Prologue 「……허르베지쿨가의 닉쿤 왕자님의 게이 발언으로 전 미국이 뜨겁습니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어젯밤 있었던 J&K사의 창립 기념 파티에서 어떤 금발의 미녀의 유혹에 ‘미안하지만 나는 게이입니다.’라고 발언해 화젠데 요 . 어떻게 생각하세요, 맥? 그가 진짜 게이라면 이건 911을 버금가는 비극인데요.」 「여자들에겐 그렇겠죠. 하지만 남자들은 대환영입니다. 이로써 미국 여자들의 눈높이가 확 낮아졌을 테니까요. 」 「글쎄요. 어쩌면 소수의 여성들도 열광할지 모르죠. 왕자님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까요. 어쨌든 , 이게 올해를 대표할 사건이 될 것 같죠?」 「그렇죠.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게이라니. 와우,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대학 시절 남성 혐오증으로 유명했 잖아요. 덕분에 한동안 허르베지쿨 계열 기업들이 인권 협회들의 집중 포화를 받은 적이 있었죠. 하여간 지금 뉴 욕은 떠들썩합니다. 지금 다들 반신반의 중인데, 그 연인이라는 사람이 직접 나타날 때까지는 계속 이 상태 겠죠. 」 「그러게요. 대체 그 상대가 누굴까요? 사실, 그가 직접 커밍아웃을 했다고는 해도 다들 믿지 않는 분위기거든요 . 다른 사람도 아닌 닉쿤라니, 일주일에 한 번은 가쉽란에 헐리웃 여자 연예인과 함께 식사를 한 장면이 포착되 는 그 닉쿤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잖아요. 사적인 자리에서 남성 1미터 접근금지로 유명한 사람이 말이죠. 거 기다 이런 대형 사고에도 스스로 닉쿤의 연인이라 나타나는 남자가 없단 말이죠. 보통, 이런 사건은 그와 밤 을 보낸 남자가 나타나 타블로이드와 인터뷰를 하는 걸로 시작하지 않나요?」 「그렇죠. 얼마 전 애크 하일렌의 아우팅 역시 그와 한때 연인 관계였던 모델로부터 터져 나왔죠? 그 인터뷰 비 용이 무려 백만 달라였다니, 닉쿤의 연인이라면 천만 달라는 받지 않을까요? 한 재산 챙길 기회입니다. 어서 나 타나주세요. 원하신다면 독점 인터뷰를 해드리겠습니다.」 “지랄하네…….” 요란한 웃음소리가 울려대는 라디오 방송을 듣던 우영은 재빨리 다른 채널로 주파수를 돌리곤 긴 한숨을 내뱉었 다. “미친 새끼.” 오늘 오전 전국의 타블로이드지 판매량을 무려 10배나 뛰게 한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허르 베지쿨 가의 귀공자, 인권 협회의 제1차 척결 대상, 남성 1미터 금족령으로 유명한 살아있는 미국의 왕자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커밍아웃이 타블로이드지의 1면을 장식한 덕이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게이? 다들 뇌가 썩었냐? 그런 놈이 한 달에 여자친구를 다섯 번을 바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우영은 신호에 걸려 길이 막히자 이를 으득으득 갈며 거친 손길로 넥타이를 풀었다. 미국 부동산과 언론 재발, 그리고 동시에 쇼비지니스계를 평정한 허르베지쿨 가의 둘째 아들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뉴욕의 사립 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과 쿼터백을 지낸 뒤 졸업, 그 후 예일대 경제학과 수석 입학, 수석 졸업 후 유펜(Upenn/University Of Pennsylvania약자)의 워튼 대학원에서 MBA를 수료한 재원에, 190센티미터에 가까 운 큰 키와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모델이었던 모친을 그대로 빼닮은 빼어난 미모, 금발벽안의 왕자님. 살아있 는 신 화, 헐리웃 여배우와 가수, 그리고 슈퍼모델들과 끊임없는 염문설을 뿌리던 카사노바의 재림, 닉쿤 벅 허 르베지 쿨. 그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게이라니 미국이 발칵 뒤집힐 만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원인은 그 기사의 익명의 제보자였다. 그러니까, 그건 어젯밤 J&K사의 창립 30주년 파티에서였다. 뉴욕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 J&K의 창립 기념 파티에 초대를 받은 닉쿤은 파티 초반부터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현재 뉴욕을 중심으로 동유럽권의 모델과 배우들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러시아 마피아의 대부, 미하엘 네브즐린의 어린 딸 엘레나 네브즐린 때문이었다. “미치겠군.”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내뱉은 닉쿤의 말에 우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엘레나는 182센티미터의 키에 풍성하고 화사한 금발과 요즘 잘 먹히는 베이비페이스에 늘씬한 몸매 덕에 이미 열세살때부터 모델로 활약 중이었고, 곧 시트콤 데뷔와 앨범 발표를 앞둔 채였다. 그 정도 몸매와 얼굴이라면 러시아 마피아의 딸이라 해도 닉쿤이 거절할리가 없다. 어차피 쇼 비즈니스계는 현재 러시아 마피아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으니 정리만 잘한다면 엘레나와 관계를 갖는다 해도 나쁠 건 없었다. 다만, 문제는……. “도대체 서양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저 얼굴이 열다섯살이라고 하는 거냐?” 열두 살 때까지 한국에서 자란 우영은 여전히 적응 안되는 서양인들의 무지막지한 성장 속도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스물대여섯 쯤 되었을 거라 생각하고, 저렇게 대쉬하는데 사귀어보라고 했던 우영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가 열다섯 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함하고 말았다. 우영이 아는 열다섯 살 소녀라 함은 교복을 입고 짧은 단발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는 상큼 발랄한 귀여운 여학생의 이미지이지, 자신과 비슷한 키에 D컵의 가슴을 휘두르며 비키니를 입고 런웨이를 걷는 이미지는 아니다. 거기다 하물며 그녀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남자를 스토킹하는 이미지는 더더구나 아니다. 거기에 더해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런웨이 최고의 악동 이미지를 구가한 막나가는 아가씨의 이미지도 아니다. 아무리 닉쿤 벅 허르베지쿨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해한다. “얼굴 진짜 작다.” 9등신 정도로 보일 정도로 작은 엘레나의 얼굴을 보며 우영은 놀라운 듯 중얼거렸다. 얼굴이 워낙에 입체적이고 오모조목해서인지 더 작아 보였다. 과연 저 속에 뇌나 들어있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옆으로 스쳐가는 웨이터에게서 샴페인 잔을 두 잔 받아든 닉쿤은 한 잔을 손에 들고는 다른 잔을 우영에게 건네주었다. 그 사이에도 서너 명의 여자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 닉쿤은 슬쩍 우영의 옆에 붙어 작게 속삭였다. “저 스토커를 어쩐다. 미하엘 네브즐린의 딸을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건드렸다면 미하엘이 내 머리통을 날릴거고. 거절하면 저 여자가 내 머리통을 날릴 거 같고. 성격이 보통이어야 말이지.” 바로 7개월 전 전 남자친구였던 시트콤 배우 출신의 맥 애벌린이 그녀의 동료인 샤샤라는 모델과 눈이 맞아 그녀를 찼다고 대낮의 백화점에서 총을 휘두른 아가씨다. 총은 장전돼있었고 그녀는 쏘려고도 했지만, 다행히도 안전장치가 풀리지 않아 살해 의도는 없이 위협 의도만 있었다는 점 -사실 엘레나는 총에 안전장치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과 함께 미하엘 네브즐린의 아래에 있는 실력 좋은 상어떼들이 지나친 다이어트로 인한 순간적 정신착란증이라는 변명으로 사회봉사 100시간과 2개월간의 갱생원 치료를 명령받은 정도로 끝났다. 그리고 그녀는 갱생원 치료가 끝나자마자 닉쿤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진짜 열정적이며 포기를 모르고 늘 사랑에 불타는 아가씨였다. 거기다 아버지가 러시아 마피아다 보니 무서운 것도 없다. 천하무적이었다. 한 마디로 대책이 안 선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딸 교육 좀 시키라고 하는 건 어때?” 아직 미성년자니 차라리 부모와 상담을 하라고 권하는 우영의 말에 닉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러시아 마피아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나 미하엘 네브즐린은 가족애가 강한 사람이야. 그게 지나쳐서 그의 자식들이나 부인들에 대한 험담이 나오면 그대로 대가리에 총을 쏴 갈긴다고. 너, 설마 내 뇌 조각들을 구경하고 싶은건 아니겠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닉쿤의 낮은 음성에 우영은 슬쩍 그를 올려다보며 진심을 토해냈다. “사실 좀 보고 싶기는 한데…….” “뭐라고?” “그냥 그렇다고. 네 뇌 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거든. 그보다, 나는 왜 데려온 거야? 설마 나한테 엘레나를 꼬시라는 건 아니겠지?” 분명 우영은 그의 개인비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지만, 우영이 다루는 분야가 그의 사교쪽이기 때문에 가끔 간소한 티파티에는 참석한 적이 있어도, 이런 대규모 파티에 함께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처음 엘레나 의 이야기를 하며 함께 파티에 참석하자고 했을 때는 이 녀석이 미쳤나 했는데 잘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뭔가 꿍 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꿍꿍이는 아무래도 엘레나와 관련된 것 같으니, 나온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우영이 불안한 듯 속을 캐려는 눈빛으로 닉쿤을 바라보고 있자, 닉쿤이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우영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아주 낮은 음성으로 우영의 귓가에 속삭인다. “거기까진 생각 안해봤지만……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군. 하지만 그러기엔 네 능력이 너무 딸리니 패스.” 딱 잘라지는 그 말에 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감싼 닉쿤의 손을 툭 쳐냈다. “미하엘 네브즐린 어디 있어? 가서 얼굴 보고 딸 얘기 좀 해야겠다.” 은근히 네 얘기를 다 까발리겠다고 협박하는 우영의 말에 닉쿤이 웃으며 우영의 팔을 잡아끈다. “어이,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너 죽고 나 죽는 일이야.” “그러니까, 난 왜…….” “아, 제이크!” 우영이 다시 한 번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닉쿤이 재빨리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우영의 팔을 잡아끈다. 그가 바라보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우영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작게 내뱉고 말았다. “켄터키 할아버지…….” 근사한 백발에 덩치가 좋은 노인의 등장에 우영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닉쿤이 재빨리 우영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제이크, 건강해 보이시네요. 오랜만입니다.” “그쪽도 여전하군.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자네가 파티에 남자를 대동하고 오다니, 별일이군.” 켄터키 할아버지의 말에 우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이미 오래된, 대학 시절의 이야기지만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남성 혐오증은 아직도 사교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덕분에 허르베지쿨 계열사 전체가 크리스찬들의 열렬한 지지와 함께 인권협회의 항의를 받긴 했지만, 사실 닉쿤 자체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전혀 혐오감이 없었다. 그와 가까운 이들 중 절반이 동성애자들이었고, 절반은 양성애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남성들이 그의 근처 1미터 내에 접근하는 걸 싫어했다. 그리고 그 남성 1미터 접근금지령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아, 제 비섭니다. 인사해, 우영. 이쪽은 제이크 서덜랜드 회장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우영은 서둘러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우영 케이먼이라고 합니다. 본명은 장우영이지만 친구들은 편하게 우영이라고 부릅니다.” “오, 그 유려한 필체의 친구로군. 매번 가족 생일과 기념일마다 근사한 선물과 카드를 보내줘서 고맙다고 한번 인사라도 할 셈이었지.” 순간 우영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늘 선물과 함께 보낸 카드의 하단에는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라는 이름으로 서명을 했었는데, 이 켄터키 할아버지는 예리하게도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난감한 상황에 그와 손을 잡은 채 우영이 닉쿤의 눈치를 살피자 닉쿤이 환하게 웃으며 우영의 어깨를 끌어안아 툭툭 친다. “필체가 유려하고 고상하죠? 동양인들, 특히 한국인들의 글씨체가 단아하면서도 정갈한 멋이 있더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아, 한국인인가?” “네.” 사실은 이러저러한 상황이라 그리 되었다는 변명도 없이 대놓고 이 녀석이 선물 담당이야, 라고 답하는 뻔뻔스러운 닉쿤의 얼굴에 우영은 작게 혀를 차고 말았다. 어차피 시간이 돈, 시간 당 삼천달라라는 어마어마한 상담료를 자랑하는 주식계의 거물이 일일이 손님들의 기념일마다 손으로 쓴 카드를 보낼 리가 없다는 건 이 세상 사람 전부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싶었다. 하긴, 애초에 그 뻔한 사실을 지적하는 이들도 이 할아버지 외엔 없을 거다라는 생각에 우영은 웃으며 분위기에 맞춰주었다. “닉쿤의 사교는 제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물은 늘 닉쿤이 고르고 전 카드만 쓰고 있습니다.” “하하, 굳이 그렇게 상사를 위한 변명은 하지 않아도 되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쇼핑할 시간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참, 그런데 닉쿤.” “네?” “요즘 무슨 일이 있나? 미하엘 네브즐린이 자네 뒤를 캐고 다닌다는데…….” “저와 거래를 하고 싶으신가 보죠.” “딸 이야기라던데……. 그 어린 딸이 자네에게 열을 올리고 있다지?” “설마요. 이 나이에 미성년자와의 관계로 영창 신세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마피아 손에 유명을 달리하고 싶지도 않고요.” “자네 생각이야 그렇다지만, 헐리웃의 십대를 십대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몸조심하게. 단 한 번의 실수가 모든걸 앗아갈 수도 있으니까.” 의미심장한 제이크의 말에 우영이 인상을 쓰며 닉쿤을 바라보자 닉쿤은 어깨만 으쓱할 뿐 더이상 엘레나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아무리 서덜랜드 회장이라 해도 저 정도 할아버지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들어간거면 아무래도 일이 좀 커진 모양이라는 생각에 우영은 진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열다섯 살부터 닉쿤의 옆에서 15년 가까이 그의 여성관계를 모두 보아왔지만, 이번만큼 난감한 일은 없었다. 닉쿤은 맺고 끊음이 정확한 성격이라, 사귈 때는 마치 여왕님처럼 대접하고 헤어질 때는 진짜 깔끔하게 친구로 돌아가는 성격이었다. 거기다 여자를 보는 눈이 탁월해 애초에 말썽이 생길 여지가 보이는 여자에게는 틈을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도 딱히 더러운 꼴은 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떻 게든 엘레나의 관심을 돌리려 하고 있지만, 이번은 좀 힘든 듯했다. 상대가 보통은 넘는게 분명하다. 분명히 보통이 넘는다. 처음 파티장에 들어선 이후부터 진짜 갈아 마실 듯 닉쿤을 노려보고 있는 게 자신에게도 느껴질 정도이니 그 원한의 깊이와 애증이 얼마나 강한지 알 것 같았다. 켄터키 할아버지와 닉쿤의 근처로 슬슬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던 우영은 슬쩍 엘레나가 서 있는 쪽을 돌아봤다. 새빨간 지방시의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샤넬의 신상 금색 클러치와 루부탱의 빨간 힐을 신고, 긴 금발을 고전적인 분위기의 웨이브를 넣어 단정하게 고정시킨 모습은 지금 막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 근사했지만, 유난히도 빨간 입술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우영은 슬쩍 닉쿤의 옆에서 벗어나 그의 팔을 툭 쳤다. “나 잠깐만.” “왜?” 웬일로 닉쿤의 음성이 다정했다. 보통 때는 틱틱거리며 말하는 타입인데 오늘따라 유달리 다정하다는 생각에 우영은 조금 의아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에 닉쿤의 팔을 잡아끌며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9시 방향에서 스토커 출현. 네가 처리해. 나까지 머리에 구멍 나긴 싫어.” 용건만 간단히 말한 뒤 우영이 재빨리 도망치려하자 닉쿤이 팔을 잡아 말린다. “그렇다고 나만 두고 가면 안되지. 내가 널 왜 데려왔는데?” “날더러 네 보디가드를 하라고?” “네가 몸으로 막아봐.” “그러다 내 머리통에 총 쏘면? 저 클러치 너무 크단 말야!” “샤넬은 뭐 저따위로 큰 클러치를 만든 거야?”라는 토를 달며 우영은 투덜거렸다. 보통 클러치라함은 담뱃갑 하나, 핸드폰 하나 들어가는 크기가 일반적이다. 저걸 왜 들고 다니다 싶을 정도로 장식품의 가치 외엔 없는 화려한 파티용 클러치가 일반적인데 최근 클러치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오늘 엘레나가 든 건 샤넬 클래식 미듐 사이즈와 맞먹는 크기의 골드앤드실버 클러치였다. 아무래도 저 번쩍거리는 클러치 안에는 총이 하나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도망가고 싶다. 닉쿤 역시 보통은 동전지갑만한 클러치를 들고 다니는 엘레나가 아무리 트랜드라 해도 커다란 크기의 클러치를 들고 휘적거리니 불안한 듯했다. “저 안에 총이 있으면 네가 날 보호해줘야지. 너 태권소년이잖아.” “웃기고 있네. 날 이단 옆차기로 기절시킨 녀석이 나한테 보호해달라고?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우영이 강제로 닉쿤을 떼어내고 도망치려하자 우영과 쑥덕거리던 닉쿤이 재빨리 일행들에게 웃으며 말을 돌린다. “우영이 좀 속이 안 좋은 모양이네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죽을 거면 같이 죽겠다는 듯 닉쿤이 끈질기게 뒤를 따르자 우영은 노골적으로 싫은 얼굴을 하며 닉쿤의 팔을 떼어내려 애를 쓰며 속삭였다. “너, 진짜 날 꼭 네 저승동반자로 데리고 가야겠냐?” “나 혼자 죽을 순 없지.” “야…….” “가자. 가서 얘기하자. 먼저 대책을 세워야지.” 그렇게 말하며 이번엔 자기가 먼저 성큼성큼 휴게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대한 저택의 정원과 이어진 베란다의 밀실로 우영을 끌고 나온 닉쿤은 우영의 손에서 샴페인 잔을 빼앗아 작은 테이블에 올려두곤 난간 쪽에 기대섰다. 그 모습에 우영 역시 그의 옆으로 가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려했다. 그러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작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닉쿤은 여유 있게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를 난간에 대고 기대 다리를 앞으로 길게 뻗어 꼬았지만 자신은 엉덩이를 대가 그대로 직립 상태가 된다. 꽤 열 받는다. “진짜 짧군.” 엉덩이를 대고 서려하자 그대로 우뚝하니 서게 된 모습을 지적하는 닉쿤을 힐끔 노려본 우영은 그대로 난간을 양손으로 짚고 올라가 아예 걸터앉아 버렸다. “엘레나는 어쩔 거야? 저러고 두다 진짜 사고 치면 어쩌게?”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아가씨라서 말야.” 끝내주는 명품 몸매와 인형 같은 미모, 거기다 아버지는 러시아 마피아의 보스, 거기다 뇌까지 없는 엘레나는 무식하게 용감한 아가씨의 요건을 모두 갖춘 상태였다. 열 받아 사람 한둘 쯤 죽인다 해도 최고의 상어떼(Shark- 변 호사)들이 알아서 잔뼈를 처리해줄 것이고, 자기가 죽이기 뭣하면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그만이다. 그녀가 죽이고 싶은 상대가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라도 마찬가지다. 무식한 사람에게 이길 장사 없다. 상대가 너무 좋지 않다. 아무래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듯해 우영은 은근슬쩍 닉쿤을 떠봤다. “차라리 네가 결혼발표를 하면 어때?” “미쳤냐?” “그러니까, 결혼 말고 발표만.” “누굴 상대로?” “아무나. 소설 보면 많이 나오잖아. 계약결혼, 뭐, 그런 거.”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그러다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당하라고? 나중에 떼어내는 거 골치 아파. 그러다 무서운 상대한테 걸리면 진짜 식장까지 걸어 들어가는 수가 있다고. 결혼식장에 입장할 거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뇌를 쏴버리겠어.” 그도 그렇긴 하다고 우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닉쿤의 결혼 상대라면 못해도 글로벌 기업의 딸, 혹은 세계가 다 아는 유명 연예인이나 모델일 텐데, 괜스레 결혼발표 잘못했다 발목 잡히는 수가 있다. 일반인을 꼬셔서 대역이라도 해달라고 했다간 차라리 엄청난 액수의 돈이 오갈 것이다. 아니, 차라리 천문학적 액수의 위자료를 요구하면 다행이지만, 상대가 나중에 그 기사를 타블로이드지에 팔아먹는 수가 있다. 그랬다간 아마 그 무서운 러시아 마피아가 자기 딸을 농락했다며 권총이 아니라 기관총을 들고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미국인들은 불륜이나 마약복용 등의 사고는 전부 용서하고 받아들여도 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건 용서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었다. 닉쿤이야 어차피 연예인이 아니니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왕족이나 귀족이 없고, 역사가 짧다는 게 최대의 콤플렉스인 미국에서 현존하는 왕자님이라 불리는 그의 이미지는 꽤 중요하다. 그러니까 괜히 어설픈 사기극 을 벌이는 건, 한국 속담대로 여우 피하려고 호랑이 굴에 뛰어드는 격이다. “프리티 우먼 보면 그러다 사랑에도 빠지고 그러던데……. 한 번 해봐. 혹시 알아? 이번에야 말로 진실한 사랑에 빠져들지.” 호러 영화와 로맨스 영화광인 우영의 말에 닉쿤이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너, 이상한 영화 좀 그만 봐.” “……남의 영화 취향 탓하지 말고 네 성생활에 대한 반성이나 해라.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야? 얼마나 만만해 보이면 저 어린애가 달라 붙냐?” “그냥 운이 없었던 거지. 나라고 설마 저런 젖비…….” 거기까지 말하던 닉쿤은 문득 말을 멈추곤 억지로 웃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닉쿤을 돌아본 우영 역시 닉쿤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 순간 베란다 창 바로 앞에 선 금발의 바비 인형을 보곤 놀라 숨을 멈췄다. 링의 사다코보다, 주온의 가네코보다 무서운 엘레나 네브즐린이었다. “왜, 전화 안 받아요?” 음침한 베란다 쪽으로 그녀가 한 걸음 내딛자 우영은 반사적으로 난간에서 내려서 똑바로 섰다. 적당히 분위기를 봐 닉쿤을 두고 혼자 도망칠 셈이었다. 어차피 닉쿤이 벌인, 아니 닉쿤에게 생긴 일이니 감당도 그 혼자 해야한다. “닉쿤, 난 이만 들어가 볼게.” 런웨이를 걷듯 1미터가 넘는 긴 다리로 워킹을 하는 엘레나의 옆으로 슬쩍 지나 도망치려는데 닉쿤이 팔을 잡아왔다. 죽어도 놓지 않으려는 듯 세게 팔을 잡은 그 악력에 우영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닉쿤을 돌아봤다. 하지만 닉쿤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앞에 선 20대의 몸과 얼굴을 가진 10대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화했었어? 내가 최근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말야. 새 걸로 바꿨는데, 아직 전의 번호로 하고 있던 모양이군. ”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일 리가. 내가 널 피할 이유가 없잖아. 참, 아버님은 잘 계시지?” “말 돌리지 말아요. 왜 날 피해요?” 아주 직접적인 그 질문에 우영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았다. 입이 근질근질해 미칠 것 같았다. “ 이 바보 아가씨야, 왜 피하긴 왜 피하겠냐. 네가 미성년자에 마피아의 딸이니까 그렇지.” 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엘레나가 당장에 파우치를 열고 권총을 꺼내들 것 같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말을 밀어넣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난 널 내 여동생처럼 생각해. 널 피할 리가 없잖아.” “누가 오빠 필요하대요? 나도 오빠는 지긋지긋하게 많아요. 한 번만 만나달라고 했잖아요.” “네 아버지와 오빠들과 함께라면 생각해보지.”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아세요?” “열다섯이면 아직 가족들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야. 그리고 너랑 난 안 돼.” “왜요? 열다섯 살이지만 알 건 다 알아요.”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법이 무서워요? 걱정 마세요. 비밀 지킬게요. 우리 둘만의 비밀로 간직해요.” 바로 옆에 내가 있는데 비밀은 무슨 비밀이냐라고 생각하던 우영은 순간 팔을 잡은 닉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느낌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런 문제가 아냐, 엘레나.” 그래, 법이 문제가 아니라 네 아버지가 문제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우영은 그 다음 이어진 닉쿤의 말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난 게이야.” 이게 미쳤나, 라는 눈으로 우영이 닉쿤을 바라보는 순간 닉쿤이 그대로 우영의 몸을 끌어당겨 목을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더 개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내 애인이야.” “……지금 나한테 그 말을 믿으라고요?” “믿지 않아도 할 수 없어. 난 이 녀석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너처럼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소녀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아. 난 게이야.” 계속해서 이어지는 닉쿤의 헛소리에 우영은 거의 기절 직전 상태까지 몰렸다. 닉쿤의 생각은 알 것 같았다. 사귀자니 미성년자에다 마피아의 딸이라 건드렸다간 죽을 것 같지,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본인이 권총 들고 설칠 것 같은 변태 스토커지. 그러니 적당한 핑계로 빠져나갈 방법을 찾다 게이론을 펼칠 생각을 한건 잘 이해한다. 어떻게 보면 지금 닉쿤의 언행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다. 지금 이 안에는 딱 세 사람뿐이고, 그녀도 자신이 좋아서 따라다니던 남자가 게이라는 소문은 창피해서 못 퍼트릴 테고 퍼트린다 해도 여자 좋아하기로는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게이라는 말은 이 세상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저 뇌 없는 아가씨만 잘 설득해서 포기시키면 된다 여겼을 것이다. 설마 내가 쫓아 다니던 남자가 게이래요, 아빠 죽여주세요, 라고는 못할 것 아닌가. 설마 한다 해도 그쪽에서는 닉쿤이 일단 그의 딸을 건든건 아니니 죽이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생명은 건진다. 다 좋다. 다 이해한다. 문제는 멀쩡한 자신까지 얼결에 게이로 만드는 닉쿤의 행동이었다. 아니, 자신은 게이가 맞지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왜 아직 정해지지 않은 남의 성정체성을 자기가 결정지어버리냐는 말이다! 우영이 너 좀 이따 보자라고 이를 가는 사이, 등 뒤에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닉쿤…… 이건 말도 안 돼요. 지금 당신 거짓말하는 거죠? 당신처럼 유명한 남성혐오증 환자가 그럴 리가 없어요.” 악과 오기와 경악에 떠는 엘레나의 음성 뒤로 아주 진지하고 애절한 닉쿤의 음성이 들려온다. “엘레나, 진심이야. 그러니 날 포기해줘. 난 10년 전부터 이 녀석뿐이었어.” 원래도 거짓말을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 닉쿤의 연기력은 끝내줬다. 우영도 순간 닉쿤이 자길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닌가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해야 믿겠어?” “어떻게 해도 안 믿어요. 못 믿어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엘레나의 말에 닉쿤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달콤하도 아픈 한숨이었다. 그 숨소리에 우영이 설마 진짜 이게 날 좋아하는 건가 하고 다시 한 번 착각의 늪 속을 헤매던 중 닉쿤이 부드러운 투로 다시 엘레나에게 물었다. “……이래도?” 그리고 다음 순간은……. “언젠가 죽여 버리겠어, 닉쿤 벅 허르베지쿨…….” 다시 떠올리자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 우영은 핸들을 잡지 않은 왼손의 손등으로 입술을 북북 문질렀다. 그 녀석을 만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아니, 이 미국 땅으로 건너온 게 천추의 한이다. 「자~ 지금 전 미국이 들썩거립니다. 오늘 아침 신문 다 보셨죠? US위클리에도 방금 기사가 실렸는데요.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연인은 누구? 라는 제목이네요. 진짜 누굴까요?」 “병신들아, 너흰 그 말을 믿냐?” 발랄한 컨츄리송이 끝난 뒤 이어진 디제이의 멘트에 우영은 홧김에 소리를 내지르곤 그대로 라디오를 끄고 CD플레이어를 켰다. 사실, 사람들이 저 기사를 믿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자신이라도 믿지 않는다. 그냥 그저 그런 가쉽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이게 재미있는 거다. 재벌가의 왕자가, 증권계의 거물이, 남성혐오증으로 유명한, 그들이 선망하는 미녀 스타들과 가쉽지를 장식하던 닉쿤이 게이라는 기사가 재밌어 죽겠는 것뿐이다. 문제는 그 화살이 언제 자신에게 날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그 새대가리가 몇 명이랑 인터뷰를 한 거야…….” 그래, 이건 닉쿤과 자신의 실수다. 설마 엘레나가 그 쪽팔리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릴 거라고는 예상 못했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다행히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일단 기자들에게 떡밥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속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담배를 빼문 우영은 불을 붙이곤 차창을 내렸다. 평일 출근시간의 뉴욕은 전쟁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던 우영은 그대로 핸드폰을 들어 닉쿤의 수행비서직을 맡고 있는 에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에반 브루넙니다.」 스페인 억양이 강한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우영은 아예 사이드 브레이크를 반쯤 건 채 핸들에서 손을 뗐다. “에반, 나.” 「아, 지금쯤 전화 올 줄 알았어. 아침 기사 때문이지?」 “응. 벌써 출근한 거야?” 「뭐, 그렇지. 새벽에 기사 보자마자 다들 불려나온 채니까. 긴급 소집이야. 넌 어디야?」 기사가 난 일간지는 허르베지쿨 가의 소유가 아닌 소규모의 지방 신문사였다. 그러니 대담하게도 그 기사를 실었을 것이다. “지금 가는 길인데 길이 막혀서 좀 늦을 것 같아. 닉쿤은?” 「아직. 5분 후에 도착한다더군. 그런데 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아무리 이 신문사가 막 나가는 데라고 해도 닉쿤 기사를 멋대로 실을 리는 없으니 뭔가 있다는 건데……. 넌 어떻게 된 건지 알지?」 우영이 허르베지쿨 가의 후원을 받아 닉쿤과 15년 지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인과 스페인계 미국인 사이의 혼혈인 에반은 닉쿤의 부친인 대런 허르베지쿨이 10년 전 그의 아들을 위해 직접 뽑아 그의 아래에서 일을 가르친 주식과 투자 전문가였다. 3년 전부터 애널리스트 일을 하고 있는 닉쿤의 비서 역을 담당하며 갖가지 문제들을 처리하는데, 그만큼 닉쿤과 우영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바늘 가는 데에 실 가듯 닉쿤이 가는 곳엔 우영이 있고, 닉쿤이 사고치는 곳에도 늘 우영이 있다는 사실을, 에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에반, 그 문제는 닉쿤 오거든 물어봐.” 「설마, 여기에 실린 미지의 연인이 너는 아니겠지?」 예리하기 짝이 없는 에반의 지적에 우영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어릴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에반은 어설픈 거짓말로 속여 넘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엔 닉쿤과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맞군. 닉쿤이 사고를 쳤는데 네가 연관이 안됐을 리가 없지. 너흰 세트니까.」 “……본의는 아니었어.” 「알아. 그래도 이런건 내게 미리미리 알렸어야지. 그래야 막든 어떻게 하든 할 거 아냐.」 “나도 이렇게 터질 줄은 몰랐지. 설마 그 타조 머리가…….” 거기까지 말하던 우영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에반이 그걸 놓칠 리가 없다. 「타조 머리? 엘레나 말하는 거냐?」 “말하자면 사정이 길어. 이따 가서 얘기할게.」 「그래, 그게 낫겠다. 너, 당분간 닉쿤과 함께 다니지 마. 파파라치들이 악착같이 닉쿤을 따라다닐 테니, 넌 따로 움직여.」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나도 지금 곤란해, 에반. 러시아 마피아에게 총 맞아 죽긴 싫다고. 그리고 그 타조 머리 진짜 무서워. 어제는 엄청난 파우치를 들고 나타났는데, 그 안에 권총이 있을지 알게 뭐야?” 「나도 지금 아주 곤란하다. 내가 말했지? 난 닉쿤만큼 너도 아껴. 네가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쯤 있었던 아무도 모르는, 사실은 일어나지도 않았던 어떤 사건 때문에 에반은 아직도 우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같은 한국계라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불쌍해서인지 늘 자신을 걱정하고 보듬어 주는 에반을 잘 알기에 우영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그래. 전 이제 마음 완전히 접었어. 안 그러면 어떻게 그놈하고 일을 해? 그 자식 애인들한테 주는 선물에 꽃에 카드에, 가는 호텔 예약까지 하는 게 난데. 정리 안 했으면 같이 일 못 하지.” 무엇보다 한창 잘 지내던 대학 시절 같은 기숙사 방을 쓰던 중에 자신에게까지 1미터 금지령을 내린 녀석 덕에 더욱 상처 받았었다. 자신이 아무리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진짜 친구 같고 형제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자기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때에도 다른 형제나 아버지, 그리고 에반에게는 금지령을 내리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닉쿤이 먼저 알아채고 자신을 멀리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자신도 마음을 접기 쉬웠던 걸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다. 「난 네가 걱정이야. 닉쿤은 걱정 안 돼. 그 자식이야 미국 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순수 백인남성이야. 거기다 재벌이고. 문제는 너야.」 맞는 말이었다. 인종 시장이자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만큼 인종차별이 심한 곳은 없다. 이 나라의 집권층은 순수 백인의 남성들이다. 다른 인종은 끼어들 틈이 없다.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살지만 결혼도 연애도 모두 같은 인종들끼리 한다는 게 이 나라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이다.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황인은 황인끼리. 결국 끼리끼리 모여 사는 거다. 에반이 자신에게 더 신경을 쓰고 안타까워하는 건, 자신과 그의 피가 반은 같기 때문이다. “걱정 말라니까. 나 이제 진짜 마음 깨끗이 접었어. 그런 바람둥이를 사랑하다간 심장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고. 지금은 진짜 친구 같고 형제 같은 거야. 그렇게 버림 받고 또 버림 받는 거 싫어.” 「……그럼 다행이고. 얼마나 걸릴 것 같아?」 “30분 정도. 아, 역시 사고 났나 봐. 경찰 오토바이가 왔다 갔다 하네. 처리 되면 좀 뚫릴 것 같아.” 「그래, 운전 조심하고 도착할 때 전화해. 오늘 다른 스캐줄은 없지?」 “오늘 나갈 선물들은 모두 준비됐으니 딱히 문제는 없을 거야. 아, 그리고 닉쿤에게 존 에스터 씨에게 안부 인사 전화하라고 전해줘. 그쪽 비서가 문자를 보냈는데 에스터 회장이 오늘 새벽에 집에서 쓰러졌다고 하더라고. 내가 화분이랑 메모는 보냈으니 오전 11시쯤 전화해서 잘 받으셨냐고 확인만 하라고 해.” 「그래.」 “아, 뚫리네. 그럼 이따 봐.”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앞 차를 본 우영은 재빨리 핸드폰을 끊은 뒤 담배를 끄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차 안에서 우영은 자신의 첫 이름을 기억해냈다. 자신의 첫 번째 이름은 장우영이었다.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마당이 있는 허름한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작은 마당에는 빨간 열매가 달리는 나무들이 있었고, 계절 별로 파란 야채들이 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정문이 아닌 작은 문을 열고 조금 나가면 바로 뒤에 개울이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그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것과 자신의 옆에서 웃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의 얼굴이었 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은 버려졌다. 이유는 모른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커다란 가방을 맨 채 버스를 타고 한 참을 간 복잡한 역에 홀로 남겨진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그러다 어떤 아줌마의 손에 끌려 고아원으로 갔고 그 안에서 많은 아이들과 지냈던 것만 기억난다. 그러다 우연 히 파란 눈을 가진 아줌마와 아저씨를 만났다. 그들은 자신에게 두 번째 이름을 주었다. 두 번째 이름은 우영 메 이어였다. 그때가 아마 아홉 살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지사에서 근무 중이던 그들은 자신을 입양해 직접 한국에서 키웠고, 자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미국 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메이어 부인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진 그녀는 임신 우울증을 겪으며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메이어 씨는 결국 자신을 파양하기로 결정 내렸고, 자신 은 일단 아동 보호소에 맡겨졌다. 지금이야 뉴욕 어딜 가든 한국인들이 드글거리지만 당시에만 해도 LA도 아닌 뉴욕에서 한국인을 보긴 어려웠다. 낯선 땅에, 문화에도 적응하지 못한 상태로 아동보호소에 있다 열세 살 때 친 절한 은행가 부부를 만나 재입양되었다. 그때 다시 우영 에클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두 부부는 아주 친절 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에클린 씨의 외도로 에클린 부부는 이 혼하게 되었고, 서로 아이를 맡으려 하지 않던 그들 때문에 결국 자신은 다시 아동 보호소로 돌려보내졌다. 친 자식들은 에클린 부인이 맡기로 했지만 입양아였던 자신까지 맡기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클 린 씨가 자 신의 양육비까지 대길 꺼려했다. 다시 돌아간 아동보호소에서 더는 희망이 없다 여기고 있었던 때 인생 최고의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게 허 르베지쿨 부인인 사라 허르베지쿨과의 만남이었다. 사라 허르베지쿨은 한국인이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바이얼리니스트였던 그녀는 우연히 대넌 허르베지 쿨을 만났고, 당시 상처한 대넌과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을 해 허르베지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우연히 아동보 호소에 한국인 소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직접 그 보호소를 찾아와 자신을 만났고, 의탁 가정 신청을 해 자신을 데려가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어차피 직접 낳은 자식이 없던 그녀는 자신을 친자식처럼 키워주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자신을 입양하려 했지만 대넌 허르베지쿨의 반대로 입양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래 도 그녀는 대넌의 다른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 아껴주며 정규 교육을 모두 마친 뒤 예일대 의 졸업장까지 따게 해주었다. 졸업을 하면서 자신은 네 번째로 이름을 바꿨다. 이번엔 우영 케이먼이었다. ‘장’이라는 성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메이어도 에클린도 싫었다. 어떤 이유 든지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성을 따르기 싫어 이름을 우영 케이먼으로 바꾼 뒤 닉쿤이 NBA를 수료하는 동안 사라 에게서 상류층 서회에서 필요한 에티켓과 상류층들이 애용하는 각종 브랜드명과 그 특징부터 시작해 꽃을 고르 는 법과 카드를 쓰는 방법 등등, 사교에 필요한 것들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닉쿤이 자리를 잡는 것과 즉시 그 의 아 래서 사교 담당 비서 역을 시작했다. 닉쿤은 좋아한다. 열다섯 살 때부터 이미 형제처럼 자란 사이이고, 또 닉쿤은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이었다. 낯선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고, 학교를 다닐 때에도 황인종이라는 이 유 로 이유 없는 차별을 받을 때에도 먼저 나서 자신을 친구라 인정하고 감싸주었다. 덕분에 아주 편안한 학창 시절 을 보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 감정은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자각을 한 건 열일곱 살 때쯤이었다. 당시 쿼터백이었던 닉쿤이 치어리더이자 메이퀸이었던 캐서린 페 이지와 데이트를 하던 걸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서운함을 느꼈었다. 처음에는 그가 멀어지는 것에 대한 서 운함인 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뒤에 거의 7년 가까 이 자신의 성정체성과 닉쿤에 대한 감정으로 엄청 마음고생을 했었다. 하지만, 그와의 편안한 관계가 너무 좋았고, 자신을 아껴준 사라에게 면목이 없어 차마 고백하지도 못하고 그렇 다고 포기하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앓던 중 그 감정을 에반에게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에반은 뭐라고 나무라거 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너 자신을 위해 포기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어차피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포기할 생각이긴 했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 같은 남자라서가 아니다. 그가 극도의 남성혐오증을 가져서도 아니 다. 그리고 사라에 대한 미안함 때문만도 아니다. 그냥 자신이 상처 받기 싫은 거였다. 친부모님께 버림 받은 것을 포함해 세 번이나 버림을 받다 보니, 누군가에 게 기대고 사랑받는다는 사실 자체에 공포증이 생겼다 이러다 또 이 사람에게 버림 받으면 어쩌나, 내가 귀찮게 군다고 화를 내면 어쩌나, 이 사람이 이러다 갑자기 떠나버리면 난 또 어떻게 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 리하고 있었다. 사라의 정성으로 애정결핍은 많이 나아졌지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과 이 모든 일들이 내 탓이라는 자기혐오만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이다. 그 덕에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채 여기까지 왔다. 사랑하다 버림받을까 봐, 마음을 줬는데 그 사 람이 떠나버릴까 봐, 아예 마음을 닫고 빗장까지 걸어 잠근 뒤 감정을 꽁꽁 묶어 가둬버렸다. 가족도 연인도 원 치 않는다. 버림받을 거라면 애초에 없는 쪽이 낫다. 원하는 건 친구들뿐이었다.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이 와도자신을 버리지 않을, 그리고 몇 년 만에 만나도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믿을 수 있고 편안한 친구들뿐이었다. 사랑은 싫다. 사랑을 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사랑을 하면서 언제 버림받을까 두려워해야 하니까 싫다. 그리고 헤 어진 뒤에 아파하는 것도 싫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영원히 이대로이길 바란다. 그래서 닉쿤을 포기했다. 다정하고 즐거운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에게서 버림 받거나 경멸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를 포기했다. 누군가 태어나 자신에게 가장 잘한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을 친구로 둔 일이라고. Chapter 1 “왜 이렇게 늦었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떡하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퉁명스러운 투로 말을 하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다지 늦지 않았다. 겨우 30분 정도 늦었을 뿐이다. “에반에게 전언 못 받았어? 사고가 나서 길이 막혔어. 자리 좀 비켜줄래? 오늘도 난 바쁘거든?” 당당하게 자신의 의자에 기대앉아 멋대로 스케줄첩을 보고 있는 닉쿤에게서 스케줄첩을 빼앗은 우영은 양복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와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어서 비켜달라고 다시 한 번 요청 하려는데 닉쿤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침에 엘레나가 울면서 전화를 했어.” “뭐라고?” “내가 마귀에 씌웠으니 엑소시즘을 하자던대?” 순간 우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사탄의 꾐에 빠진 거니 회개하면 낫는대. 주기도문까지 읊어주더군. 걔 주기도문 중의 다섯 단어 중 세 단어를 못 읽는 거 알아? 진짜 놀랐어. 내가 지금까지 그 애와 대화를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지더라고. 거의 문맹수준 이야.” “……농담이겠지.” “아니, 진짜야. 자기 이름은 영어로 쓰나 몰라. 아니, 러시아어는 제대로 하나? 미국에서 태어난 걸로 아는데… ….” “그거 말고, 엑소시즘 말야. 농담이지?” 설마 이 21세기에 동성애는 사탄의 저주, 악귀 들린 행위, 죽어 지옥에 떨어져 화염에 싸여 죽을 마귀의 저주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우영이 가방을 책상 위에 두며 설마하는 얼굴로 묻자 닉쿤이 심각한 얼굴로 책상 위에 팔을 괴며 답해준다. “진심인 것 같았어. 이걸 한국 속담으로 뭐라고 하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라고 하지. 그나저나 그 아가씨 크리스천도 아닌 것 같던데……. 뭐지? 갑자기 개종하셨나?” “어디서 뭘 주어들은 거겠지. 어제 퀴어 영화를 다섯 편이나 봤다나 뭐라나.” “보통 퀴어 영화를 봤다면…… 그쪽을 이해하게 되지 않나? 소수 성애자들의 애환이라든가,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든가, 그들도 보통 사람과 같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야.” “말은 퀴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크리스천들이 제작한 동성애자 계몽 비디오를 본 모양이야. 신을 믿지 않던 자들이 육욕에 젖어 동성간의 성교를 하다 나중에 회개하고 구원받아 이성애자로 돌아왔다던데? 그 뒤로 열정적인 크리스천이 됐다는 게 전체 내용이었대.” 기가 막힌 소리에 막 책상 위에 놓인 스케줄 표를 확인하던 우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퉁명스레 받아쳤다. “흑인이 회개하고 구원 받으면 피부가 희어진다디?” 그 말에 닉쿤이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뜨며 우영에게 묻는다. “너 성정체성은 타고났다는 쪽이었냐?”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만큼 설득력 없는 소리잖아. 동성애자가 갑자기 이성애자가 된다는 건, 마치 황인종이 염색하고 렌즈끼면 백인된다는 소리랑 비슷하게 들려.” “웃기긴 하지.” “웃긴 정도가 아니지.” “하긴, 그게 회개해서 없어질 감정이었다면 난 이미 10년 전에 나았을걸.” 닉쿤의 진지한 어조에 우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늘 날짜의 기념일들을 확인하곤 죽어도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를 무시하며 전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신호음이 가는 동안 그의 말에 대꾸해주었다. “동성애가 회개해서 낫는 병이라면 네 그 바람기는 10년도 전에 나았겠지. 바람기는 사실 노력으로도 고쳐지는건데 말야. 아…… 클레인, 저 우영인데요. 저번에 얘기한 와인 말이에요. 오늘 입고되는 거 맞나요?” 금세 전화로 신경을 돌린 채 오늘 중에 발송해야 할 선물들의 입고를 확인하는 우영의 모습에 닉쿤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네, 그럼 오전 중에 보내주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짤막한 통화를 마친 우영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자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은 닉쿤을 보며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그나저나 좀 일어나줄래? 나도 일해야 하거든? 너 긴급회의라면서 안 가 봐도 돼?” “미뤘어. 당분간 필요한 거니 그냥 두라고 했어. 내가 직접 인터뷰하지 않는 이상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떠돌다 사라질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부모님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건데?” “침묵해서 잘못될 일은 없지.”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 빨리 내 자리나 내줘. 오늘 쓸 카드만 열다섯 장이야.” “에반한테 맡기지 그래? 그리고 오랜만에 영화나 보러갈까? 아니면 뮤지컬? 오페라? 어때?” “네 한 시간이 삼천 달라야. 미안하지만 난 갑부가 아니라 너한테 쓸 돈 없어.” “내가 데이트하자는 건데?” “너 혼자 하세요.” 마치 꽉 짜놓은 대본을 읽듯 닉쿤이 하는 말에 한 치의 틈도 두지 않고 재빨리 거절의 말을 반복하는 우영을 보며 닉쿤은 뚱한 얼굴로 책상에서 몸을 떼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리고는 느긋한 어조로 다시 묻는다. “너, 날 마피아의 손에 죽게 할 셈이냐?” 막 호텔에 전화를 걸려던 우영은 엉뚱한 닉쿤의 말에 인상을 쓰며 단축번호를 누르려다 말았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어젯밤에 그런 말을 해놓고 오늘 나 혼자 돌아다니면 엘레나가 오해하고 거짓말했다고 난리를 칠 수도 있잖아. 그럼 난 그날로 죽는다고.” “그보다는 널 회개시키려고 교회에 끌고 갈 것 같은데? 그 뇌 없는 아가씨는 네 말을 진짜 믿는 눈치던데.” “그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의심은 할 걸.” “바보 맞던데?” “그렇게 머리가 나쁜 애는 아냐. 다만 다른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거지. 한 예로, 그 애는 샤넬과 루이비통 백의 생산 년도와 한정품들 색상과 이름까지 다 외우고 있어. 그쪽으로는 끝내주게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샤넬과 루이비통 가방은 보기만 해도 몇 년도 무슨 모델인지 다 나와. 아마 가격도 다 외우고 있을걸.” “샤넬 매장에서 일하면 되겠네. 매장에서 스카웃 안 한다니? 내가 소개해줘?” “농담은 그만하고. 그런 이유로, 오늘부터 당분간 로이드와 네 일을 좀 바꿔줘야겠어?” “뭐?” “로이와는 얘기 끝냈어.” “무슨 소리야? 수행비서인 로이랑 내 일을 바꾼다니? 그게 말이 돼?” “로이도 꽤 달필이거든. 그리고 은근히 이쪽 일을 하고 싶어 하길래 당분간 바꿔서 해보라고 했지.” “미쳤냐? 이거 보통 일 아냐. 그리고 로이 일도 보통이 아니고. 분야를 바꿀 거면 최소한 두 달 간은 인수인계를 해야지.” “지금부터 해.” “지금부터 어떻게 하라고?” “이쪽 일은 네 메모랑 사라의 도움으로 어떻게 될 거고, 그쪽 일은 에반이 도와줄 거야.” “장난해? 이거 보통 일인 줄 알아? 아, 됐어. 더 말하기도 귀찮다. 빨리 비켜. 웨이팅 걸어둔 상품들 확인해야 돼. 그리고 사라 생일 파티 준비도 해야 하고. 손님 명단도 하나씩 다 만들어야 하니 좀 비켜라.” “……안 한다고? 너, 진짜 날 마피아의 총에 죽게 하고 싶은 거야?” 또 다시 먹히지도 않을 협박을 하는 닉쿤을 쳐다보며 우영은 한숨과 함께 사실을 내뱉었다. “에반이 너랑 같이 다니지 말래.” “……에반이? 왜?” “같이 다니면 여기저기 소문날 거라고. 너랑 나 유난한 거 다들 알잖아. 그러니까 조심하래.” 에반은 쓰레기 같은 가십을 신경 쓸 사람이 아니다. 그가 걱정하는 건 괜히 그런 소문이 났다 자신이 또 주제 넘게 황홀경을 헤맬까 하는 걱정이었지만,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할 수는 없기에, 우영은 가장 무난한 답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닉쿤 역시 에반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에반이 그런 걱정을 한다는 걸 믿으라고? 에반은 아버지 밑에서만 7년을 일했어. 가십 따위 묻어버리면 그만이라는거 알 만큼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고? 그것도 너랑 내 사이를 뻔히 알면서?” “에반은 네가 아니라, 날 걱정하는 거야. 괜히 너랑 엮여서 피 보지 말라고.” 우영이 수화기를 든 채 딱 잘라 말하며 다시 단축 다이얼을 누르자 닉쿤이 의자에 기대앉은 채 팔짱을 끼며 중얼거린다. “결론은 하나네.” “……뭐? 레이첼, 저 우영인데요. 슈피겔라우 보르도 레드 와인 글라스들 수량 파악됐나 해서요. 다음 달 파티에 500개가량이 필요한데요. 아, 화이트 와인 잔은 300개요. 전부 비버리 힐즈 시리즈로요.”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레이첼의 답에 다시 스케줄첩을 체크하던 우영을 바라보던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에반이 언제부터 날 사랑하기 시작한 거지?” 타앙하는 소리가 나며 우영이 들고 있던 수화기가 책상에 부딪쳐 아래에 떨어져 흔들거린다. 그 수화기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닉쿤의 얼굴을 바라본 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재빨리 잡아들었다. “너, 에반 앞에서 그대로 말해봐. 엘레나가 아니라 에반이 네 머리통에 기관총을 갈길걸. 아니다, 전기톱 들고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날 사랑하니 널 질투하는 거 아냐? 그런 시시껄렁한 가십에 휘둘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에반답지 않아.” “……그러니까 직접 물어보라니까……. 네, 다 준비된 건가요? 그럼 당일까지 보관 부탁드릴게요. 다른 식기들도 모두 체크된 거죠? 그럼, 내일쯤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짤막한 통화를 마친 우영은 이번에야 말로 닉쿤을 밀어내겠다는 듯 의자 뒤로 가 닉쿤의 어깨를 잡아 밀기 시작했다. “제발, 네 사무실로 가. 응? 여기 내 사무실이거든?” “비서 주제에 개인 사무실까지 갖는다는 게 말이 돼? 여긴 내가 쉬려고 너한테 준 거야.” “웃기지 말고 가. 좀 가라. 나 지금 30분 딜레이 돼서 겁나게 바쁘거든?” “그러니까 이쪽 일은 로이한테 맡기고 내 차 운전이나 하라고.” 또 다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는 닉쿤을 무시하며 우영은 이번엔 진짜 화가 난 듯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너 진짜 안 비킬 거야?” “같이 나가. 난 이 젊은 나이에 죽기는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죽어도 일어서지 않겠다면 그 의자를 아예 사무실에서 밀어낼 셈이었다. 팔을 걷어 부친 우영은 미련 없이 의자를 밀어 사무실 문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닉쿤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롤러코스터 같은데?” “닥쳐.” “더 빨리, 더 세게!” 문일 밀어 연 뒤 복도를 달리자 닉쿤의 주문이 많아졌다. 임원진의 사무실이 있는 복도를 달리던 우영은 이것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저택 안에서 이러고 참 많이 놀았었다. “너 진짜 저 끝까지 간다?” “더 빨리! 달려!” 아직도 아이처럼 장난을 치는 닉쿤을 보자 우영도 절로 기분이 좋아져 자기도 모르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그 느낌에 우영이 헛소리를 시작했다. “디즈니랜드 갈까?” “그럴까? 가서 미키 마우스 머리띠 하고 한 바퀴 돌아볼까?”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의자의 발에 다리를 올린 우영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떠들며 몸의 균형을 잡았다. 임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긴 복도를 지나면 저 끝에는 일반 직원들이 상담을 하는 커다란 사무실이 있다. 시끄럽게 울려 대는 전화벨 소리를 듣던 우영은 그제야 아차 싶은 마음에 의자를 멈추려 다리를 내렸다. 하지만 브레이크는 우영의 다리가 아니라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온 에반였다. “너희 뭐하는 거야?” 신나게 달리던 의자가 에반의 손에 잡혀 타악- 하니 멈췄다. 순간 달려온 속력 덕에 핑글거리는 의자가 돌며 에반의 방향으로 돌아가자 닉쿤이 곧장 다리를 꼬고 근엄한 자세를 잡고 앉는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앞에 선 에반에게 말을 건다. “에반, 나랑 얘기 좀 하지.” “좀 이따 봐. 우영, 너 내 사무실로 와.”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에 유난히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었지만 얼굴의 전체적인 느낌은 동양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에반의 선언에 우영은 조금 억울한 눈으로 에반을 바라봤다. “왜 나만?” “그럼 내가 상사를 혼내랴? 들어와. 그리고, 닉쿤 넌 사무실로 돌아가서 내가 올려둔 서류부터 봐.” Bliss사의 오너는 닉쿤이지만 기본적인 애널리스트 일은 그 아래에 있는 비서 격인 에반이 대부분 하고 있었다. 닉쿤이 하는 일은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이용해 투자자들을 유치하고 돈을 불리는 일이었다. 곧 에반이 닉쿤 의 파트너로 올라서 Bliss&Seth사로 이름을 바꿀 예정이기도 했다. 사무실 하나에서 사원 10명으로 시작한 Bliss 사는 어느새 애널리스트 일곱 명과 평직원만 오십명 가량이 되는 컨설팅 업체로 발전해 있었다. 3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물론, 그건 닉쿤의 자본력과 인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자 갖다 놔.” 억울하지만 일단 매니저 격인 에반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우영은 의자를 한 번 툭 찬 뒤 에반을 따라 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 서서 문을 열고 있던 에반이 그런 우영을 보곤 닉쿤에게 턱짓을 한 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양복 재킷을 벗어둔 지 오래고 셔츠 소매까지 걷어 부친 우영을 본 에반은 먼저 다가와 우영의 넥타이부터 만져주었다. “꼴이 그게 뭐야? 너희 둘은 언제 철들래?” “잔소리 할 거면 좀 나중에 해주면 안 돼? 나 바쁜데.” “바쁜 녀석이 의자 갖고 복도를 주행해? 앉아.” 자신의 책상 안으로 들어가 앉은 에반이 책상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우영은 얌전히 그가 권한 자리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영의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 무섭게 에반은 예상했던 대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행동 조심, 말조심하라고. 지금 그렇지 않아도 기사 때문에 사무실이 술렁거리는데 너희 둘이 그러고 놀면 어쩌자는 거야? 아까 보니 다들 네가 그 애인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분위긴데.” “남의 말 사흘이야. 실컷 떠들다 말겠지. 애초에 닉쿤이 게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 그 말 믿는 사람 아무도 없을걸.” “헛소문이 왜 무서운 줄 알아?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지만, 혹시나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다들 말도 안된다고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기사가 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조심할게.”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냐. 이미 사고는 쳐놓고 이제 와서 조심한다면 다야? 벌써 주식이 떨어지고 있어. 어쩔거야? 오늘 온 전화 중 30%가 그 소문이 진짜냐고 묻는 전화였어. 여기가 너희 장난하는 데야? 닉쿤이야 그렇다쳐도 너까지 그러면 어쩌자고?” 닉쿤은 상사라서가 아니라 워낙에 막무가내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에반은 역시나 자신을 잡고 뜯어말릴 셈이었다. 그의 기분은 잘 알겠지만 솔직히 아주 억울하고 기가 막힌다. “에반, 그런데 나도 진짜 억울하거든?” “억울해도 소용없어. 하여간 당분간 행동 조심해. 사라가 나한테 확인 전화했더라.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저거 너 때문에 기사 난 거 아니냐고. 닉쿤이 지 입으로 그런 소리를 했을 리는 없으니, 누가 날조한 건데 그럼 그 상대가 너밖에 더 있어?” “그건 아니지. 닉쿤한테 나보다 더 오래 붙어 있는 로이 있잖아. 그리고 에반도 나보다는 더 오래 같이 다니고. ” “바보냐? 로이랑 내가 닉쿤 옆에 1미터 이상 붙는 거 봤어? 닉쿤은 남자들은 자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녀석이야.” 확실히 닉쿤의 남성 혐오증은 유명하지만, 그것도 이미 옛날 얘기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닉쿤의 병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거 다 났어. 아직도 1미터 떨어져서 다니는 거야?” 닉쿤도 딱히 에반에겐 1미터 금지령을 걸지 않았지만, 에반은 그의 뜻에 따라 정확히 1미터 간격을 유지하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다 나은 병을 뭘 그리 걱정을 하냐 싶어 말하자, 에반이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누가 그래? 다 나았다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이제 1미터 금지령 안 지켜도 된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지키라던데?” “……응?” “나랑 로이한테는 여전히 1미터 간격 유지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왜?” “그걸 내가 알아? 너만 풀어준 것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에반은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을 끊었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 갖고 심각해한다는 생각에 우영은 셔츠 소매를 내리며 다시 단추를 잠갔다. “그러고 보니…… 너, 그 녀석이랑 같은 기숙사였지?” “룸메이트였지.” “대학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자기 저택 팽개치고 죽어도 기숙사에 들어가겠다고 우기더니, 나중에는 자기가 못살겠다고 난리였단 말이지…….” “어? 그랬었어?” “그래. 1학년 중간에 기숙사에서 나오고 싶다고 난리쳐서 대넌하고 한바탕 싸웠었는데……. 넌 몰랐어?” 전혀 몰랐던 이야기다. 물론, 2학년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룸메이트를 바꾸고 싶다고 해서 좀 상처 받긴 했지만 기숙사에서 나가려고 했다는 건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조금 상처받는 기분도 들었다. 자신과 함께 다니려고 기숙사에까지 들어와 준 걸 보고 꽤 기뻐했는데 중간에 도망치려 했다니, 좀 쓰리긴 하다. “그거 지금 들으니 좀 상처 받는 것 같아. 혹시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나?” “……그건 아닐걸. 나도 너 보고 혹시나 해서 떠본 거니까.” 갑작스러운 에반의 발언에 우영의 눈이 커졌다. 7년 전 졸업 직전에 에반이 “너, 닉쿤 사랑하냐?”라고 물어 혼비백산했던 기억이 있기에, 더욱 놀랐다. “뭐야? 그때 떠본 거였어?” “그래. 너 워낙에 사귀는 애도 없고 해서 이상하다 싶어 물어본 거야. 그 흔한 여자친구도 없었잖아.” “그건 내가 연애가 무서운 거고.” “그래. 나도 그때 알았다. 하여간, 그래도 조심해. 넌 진짜 조심해야 돼. 정주기는 힘들어도 한 번 정주면 잘못 떼는 타입이니까.” “나도 알아. 그래서 나도 정리했다고. 지금 이렇게 너무 좋은데 그걸 깨긴 아깝잖아. 난 지금이 너무 좋아. 지금 이 상태가 좋아. 일하는 것도 좋고, 닉쿤이랑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아. 친구도 그 녀석 하나뿐이잖아.” “그 노먼이라는 친구는? 한동안 붙어 다니더니.” 대학시절 같은 영문학과에 다니던 친구의 이름에 우영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러고 보니 한 놈 더 있었다. 자신의 치부를 아는 인간이. 그 인간은 언제고 조용히 사고사로 위장해 죽여야 하는 놈이었다. “노먼의 노자도 내 앞에서 꺼내지 마. 그 자식,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릴 거야.” “파파라치 한다며?” “그래. 그 자식이 날 두 번이나 물 먹였어. 한 번만 더 그러면 그때는 진짜 죽여 버릴 거야.” “클리샤 사건 그 친구 작품이었지? 거기 알려준 게 너냐?” 클리샤 허드슨이라는 3년 전쯤 상당히 잘 나가던 슈퍼모델과 닉쿤의 염문설을 떠올리며 우영은 다시 한 번 그 자식을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오랜만에 나타나 술을 마시자길래 미친척하고 술을 퍼붓다 닉쿤이 지금 클리샤와 연애 중이고, 내일 무슨 호텔에서 만난다까지 떠벌려 호텔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사진 이 신문 1면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식사 장면이나 데이트 장면은 여과 없이 드러내던 닉쿤였지만 호텔 앞에서 사진이 찍힌 건 처음이라 당시 닉쿤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적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클리샤는 열여섯으로 나이를 속이고 있었다. 그나마 그 기사와 함께 클리샤의 실제 나이가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밝혀준 노먼에게 감사해야 할지 저주해야 할지 아직도 헷갈리는 상태였다. “술 마시다 말려들었지, 뭐. 닉쿤한테는 말하지마. 그건 나도 아직 닉쿤한테 말 안했어. 말하면 나 죽일 것 같아.” “그러게 말조심을 했어야지.” “나도 그때 많이 후회했어.” “후회만 한다고 될 일이야? 셀리브리티들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입조심해야 돼. 그걸 새기고 또 새겨.” “……그거 말고.” 그건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서 우영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날 우영이 후회했던 건 그런게 아니다. “그럼 뭘 후회했는데?” “노먼 자식을 알파베타감마 신고식 때 죽여 버렸어야 했어. 술 마시고 토해 기절한 놈을 밟고 그냥 지나갔어야 했는데, 밟은 게 미안해서 신고한게 천추의 한이야.” 노먼 맥캐인이라고 알파베타감마 클럽 중에서도 또라이 중의 또라이로 소문난 우영의 친구에 대해 잘 들어 알고 있던 에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그 클럽 출신이었기에 노먼 맥캐인의 전설은 들어 알고 있었다. 알 파베타감마 역사 상 최고의 또라이라 칭해지는 걸 보니 보통은 아닌 듯했다. “……이번에 만나면 진짜 죽이겠구나.” “죽여서 뼈까지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야. 내가 그 자식 때문에 대학교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러고선 또 친구라도 나타나서 날 물 먹였다고.” 서슬 퍼런 우영의 기세에 에반은 컴퓨터를 켜며 서둘러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래, 알았다. 이제 나가봐.” 우영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해 가는데 에반이 막 생각난 듯 우영에게 말을 건다. “아, 사라한테는 네가 먼저 전화해서 이런저런 상황이었다고 설명해. 많이 놀란 모양이던데.” “알았어.” 문을 밀어 열고 에반의 사무실에서 나온 우영은 문을 닫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는 전부 정리했다, 이제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조금은 흔들린다. 완벽하게 미련을 끊어낸 건 아니다. 아니, 사실은 아직 좀 헷갈린다. 형제 같고, 친구 같은 녀석이기에, 오히려 그에 대한 감정이 미련인지 애정인지 혼란스럽다. 물론 후자이길 바라지만 전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전에는 몰랐었다. 사람이 마음이 정리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었다. 고개를 숙인 채 길게 숨을 내뱉은 우영은 마음을 다진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에반한테 깨졌어?” “으악!” 갑자기 바로 옆에서 들려온 음성에 놀라 우영은 심장을 내리누르며 비명을 내지르자 벽에 기대 서 있던 닉쿤이 어깨를 으쓱한다. “뭘 그렇게 놀라? 죄지은 거 있어?” “야, 있으면 있다고 말 좀 해. 놀랐잖아.” “그러니까 왜 놀라냐고?” 갑자기 표정이 무거워진 닉쿤을 슬쩍 돌아본 우영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맥 빠진 음성으로 답했다. “갑자기 말 걸면 놀라지.” “에반이 화냈어?” “아냐, 그런 건.” 괜히 이런저런 말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 뒤라서인지 닉쿤을 정면에서 볼 수가 없어 우영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닉쿤이 제대로 허리를 펴고 선 채 우영을 바라본다. “그럼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어?” “일이 많아서. 들어가 봐.” 우영이 닉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옆으로 비켜나가려는데 닉쿤이 우영의 팔을 세게 잡아끈다. “……얼굴이 왜 그래?” “뭐가?” “안 좋아 보이잖아.” “안 좋긴 뭐가. 갑자기 일 터져서 그렇지. 에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냐? 이따 보자.” 닉쿤의 팔을 떨쳐내고 사무실로 가려는데 이번엔 강제로 닉쿤이 강제로 얼굴을 잡아 들어올린다. “나한테 뭐 죄 지은 거 있어?” 순간 우영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혹시라도 방금 전 에반과 한 대화를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거 없는데.” 클리샤 사건은 닉쿤이 아직도 자다 깨 이를 갈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닉쿤이야 클리샤가 스무 살이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열여섯의 미소녀로 알고 있었으니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기사는 읽지 않고 사진만 본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장난도 아니었다. 워낙에 깔끔한 성격인지라 자신의 경력에 오점이 남는 건 질색을 하는 닉쿤에게 그 사건은 영원히 기억에서 묻어버리고 싶은 것과 동시에, 노먼 맥캐인은 언젠가 잡아 죽일 역적 리스트에 올라갔다. 만약 그 사건의 전말을 닉쿤이 안다면 진짜 자신을 해고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영은 치를 떨었다. “……진짜 아무 것도 없어.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일 봐.” 재빨리 표정을 풀고 우영이 어깨를 으쓱하자 닉쿤이 그제야 우영의 얼굴을 놓고 물러선다. “그럼 됐어. 점심 같이 하자.” “어……. 나 약속 있어.” “없는 거 알아. 스케줄첩 봤어.” “개인적인 약속이야. 아, 나 진짜 시간 없다. 오전 중에 처리할 일이 태산이야. 간다.” 먼저 닉쿤의 어깨를 툭 친 우영은 먼저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의 사무실로 향해갔다. 가만히 우영의 등을 바라보 던 닉쿤은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에반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네.” 짤막한 에반의 답에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선 닉쿤은 문을 밀어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 에반의 책상 위에 서류를 집어던졌다. “이대로 해. 책임은 확실히 지고.” 그제야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뗀 에반이 앞에 선 닉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는다. “너, 제대로 보기는 한 거야?” “대강. 어차피 나도 생각했던 거니 괜찮아. 그대로 진행시켜.” 그렇게 말하며 책상 앞을 떠난 닉쿤은 사무실 안에 놓인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쪽으로 오라는 무언의 행동에 에반은 노트북을 켜둔 채 닉쿤이 앉아있는 소파의 반대편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왜?” “우영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별말 안 했어.” “그런데 왜 그렇게 축 쳐졌어? 우울해 보이던데.” “그냥 잔소리 좀 한 거야. 오늘 같은 일이 있으면 미리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너는 그렇다쳐도 같이 있던 진까지 그러면 안되니까.” “쓸데없는 일로 기죽이지 마. 그래보여도 남한테 안 좋은 소리 들으면 금세 풀꺾이는 성격이야. 알잖아, 은근히 소심한 거.” “잘 알지. 그러니까 걱정이라고. 너까지 더해주지 마.” 딱 잘라지는 에반의 말에 닉쿤은 더 이상의 추궁은 그만두기로 하고 진짜 그를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그것보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팔짱을 끼며 닉쿤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에반도 진지한 얼굴로 닉쿤을 바라봤다. “말해. 뭔데?” “당신, 날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우영한테나 먹힐 헛소리하지 마.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 닉쿤에게 에반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단박에 답을 내려주었다. 닉쿤이 가끔 화가 나면 이상한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건다는 걸 잘 알기에 에반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우영은 놀라 당황하지만 에반은 놀라지 않는다. 그래서 닉쿤은 에반을 별로 안 좋아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우영하고 날 떼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뭔데?” “네가 아니라 우영을 위해서야. 넌 장난으로 던진 돌에 걔는 맞아 죽어.” 딱 잘라지는 에반의 말에 닉쿤은 미간을 좁혔다. “그건 또 무슨 궤변이야?” “너니까 하는 소리야. 너한테야 가쉽란 장식하는 게 우습겠지만 우영은 아냐. 넌 공인이고 우영은 아냐.” “셀레브리티가 공인이라고? 그런 헛소리는 또 처음 듣는데?” “그럼 공인이 아니면? 매스미디어에 고개 들이밀고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영향력을 떨치는 순간 공인이야. 네가 갖고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대가로 넌 사생활을 팔고 얼굴을 파는 거지만, 우영은 아무것도 없어. 그 녀석이 자기 사생활과 얼굴을 노출시킬 이유가 없다고.” 닉쿤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반은 암초였다. 항상 그랬었다. 모든 일에 제동을 거는 게 그였다. 그래서 닉쿤은 그가 참 싫었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의 사고가 가끔은 버겁다. “당신 말은 알겠는데……. 그게 당신이 나랑 우영 사이에 끼어들 이유가 된다는 거야?” “돼. 난 우영을 친동생처럼 생각하니까.” “친동생은 아니잖아.” “아니니까 더 애틋해. 장난은 이쯤 끝내.” 이미 모든 사정을 파악한 듯한 에반의 선언에 닉쿤은 차갑게 식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에반을 응시했다. “장난이 아니라면?” “장난이 아니면, 갑자기 우영 케이먼이 재미있어지기라고 한 거야? 그렇다면 더더구나 네가 끝내. 형제 같고 친구 같다는 녀석한테 그게 할 짓이야?” “누가 장난이라고 했어?” “그럼 뭔데? 네 그 잘난 연애 리스트에 우영 이름 하나 더 추가하려는 거 아냐? 네가 뭔데? 넌 웃으면서 굿바이 할 수 있지만 우영은 아냐. 버림받는 게 무서워서 연애도 못하겠다는 녀석을 그렇게 만들고 싶어? 진짜 어지간 한 각오 아니면 건들지도 마. 친부모한테 버림받고 두 번이나 파양 당했어. 걔 인생 불쌍하지도 않아? 혼자 기를 쓰고 여기까지 왔어. 그 환경에서 저렇게 잘 자라기도 쉽지 않아. 그리고 그만큼 우영이 노력했다는 거고. 그 평생의 노력을 네가 무슨 권리로 깨는데? 그냥 내버려둬. 편하게 혼자 살게 놔둬.” 에반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맞는 말이었다. 닉쿤도 그 동안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해오던바였다. 하지만 솔직히 이젠 그런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생각만 하다 끝나는 건 질색이다. “그럼, 각오만 다졌으면 된다는 거지?” 의미심장한 닉쿤의 말에 에반은 순간 그의 진심을 알아채고 말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걸, 알고 말았다. “……너…….” 뭔가 더 말을 하려 에반이 입을 열려는 순간 닉쿤은 더 듣기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처리 잘해. 난 미팅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닉쿤!” 그답지 않은 에반의 고함소리에 막 두 걸음 정도를 옮겼던 닉쿤은 걸음을 멈추곤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에반, 내 사생활에 간섭하라는 권리 준 적 없어. 당신은 내가 시키는 일이나 하고, 내 뒤처리만 깨끗하게 해주면 돼. 그럼 그만한 대가는 돌려줄 테니까. 그 이상의 어줍지 않은 참견은 그만둬. 난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야. 당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못해.” “그래서 기어이 하겠다는 거야? 엘레나는 대강 처리하면 되잖아? 애초에 네가 그 어린애 하나 처리 못한다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미안하지만 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라고. 내가 결심을 했다면 아무도 못 말리는 거 알지?” “닉쿤…….” “이만 가볼게.” 다시 돌아서선 손을 들어 보인 닉쿤은 그대로 바쁜 듯 에반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에반은 의자에 기대앉아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자신이 뭔가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처음에 우영이 닉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우영을 위해 어떻게든 뜯어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닉쿤이 절대 우영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질 일은 없을 거라 여겨서였다. 왜냐하면 둘은 너무나 가까웠다. 우영의 말대로 진짜 형제 같고 친구 같은 관계였다. 첫눈에 반한 연인도 2년이 지나면 밍숭맹숭해진다. 결국 정만 남는 게 일반적이라, 그렇게 오래 알아온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화학 반응이 일어날리 없다 여기곤 우영을 포기시켰는데, 아무래도 모르는 사이에 닉쿤도 타올랐던 모양이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서로 차마 말도 못하고, 그냥 친구로 남자고 한 건데, 우영은 그게 됐는데…… 닉쿤은 그게 안 된 모양이다. 우영은 괜찮다. 우영은 소심한 성격이라 포기시키기도 쉽고, 또 절대 고백할 용기도 없는 녀석이니까 문제가 없다. 하지만 닉쿤은 다르다. 한다면 하는 녀석이다. 사실 예일대 입학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기어이 해낸 녀석이었다. 그것도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까지 했다. 어릴때엔 신동 소리를 들었지만 청소년기에 이미 투자와 여자쪽으로만 온 신경이 쏠려 녀석의 수학 성적은 거의 낙제점에 가까웠지만, 쿼터백과 학생회장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AP를 따고, 에세이에는 다섯 살때부터 교육받은 투자와 주식에 대한 소신과 그가 아는 투자 원칙을 논문으로 써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터뷰에서 그가 절대 예일대 경제학부에 입학해야 하는 이유를 열정적으로 역설해 결국 예일대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회계 관련 수업까지 완벽하게 A+를 받아 졸업을 했다. 그러고 보니 닉쿤이 아이비리그에서 유펜(Upenn-펜실베니아대학)의 경영학부나 경제학부 부동의 1위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부를 포기하고 예일대 경제학부를 선택한 것도 의외였다. MBA는 결국 유펜의 워튼 경영대학원에서 땄지만 이상한 일이긴 했다. 왜 굳이 기를 쓰고 예일대에 가려고 한 건가 했더니…… 이제 알 것 같았다. “큰일이군.” 어쩐지 파란이 예상되는 미래에 에반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겨우 네 살 차이지만 저 어린 것들의 뒤처리는 결국 자신의 몫이 될 터였다. “돌겠군.” *** 자주 가는 회사 근처의 식당에서 가볍게 점심을 때운 우영은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 서 일어섰다. 날씨가 선선해진 채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막 가게를 나서려던 순간 재킷 안쪽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나.」 “응. 왜?” 수화기 멀리에서 선명하게 울리는 음성에 우영은 무심히 답하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회사 건물을 향해 걸음을 돌리는 순간 안에서 닉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에 좀 와줘.」 “병원? 병원은 왜?” 「사고가 났어.」 “무슨 사고?” 「교통사고.」 태연한 닉쿤의 답에 우영은 걸음을 멈추고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브렛한테 와 있어. 이쪽으로 와.」 “무슨 일이야? 얼마나 다친 건데? 상대는?” 「와서 봐.」 “얼마나 다친 거냐고?” 「일단 와봐. 끊는다.」 우영은 속이 타 대체 얼마나 다친 거냐고 물었지만 닉쿤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뚝 끊긴 핸드폰을 보며 우영은 눈을 부릅떴다. “손하고 입은 멀쩡한가 보네. 망할 자식!” 회사로 돌아갈 틈도 없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온 우영은 브렛의 사무실로 달려 들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닉쿤!” 병실을 찾을 생각도 못한 채 무작정 브렛의 사무실을 열고 소리를 친 우영은 소파에 멀쩡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는 닉쿤의 모습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너, 뭐야?” 교통사고라더니 너무 멀쩡한 꼴에 우영이 고함을 내지르자 왼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있던 닉쿤이 오른손을 들어보인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하얀 석고붕대가 감겨 있었다. 기브스였다. “오른손 다친 거야?” “응. 급정거하다 손목이 차문에 부딪쳤어.” 어쩐지 손하고 입은 멀쩡한 거 같더라니…… 역시나였다. 오는 내내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멀쩡한 꼴을 보니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염좌야, 타박상이야, 골절이야?” “골절.” 골절이라니 좀 크긴 하지만…… 그래도 교통사고라는 말에 별별 상상을 다 했던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닌지라 우영은 문 앞에 선 채 그대로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별거 아니잖아…….” “별거 아니라니? 뼈가 부러졌잖아.” “너 럭비 할 때 종종 다쳤잖아! 난 또 큰 사고라고…….” 맥이 탁 풀려 그대로 몸에 힘을 빼고 바로 서자 닉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느긋하게 묻는다. “놀랐어?” “그럼, 안 놀라냐? 교통사고라는데? 차는? 차는 안 다쳤어?” “넌 나보다 차가 걱정이냐?” “당연하지. 걔가 얼마나 비싼 몸인데!” “멀쩡해. 급정거라니까. 브렛, 이만 가볼게요. 운전기사 왔으니.” 그제야 브렛의 존재를 눈치 챈 우영은 서둘러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백발이 성성한 의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 드렸어야 하는데.” “아니, 됐어. 저 녀석이나 데려다줘.”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아, 저번에 보낸 와인 잘 마셨다. 구하느라 힘들었겠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얼마 전 그의 생일에 닉쿤의 이름으로 보낸 와인에 대한 인사말에 우영은 이젠 아주 대놓고 자기가 보냈다 말하며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 모습에 옆으로 다가선 닉쿤이 작게 웃는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둘이라는 걸 이젠 다 아는 모양이네. 가자.” “네가 일 안 하고 농땡이 부리는 게 다 들통 난 거지.” 다시 한 번 브렛에게 인사를 한 우영은 사무실에 제대로 들어서지도 않은 채 다시 뒤돌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닉쿤이 바지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 건넨다. “네가 운전해. 차 안 갖고 왔지?” “그래.” 열쇠를 받아들며 우영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듯 퉁명스럽게 답했다. 정신이 수습되고 나니 사람을 헐레벌떡 뛰어오게 한 닉쿤에게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별거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지, 거창하게 교통사고라는 말만 하고는 끊어버린 닉쿤의 행동이 괘씸해 미칠 것 같았다. 아예 작정을 하고 사기를 친 거다. “오후부터 로이랑 직무 바꿔.” 속도 모르고 되지도 않을 말을 반복하는 닉쿤을 슬쩍 뒤를 돌아본 우영은 짜증스러운 듯 내뱉었다. “또 그 소리냐?” “오른손을 다쳤어. 당분간 행동하기 불편해.” “그래서 나한테 네 수발 들으라고? 차라리 간병인을 돈 주고 사. 아니면 집으로 들어가든가.” “간병인은 불편해. 그럴 정도도 아니고. 생활에 자잘한 불편이 있는 건데, 내 마음대로 운전도 못하고 다니잖아. 그렇다고 번번이 로이 불러내는 것도 불편하고. 집으로 들어가자니 잔소리가 시끄럽겠고.” 말은 길게 해도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나한테 수발 들으라는 소리잖아?” “맞아. 다른 사람은 불편해.” “너……. 아니다, 가서 얘기하자. 골치 아프다, 진짜.” “만약에 내가 진짜 많이 다쳐서 간병인이 필요해도 네가 해야 돼. 여자들을 쓸 수는 없고 남자들은 싫어. 그렇다고 우리 가족들이 헌신적으로 내 수발들 사람들도 아니고. 너밖에 없잖아?” “내가 병 걸리면 넌 수발 들어줄 거냐?” “물론이지. 이 세상에 나밖에 네 수발 들어줄 사람이 또 있겠어?” 펄펄 끓던 화가 그 답에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닉쿤에게는 강한 편이지만, 이런 말에는 약해진다. 천애고아에 국제미아였던 자신에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라와 닉쿤 정도였다. 닉쿤의 부친과 형, 그리고 동생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좀 달랐다. 그들은 단지 오블리제 노블리제를 충실히 실천하며 자신을 후원한다는 사실에서 만족감을 얻던 이들이었다. 그 집에서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건 사라와 닉쿤뿐이었다. 태어나서 자신에게서 먼저 등을 돌리지 않은 이들도 그들뿐이었다. 가끔 닉쿤이 자신의 그런 약점을 이용하는 것 같아 불쾌할 때도 있었지만, 닉쿤이 그 약속을 지킬 걸 알기에 또 기뻐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 일 생각보다 복잡해. 로이 일도 어려울 것 같고.” “로이 일은 간단해. 내 스케줄 확인하고 그대로 따라 움직이면 돼. 네가 훨씬 더 잘할 거야.” “그래, 거의 운전사지. 결국 내 자리는 네 운전사구나.” 우영의 푸념 섞인 말에 닉쿤은 환하게 웃으며 우영의 어깨를 툭 쳐주었다. “네가 운전하면 조수석에 타줄게.” “됐네. 회사로 갈 거야, 아니면 집으로 갈 거야?” “일단 회사로. 아직 할 일 많아. 점심은 먹었어?” “먹고 나오다 네 전화 받은 거야.” “또 샌드위치로 때웠군.”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반복하며 엘리베이터 앞에 선 우영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단아한 그 옆모습을 바라보던 닉쿤은 안타까운 듯 숨을 내쉬며 서둘러 정면을 바라봤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여기가 어디든 상관 않고 우영을 끌어안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닉쿤의 인생 속에 우영이라는 인간이 뛰어든 건 15년 전 가을이었다. 새학기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새어머니였던 사라가 한 소년을 데리고 왔다. 그녀가 뉴욕에 있는 아동 보호시설에 한국인 국제 미아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로 빈번하게 그 쪽을 드나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기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같은 핏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지대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그 아이에게 신경을 쓰던 것은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놀랐던 건 그녀가 어느새 위탁가정을 신청해 과정을 수료하고 그 아이를 허르베지쿨 저택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동보호 담당 직원과 사회복지사, 두 명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섰다. 넓은 정원 앞에 선 채 멍한 시선으로 정원을 돌아보는 소년의 모습에 굉장히 놀랐던 걸로 기억한다. 첫 번째로 그 아이가 분명 자신과 동갑이라 여겼는데 너무 작고 연약해 보여서였고, 두 번째는 멀뚱하니 선 소년의 얼굴이 소녀처럼 하얗고 가련한 느낌이라서였다. 사라 덕에 동양인들을 많이 봐왔지만 모두 생김새가 오밀조밀하고 평면적이라 딱히 인상에 남던 이는 없었다. 모두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고, 체형이 가늘고 어려 보이는 얼굴에 딱히 눈에 띌 만한 개성은 갖추지 못했던 터라 다들 비슷비슷하다는 인상이 강했었다. 사라만이 외꺼풀에 길고 가느다란 눈을 가져 인상에 남았을 뿐 대부분이 어떤 개성이라는 걸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소년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소년 자체도 그렇지만 그 주변에 품고 있는 서늘하고 물기와도 같은 공기가 그랬었다. 「사라가 동양 원숭이를 데리고 왔어.」 수영장 쪽에서 선탠을 하던 바로 아래 동생인 클랜이 킥킥거리며 먼저 말을 꺼내자 막 수영장에서 나온 클레어가 정원과 이어진 창을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남자애라고 들었는데?」 「그러게. 너보다 어린 여자애로 보이는데?」 당시 열두살이지만 키는 이미 160센티를 넘어가던 클레어를 보며 클랜이 장난을 치자 클레어가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신기한 듯 창가로 다가가 그 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린다. 「인형 같아.」 「인디안 인형?」 「아니. 진짜 인형 같아. 와, 말을 하네. 되게 작다.」 「네가 너무 큰 거겠지.」 클레어와 클랜이 말장난을 하는 사이 흥미가 생겨 그쪽으로 다가서 보자 서서히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소년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가을의 햇살을 받아 맑게 빛나던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굳어졌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헐렁거리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아이는 잠시 놀란 듯 이쪽을 바라보다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지친 듯 슬퍼 보이는 그 미소에 심장이 지끈하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아이가 아주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끌렸던 것 같다. 딱히 인상에 남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냥 그 시선이 너무 애달파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 아이를 데리고 곧장 수영장 쪽으로 나온 사라가 그 아이를 데리고 이쪽으로 다가서며 인사를 시켜주었다. 「인사해야지. 닉쿤, 클랜, 클레어.」 사라의 말에 클랜과 클레어가 손만 들어 흔들자 아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여기는 우영이야. 앞으로 우리 집에서 위탁을 하게 될 거야. 친하게 지내.」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누워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자 아이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난 닉쿤, 그리고 저기 누워있는 녀석이 내 아래 동생 클랜이고, 여자애가 막내 클레어.」 「아, 누나가 아니었어?」 그 말에 클레어가 자지러질 듯 웃음을 터트리자 클랜이 뚱한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모두가 유난히 발육이 좋은데 셋째인 클랜만이 발육 상태가 여동생인 클레어보다 못해 늘 불만이었다. 「저 녀석이 막내야. 만나서 반가워. 나랑 동갑이라고 했지?」 그 말에 우영은 고개를 돌려 사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사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같은 학교로 들어갈 거니까 친하게 지내. 힘든 게 있으면 닉쿤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닉쿤은 아주 친절하고 근사하니까.」 사라의 말에 우영은 살며시 손을 마주잡아왔다. 가늘고 작은 손이 닿는 순간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우영의 손은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보고 천천히 눈을 들자 순간 우영이 그다지 작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멀리서는 그렇게나 작아 보였는데 가까이 보자 클레어와 비슷한 정도였다. 좀더 선이 가늘고 연약해보이는 탓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 때문이기도 했다. 「사라, 내가 방을 안내해줘도 돼?」 「그래줄래?」 「그래. 가자. 2층에 있는 그 방이지?」 얼마 전부터 사라가 이것저것 꾸미고 있던 2층 안쪽의 끝방을 떠올리곤 그렇게 말하자 사라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 모습에 꼭 잡고 있던 손을 잡고 그대로 저택 안으로 우영을 끌고 갔다. 어서 둘만 있고 싶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둘만 있는 공간에서 그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하얗고 작고 가늘고 슬픈 눈을 가진 생물체에 대한 호기심인지, 혹은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인지 잘은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와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그때는 그 감정이 뭔지 몰랐었다. 둘 다 너무 어려서, 그리고 첫만남이었기에 그게 어떤 건지 감히 상상도 못했었다. Chapter 2 “오늘은 일찍 퇴근할 거야.”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떡- 하니 앞을 막아선 에반을 보자마자 닉쿤은 귀찮다는 듯 툭하니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해갔다. 멀뚱하니 그의 뒤를 따르던 우영은 또 자기만 남겨두고 튀어버린 닉쿤을 원망스러운 얼굴로 바라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너, 나 좀 보자.” “……그만 좀 보지. 오늘 하루 동안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냐, 우리? 그러다 정분날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슬쩍 빠져나가려는데 에반이 우영의 팔을 확 잡아끈다. “까불지 말고 들어와.” “왜 또 나한테만 그래?” “저 녀석은 말이 안 통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무식한 사람이 최고다. 상식 있고 개념있는 사람들만 손해 보는 세태를 저주하며 에반의 사무실로 끌려들어간 우영은 그의 사무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이건 내 잘못 아냐.” “너 새대가리냐? 아침에 내가 한 말을 그새 까먹고 억지 쓴다고 오냐 하고 달라붙어?” “……손 다쳤잖아.” “오른쪽 손목 기브스한 게 뭐? 그 정도로 안 죽어. 일하는 데도 지장 없고.” “그렇긴 한데, 워낙에 까다롭잖아. 로이가 옆에 있으면 불편하다고 해서.” “너 넘어간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뭐가?” “그 손이 진짜 다친 건지 알게 뭐야?” 오늘 하루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그 일만 생각하던 에단은 악에 받친 듯 중얼거리다 아차 했지만, 우영은 그 말의 의미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기브스까지 했잖아. 브렛이 그냥 기브스를 했겠어? 다쳤으니 했겠지.”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 너 회계학 들었었지?” “응. 닉쿤이 수학이 하도 꽝이라 같이 들었었는데?” “너 CPA(Certified public accountant-공인회계사) 딸 생각 없어?” “갑자기 웬 CPA?” “문득 생각난 건데, 실력 썩히기 아깝잖아. 사교 관리도 중요하지만, 너도 그동안 발 꽤 넓혀뒀고 우선 CPA로 시작해서 MBA에 도전해 보는게 어떨까해서. 경력도 있고 너도 돈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한 채니까 . ” 에반이 오늘 하루 종일 앉아 내린 결론이 그거였다. 어떻게든 우영을 위해 닉쿤에게서 떼어놓긴 해야겠는데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일단 닉쿤이 쉽사리 그렇게 두질 않을 것이다. 오늘만 해도 자신이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로이와 우영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원래는 매니저인 자신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멋대로 인사를 처리한 닉쿤에 게도 화가 났지만 그런다고 쪼르르 따라다니는 우영도 문제는 있다. 그러니까, 합리적인 이유를 걸어 둘을 떼어놔야 한다. CPA를 준비하고 따는데 최소 3년에서 5년이고 MBA까지 따면 앞으로 못해도 7년가량은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다. 우영은 아직 젊고 경력도 있으니 해볼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영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닉쿤도 반대할 수 없을 거다. “난 별로 그럴 생각은 없는데…….” “잘 생각해봐. 언제까지 닉쿤 비서 노릇만 할 건데? 네 일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네쪽에서 일할 전문가들은 많아. 회계학 성적도 좋았던 걸로 아는데 아깝잖아. 난 애초에 네가 영문과보다는 경제학부 쪽에 더 맞을 것 같았거든. 진지하게 생각해봐. 공부 더 하고, 더 높은 자리를 향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개인적으로 너정도 재원을 썩히는 것도 아깝고.” 딱 잘라지는 에반의 설명에 우영은 조금 기가 죽은 듯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우영의 연봉이 팔만 달라였다. 사교 담당 비서라는 게, 의외로 그 조건에 부합할만한 능력과 노하우를 가진 이들이 드문데다 사교계의 거물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꽤 고급 전문 직종이라 여겼는데 에반의 눈에는 그게 한심해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선물과 카드를 고르고 기념을 맞추는 섬세한 작업이라 대부분 고학력 중산층 이상 출신의 여성들이 하는 일이니 그런 생각 이 들 법도 하다. 에널리스트라는 지위를 갖고 하루에만 몇 억 달라의 돈을 이리저리 돌리는 에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는 일들이 우스울 만도 하다. 하지만 우영은 나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닉쿤에게 필요한 인맥을 연결하는 건 결국 자신이었고, 그들과 닉쿤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게 자신의 일이었던 지라, 정보가 가장 중요한 닉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여겨왔었다. 지금 에반의 말은 그 자부심을 산산이 깨부수는 말이었다. 그게 조금 섭섭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별거 아닌 거야?” “그런 건 아냐. 네가 하는 일은 진짜 중요해. 하지만 네가 마흔이 돼서도 그 일을 할 거는 아니잖아. 그리고 닉쿤이 결혼을 하면 그건 부인의 몫이 될 거야. 네가 하는 일 중 절반 이상이 부인의 몫으로 돌아갈 일이라고. 물론, 내조만 하는 부인의 경우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영의 어깨가 축 쳐졌다. 그러고 보니 그도 그렇다. 파티 관리나 중요한 손님들의 기념일이나 선물을 챙기는 건 그의 부인이 할 일이었다. 지금은 대신 할 사람이 없어 자신이 챙기는 것뿐이다. 대넌의 사교 관리를 하는 것도 결국 사라였다. “……알았어. 생각해볼게. 난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봐서…….” “평생 닉쿤 뒤치다꺼리만 하다 끝낼 생각이 아니면 너도 네 길 찾아. 지금 상태 좋지. 하지만 닉쿤이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할 건 아니잖아. 부동산쪽은 닉쿤이 맡게 될 거야. 클레어는 역부족이야.” 닉쿤의 형인 애이먼은 현재 결혼 후 언론 쪽의 일을 하고 있었고, 닉쿤의 바로 아래 동생인 클랜은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는 딱히 사업에는 관심이 없는 듯 작가가 될 생각이라고 한 터라, 부동산 쪽은 클레어가 돕고 있었다. 하지만 대넌이 늘 닉쿤이 부동산 쪽을 맡아줬으면 하는 눈치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Bliss사도 제법 규모가 있지만, 허르베지쿨 가 소유의 부동산 컨설팅 회사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전국 지사부터 시작해 하루에 오가는 금액만 해도 천문학적이다. 그곳에 가면 닉쿤에게 따라붙은 전문 비서만 7명가량이다. 더는 자신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그래. 하여간 너 자꾸 닉쿤에게 놀아나지 마. 그 자식은 재미로 그러는 거야.” “알아. 그래도 친구인 걸.” “그래, 그 놈의 친구……. 그게 문제지.” 두 녀석이 동시에 친구타령을 해대는 통에 에반은 이제 ‘친구’라면 신물이 날 정도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듯 에반이 말을 끊은 사이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린 뒤 벌컥 하니 문이 열렸다. “둘이 무슨 역적모의를 하는 거야? 날 회사에서 내쫓으려고?” 에반의 사무실에 저렇게 예의 없이 들어올 인간은 닉쿤밖에 없기에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그쪽을 돌아봤다. 그 새를 못 참고 또 쳐들어온 닉쿤에게, 에반이 툭하니 말을 내쏜다. “그래. 일은 안 하고 도망 다니는 오너 쫓아내자고 작당하던 중이야. 난 새벽 3시에야 집에 들어가는데 넌 벌써 퇴근한다고?” 원성이 가득 담긴 에반의 말에 닉쿤이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환자잖아.” “겨우 그 정도 갖고 엄살이야?” “겨우 그 정도라니. 골절이라고. 우영, 가자.” 문 앞에 선 닉쿤이 먼저 돌아서자 우영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며 양복자락을 정리한다. “알았어. 그럼, 갈게. 에반,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일찍 퇴근해.” “그래. 내가 말한 거 잘 생각해보고.” “알았어.” 에반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오자 뚱하니 복도에 선 닉쿤이 사무실 안쪽을 슬쩍 보더니 우영에게 묻는다. “무슨 얘긴데? 뭘 생각해?” “별거 아냐.” “별거 아니면 말해도 되잖아. 뭔데?” “CPA 따볼 생각 없냐고 해서.” 닉쿤의 말에 답하던 우영은 그제야 가방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닉쿤이 왼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내밀며 묻는다. “CPA?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뭐……. 비서 일만 하다 끝낼 수는 없고, 또 나 회계학 좋아했거든. 애널리스트 일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너랑 에반이 가르쳐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서류가방을 받아든 채 닉쿤의 옆에서 복도를 걷기 시작한 우영은 지나가는 직원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해보였다. 닉쿤 역시 인사를 건네는 사원에게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하곤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안 돼. 힘들어. 신경 쓸 일도 많고.” “왜 안 돼? 너도 하는데.” “나는 나고, 넌 아냐. 하루에 서너 시간 자고 살아야 돼. 고객 관리도 그렇고, 보통 일이 아냐.” “그 정도는 나도 해. 못할 거 없어. 그리고 고객관리는 너보다 내가 잘할걸.”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선 채 우영이 툭하니 말을 던지자 닉쿤이 미간을 찌푸리며 우영을 내려다본다. “뭐야? 진짜 애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어?” “그건 아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잖아.” “미래를 생각한다면 내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아. 너 주식으로 꽤 불렸잖아.” 처음 입사한 뒤 1년 간 모은 돈을 자기에게 맡기라는 그 말에 순순히 삼만달라를 건네자 닉쿤은 그 돈을 일년 만에 열 배로 불려주었다. 그리고 그 돈에 사만 달라를 더해 맡기자 다시 일간 열 배로 불려줬다. 보통 만 단위는 돈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닉쿤였지만 자신만은 특별히 맡아 자산 관리를 해준 덕에 지금 자산은 상당하다. 문제는 그게 닉쿤의 능력이지 자신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거랑은 다르지. 그건 네 능력이고. 평생 너한테 빌붙어 살 수는 없잖아.” “나 같은 친구를 둔 것도 능력이야. 너, 인맥이라는 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아직도 몰라?” “그건 능력이라기보다는 운이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운 같은 건 없어.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널 선택한 건 운이 아니라, 네 능력이야. 네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해주지도 않았어.”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먼저 들어서며 우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닉쿤의 말대로였다. 닉쿤은 고객과 친구 사이를 정확히 구별 짓는 성격이었다. 고객들을 친구처럼 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친구가 되진 않는다. 그가 아는 대학 친구들이나 사적으로 친한 친구들의 경우는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돈을 버린 셈 치고 빌려주기는 할망정, 투자 관리나 자산관리를 해주지는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었기에 닉쿤이 자산관리까지 해주는 거다. 그건 인정한다. 닉쿤에게 자신은 진짜 특별한 친구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역시 닉쿤은 특별하다. “그런데 벌써 퇴근해도 돼? 너무 이른 거 아냐? 일 없어?” 막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우영이 묻자 닉쿤이 어깨를 으쓱한다. “환자잖아.” “겨우 손목 부러진 걸로 환자 행세하려고?” “교통사고라고. 교통사고 후유증이 얼마나 큰데. 특히 나처럼 쉴 시간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 특히 더해. 푹 쉬어줘야 돼.” “급정거가 교통사고면 파리도 새다.” 주차해놓은 차 앞으로 걸어간 우영은 락을 풀고 차 뒷문을 열어 가방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자 조수석에 올라탄 닉쿤이 그의 가방을 뒷좌석에 던지며 웃는다. “내 차가 재규어가 아니라 1970년 산 캐딜락이었다면 대형 사고 났어. 제동거리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 급정거한 순간 차가 코앞에 있었어. 제로백(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닿는 시간)이 5.3초밖에 안 되는 차를 끌고 막 액셀을 밟는 순간 앞에서 차가 멈췄다고. 조금만 늦었으면 대형사고야.” “그래, 라이언스경(윌리엄 라이언스-재규어의 전신인 더 스왈로우&카우치 빌딩 컴퍼니의 창시자 겸 디자이너)에게 감사해라.” 이미 시동이 걸린 차의 핸들을 쥐고 부드럽게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 뒤 기어를 바꾸자 춤을 추듯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실 닉쿤의 억지를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가 이 재규어 때문이었다. 닉쿤의 차는 스물여덟 대였는데 그 중 다섯대가 재규어였고, 닉쿤이 가장 애용하는 차 역시 재규어였다. 그리고 우영은 닉쿤의 재규어를 아주 좋아했다. “내가 차를 갖고 가긴 그러니까 너 먼저 집에 내려주고 택시 타고 집에 가야겠다.” “집에 가게?” “응. 몇 블락 안 되니까 걸어가도 되겠네. 날도 좋으니 산책이나 해야겠다.” 다른 때보다도 이른 퇴근이라 우영은 집에 돌아가 뭘 할까 고민 중이었다. 보통 사무실에서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8시에서 9시 사이에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그럼 곧장 세탁물을 맡기고 샤워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저녁 식사도 하지 않은 채 6시 퇴근이라 뭘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선 맡겨놓은 세탁물을 먼저 찾아다두고, 그 뒤에 가볍게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 시간이 많으니 영화라도 보러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망상은 다음 이어진 닉쿤의 말에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환자 혼자 두고 집에 가겠다고?” “……뭐라고?” “말이 그렇잖아. 내 손이 이 모양인데 날 혼자 두고 집에 돌아간다고? 저녁은 어떻게 하라고?” “배달 시켜.” “샤워는?” 그 질문에 차를 몰고 막 지상으로 빠져나가던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나한테 샤워까지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냐, 너?” “그럼?” “오른손이 부러진 거지, 너 병신된 거 아니거든?” “오른손이 이래서 머리를 어떻게 감아?” “왼손으로 감으면 되지.” “찝찝해.” “참아. 그러게 누가 급정거를 하래? 나도 오늘은 집에 가서 할 일 많아.” “뭘 할 건데?” “이것저것.” “청소하고 세탁물 찾고 텔레비전 보고 앉아 있으려고?” 정확히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지적하자 우영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오래된 친구는 좋지않다. 자신에 대해 너무나 세세히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네가 집에 가봐야 할 일이 집안일밖에 더 있냐는 듯한 그 말투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조금 오기를 부렸다. “……나갈 거야.” “어딜?” “……영화 보러.” “누구랑?” “친구랑.” “친구 누구?” “친구 누구라면 네가 알아?” “너한테 내가 모르는 친구가 있어?”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라 칭해지는 이들은 모두 닉쿤의 친구들이기도 했다. 그와 항상 딱 붙어 다니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사실, 사람들을 사귀기를 꺼려하는 성격이다 보니 닉쿤을 통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기가 꺼려졌다. 그러니까 닉쿤은 자신의 방어선이었다. 닉쿤이 이 사람은 괜찮아, 라고 하면 사귀어도 된다. 하지만 저 녀석은 안 돼, 라고 하면 사귀어선 안 된다. 처음으로 닉쿤의 조언을 무시하고 사귄게 노먼 맥캐인이라는 녀석이었는데 그 뒤로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절대 닉쿤이 저 녀석은 안 돼, 라고 하면 사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친구들은 모두 닉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닉쿤이 모르는 친구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오기가 생겼다. 없어도 있다고 우겨야 할 것 같았다. “있어. 네가 모르는 친구.” “누군데?” “……하여간 있어.” “노먼 맥캐인?” 갑자기 나온 그 이름이 그렇지 않아도 오늘따라 노먼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던 우영은 진짜 놀라 핸들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노먼을 떠올리자 다시 퍼지는 살심과 닉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 자식은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릴 놈이야. 왜 기분 더럽게 걔 얘기를 꺼내?” “아직 연락하나 해서.” “연락 오면 당장 너한테 갖다 바칠 테니 걱정 마. 네가 죽여주면 나야 고맙지.” “……진심이야?” “진심이지, 그럼.” “그럼 다행이고.” 노먼에 대한 이야기가 이 이상 나올까 우영은 침묵한 채 조용히 차를 운전해갔다. 아직 러시아워에는 들지 않는 시간이라 꽤 수월하게 차가 나갔다. 몇 번 신호에 걸리기는 했지만 얼마 걸리지 않아 닉쿤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우영은 차문을 열어주는 어턴던트를 보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사이 닉쿤은 안전벨트를 풀곤 뒷좌석에 있는 가방을 찾아들었다. 어턴던트가 차문을 열자 우영은 내일 일정에 대해 물었다. “그럼, 나 주차해놓고 갈게. 내일 아침 8시 30분까지 오면 되지?” “그래. 아…….” 막 차에서 내리려던 닉쿤의 몸이 가볍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차 문을 잡고 기대며 힘겨운 듯 몸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어턴던트가 그를 부축하자 우영은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닉쿤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좀 현기증이 나서…….” “병원 갈까? 머리 다친 거 아냐?” “그건 아냐. 그냥 좀 현기증이 나서 그래.” 아무리 작은 사고라도 닉쿤라면 분명 병원에 간 김에 전신 엑스레이를 찍고 MRI검사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골절상을 입었는데 병원에서 그냥 내보냈을 리가 없다. “진짜야? 진짜 괜찮아?” “응. 나 부축 좀.” “그래.” 서둘러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내 든 우영은 차 열쇠를 주차 요원에게 맡긴 뒤 닉쿤의 가방까지 받아들고 그를 부축해 아파트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아파트지 닉쿤이 사는 아파트는 센트럴파크 남서쪽에 위치한 60층짜리 빌딩으로 한 층이 240평가량이 되는 넓이의 초호화 아파트다. 일반 매매 거래가가 삼천만 달라에 이르는 고급 주 택인 만큼 경비와 보안이 엄격했다. 진짜 피곤한 듯 옆에 기대선 닉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가 서자 닉쿤이 카드 키를 하나 꺼내 건넨다. 키를 들어 엘리베이터 버튼 옆의 카드 슬롯을 긁자 멈춰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축 쳐진 닉쿤을 부축해 안으로 들 어서서 다시 한번 카드 키를 긁자 자동적으로 58층에 불이 들어온다. “진짜 괜찮아? 숨소리가 거칠다.” “가서 쉬면 좀 좋아질 거야.” 말은 그렇게 하는데 닉쿤답지 않게 얼굴색도 유난히 붉고 몸이 뜨거운 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어깨에 걸친 팔에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닉쿤은 평생 감기도 모르고 살던 건강체였다. 지금까지 그를 15년이나 알아왔지만 호흡이 이렇게 거칠어지거나 몸에 열이 나는 일은 우동 후가 아니면 거의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아니 대학시절에는 몇 번 있긴 했지만, 그때도 거의 하룻밤 앓고 가볍게 넘어간 정도였다. “너, 열나는 것 같아. 몸이 뜨거워. 감기 걸린 거 아냐?” 우영이 걱정이 되는 듯 그의 이마를 짚어주며 그렇게 묻자 닉쿤이 이젠 아예 우영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린다. “그런가 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했는데 지금 닉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높고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우영은 진심으로 닉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야, 너 진짜 이상해. 왜 이렇게 숨소리가 거칠어?” 그 사이 어느새 5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워낙에 보안이 철저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문과 현관문이 아예 이어진 터라 닉쿤을 부축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영은 그대로 문을 밀어 열고 들어가 보안 장치를 끄고 그를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물 가져올게.” 유럽풍으로 시원하게 꾸민 하얀 응접실 안의 소파에 닉쿤을 앉혀둔 우영은 가방을 먼저 내려두고 서둘러 주방을 향해갔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생수 병을 꺼내들고 막 응접실로 달려오는데 닉쿤이 보이지 않았다. “닉쿤?” 이상하게 고요한 응접실을 돌아봤지만 그 안에는 닉쿤이 없었다. 침실로 간 건가 해 그쪽으로도 가봤지만 역시나 침실 역시 텅 빈 채였다. “야, 어디 있어?” 말이 240평이지 이 안을 뒤지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어차피 몸도 좋지 않은데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재나 다른 방들을 확인하기 위해 막 침실을 나서려는데 침실과 연결된 욕실쪽에서 샤워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반투명으로 바뀌는 욕실 문 너머로 우뚝 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색감을 보니 아무래도 양복을 입은 채 달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닉쿤, 열나는데 목욕하면 안 돼!” 하지만 저 불투명 유리 안쪽에서는 아무런 답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 어디가 심하게 아픈 건가 해 우영은 우선 양복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푼 채 구두까지 벗어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욕실 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는 안을 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닉쿤,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예상대로 닉쿤은 양복을 입은 채 샤워기 앞에 서 있었다. 위에서뿐 아니라 샤워 바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닉쿤은 이미 흠뻑 젖은 채였다. 닉쿤의 나쁜 버릇 중 하나가 아주 가끔씩이지만 몇 만 달라에 달하는 고급 양복을 입고 몸에 열이 나면 그대로 샤워기로 돌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대학 졸업 후에 없어졌다 했는데 아직도 못 고친 모양이다. 그것도 꼭 찬 물 속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너, 감기 든다니까.” 옷이 젖은 건 질색이기에 조심조심 안을 살피며 그렇게 말하자 닉쿤이 그제야 이쪽을 돌아본다. 물줄기 아래에 선 그는 지독하리만치 섹시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우영은 화보 같은 광경에 매혹당하기보다 그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 “닉쿤, 어서 나와.” “……몸이 뜨거워.”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쏟아졌다. 목이 잠긴 듯, 그리고 피로에 절은 듯한 음성이지만 동시에 열기가 느껴지는 음성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픈 건가 싶기도 하고, 또 아픈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기도 해 우영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나와. 너 지금 몸이 안 좋은 거야. 기브스까지 하고 그게 뭐야?” 샤워 룸 한쪽에 비치된 바스 가운을 들고 우영이 닉쿤에게 다가가며 그렇게 말을 걸었지만 닉쿤은 샤워기를 끌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어차피 샤워는 해야 하는 거고, 또 이미 젖은 채인지라 우영은 바스 가운을 다시 걸어 두고 샤워기 옆으로 다가갔다. 순간 얼음물처럼 내리꽂히는 찬물의 한기에 몸을 떨며 우영은 서둘러 센서 버튼을 눌러 온수로 바꿨다. 우영은 한여름에도 반드시 온수로 샤워를 하는 타입이었다. 찬물은 질색이다. “옷부터 벗어. 그리고 씻은 뒤에 식사하자. 왜 그래? 애들처럼.” 열이 난다고 무작정 찬물 속으로 뛰어드는 게 너무 아이 같은 발상이라 우영은 물에 젖은 닉쿤의 양복 재킷을 벗겨주려 손을 뻗었다. 아마 오른손의 기브스 때문에 옷을 벗기 번거로워 또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오른손을 못 써서라기보다 기브스에 소매부분이 걸려 잘 벗겨지지 않은 듯했다. “팔 들어. 벗겨줄게.” 우영은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지만 서서히 온수의 온기가 차 습도로 울리기 시작한 욕실 안에서 그 말이 상당히 묘한 의미로 들린 듯 닉쿤이 웃으며 농담을 한다. “너, 욕실에서 그런 말 하면 얼마나 섹시한 줄 알아?” “섹시 같은 소리 하네. 너랑 나랑 그럴 섹시 찾을 사이냐? 물 좀 꺼. 벗기기 힘들다.” “……너, 이렇게 근사한 남자를 욕실에서 보고도 아무 생각도 안 들어? 달려들고 싶다거나 안기고 싶다거나?” “네 입으로 근사하다는 말 하지 마. 넌 수치도 모르냐?” 닉쿤의 양복 재킷을 먼저 벗긴 뒤 한 팔에 건 우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닉쿤의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 손길을 바라보며 닉쿤은 젖은 금발을 뒤러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뱉는다. 젖은 넥타이를 다 푼 우영은 “실크라 다신 못 쓰겠다.”라고 중얼거리며 이번엔 닉쿤의 셔츠자락을 풀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 손길에 닉쿤은 조바심이 나는 듯 한 걸음 앞으로 가 우영을 샤워룸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우영이 인상을 쓰며 뒷걸음질치다 고개를 든다. “뭐야?” 우영의 검은 머리카락이 습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우영도 물을 맞아 온몸이 젖은 채였다. 물에 흠뻑 젖은 그 모습에 닉쿤은 아찔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우영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그리고는 조금 들뜬 음성으로 우영에게 묻는다. “나, 남자들한테도 꽤 어필하는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날 보면 아무 생각도 안 들어?” 갑작스레 뺨을 감싸 쥔 닉쿤의 손길에 우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태연하게 대꾸해주었다. “좋은 친구지. 근사하고 다정하고. 넌 멋있어. 누구나 널 사랑할 거야. 그건 장담해.” “너는?” “나도 널 사랑하지, 당연히. 뒤로 돌아봐. 셔츠 벗어야지.” 귀찮다는 듯 무성의하게 답하며 닉쿤을 재촉하는 우영의 말투에 닉쿤은 돌아서지 않고 진지한 눈으로 우영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한 걸음 더 다가선다. 그에게 밀려 얼결에 벽에 등을 대고 선 우영은 이건 또 뭐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닉쿤을 바라보다 순간 열에 들뜬 듯 뜨겁고 강렬한 시선에 숨을 멈췄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못되었다. 알듯 말듯 묘한 상황에 우영은 일부러 그 눈빛을 외면하고 돌아서려했다. 하지만 이번엔 닉쿤의 두 팔이 우영이 기대고 서 있던 벽을 짚고 가로막는다. “날 사랑한다면 증명해봐.” 무거운 음성이었다. 언제나의 그답지 않은 어조와 이상한 대사. 욕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서서히 선명하게 그려지려하자 우영은 재빨리 웃으며 닉쿤을 바라봤다. “널 사랑하면 이 아파트에서 떨어지라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네 대신 엘레나의 총을 맞아달라거나?” 억지로 웃으며 농담을 건넸지만 닉쿤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언제나 파란 하늘처럼 맑게 빛나던 눈동자가 무거운 바다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우영은 그런 눈이 싫었다.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친구,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가끔은 형 같고, 또 가끔은 귀여운 동생 같은 친구. 그게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그는 자신이 아는 닉쿤이 아니다. “샤워하고 나와. 식사 준비해줄게. 머리 감을 수 있어?” “…….” “나 먼저 나갈게. 양복은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넥타이는 버려야겠다. 그러게 왜 비싼 옷을 입고 이런 짓을 해? ” 우영이 다시 시선을 돌리며 돌아서려하자 닉쿤의 손이 우영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손의 움직임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기에 우영은 마른 침을 삼켰다. 불과 10분 전 만해도 즐거운 하루였다. 에반에게 욕 좀 먹고 타조 머리가 사고를 쳐 상황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타블로이드판 날조 기사 따위야 늘 있었던 일이고, 기면 기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딱히 문제될 게 없는 하루였다. 닉쿤이 조금 다쳤고 또 아주 조금 복잡한 인수인계 문제가 있다는 것 외엔 아주 좋았다. 하지만 지금 순간은 태어나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닉쿤, 너 왜 이래?” 우영이 조금 놀란 듯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묻자 이번엔 닉쿤이 싱긋 웃는다. 억지로 웃는 얼굴이었다. 눈가와 입매가 잔뜩 굳어 있다. “……내가 원하면 뭐든 해줄 수 있어?” “같이 죽자는 거 빼곤 다 해줄 수 있어.” 사실은 같이 죽자고 해도 죽어줄 의향이 있었다. 닉쿤의 부탁이라면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일부러 농담처럼 그렇게 말을 자르자 닉쿤이 강제로 턱을 들어올린다. 다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우영은 몸을 흠칫 떨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뜨겁고 애절해 두려울 정도였다. 방금 전부터 시끄럽던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다.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댄다. 여기서 더는 안 된다. 이 이상 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도망쳐야 한다. 서둘러 이 안에서 저 밖으로 도망쳐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는 달리 몸은 잘 움직이질 않았다. 사방에서 거세게 쏘아대는 물줄기에 금세 욕실 안은 뿌옇게 흐려졌다. 전신 저울도 샤워룸 안의 불투명한 유리문도 전부 뿌옇게 흐려진 채였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널 안고 싶다면 내게 안겨줄 수 있어?” 쿵하며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전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었기에,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읽힌 듯 수치스럽고 당혹스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이 말이 진담일 가능성은 단 0%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장난이고, 농담일 것이다. 아 주 가끔, 진짜 아주 가끔씩 닉쿤은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자신이 놀라 심각하게 반응하면 닉쿤은 곧 웃으며 얼굴을 풀고 그걸 믿었냐는 듯 놀려댄다. 그러니까 넘어가면 안 된다. 언제나와 같은 질 나쁜 장난이다. 다시 한 번 기억을 되새기며 우영은 자신을 달래도 또 달랬다. 넘어가면 자신만 손해다. 자신만 상처 받는다. 늘 그랬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우영은 정면으로 닉쿤의 눈을 바라보며 드물게도 진지한 투로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닉쿤, 네가 원하면 난 너랑 잘 수 있어. 하지만 넌 안 그럴 거야. 사라와 넌 내겐 유일한 가족이니까.” 딱 잘라지는 그 말에 닉쿤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을 가로 막고 있던 팔이 툭하니 떨어지자 우영은 재빨리 젖은 닉쿤의 옷을 들고 샤워룸을 나가 욕실문 앞에 놓인 바스켓에 닉쿤의 옷을 집어던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요란하다. 너무 요란해서 귀청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다시 혼자 남은 샤워룸에서 닉쿤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접근하는 게 아니었는데, 마음이 초조해 밀어붙인게 화근이다. “멍청하긴…….” 우영이 얼마나 겁이 많은지 알고 있다. 아닌 척하지만 우영의 마음 속에는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 버림받을까, 또 다시 언제 혼자 남겨질까, 늘 그런 생각을 하고 두려워하며 사람들을 배척하고 있었다. 깔끔하고 영리하고 성격 좋고, 세심하며 섬세하고 다정해 보이지만 우영은 기본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서툴고, 남에게 어리광도 부릴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선물 하나를 건네도 그 선물에 대한 대가를 어떻게 치를까 전전긍하며, 기분 나쁜 기색만 보여도 그가 잘못한 게 아닐까, 뭔가 실수를 해 상대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닐까 가슴 졸이며 애를 태우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에게 갑자기 다가서면 무서워 도망칠 게 뻔했다. 그래서 천천히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아주 천천히, 확신이 생겼을 때 물처럼, 공기처럼 스며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초조해진다. 10년이었다. 딱 10년이라고 자신에게 유예기간을 주었다. 만약 이 감정이 10년 뒤에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확신을 갖고 대쉬하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었다. 만약 진짜 10년 동안 자신이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게 영원할 테니, 그때는 진심으로 그에게 다가서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다시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변덕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기에,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와 우영에게 한 맹세였다. 그러니까 그건 막 대학에 입학했던 첫 해의 일이었다. 「노먼 저 자식 좀 누가 내쫓아줘!」 샤워를 마친 우영이 짧은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투덜거리며 방으로 걸어들어왔다. 유난히 높고 화가 난 듯한 우영의 태도에 옆을 돌아보자 우영이 온몸이 새빨개진 채 화를 내고 있었다. 옷도 조금 젖은 채였다. 샤워를 한다고 가서는 젖은 채로 나온 그 꼴에 심장이 떨려 모른척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느긋하게 물었다. 「왜 또?」 「샤워 중에 쳐들어와서 장난을 치잖아. 갑자기 온수를 최고로 트는 바람에 화상 입을 뻔했어.」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기숙사에는 또라이 둘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먼 맥캐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우영 케이먼이었다. 두 번째 또라이는 무시무시한 수학능력을 자랑하며 영문과에 있던 탓에 또라이보다는 괴짜로 알려져 있었지만, 첫 번째 또라이는 케이블 방송의 유명 프로 ‘Loosers(머저 리들) ’에나 나올 법한 또라이 중의 또라이라 모든 이들로부터 경외시 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또라이가 아무래도 우영에게 관심이 지대한 듯했다. 기숙사 입소 첫날 있었던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신고식 때 기숙사에 불을 낼 뻔 하다 술독에 빠져- 진짜 커다란 술통에 녀석을 집어넣고 술을 들이부었다.- 죽을 뻔했던 녀석을 우영이 살려놓자, 그 뒤로 노먼은 우영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간섭을 하고 챙겨주고, 또 가끔씩 욕실에까지 쳐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다. 우영은 그게 단지 괴롭힘이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자신이 보기엔 아니었다. 그건 또 다른 관심의 표명이었다. 또라이 중의 상 또라이지만 거대 로우펌 Jack&Clide의 파트너인 잭 맥캐인의 아들이자 지방 판사와 검사보만 일곱 명을 배출한 법조계의 명문가 맥캐인 가의 장남인 까닭에 그를 이 기숙사에서 쫓아낼 사람은 없었다. 또라이 클럽이라 불리지만 알파베타감마 기숙사는 기본적으로 정재계뿐 아니라 법률과 언론, 방송계의 거물들의 아들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클럽이었다. 우영이 처음 이 기숙사로 들어올 때는 자신이 하인까지 데리고 입소한다고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모두들 나름 우영의 실력과 장래를 유망하게 보고 자신의 장래 보좌로 보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었다. 문제는 노먼 맥캐인이었다. 「무시해. 네가 상대해주니 더 난리잖아.」 책을 슬쩍 내리고 옷장을 열고 옷을 꺼내는 우영의 다리를 힐끔 훔쳐봤다. 탄력있고 긴 다리가 쭉 뻗은 채 아른 거리자 또 다시 숨이 가빠왔다. 처음에는 기숙사에서 둘만 살면 좋겠다 싶어 들어왔지만 하루하루가 고문이었다. 차마 건들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보고만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특히나 저렇게 무방비하게 옷을 벗고 설칠 때는 차라리 다 포기하고 일을 저질러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 바라보다가는 진짜 사고를 칠 것 같아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자꾸만 우영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언젠가 날 잡아서 한 번 죽여놓을 거야. 장난도 한두 번이라야 참지.」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 「원래 그런 녀석이면 내가 안 이러지. 그 녀석이 쓴 소설을 보고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데. 그거 그 자식이 쓴 거 맞기나 해? 어디서 사온 거 아냐?」 우영이 노먼 맥캐인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영문학 수업 중에 그가 제출한 단편 소설 때문이었다. 처음 그 소설을 낸 게 노먼 맥캐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던 우영은 외로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흐르는 듯 부드럽고 은유적인 문장들이 최고라며, 이런 녀석이 같은 학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몸부림을 쳤었다. 하지만 곧 그 소설을 낸 학생이 노먼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그 소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곧 다시 찾아가 소설을 다시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노먼과 우영의 사이에는 통하는 게 있었다. 그렇게나 사람을 싫어하는 우영이 저렇게 끈덕지게 달라붙어 괴롭히는 노먼을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 받아줄 정도로, 말이다.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영은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노먼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게 우정인지 존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우영의 감정은 어떤지, 혹은 노먼이 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툭하니 미끼를 던졌다. 「그 자식이 널 사랑하나 보지.」 젖은 옷을 벗어두고 청바지와 흰 티셔츠로 갈아입은 우영이 그 말에 대경실색한 얼굴로 받아친다. 「돌았냐? 무슨 사랑이 그 따위야?」 「그러지 않고는 너무 끈질기잖아.」 「아서라. 그런 사랑 줘도 하나도 안 고마워. 그딴 장난에 휘둘릴까 봐?」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면?」 「지나가던 개나 주라고 그래. 난 연애는 안 할 거야.」 뜻밖의 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두고 우영을 바라보자 우영이 그의 책상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이쪽을 바라본다. 언제나와 같은 태연한 얼굴이지만 그 표정 안에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진심으로 연애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기쁜 반면, 또 불안해졌다. 아무와도 연애를 안 한다니 건들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자신에게는 횡재인 셈이지만, 그렇다는 건 자신과도 연애는 안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돌진해버린다 해도 우영은 받아줄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혹시 진짜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연애를 안 하다니? 왜?」 「그냥 적당한 나이 되고 자리 잡히면 에반의 어머님이 소개해주시는 한국 여자랑 결혼할 거야. 연애는 안해. 연애 같은 거 하면 헤어지잖아.」 무슨 순결 선언도 아니고, 조신한 귀족가문의 아가씨 같은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이 터졌다. 대체 몇 세기에 살고 있는 거냐, 이 녀석은? 「너, 결혼해도 이혼이 성립한다는 걸 모르냐?」 「그래도 싫어. 종신계약 아니면 난 안해.」 「어이, 잠깐. 연애가 무슨 보험이냐? 너, 연애를 무슨 생명보험으로 생각하는 거야?」 「나한테는 비슷해. 헤어질 거면 연애도 사랑도 안해. 사랑하다 버림 받으면 어떻게 살아?」 「그건 무슨 헛소리야? 사람이 만나다 헤어질 수도 있지. 연인과 이별한다고 죽는 사람은 없어.」 어쩐지 그 동안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잘 버틴다 했더니-덕분에 우영이 게이라는 소문이 고교시절 내내 따라다녔지만- 그런 이유였다니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연인에게 버림 받았다고 죽었다는 사람은 지금까지 못 봤다. 아니, 적어도 자신은 들어보지 못했다. 언젠가, 혹시라도 자신이 그에게 고백할 때를 대비해 베이스를 깔기 시작하자 우영이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팔짱을 끼고 앉으며 말한다. 「넌 버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몰라. 버림 받지 않고 버리기만 하던 사람은, 그 기분이 어떤 건지 몰라.」 「우영, 너…….」 「하여간 그래. 버림 받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돼. 내가 나쁜 아이라서 그런가, 내가 잘못해서 그런가, 내가 뭘 잘못 했을까,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인가.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이제 그런 생각하기 싫어. 지금까지 지겹도록 해왔어. 떠나는 사람 등 쳐다보고 있는 것도 싫고, 나 싫다고 버린 사람 생각하며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것도 싫어. 한번 더 버림 받으면 난 진짜 죽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 5년을 우영과 친구처럼 가족처럼 살아왔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그늘진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던 우영이다. 늘 웃으며, 파양당한 아이 특유의 비굴함이나 어색함을 보이지 않아 가족들 모두 그의 낙천적인 성품을 칭찬하고 좋아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했었다. 상대가 과한 호의를 보이면 반드시 그에 대한 인사를 하고 어떻게 답례를 할까 늘 고민하며, 그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척했다. 그게 단지 우영이 워낙에 원리원칙에 강하고 보수적인 성격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를 하고 학교생활 중에서도 흠 잡힐 것 하나 없이 완벽한 모범생이었던 이유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틈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와 조금이라도 실망을 시키면 누군가 그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던 거다. 「한국 속담 중에 참을 인(忍)이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이 있어. 세 번은 참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리고 보통 사람도 세 번 이상은 안 건들지. 두 번, 세 번까지는 건드려도 네 번째는 포기하니까 세 번만 참으면 어지 간 한 고난은 지나간다는 뜻이야. 나도 세 번을 참았어. 세 번까지는 참을 수 있었어. 하지만 네 번째는 아냐. 네 번째는 못 겨딜 거야.」 「……그래서 연애를 안 한다고?」 슬픈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던 우영은 그 질문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런 거지. 그럴 시간이 없기도 하고. 닉쿤, 넌 다 가지고 있으니까 모르겠지만……. 난 네가 갖고 태어난 모든 걸 내 스스로 얻어야 돼. 애초에 없는 가족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성취하고 얻어내야 돼. 돈도 직장도 가정도 모두 마찬가지야.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나무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막막하고 기가 차는 일인지 넌 몰라. 너는 리무진을 타고 라스베가스를 달리겠지만, 난 맨발로 물길을 뚫어 나무를 심고 황무지를 일궈야 돼.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연애 같은 거 할 여유가 없어. 넌 달릴 때 난 걸 어가야 돼. 감정의 소비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그리고 난…… 아마 사랑을 하면 그걸로 끝일 거야. 딱 한 번만 할 거야. 내가 날 알아. 난 두 번 사랑은 못해. 무서워서. 그러니까 내 인생의 사랑은 한 번뿐이어야 돼. 종신보험 밖에 없어.」 「네가 그런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어.」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난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네가 될 수 없어. 그리고 너도 내가 될 수 없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날 알겠어? 나도 아직 널 모르겠는데.」 우영의 말대로 자신은 그를 모른다. 하지만 분명 우영도 자신을 잘 모른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지금 그 말로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자신과 그 사이에 있는 벽을 두껍게 쌓고 그 벽을 절대 넘어설 수 없다는 선언을 하는 순간,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따라 달려오겠다는 우영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단 한 번의 영원한 사랑을 원한다는 우영을 위해 모든 감정들을 꾹꾹 노르고 참아야 했다. 섣부른 혈기로, 순간적인 충동으로 우영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어설픈 감정으로 시작했다가는 우영도 자신도 끝장이었다. 그래서 10년을 자신에게 주었다. 10년 간 만약, 10년 뒤에도 자신의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도 여전히 우영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때는 사정없이 들이받겠다고. 그때까지 자신의 감정이 유효하다면 그건 영원한 것이니, 그때는 제대로 고백을 하고 그를 자신의 리무진에 태워가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사흘 전 정확히 그 날로부터 10년이 지나갔다. 그러니까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확신과는 별개로 우영은 여전히 자신을 친구로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초조했다. 15년 간이나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친구의 자리를 지키며 바라보던 우영을 설득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을 이제야 인식한 것이다. 인정한다. 자신은 우영을 지나치게 만만하게 생각했었다. 열정적으로 대쉬하고 다가서면 우영의 성격에 곧 자신에게 넘어올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영의 가슴 속 깊이 박힌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을 치구로서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큰 난관은 사회적 지위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자신의 미래도 아니었다. 진짜 가장 큰 문제는 우영 케이먼의 마음을 여는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닉쿤은 축 쳐진 채 샤워를 마치고 나와 드레스룸으로 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리 우영이라도 화가 나 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멀쩡한 팔에 기브스까지 하곤 조급함에 시작하자마자 일 을 망쳐버렸다. 처음 병원으로 쳐들어가 멀쩡한 팔을 기브스해달라고 했을 때 브렛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거의 “너 미쳤냐?”라는 얼굴을 하는 그에게 좀 쉬어야겠다며 사정을 설명하고 겨우 겨우 오른손에 석고 를 바를 수 있었다. 일주일 후에는 반드시 떼겠다는 약속을 한 뒤 우영을 부르고 겨우 집에까지 끌고 왔는데, 그 걸 참지 못해 일을 그르쳤다. 애초에 부축을 해달라고 한 게 화근이었다. 쉽사리 집까지 따라오지 않을 것 같아 머리를 쓴 건 좋은데, 우영이 가까이 다가서면 흥분한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못했다. 그동안 이골이 날대로 나 이젠 괜찮다 여겼지만, 우영 의 피부가 닿고, 그의 체취가 느껴지자 미칠 것 같았다. 어떤 남자가 10년이나 참고 참으며 지켜만 보던 상대가 바로 눈앞에서 무방비한 채로 있는데 참을 수 있을까. 다 른 건 몰라도 우영도 그 점만은 인정해줘야 한다. 평생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을 것 같은 그 녀석은 모르겠지만, 그와 한 방을 쓰고 나란히 붙어 다니면서 자신이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그리고 그걸 이겨내기 위해 무슨 짓 을 했는지, 꼭 알아야 한다. 거기다 스스로에게 맹세한 대로 10년이나 참았으니, 그 점도 인정해줘야 한다. 물론, 우영과 연인 관계가 된 후의 일이지만. “어떻게 냉장고가 텅텅 비었냐?” 한숨을 내쉬며 응접실로 가는데 주방에서 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놀라 주방 쪽을 들여다보자 냉 장고를 뒤지던 우영이 툴툴거리며 계란과 베이컨을 꺼내든다. 그새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채였다. 그리고 옷도 이 아파트에 가져다놓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너, 뭘 먹고 사는 거야? 아무리 집에서 아침만 먹는다고 해도 심하잖아. 메이드는?” 분명히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영이 멀쩡한 얼굴로 요리를 하고 있자 닉쿤은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우영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 막 프라이팬을 꺼내던 우영이 이상하다는 듯 닉쿤을 쳐다본다. “귀신 봤어? 얼굴이 왜 그래?” “아니……. 그냥 주문하지?” “오래 걸리잖아. 가볍게 먹자. 약은?” 우영이 닉쿤의 오른쪽 손목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닉쿤은 대강 “뭐, 약은 안 좋으니까.”라고 얼버무렸다. 멀쩡한 팔에 기브스를 하고 진통제까지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부러진 거면 고통이 상당할 텐데, 괜찮아? 진통제나 소염제 처방 안 해줬어?” “주사 맞았어. 커피는 내가 내릴게.” 서둘러 말을 돌린 닉쿤은 넓은 아일랜드식 주방의 한쪽 구석으로 가 커피 메이커 앞에 섰다. 그리고 커피 메이커 가 있는 위쪽 선반을 뒤져 일회분이 포장이 돼있는 원두커피를 찾아 들었다. 어설픈 동작으로 물을 받고 커피를 넣다, 닉쿤은 어떻게든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아, 존 에스터가 굉장히 좋아하던데. 뭘 보낸 거야?” “그냥 화분.” “화분을 좋아하던가? 원예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냥. 그런데 왜?” “존이 날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런데 오늘 그 까다로운 존이 주말에 사냥을 하러 가자고 하더라고. 퇴원하는 대로 자기 별장으로 초대하겠다고. 너도 데리고 오라던데.” 이제 닉쿤이 보내는 선물과 카드는 닉쿤이 아니라 우영이 처리한다는 건 사교계 내의 모든 이들이 아는 비밀이 되어버렸다. 서덜랜드 회장도 그렇지만 존 에스터라는 거물까지 대놓고 그렇게 나오자 닉쿤도 더는 속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어차피 닉쿤은 그들을 형식적이나마 챙겨주는 것뿐이고, 그들 역시 닉쿤이 보내는 선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니까. 사실 그런 것들을 못마땅해 하던 거물들-특히 존 에스터-도 종종 있었지만, 그들도 이젠 닉쿤의 아래에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부하 직원이 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는 듯했다. “대체 뭐라고 한 거야? 존 에스터가 친절하게 주말 초대까지 하고 말야.” “그냥, 시를 보내줬지.” “뭐라고?” “Nine hundred and ninety-nine can`t bide the shame or mocking or laughter. Nut the thousandth man will stand by your side. To the gallows-foot- and after.” 우영이 읊어준 시의 한 구절에 닉쿤은 커피 메이커의 버튼을 누르곤 팔짱을 끼며 돌아섰다. “키플링?” “응.” “그거 너무한 아부 아냐?” “아부?” “그래. 내가 평생 당신 편이 되어주겠소, 이런 거 아니냐고? 존이 아부에 약한 줄은 몰랐는데?” 순간 베이컨을 굽고 막 계란을 깨넣으려던 우영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네 얘기 하냐.” “그럼?” “지금 에스터 그룹 동반 창시자인 그렉 위블리의 철강 산업 부실 경영 문제로 난리잖아. 대주주인 존은 입장 상 그를 밀어내야 하는데 워낙에 친한 친구이고, 또 에스터 그룹을 같이 일군 사람이라 난감해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그것 때문에 쓰러진 것 같길래, 시를 보내준 거야.” 그제야 알겠다는 듯 닉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렉을 버리지 말라는 뜻이야?” “그건 그 사람이 판단할 몫이지. 하단에 간단하게 썼거든. 당신의 인생 끝에 무엇이 가장 큰 재산으로 남았는지 묻는다면 뭐라고 할 거냐고.” “그건 너무 건방진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죽는 최후의 순간 떠오르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 너밖에 없더라고. 그리고 그게 내 인생 최대의 축복이자 최대의 자산이니까. 돈이나 명예를 죽어서 갖고 갈 건 아니잖아.” 진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지금 닉쿤에겐 그 말이 곱게 들리질 않았다. 방금 전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고도 너무나 멀쩡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친구 운운하는 우영이 어쩐지 야속하고 또 뭔가 알아채고 미리 방어막을 치려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너 뭘 알고 이러는 거야?” “뭐가?” “내가…….” “네가 뭐?” “……내가…….” “엘레나랑 자주 만나더니 너까지 문맹이 됐냐? 왜 말을 더듬어?” 접시 두 개를 꺼내 반숙으로 익힌 계란과 베이컨을 담고 튕겨져 나온 토스트 두 개씩을 담은 우영은 옆에 있던 트레이 위에 접시 두 개를 내려두고 냉장고를 열어 그 안에 있던 개별 포장이 된 치즈와 버터를 꺼내 올렸다. “커피는?” 우영의 물음에 뒤에 있던 커피 메이커를 돌아본 닉쿤은 딱 두 잔 분량 정도가 내려진 포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 다. “다 됐어.” “잔 꺼내줄게.” 수납장을 뒤지던 우영은 하얀색의 평범한 머그 잔 두 개를 꺼냈다. 하지만 그걸 본 닉쿤은 고개를 내저었다. “응접실에 있는 잔을 써.” “어, 그건 아니잖아.” “상관없어.” 닉쿤은 짤막하게 그렇게 답한 뒤 포트만 들어 트레이 위에 올린 뒤 트레이를 밀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우영은 멀뚱한 얼굴로 그런 닉쿤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라 함은 허르베지쿨가에서 특별 제작한 식기 중 하나로, 독일의 명인이 닉쿤을 위해 제작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부부 찻잔 세트였다. 셀레브리티들이라면 응당 에르메스, 라리끄, 로얄코펜하겐을 쓸 거라 여기지만 진짜 셀레브리티들은 브랜드가 아닌 개인에게 테이블 웨어를 주문한다.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명인의 손으로 만든,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테이블 웨어를 원하는 거다. 로얄코펜하겐 급은 파티에나 가볍게 내놓는 제품들이다. 닉쿤이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가구를 비롯한 가방과 식기들, 그리고 옷과 향수까지-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을 위해 최고의 명인들이 만들어낸 이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들이었다. 갑부들은 향수조차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이 아닌 프랑스의 향수업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만든다는 걸 열여덟 살 때 처음 알았다. 닉쿤 역시 사각형의 긴 병에 ‘Bliss Bless kiss’라는 이름이 새겨진 향수를 사용한다. 물론, 그 향수는 이 세상에 오로지 그 한 병 뿐 이고, 닉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일과 샤워코롱 역시 수작업으로 제작된 천연제품만 사용한다. 보통은 명인이 제작한 수공예품이라도 고유넘버를 적기 마련인데, 닉쿤이 쓰는 것들은 모두 그 아래 명인의 이름과 함께 닉쿤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 다른 식별 코드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그 부부 찻잔은 찻잔 아래 백금으로 닉쿤의 이름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탐낼 정도로 가치가 있는 상품이었다. 닉쿤의 말로는 그 장인이 만든 마지막이자 최고라 칭해지는 찻잔이었던 탓에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 라고 한다. 경매에 내놓으면 백 만 달라 이상은 너끈히 받을 거라 자신의 앞에서 자랑을 하며 유난히 아껴 늘 응 접실의 장식장 안에만 놓아두던 그 찻잔을 쓴다니, 이상하다기보다 충격적이었다. 혹시나 설마 하는 것들이 자꾸만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친다. 닉쿤의 태도가 너무 이상하다. 그가 하는 행동들, 그리고 말투 모든 것들이 이상하다. 다른 건 따지지 않더라도 당장에 그가 트레이를 끌고 간 것부터가 충분히 이상하다 칭할만하다. 물건을 떨어트려도 절대 스스로 먼저 줍는 법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렇 게 교육받고 자랐다. 처음 닉쿤을 만나고 그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과 타인에게 하는 행동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경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저택 안에 있는 가정교사 중 자세를 교정해주는 이들의 교육 방법을 듣고는 기절할 뻔한 기억도 난다. 인사를 해도 절대 허리를 숙이지 않고 고개만 15도 정도로 숙일 것, 사람들을 바라볼 때 절대 시선을 피하지 말 것, 의자에 앉을 때에도 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등을 편 채 목을 곧게 세울 것. 시선을 움직일 때 역시 목이 아닌 눈동자로 부드럽게 움직일 것. 절대 먼저 상대에게 악수를 청하지 말 것. 물건을 떨어트려도 먼저 줍지 말고 상대가 주어주길 기다릴 것. 상대가 아무리 짐이 많아도 짐을 들어주지 말 것. 아무리 귀한 선물이나 연인에게 선물할 꽃이라 해도 손에 짐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지 말것. 스스로 문을 열지 말 것. 일반적인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 교육 방법에 우영은 기함했다. 물론, 아이를 대할 때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다거나 여자를 에스코트할 때는 절대 먼저 앉지 말 것과 같은 상식적인 것들도 있었지만, 과반수이상이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과는 다른 것들이었다. 그리고 닉쿤은 배운 대로 행했다. 자신의 앞에서는 자연 스럽게 행동했지만 가벼운 티파티에서도 상대를 대할 때엔 늘 압도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에이먼이나 클랜, 클레어도 마찬가지였지만 체구나 분위기나 닉쿤만큼 우아하고 고상해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런 닉쿤이 트레이를 끌고 갔다는 사실을 우영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닉쿤은 다른 건 몰라도 뭔가를 들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짐이 흘러넘쳐도 도와주는 일이 없었다. 책이나 짐을 들어준 건 오히려 노먼이었지, 닉쿤은 절대 자신의 짐을 나눠들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닉쿤은 그의 가방과 식판 외엔 절대 손에 뭔가를 드는 일이 없었다. 교제중인 여성을 아무리 여왕처럼 대해준다 해도 그녀의 작은 클러치 한 번 들어준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줄 선물도 전부 배달시켰고, 꽃조차도 수행비서인 로이에게 들게 했다. 데이트 시에도 늘 비서를 함께 데리고 다녔기에 데이트 중인 여자에게 차문을 열어주는 것도 비서의 몫이었다. 그래, 닉쿤은 그런 녀석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닉쿤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린다. “너, 왜 안 하던 짓을 해?” 트레이를 끌고 나간 닉쿤을 따라 나온 우영이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담아 그렇게 묻자 닉쿤이 뭐 그리 대수냐는 듯 슬쩍 우영을 바라보곤 트레이를 끌고 응접실로 향한다. “안 하던 짓이라니?” “네가 트레이 끌고 다니니까 진짜 이상해.” “난 원래 친절한 남자야. 와인 한 잔 할래?” “커피 끓여 나와서 와인 얘기를 하냐? 그리고 토스트랑 베이컨에 웬 와인이야? 냉장고 좀 채워 놔. 우유랑 계란뿐이잖아. 샐러드도 없고.” “채워둘게. 집에서 식사할 일이 거의 없어서 비워둔 거야.” 식당이 아닌 응접실로 트레이를 밀고 온 닉쿤이 접시를 옮겨놓는 걸 보며 우영은 어쩔 수 없이 테이블 앞의 하얀색의 의자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하긴, 그렇긴 하다. 네가 집에서 식사할 일은 거의 없지.” “그래도 채워둘게. 네가 자주 와.” “내 집 놔두고 왜 너희 집엘 와?” “너희 집이라니? 너랑 나랑 집 구분할 사이냐?” 당연히 그럴 사이다. 사적으로는 친구라 해도 공적으로는 오너와 고용인의 관계다. 아니, 그런 건 차치하더라도 그와 자신은 네거 내거 구분 안하는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정서적인 거리는 가깝더라도 물리적인 거리는 멀다. 아니, 그렇게 유지해야 한다. “찻잔 꺼내올까?” “내가 꺼낼게.” 어차피 메이드가 매일 조심스럽게 꺼내 닦아 넣어두는 것이기에 딱히 세척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닉쿤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상했다. “그럼 내 잔 가져올게. 깜빡하고 내 걸 안 가져왔다.” “여기 있잖아.” “됐어. 한 벌에 오십 만 달라씩 하는 거 불안해서 어떻게 써?”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난 칠칠치 못해서 잘 깨먹는다고. 커피 잔 하나에 내 6년치 연봉을 날릴 생각은 없어.” 찻잔뿐 아니라 식기와 가구, 그리고 작은 장식품 하나하나까지 전부 수공예품들이었다. 이 집은 두고 내부만 털어도 수백만 달라는 나올 거다, 라는 생각에 우영은 문득 ‘돈 급하면 이 녀석 집이나 털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닉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시계와 넥타이 몇 개만 집어가도 몇 만 달라 어치다. 할 만한 짓이다. 물론, 소심한 자신의 성격 상 진짜 행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자기가 지금 앉아있는 의자는 얼마짜리일까 상상하는 사이 닉쿤은 어느새 진열장으로 다가서 있었다. “내 거면 네 거기도 해. 자기 걸 깨는데 누가 뭐래?” 유리 장 안쪽에 진열된 찻잔을 꺼내 들고 오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불안한 듯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 닉쿤도 자신의 태도와 어제와 오늘 확 다르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우영이 보기에 낯설고 이상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10년 간 참아오던 것들을 터트리자 제어가 되질 않는다. 지난 10년 간 일부러 우영에게 더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건 사실이다. 그렇게라도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수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온갖 여자들을 다 만나봤고-사실은 남자도 만났었다.- 대학 졸업 후엔 거리를 두기 위해 일부러 필라델피아까지 날아가 워튼 스쿨에 입학했다. 우영이 그런 자신의 태도에 섭섭해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나름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래도 잊지 못하는지 두고 보자고, 이렇게 해서도 안 되면 할 말 없는 거다, 라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준 10년 동안 진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잊기 위해 노력했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건 운명이라고 여기고 순응하겠다 결심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결국 포기가 안 되었으니 그간 못해준 걸 다 해주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우영은 그에 응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애초에 남이 주는 건 사탕 하나라도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조금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 두 개의 잔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와 그 위에 내려둔 닉쿤은 우아한 움직임으로 포트를 들고 잔에 커피를 따랐다. 커피를 따르는 모습조차 완벽한 자세로 교정 받고 자란 이가 하면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닉쿤이 하니까 근사한 건지도 모르겠다. 손의 움직임이나 팔을 드는 각도라든가, 그 사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시선의 중심이 나, 모두 우아하고 품위 있다. 오른손에 기브스를 한 채인데도 물 흐르듯 부드럽고 유연하다. 문득 기브스를 한 닉쿤의 팔을 바라본 우영은 진짜 진지한 얼굴로 닉쿤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닉쿤, 병원 가보자.” 막 우영의 찻잔에 커피를 따르던 닉쿤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우영의 눈을 바라봤다. “뭐?” “너, 아무래도 오른손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것 같아.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진짜 크대. 다친 순간에는 몰라도 나중에 보면 점점 이상한 짓을 한다잖아. 병원 가자.” 우영은 진심이었다. 아주 진지했다. 그렇지 않고는 닉쿤이 저럴 리가 없다. 하지만 닉쿤은 진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우영의 반응이 참 참신하고 재미있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자신을 의심하는 걸 보니 도저히 웃을 기분이 되지 않는다. “……머리는 안 다쳤어. 걱정 마.” “아냐. 내가 보기엔 너 많이 다친 것 같아.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보면 다쳤을 거야. MRI도 다 잡아내는 거 아 니다, 너? House M.D를 보니까 아주 작은 종양은 못 잡아낸대.” 교통사고에 이어 이젠 자신을 뇌종양 환자로 모는 우영을 보며 닉쿤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너, 집에서 텔레비전 좀 그만 봐. 넌 지나치게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어.” 호러 영화에 로맨스 영화에, 시즌마다 드라마들을 줄줄이 챙겨보는 우영의 생활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현실이 싫어 가상 세계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하여간. 가보자, 응?” “머리엔 전혀 이상 없어. 그만하고 식사나 해.” “아냐. 난 정말 걱정 돼.” 오전에는 엘레나가 교회에 하자더니 오후엔 우영이 병원을 가잔다. 이러다간 진까지 엑소시즘하자고 난리칠 것 같아 닉쿤은 베이컨 한 조각을 포크에 찍어 우영의 입 안에다 넣어주었다. “먹어.” “……먹긴 하겠는데…….” “일단 먹자.” 포크를 내려두고 왼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마시며 닉쿤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우영과의 사이가 더 이상 어색해 지지 않은 건 좋은데, 아무래도 이 관계를 한 번쯤은 전복시킬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다. 10년 간 절제를 위해 정해놓은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그 긴 시간의 극간을 뛰어넘는 게 얼마나 힘들지를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게 문제였다. 시간의 강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몰랐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식기를 세척기에 넣은 우영은 당연한 듯 자신의 가방을 찾아들었다. “나 갈게. 혹시 안 좋아지면 전화해.” 양복과 구두는 아예 두고 가기로 했다. 내일 오전에 메이드가 와서 정리해줄 테니, 닉쿤의 집에 갖다 둔 청바지 와 티셔츠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우영은 그 차림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검은색의 서류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 다. 닉쿤은 그게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리며 우영의 뒤를 따랐다. “진짜 가려고?” “그럼 가야지. 가서 세탁물도 찾아야 하고, 집 정리도 좀 해야지. 밤에는 나가봐야 하고.” “어딜?” “영화 보러 간다니까.” “혼자서 무슨 재미로 영화를 봐?” 역시나 닉쿤은 우영이 혼자 영화를 보러갈 거라는 사실을 눈치 챈 듯했다. 영화를 보고 싶으면 필름을 받아와 집 에서 보면 될 거 아니냐고 말하는 닉쿤에게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혼자라도 영화관을 찾는 행위를 납득시 키긴 어렵다. “……혼자 보는 재미야.” “무슨 영환데?” “무슨 영화라고 하면 필름 사다 틀어주려고?” 닉쿤은 아파트 안에 100㎡에 달하는 룸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영이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할 때마다 번번이 배급사를 알려주면 필름을 받아다 틀어주겠다고 해 우영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 전화 한 통만 하면 배 급사에서 필름을 들고 달려 와주는 거야 고맙지만 우영은 겨우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짓을 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지금 전화하면 필름 가져올 거야. 여기서 봐. 그리고 내일 같이 출근하면 되잖아.” “싫어.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지.” “57층이 매물로 나왔던데 사서 거길 통째로 영화관으로 만들까?” 다른 사람이 했다면 어디 해보라고 말하며 웃고 말았겠지만 닉쿤이 하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영화관을 통째로라도 사고도 남을 녀석이라, 진짜 조금도 비웃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았다. “……헛소리 그만해. 너 영화 좋아하지도 않잖아.” “헛소리가 아냐. 뭐 하러 멀리까지 나가서 영화를 봐?” “됐어. 난 그냥 혼자 나가서 팝콘 사들고 빽빽거리는 애들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나 볼래. 갈게. 내일 여덟시 반이다. 시간 지켜.” 우영은 금세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마지막으로 약속 시간을 주지시켰다. 닉쿤이 약속 시간을 어길리야 없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우영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닉쿤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 며 현관 옆에 있던 키 박스에서 차 키를 하나 꺼내 건넸다. “……차 갖고 가.” “됐어. 그냥 걸어가도 돼.” “갖고 가. 어차피 주차장에서 노는 차야.” “두 다리 멀쩡한데, 뭐. 쉬어. 도착 전에 전화할게. 정 몸 안 좋으면 브렛한테 전화하고. 간다.” 1층 버튼을 누른 우영은 그대로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문이 닫히자 천천히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마음이 너무 시끄럽다. 탕-- 탕탕탕- 시끄럽게 울리는 노크소리에 침대에서 늘어져자던 우영은 겨우 눈을 뜨고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전자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 20분이었다. 블라인드 밖으로 희미한 햇살은 보이지만 완전히 해가 뜬 시간은 아니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결국 보고 싶던 영화도 못 보고, 집안에 틀어박혀 끙끙 대다 새벽 3시에나 겨우 잠이 든 터라 우영은 칭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가 현관 앞에 섰다. “누구세요?”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쿵쿵거리는 문소리를 들으며 우영이 묻자 밖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야.” 에반이었다. 에반이 이 시간이 무슨 일인가 싶어 삼중으로 걸어둔 열쇠를 열고 문을 밀어 열자 어두운 복도 안에 우뚝 선 에반의 눈이 순식간에 커진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잠도 안 자?” “……넌 눈이 왜 그래?” “응?” “눈이 안 보인다.” 그 말에 눈을 제대로 뜨려 애를 쓰던 우영은 퉁퉁 부어 반밖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댔다. “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난 아예 못 잤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팔자 늘어졌구나.” 말투에 칼이 박혀 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듯한 에반의 목소리에 우영은 겨우 눈을 제대로 뜨며 그에게 물었 다. “또 왜 그래?” “눈 번쩍 뜨이게 해주랴?” “냉동실에 팩 있어.” 우영은 잠을 조금만 못 자도 붕어 눈처럼 눈꺼풀이 탱탱 붓는 체질이라 냉동실에는 늘 아이스팩이 준비되어 있었 다. 어차피 깬 거 얼음찜질이라도 할 셈으로 우영이 먼저 돌아서려는데 여전히 복도에 우뚝 선 에반이 우영의 눈 앞에 신문을 들이민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반밖에 떠지지 않았던 우영의 눈이 순식간에 번쩍 뜨였다. “잠이 확 깨지?” 에반의 말에 신문을 받아든 우영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신문 1면에 실린 커다란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확 실히 눈은 확 떠졌다. 경악은 붓기도 이긴다. 그리고 에반의 잔소리에 대한 공포감은 수마도 몰아낸다. “들어가자.” 한바탕 잔소리를 할 기세의 에반을 슬쩍 보며 우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만은 저 잔소리를 피할 방 법이 없을 듯했다. “……들어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얌전히 주방 겸 식당으로 들어선 우영은 뒤 따라오는 에반의 걸음 소리를 들으며 불을 켜 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시선은 신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진 위에 실린 타이틀을 보며 우 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Secret Secretary」 뭐라고 해야 할지, 참 묘한 기분이었다. 커피 메이커에 물을 붓고 막 커피를 부으려던 우영은 제법 정신이 들자 다시 한 번 사진을 자세히 살피고는 쓴 웃음을 흘렸다. “사진 잘 찍었네. 광학 렌즈 쓴 거지? 어떻게 주변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안 나왔냐?” 그 사진은 분명 닉쿤의 아파트 앞에서 그를 부축하는 자신과 그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아파트 건물 이 나 큰 도로는 작게 처리되고 자신과 닉쿤만 아주 선명하고 크게 나와 마치 좁고 읍침한 골목길 안에서 둘이 포 옹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더 재미있는 건 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진만 보자 면 사진의 왼쪽 끝에 차문 앞에서 자신에게 기댄 닉쿤과 자신이 은밀한 골목길 안에서 끌어안고 있는 듯 보인 다 . 거기다 닉쿤의 얼굴 각도가 절묘하다. 자신의 목가에 얼굴을 묻은 듯 보인다. “포토샵으로 작업해준 거지. 밍밍한 사진은 재미 없어서 못 쓰니까.” “하긴 브리트니 스피어스 보니 파파라치 사진하고 영상에 나오는 거랑 몸매가 다르더라고. 왜 이렇게 고무줄 인 가 해서 보니 사진이 고무줄이더만.” 싱크대 쪽에 기대선 우영은 천천히 아래의 기사들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사의 내용인 즉, 닉쿤의 오래된 연인이 사실은 그의 비서였더라, 저렇게 친밀하게 붙어 지낸다, 사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은 호모 퍼그였더라, 그 런 내용이 주된 것이었다. “진짜 꿈보다 해몽이 좋네. 커피 마시지?” 우영이 거의 다 내려온 커피를 머그 잔에 따라 한 잔을 먼저 테이블에 앉은 에반에게 건네자 에반이 잔을 받아들 며 신경질적인 얼굴로 우영을 돌아본다. “넌 뭘 믿고 그렇게 태연해?” “재밌잖아. 그냥 다들 재미로 그러는 거야. 일일이 반응하면 이쪽만 우스워져. 여차하면 닉쿤한테 오늘 중에 다 른 여자랑 데이트 한 번 하라고 하지,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닉쿤이 누구든 만나면 금세 사그라지겠지.” 문제는 닉쿤이 그런 각오를 다진 뒤에 다른 여자를 만날까 하는 것이었지만 에반은 굳이 그 문제는 입에 담지 않 았다. 그저, 두 번째 토픽을 터트릴 준비를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이 새벽에 여기까지 온 거야? 닉쿤이 타블로이드 1면에 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닌데, 뭐 .” “네가 걱정돼서 온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알려줄 것도 있고.” “뭐?” 다른 잔에 자신의 커피를 따르며 우영이 무심히 묻자 에반이 두 번째 문젯거리를 터트렸다. 첫 번째는 태연했지 만 두 번째는 아무리 우영이라도 그다지 태연하진 못할 것이다. “그 사진을 누가 찍은 건지 알아?” “파파라치겠지.” “그래, 파파라치지. 그런데 누군지 아냐고.” “브래스먼? 아니면 캐니?” 우영이 다 따른 잔을 들며 헬리콥터와 온갖 장비들을 다 동원해 사진을 찍어대는, 한 번 걸리면 절대로 못 빠 져 나간다는 악명 높은 헐리웃의 유명 파파라치의 이름을 대자, 에반이 침묵한다. 그 이상한 적막감에 우영은 안 좋은 예감을 받은 듯 등을 굳혔다. 그리고는 커피잔을 들고 돌아서며 에반을 바라봤다. 우영의 얼굴은 웃을 듯 말 듯 아주 이상한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벌레 씹은 얼굴이었다. “설마…… 노먼 맥캐인이라는 얘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맞아.” 혹시나 하던 게 역시나가 되자 우영은 순간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타일 바닥 위로 두꺼운 머그컵의 잔해들이 구르며 막 내린 뜨거운 커피라 슬슬 흐르는 걸 본 에반은,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대체, 너 그 녀석이랑 무슨 원수를 진거야?” “내가 무슨 원수를 져? 아니 원수를 져도 원한을 가진 건 나지!” “그럼 닉쿤이야?” “그렇겠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으니까! 노먼 맥캐인, 이번엔 진짜 죽여버리겠어!” “맥캐인가의 장남을 어떻게 죽여? 그보다, 너한테 연락 없었어? 항상 사고친 전후로 네게 연락하는 것 같던데. ” “아직 연락 없어. 오기만 해봐! 당장에 목을 매달아서 처형해버릴 테니까!” “맥캐인가 장남이라니까. 하여간 연락 오면 나한테도 알려줘. 내가 그 친구 한번 만나봐야겠으니까.” “만나서 말할 것도 없어! 그냥 죽여버려야돼, 그런 놈은!” 불을 뿜을 듯 화를 내는 우영을 보며 에반은 대강 사정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에는 혹시나 혹시나 했었다. 노먼이라는 친구가 유난히 우영에게만 짓궂게 굴었던 점이나 닉쿤의 결정적인 약점만 잡아 노리는 거나, 좀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어제 닉쿤의 태도와 지금 우영의 태도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노먼 맥캐인과 닉쿤 벅 허르베지쿨은 학창 시절부터 연적이었던 모양이다. 서로 말은 안 하고 눈치만 살폈지만 연적이었던게 분명하다. 허르베지쿨 가의 고문 변호사가 잭 맥캐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한 관계여야 하지만 서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이유는 우영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사람 사이의 연계점은 우영뿐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런 둘의 관계가 틀어진 게 대학시절이라고 한다면, 역시나 우영이다. 두 사람 다 애정 표현 방법이 삐뚤어진 편이라고 생 각하면 아주 쉽게 결론이 도출된다. “하여간 너 오늘은 출근하지 마. 파파라치들이 우굴거릴 거야.” “피하면 더 티나잖아.” “그건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출근할거야. 그리고 닉쿤 일정 조정해서 데이트 시켜 버릴 거야!” “각오는 좋다만……. 저 사진은 어쩌다 찍힌 거야?” 에반은 그제야 가장 궁금하던 바를 물었다. 닉쿤이야 그렇다치고 우영은 함부로 사람의 옆에 붙는 법이 없는 성격이다. 어릴 때에도 필요 이상의 접촉은 피하던 녀석이 저렇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면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대체 닉쿤이 무슨 사기를 쳤길래 우영이 저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나 궁금해 묻자 바닥에 떨어진 컵조각을 줍던 우영이 퉁명스레 답한다. “닉쿤, 머리를 다친 것 같아.” “응?” “급정거 해서 오른손이 부러졌다는데 내가 보기엔 머리를 다친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오늘 병원에 데려가 보려고 했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더니 열이 펄펄 나더라고. 숨소리도 거칠고.” 불행히도, 에반은 그 설명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이해하는 자신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여간 이해는 됐다. “……네가 부축한 뒤에 열이 났지?” “응.” “……알겠다. 병원에 데려가 봐라.” “오전 스케줄 좀 비우고 데려가 봐야지.” 진짜 진지한 얼굴로 그 사이비 환자의 뇌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하는 우영을 보며, 에반은 진심으로 닉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아무래도 두 녀석의 타이밍이 기차게 어긋나버린 듯했다. 아니, 그보다는 닉쿤의 그간 행적 덕에 우영은 닉쿤의 태도 변화를 뇌 이상으로 인지하는 듯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지만, 닉쿤의 입장에서는 진짜 자기가 판 구덩이에 파묻히는 꼴이니 얼마나 비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도 결국 자기 잘못이니 남 탓할 건 없다. 자기 무덤을 포크레인 갖다 파놨으니 그저 고이 눕는 수밖에. 그리고 사실, 조금은 그 얄미운 왕자님이 당황하는 꼴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녀석이 우영이 병원에 끌고 가는 순간 무슨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니 재미있어 죽을 것 같았다. “그래, 꼭 데리고 가봐.” “응.” “준비해라. 나랑 같이 나가자.” 그 말에 다시 벽시계를 본 우영은 이제 겨우 5시 40분이 될까 말까 할 시간임을 확인하곤 인상을 썼다. “너무 이르지 않아?” “이르긴. 아침 시간을 빼느니 차라리 아침 일찍 병원으로 데려가는 게 낫지. 내가 브렛한테 전화해놓을게. 식사하고 준비하고 나가면 6시니까 7시까지 도착한다고 해둘게.” “아, 그럼 되겠다. 부탁할게. 스케줄 조정하느니 일찍 가는 게 낫겠다.” “그래.” 우영이 부지런히 바닥에 흐른 커피를 닦고 욕실로 향하는 걸 보며 에반은 아주 드물게도 기분 좋은 듯 미소지었다. 너, 한 번 당해봐라. 우영이 샤워하는 사이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다시 신문을 훑어보던 에반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알림인가 해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았다. 거실이 아니라 침실인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으로 보이는 침실로 간 에반은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끄려 그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막 알람을 끄려는데 알람이 아니라 전화였다. 닉쿤이였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에반은 이대로 두면 우영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할 것 같아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막 우영은 샤워 중이라고 하려는데 안에서 나직한 닉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The moment I wake up.」 에반은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건가 했다. 아니 닉쿤이 아닌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음성은 분명 닉쿤의 목소리가 맞았다. 「Before I put on my makeup. I say a little prayer for you…….」 생전 처음 듣는 거지만 분명히 닉쿤의 목소리가 맞다. 기가 막힌 상황에 에반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용쓴다.” 비웃음이 역력한 그 말에 갑자기 닉쿤의 노랫소리가 뚝 끊겼다. 「……에반?」 닉쿤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벼르고 벼르다 딱 우영이 일어날 법한 시간에 맞춰 알람 대신 노래를 불러주겠다는 노력과 정성은 가상하지만 오늘은 때를 잘못 맞췄다. 「당신이 왜 이 시간에 우영의 핸드폰을 받아? 우영은?」 “샤워 중.” 「뭐?」 “출근 준비 중이라고. 왜 그렇게 놀…….” 뭘 그렇게 놀라냐고 하려던 에반은 문득 이 인간이 자신과 우영이 그런 사이라고 오해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보통 사람의 가치 기준은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눈에 예쁘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예뻐한다 생각한다. 특히나 닉쿤처럼 취향이 아주 빼어나다 자부하는 인간들은 그의 기준이 이 세상의 기준이 라 고 보는 경향이 심하다. 하지만 아무리 닉쿤의 눈에 우영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해도 자신의 눈에는 그냥 불쌍하고 순해 보이는 동료이자 동생일 뿐이다. 문제는 지금 닉쿤에게 개인적 견해와 취향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왜 우영하고 이 시간에 같이 있어? 뭐야? 거기서 자기라도 한 거야?」 “……방금 왔어. 네가 신문에 우영 얼굴 드러내준 덕에 눈뜨자마자 신문 사들고 달려왔다.” 「아, 떴어? 1면이야, 2면이야?」 뭐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1면 2면을 찾냐, 욕해주고 싶은 마음은 한이 없지만 화를 내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알기에 에반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1면이야. NY daily.” 「당연히 그래야지.」 “1면에 실리니까 좋냐?” 「2면보다야 1면이 낫지. 2면에 실었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 거야.」 “그래, 좋겠다.” 대체 셀레브리티들의 머리통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라고, 에반은 생각했다. 보통 이런 추문이 일면 짜증을 내기 마련인데 자신의 기사가 몇 면에 실렸는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종들의 뇌구조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나중에 해부해 보고 싶을 정도다. “하여간 잘 됐다. 일어났으니 준비하고 기다려. 우영이 곧 데리러 갈 거야.” 「이 시간에?」 “7시쯤 도착할 테니 준비하고 있어. 같이 아침이나 먹자.” 「이건 또 무슨 파격 서비스지?」 네 뇌 사진 기념 서비스, 라고 말하려다 에반은 말을 돌렸다. “어차피 우영이 너랑 다녀야 할 거고, 둘만 다니면 입방아들 찧을 테니 내가 직접 껴서 같이 얼굴 팔아주겠다는 거야. 그렇다고 당장 너랑 우영이 떨어지면 다들 더 의심할 거 아냐.” 「그것뿐이야? 당신이 겨우 그 정도로 이런 상황에 우영하고 날 붙여두겠다고?」 “나도 함께야.” 반드시, 기어이, 병원에 끌려가 뇌 사진을 찍는 닉쿤을 보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힘을 주어 그렇게 말하자 닉쿤이 여전히 시큰둥한 투로 중얼거린다. 「알았어. 7시 도착이야?」 “그래.” 「우영 예쁘게해서 데려와.」 “뭘 해도 안 예뻐. 내가 리차드 테일러(반지의 제왕과 킹콩의 특수효과 담당)가 아닌 이상 걔를 예쁘게 만들기는 힘들어. 아니, 그 사람이라도 힘들걸.” 단아하고 부드러운 미모기는 하지만 예쁜 것과는 거리가 먼 외모였다. 굳이 beasutiful하다는 표현을 쓰자면 나 름대로의 개성과 분위기가 있으니 고개를 끄덕거리겠지만 pretty나 gorgeous하다고 묻는다면 고개를 내저을 수밖 에 없다. “7시에 도착할 테니 정확히 기다려. 애먹이지 말고.” 「걱정 마. 끊어.」 딱 잘라지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기자 에반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다시 사이드 테이블 위에 두곤 침 실에서 빠져나왔다. 에반이 방에서 나오는 것과 동시에 우영 역시 바스 가운을 입은 채 욕실에서 나왔다. 우영을 보자마자 에반은 닉쿤의 전언을 전했다. “닉쿤한테 전화 왔어. 7시까지 기다린대. 같이 아침 먹자고 했어.” “그래? 잘 됐네.” “준비하고 나와. 아, 그런데 I say a little prayer for you 좋아해?” “갑자기 웬 노래 타령이야?” “그냥 떠올라서.” 닉쿤이 무작정 그 노래를 부르진 않았을 거다. 오래 알아온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니, 어쩌면 우영이 흘러가는 투로라도 아침에 그런 노래로 깨워주는 사람이 좋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들 어 묻자 우영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좋아해. 예전에 My best freind`s wedding 볼 때 그 노래 나오는 장면을 계속 돌려봤거든. 있잖아, 루퍼트 애 버렛이 모임 자리에서 줄리아 로버츠 옆에서 노래 불러주는 부분.” “너 줄리아 로버츠 영화를 몇 번이나 본 거야?” “아, 그 영화는 한 다섯 번? 재밌잖아.” “오래된 친구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깽판 놓는 인지부조화증 여자 얘기가?” “인지부조화? 푸하하하, 그거 말 되네.” 우영이 웃으며 막 그의 방으로 들어서려는 모습을 보며 다시 주방으로 가려던 에반은 생각이 난 김에 못을 박아 두기로 했다. “넌 그러지 마라.” “응?” “인지부조화.” 막 방문을 열려던 우영이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에반을 돌아본다. “……에반, 요즘 너무 예민한 거 아냐?” “예민할 수밖에. 너랑 닉쿤이랑 잘 지내는 건 좋지만 그 이상은 좋지 않으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안 된다 생각하면 인정하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닉쿤은 그런 걸 할 줄 모르니까 너한테 말하는 거야.” 아마 뭔가 안 좋은 상황이 닥쳤을 때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건 우영이 아니라 닉쿤일 것이다. 우영은 늘 조심스 럽고 이성적인 편이니 그럴 염려가 없지만, 닉쿤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사고를 가지고 자란 이는 실패나 실 연 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닉쿤의 그 성격에 한 번 하겠다 결심하고 달려든다면 그걸로 끝이다. 문제는 우 영이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인데, 우영은 아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닉쿤은 말 그대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엔 우영이 그를 현실로 이끄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바닥을 깔아주는 거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아마 아주 나중에는 우영도 그 의미를 알아챌 것이다. “준비하고 나와. 커피 준비해줄게.”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에반이 화제를 돌리자 우영이 순순히 그의 방으로 들어선다. 주방 구석으로 가 커피포트에 물을 받으며 에반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에반도 좋아서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기 를 쓰는 게 아니다. 그냥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닉쿤은 모르겠지만 우영 에게는 너무 좋지 않다. 진짜 닉쿤이 평생을 책임질 각오를 했다 해도 아무리 봐도 우영이 너무 손해다. 성격이 라도 대범하다면 모를까 겉으로는 단순하고 밝아 보여도 속은 여리고 소심하기 그지없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 고 자신의 평판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니만큼 닉쿤과의 관계는 절대로 피해야 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우영이었고, 우영을 위해 에반은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밖에 없 다. 결국 최후에 만신창이가 되는 건 우영일 테니까. *** “이건 또 무슨 짓이지?” 아침 일찍 브렛의 병원으로 끌려온 닉쿤은 짜증스럽다는 투로 그렇게 말을 던졌다. 아침부터 에반과 우영 둘이 뭔가를 작정을 한 듯 함께 와 덤벼들더니 최종 도착지는 병원이었다. 다행히 에반은 차를 갖고 와 따로 움직였지만 바로 뒤에 차를 주차한 채였다. 확실히 둘이 짠 거다. 이건, 엘레나보다 더 질이 나쁘다. “일단 MRI 한 번만 찍어보자. 아무래도 너 이상해.”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며 우영이 진짜 진지한 어조로 그렇게 말을 걸자, 닉쿤은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도 못한 채 가만히 우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도 어이가 없었던 건가 하면 비참한 반면 또 오기가 든다. 너 내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이 따위로 나오냐?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돌아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평소에 어땠길래?” “너 원래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체질이잖아. 열이 난 것도 그렇고 호흡도 너무 거칠었단 말야.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잖아.” “예를 들어?” “네가 직접 커피를 내린다거나 트레이를 민다거나, 아니면 그 아끼던 잔을 꺼낸다거나 하는 거 말야.” “커피 정도는 보통 내가 내려 마시고, 트레이는 내가 밀고 싶어서 민거야. 그리고 커피 잔은 진열만 해놓기 아까웠던 거고. 그게 내가 병원에 와서 MRI를 찍을 이유가 된다고?” “하우스에서 보면…….” “그 놈의 드라마 타령 좀 그만해!” 짜증이 나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우영이 순식간에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제야 닉쿤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영이 평소에는 바락바락 말대답도 잘하고 농담도 잘하지만 누가 큰소리를 내면 금방 주눅이 든다는 걸 깜빡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너한테 화내는 게 아니라……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냐고.” “급정거했다며? 진짜 머리라도 다쳤으면 어쩌려고 해? 한번만 하자. 응? 걱정돼서 그래.”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는 게 자신의 몸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진짜 감정을 가졌을까 봐 걱정된다는 듯 들려 닉쿤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로 병원에 끌고 올 정도라면 진짜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간 당장에 정신병원에 감금시킬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영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물론, 아직까지 자신의 태도가 미적 지근하긴 하지만 우영의 저런 태도로 보아 세게 나갈 수도 없다. 진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칼을 뽑았으니 휘두르긴 해야겠는데, 상대가 너무 좋지 않다. “……좋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는데 못해줄 건 없지. 대신 넌 뭘 해줄 건데?” “응?” “내가 네 말에 따르면 너도 뭔가를 해줘야 할 거 아냐?” 주고받는 건 뭐든 명확히 하는 우영의 성격을 알기에 슬쩍 떠보자 우영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뭘 해줄까?” “주말 데이트.” “응?” “주말에 시간 내. 내 스케줄도 비우고. 데이트 하자.” 그 말에 순간 우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데이트’라는 말이 아주 거슬린 얼굴이었다. 그 속내가 훤히 보여 닉쿤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데이트라는 말에 저 정도인 걸 보니 섹스하자고 하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나랑?” “응.” “안 바빠?” “바쁘지만 시간 낼 테니까, 너도 시간 내.” “내가 왜 너랑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내가 하고 싶으니까.” “……꼭 해야 돼?” “물론.” “너랑 다니는 거 싫은데…….” 노골적으로 싫은 얼굴을 하는 우영의 얼굴에 닉쿤은 심장이 지끈하는 느낌을 받았다. 겨우 하루, 아니 이틀간 함께 데이트를 하자는데 저런 얼굴을 하다니, 아무리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라도 상처 받을 수밖에 없다. 이쪽은 몸이 달아 죽겠는데,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고, 더 다가가고 싶고, 옆에 있으면 안고 싶어 미치겠다는데 상대는 데이트 신청에도 시큰둥하다. 이 이상 비참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비참하다. “너, 데이트하자는 상대에게 그렇게 대놓고 같이 다니기 싫다고 하는 거 너무 무례한거 아냐? 나 상처 받았어. ” “너랑 다니면 사람들이 자꾸 따라다니고 쳐다보잖아.” 그도 그렇긴 하다. 어차피 닉쿤도 우영과 함께 브로드웨이를 누빌 생각은 없었다. “좋아. 그럼 집에서 보내자. 영화 보고, 식사하고, 얘기하고. 어때?” 주말에 함께 앉아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떠는 건 대학시절까지 늘 하던 일이었기에 우영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답을 내주었다. 닉쿤이 워튼 스쿨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종종 함께 주말을 보냈었다. 물론, 그때는 클랜이나 클레어가 끼어 있긴 했지만 둘만 있다고 다를 건 없다. 데이트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별것도 아니었다. “뭐, 좋아. 그런 거라면.” “좋아. 내리자.” “응.” 닉쿤이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창가의 버튼을 누르자 차 문이 열린다. 먼저 나서는 닉쿤을 따라 우영 역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바로 뒤에 차를 주차한 에반이 문을 열고 내리며 묻는다. “결정내린 거야?” 에반은 여전히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의 톤은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이게 재미있어 죽겠는 모양이다. 그런 에반을 잠시 바라보던 닉쿤은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병원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듯 우영을 돌아본다. “그래. 올라가. 아, 우영. 커피 좀 사다줄래? 검사하고 곧장 마시게.” “알았어. 에반은?” “나도 부탁해.” 어차피 검사 후 아침을 먹으러 갈 테지만 식사를 할 식당은 병원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기에 우영은 얌전히 돌아서 찻길 건너편에 있는 테이크아웃 점을 향해 걸었다. 우영이 멀어지자 병원 건물 내로 들어서며 닉쿤은 옆에 선 에반을 잡아먹을 듯 돌아봤다. “당신, 뭐하자는 거야?” “뭐는? 잘 알아두라는 거지.” “뭘?” “네가 우영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무슨 헛소리야?” “우영의 행동이 설명해주잖아. 네가 우영을 사랑한다는 건 머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행동이라고. 당사자인 우영이 저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 것 같아?” 아픈 데를 사정없이 찌르는 에반의 말에 닉쿤은 지끈하는 심장의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 겨우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아직 날 믿지 못하는 것뿐이야.” “믿지 못하니 이 정도지, 네가 진심인 걸 알면 저 녀석은 신발 벗어들고 도망칠 거야. 내가 장담해.” 닉쿤도 그럴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다. 우영이 이게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자신이 그를 갖고 노는 거라 여기며 상처 받을 것이고, 또 진심이라고 생각하면 무서워서 한국으로 내뺄지도 모른다. 알고 있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리고 아마 조만간에 자신의 진심도 알아챌지 모른다. 눈치는 기차게 빠른 녀석이니까. “……그래서 어쩌라고? 무슨 대책이라도 있어?” “대책이야 하나뿐이지.” 그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에반은 4층 버튼을 누른 뒤 문이 닫히자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처럼 살아. 늘 그래왔듯이 주마다 애인을 갈아 치우는 바람둥이에 타블로이드 1면에 실려야 만족하는 골 빈 재벌로 살라고. 와인 한 잔 마시러 전용기 타고 프랑스로 날아가고, 스시가 먹고 싶으면 요트를 타고 일본항으로 가서 먹고, 보고 싶은 뮤지컬이 있으면 극단을 통째로 사들여서 연기하게 하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다이아몬드를 받쳐서 같이 자고, 그냥 그렇게 살라고. 너는 너대로 우영은 우영대로. 너는 네 세계에서 우영은 우영이 사는 세계에서.” “내가 겨우 그런 답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그럼 무슨 답을 원했는데? 내가 당장 너희 둘 잘 살라고 꽃잎을 뿌려줄 줄 알았어? 가는 길이 뻔한데, 어떻게 될지 훤한데 내가 약 먹었어?” “당신한테 이해 구한적 없어.” “난 어차피 죽어도 이해 못해. 그냥 충고하는 거야.” 그 사이 4층에 닿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내리며 닉쿤이 한숨을 내쉰다. “어제는 엘레나가 엑소시즘을 하자더니 오늘은 병원? MRI? 기가 차서.” “나도 진짜 신부님이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느긋하게 뒤를 따르는 에반의 말에 닉쿤은 시선을 돌려 에반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답지 않은 무겁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내뱉는다. “뇌 촬영이 아니라 뇌수술을 하고 신부님, 부처님, 알라신이 다 와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내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한 줄 알아? 10년이야. 10년 동안 포기하려고 별 짓을 다 해봤어. 우영하고 떨어져도 살아봤고, 일부러 정 떼려 매정하게 대하기도 하고, 다른 여자도 수없이 사귀고, 할 수 있는 건 다해봤어. 그런데도 안됐어. 아무리 해도 지독하게도 그 감정이 변하질 않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관두라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10년에 대한 대가는 돌려받을 자격이 있어. 내가 10년 동안 어떻게 참고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당신은 몰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몰라. 그러니까 간섭하지 마. 간섭하고 싶으면 당신이 10년 동안 겪어보고 나서 해 . 그럼 들어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닉쿤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멀리 보이는 원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악에 받친 듯한 닉쿤의 말투와 표정에 에반은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그냥 한 때 지나가는 연정이나, 가벼운 호기심 정도로 치부했지, 닉쿤이 저렇게까지 진심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이미 각오를 다졌다는 그의 말에도 설마, 설마 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잘못 짚은 듯했다. 생각보다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문제가 진짜 복잡해질 듯했다. *** “빌어먹을…….” MRI 촬영을 하자마자 내려선 닉쿤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그거였다. 멍하니 의사들 뒤에 서서 아무 이상 없다는 설명을 들은 우영은 톨 사이즈의 컵을 든 채 닉쿤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돌아왔을 때부터 기분이 별로인 것 같더니, 지금은 더욱 별로였다. 설상가상으로 에반도 기분이 최악인 듯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했는지 분위기가 험악하다. “이상 없다잖아. 다행이야.” MRI 촬영실을 나오며 풀어놓은 넥타이핀과 커프스, 그리고 시계를 차는 닉쿤의 옆에 선 우영은 재빨리 닉쿤에게 컵은 건네주었다. “마셔. 아침 먹으러 가자.” 그 말에 닉쿤이 아무 말 없이 컵만 빼앗아 든다. 진짜 화가 난 모양이었다. “화났어?” “당연하지.”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날 걱정은 해?” “당연하지. 너라면 내가 이상한 짓 하는데 걱정 안 하겠어?” 순식간에 닉쿤의 애정과 헌신이 어린 행동들을 ‘이상한 짓’으로 폄하한 우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닉쿤의 넥타이핀을 만져주었다. “됐다. 가자. 그런데 에반은 왜 저래? 싸웠어?” “……뭐.” “뭐라고 싸웠길래 그래? 에반과 닉쿤의 사이가 좋냐고 묻는다면 아주 좋다고 답할 수는 없겠지만, 나쁘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답할 수는 있었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훌륭한 파트너 관계였다. 정서적인 면보다는 공적인 면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감정이 깃든 싸움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 거나 가끔 회사 관리에 있어서 의견 마찰을 일으키는 일은 있었어도 그때마다 서로 의견을 조율해 한쪽이 한 발 물러 서거나 타협해 금세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런 두 사람이 싸움이라니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닉쿤, 뭐야?” 아무리 봐도 이상해 우영이 재차 묻자 막 MRI촬영실을 나오던 닉쿤이 뒤에 따라 나오던 에반을 슬쩍 돌아본다. 그 시선에 에반이 무표정한 얼굴로 닉쿤을 바라보자 왼손으로 컵을 들고 있던 닉쿤이 우영에게 컵을 건넨다. 오른손엔 자신의 컵을 그리고 왼손에는 닉쿤의 컵을 든 우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닉쿤을 쳐다보자 닉쿤이 왼손을 들어 우영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한다. “왜?” 그 손길에 이끌리듯 우영이 다가서자 닉쿤이 슬쩍 에반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입술 끝을 올려 환하게 미소 짓는다. 순간 에반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아까부터 화가 난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닉쿤이 저렇게 표정을 풀고 웃는다는 게 아무래도 조짐이 좋질 않았다. “어이, 닉…….”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 에반이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양손에 컵을 든 우영은 멍청하니 그 자세로 서 있었고 그런 우영의 머리통을 잡아끈 닉쿤은 망설임 없이 우영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는 아주 잡아먹을 듯 농염한 키스를 시작했다. 첫 키스도 아직이라는 우영을 붙잡고 입안 깊숙이 혀를 넣고 타액을 빨아들이며 고난이도의 키스를 하는 그 모습에 에반은 그대로 선 채 얼어버렸다. 비록 아직 병원 영업 개시 전이고, 지금 그들이 있는 층은 모두 검사실만 있어 텅 비어있고, 다른 의사들은 검사 결과를 저장하는 중이라 아무도 없는 복도라 해도, 이건 분명 자신에게 하는 선전포고였다. 닉쿤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없는 병원 복도가 아니라 센트럴 파크 광장 한복판에서라도 우영과 키스할 수 있다는, 그러니까 자꾸 건들면 피 볼 거라는 경고이자 선전포고였다. “……미친 놈.” 평생 하지 않는 욕설을 입에 담으며 에반은 드디어 비극이 시작되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에반도 당분간 편히 살긴 그른 듯했다. 에반이 그의 암담한 미래에 슬퍼하는 사이, 우영은 그대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선 채로 기절을 한 모양이었다. “코로 음식을 먹은 건지도 몰라. 샌드위치를 코로 먹고, 커피는 눈으로 마신 거야.” 분명히 먹은 기억이 없음에도 식당에 가서 앉아 접시를 비웠다는 사실에 우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날씨는 미치도록 화창했다. 아침을 먹고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한 뒤 미팅을 마친 닉쿤은 30분 정도 여기 저기 전화통화를 하더니 곧 사무실을 나서 맨하탄 한복판에 위치한 GATH사로 향했다. 현재 J&K사가 합병을 진행 중인 회사의 재무 구조와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조금 시간이 났다. 원래는 닉쿤을 내내 쫓아 다 녀야 하지만 에반도 함께 나온 데다 오늘 자신이 좀비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닉쿤은 회의에는 참석하지 말 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서류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해주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물론 이게 그 닉쿤 탓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여간 시간을 줘 다행이다. 지금 자신을 고민에 빠 트린 상대가 상사라는 건 상사가 영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운이라 칭할 만하다. “사내 성희롱으로 고소할까…….” 일단 닉쿤은 분명 자신의 직속상사이기도 하니 성희롱으로 인한 고소가 가능하다. 에반도 바로 눈앞에서 보았고, 아마 보안 카메라에도 남아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자신이 그럴 배짱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치겠네…….” 사내 성희롱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설마 설마 하며 절대 아닐 거라 부정하고 있던 것을 눈앞에서 확인해버 린 게 문제였다. 사실은 어제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눈치를 챘기에 닉쿤을 어떻게 해보려고 그 발악을 한 거다. 오늘 병원까지 데리고 간 건 사실 닉쿤이 진짜 걱정되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미친 것 같으니 그만두라는, 아주 우회적인 의사 표현 방법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역효과였다. 닉쿤도 그걸 눈치 챘는지 아주 대놓고 적극적으로 나왔고, 덕분에 자신은 좀비 상태 가 되어버렸다. 진짜 이러려고 한 건 아니다. 닉쿤이 어떤 의도로 갑자기 자신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했든, 무시할 셈이었다. 그 럼 곧 닉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의사를 알아챌 거고, 받아들여줄 거라 믿었으니까, 무작정 버틸 셈이었다 . 그냥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고, 아는 체도 안 할 셈이었다. 하지만 닉쿤은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밀어붙였다. 머리통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미 충분히 과부하 상태였다. “상사한테 꾸중이라도 들은 거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왜 이럴 때 자신은 기절도 안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옆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버터에 오일을 쏟아 부은 듯한, 그 음성…….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자 벤취 바로 옆자리에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얼굴이 앉아 있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진한 갈색 머리카락에 햇살을 받아 투명해 보이는 파란 눈동자. 거칠어 보이지만 은근한 부드 러움이 느껴지는 외모. 그리고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눈웃음. “오랜만이지? 이런,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씨익 웃으며 사람 비위를 긁는 그 얼굴에 순식간에 정체불명의 존 도우(John Doe-신원미상 남자) 얼굴 위로 한 이름이 매치되었다. “노먼 맥캐인!?” “여전히 열렬하군. 나도 그리웠어, honey.” “개새끼!” 우영은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노먼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노먼은 잽싸게 옆으로 피해 그 주먹을 피해 일어서며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하시네.” “너, 잘 만났다!” “오우, 주먹도 여전하셔. 너의 그 화끈한 이단옆차기도 여전하지? 그 폭력성에 반했다니까.” 능글능글 슬슬 신경을 건드리는 그 말에 대학 시절 식당 안에서의 활극이 떠올랐다. 만나기만 하면 Sweetie 타령을 반복하는 녀석 덕에 1학년 초기에 녀석과 커플로 묶여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어차피 남의 소문은 사흘이라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 노먼은 아주 끈질겼다. 기어이 식당 안에서 “지난 밤 아주 뜨거웠지?”라고 하 는 바람에- 그 전날 밤 노먼이 샤워 중인 욕실로 찾아와 온수를 최고로 올려 틀어준 바람에 화상을 입을 뻔 했었 다.- 쌓이고 쌓인 게 한꺼번에 터져 그대로 녀석을 이단옆차기로 쓰러트린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고소하면 너도 성희롱으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식판을 내던지고 나간 뒤로, 노먼의 sweetie 타령은 줄었다. 대신, honey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낯으로 날 찾아와?” “보고 싶으니까.” “미쳤냐? 꺼져! 당장에 꺼져버려!” “밥 먹자.” 우영이 아무리 화를 내도 태연하게 자기 할 말만 하는 건 여전하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사람 열 받게 하곤 헛소리를 찍찍 하다 사라진다. 그리고는 잊을만하면 또 나타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곤 사라진다. 우영은 진심으로 자신의 시체에서 사리가 나오면 다 노먼 맥캐인 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일찍 죽어도 노먼 덕이다. 진짜 상종을 못할 인간이었다. 더 이상 말도 섞고 싶지 않아 휙하니 돌아서 걷자 노먼이 태연한 걸음으로 뒤를 따라온다. “어이, 어딜 가?” “총기 사용 허가 받으러.” “어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인사도 안 해?” “인사 대신 네 뇌를 갈겨버릴 거야.” “험악한 말 하지 마시고.” 노먼 맥캐인이 가장 무서운 건 그 녀석과는 절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안 듣는다, 라는 게 노먼의 인생철학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로변을 걷자 노먼의 걸음 역시 빨라진다. “밥 먹자.” “내가 미쳤냐? 너 같은 거랑 밥을 먹게?” “어차피 닉쿤은 지금 회의 중이잖아. 한참 지나야 나올 테니 나랑 밥 먹자.” “네가 닉쿤 비서야? 어떻게 알아?” “뻔하지. 그나저나 사교계에 입문해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겨우 운전기사냐? 예일대 수재가 운전기사라니, 동문으로서 쪽팔리다.” 슬슬 아픈 부분을 찔러대는 노먼에게 우영은 시선도 돌리지 않게 답해주었다. “예일대 영문과 수석이 파파라치 하는 것보다야 낫지.” “뭐 그런가? 하여간 밥 먹으러 가자. 너 잘하는 데 알지?” 친근하게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으려는 노먼의 손을 우영이 뿌리치며 사납게 소리친다. “꺼져!” “왜 이러시나……. 아, 리무진 타고 꽃 들고 나타난 게 아니라서 그래? 지금이라도 가서 턱시도 입고 리무진 끌고 올까?” “남의 사생활 사진 찍어 팔아먹은 돈으로 리무진? 웃기고 있네.” “파파라치도 하나의 직업이야. 그리고 난 대중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위시 메이커일 뿐이라고.” “파파라치가 위시 메이커면 청부살인자는 위시 마스터냐? 파파라치들 하는 짓이 청부살인자들이랑 뭐가 달라?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뿐이잖아!” “난 사람은 안 죽인다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쏴야만 사람 죽이는 거야? 말로도 사람 죽여! 말로 죽이는 게 더 잔인하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난 복수의 여지는 주잖아. 숨통을 끊어 죽여 버리진 않는다고.” 그 말에 우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돌아서 노먼의 멱살을 쥐었다. “대체 너 나랑 무슨 원수를 진거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길래 이래?” 진짜 화가 난 듯 격한 우영의 반응에 노먼은 잠시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원수는 무슨. 사랑이지. 내가 너 사랑하는 거 몰랐어? 수없이 고백했잖아? 그때마다 넌 거절했고.” 그 말에 우영은 기운이 빠진 듯 노먼의 멱살을 쥔 손을 놓았다. 분명 그랬었다. 닉쿤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입학때부터 졸업 때까지 노먼은 수 천 번도 더 사랑 고백을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번번이 거절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고백이라고 하기도 모호했다. 예일대 역사상 최악의 또라이라 불리는 녀석이 실실 웃으면서 장난치듯 고백을 하는데 어떤 병신이 그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까? “그날, 널 살려두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대체 무슨 영광 보겠다고 너 같은 걸 살려서 이런 봉변을 당하는 거지? 세계 평화를 위해 그날 널 밟고 그냥 지나갔어야 했어.” 아직도 떠오르는 10년 전 알파베타감마 신고식 때 사건을 떠올리며 우영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앞에 선 노먼이 환하게 웃는다. “하하, 성질 여전하네.”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럼 울까?” “……관두자. 너랑 대화를 하려던 내가 잘못이지. 관두자. 관둬. 빨리 꺼지기나 해. 닉쿤이 널 보면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기운이 쭉 빠진 채로 우영은 노먼을 무시한 채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노먼의 말이 발목을 잡아챈다. “클리샤 사건, 닉쿤 알아?” “……너, 뭐하자는 거야?” “아니. 그냥 닉쿤이 아나 해서. 그게 너랑 내 합작품이라는 걸.” “죽고 싶냐? 닉쿤이 그걸 알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그럼 그것도 아직 모르겠네?” “또 뭐?” “너 술 마시면 묻는 대로 다 대답해준다는 거. 아주 착해지잖아.” “……너 진짜 죽고 싶냐? 클리샤 사건만으로도 나 너한테 무지 쌓였거든? 진짜 너 만나는 순간 죽여 버리려고 했거든?” “왜 이래? 난 사랑하는 널 위해 그런 건데.” “뭐가 날 위해서야?” “네가 이도저도 아닌 채로 못된 바람둥이 놈한테 휘둘리니 널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한 거야. 그리고 그 놈은 그런 벌 받아도 싸잖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널 두고 바람이나 피우다니 말야.” 느끼한 말을 아주 상쾌하고 터프하게 하는 노먼을 우영이 진짜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본다.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입에서 나가는 거니 말이지. 난 사랑하는 널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놈하곤 다르거든.” “그 놈의 사랑 두 번만 하다간 너 아예 내 목을 졸라 죽이겠다?” “난 널 사랑해. 알잖아? 그냥 모른 체하고 싶은 거지, 너도 이미 알고 있어. 맞지?” “……관두자. 나 피곤해. 가야겠어. 너랑 더 말 섞고 싶지도 않아.” “점심 먹자니까.” “아 좀 가!” “잡지사에 소설을 투고할 생각이야. 다섯 편정도 써놨는데 좀 골라줘.” 그 말에 짜증을 내던 우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온순해졌다. 재빠르게 변하는 그 표정 변화에 노먼은 귀엽다는 듯 눈웃음을 쳤다. 우영의 약점은 잘 알고 있다. 우영은 자신의 소설이나 에세이가 걸리면 약해지고 만다. 그게 또 아주 귀여웠다. “……갑자기 왜?” 우영이 의심스러운 듯 조금 낮아진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다. 우영의, 노먼의 소설에 대한 애정과는 별도로 노먼 맥캐인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이었다. 노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는 무슨. 그 동안 계속 준비해온 거야. 파파라치는 취미고.” “……진짜야?” “물론이지. 그러니까 시간 좀 내줘.” “…….” “응?” “좋아. 대신 멀리 가. 닉쿤이 나오다 너랑 있는 걸 보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좋아.” 그렇게 말하며 노먼이 상쾌하게 오토바이 키를 빙글빙글 돌렸다. 죽이니 살리니 해도 우영은 노먼 맥캐인이라는 인간한테 약했다. 그리고 노먼 맥캐인의 소설에는 더더욱 약했다. 그러니까, 그게 비극이었다. “그런데 소설은?” Gath사의 건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가게로 와 샌드위치를 반쯤 먹고 난 뒤 우영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노먼이 “아.”라는 감탄사를 흘리며 재빨리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영은 눈을 반짝거리며 노 먼 이 꺼내줄 소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시절 노먼이 낸 시와 에세이, 그리고 소설들은 모두 좋았다. 글 솜 씨에 는 재능이 없던 우영은 진짜 재능이라는 건 타고나는 거구나 라는 걸 노먼을 보며 느꼈었다. 우영이 끝끝 내 노먼 을 버리지 못한 이유도 그 재능 때문이었다. 영문학과에 다니면서도 회계학과 통계학에 더 강한 면모를 보이며 전공과목은 간신히 낙제점을 면했던 자신과는 달리 노먼은 특출 난 재능을 보여 그 과감한 또라이 행각 에도 불구 하고 영문과 수석 졸업생이 되었다. 그런 노먼이 파파라치가 되어 나타났을 때엔 뭔가 노먼답다라는 생각을 하면 서도 화가 났었다. 왜 그런 재능을 가진 녀석이 저러고 있나 싶어 더 표독스럽게 굴었던 것도 사실 이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다니 다행이다. 아니,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다. 노먼은 단 한 번도 글쓰기를 포기한 적이 없 었다. 다만 그 자유분방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물론, 남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타고난 짓궂음도 말 이다. 두근두근하며 기다리던 우영은 소설 대신 테이블 위에 올라온 영화 티켓 두 장을 보곤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토요일 오후 3시. 너,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분명 영화 티켓에 써진 영화의 제목은 자신이 어제 혼자라도 보러 가겠다고 결심했던 그 영화였다. 문제는 왜 소 설이 아니라, 이게 테이블 위에 올라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소설은?” “토요일 한 시에 너희 집으로 찾아갈게. 점심 먹고 영화 보고 우리 집으로 가서 보여줄게.” 식사하고 영화 보고 집이라……. 그건 마치 데이트 같았다. “……관두자.” “어이, 닉쿤한테 클리샤 얘기해도 돼?” “너 왜 자꾸 나하고의 문제에 닉쿤을 걸고 넘어져? 그렇게 치사하게까지 네 소설 안 봐도 돼. 나도 바쁜 사람이야.” “네 인생의 중심은 닉쿤 벅 허르베지쿨 아니었어?” “웃기네.” “……그 말은 마음 정리했다는 거야?”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진짜 정리했냐?” “그래.” “……그럼 더 잘 됐네. 데이트하자.” 비약적인 대화의 전환에 우영은 현기증을 느꼈다. 늘 노먼과 얘기하고 있으면 이렇게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화제의 전환이 하도 빠른 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장단을 맞추기도 힘들다. “내가 미쳤다고 너랑 데이트를 하냐? 그리고 그날은 닉쿤이랑 약속 있어.” “취소해.” “너 진짜 뻔뻔하다.” “클리샤.” “야!” “어차피 포기한 거면 상관없잖아. 나랑 데이트하자.” “너 진짜 왜 이래?” “사랑하니까.” 관두라고 타박을 하려던 우영은 순간 휙하니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노먼에겐 미안하지만, 어쩌 면 이 녀석을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 사실 노먼에게는 전혀 미안하지 않다. 아무리 노먼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다 해도 그동안 노먼이 자신에게 행한 만행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좀 이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양해만 구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 데이트 하자.” 결심을 굳힌 우영이 재빨리 말을 바꾸자 노먼이 팍 인상을 쓴다. “뭐야? 너 날 죽이려고?” “……데이트 신청한 거 너거든?” “이렇게 쉽게 승낙할지 몰랐지. 너 10년 동안 거절했잖아. 오늘도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런 사정이 있어. 사정은 토요일에 설명해줄게.” “뭐……. 좀 찝찝하긴 하지만 나야 좋지. 그럼 토요일 데이트 하는 거지?” “물론.” “몇 시에 데리러 갈까?” “너, 우리 집 알아?” “파파라치를 뭘로 보는 거야?” “파파라치가 왜 내 주소를 알고 있는데?” “사랑하니까.” 무슨 질문을 해도 답은 ‘사랑하니까.’다. 이러니까 우영이 노먼의 고백을 믿지 못하는 거다. 진짜 사랑고백이 라면 아주 간절한 사랑이 아니라도 저렇게까지 건성으로는 못한다. 최소한의 진심은 비치게 되어 있는데 노먼에게는 조금의 진정성도 보이지 않는다. ‘밥 먹자.’라는 말처럼 ‘사랑한다.’라는 말을 매일 반복하는 녀석을 어떻게 믿을까. “너랑 얘기하고 있으면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 “넌 바보는 아냐. 바보 비슷하긴 하지만.” 언제나 우영을 바보 취급하는 노먼의 태도에 우영이 찌릿하고 노먼을 노려보자 노먼이 환하게 웃고 만다. 또라이 라곤 하지만 노먼은 생긴 건 아주 멀쩡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학 시절에 그 엽기적 행각에도 불구하 고 여자들의 대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근사하고 잘 생겼다. 닉쿤이 전형적인 귀족가문의 도련님 스타일이라 면 노 먼은 터프하고 거친 쾌남형이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콜린 패럴 스타일이었다. “생긴 건 멀쩡해서는…….” 얼굴과 그 재능이 아깝다는 듯 우영이 고개를 내젓자 노먼이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듣기 좋은 유쾌한 웃음이지 만 우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썼다. 그 사이 노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아버지다.” 번호를 확인한 노먼은 전화를 받지 않은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노먼이 아직도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우영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커피 잔을 들었다. “잭? 잭이 아직도 널 자식으로 취급하냐?” 졸업 후 파파라치를 하겠다면 달려 나간 노먼은 맥캐인 가의 처치곤란 산업 폐기물이었다. 맥캐인 가와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거물들과 고객들의 사진까지 맘대로 찍어내 팔아내는 통에 잭 맥캐인이 한 동안 노먼을 찾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었다는 건 유명한 일이다. 한 번은 고객의 불륜 장면을 찍어 팔아넘긴 그의 아들과 법 정 싸움까지 갈 뻔한 잭 맥캐인은 그 후로 정키는 용서해도 파파라치는 용서 못한다는 특이한 철칙을 갖게 되었 다. 그런데 아직도 노먼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니 놀랄 일이다. “당연하지. 이래봬도 우리집 자식들 중 가장 뛰어나니까. 간다. 오늘 아침 사진 때문에 허르베지쿨이 클레임 걸었을 거야. 잔소리 듣고 올게.” “그래, 가라.” “토요일 데이트 잊지 마.” “걱정 마.” 드디어 저 거머리를 떨쳐내게 됐다는 사실에 우영은 마음이 느긋해졌다. 아침식사는 어디로 했는지 아직도 기억 이 안 나는 상태라 남은 샌드 위치에 손을 대는 우영을 보며 노먼은 사랑스럽다는 듯 우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 어 주었다. “오후 1시야.” “내가 시간 안 지키는 거 봤냐? 너나 약속 지켜.” “알았어.” 오토바이의 헬멧을 손에 든 노먼은 잠시 우영을 내려다보다 허리를 숙여 우영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오늘 오전에 당한 게 있는지라 우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노먼이 손끝이 우영의 입술을 스쳐간다. “네 첫 키스, 내가 가져도 되지?” 미안하지만 이미 첫 키스는 물 건너갔다, 라고 말하려다 우영은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손사래를 쳤다. “꺼져.” “갈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노먼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우영은 안도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평화 의 시간이 도래했다. 노먼 덕에, 아니 덕인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닉쿤 때문에 놀란 건 많이 가셨다. 그러고 보 니 노먼은 늘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닉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때는 늘 노먼이 나타났고 노먼과 이렇게 싸우 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 눈이 맑아진다. 그래서 냉정하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오늘만 해도 노먼을 만나기 전까지는 진짜 무서워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두려움이 가셨다. 정신이 차분해졌다 . 그런 점은 감사한다. 늘 감정에 억눌려 터지기 직전까지 가는데, 노먼은 그 감정을 확실하게 터트리게 해준다 . 마음껏 소리 지르고 싸우고 화내고, 그러다 웃고. 크게 한 번 소리치는 게 사람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노먼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 저 녀석을 미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상한 성격만 아니라면 진짜 좋아했을 것이다. “닉쿤을 두고 저 남자랑 데이트를 해요?” 커피를 마시려 손을 뻗는데 아주 위쪽에서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분명히 바로 이틀 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인 것 같았다. 오한이 끼친 우영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리고 앞에서 흩날리는 골드 블론 드의 긴 생머리를 보는 순간 잔을 든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겨우 닉쿤의 키스에서 충격이 가셨다고 생각했다. 노먼과 다시 엮이는 건 질색이지만, 지금은 이용할 만하니 괜 찮을 것 같았다. 겨우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채였다. 그런데 키스 끝나고 노먼 가니 엘레나가 나타났다. 사다코의 저주에서 벗어나 들어간 집이 가네코의 집이라든가, 프레디를 피해 겨우 잠에서 깼더니 눈앞에 제이슨 이 있어 신나게 도망쳐 들어간 집이 에드 기인의 도축장이라든가 할 때의 기분이 딱 이럴 것 같았다. “나랑 얘기 좀 해요.” “나랑 할 얘기가 있던가? 난 좀 바쁜데…….” 라고 말하려다 문득 오늘따라 타조의 가방이 유난히 크다는 사실에 시선이 갔다. 오늘은 그나마 저렴한 에르메스 (Hermes)의 에블린 블루진을 들었는데, 문제는 에블린은 에르메스의 문양 그대로 가죽에 구멍을 뽕뽕 내놨다 는 사실이다. 그 구멍들 사이로 은색의 물체가 비치자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어 재빨리 말을 바꿨다. “……바쁘지만 앉아. 잠깐 시간은 있어.” 파티에서와는 달리 마크 제이콥스의 티셔츠에 트루 릴리전 데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엘레나는 20대 초반 정도로는 봐줄만했다. 문제는 그 아래 신은 어그 부츠지만, 진짜 양털로 만든 어그야 여름에 시원하다니 잘 어울린다 싶 었 다. 그 와중에도 샤넬의 진주 체인 목걸이는 잊지 않을 걸 보니 어지간히도 샤넬을 좋아하는 처자다 싶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엘레나는 멋대로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노먼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뚱한 얼굴 로 우영을 바라본다. “……가방 예쁘네.” 딱히 할 말이 없어 우영이 에블린을 칭찬하자 새초롬한 표정의 엘레나가 뭘 그런 걸 칭찬하냐는 얼굴을 한다. “오늘은 학생 같아 보여서.” “내가 늙어 보인다고 하려는 거예요?” 자각은 있었나 보다. “아니, 그냥 헐리웃 10대 같다고. 그런데 안 바빠? F/W 준비 안 하나?” “모델 활동 정지 먹었어요. 1년 간.” “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며 우영은 계속해서 테이블에 올려둔 엘레나의 에블린을 훔쳐봤다. 저 은색은 뭘까. 저거 진짜 총인가, 총이면 어떻게 하지? 접시로 막으면 뚫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힐끔거리자 엘레나가 슬쩍 그녀의 가방을 보더니 묻는다. “에르메스 좋아해요?” “뭐.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야 자주 접해야 하니까.” “저번에 에르메스 크로커다일 블루로얄 채간 거 당신이죠?” “아, 클레어가 부탁해서.” “내가 그거 아침에 눈 뜨자마자 사려고 달려갔는데 당신이 채갔다는 얘기 듣고 진짜 열 받았던 거 알아요?” “내가 쓰는 거 아니잖아. 그리고 너한테 벌킨은 좀 그렇지 않아? 에블린이나 샤넬 볼륨 백 정도가 어울리는 나인데…….” “그래도 들어야 한다고요! 클레어는 잘 들고 다니지도 않잖아요!” “클레어는 그냥 수집용이야. 블루 색상을 좋아하는데 드물잖아. 화이트 룸이랑 블랙, 레드 룸은 꽉 찼는데 블루 룸은 좀 허전해서 나오자마자 내가 다 사들이는데.” 클레어 허르베지쿨은 딱히 눈에 띄게 치장을 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구두와 가방이라면 환장을 하는 편이었다. 잘 들고 다니지도 않는 걸 왜 사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저택에 있는 쇼룸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진짜 쇼룸이었 다 . 커다란 원형의 2층을 레드룸 화이트룸 블루룸 블랙룸 그리고 핑크룸으로 섹션을 구분한 뒤, 각 브랜드의 가방 과 구두들을 색깔별로 사서 진열해둔다. 그러니까, 클레어는 가방이나 구두 자체보다는 그 콜렉션에 집착 하는 편이 라고 할 수 있겠다. 신상도 신상이지만 리미티드나 프리 시즌(Pre-season), 그리고 런웨이 제품들은 무조건 사서 진열해둔다. 가방 하나에 10만 달라가 넘어가는 제품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할 뻔했지만 어차 피 계산 은 닉쿤 나 클레어가 직접 하니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열심히 클레어의 가방 콜렉션을 돕는 중이었 다. “클레어는 모으기만 하는 거예요?” “거의. 가끔 한번씩 생각나면 들지.” “저번에 에르메스에서 서류가방 제작했다면서요? 그것만 들고 다니던데.” “일을 하니까. 그리고 워낙에 번거로운 걸 귀찮아해서.” 엘레나는 뭐 그따위 재미없는 가방을 들고 다니냐는 듯 말했지만, 그 에르메스에게 특별 제작한 서류가방이 십만 달라였다. 다이아몬드 칠이라도 했나 싶어 보니 가방을 닫는 부분에 진짜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 “그나저나 사회봉사는 마친 거야? 막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그 총기 사건 이후의 일이 궁금해 묻자 엘레나가 툭하니 내뱉는다. “하고 있어요. 아버지한테 혼나서 빠져나가지도 못해요.” “너, 아버지한테 혼도 나?” “사람 없는 데서 쏴야지, 사람 많은 데서 쐈다고요.” “…….” “내 얘기는 이제 됐고, 이 말하려고 왔어요. 하루라도 빨리 닉쿤의 옆에서 떨어져주세요. 당신 때문에 닉쿤이 손해를 보잖아요.” 맹랑한 엘레나의 말에 우영은 잠시 번민했다. 그냥 사실대로 다 터놓고 이 아가씨를 설득할까, 아니면 그냥 사실 인 척 닉쿤의 장단에 맞춰줄까? 전자를 택하자니 아가씨의 뇌 용량이 너무 의심스럽고, 후자를 택하자니 닉쿤에 게 말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 다 선택 않고 버틸 수는 없으니, 결국 닉쿤에게 말리는 쪽 을 택하기로 했다. 닉쿤을 설득하는 건 쉽지만, 엘레나의 뇌 용량은 인력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니까. “나 때문에는 손해를 보지만 너 때문에는 죽을 것 같은데?” “이제 안 죽여요! 아버지가 다시 한 번 총에 손대면 가만 안 둔다고 하셨어요.” “너 말고 너희 아버지 말야. 아니면 너희 오빠들이나.” “우리 아버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방금 전엔 으슥한 데서 죽이라고 했다며?” “그건 그거고.” “그거랑 이거랑 똑같아. 하여간, 네가 먼저 포기해.” 그 말만은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저 타조머리였다. 저 타조만 포기하면 간단해진다 . 자신이 더 이상 닉쿤의 장단에 맞춰줄 이유가 없으니 사실대로 다 말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이 문제를 그렇게 쉽게 해결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싫어요.” “그럼 어쩌게?” “4년만 기다려달라고 할 거예요.” 4년이라.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니, 엘레나로서는 참 많이 양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가 있긴 하구나.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요?” “너, 학교는 언제 가? 지금 한창 수업 중일 시간 아닌가?” “시간 나면 가요.” “……그럼 한 가지만 더 궁금해 해도 될까?” “뭔데요?” “너, 이름은 쓸 줄 알아?” “알아요! 날 뭘로 보고!” “그럼 써 봐.” 라고 말하며 우영은 넵킨과 함께 펜을 건넸다. 그러자 펜을 잡고 그 위에 Ellena까진 쓴 타조는 이내 N에서 손을 멈췄다. 닉쿤의 말이 사실이었다. 문맹인가 보다. 아니, 일단 알파벳은 아니 문맹은 아니지만, 문맹 수준인 건 맞는 듯했다. “문맹 맞구나…….” “그냥 까먹은 거예요! 보통 사인은 엘레나까지만 한다고요!” “그래. 알았다.” 고개를 내저은 우영은 엘레나의 손에서 펜을 받아들고 다시 양복 재킷 안에 넣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진짜 신기했을 때 미국에 의외로 글자를 쓰고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는 아주 나이가 많으신 노인 분들을 제외하곤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의외로 미국은 문맹률이 높다. 진짜 이상한 나라였다. 우영이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시려 컵을 들자 엘레나가 눈을 부릅뜨고 재차 답을 촉구 한다. “왜 대답을 안 해요? 헤어질 거예요, 말 거예요?” “너 하는 거 봐서.” “뭘요?” “네가 어떻게 나오나 봐서 헤어져줄게. 됐지?” 그렇게 말하며 앞에 있던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자 엘레나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키는데……. “배고파?” “……네.” “뭐 시켜. 사줄게.” “내가 돈이 없어서 못 먹는 줄 알아요?” “그럼 왜?” “……전 숨만 쉬어도 살 쪄요. 물만 먹고 산다고요.” “응?” “물하고 과일 샐러드 200그람이 하루 식사 전부에요. 그런 제 앞에서 먹고 싶어요?” “……왜 그러고 사는데? 어차피 활동 안 한다며?” “영원히 안 할 거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러고도 사람이 살 수 있냐?” “저 살아 있잖아요. 아 다른 데 가서 먹어요!” 그 말에 우영은 슬쩍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왼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엘레나의 파란 눈동자가 그 접시를 따라 움직인다. 조금 재미있었다. 그리고 다시 접시를 오른쪽으로 옮기자 엘레나의 얼굴이 휙하니 오른쪽으로 돌아간 다. 마치 테니스 관람을 하는 고양이 같았다. “……이거 좀 먹을래?” 하도 안 돼보여 그냥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엘레나는 침을 꿀떡 삼키더니 의외로 순순히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럼, 한 입만…….” 손을 부들부들 떨며 샌드위치를 손에 드는 엘레나는 딱 그 또래 다이어트 중인 여학생 같아 보였다. 어쩐지 귀엽 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 먹으면 친구들하고 어떻게 다녀?” “친구 없어요. 모델 친구들은 있지만, 다들 안 먹어요. 물 먹어도 욕해요. 배 나온다고.” “학교 친구들은?” “없어요. 러시아 마피아 딸이잖아요.” “……그게 왜?” “다들 무서워해요. 아닌 애들은 뭐…… 나한테 붙어서 뭐 하나 얻어 보려는 애들이고. 다들 나보다 한참은 작아서 같이 다니려고도 안 하고.” “아, 하긴. 너보다 한참 작겠구나.” 엘레나는 열다섯 살 소녀의 평균 신장을 초월한 지 오래였다. 또래 친구들과 다닌다면 아마 언니와 동생쯤으로- 심하면 엄마와 딸로- 보일 것이다. 그걸 이제 알았다는 듯 우영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엘레나다 딱 한 입만 먹은 샌드위치를 다시 내려두고 우영을 노려본다. “당신, 되게 예의 없네요.” “사실이니까.” 그럼 네가 짧으냐? 라고 묻는 듯한 우영의 시선에 엘레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냅킨을 들어 입술을 닦았다. 하얀 냅킨 위에 새빨간 입스틱 자국이 찍혀나오는 걸 본 우영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네가 왜 나이 들어 보이나 했더니 화장 때문이구나. 왜 화장을 하고 다녀?” “모델이니까요. 그리고 다들 해요. 학교에서도 화장 안 하는 애들은 구질구질한 왕따들밖에 없어요.” “왜? 제일 예쁠 나인데? 너는 화장 안 하면 더 예쁠 것 같은데? 나이 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감추고 다녀?” “내가 예쁜 거 이제 알았어요?” “응.” 우영은 진짜 솔직하게 그렇게 답해주었다. 닉쿤과 함께 다니다 보니 모델이나 배우, 가수들을 많이 봤는데 헐리 웃의 화장능력은 화장이라기보다는 거의 분장에 가까웠다. 아마 특수효과 바로 아래급이 여배우들의 화장일 것이 다. 쳐진 살을 탱탱하게 올려붙이는 해파리 테이프를 본 순간 이미 얘기 끝난 거다. 헐리웃에서 원판불변의 법 칙 은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영은 여자들의 화장한 얼굴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는 나이가 어려서인 지 피부도 좋고 예쁜 것 같았다. 화장을 안 하면 귀여울 얼굴이었다. “……당신, 진짜 예의 없네요.” “화장 덕지덕지한 사진만 봤으니까. 그런데 지금처럼 머리 풀고 화장 안 하면 더 예쁠 것 같아. 열다섯 살은 그 냥 서있기만 해도 예쁘잖아.” “뭐, 저야 당연히 화장 안 해도 예쁘긴 하죠.” “일도 좋고, 다 좋은데, 열다섯에는 열다섯에 맞는 게 있잖아. 나중에 나이 들면 열다섯처럼 하고 싶어도 못해. 열다섯에는 그때 할 수 있는 걸 다 해봐야지.”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래. 아, 나 일어나야겠다. 이 샌드위치 다 먹을래?” “……살찌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엘레나는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진짜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순간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겨우 열다섯인데 물과 샐러드로 연명한다니. “먹고 싶으면 먹어. 넌 살쪄도 예쁠 거야. 꼭 모델 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 “모델 안 하면요? 나 머리 나빠서 공부 못해요.” “샤넬과 루비이통은 역사서 편찬해도 된다며? 나중에 그런데 들어가서 일하면 되잖아. 옷도 잘 입는데 디자인 공부해도 되고. 얼굴 예쁘니 배우 해도 되고. 잡지 에디터 같은 것도 있고. 나처럼 사교담당 비서 노릇해도 되 고 .” “대사 못 외워요. 그리고 글 잘 못 읽어요.” “그거야 지금부터 배우면 되지. 열다섯 살이잖아, 겨우.” “창피하단 말이에요. 아직도 글 못 읽는 거.” “난 열두 살 때 미국에 건너와서 사전 없이 기사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게 열다섯 살 때였어. 그때부터 미친듯이 공부해서 예일대도 들어갔는데?” “한국인들은 머리 좋잖아요,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 네 뇌가 좀 심하게 작긴 하지만, 주름이 많길 기대해볼 수밖에.” ‘주름’이란 말에 순간 엘레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우영이 어깨를 경직시키자 엘레나 의 손이 재빨리 가방으로 향한다. 뇌가 작다는 말에 화가 났나 해 우영은 재빨리 테이블 위에 있던 빈 접시를 꽉 쥐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손이 막 가방에서 나오려는 순간 우영은 본능적으로 접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엘레나가 찾아든 건 총이 아니라 커다란 거울이었다. “저 주름살 보여요? 보톡스 맞아야 하나? 주름살 어디 있어요?” 거울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눈가와 입가를 돌아보는 그 모습에 우영은 어깨에 힘을 빼고 접시를 내려놨다. 그 은색의 번쩍거리던 게 거울이었나 보다. 얘는 아무래도 뇌도 작고 주름도 적은 모양이다. 큰일이다. “주름살 없어. 있으면 내가 있지. 거기 주름 말고, 사람 뇌에는 주름이 있거든, 구불구불.” “네? 머리통에 주름이 있다고요? 거기도 보톡스 맞을 수 있어요?” “……그건 있어야 돼. 펴면 큰일 나.” 지금보다 더 머리가 나빠지면 큰일 일 것 같아, 우영이 서둘러 설명을 해주자 그제야 엘레나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장이 꼬인 것처럼 말이죠?” “……장이 꼬이면 큰일나지. 장도 구불구불한 거야, 그냥.” “하여간요.” 새초롬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먹는 엘레나를 보며 “진짜 애구나.”라고 탄식하던 우영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 드폰이 울리자 재빨리 번화를 확인했다. 닉쿤이였다. “응. 나.” 「어디야?」 “어? 벌써 회의 끝났어?” 우영의 그 말에 엘레나의 눈이 번뜩인다. “닉쿤예요?” 「자료 준비가 덜 돼서 그만하고 나가는 길이야. 그따위 자료를 제시하면서 뭘 하라는 거야? 다음 주에 다시 미 팅 잡기로 하고 나가는 길인데, 어디야?」 “어, 여기가……. 어, 나 회의 길어질 줄 알고 점심 먹으러 나왔는데. 지금 들어갈게.” 닉쿤에게 할 말도 있었던 터라 마침 잘 됐다 싶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엘레나가 따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 어선다. “나도 같이 가요!” 「뭐야? 그 멍청한 목소리는. 엘레나랑 같이 있어?」 기가 차게 엘레나의 음성을 알아들은 닉쿤의 질문에 우영은 엘레나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응,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어. 지금 갈…….” “닉쿤, 이 남자 다른 남자랑 데이트한대요! 이런 남자는 잊고 나한테 와요!” 갑작스러운 엘레나의 폭탄선언에 우영은 혼비백산했다. 말을 해도 자신이 해야지, 엘레나가 하는 건 안 좋다. 역 효과다. 「무슨 소리야? 데이트라니?」 “야, 헛소리야, 헛소리. 나 지금 갈게. 끊는다.” 더 이상 얘기를 하면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재빨리 전화를 끊은 우영은 앞에 서 있는 엘레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러자 엘레나 역시 할 말 있다는 태도로 받아친다. “닉쿤 두고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는 건 맞잖아요?” “그건 내 사정이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애인이 다른 남자랑 데이트 한다는데 두고 보라고요?” “너한테는 좋은 거 아냐?” “나한테 닉쿤 포기하라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야, 가봐야겠다. 넌 할 일 없으면 학교 가서 공부나 해. 아니면 봉사활동 마저 하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우영은 더 이상 말하길 포기하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돌아서 가려하자 엘레나가 재빨리 샌드위치를 들고 일어나 따라붙는다. “나도 같이 간다니까요.” “닉쿤 벅 허르베지쿨 게이설에 미성년자 폭행설까지 더해주고 싶어? 더 이상 추문 뿌리게 하고 싶지 않으면 근 처로 다가오지 마. 클리샤 사건 때문에라도 닉쿤은 미성년자라면 질색을 해.” “미성년자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늦게 태어난 게 무슨 죄에요?” “죄 맞아.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는. 4년 뒤에 얘기하자. 난 간다.” 막 가게를 나와 잡은 택시 안에 올라타며 우영은 엘레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와 마주 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우영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돌아갔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우영과 통화를 하던 닉쿤은 다시 험악해진 얼굴로 핸드폰 액정 화면을 노려봤다. 그 무식한 키스와 우영의 스타벅스 캠페인-고급 양복을 입고 양손에 스타벅스 컵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우영의 모습은 진짜 스타벅스 캠페인 같았다.-이후로 날아갈 듯 방긋방긋 웃고 다니더니 순식간에 살벌해진 닉쿤의 기색에 옆에 선 에반은 혀를 차며 닉쿤을 돌아봤다.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렇게 날 사랑해? 하루 종일 보고 또 보자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GATH사의 회계 내역이 개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다음 주까지 제대로 만들어 놓으라고 하더니, 우영과 통화를 한 뒤로 갑자기 저기압이다. 데이트 어쩌고 한 걸로 봐선 아무래도 우영이 반격에 나선 모양이다, 라는 생각에 에반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두 녀석의 관계를 꼬아놓은 데에 자신이 일조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마 닉쿤도 그런 생각에 자신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듯했다. “우영, 얼마나 걸린데?” “곤 온대.” “그럼, 내 차에서 얘기 좀 하자. 할 말이 있어.” “잔소리 할 거면 관둬.” “잔소리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지만, 일단 내 입장 정리는 하고 가야겠다.” “당신 입장이 어떤 거든 내가 알 게 뭔데?” “심술 부리지 마. 자꾸 이 따위로 나오면 내가 대놓고 방해하는 수가 있으니까.” “뭐?” “우영이 날 친형처럼 따르는 거 알지?” “……해고 당하고 싶어?” “하고 싶으면 해. 그럼 노먼 맥캐인이랑 손 잡고 고소할 테니까.” 에반이 대체 무슨 깡으로 저러나 싶어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닉쿤은 막 울린 핸드폰 벨 소리에 액정을 보더니 전화를 받았다. “응, 왜?” 「기사 봤어. 역시 형은 의외성의 인간이라니까.」 시원하게 터지는 클랜의 음성에 닉쿤은 핸드폰을 살짝 귓가에서 떼었다. “석 달만에 전화해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열린 문을 통해 엘리베이터에서 나서며 닉쿤이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하자 안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터진다. 「그럼 그 동안 잘 지냈냐? 몸은 건강하냐? 뭐 그런 인사를 바란 거야? 파리에서도 형 소식은 지겹도록 들었어. 뭐 하루도 안 나오는 날이 있어야지. 그것도 꼭 연예면에.」 “1면이냐?” 「아니, 파리에서는 별로 그렇게 크게 다루진 않아. 연예면 한 귀퉁이에 나던데?」 “고소해야겠군.” 「으하하하, 여전하네. 우영하고 에반은 잘 지내?」 “잘 지내.” 「나 지금 공항이야. 곧장 집으로 갈 건데, 오늘 들를래?」 이 시대의 반항아, 허르베지쿨 가의 골칫덩이 클랜 허르베지쿨. 셀레브리티의 삶을 거부하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작가가 되겠다며 프랑스로 날아가 추수 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카드로 생존신고를 대신하던 클랜의 갑작스러운 귀 향 소식에 닉쿤은 걸음을 옮기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왜?” 「왜긴, 사랑하는 형님 지원사격하러 왔지. 여전한가 봐?」 “갑자기 무슨 뚱딴지야?” 「하하,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여간 난 무조건 형편이야. 형은 에이먼이랑은 달리 늘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니까.」 “네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이라 돕겠다는 거야?” 「물론이지. 형은 재밌거든. 에이먼이나 클레어랑은 달라. 백미터 달리기보다는 마라톤을 즐기는 성격이니까. 일단 집에서 보자고.」 “왜 돌아온 건데?” 「말했잖아. 형 도우러 왔다고. 그리고 이제 슬슬 백수 생활 접고 일이나 해볼까 하고.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오늘 안 되면 주말에 우영이랑 같이 들러.」 이런 상황에 우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라니, 대체 클랜은 무슨 정신이가 싶어 닉쿤은 혀를 찼다. “너, 난장판이 구경하고 싶은 거야?” 「설마. 난 형하고 아버지 사이에 오간 거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뭐?” 「하여간 얼굴 보고 얘기하자. 우영도 보고 싶네. 아, 그리고 에반 나 빌려줘.」 “무슨 소리야?” 「아, 택시 타야겠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이코노미석이 이렇게 미어터지는 줄 몰랐네. 다리도 제대로 펴기가 힘들어. 우리 궁전으로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어.」 “올 거면 연락을 하지. 그럼 비행기 보내주잖아.” 「으하하하, 그런 것도 여전해. 전용기는 나중에 유용하게 빌려쓸게. 그럼 끊는다.」 전세기 얘기만 하면 질색을 하는 클랜이 웃으며 빌려쓴다는 말을 하자 닉쿤은 이건 또 웬 심경의 변환가 하는 생각에 에반과 함께 차로 가다 멈춰 섰다. “너, 뭐야?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세상을 좀 안 거지. 우리 궁전이 그리워지더라고.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하여간 나중에 봐.」 짤막하게 나 살아서 돌아왔소라는 말만 전한 클랜이 그대로 전화를 끊자 닉쿤은 한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본 채 멈춰 서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괴이한 일인가 싶었다. 돈도 명예도 다 싫다고 뛰쳐나간 녀석이 갑자기 그 삶이 그리워졌다니, 어 떤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돈 없다고 채이기라도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클레어나 에이먼이라면 몰라 도 클랜은 수중에 한 푼 없어도 어디서든 잘 살아갈 녀석이었다. 성격 좋고 명석하고, 또 너그러우면서도 여유 로 운 성격이다. 워낙에 부족한 거 없이 자라 그런 것도 있지만 원래 타고난 성품이 그랬었다. 그런 녀석이 이제 와 궁전으로 돌아오겠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선 채 핸드폰을 내려다보 고 있자 차 문을 연 에반이 이쪽을 돌아본다. “뭐야? 클랜?” “응.” 여전히 에반에 대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퉁명스레 답한 닉쿤이 뒷 좌석의 문을 열고 타자 에반이 작게 혀를 찬 다. 얘기를 하자는데 뒷좌석에 타는 건 또 무슨 심보인가 싶어서였다. 하긴, 닉쿤은 우영이 운전하는 차가 아니 면 절대로 조수석에 타지 않는다. 조수석에 타는 것뿐 아니라 운전하는 것도 싫어했다. 보통 정신 면허 허가를 받게 되면 다들 자기 차 들고 뛰쳐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닉쿤은 면허를 받고도 운전에 시큰둥했다. 차를 좋아해 모으기는 하지만 그다지 운전은 즐기지 않는다. 한 번은 왜 그러냐 물었더니 운전석에 앉은 시간이 아깝다고 답 했다. 차 안에서도 수백 가지 계획을 짜고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할 이유는 없다고 하는 걸 보고, 독한 놈이라고 여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는 왜 모으냐고 했더니 취미란다. 허르베지 쿨 가 의 사 남매는 모두 이상하게 수집벽이 있었는데 닉쿤은 차를, 클레어는 가방과 구두를, 그리고 클랜은 책 을 모 은다. 그리고 에이먼도 비밀스러운 수집벽이 있었다. 다만, 에이먼의 경우는 그걸 드러낼 수가 없다는 차 이뿐이 다. 그 들 모두 저택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갈 때 유일하게 컬렉션을 들고 가지 못한 게 에이먼이었다. 하여간 이상한 남매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에반은 순순히 뒷좌석으로 가 닉쿤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내 입장 정리를 하기 전에, 너희 가족은 어떻게 할 건지부터 말해봐.” 닉쿤이 진짜 작정을 하고 달려든 거라면 뭔가 생각이 있었을 거다. 에반은 그렇게 믿었다. 그렇지 않고는 저렇게 돌진할 녀석이 아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너만 15년 동안 우영 보고 산거 아냐. 사라랑 네 형제들도 우영한테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야. 그리고 제일 문제인 대넌도 있고.” “에이먼은 남의 일에 상관없는 성격이야. 그냥 웃으면서 '미친놈' 그러고 말걸. 클랜이야 내가 사고 치면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녀석이고, 클레어는 좋아하겠지. 허르베지쿨사를 자기가 이어받을 수 있다고 여길 테니까.” 분명히 그렇긴 하다. 허르베지쿨 가의 4남매는 사교계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아주 드물게 사이가 좋은 형제들이었다. 에이먼이 다소 따로 노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건 그의 개성이기에 모두가 존중해주었고 그 역시 가족들에게는 다정한 장남이었다. 게다가 워낙에 사리분별 확실하고 닉쿤을 절대적으로 믿기에 닉쿤이 뭘 하든 그러라고 할 성격이었다. 그리고 클랜은 분쟁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고지식하고 내성적인 에이먼에 반해 닉쿤을 특히나 잘 따르고 좋아했던 터라-둘 다 반골들이라- 아마 닉쿤의 결정이라면 뭐든 두 손 들고 환영한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클랜은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옛날에, 집 가출 직전까지 종종 '패리스 힐튼 같은 게 형수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우영이 나아.'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었던 걸 보니 예상은 했던 것같다. 그리고 클레어는, 닉쿤의 말대로 대환영일지도 모른다. 닉쿤의 대학 동기였던 맷 클리블랜드와 약혼을 한지 4년이 지났음에도 일 욕심이 많아 결혼하길 꺼려하던 그녀다. 유달리 야망이 강한 그녀라면 이 일로 닉쿤이 허르베지쿨가의 상속 명단에서 제외될지도 모르니 엄청 기뻐할 것이다. 물론, 그녀는 닉쿤을 아주 좋아하긴 하지만 그와 별개로 허르베지쿨사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닉쿤이 닉쿤사를 차렸을 때 가장 환영하던 것도 그녀였다. 에이먼이 맡은 방송사야 어쩔 수 없지만 부동산 회사만이라도 그녀가 차지하고 싶어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만큼 능력도 있다. “좋아, 에이먼, 클랜, 클레어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사라는?” “사라야, 잘 설득하면 되겠지.” “그럼 대넌은?” 마지막으로 에반은 가장 막강한 적이 될 대넌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닉쿤이 피식 웃는다. “걱정 마. 아버지는.” “걱정 안 할 수가 없잖아. 대넌 무서운 사람이야. 사실 지금까지 아무 연락 없는 게 더 무섭다고.” “걱정 마. 아버지도 어떻게 못 해.” “왜?” “나랑 10년 전에 계약한 게 있거든.” “계약?” “응.” 그러니까 그게 언제더라, 라며 닉쿤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때는 여름이었다. 학기 중 주말에 저택으로 돌아와 썬탠을 하고 시간을 보낸 뒤 지중해로 날아갔던 대넌이 돌아오자 재빨리 대넌의 서재로 쳐들어가 용건을 말했다. 「레이든 제약 회사 주식 저 주세요.」 인사 한 마디 없이 나온 그 말에 대넌은 이게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은 눈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기숙사에서 나오겠다고 해 한바탕 싸운 후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거긴 왜?」 「그럴 일이 있어요.」 「내가 왜 레이든의 주식에 네게 줘야 하지? 지금 미친 듯이 오르고 있는데?」 얼마 전 레이든 사에서 획기적인 에이즈 신약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문을 들은 대넌은 있는 대로 레이든 사의 주식을 사들였고, 그 일주일 후 기적의 약이라는 타이틀로 레이든 사의 신약 발표가 나자 레이든의 주식이 미친듯이 오르기 시작했다. 연이어 2주간 최고치를 경신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주식에 대넌인 연신 싱글벙글한 채였다. 「제게 주시면 알아요. 전부 주세요.」 「그러니까 왜?」 「내일 오후면 쓰레기가 될 테니까요.」 짤막한 그 말에 대넌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넌은 어린 시절부터 가끔 이상한 핑계를 대며 그를 혼란에 빠트리게 한 자신을 믿지 않는 성향이 있었다. 몇 번인가 자신에게 사기를 당한 뒤엔 더욱 그랬다. 「내가 왜 널 믿어야 하지?」 「뭐, 굳이 손해를 보시겠다면 안 말릴게요. 어차피 아버지가 손해 보는 거니까. 대넌 허르베지쿨의 운도 이제 한 물 갔다고 하겠죠, 다들.」 대넌이 일주일 만에 레이든 사의 대주주가 되긴 했지만 그 정도 금액을 손해 보는 건 대넌에게는 그냥 모기에 물린 정도의 타격일 뿐이다. 몇 억불 정도는 그냥 재수 없었다 생각하고 포기할 정도로 대넌은 통이 큰 남자였다. 문제는 그의 자존심이었다. 만약 혹시라도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문을 듣자마자 주식을 사 모은 그의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다. 더더구나 부동산 재벌이라 불리는 그가 투자에서 손해를 봤다면 허르베지쿨사에 타격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대넌 허르베지쿨도 한 물 갔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 였다. 아마 신문 지상에서 「황혼의 허르베지쿨」라는 타이틀을 본다면 그는 아마 혈압으로 쓰러질 것이다. 그의 운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대넌이 몇 번이나 자신에게 사기를 당해 열 받아 방방 뛰었던 걸 생각하면, 아마 주식 에서 피해를 본다면 그는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그 부분을 강조했더니 대넌은 쉽게 넘어왔다. 「뭐가 있는 거냐?」 「글쎄요…….」 「날 상대로 사기 칠 생각 말고 사실대로 말해.」 「싫습니다.」 「닉쿤!」 어쩐지 초조해진 대넌의 음성에 자연스레 미소가 흘렀다. 대넌이 아주 제대로 걸려들었다. 「그럼 뭘 주실 건데요?」 「뭐?」 「제가 어떤 정보를 드린다면 아버지는 뭘 주실 건데요?」 「무슨 소리냐?」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죠.」 「요트를 주마. 아니면 전세기? 그것도 아니면 니스의 별장?」 「어차피 제 건데요, 그것들은.」 「누가 너한테 준다고 하더냐?」 「형은 이미 생일 선물로 다 받은 것들이고, 클랜은 준다고 하면 짜증낼 거고, 클레어는 귀찮다고 할 테니, 저한테 주셔야죠. 이런 생활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건 저뿐이니까요.」 「그럼 뭘 원하는데?」 그 말에 들고 있던 종이 한 장과 펜을 건네자 대넌이 인상을 쓴다. 「이건 또 뭐야?」 「각서요.」 「무슨 각서?」 「10년 뒤에, 제가 누굴 선택하든 절대 방해도 간섭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각서요.」 「……내가 왜 이걸 써야 하는데?」 「제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제게 10년 간 유예 기간을 줄 생각입니다. 만약 그때까지 그 상대를 잊지 못한다면 무조건 돌진하려고요. 그때 가서 성가시게 굴지 말고 깨끗하게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달라는 겁니다.」 그 말에 순간 대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성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영리하고 대범한 둘째 아들이 이런 거래를 청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얼굴이었다. 그리고 뭔가 상당히 껄끄러운 얼굴이기도 했다. 「대체 상대가 누구길래 네가 이런 각서를 받는다는 거지? 거기다 10년?」 「아버지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 그 말에 대넌의 얼굴이 순간 경악으로 굳어진다. 「……사라냐?」 「……사라를 좋아하긴 하지만 전 늙은 여자는 취미 없습니다.」 「그럼, 재클린?」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절친한 친구의 딸 이름을 거론하는 대넌을 보자 절로 짜증이 일었다. 「제가 처음 몽정을 했을 때 낳았으면 제 자식뻘입니다.」 「10년을 기다린다며?」 「저 자신에게 주는 유예 기간이지, 재클린 클 때가지 기다린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성인입니다.」 「누군데?」 「그냥 모르는 채로 계세요.」 닉쿤이 계속해서 답을 회피하자 대넌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잔뜩 굳어진 얼굴로 묵직한 음성을 낸다. 「설마…… 에반이냐?」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진짜 테이블을 뒤엎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닉쿤은 그의 말에 천천히 답해주었다. 「아버지도 감이 많이 가셨군요. 슬슬 은퇴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그 말에 대넌은 “망할 자식”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누군데?」 「말 안 합니다.」 「……말 못할 이유가 있는 거냐?」 「아직은 아니니까요. 말씀드렸다 시피, 전 제 자신에게 10년간 유예 기간을 주겠다 했습니다. 그 사이에도 그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영원할 거라 장담할 수 있으니까요. 그 사이 미친 듯이 노력해보겠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웃음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 그리고 허르베지쿨 사까지 진창에 빠트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노력 중입니다. 진짜 죽을 각오로, 그 사람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10년 뒤에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으니, 아버지도 협력해주셔야겠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 」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상대냐?」 「아버지가 사라를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요. 물론, 그런 분이 메리지 호텔에서 성매매를 하셨다는 건 믿을 수 없지만…….」 상세한 장소까지 담긴 그 말에 대넌이 고함을 내지른다. 「닉쿤!」 「이미 옛날 일이니 저도 입 닫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진짜 놀랐습니다. 설마, 그 명단에 아버지 이름이 있을 줄이야.」 「내 이름이 있을 리가 없어!」 「그렇죠. 제임스 맨슨 씨.」 닉쿤이 히죽 웃으며 대넌이 가명으로 쓴 이름을 대자 대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임스 딘의 제임스와 찰리 맨슨의 맨슨을 따다 붙인, 그 장난 같은 가명을 닉쿤이 정확히 알아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건 어떻게 알아낸 거냐?」 「마담 베르니가 알려주더군요. 저번에 같이 술을 마셨거든요. 서로의 비밀 하나씩을 공유하기로 했는데, 너무 대단한 걸 알려줘서 놀랐습니다.」 마담 베르니는 뉴욕에서 유명한 사교계의 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가 하는 일은 불법적인 매춘 행위였다. 그것도 고급 호텔 하나와 연계해 잘 교육받은 미모의 재원들을 상류층 남자들에게 빌려주는 형식으로 말이다. 겉으로는 그냥 시간 많고 돈 많은 사교계의 꽃이었지만, 시간 당 천 달라에서 이천 달라의 화대를 받는 고급 매춘 알선업이 그녀의 본업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사교계에서도 친한 클럽의 몇몇 남자 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여자…… 절대 비밀을 지킨다더니…….」 「사라와 재혼 전이었으니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니 굳이 가명을 쓰고 호텔을 찾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왜 그러신 거죠?」 「잭에게 말린 거야. 그래서 네가 그녀와 공유한 비밀은 뭔데?」 「그건 말 못합니다. 비밀은 어디까지나 비밀이니까요.」 마담 베르니와 술을 마시며 처음으로 타인에게 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물론, 우영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사정만 설명을 하자, 그녀가 웃으며 요긴하게 써먹으라고 알려준 게 ‘제임스 맨슨’이었다. 「아무리 불륜은 아니라지만 아버지처럼 명망 있는 분이 매춘을 했다는 건 큰 불명예죠. 비록 7년 전 일이지만 말입니다.」 슬슬 약을 올리는 듯한 닉쿤의 말에 대넌이 그를 노려보며 협상안을 통보하라 재촉한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거냐?」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각서만 써주시면 됩니다.」 「싫다면?」 「사라한테 말해야죠.」 「닉쿤 벅 허르베지쿨!」 「인생은 원래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각서 써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한테 너무 불리한데? 네가 누굴 데려올 줄 알고?」 「그러니까 제가 그 큰 건을 던진 거 아닙니까?」 「……좋다. 단, 너도 지킬 조항이 있다.」 「무슨 조항이요?」 「첫째로 졸업 후 워튼 스쿨에 입학할 것.」 전통적으로 허르베지쿨 가의 사람들은 아이비리그 중 유펜 출신들이었다. 에이먼도 클랜도 클레어도 모두 유펜에 입학했지만 닉쿤만 유독 고집을 부려 예일로 들어갔다. 네 남매들 모두 유펜 경영학부에 입학시키는 게 대넌의 꿈이었는데, 닉쿤이 그 꿈을 깬 것이다. 그러니 최후의 선택으로 유펜의 워튼 스쿨을 권하는 거다. 어차피 닉 쿤 도 당분간 우영과 떨어져 있어볼까 하던 터라 그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요?」 「MBA 수료 후엔 허르베지쿨 사가 아니라 자기 회사를 세워 자산 십억 불 규모로 키울 것. 그리고 그때까지 최소 한 백 명의 여자들을 만날 것.」 두 번째는 분명히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세 번째 조건을 듣는 순간 닉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최소 백 명이야.」 「그건 뭡니까?」 「네가 사랑하는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 성격에 10년 간 기를 쓰고 잊어보겠다고 했으니, 진짜 죽을 각 오로 잊어 봐. 그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여자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지. 그리고 만약 그 백 명 중에도 네 마음을 끄는 여자가 없다면 내가 포기하마. 그리고 10년 뒤에도 네 마음이 그대로라면 인정해주지. 그렇게까지 죽 을 각 오를 하고 잊으려 노력했는데도 안 된다면 그건 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니까. 할 때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 하는 거다. 네가 10년 뒤에 당당하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해봐. 진 짜 절대 후 회하지 않도록.」 다소 어이없는 조건이긴 하지만 닉쿤은 그도 그럴 듯하다 생각했다. 백 명을 만나봤는데 그 백 명 중에서 설마 자신의 마음을 끄는 여자가 없을까. 있다면 이 혼란이 순식간에 종식되고 우영도 살고 자신도 사는 거니 괜찮다. 그리고 없다면 자신은 진짜 우영에게 눈이 먼 거니 어쩔 수 없다. 최선을 다 해보자 했으면 진짜 할 수 있는 일 들은 모두 다 해보는 거다. 단 마약만 빼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다시 써와. 그럼 사인하지.」 자신이 건 조건이 만족스러운 듯 대넌이 웃어 보이자 닉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밀었던 종이를 찢고 자리에서 일 어섰다. 「각서를 다시 작성해 오겠습니다.」 닉쿤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자 대넌이 닉쿤을 부른다. 「그 전에 레이든은 뭐지?」 진짜 초조한 듯한 그의 태도에 닉쿤은 싱긋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사인하시면 얘기하죠.」 “그래서 사인하셨다고?” 닉쿤의 설명을 들은 에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물론이지. 설마, 아버지도 내가 진짜 10년 간 그 녀석을 사랑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하긴…….” 보통 10년이면 끓어 넘치던 연정도 식게 마련이다. 게다가 닉쿤처럼 온갖 종류의 여자들을 다 만나고 다닌 사람이라면 더욱 말이다. 아마 대넌도 그 점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닉쿤의 바람기가 상상을 초월한 상태라 아무 마음을 푸욱- 놓고 있었을 거다. 그러다 뒤통수를 맞으니 너무 열 받아서 전화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들과 한 약속만은 목숨을 걸고 지키는 대넌이니, 이제 와 뭐라 말도 못하고, 혹시나 해서 만류하려 들면 그대로 닉쿤이 그 각서를 들이밀고 고소 운운할 게 뻔하니 속만 썩고 있는 거다. 조만간에 병원에 실려 갈지도 모르겠다. “그래, 좋다. 하여간 워튼 스쿨은 졸업했고 자산 십억 불도 채웠고, 여자 100명은 만난 거야?” 에반은 진심으로 그게 궁금했다. 닉쿤의 염문설이야 하도 화려해 알고 있지만 설마 백 명이 될까 싶어서였다. “정확히 182명.” “……네 바람기가 각서 조항 때문은 아니었구나.” 닉쿤의 그 화려한 여성 편력이 대넌과의 약속 때문인가 감동 받았던 에반은 닉쿤의 입에서 숫자가 나온 순간 절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저건 타고난 거다. 절대로, 타고난 거다. “하여간 뭐 그렇지. 그래서 당신의 입장은?” “사실은 네가 장난으로 작업 거는 걸까 봐 걱정했는데, 진심이라면 내가 말릴 이유가 없지. 사실대로 말해 난 네 가족도 아니고 더더구나 친구도 아니니까. 문제는 우영이야. 우영을 어떻게 설득할래?” “나도 그게 고민이야. 사실은…… 좀 쉽게 생각했었어. 어차피 연애는 안 한다 했으니 다른 애인 생길 일은 없을 거고, 내가 고백하면 금방 넘어올 줄 알았거든.” “너 아직도 우영을 모르는구나. 그 녀석이 네가 고백하면 얼씨구나 하고 달라붙을 줄 알았냐? 도망가지.” “나한테까지 그럴 줄은 몰랐지.” “너니까 특히 더 그래. 널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기니까. 친구가 자기한테 그런 감정 갖고 있다는 거 꽤 배신감 느껴질 수도 있어.” 그 말에 타격이 된 듯 지금까지 무표정하던 닉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에반도 이 이상은 말릴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실은 우영이 널 좋아했는데 내가 그걸 7년 전에 뜯어말려 포기시켰다, 라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다. 남의 감정을 자신이 토로한다는 것도 웃기고, 또 자신이 말린 걸 알면 닉쿤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아서였다. “하여간 난 이제 백기 들었어. 여기서부터는 알아서 해. 고생 좀 하겠지만…….” “백기 든 김에 좀 도와주지?” “난 우영 편이라 그 짓만은 못 하겠다.” 어차피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갈 걸 아는데 가라고 우영의 등을 떠밀 수는 없어 에반이 작게 중얼거리자 닉쿤도 더 이상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지하 주차장 안에 뭐 볼 게 있냐 싶었지만, 나름대로 생각할 게 많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잠시 입을 다물고 한숨을 내쉬던 에반은 그제야 뭔가 떠오른 듯 닉쿤을 불렀다. “그런데 레이든은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네가 그 에이즈 신약 실험이 사기인 걸 어떻게 알았는데?” “아…… 뭐. 옆 기숙사에 괴짜 녀석이 하나 있었거든. 벤이라고 알지? 지금 시스본 제약 회사에 있는 녀석.” “아, 알아. 그 이상한 친구.” 에반이 가끔 닉쿤에게서 들어 알고 있던 천재 소년 이야기를 떠올리며 답하자 닉쿤이 말을 이어간다. “그 녀석이 그 얘기를 하더라고. 레이든 사의 에이즈 신약 보고 기사를 보고 이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당시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그 녀석이 그때 마침 같은 아이디어로 논문을 준비 중이었거든. 단 실효성의 문제로 인해 실험은 시작도 못해봤지만, 그게 확실히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교수들과 팀을 짜서 반박 논문을 준비한 거지. 그게 딱 그 다음 날 터졌어. 터트리기 전에 미리 알려주더라고.” “아…….” “그 기적의 약은 지금 벤이 준비 중이야. 10년 전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하지. 괴짜지만 진짜 머리는 비상한 녀석이거든.” 닉쿤의 말에 에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닉쿤이 정치 경제 분야뿐 아니라 명망 높은 과학자나 의사, 그리고 문화계 거물들과도 계속해서 교제를 하는 이유가 그런 거였던 모양이다. 정보는 언제 어디서든, 뜻밖의 곳에서도 날아드는 법이니까. “그럼, 얘기 끝난 거지?” “뭐…….” 짤막한 답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우영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우영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닉쿤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아무래도 아까 데이트 어쩌고 하더니,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싶어 에반은 안됐다는 얼굴로 이쪽을 향해 오는 우영을 바라봤다. 닉쿤의 기분이 개떡이니 아무래도 뭔가 일이 나도 나지 싶었다. “오늘 내 남은 스케줄 전부 취소해줘.” “응?” “이대로 아파트로 돌아갈 테니, 취소해줘.” 반대하지 않겠다 했더니 이젠 아예 부리는 닉쿤의 꼴에 에반은 조금 비위가 틀렸지만 두 사람의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어긋나게 한 것이 자신이었던지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대신, 애 너무 잡지 마라. 데이트 어쩌고 하는 것 같던데.”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이 날 잡고 있어. 지금 아주 미치겠다고.” “그렇게까지 했는데 못 알아먹는 바보가 어디 있어?”라고 말하며 닉쿤은 거친 손길로 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에반 역시 운전석으로 가기 위해 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을 본 우영의 걸음이 빨라진다. “미안, 늦었지?” “어딜 다녀온 거야?” 우영을 맞이한 닉쿤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진짜 화가 난 듯해 에반은 우영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재빨리 자신의 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어, 점심.” “엘레나랑 같이?”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어. 모델 활동 정지 먹어서 시간이 남아도나 봐.” “데이트는 또 뭐야?” 주차장에 선 채 쥐 잡듯 자신을 몰아치는 닉쿤을 슬쩍 본 우영은 여기서는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에반의 차 바로 옆에 주차해놓은 닉쿤의 차 쪽으로 다가섰다. “타. 타고 얘기하자.” “뭔데? 데이트를 누구랑 하는 건데?” “가면서 얘기하자니까.” “엘레나는 왜 만난 거야?” “우연히 만났어.” 락을 풀고 우영이 먼저 운전석에 올라타자, 닉쿤이 인상을 확 찡그린 채 조수석에 올라탄다. “우연히 만난 건 만나 거라 쳐도 무슨 얘기를 한 거야?” “그냥, 뭐……. 시시한 얘기. 생각보다 귀엽더라. 아주 청순하고…….” 핸들을 잡은 우영이 기어를 바꾸자 안전벨트를 맨 닉쿤이 어이없다는 듯 받아친다. “그 얼굴 어디가?” “아니, 얼굴 말고 뇌가.” “……깨끗하긴 하지. 순백이지.” “응. 놀랐어. 이름 써보라니까 영문으로 자기 이름만 쓰는데 ellena라고 쓰더라고. 생각해 보니 걔 러시아 애잖아. 엘레나면 Ejieha아니던가?” “……그렇지.” “역시 러시아어도 못하나 봐. 큰일이다.” 영어를 못 하길래 혹시나 러시아어라도 잘하나 희망을 걸었던 우영은 모국어도 모르는 엘레나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닉쿤은 엘레나가 문맹이건 장님이건 관심 없는 일이었다. “지금 엘레나가 문맹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누구랑 데이트를 한다는 거야?” 겨우 말을 돌렸다 싶어 마음을 놓았던 우영은 말하기 껄끄러운 화제를 꺼내는 닉쿤을 보며 엑셀을 밟아 서둘러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날씨 좋네. 해안가 가면 좋겠다. 너 썬탠 좀 해야지? 백인들은 귀찮겠어.” “말 돌리지 마.” “……어디로 갈까? 회사로 갈래? 점심 먹을래?” “집으로. 그래서 누구랑 데이트를 한다는 거야?” “……누군지는 아직 말 못해.” “왜?” “사정이 있어. 첫 데이트니까 해보고, 경과 좋으면 말할게.” 아주 당당하게 데이트 뒤에 사후 보고까지 하겠다는 우영의 말에 닉쿤은 혈압이 올라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눈치도 빠른 녀석이 자신의 직접적인 대쉬를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눈치 채고 이해하고 고민하고도 남을 녀석이다. 그걸 뻔히 아는데 끝까지 모르는 척하려는 우영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너, 나랑 장난해?” “시간이 남아 도냐? 왜 그런 장난을 해? 너도 바쁘지만 나도 바빠.” “그럼 뭐하자는 거야?” “뭘 하긴. 나도 연애 좀 해보겠다는 거지.” “연애는 안 한다며?” “그건 그때 얘기고!” “우영, 너…….” “어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내 연애에는 간섭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내가 너 여자 만나는데 뭐라고 하는 거 봤어?” “그거랑은 사정이 다르잖아! 너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야? 그렇게 표현하는데도 못 알아먹어?” “네가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 우영을 일부러 정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모르는 척하겠다고 했으니 끝까지 모르는 척 할 셈이었다. 아는 척하면 끝장이다. 자신이 아는 기색을 하는 순간, 닉쿤은 무작정 달려들 것이다. 닉쿤을 좋아하지만, 그리고 사랑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그를 믿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그이기 때문에 시작할 수 없다. 이렇게 좋은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도 싫고, 상처받는 것도 싫다. 닉쿤은 순간의 호기심이나 장난이겠지만, 아니,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 해도 결국 상처 받는 건 자신이다.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남겨지는 건 자신뿐이다. “우영, 너 진짜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뭘?” “……진짜 이렇게 나올 거야?” “네가 무슨 소리하는지 진짜 모르겠다. 집에 데려다줄게. 3시간 정도 비니 좀 쉬어.” “……데이트는 언제야?” “아, 그렇지 않아도 그 말 하려고 했어. 토요일이야. 아무래도 주말 약속은 일요일로만 잡아야겠다.” “뭐?” “그렇게 됐어. 미안.” “내가 약속할 때는 그런 말 없었잖아.” “……뭐…… 그렇게 됐어. 미안하다. 대신 일요일에 하루 종일 같이 있자. 데이트 보고도 할 겸. 네가 이것저것 어드바이스도 해주면 좋고.” 당당하게 토요일은 미지의 그놈과 그리고 일요일은 자신과 데이트를 하겠다는 우영의 발언에 닉쿤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기도 안 찬다. 자신도 양다리를 걸친 적은 없다. 그런데 우영은 아주 당당하게 양다리를 걸치겠다 말하고 있었다. 우영이 자신의 의도를 모를 리 없으니 이건 분명 양다리였다. 거기다 분명 자신과 선약을 하곤 그 놈과 약속을 위해 자신과의 약속을 미룬다는 것 역시 충격이었다. 우영에게 늘 일 순위는 자신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약속을 노먼과의 약속 뒤로 미룬다는 건, 우영에게 있어 자신의 순위가 밀린다는 의미 같아 더 짜증이 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영이 자신에게 이럴 수는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겨우 자신에게 걸어둔 마법을 풀었는데 이번엔 우영이 마법을 걸려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어쩌면 이렇게나 어긋날 수가 있을까? 생각 같아서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냐고 따지고 확 일을 저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진짜 도망칠 것 같아 일단은 참기로 했다. 참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토요일날 데이트 못 해. 취소해.” “안 돼. 이미 약속했어.” “클랜이 돌아왔어. 집에 가봐야 돼.” 닉쿤의 말에 우영이 놀라 그를 돌아봤다. “클랜이?” “주말에 가족들끼리 모여서 식사할 거야. 너도 같이 가는 거야.” “웬일로? 당분간 안 돌아올 것 같더니?” “얼굴 보고 얘기한대. 그러니까 토요일 데이트 취소해.” 어지간하면 노먼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그렇다고 클랜이 돌아왔다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5년 전 집을 뛰쳐나간 뒤 제대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더더욱 그랬다. “드디어 작가를 포기했나?” “모르지.” “잘 됐네. 나도 그렇지만 클랜도 진짜 소설에는 재능이 없어.” “……노먼 맥캐인은 재능이 넘치고?” 갑자기 나온 그 이름에 우영은 놀라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그 반응에 닉쿤은 대강 알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앉아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노먼 맥캐인이 또 나타난 거군. 그래서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귀신이다. 하긴, 자신처럼 낯을 가리는 사람이 난데없이 데이트라니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상대가 노먼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래서 너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는 질색이다. “……미안. 말하려고 했어.” “노먼 맥캐인하고 데이트를 한다고?” “노먼이 계속 고백했었어. 지금까지는 그냥 모르는 척하고 무시했는데, 이번에는 좀 달라. 진지하게 나오더라. 그래서 생각해보기로 했어.” “그 녀석은 네 종신보험이 되어준대?” “모르지. 하지만 10년 간 날 기다려준 건 그 녀석뿐이야. 그러니까 그냥 믿어보고 싶어.” 우영의 진지한 말에 닉쿤은 허탈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10년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표현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였을 뿐, 10년을 인내한 건 마찬가지다. 아니, 자신이 더 안 좋다. 말도 못하고 끙끙대며 가까이 다가오면 호흡이 거칠어질까 마음에도 없는 1미터 경계령까지 내렸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우영이 얼마나 상처 받은 얼굴을 했는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 우영만 상처 받은 게 아니다. 자신도 상처 받았었다. 그래도 끊어내자고 생각했다. 서로 아프더라도 만약을 위해 감정을 정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젊은 혈기에 객기를 부리다간 두 사람 모두 상처 받을 테니까,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그 인내의 대가를 돌려받자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거렸다. 설마 그 인내의 대가가 이렇게 돌아올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었다. 이렇게 잔인하게 돌아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도 우영은 들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막막한 기분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 가야할지 머리가 다 아프다. 조수석에 앉아 슬쩍 옆을 돌아보자 조금의 동요도 없는 차분한 우영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영은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웠다.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 자신의 평판 같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10년 간 자신은 진짜 엉뚱한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었다고 하지만, 주변의 압박이 사라지면, 다 잘될 줄 만 알았다. 고백하는 순간 우영은 조금 망설이면서도 결국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고 여겼다. 근거도 없이 그렇게 자신했었다. 그게 틀렸다는 걸 이제야 겨우 알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들도, 에반도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우영 케이먼,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보다 우영을 공략하는 게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Chapter 4 우영은 아주 어린 시절의 꿈을 꾸고 있었다. 분명히 꿈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기억이었다. 작은 마당이 있던 허름한 집에서 어머니가 갑자기 우영의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외할머니 댁에 가야 한다며 옷 가지들을 커다란 배낭에 채워 넣은 그녀는 책도 가져가자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교과서며 공책이며 하나도 넣 지 않았다. 대신 사진 한 장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고는 그대로 자신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막 낮잠에서 자다 깬 여동생이 자신도 가겠다며 울자, 넌 집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며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는 그 집을 나 섰 다. 여름이었다. 뜨거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참을 자갈길을 걷자 저 멀리서 오는 작 은 버스가 보였다. 버스 위에 올라타 잔돈을 낸 어머니는 자신을 꼭 끌어안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의 어 머니가 아니었다. 수다스럽고 밝고 활기차던 그녀가 그 날만은 유독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는 내 내 가끔 숨을 멈췄다 몰아쉬기를 반복했다. 엄마 왜 그러냐고 물어도 그녀는 자신의 손을 꽉 쥘 뿐 사정을 설명해주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시내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곤 다시 버스를 갈아탔던 것 같다. 거기가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잠이 들어 한참을 자다 깨도 산만 보여 다시 잠을 자고, 또 눈을 떠도 산이라 다시 산을 잤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침내 지루한 버스 여행이 끝났을 때 어머니는 자신을 버스 정류장 한 귀퉁이에 내려두곤 화장실에 다녀 올 테니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에 따라 얌전히 기다렸다. 저 멀리 보이는 시계탑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속해 서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버스의 출발 과 도착이 끝나고 정류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꼼짝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어머니가 왔는데 자신 이 없으면 화를 낼 테니까, 다시는 어머니를 못 볼지도 모르니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다리가 붓고 배가 고파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새벽이 가까워갈 즈음에야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손을 잡고 근처 의 경찰서로 자신을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어머니도 여동생도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이름으로 겨우 그 집을 다시 찾았을 때 어머니 와 동생은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았다. 멀리, 아주 멀리로 떠났다고만 들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건 사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머니는 자신을 버린 거였다. 오래된 사진 한 장 뒤에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만 남긴 채 자신을 버린 거다. “아…….” 삐리릭거리는 전자음에 눈을 뜬 우영은 서둘러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목소리가 왜 그래?」 누구냐는 말도 없이 대뜸 나온 그 말에 우영은 서둘러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닉쿤이였다. “어…… 내가 너무 오래 잤나? 지금 데리러 갈까?” 아파트에 들른다는 닉쿤을 혼자 내려두고 자신 역시 집으로 돌아와 잠깐 낮잠을 자던 우영은 서둘러 사이드 테이 블의 시계를 찾았다. 5시 20분이었다. 6시까지 가기로 했으니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상 체를 드는 순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운 목소리잖아. 왜 그래?」 “아냐. 꿈꿨어.” 「무슨 꿈?」 엄마가 자신을 버릴 때의 꿈을 꿨다고는 할 수가 없어 우영은 눈물을 닦으며 대강 말을 돌렸다. “네가 내 치즈 뺏어먹는 꿈.” 「……내가 주면 줬지, 뺏어먹은 기억은 없는데?」 “그러니까 꿈이지. 지금 나갈게. 집이지?” 「아냐. 병원이야.」 병원이라는 말에 우영은 벌떡 일어나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왜? 머리에 이상 있대?” 「……넌 내 머리에 이상 있었으면 좋겠냐?」 “그런 건 아니지만……. 병원은 왜?” 「기브스 풀러 왔어. 여기로 오지 말고 기다려. 갈 테니까.」 “골절이라면서 벌써 기브스를 풀어?” 「……그런 사정이 있어. 기다려, 하여간. 도착 전에 전화할 테니까.」 대체 무슨 사정이기에 벌써 기브스를 푼다는 건가 싶어 우영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골절이면 못해도 1달인데, 엑스레이 필름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싶었다.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해줄게. 6시 30분쯤에 도착할 거야.」 “그래, 그럼.” 짤막한 통화를 끝내며 우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질 때 그렇게 헤어져서 걱정했었는데, 닉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이전과 같은 태도로 자신을 대해주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관계가 허물어지지 않아서, 그와 자신이 이전과 같아서 다행이었다. 버림받는 것보다 더 아픈 게 사랑하고 믿던 사람의 등을 봐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 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닉쿤을 친구로 두자고 맹세했던 건 그와는 평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닉쿤은 모르지만 이미 종신계 약서는 자신이 작성해두었다. 편안한 친구로, 슬픈 일이 있을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친구, 형제 같은 존재. 그렇 게 남겨두고 싶었다. 사랑을 하다 사랑이 끝나면 뒤돌아서서 '안녕.'한 마디로 끝내는 건 싫었다. 아마, 에반이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알아서 포기했을 것이다. 이대로가 좋으니까, 지금이 너무 좋으니까. 어색한 얼굴로 만나 안부나 묻고 웃으며 헤어지는 사이는 싫으니까. 언제까지나, 언제 어디서 만나도 웃으며 같이 이야기하고 다시 웃고 떠들고, 평생을 그렇게 웃으며 지내고 싶었 다. 닉쿤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닉쿤이 자신을 데리고 장난을 칠 정도로 막나가는 녀석이 아니라 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서려는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가 궁금한 거다. 이렇게 좋은 관계를 무너뜨리려는 저의를, 그리고 대체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의도인지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아니, 어떤 의도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의 이런 좋은 관계를 무너뜨려가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 7년 전이라면, 가슴 떨려하며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 그리고 지금 자신은 너무 편안하고 행복하다. 이 행복을 깨트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여기까지 올 때까지 힘들었 다. 한순간에 마음을 잘라내고 온 것이 아니다. 지난 7년 간 익숙해지기 위해 몸부림을 쳤고, 이제 겨우 아무렇 지 않은 듯 닉쿤을 대하게 되었다. 그 시간과 자신의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닉쿤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건 바로 이 상태였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이대로 이길 바랄 뿐이다. *** “운거야…….” 기브스를 풀고 손의 상태를 확인하던 닉쿤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닉쿤의 오른손 손목 관절 상태를 확인한 브렛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닉쿤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브렛에게 묻는다. “다 된 거죠?” “응. 그래도 겨우 하루 만에 풀다니 별일이다.” “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요. 그럼 갈게요.” “그래. 아, 클랜 돌아왔다며?” 돌아온 지 이제 겨우 5시간인데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벌써 브렛의 귀에까지 그의 귀향소식이 들어간 건가 싶어 닉쿤은 쓰게 웃으며 브렛을 돌아봤다. “그 녀석이 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하하, 무슨 짓은. 그냥 안부 전화했던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점잖아졌던데.” “그 녀석이 점잖아질 리가 없죠.”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니까. 네가 게이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렇게 말하며 브렛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갖고 던진 그의 농담에 닉쿤은 ‘그거 사실인데요?’라고 반박하려다 그냥 참기로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저녁식사 같이 하시죠. 클랜도 함께.” “그래. 사라에게도 안부 전하고.” “네.” 자신의 주치의이자 부친의 오래된 친구이기도 한 브렛에게 깍듯한 인사를 마친 닉쿤은 겨우 이틀 만에 자유로워 진 오른손의 손목을 움직이며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분명 울던 목소리였다. 우영 자신은 잘 모르지만 기숙사에서 간혹 울다 깨던 우영의 목소리가 딱 그랬다. 보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울거나 하지 않지만, 아주 가끔 어릴 때의 꿈을 꾸면 우는 듯했다. 또 어릴 때 꿈을 꾼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어서 가서 끌어안고 위로해줘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테니 울지 말라고, 절대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줘야 한다. 아프지 않게, 다시는 울지 않게 꼭 끌어안아줘야 한다. ***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만진 뒤 구겨진 셔츠를 갈아입고 다시 닉쿤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우영은 다음 장소를 확인한 뒤 시계를 돌아봤다. 6시 25분이었다. 시간이라면 칼 같은 녀석이니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된 듯해 작은 스케줄 용 팜(palm-PDA)을 가방에 넣고 양복재킷을 걸쳤다. 넥타이와 양복을 걸치며 다시 거울을 보자 살짝 부은 눈이 보 였 다. “뭐 이렇게 부은 거야…….” 낮잠을 자서인지 울어서인지 눈이 살짝 부어 있었다. 조금 있으면 가라앉겠지만 닉쿤라면 기차게 알아볼 것 이다 . 팩이라도 해야 하나 하는 중에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려왔다. 양복 재킷 안쪽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폴더를 열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경쾌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일 약속 기억하지?」 노먼이었다. “응?” 「내일 데이트 말야. 어떤 스타일이 좋아? 캐주얼? 아니면 정장? 아니면 유러피언? 극장 들러서 움직일 거니 턱 시도는 좀 그렇고, 넌 뭐 입을 거야?」 “어…… 내일이 토요일이었냐?” 「응. 몰랐어?」 “어라? 아, 그렇네. 아, 맞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어. 내일 안 된다.” 「뭐?」 “클랜이 돌아왔대. 내일 모여서 식사하기로 했나 봐. 아, 내일! 큰일이다. 찾아올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야, 끊자. 나 시간 없다.” 「어이, 첫 데이트를 그딴 식으로 취소하면서 무조건 끊자니? 이건 무슨 예의야?」 “데이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말이 데이트지 그냥 놀러 나가는 거잖아. 야, 나 진짜 바빠. 닉쿤 내려주고 미친듯이 뛰어 다녀야겠다.” 「……그럼 그렇지.」 한숨 섞인 노먼의 음성과 함께 뭔가 탕-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때와 달리 기분이 상한 듯한 그 목소리에 우영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통화에 열중했다. “미안하다. 클랜이 갑자기 돌아올 줄 몰랐지.” 「네가 그 놈 돌아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 “전해줄 것도 있고, 또 오랜만이잖아. 얼굴 봐야지.” 「……그래, 뭐. 어쩌겠냐. 그래도 나 진짜 지금 많이 실망했어. 아버지한테 미친놈 소리 들어가면서 깨지고 메이시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잔뜩 쇼핑해왔는데.」 “쇼핑을 왜 해?” 「너랑 하는 첫 데이트잖아. 근사하게 보이려고 아버지 카드 훔쳐 들고 가서 미친 듯이 사재꼈다고.」 “미친놈. 나랑 만나는 게 뭐라고 아버지 카드까지 훔쳐?” 「첫 데이트야.」 “그게 뭐?” 「……첫 데이트라고. 우영 케이먼. 너 아직도 그 의미를 모르겠어?」 “무슨 의미?”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너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내 데이트 신청 받아들였구나.」 “다른 의미가 있어야 돼?” 「어이, 친구. 첫 데이트라는 건 말야. 첫 데이트야. 너랑 나랑 정식으로 연애한다는 의미라고.」 순간 우영은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아무리 이용할 생각이었다지만 그 데이트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 다. 연애는 안 해봤어도 데이트는 몇 번 해봤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한 데이트는 지금까지 주변의 압박이 못 이 겨 한, 애초에 거절하기 위한 데이트였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먼도 그걸 알고 있을 거라 생 각했었다. 첫 데이트를 거창하게 생각할 정도로 어린 나이도 아니고, 어차피 첫 번째 데이트란 건 다들 탐색용 으 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마음에는 드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피기 위한 것이지, 진짜 사랑해서 데이 트를 하는 일은 드물다. “너, 나이가 몇 개냐? 무슨 첫 데이트 타령이야? 데이트 안 해봤어?” 「그래, 첫 번째 데이트야 탐색전이지, 나도 알아. 그런데 너랑 나랑 서로 탐색할 때는 지났잖아. 그러니까 나한 테 너와의 첫 데이트는 정식 교제의 의미라고. 알겠어?」 “모르겠는데…….” 「너, 진짜 내가 장난으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냐?」 “장난이 아니면? 어떤 병신이 네 고백을 믿냐?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내가 그렇게 너한테 못할 짓을 했냐?」 그 말에 우영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양심이 있으면 생각을 해봐.” 우영의 한숨에 노먼 역시 한숨을 내쉰다. 「지금부터라도 잘해야겠군.」 “잘하지 마. 네가 잘한다니 무섭다.” 진심으로 거절하고 싶은 마음에 툭하니 내뱉은 우영은 다시 가방을 챙기러 침실로 향했다. 시간을 슬쩍 보니 6시 27분이었다. 슬슬 닉쿤이 도착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딱 히 올 사람이 없어, 세탁 배달을 왔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든 우영은 그대로 현관으로 걸어가 소리쳤다. “누구세요?” “나.” “네?” “나라고. 닉쿤 벅 허르베지쿨.” 핸드폰을 들고 통화 중이던 우영은 닉쿤의 목소리가 확실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전화를 끊고 문을 열었다. 이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닉쿤은 보통 그의 집으로 부르면 불렀지, 자신의 아파트를 찾는 일은 드물었다. 뭐 딱히 이 집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럴 시간이 없었던 탓이다. 말 그대로 시간이 금인 직업이었다. 한 시간 상담료만 삼천 달라이고, 식사를 하고 정보를 얻는 데에 오천 달라다. 그리고 직접 닉쿤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십만 달라를 깔고 들어간다. 닉쿤의 하루 24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자면 자신의 연봉급이었다. 그런 그가 굳이 시간을 내 자신의 아파트를 들를 여유가 없던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집에도 서너달에 한 번 간신히 휴가를 내 돌아가는 닉쿤이였다. 그가 직접 오겠다고는 했지만 집에 들를 줄은 몰랐던 터라 우영은 놀라 재빨리 열쇠를 따고 문을 열었다. “전화하지? 그냥 내가 내려가면 되…….” 뭐 하러 귀찮게 올라왔냐고 말하려던 우영은 문을 열자 보인 닉쿤의 얼굴이 아닌 닉쿤의 가슴팍이 보였다. 순식간에 그에게 끌어안긴 우영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울었잖아.” 순간 ‘귀신같은 놈’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겨우 몇 초 잠깐 통화한 걸로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까지 알다니, 진짜 너무 오래 알아온 것 같다. 징글징글하게 오래 알았다. “……누가 울었다고 그래?” “귀신은 속여도 난 못 속여. 또 안 좋은 꿈을 꾼 거지? 울 것 같아서 달려왔어.” 머리카락 위로 닉쿤의 호흡과 함께 입술이 닿았다. 걱정스러운 듯 등을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그의 행위에 우영은 마음을 놓고 그의 품에 안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뛰어와 주는 게 닉쿤이였다. 한 동안 서로가 바빠 무심해졌다고 생각하던 때에조차, 닉쿤은 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컨디션에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쉬라고 먼저 말해주었다. 상사로서도 좋았지만, 친구로서는 더없이 좋은 녀석이었다. 이 품을 잃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지금 이대로 시간이 정지해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일 정도로, 그의 품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어릴 때 꿈을 꾼 거야. 그냥, 그런 거야. 너, 안 늦었어? 안 가 봐도 돼?” “……조금만 더 있다.” 머리카락 위로 닿는 닉쿤의 숨결이 뜨거웠다. 그리고 귀에 닿은 그의 가슴에서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퍼진다. 등을 쓰다듬어주던 상냥하던 손길도 어쩐지 점점 끈적끈적해지는 느낌이었다. “닉쿤, 또 열 오르는 거 아냐?” 걱정이 돼 우영이 고개를 들여 그렇게 묻자 닉쿤이 쓰게 웃는다. “……어쩔 수 없어.” “왜? 감기야? 어제부터 이상하더니, 진짜 몸살이라도 걸린 거 아냐? 너무 무리했어, 그 동안.” “몸살도 감기도 아냐. 이건 지병이야.” 그 말에 우영이 놀라 닉쿤을 부드럽게 밀어낸다. 그의 옆에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닉쿤이 지병이 있다는 건 몰 랐었다. “지병? 그럼 병원 가야지?” “소용없어.” “왜?” “이 병은 죽어도 못 고칠 거야, 아마.” “무슨 병인데?” “……너 말해도 몰라.” “나 하우스랑 그레이스 아나토미 열심히 봤어. 어지간한 병명은 다 알아.” 마치 자기가 의사라도 된다는 듯 진지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우영의 눈빛에 닉쿤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우영의 이마를 툭 내리쳤다. “텔레비전 좀 그만 봐.” “도움이 되는 걸. 21세기의 신은 TV 안에 있어.” “마릴린 맨슨도 좀 끊고.” “요즘은 안 들어. 그런데 너 진짜 괜찮은 거야?” “글쎄……. 별로 괜찮지는 않은데 어쩔 수 없지. 중요한 스케줄이 있으니.” “아, 그래. 빨리 움직여야지. 나가자. 가방 갖고 올게.” “그래.” 닉쿤은 문턱에 기대선 채 우영이 가방을 들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말끔하게 양복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우영이 천천히 왼쪽에 있는 침실의 문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천천히 아파트 내부를 돌아봤다. 몇 번인가 들른 적은 있 지 만 들어간 적은 없던 공간이었다. 한달 렌탈비가 1800달라에 달하지만 내부는 허름하다. 처음 우영이 이 아 파트 를 빌렸을 때 당장에 그냥 내 아파트로 들어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스치기만 해도 이 정도인데 매일 아침과 밤마다 집에서 부딪치면 곧 사고를 칠 게 뻔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냥 사고를 쳐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끌다가는 이도저도 안 된다. “다 됐어. 나가자.” 가방을 들고 나오는 우영을 보며 닉쿤은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뻗었다. 그제야 우영은 닉쿤의 손에 기브스가 풀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너 진짜 푼 거야? 골절이라며?” “거짓말이었어.” “응?” “그냥 두면 네가 죽어도 일을 안 바꿀 것 같길래.” “응?” “멀쩡한 손에 기브스 했었다고. 이제 일도 바꿨으니 풀어야지. 겨우 이틀 묶어놨다고 뻣뻣하네.” 아주 뻔뻔스럽게 사기를 쳤다고 고백하는 닉쿤의 태도에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닉쿤!” “사정이 그렇게 됐어. 가방 줘.” “가방은 왜?” “무겁잖아.” “그러니까 왜?” “들어준다고.” “난 팔 멀쩡하거든? 그리고 너처럼 부러졌다고 사기도 안 쳤거든? 이게 뭐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 가방 줘.” 말은 달라면서 닉쿤은 그대로 우영이 들고 있던 검은색의 서류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에 우영은 놀라 재빨리 문을 닫아 잠근 뒤 닉쿤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가방 줘. 내 가방을 왜 네가 들어?” “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을 연 닉쿤이 문을 막아선 채 먼저 타라는 신호를 보낸다. 누굴 기다리는 법 없이 재깍재깍 자기가 먼저 타야 직성이 풀리는 닉쿤의 과도한 친절에 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빨리 타기나 해. 시간 없어.” 우영의 의심에는 이제 이골이 난 듯 닉쿤이 태연하게 대꾸하자 우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섰다. 그 뒤로 곧장 닉쿤이 들어서 1층의 버튼을 누르자 곧장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우영은 불편한 듯 자신의 가방과 닉쿤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하지만 닉쿤은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 봐? 내가 그렇게 근사해?” “좀 미친 것 같아서.” 노골적인 우영의 표현에 닉쿤은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말을 해도 꼭…….”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너 진짜 귀신이라고 들른 거 아냐?” “너까지 액소시즘하자고 설치지 마. 새대가리 하나로 충분해.” “그럼 굿할래?” “……작두 타는 광대 보러 가자고? 관둬.” 순간 문이 열리자 닉쿤이 문을 손으로 밀며 우영에게 길을 터주었다. 연이어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우영은 찝찝한 얼굴로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섰다. 아파트 앞에 서 있는 검은색의 재규어를 본 우영은 닉쿤에게 돌아서 손을 뻗었다. “열쇠 줘.” “내가 운전할 거야.” “너 운전하는 거 싫어하잖아.” “너랑 있을 때는 좋아해.” 삐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락이 풀리자 동시에 차의 시동이 걸렸다. 더는 말하는 것도 귀찮아 우영이 그대로 조수석으로 향해 걷자 그보다 한 걸음 앞서 온 닉쿤이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준다. 그 행위에 우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 닉쿤을 돌아봤다. “너, 진짜 귀신 들린 거 아냐? 너 닉쿤 아니지? 노먼이 닉쿤 가면 쓰고 온 거지?” “……여기서 노먼이 왜 나와?” “그럼 뭐냐고? 사라랑 클레어한테도 차 문을 안 열어주는 네가 차문을 열어주다니! 이게 말이 돼?” 데이트하는 여자들은 물로, 사라와 클레어에게도 절대 차 문을 열어주는 일이 없어-물론, 대부분 보디가드나 비서들이 열어주니 상관없지만.- 한때 ‘문 열지 않는 닉쿤’라는 별명까지 달았던 인간이 먼저 문을 열어주니 우영이 경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닉쿤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뭘 그렇게 놀라? 타.” “너, 진짜 이상해.” “진짜 마귀에라도 쓰였나 보지.” 더는 화내기도 지친 닉쿤이 순순히 인정하자 우영은 불길하다는 눈빛으로 닉쿤을 바라보며 일단 차에 올라탔다. 우영이 좌석에 앉자 차 문을 닫은 닉쿤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우영의 가방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타 안전벨트를 맸다. “출발한다.” “해. 시간 아슬아슬하겠다. 슬슬 러시아워 때야.”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우영이 중얼거리자 닉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부드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에반이 오늘 오후 스케줄을 모두 취소한 채였다. 그러데 굳이 우영에게 알리지 않고 움직인 건 오늘 내로 사단을 내겠다는 굳건한 의지 때문이었다. 우영이 그래도 모르는 척한다면 이번에는 정면 돌파다. 행동으로 보여주기보다 제대로 고백해줄 셈이었다.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느니 확실하게 말로 하는 쪽이 좋다. 그래서, 도망간다면 잡아오면 된다. 10년을 침묵하고 기다렸다. 내뱉고 난다면, 차라리 터트려버린다면 눈치 볼 것도 없이 밀고 당기기를 시작하면 된다. 도망치면 쫓아가고, 밀어내면 다시 다가서고, 돌아서면 뒤에서 끌어안아 버리면 그만이다. 애초에 끙끙대며 어설픈 수를 쓰는 게 아니었다. 무조건 정면 돌파다. 센트럴파크의 동쪽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한 차 안에서 우영은 이건 또 뭔가, 하는 눈으로 닉쿤을 돌아봤다. 오늘 일정은 7시에 딜런 메이츠의 저택에서 있는 가벼운 만찬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레스토랑을 찾자 우영은 자기도 모르는 새 스케줄이 바뀐 건가 하는 얼굴로 닉쿤을 돌아봤다. “약속 장소 바뀐 거야?” “응.” “그럼 나한테 말을 해주지.” “그렇게 됐어.” 시동을 켜둔 채 먼저 운전석에서 내린 닉쿤은 그를 마중 나온 매니저를 보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주차 관리인이 다가와 조수석의 문을 열자 우영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내려 했다. “가방은 두고 내려.” “관련 서류는?” “식사하면서 재미없는 얘기는 안 해.” 그럼 대체 뭐 하러 만나러 거야? 라고 물으려다 우영은 순순히 뒷좌석을 열기를 포기하고 핸드폰만 챙긴 채 매니저와 이야기를 끝내고 다가서는 닉쿤의 뒤에 섰다. “어서 오십시오.” 레스토랑의 매니저라고는 하지만 그보다는 유럽 저택의 집사 같은 분위기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밀어 열자 닉쿤이 느긋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선다. 우영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닉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금요일 저녁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레스토랑 안은 한산했다. 보통은 이 시간이면 반 정도는 꽉 차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한산했다. 아무리 이 레스토랑이 소수의 몇 명 외에는 좌석 예약도 불가능하고, 일주일 전 예약이 아니면 들어오기도 힘든 까다로운 곳이라 해도 이건 너무하다. “왜 이렇게 조용해?” 닉쿤이야 당연히 뉴욕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 전부에 지정좌석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 텅 빈 곳에 들어서는 건 처음이라 우영이 이상하다는 듯 묻자 닉쿤이 돌아보며 눈웃음을 친다. “왜? 무서워?” “아니, 그보다 이 시간이면 항상 꽉 차 있었는데 이상하잖아.” “오늘 휴일이야. “응?” “갑작스러운 휴업으로 종업원들도 없어. 메인 쉐프 서브 쉐프 둘, 테이블 담당 세 명, 그리고 매니저와 주차 담당 두 명만 남아있어. 그리고…….” 닉쿤이 잠시 말을 끊고 그들을 안내하던 매니저가 외부로 통하는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커다란 호수가 펼쳐진 정경 위로 준비된 테이블이 보였다. 새하얀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그 주변을 수많은 촛불들이 감싸고 있었다. 로맨틱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어쩐지 우영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간간히 켜진 가로등밖에 없는 호수를 낀 정원에 촛불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사람도 없다. 너무 고요하다. “앉아.” 우영이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닉쿤이 먼저 테이블로 가 의자를 빼고 기다린다. 어느새 매니저는 사라져 있었다. “너, 뭐하는 거야?” “뭐긴? 앉아. 식사해야지.” 대체 이건 또 무슨 장난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위쪽에서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위층을 올려다보자 건물 2층의 활짝 열린 유리문 너머로 라탄 파티션이 늘어서 있었다. 음악 소리는 그 너머에서 울려왔다. 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금요일 밤에 불려나와 라탄을 앞에 두고 생뚱맞게 연주를 하는 건가 싶어 우영은 그냥 다 포기해버리기로 했다. 나름 예술인이라 자부하며 음악 공부를 했을 텐데 나이 들어 이 방중에 불려나와, 그것도 손님 앞이 아닌 라탄 뒤에 가려진 채 영문도 모르고 연주를 하는 이들도 있는데 자신 정도면 진짜 양반이다. 그리고 나름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닉쿤의 의도는 알 것 같아 더는 잔소리를 하기 도 미안해졌다. “……그래, 나도 이젠 모르겠다.” 지친 듯 숨을 토해내며 우영이 의자에 앉자 닉쿤이 의자를 밀어 자리를 잡아준다. 그리곤 그의 자리에 가 앉지 않은 채 옆에 놓인 트레이에 있던 와인을 손에 들었다. “와인부터.” “네가?” “물론.” 싱긋 웃으며 와인의 마개를 딴 닉쿤은 잔 두개를 테이블 위에 얹어두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와인을 따랐다. 물 흐 르는 듯한 그 움직임에 우영은 멍한 눈으로 닉쿤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느끼지만 닉쿤이 커피나 와인을 따르는 모습은 지나치게 섹시하다. 누구나 매일 반복하는 행위임에도 우영의 몸이 만든 균형과 당당하고 섬세한 손동작 하나하나가 몹시도 부드러우면서 섹시하다. 해가 우영 밤하늘과 수백 개의 촛불들, 그리고 와인과 음악. 보는 이들이 하나도 없는 고요한 공간 안에서 우영 은 멍해져가는 의식을 느꼈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어, 그냥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두 개의 잔에 와인을 따른 닉쿤은 와인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우영 역시 잔을 들어 부딪치자 바로 우영의 앞 에 선 닉쿤이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Wine comes in at the mouth.” 예이츠였다. 이 녀석이 이런 시도 알고 있는 건가 해 우영은 웃으며 닉쿤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웬 예이츠야?”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그 말에 우영은 웃고 말았다. 간지러운 듯, 그냥 웃었다.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부드러운 선율과 어울리는 닉쿤의 낮은 음성에 우영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면서도 와인 잔을 기울여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움직임에 맞춰 닉쿤이 고개를 숙여 우영과 시선을 맞춘다. 순간 우영은 두근두근 떨려오는 심장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바로 눈앞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사로잡힌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는 우영의 시선에 닉쿤은 천천히 우영의 뺨을 쥐었다. 그리고 우영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I look at you, and I sigh.” “푸웁!” 닉쿤의 기가 막힌 낭독과 가슴 시린 듯한 한숨 소리와 함께 우영은 머금고 있던 와인을 뿜어버렸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웃어재끼기 시작했다. “으악, 미치겠다. 닭살 봐. 나 닭살 돋았어! 어떻게 해?” 깔깔거리고 웃으며 눈물까지 흘리는 우영의 얼굴에 분위기 잡다 와인세례를 받은 닉쿤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참담한 표정으로 냅킨을 찾아 얼굴을 닦았다. 대강 예상은 했었지만, 우영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었다. “네가 이런 걸 못 참는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아, 미안. 미안해. 그러니까 왜 웃겨? 나 오늘부터 예이츠 안 좋아할래. 그 시 볼 때마다 너 생각날 것 같아. 대체 프러포즈할 때 그런 낯간지러운 시를 읊는 수치도 모르는 인간들이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순식간에 닉쿤 나름대로 필살기였던 고백이 ‘수치도 모르는 짓’이 되어버렸다. 하긴, 애초에 여자들에게나 먹힐 수법을 우영에게 써보려고 한 게 잘못이었다. 물론, 다른 여자들에게는 절대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한 적이 없지만, 나름 연구하고 조언을 얻어 준비한 이벤트인데 역시나 우영은 역겨워한다. 원래도 이런 건 질색을 하는 성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서 우영은 절반 정도는 욕을 했던 것 같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주로 나오는 감동적인 고백 장면에서 우영은 늘 ‘어떻게 저런 말을 두 눈 뜨고 할 수 있지?’ 내지 ‘저 사람들은 아예 버터로 온 몸을 바르고 다니나 봐.’ 내지 ‘나라면 죽겠다, 차라리.’라고 하던게 대부분이었다. 왜 욕하면서 굳이 로맨틱 코미디를 보냐고 했더니 ‘코미디 부분은 재미있거든. 설 정이 웃 겨.’라고 했었다. 슬랩스틱 코미디나 미국식 개그는 맞지 않는 체질인지라 우영이 볼만한 코미디는 로맨틱 코미디가 전부라고 했던 게 이제야 기억났다. 그래, 로맨틱 코미디에서 로맨틱은 빼고 코미디만 좋아하는 녀석 이었다. 애초에 로맨틱하게 접근하려 했던 1차 계획을 수정해 닉쿤은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래도 프러포즈라는 건 알았나 보네.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닉쿤이 얼굴에 남은 와인을 닦아내고 자신의 자리에 가 앉으며 그렇게 말하자, 우영이 순간 아차 싶은 얼굴로 닉쿤을 돌아봤다. 걸려들었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모르는 척하더니 다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 답은?” “……무슨 답?” “내 프러포즈의 답 말야. 어때?” “거절할게.” 우영은 지체없이 명백한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닉쿤 역시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한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서 왜 물어봐?” “혹시나 해서. 식사하자. 식사하고 술이나 마시자.” “그걸로 끝?” “그럼 어떻게 해? 내가 아무리 현대판 귀족이라지만 21세기는 평등사회야. 내 프러포즈를 거절했다고 잡아다 가두고 고문할 수도 없고, 납치해 강제로 앉혀놓을 수도 없잖아? 위법이니까.” 위법만 아니라면 할 의향이 있다는 듯한 닉쿤의 말에 우영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럴 생각은 있다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최대한 네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으니 당분간은 지켜봐줄게.” “내가 끝까지 버티면?” “내가 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닉쿤이 우아하게 와인 잔을 들어 마시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우영은 서서히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농담이 아닌 것 같다. “어이, 이보세요. 이 나라는 법치 국가거든요?” “섬을 하나 살 계획이야. 나중에 책자 보여줄게, 골라 봐. 두바이에 있는 월드 프로젝트 중 하난데, 한반도는 아직 안 팔렸다고 하더군. 인공 섬이지만 환경은 이상적이야. 건물을 짓고 계획을 세워야겠지만, 그 섬 자체는 내 영지가 되는 셈이니까 뭐든 할 수 있지. 너도 원하는 도시 계획을 세워봐.” 두바이의 월드 프로젝트는 낙힐(Nakheel)사에서 주도하는 사업으로 300여 개국의 나라 모양을 본떠 만든 인공섬을 분양하는 정책이었다. 한 마디로 보통 사람들은 게임으로 하는 심시티(simcity)를 시뮬레이션이 아닌 직접 실 행하는 것이다. 얼마 전 대넌이 낙힐 사의 메일을 받고 독일을 분양 받을까 고민하던 게 떠올라 우영은 재빨리 닉쿤의 자산을 계 산하기 시작했다. 한반도는 아직 팔리지 않았지만 2500만 달라에서 4000만 달러 사이로 추정되고 있었다. 닉쿤 이 증여받은 재산과 그의 증권과 부동산,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닉쿤 소유의 저택들을 모두 합치면 10억 달라 가 까 이 된다. 충분히 살 수 있다. 주식까지 갈 것도 없이 3년 전 대넌에게 받아낸 니스의 별장 하나만 팔아도 충 분히 가능하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그가 가진 현금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닉쿤라면 진짜 그 섬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영은 창백한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답해주었다. “닉쿤, 내가 보기엔 그건 낭비인 것 같아.” “낭비라니, 그건 투자야. 나중에 관광지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고, 대여를 해도 좋지. 헐리웃 스타들이 너도 나도 달려들어 빌려달라고 할걸. 파파라치 없는 지상 낙원일 테니.” “그럼 그냥 투자만 해. 난 섬 안 좋아해.” “난 좋아해.” “나 비행기 무서워.” “배 타고 들어가면 돼.” 어쩐지 이미 그 섬을 구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우영은 애절한 얼굴로 닉쿤을 바라봤다. “닉쿤…….” “그런 목소리는 침대에서나 내. 네가 그렇게 바라보면서 애원하면 또 지병이 도진다고.” “……뭐?” “식사하자. 오늘은 즐겁게 보내자고. 식사 후에 오랜만에 펍에 가서 술 한 잔 어때? 아, 그러기엔 너무 정장이 네. 아파트로 가서 술 마시자. 영화도 보고. 어때?” “섬 안 산 거지?” “아직은.” “사지 마. 돈 아까워.” “난 안 아까워.” 그야 당연한 일이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돈을 아까워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섬을 살 거면 그 돈을 날 줘.” 우영의 의도는 그런 섬을 사느니 차라리 돈을 공중에서 뿌려라 라는 의미였지만 닉쿤은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 다. “줄까? 지참금으로?” “……됐어. 식사나 하자.” “현금이 싫으면 전용기나 저택은 어때? 아니면 빌딩을 하나 사줄까?” “닉쿤, 내 앞에서 돈 자랑 하냐? 네 자산이 얼만지는 나도 잘 알아.” “자랑하는 게 아니라, 해주고 싶은 거야. 뭐든 해주고 싶어. 집이든, 차든, 섬이든, 요트든. 전부 다 주고 싶어. 그게 내 마음이야.” “그건 부모님의 마음 아니냐, 보통?” “네가 내 아들이면 큰일 나지. 근친상간이 될 테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침대에서 섹스하다 걸리는 건 좀 그렇잖아." 닉쿤은 전술을 완전히 바꿔 빙빙 돌리며 다가서는 것보다 일단 들이받기로 결정내린 후였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그의 말투와 행동에 우영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닉쿤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도가 지나치다. 진짜 미친 것 같았다. “너, 내일 나랑 LA 좀 가자.” “LA는 왜? 뭐 좋은 거 있어?” “저번에 에반 어머니가 얘기해주셨는데 한국에서 알아주는 무당이 이민을 왔대. 굿을 기차게 잘하나 봐. 가서 한판 하고 오자.” 그 말에 닉쿤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 우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라고 내버려둘 셈이었다. 저렇게까지 현실도피를 하고 싶다는데 굳이 잡아끌고 현실에 내려놓은 필요는 없으니까. 이젠 병원에 뇌 사진을 찍자고 끌고 가든, 엑소시즘을 하자고 성당에 끌고 가든, 굿을 하자고 한국으로 끌고 가든 상관없었다. 하자는 대로 뭐든 해줄 셈이었다. 그래서 우영이 납득을 한다면 상관없다. 영리한 녀석이니 현실도피를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 역시 금세 알아챌 것이다. 아니, 싫어도 알아채게 될 것이다. 이제 곧 2단계 작전으로 돌입할 테니까. “식사부터 하자.” 그렇게 말하며 닉쿤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식으로 고백하기가 끝났으니 이제 밀어부치기 2단계다. 데이트는-닉쿤의 입장에서만- 아주 순조로웠다. 우영의 신랄한 비웃음 덕에 다소 민망하고 당황스럽고 열 받긴 했지만 그 정도는 무념무상으로 저 멀리로 집어던지고 식사를 마치고 드라이브를 한 뒤 아파트로 돌아와 술을 마 시자 분위기는 점점 더 느슨하게 풀려갔다. 닉쿤은 부드럽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 어 갔고 우영은 그 화술에 말려 즐겁게 웃으며 떠들어댔다. 저택에서 있었던 소소한 사건들-클랜의 이유 없던 반항 과 에이먼이 성인이 되자 처음으로 그의 비밀스러운 취향을 털어놓았을 때의 사건-부터 시작해 학창시절 이야기 까지. 한 번 나오자 줄줄이 쏟아지는 추억들에 우영은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과거를 추억하고 웃었 다. 집으 로 돌아오는 내내 웃으며 대학 시절 옆 기숙사의 벤와 노먼이 터트린 사건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분위 기가 이어 졌다. “나 그때 진짜 놀랐어. 설마 에이먼의 취미가 그런 걸 줄이야.” 술을 마시던 우영이 킥킥거리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진짜 상상도 못했던 그 사건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삐져나온다. 아마 닉쿤이나 클랜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황당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에이먼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경악한 사건이었다. “나도 놀랐어. 설마, 우리 형이 그런 취미일 줄이야. 어쩐지, 우리 가족 다들 수집벽이 있는데 형만 얌전하더라니.” 그러니까 13년 전의 일이었다. 에이먼은 성인이 되자 자기도 모을 게 있다며 가족들을 모아두고 근엄한 얼굴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가 파충류나 희귀곤충, 혹은 각 나라에 있는 고성이나 섬을 수집한다 고 했어도 모두가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여자 속옷을 수집하고 싶다고 해도 그냥 납득했을 것이다. “인형이라니……. 액션피겨도 아니고 프라모델도 아니고 레이스와 리본이 치렁치렁하니 달린 인형이라니.” 닉쿤은 아직도 아찔한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큭큭거리며 웃었다. 진한 갈색 가죽 상자를 들고 나타나 가족들 을 바싹 긴장시켰던 에이먼이 상자를 열고 보여준 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던 파충류도 여자 속옷도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보다 심했다. 그가 당당하게 나도 이제 콜렉션을 갖겠다 선언한 건 구체관절 인형이었다. 그것도 아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고가의 인형이었다. “그거 눈도 사다 넣고 화장도 시키고 그러는 거라며? 가발도 바꾸고.” “응. 진짜 신기하다니까.” 하다못해 수작업으로 만드는 사기 인형이라면 당당하게 모을 수 있지만-물론, 소아성애자 취급을 받을 위험은 있 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돌피는 아니었다. 그가 하도 단호한 얼굴로 선언을 하는 덕에 모두가 결국 수긍하고, 대 신 그 인형은 사라가 모으는 걸로 하기로 하고 3층에 컬렉션방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아직도 그 방에 적응이 안 된다. 허르베지쿨 가의 장남이, 지역 케이블 포함 30개국의 방송국을 총괄하며 쇼비지니스계의 혜성이라 불리는 에이먼 허르베지쿨이 돌피를 모은다니. 그것도 가끔 집에 들를 때마다 작업실에 박혀 옷을 만들어 입히고 화장 을 시키고, 머리까지 만져준다니.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차마 그의 이름으로는 구입할 수 없어 에이먼의 인형 구입을 총괄 담당해주는 우영이지만 그가 인형을 안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피어스 브로 스난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귀족 청년 같은 에이먼이 인형을 안고 다니다니…… 너무 안 어울린 다. “재미있다니까, 너희 형제들은? 그나마 제일 나은 게 클랜이지. 그 녀석은 고서적만 수집하니까.” “에이먼도 큰일이지. 그 취미를 이해해 줄만한 여자가 있을까, 과연?” 18년 간 욕망을 참아온 에이먼은 절대 그의 은밀한 취미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그의 은밀한 취미를 이해해 줄 만한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넌이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내긴 했지만, 섣부 르 게 교제를 하다 상대 여성이 에이먼의 취향을 사교계에 소문낼까 두려워 그냥 네 마음대로 하라고 포기한 채 였다 . 그런데 과연 돌피를 모으는 남편을 납득할 만한 여자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같은 취 미를 가 진 여자와 결혼하면 되지 않냐 싶기도 하지만 이 뉴욕에서, 그것도 허르베지쿨 가와 사돈을 맺을만한 가문의 아 가씨들은 가방과 보석은 모아도 인형은 모으지 않는다. “다들 제 짝이 있는 법이잖아. 곧 나타나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예술계통 사람도 괜찮고. 저번에 신진 디자이 너랑 교제한다고 하지 않았어?” “뭐, 그쪽도 잘 안 되는 모양이야. 에이먼이 패션 센스가 뛰어나잖아. 그 여자의 여름 콜렉션을 신랄하게 씹어 준 모양이야. 그랬더니 당분간 연락하지 말랬대.” “에이먼은 디자이너가 됐어야 했나? 인형도 보면 옷 만들고 입히고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방송 일도 좋아해.” “하긴, 싫어하면 그렇게 못 하지.” 방송사를 맡은 뒤 리얼리티 쇼와 시트콤, 그리고 법정 드마라를 제작해 그가 제작한 쇼와 드라마 중 80% 이상을 월드와이드로 배급하고, 매 시즌마다 그가 제작한 드라마들이 드라마 시청률 10위 안에 두 개 이상은 오르는 기 염을 토해낸 에이먼의 실적을 돌아봤을 때, 분명 싫은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싫어한다면 그렇게 뛰어난 성적 을 거두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특이하다니까, 진짜. 그렇다고 여장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책이나 가방 모으는 거랑 똑같은 거지, 뭐. 그래도 역시 에이먼이 인형을 안은 건 안 어울려.” 클레어까지 포함해 전원이 덩치가 유달리 좋은 허르베지쿨 가의 남자가 인형을 안고 있는 건 진짜 고목나무에 매 미다. 우영이 그런 생각을 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빈 테이블을 돌아본 닉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안주 가져올게.” “그럼, 그만하지?” “이제 겨우 11시야. 이런 자리 오랜만이잖아.” 센트럴 파크뿐 아니라 저 멀리 해변가의 풍경까지 한 눈에 보이는 닉쿤의 침실 창가에 앉은 우영이 잠시 기다리 자, 안주를 가지러 나간 닉쿤이 새 술병을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려두고 우영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잔을 받아들 며 우영은 조금 무리라는 얼굴을 했다. “또?” “내일은 어차피 주말이고, 오후에 집으로 가야 하니 여유 있어.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마셔?”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닉쿤의 행동이 조금 미심쩍기는 했지만 우영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받아 들었다. 지금도 슬쩍 취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그리고 취하면 잠이 드니 괜찮을 것이다. 아주 드문 경 우,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술버릇은 조용히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자는 거였다. 그러니 별 문제는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무슨 꿈을 꾼 거야?” 우영의 표정을 살피던 닉쿤은 막 가져온 캐비어 샐러드와 치즈를 테이블에 올려든 뒤 연이어 휴대폰을 테이블 위 에 올려두었다.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두는 건 상당히 매너 없는 행동이었다. 닉쿤라면 절대 하지 않을 그 행동에도 우영은 닉쿤의 이상한 행동을 알아채지 못한 듯 몽롱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가 날 버릴 때 꿈.” 닉쿤은 순간 “왔다!”라는 생각을 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슬슬 우영이 본심을 터놓기 시작했다. “기억나?” “응. 희미하게 기억이 나. 저기 지방에서 날 데리고 서울까지 와서 버리고 갔어. 나중에 학교 이름으로 겨우겨 우 찾아가 보니 이사 갔더라고. 아주 멀리 갔대. 여동생만 데리고.” 우영을 15년이나 알아왔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우영은 술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술에 취하면 자는 체질이었다. 그 요란한 대학 신입생 신고식에서도 다들 술을 마시다 지쳐 토하고 주사를 부리고 기숙사에 불을 지르려하고-노먼의 경우-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며 폭약제조-벤의 경우-를 하며 난리를 쳤을 때에도 우영은 자신이 사뿐히 지려 밟은 노먼을 교내 경찰에 신고해 살려놓고 얌전히 자신의 방으로 가 조용히 잠을 잤다. 하 지 만 취한 시점과 잠든 시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사이의 우영은 아주 솔직해진다. 그걸 아는 건, 닉쿤 자신 뿐이었다. 적어도 닉쿤은 그렇게 믿었다. “너희 엄마는 왜 너만 두고 간 거야?” “내가 나쁜 애였나 봐. 갖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쁜 애였던 것 같아. 그러니까 거기까지 데리고 가서 날 버 렸지. 아주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데, 우리 동네에 어떤 아줌마는 홍수 때 아들이 죽었다고 미쳐서 자살했었거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그럴 텐데, 버릴 정도였으면 진짜 내가 나쁜 애여서 그랬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 떻게 자기 자식을 버려?” “……뭔가 다른 사정이 있겠지.” “아냐. 맞을 거야. 그러니까 두 번이나 파양을 당했지. 내가 나쁜 애라서 그래.” 어렴풋이 우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우영의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듣자 숨 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주 보통의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처럼 해맑고 유쾌한 성격이었지만 우영에게는 뿌리 깊게 박힌 자기비하와 혐오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 든 자신의 탓이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늘 안타까웠다. 다른 사람에게 흠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나 조금이라도 실수를 할까 실망시킬까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남 들이 하는 무리한 부탁까지 모두 수용하고야 마는 그 점이 늘 가슴 아팠었다. 우영이 풀이 죽을 때마다, 실수를 해 의기소침해 있을 때마다 늘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어깨를 두드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정도에서 끝났지만, 이제는 할 수 있다. 어차피 사고 치기로 작정한 이상 거 리낄 게 없다. “넌 나쁘지 않아. 아주 착한 사람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닉쿤은 우영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우영의 머리를 잡아 품에 안으며 그렇게 속삭였 다. 다정하고 상냥한 그 음성에 우영이 희미하게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넌 진짜 좋은 친구야. 너랑은 평생 이렇게 있고 싶어.” “평생 이렇게 있을 거야.”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노먼은 어떻게 된 거야?” 슬슬 그 막간의 타이밍이 닿은 듯해 닉쿤이 묻자 역시나 우영이 순순히 답해준다. “데이트하쟤.” “왜?” “날 사랑한대.” 그건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 노먼이 우영만 유독 물고 늘어질 때부터 알아봤다. 역시나 다시 만나면 갈아 마셔 버려야겠다. “그래? 그래서 넌 왜 하기로 한 건데?” “네가 자꾸 작업 거니까 부담스러워서. 노먼이랑 데이트하면 이상한 짓 안 할 거 아냐. 넌 노먼 진짜 싫어하니까.” 순간 닉쿤은 “얼씨구?”하며 슬슬 우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자꾸 진심을 보이니 그게 무서워서 노먼에게로 도망치려 했던 모양이다. 뭐, 진짜 노먼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이 상황은 좋지않다. 지금까지는 우영의 친구이기도 하고, 또 우영이 노먼의 소설을 하도 좋아해 두고 보자고만 했지만, 노먼을 우선 고소한 뒤 뒷일을 도모해야 할 듯싶다. 잭 맥캐인과의 관계를 끝장낼 각오를 하고라도 그 자식을 일단 감방에 처넣어야 한다. “그래서 노먼하고는 어디까지 갔어? 키스했어?” 그 물음에 우영이 환하게 웃는다. “미쳤냐? 그 놈은 그냥 친구야. 이번에 소설 투고한대. 잘됐어. 그 녀석은 진짜 재능이 있으니까 잘될 거야.” “그 녀석하고 자고 싶은 건 아니고?” “으하하하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걔는 내 친구인 동시에 철천지원수야. 그 재능만 아니었으면 내가 벌써 죽여서 묻어버렸을걸.” “그럼 누구랑 자고 싶은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닉쿤은 희망을 담아 그렇게 물었다. 우영이 연애는 하지 않는 주의라는 건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 우영에게 마음에 품은 상대가 있는지 확인해둬야 한다. 물론 최고의 상황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우영의 입에서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이름이 나온다면 심장이 떨려 죽을지도모른다.- 그건 그다지 가능성이 없으니, 최선의 답은 ‘아무도 없어.’다. 하지만 우영은 어쩐지 아무 답이 없었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내려다보자 아직은 눈을 뜬 채였다. 눈동자가 풀려있긴 하지만 아직 아웃 상태는 아니었다. “우영, 말해봐? 누구야? 그런 사람 있어?” 아이를 달래듯 등을 살짝 두드리며 그렇게 묻자 우영이 웃으며 답한다. “너.” 짤막하고 솔직한 그 답에 닉쿤의 얼굴에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심장이 피로 몰려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혹시 자신이 너무나 바라던 바라 잘못 들은 건가 해 닉쿤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왼손으로 내리누르며 다시 물었 다. “……누구? 나라고?” “응.” 이 말은 진심이다. 취했을 때의 우영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 번 술에 취한 우영에게 한국이 그립지 않냐고 했던 사실은 미치게 가고 싶다고 하더니 그대로 공항으로 달려가 티켓을 끊은 적도 있었다. 평소에는 “뭐 , 언젠가는 가겠지.”라고 하던 우영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었다. 물론, 우영은 중간 과정을 싸그리 잊었기에 자신이 갑자기 술을 마시고 달려가 한국에 보내달라고 난동을 피운 걸로 알고있다. 티켓을 끊고 비행기를 타려는 우영을 말리느라 난동을 피운 건 자신이었지만, 하여간 우영은 그가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린 걸로 알고 있다. 어지간하면 취하지 않지만 살짝 취기가 오르면 지나치게 솔직해지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다. 예상대로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나랑 자고 싶다면…… 언제부터 그런 거야?” “옛날에. 아주 옛날부터.” “언제?” “대학교 때쯤?” “미치겠네…….” 자기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은 통했던 모양이다. 그걸 놓쳤다고 생각하니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미리 알았다면 그냥 들이 받아버리는 건데, 괜히 시간만 버렸다. 왜 미리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우영이 취하면 아주 솔직해진다는 걸 안 건 5년 전인데, 왜 그때라도 미리 물어보지 않았을까. 이렇게 쉬운 걸, 이렇게 솔직하게 듣고 나면 편했을 걸. 닉쿤이 속으로 지난 5년간의 세월을 한탄하는 사이 우영은 반쯤 남은 잔을 비우며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한때는 그러고 싶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너랑 그냥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게 더 좋으니까. 사랑하다 헤어져서 아무렇지 않게 친구로 지낼 정도로 난 대범하지 못하거든. 아마, 계속 생각나고 슬플 거야. 그러니까 친구가 좋아.” 부드러운 어조로 칭얼거리듯 말을 마친 우영은 빈 잔을 내려두고 닉쿤의 품을 밀어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야겠다. 좀 이따 쓰러질 것 같아.” 정확히 자신이 기절할 타이밍을 알아챈 우영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뒤진다. 잘 공간을 찾는 움직임이었다. 그런 우영을 잡아끌고 침대에 앉혀줘야 하는데 심장이 너무 심하게 두근거려 닉쿤은 의자 팔걸이에 기대앉은 채 멍하니 우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닉쿤은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핸드폰 걸이에 달린 은색의 지포 라이터 모형을 찾아 뚜껑을 열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 안에서 선명한 우영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같은 부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은 닉쿤은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두고 욕실로 들어가려는 우영을 따라가 그 팔을 잡아 침대로 잡아끌었다. “여기서 자.” “여기 네 침실이잖아. 난 옆방에서 잘게.” “거기 욕실이야.” 투명한 문 앞에 선 채 멍한 눈으로 안을 들여다본 우영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 그런가? 그런데 왜 이렇게 넓지? 저기 침대도 있는데?” “욕조야. 여기서 자.” “응.” 눈도 풀리고 혀도 살짝 꼬였지만 아주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로 그렇게 답한 우영은 얌전히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리고는 곧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잠든 우영을 내려다본 닉쿤은 손을 뻗어 우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채 고개를 숙여 우영을 내려다보자 꼬냑 특유의 달짝지 근하 면서도 독한 향이 흐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어지는 숨결은 더없이 달콤하다. 지독한 알콜 냄새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핥은 뒤 입술을 겹쳐도 우영은 일어나지 않았다. 푹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슬슬 자신감이 나기 시작했다. 술 마시고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녀석이다. 사랑스러운 우영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살짝 입술을 핥고는 슬쩍 우영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미안……. 하지만 일단 사고는 치고 보는 거야.”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속삭인 닉쿤은 우영의 위에 올라타 목가에 입을 맞췄다. 일단 침을 발라두고 보는 거다. *** “응?” 한창 달게 자던 중 갑자기 가슴을 후려치는 느낌에 눈을 뜬 우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어쩐지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야?” 술을 너무 마셨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돌아보던 우영은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짙은 금발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어제 닉쿤의 아파트에서 술을 마시던 기억을 떠올리곤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다.” 술을 꽤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기절하듯 잔 걸 보니, 허용량을 초과한 게 분명하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우영은 머리를 안고 스윽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이상할 정도로 허전하다는 느낌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내 옷…….” 분명히 옷을 입고 잔 것 같은데, 좀 이상하다. 닉쿤이야 원래 다 벗고 자는 녀석이라지만 자신은 옷을 입지 않으면 자지를 못하는 성격이었다. 뭐 하나라도 걸쳐야 편안한 느낌인데 이상하게 몸이 허전해 허리 아래를 내려다 보 자 거기도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허벅지 사이에 이상한, 아이스크림이 말라붙은 듯한 자국도 하나 …… 가 아니라 두 개, 아니 세 개. “응?” 그러고 보니 뺨도 찝찝하다. 자다 침이라도 흘렸나 싶어 손등으로 닦으려는데 이상하다. 이상하게 뻣뻣하다.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이상 사태에 다시 자신의 하체를 내려다본 우영은 허벅지 안쪽에 남은 이상한 멍 자국을 발견했다. 아니, 멍이라기보다는 약간 불그스름한 자국이다. 마치 모기에 물린 것 같은, 하지만 부어오르지는 않은 이상한 흔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영은 놀라 옆에서 잠든 닉쿤을 돌아봤다. 닉쿤은 역시나 알몸이었다. 닉쿤이야 다 벗고 자는 게 새로울 게 없으니 상관없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아주 이상하다. “닉쿤. 일어나 봐.” 도저히 더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닉쿤의 어깨를 흔들자 닉쿤이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골반 위에 입을 맞춘다. 그 느낌에 우영은 “히익!”하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일어나 봐! 닉쿤 벅 허르베지쿨! 눈 떠!” 대체 어젯밤에 술을 마시고 무슨 짓을 했나 싶어 우영이 사정없이 닉쿤의 어깨를 흔들자 닉쿤이 부스스 눈을 뜬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우영의 배에 입을 맞춘다. “……왜?” “왜는 뭐가 왜야?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봐! 내가 왜 홀딱 벗고 너랑 누워 있냐고?” “거참, 보면 몰라?” “모르겠으니까 널 깨웠지!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야?”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우영은 창백한 얼굴로 닉쿤의 어깨를 흔들었다. 지금까지 딱 다섯 번 정도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좋았던 적이 없었다. 처음 퓨즈가 나갔을 때, 인류의 적 노먼 맥캐인을 살려놨고, 두 번째로 퓨즈가 나갔을 때는 노먼을 붙잡고 닉쿤에 대한 감정을 하소연하는 바람에 약점을 잡혀버렸다. 그리고 세 번째로 정신을 잃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술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가 공항에 가 한국행 티켓을 끊어 놓고 집에 가겠다고 난동을 부렸었고, 네 번째로 정신을 잃었을 때는 클리샤와 닉쿤의 일정을 전부 노먼에게 불어버렸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정신을 잃었을 때는 한겨울이었는데, 워튼 스쿨에 다니던 닉쿤이 보고싶다며 비행기를 타고 가 닉쿤의 아파트 앞에 누워 동사할 뻔했었다. 그리고 이게 여섯 번째다. 어젠 또 어딜 가서 무슨 사고를 친 건가. 옷을 벗겨둔 걸로 봐선 풀장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찝찝한 자국들은 뭐란 말인가. “너, 기억 안 나?” “무슨 기억? 내가 또 한국 간다고 했어? 아니면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했어?” “무슨 소리야? 너, 어제 아주 뜨거웠어. 너 할때는 하더라?” 도대체가 따라갈 수 없는 대화의 비약에 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내가 뭘 해?” 전혀 모르겠다는 듯 우영이 되묻자 그제야 닉쿤이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 넘기며 일어나 앉는다. “너, 진짜 기억 안 나?” “무슨 기억?” “나랑 자고 싶다고 내 침대로 기어들어왔잖아. 그리고 입으로 해줬던 거 기억 안 나?” “응?” “이것 봐라.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닉쿤은 그대로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은색의 지포 라이 터 모양의 핸드폰 줄을 잡고 버튼을 누르자 그 안에서 생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럼 누구랑 자고 싶은데? 우영, 말해봐? 누구야? 그런 사람 있어?』 『너.』 『응.』 『나랑 자고 싶다면…… 언제부터 그런 거야?』 『옛날에. 아주 옛날부터.』 살짝 혀가 꼬인 자신의 음성에 우영은 그대로 침대를 박차고 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거짓말이야! 그거 작업한 거지? 내가 그랬을 리가 없어!” 우영이 기겁을 하며 부정하자 닉쿤이 핸드폰을 흔들며 싱긋 웃는다. “어이,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두고 거짓말을 해?” “그럴 리가 없어!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네가 해주고 싶다면서 먼저 내 바지 벗기던 거 진짜 기억 안 나? 동영상으로 찍어둘 걸 그랬군.”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난 절대 그런 짓 안 해!” “확신할 수 있어?” “그래!” “진짜? 절대로 안 했다고 보장할 수 있어?” “물론이지!” “잘 생각해 봐. 진짜 그래? 장담할 수 있어?” 닉쿤의 연이은 질문에 우영은 점점 자신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는 건 없다. 에이먼의 돌피 이야기를 하다 술을 더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장담……할 수 있……을 거야…… 아마.” “진짜로? 절대 아니라고? 여기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 아니면 보안 테이프라도 돌려볼까? 침실에는 없지만 복도에는 있어. 네가 접시를 치우려고 나가는 내 뒤에 따라 나와 끌어안은 건 보일 걸?” 복도로 난 문을 손으로 가리키던 닉쿤의 말에 우영은 기겁을 했다. 보고 싶지 않다. 절대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 기억이 없다면 없는 대로 두는 쪽이 낫다. 확인을 하면 인정해야 한다. 그건 싫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우영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세상에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일이란 아무도 모른다. 특히나 공항으로 달려가 한국행 티켓을 끊고 당장에 비행기를 타겠다고 난동을 부렸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봤을 때 술 취한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있어. 네가 먼저 덤벼들었어. 내 정액까지 마신 거 기억 안 나? 내가 그만두라는데도 마셨잖아?”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자신의 임가를 톡톡 손끝으로 두드리자 우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입가를 만졌다. 뭔가 마른 것이 붙은 듯한 그 느낌에 우영은 서서히 질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랬다고?” “그래.” “말도 안 돼…….” “나도 놀랐어. 네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다니.” “잠깐! 그만! 제발 그만해! 그만하자. 나 좀 씻고 나올 테니까, 좀 이따 얘기하자.” 우영은 우선 화장실로 피신하기로 했다. 이대로 두면 난투가 벌어진다. 먼저 전열을 가다듬고 머리를 정리한 뒤 다시 맞서야 한다. 지금은 닉쿤의 페이스다. 말려들면 끝장이다. 우영이 먼저 백기를 들자 닉쿤이 침대에서 여유 있게 웃으며 손끝으로 욕실을 가리킨다. “욕실은 저기야. 그리고 거기 있는 건 욕조고. 침대 아냐.” “……응?” “아, 네가 어제 거기 들어가서 욕조에서 자겠다고 하더라고.” “내가?” “그래.” “맙소사…….” 할 수 있는 뻘짓은 다 했다는 생각에 우영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차피 욕실 안이라도 유리문이라 밖에서 안쪽의 움직임을 훤히 보는 곳이긴 하지만 지금 우영은 그런 걸 고려할 정신이 없었다. “미치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지 않으니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닉쿤의 말을 믿을 수도 없다. 삽입을 한 건 아니다. 다리랑 엉덩이 쪽은 멀쩡하다. 그러니까 아마 진짜 오럴만……. “말도 안 돼…….”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그랬을 리가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욕실 전면 거울을 본 우영은 몸 여기저기에 덕 지덕지 이상한 흔적을 품은 자신의 몸을 보곤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위와 옆에서 뿜어져 나오 는 물을 맞으며 몸을 씻어내던 우영은 그러다 문득 자신이 닉쿤의 정액을 마셨다고 한 말이 떠올라 그대로 다시 세면대로 달려와 칫솔을 들고 전투적인 칫솔질을 시작했다.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 그래, 그랬을 리는 없다. 하지만 혹시나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리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잇몸에 피가 나도록 이를 닦고 입안을 헹궈내던 우영은, 문득 이 모든 문제들의 근원을 찾아냈다. 지금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닉쿤과 했냐 안 했느냐가 아니다. 자신이 닉쿤에게 먼저 달려 들었느냐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도 자신이 닉쿤에게 미련을 갖고 있느냐 하는 사실이었다. 닉쿤이 워튼 스쿨에 입학했을 때 겨우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의 그런 결정에 섭섭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던 시간 덕에 마음도 많이 안정되었고, 또 미련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정리했 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에반이든, 노먼이든, 누가 물어도 확실히 끝냈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완전 히 잊었다 믿었다. 그런데 만약, 진짜 만에 하나라도, 혹시라도 자신이 진짜 어젯밤 닉쿤에게 먼저 수작을 건 거라면…… 아직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가장 문제는 자신의 미련이다. 미련이 남았다면 그를 잘라낼 수 없다. 또 다 시 같은 과정의 반복이다. 거기다 이번에는 닉쿤까지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있다. 이런 때에 마음이 흔들리면 아 마 닉쿤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다. 체면이나 평판 같은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걸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뭐해?” 세면대에 기대 선 채 숨을 몰아쉬던 우영은 욕실 안에서 울려대는 목소리에 놀라 옆을 돌아봤다. “뭘 그렇게 놀라? 하도 안 나와서 같이 씻으려고 온 건데. 점심은 나가서 먹자. 샤워해야지.” 세면대에 서 있던 우영의 팔을 잡아끈 닉쿤이 샤워룸 안으로 들어서려하자 우영은 몸서리를 쳤다. “너 먼저 해.” “뭘 따로 해? 볼 거 다 본 사이에.” “난 못 봤거든?” “지금 보고 있잖아.” 얼결에 샤워룸에 끌려들어간 우영은 그제야 두 사람 모두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워낙에 기숙사에서 자주 봤던 거라 별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아무렇지도 않다. 어릴 때엔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괜찮다.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나 지금 네 알몸 봐도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런데 내가 먼저 달려들었다는 건 말도 안 돼.” 닉쿤이 샤워버튼을 누르자 미지근한 물이 사방에서 타져 나왔다. 우영의 말에 닉쿤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듯 물줄기를 맞으며 우영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곤 젖은 듯 촉촉한 푸른 눈동자로 우영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속삭인다. “네 입속 아주 뜨거웠어. 그리고 몸도 아주 뜨거웠어.”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인 닉쿤이 우영의 귀를 살짝 물어뜯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자 우영은 소름끼치는 감각에 어깨를 살짝 떨었다. 생경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각이었다. 어쩐지 다리가 떨리며 아랫배 쪽이 울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하다 싶어진 우영은 닉쿤을 밀어내고 옆으로 돌아서려 했지만 닉쿤은 무작정 우영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기억 안 나? 네가 먼저 다가와서 내 바지를 내리고 혀로 내 성기를 핥았잖아.” 물은 적당한 온수였다. 그런데 우영은 어쩐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그랬다고?” “그랬어.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닉쿤의 손이 슬쩍 엉덩이에 닿아왔다. “나랑은 여기로 해도 좋다면서 벗고 들이댔잖아?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 내가 거절했지만…….” 닉쿤이 느긋하게, 마치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우영의 턱을 핥는다. 관능적이고 농밀한 그 행위에 우영은 슬슬 아래 있는 물건이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닉쿤이 일부러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알아챈다고 해서 이 상황이 나아질 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우영, 난 해도 상관없어. 너라면 좋아. 네 안에 들어가면 미쳐서 그대로 싸버릴지도 몰라.” “……음담패설은 나중에 하고……. 좀 비켜라.” 슬슬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성기의 느낌에 우영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다 반쯤 발기한 닉쿤의 성기를 보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이 그에게 오랄을 해줬다는 건 절대 거짓말이다. 아직 다 커지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면 완전 발기했을 때 자신의 입에 들어갈 리가 없다.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우영의 얼굴에 닉쿤이 간지러운 듯 웃음을 흘린다. “그럼 그것도 기억 안 나겠네.” 또 뭐가 남은 거냐, 라는 얼굴로 우영이 닉쿤을 올려다보자 닉쿤이 싱긋 웃으며 우영의 엉덩이를 잡아끌어 바싹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너무 커서 힘들다고 울었던 거.” “……농담이지?” “진짜야. 녹음한 거 들려줘?” “……거짓말이지?” “녹음한 거 들려줄게. 어제 넌 진짜 섹시했어.” 순간 우영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살 충동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58층 벽을 허물고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진짜 그랬다고?” “응. 사랑스러웠어. 오늘 밤이라도 준비만 된다면 난 OK야.” 그렇게 말하며 닉쿤은 우영의 엉덩이를 세게 틀어쥐었다. 아무래도 닉쿤은 진짜 할 의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닉쿤라면 한다. 닉쿤의 지난 연인 리스트에는 남자도 열두 명이 껴 있었다. 닉쿤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할 수도 있다. 순간적인 두려움에 우영은 닉쿤을 바라봤다. 설마, 설마 하는 우영의 시선에 닉쿤이 아주 달콤하고 섹시한 음성으로 우영의 귓가에 속삭인다. “끝내주게 해줄게. 다시는 잊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슬쩍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바로 입구에 닿는 손끝의 노골적인 애무에 우영은 성인들의 격언을 몸소 실천하기로 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너, 너무한 거 아냐? 두 달 만에 집에 가는데 멍을 달고 가라고?” “네가 잘못 했잖아.” 오른쪽 관자놀이를 제대로 얻어맞아 시퍼런 멍이 든 닉쿤은 툴툴거리며 선글라스를 낀 채 차 문을 열었다. 오늘은 모처럼 본가로 돌아갈 예정이라 먹색의 티셔츠에 흰색 면 재킷, 그리고 청바지를 입은 채였다.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캐주얼한 옷을 입은 닉쿤은 오늘은 애널리스트보다는 근사한 영화배우 같았다. 그것도 성인 비디오 전문 배우 말이다. “가기 전에 들를 데가 있어.” 가벼운 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우영은 툴툴거리며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 안에 올라탔다. 닉쿤 역시 서둘러 운전석에 올라타며 잔뜩 약이 오른 투로 묻는다. “어딜 들르는데?” “43번가.” 안전벨트를 매던 닉쿤은 에이먼을 대신해 우영이 돌피를 주문해 나르는 가게가 43번가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형 대신에 인형 사러?” “응. 신제품 나오는 게 있어서 부탁해놨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기어를 바꾼 닉쿤이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잔뜩 비틀린 어조로 묻는다. “너는 안 쪽팔리냐?” “안 쪽팔려. 네가 모으는 거라고 소문냈으니까.” “하여간……. 이제 에이먼 부탁 들어주지 마. 네가 왜 에이먼 심부름을 해줘?” “친구니까.” “친구라도 그렇지.” “운전이나 잘해.” 아직 쌓인 게 겹겹이라 우영이 툭 내쏘듯 말하자 닉쿤은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우영의 입에서 더 이상 병원 가자, 굿 하자라는 말이 안 나온다는 건 우영이 슬슬 이 상황을 현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우영은 현실도피가 특기이긴 하지만 한 번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녀석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더 쉬웠을 거다. “그래서 내 프로포즈에 대한 답은?” “어제 말했잖아. 거절한다고.” “날 덮치고도?” “그 얘기하지 말랬지!” 듣기 싫은 그 말에 우영이 으드득 이를 갈자 닉쿤이 우영을 흘깃 쳐다보며 얄미운 투로 받아친다. “어제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내고 오늘은 모르는척 구는 거 너무 매너 없는 짓 아냐?” “누가 매너가 없어? 그리고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녹음한 자료가 있다니까.” “제발! 지금 그 얘기는 하지 말자. 나도 머리 정리 좀 하자고.” “정리할 게 뭐 있어? 이미 질렀어. 선을 뛰어 넘었다고. 오늘부터 넌 내 애인이야.” “난 넘은 기억 없거든?” “왜 이러시나. 날 사랑하신다면서.” “그건…….” 우영이 막 그 사실에 대해 반박하려는 순간 청바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노먼인가 해 핸 드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하자 난생 처음 보는 번호였다. 거래처나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모두 저장되어 있는 터라 누가 전화를 한 건가 해 우영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엘리에요.」 대뜸 엘리라고 하는 그 말에 우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 누구시죠?” 「……엘레나요.」 순간 우영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아무리 싫어도 그건 아가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너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당신 번호 따는 건 식은 죽 먹기죠. 닉쿤 번호도 알아냈는데.」 그래, 이 아가씨 마피아의 딸이었다. 깜빡했다. “내 전화번호는 왜?” 「연적의 전화번호 정도는 알아둬야죠.」 “알아서 뭐하게?”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닉쿤 위치도 알죠! 난 위치 조작도 할 수 있어요.」 무슨 의미인지는 대강 알 것 같은데, 말이 틀렸다. 아니, 정확히는 단어가 틀렸다. “……내 위치를 왜 조작해?” 「아, 그것도 몰라요? 핸드폰으로 위치 알아낼 수 있다고요.」 “조작이 아니라 추적이겠지.” 우영이 정확하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자 엘레나가 침묵한다. 그리고 휘리릭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잡지에서 뭘 또 봤나 보다. 문제는 그걸 제대로 읽지 못하는 엘레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조작이든, 추적이든, 하여간 각오해요. 당신들이 어디에 있든지 난 알 수 있어요. 당신이 있는 곳에 닉쿤이 있다 이거죠,」 엘레나는 득의양양하게 자기가 이렇게 능력이 있다고 말했지만 우영은 순간 이 아가씨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뇌 구조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거야 상관없지만…… 닉쿤 번호 알면 그냥 닉쿤 위치를 추적하지, 왜 날 추적해?” 뭘 그리 복잡하게 돌아가냐고 묻는 그 말에 엘레나가 침묵한다. 대신 옆에서 운전을 하던 닉쿤이 우영에게 “타 조야?”라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답을 한 우영은 진심으로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엘레나에게 전화를 끊 어달라고 요청했다. “더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아, 잠깐만요!」 “또 왜?” 「질투 스펠링이 뭐예요?」 “……j-e-a-l-o-u-s.” 「알았어요. 기다려요.」 “뭘?” 「협박문자요.」 “……협박 문자를 원래 이렇게 통보하고 보내는 거냐?” 「내일 편지로도 갈 거예요. 오늘 하루 종일 신문 오려내느라 죽을 뻔 했어요. 제 성전인 보그랑 마리끌레르도 다 오렸다고요.」 “……저기, 엘레나. 아니, 엘리. 신문을 왜 오렸는데? 그냥 손으로 쓰지.” 「그럼 제 필테가 남잖아요.」 역시나 가능한 건 일반 수준의 대화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의 뇌는 고급 영어를 하기엔 무리가 있는 모양이다. “필테가 아니라 필체야. 하여간 필체를 남기면 안 되는 편지를 보내면서 왜 미리 알려주는데?” 「원래 협박문은 그런 거잖아요.」 “너도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닉쿤이 자신에게 텔레비전 좀 그만 보라고 할 때의 기분이 이랬던 걸까 하는 생각에 한숨이 터졌다. 과도한 매스미디어로의 노출은 이런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따라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신문 오릴 생각 말고 읽어라.” 「하여간, 기다려요.」 “기다리는 건 기다리는데…… 너 파닉스(phonics)부터 다시 공부해. 서면 인터뷰하면 큰일 나겠다.” 「공부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세르게이가 책 잔뜩 사다줬어요.」 순간 우영은 자신이 들은 이름이 맞는가 하는 생각에 엘레나에게 되물었다. “……세르게이? 세르게이 네브즐린?” 「네. 우리 큰오빠요.」 미하엘 네브즐린의 장남이자 현재 러시아의 상권을 휘어잡고 있는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이름에 우영은 경악했다. 미하엘 네브즐린이야 워낙에 나이가 있고 또 나름 원칙이 있는 사람이지만 세르게이 네브즐린은 다르다. 그가 현재 매춘과 총기 밀매, 그리고 마약에까지 손을 뻗어 가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합법적인 인력 사업에 몸담고 있지만 그의 실상은 진짜 마피아였다. 마피아 그 자체였다. 사회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은발의 도도한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낸 우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외모야 기가 막히게 잘 생겼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살 떨리는 남자였다. 사진을 보면서 이 사람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올지도 몰라, 라는 생각까지 했던 그 남자가 철부지 막내동생을 위해 기초 영어교제인 파닉스를 사다니. 뭔가 안 어울린다.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책도 사다주는구나……. 그것도 파닉스를…….” 「물론이죠. 오빠들이랑 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줘요.」 과연 그럴 듯하다. 세르게이에게 아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서른 중반의 남자가 서점에서 파닉스를 고른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여길 텐데-워낙에 유명인이라- 동생을 위해 그 쪽팔림을 감수하다니. 이 타조양은 가족들에게 진짜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네가 그 모양이구나?” 우영이 이제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전화기 저편의 엘레나가 자신있게 말한다. 「제가 그래서 예쁘죠. 전 러시아 공주에요.」 “공주치고는 너무 무식한 것 같은데……?” 「글 못 읽는다고 무식한 건 아니잖아요?」 “현재 러시아 대통령은?” 「……볼셰비키?」 “……너, 대체 몇 세기에 사는 거냐? 그리고 볼셰비키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다수당’이라는 뜻이야. 너, 너희 나라 말도 몰라?” 「그럴 수도 있죠. 우리 오빠들도 모를걸요.」 “……너희 나라 수도가 어딘지는 알아?” 「……모스키토?」 “너희 나라 수도는 모기의 본거지냐?” 「무스크……. 아니, 마스크…….」 모기에 이어 나온 무스크에 마스크까지. 더는 머리가 아파와 말할 기운이 없었다. “……관두자. 내 머리까지 새하얘지는 것 같다. 공부해, 응? 다음에 전화할 때는 제발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알고 있길 바란다. 끊어.” 거기까지 말한 뒤 우영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닉쿤에 엘레나에 노먼까지, 아주 뒷골이 지끈지끈거린다. “엘레나가 왜? 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닉쿤 역시 우영이 궁금해 하던 바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영은 그 말에 답해주기보다는 바로 떠오르는 바를 내뱉었다. “엘레나. 얘 피부가 왜 좋은지 알겠어.” “왜?” “뇌가 깨끗하면 피부도 깨끗해지나 봐. 고민할 게 있어야 트러블이 나지.” 얼굴 예뻐, 몸매 죽여, 아버지는 러시아 마피아 대부에 큰오빠는 러시아의 대제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남자. 거기 다 타고난 순백의 뇌덕에 스트레스도 안 받으니 피부가 백옥 같을 수밖에. 우영이 자신의 피부는 아주 썩어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한탄을 하자 닉쿤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너도 아직은 탱탱해. 너무 걱정하지 마.” “너 때문에 하룻밤에 3년은 늙은 것 같아.” “3년 늙었어도 동양인은 어려 보이니 괜찮아. 너 아직도 고등학생으로 보여.” 닉쿤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금 우영의 머릿속은 터질 것 같은데, 닉쿤은 오히려 터트리고 나니 편한 모 양이다. 자신의 상황 따윈 상관없다는 듯한 닉쿤의 태도에 열 받고, 겨우 마음 정리하니 들이대는 닉쿤의 기가 막힌 타이밍에 더 열 받고, 아직도 마음을 정리 못 한 듯 망설이는 자신에게 또 열 받아, 머리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제 더는 피해나갈 구석이 없다는 걸 알았다. 핑계를 댈 것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Chapter 5 『I`m zealous. I must has you go away.』 완벽하게 문법을 무시한, 게다가 단어도 틀린 문자를 받은 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난 열정이다. 당신을 멀리 가게 만들 거예요. 그래, 네 이름이 원래 질러스였구나.” j와 z 하나 차이로 뜻이 심하게 갈린다는 걸 이 아가씨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분명히 낮에는 자신에게 철자를 묻고는 제대로 보냈던 걸 5시간 지났다고 또 틀리는 것도 문제지만, 이 아가씨는 아무래도 zealous가 질투라고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한숨을 내쉰 우영은 문자의 송신 번호를 확인하고 답 문자를 보내주었다. 『z가 아니라 j. 그리고 형용사는 뒤에 y 붙여야 돼. 그리고 must 다음에는 have다.』 오랜만에 허르베지쿨 저택에 돌아와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고 클랜이 대넌과 일대일 면담을 하는 시간을 이용해 수영장에 나와 있던 우영은 send 버튼을 누르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영과 썬탠을 좋아하는 클랜이 돌아와서인지 오랜만에 허르베지쿨 저택의 수영장이 가득 차 있었다. 어두운 밤에 일렁거리는 반짝거린다. 처음에 왔을 때엔 온 가족들이 툭하면 옷 벗어재끼고 일광욕을 하길래 이 집은 왜 이 렇게 벗고 다니는 걸 좋아하나 했더니 백인들은 뼈가 약해 일광욕을 자주 해줘야 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홀 라 당 벗고-물론, 저택 안 에서만- 썬탠을 하는 게 익숙한 가족들이라 덕분에 초기엔 적응이 안돼 고생을 많이 했었 다. 그래봐야 다들 자택을 갖고 집을 나간 뒤로는 대넌은 늘 바쁘고 사라는 수영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청소만 해주 더니 클랜 덕에 드디어 물이 가득 찬 수영장을 보자 신기하게도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생각도 나고,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도 떠올라 감회가 남다르다. 사실 저택에 도착하기 전까지 바싹 긴장한 채였다. 물론, 다들 기사만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라 생각은 했지만 어젯밤에 쳐둔 사고가 있는 터라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내쫓기면 어쩌나, 아니면 다들 자신을 잡아 죽일 듯 노려보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었는데, 막상 저택에 들어서자 모두가 평소와 똑같이 자신을 대해주었다. 에이먼 은 자신이 들고 온 선물을 들고 “앞으로도 닉쿤이랑 잘 지내.”라는 정체불명의 말을 남긴 뒤 3층으로 올라갔 고 , 클랜은 “고생했어.”라는 의미심장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사라와 클레어는 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다 음 시즌에 나올 가방들을 웨이팅 걸어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일 문제였던 대넌 역시 평소처럼 자신을 대해주었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이걸 좋은 징조로 봐야 할지, 나쁜 징조로 봐야 할지 애매한 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안사람들은 독특하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튀어갈지 알 수 없다. 조용한 수영장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자, 잠시 후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그 문자를 본 순간 진짜 머리통 이 깨진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낮부터 거의 5시간 동안 문자를 백 개가량을 주고받았는데. 이 아가씨가 제 대로 쓴 단어라곤 I, you 밖에 없다. 이번에도 틀린 철자를 고쳐 답문을 주었다. 아무래도 이번 달 핸드폰 요금은 네브즐린 가에 청구해야할 것 같다. “또 문자야? 그 타조 더럽게 할 일 없나 보다.” 저녁 식사 중에도 계속해서 울려대는 문자에 내용을 궁금해 하던 닉쿤이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왼쪽 눈가에 시퍼런 멍을 달고 따라 나왔다. 저녁 식사 후 에이먼은 역시나 3층 방에 박혀 나오지를 않는 채였고, 클레어와 사라는 응접실로 가 사교계 소문 들을 정보로 교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클랜은 역시나 대넌의 호출을 받고 서재에 감금당한 채다. “얘, 아무래도 내가 자기 친구인 줄 아나 봐. 자꾸 문자를 보내.” 한 번 답 문자를 주자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는 걸 보니, 이 아가씨에게 필요한 건 남자친구가 아니라 또래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문자 통이 꽉 차 번거롭게 지워야 했지 만,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답 문자를 주는 중이었다. 이렇게 매달리는 상대를 뿌리칠 만큼 자신은 독하지 못하다. “네가 자꾸 상대해주니 그렇잖아. 그런 애들은 상대해주면 끈덕지게 달라붙어. 귀찮게 뭐 하러 일일이 문자를 보내주고 있어?” “그러게. 나도 오지랖도 넓지. 5시간 동안 100통이 넘게 오간 것 같아.” 그 말에 닉쿤이 경악한다. “100통? 둘이 연애해?” 진짜 큰일 날 소리를 하는 닉쿤에게 우영은 맥 빠진 음성으로 그보다 더 큰일을 말해주기로 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보다 무서운 게 어디 있어?” “그 백 통 중에 얘가 문법이나 철자 실수 없이 문자를 보낸 건 단 한 통도 없다는 사실이야.” 그 말에 닉쿤이 한숨을 내뱉는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상대하고 있냐고. 머리 나쁜 것들은 상대해주면 좋아서 상대해주는 줄 알고 더 들러붙는다니까.” 속 모르는 닉쿤의 말에 우영은 진지한 얼굴로 핸드폰을 열어 닉쿤에게 문자를 보여줬다. “너라면 이 철자를 보고 답 문자를 안 보낼 수 있겠냐?” 단호한 우영의 말에 닉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이걸 일일이 지적해주고 있는 거야? 네가 걔 가정교사냐?”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사실 차라리 이 김에 닉쿤 비서 때려치우고 타조 가정교사로 들어앉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닉쿤과 좀 거리를 둬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아가씨 영어 실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다. 꼭 잡아 앉혀두고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애가 차라리 못되기라도 하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인데 은근히 귀여운데다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아 도와주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계속 문자를 보낼 기센데, 이 형편없는 영어 실력은 참아줄 수가 없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집으로 쳐들어가 노트랑 책 펼쳐두고 패가며 과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마피아 딸이니 아무래도 페이도 세지 싶다. 위험수당이 어마어마하게 첨부될 거다. 생 명보험하고 사고보험도 엄청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점점 마음이 기운다. 예일대 영문과 졸업생이면 가정교사로서는 최곤데……. “걔도 참 어지간하다. 그쯤 했으면 알아먹어야지.” 닉쿤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 사이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우영은 문자를 확인하고는 지친 듯한 음성으로 닉 쿤에게 말을 건넸다. “절대 포기 안 할 기세야. 이젠 전술을 바꿔서 자기 성년 될 때까지 4년 동안 문자 보내서 나 혈압 올라 죽게 하려는 것 같아. 연적이니 뭐니 하는 거 보니, 날 먼저 해치우려나 봐.” 엘레나의 문자가 무서운 건 그 협박문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엘레나의 무시무시한 영어 실력이었다. 어쩌면 이게 엘레나의 고도의 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문자 받다 열 받아 자신이 혈압으로 쓰러지길 바라는 거라면, 엘레나는 진짜 천재다. 7살짜리가 보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라고 중얼거리던 우영이 또 다시 틀린 철자를 지적해 문자를 보내주자 닉 쿤이 휴대폰을 빼앗아 옆 의자에 던지며 진지한 어조로 말을 건다. “엘레나보다 나랑 할 얘기가 있잖아. 얘기 좀 해.” “……나중에 하면 안 될까? 난 아직 정리가 덜 됐는데.” 오늘 하루 종일 고민하고 정리하고 대책 세우고 또 다시 고민해봤지만 여전히 결론은 나지 않은 채였다. 아니, 사실을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엘레나한테 문자 보내느라 닉쿤과의 일을 살짝 까먹고 있었다. “우영, 날 믿지 못하는 거 알아. 믿을 수 없겠지.” 그래도 네 주제는 아는구나 싶어, 우영은 닉쿤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앉았다.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우리 가족을 걱정하는 거야?” “걱정 안 되면 거짓말이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지. 사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럼?” “내가 너한테 마음이 없어.” 우영이 딱 잘라 말을 내뱉자 닉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다 이내 겨우 마음을 수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거짓말하지 마.” “녹음 핑계 대지 마. 내 마음은 지금 안 그래. 내가 널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정리했어. 다시 혼란스럽기 싫어. 난 내 일을 좋아하고, 너랑 지금 이대로 일하는 게 편해. 진창으로 얽히는거 싫어.” “……왜?” “여러모로. 버림받는 게 무섭다거나 하는 건 문제가 아냐. 그래, 뭐 사귀다 헤어진다고 죽기야 하겠니?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이 별로 안 흔들린다. 그리고 사실 그런 생각도 들어.” “무슨 생각?” “난 몇 주짜리인가…… 하는 거.” 닉쿤의 연애는 주 단위였다. 달도 아니라, 주 단위다. 보통 길면 3주, 짧으면 1주다. 사실 일주일을 만난 여자를 진짜 사귀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데이트는 탐색전이고 두 번째는 확인 작업이다. 그리고 세 번째에야 비로소 굳히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하루에 18시간을 일하던 닉쿤이 그 여자들과 일주일에 일 곱 번을 만난 것도 아니고, 두세 번 데이트 후에 굿바이였으니 어떻게 보면 ‘교제’의 개념에 들어가는 이 들은 몇 안 될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진지하게 사귀었다 하는 상대는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타블로 이드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나니 그냥 사귀나보다 했던 거다. 따지고 보면 매스미디어의 세뇌 기능에 걸려들 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의문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조금은 그런 식으로 닉쿤에게 보복해 주고 싶은 마 음이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닉쿤은 정확히 걸려들었다. “……우영…… 그건…….” 당황한 얼굴로 뭔가 반론을 펼치려는 닉쿤을 우영이 막는다. “내 말부터 들어. 그래, 연애한다 치자. 네가 나한테 장난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너 그럴 사람은 아냐. 그 건 믿어. 지금까지 네가 만난 사람들 전부 네가 진심으로 대했다는 거 알아. 연애 감정이든 우정이든, 넌 언제나 진심으로 성의있게 사람들을 대해줘. 그래서 내가 널 사랑했던 거고.” “그래. 그러니까……” “네 옛 연인들의 절반은 지금 네 우수 고객들이고, 절반은 네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거 알고 있어. 너한테는 필요한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이 너와 헤어지고도 그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네가 그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도 그 사람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를 만났었다는 뜻이기도 해. 몇 번 만나 식사하고 섹스하고, 정보를 주고받고 어쩌면 연애보다는 사업에 더 가까웠던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즐거웠을 거야. 그리고 즐거웠던 추억이 남아있으니까 너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겠지. 그런데 말야 …….” 거기까지 말하던 우영이 말을 잠시 끌자 닉쿤이 재촉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못 하겠어. 그리고 헤어지면, 널 보고 어떻게 일해? 난 촌스러워서 헤어진 상대랑 웃으면서 같이 일 못해. 아마 계속 생각날 거야. 좋은 추억이 떠오르고, 그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아파서 널 제대로 못 볼 것 같아. 그리고, 내가 실연 당하면 난 누구한테 위로 받아?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데…… 누가 나한테 위로를 해줘?” 시작도 전에 헤어지길 걱정하는 우영의 태도에 닉쿤은 화가 치민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안 헤어지면 되잖아? 내가 그런 각오도 없이 네 종신 보험에 서명하겠다고 나섰는 줄 알아?” “종신보험 쓰레기 되는 거 순식간이야.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나도 이렇게 식었는데, 너라고 식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 “있어!” “그렇게 쉽게 답하지 마. 나도 내가 이렇게 편하게 널 대할 줄 몰랐어. 그런데 그게 별거 아니더라. 시간 지나니 편해지더라.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너 혼자 결론내리지 마.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마음이 동하니 지금 너한테 이렇게까지 한다고 생각해? 그 정도로 내 진심이 우스워 보여? 확신이 서지 않으면 난 움직이질 않아. 너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야. 난 절 대 확신할 수 없는 서류에는 사인하지 않아.”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그 서류에 사인하고 네 마음 식으면 어떻게 할래? 그래도 사인했으니 약속은 지키자고 의무적으로 날 대하는 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데?” “그럴 일 없다니까!” “넌 널 믿지? 그런데 난 널 믿을 수가 없어. 솔직히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좀 더 생각해 볼래. 아직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이르다.” 거기까지 말한 우영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 핸드폰을 들고는 돌아섰다. “일어설게. 쉬어라.” 오늘따라 유난히 지친 듯한 기색으로 돌아서는 우영을 바라보던 닉쿤은 언젠가 꼭 우아한 분위기에서 감동적으로 고백하려 준비했던 그 말을 내뱉어버렸다. “난 널 사랑해. 10년 전부터 계속 그랬어. 나는…….” 하지만 그 고백에도 우영은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뒤를 돌아보며 닉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럼 10년 전에 말하지 그랬니?” “You win!” 2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클랜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는다. 어릴 때에는 가장 작았지만 지금은 형들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자란 유쾌한 청년의 인사에 우영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 “들었어?” “응. 분위기가 묘하길래 몰래 엿들었지. 하여간 축하해.” “뭘?” “우리 형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 끌어낸 거. 그리고 고생길 열린 거.” 아무리 클랜이 반골기질이 강한 허르베지쿨가의 문제아라고는 하지만, 이 상황을 반기는 건 아무래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랜, 너 너무 재미있어 하는 거 아냐? 설마 너 이 일 때문에 돌아온 건 아니겠지?” “설마. 나도 형을 본받아볼까 하고 온 거지.” “닉쿤을 본받아서 뉴욕 여자들 씨를 말리려고?” 닉쿤 벅 허르베지쿨에게서 본받을 거라곤 그 바람둥이 기질과 사기꾼 기질밖에 없는지라, 우영이 제발 그것만은 본받지 말라는 투로 말을 걸자 클랜이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린다. “설마. 난 형처럼 기운이 넘치지 않아.” “그럼 뭔데?” “정면 돌파.” “뭐야? 너도 사고 쳤어?” 허르베지쿨 가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의 절반이상이 클랜이 치던 사고였다. 맥캐인 가에 노먼이 있다면 허르베지 쿨 가에는 클랜이 있다, 는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돌 정도로 클랜은 노먼과는 다른 의미의 말썽꾸러기였다. 이 악 동이 정면 돌파를 하겠다는 걸 보니 보통 일이 아닌 듯해, 우영이 불길하다는 얼굴로 클랜을 뚫어져라 쳐다 보며 묻자 클랜이 씨익 웃으며 그의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들어가서 얘기해. 우영한테만 몰래 해주는 얘기니까, 대신 비밀 지켜줘야 돼.” 이 놈의 집안사람들은 비밀이라면서 왜 그렇게 자신에게 털어놓나 싶어 우영은 살짝 진저리를 쳤다. “그 비밀, 그냥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으면 안 되겠냐? 너희 집 사람들 비밀 너무 좋아해. 그리고 그 비밀 나한테 말해주는 것도 너무 좋아해.” “그거야 우영이 믿을 만하니까지.”라고 웃으며 답을 한 클랜이 먼저 걸어 그의 방문을 열고는 우영을 기다린다. “들어와. 나랑 맥주 한 잔 해.” *** “우영, 그거 형한테 사기당한 거야.” 맥주를 마시던 중 클랜의 마수에 걸려 그간 닉쿤과 있던 일을 전부 터놓아버린 우영은 지난 밤 일을 들은 뒤 단숨에 답을 내려주는 클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우영이 그럴 성격도 아니거니와, 우리 형이라면 그랬으면 당장에 끝까지 갔을걸. 참긴 뭘 참아? 그 호색한이. ” 클랜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단언했다. 그리고 그제야 우영은 “아.”라며 멍청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형제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닉쿤라면 분명히 끝까지 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형이 진짜 급하긴 했나 보네. 그런 편법을 다 쓰고.” 시원스러운 클랜의 답에 우영은 슬슬 닉쿤에 대한 살심이 일기 시작했다. 역시 주먹 한 대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 . “역시 몇 대 더 패줬어야 했어. 나쁜 자식.” “어쩔 수 없지. 우리 형이 사기 치는 실력이 끝내주잖아. 우리 아버지도 여러 번 당했는데, 뭐. 허르베지쿨가에서 안 태어났으면 지금쯤 어디서 엄청난 게이트 하나 일으키고 연방교도소에 갇혀 있을걸. 거기다 통은 좀 커. ” 분명 그렇다. 그 미모에 그 성격에, 그 머리에, 그 뛰어난 언변과 화술에, 사기 실력까지. 절대 범죄자다. 범죄 자 아니면 사이비 교주다. “……입이 찢어져도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러니까, 우영이 형을 못 믿는 것도 난 충분히 이해해. 그래도 너무 괴롭히지는 마. 적당히 애태우다 넘어가 줘. 우영도 형 사랑하잖아.” 클랜은 의외로 이 사태를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우영도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클랜은 걱정하지 않았다. 클랜은 에이먼이 대형 구체관절 인형을 들고 와 결혼하겠다고 해도 손뼉 치며 축하해줄 성격이다. 어쩌면 할 까 말까 망설이는 에이먼을 부추길지도 모른다. 그래, 클랜 허르베지쿨은 그런 인간이었다. 노먼과 붙으면 아주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다. 두 사람이 붙으면 지구 멸망이다. 노먼과 클랜 둘이 손잡고 있는 것만 생각해도 아찔해졌지만, 그래도 지금 자신이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대는 클랜뿐이라, 솔직하게 심정을 털어놓기로 했다. 새삼 이 시기에 돌아와 준 클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사실은 그게 문제야.” “뭐가?”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단 말이지.” “왜?” “나도 확신이 안 서. 닉쿤은 확신한다고 설치는데, 뭐랄까……. 나 그 녀석 좋아했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오래된 친구 사이에 남은 정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또 가족 같은 기분이기도 하고, 또…… 가끔은 사랑이 남은 것도 같고. 내가 확신이 안 서. 사실은 그래서 그래.” 그게 제일 문제였던 것 같다. 닉쿤이 이렇게 나오는 게 당혹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기쁜 것도 사실이다. 아예 싫은 건 아니다. 그냥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 복잡한 거지, 진짜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싫은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인 거다. 차라리 싫으면 아예 작정을 하고 끝장을 보면 되겠지만, 그러기엔 아직도 아리까리하다. 자신의 감정이 진짜 정리가 된 건지, 아니면 아직 미련이 남은 건지, 잘 모르겠다. “우영, 너무 초조해 하지 마. 그거야 천천히 확인하면 되지. 10년 기다렸으니 10년 더 못 기다리겠어?” “……10년은 또 뭐야?”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뭔데?” “거기서부터는 노코멘트. 거기까지 내가 말하는 건 페어플레이가 아니니까 형한테 직접 들어.”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듯 딱 잘라 말을 자르는 클랜의 태도에 우영도 더는 그 문제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진짜 궁금하던 바를 물었다. “그런데 넌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사고는 아냐.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 어쩌면 이 상황에서는 아버지가 반기실지도 모르지. 어쩌면, 날 잡아죽일지도 모르지만.” 잡아 죽인다는 그 말에 우영은 진심으로 클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넌은 절대 아이들에게 손을 대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끼기에, 자식들과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가정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그 덕에 허르베지쿨 가의 사 남매들의 관계도 돈독했다. 그런 그가 아들을 잡아 죽일 정도라니,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걸까. “대체 뭔데? 빨리 말해. 심장 떨린다.” “별거 아냐. 그냥, 결혼하려고.” 순간 우영은 눈을 크게 뜨고 클랜을 바라봤다. 이 시대 최후의 반항아인 클랜 허르베지쿨이 결혼이라니. “……결혼?” “응.” “그건 축하할 일이잖아.” “그게…… 좀 문제가 있어.” 클랜이 망설이는 걸 보니 걱정은 되지만, 이 상황이라면 대넌은 어지간한 상대라면 다 받아줄 거라고, 우영은 생각했다. 첫째인 에이먼은 그 놈의 수집벽 때문에 결혼이 어려운 상태고, 닉쿤은 온갖 염문만 뿌려대다 결국 게이설까지 나도는 채이고, 막내인 클레어는 일 욕심이 많아 약혼자를 독수공방시키며 결혼을 미루고 있다. 빨리 자식들을 결혼시켜 손자를 보고 싶다고 하던 대넌이라면 클랜이 결혼한다고 하면 어지간한 상대가 아닌 이상은 두 손 들어 환영할 것이다. “결혼 소리 하는 거 보니, 상대가 남자인 건 아니고……. 애 딸린 과부야? 아니면 미성년자?” “……재클린.” “재클린? 재클린 레너드? 그 재키?” “응.” “와! 그거 축하할 일이잖아. 걔 석 달 전에 성인 됐잖아. 문제될 거 전혀 없네.” 재클린은 대넌의 절친한 친구인 브루스 레너드의 딸이었다. 엄청난 미녀는 아니지만 성격 좋고 싹싹하고 하버드에 입학한 수재에 얌전하고 예의 바른 아가씨였다. 무엇보다 대넌이 친딸처럼 아끼는 아이였다. 친우의 딸이기도 하지만 애교 없는 클레어와는 달리 재클린은 아주 상냥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재클린이 상대인 게 그게 뭐가 문제냐 싶어 우영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넌 엄청 좋아하겠는 걸? 너, 그렇게 속 썩이더니 막판에 효도하는구나. 그래서 돌아온 거야?” “응, 일도 시작하고. 그쪽은 내가 백수인 게 영 못마땅한 모양이니까.” “진짜 사랑은 위대하구나. 죽어도 목 조르는 넥타이 매고 매일 출근은 못 하겠으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한 네가 일을 하겠다니.” “뭐, 사실 슬슬 내 재능의 한계가 보여서 말야. 파리에서도 글 쓰는 것보다 투자 상담으로 돈을 더 벌었거든. 열심히 주식해서 먹고 살았지.” “하하, 너희집 특성인가 보다, 그건. 진짜 돈은 잘 벌어.” “그러니까. 희망과 재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진짜 슬픈 일이더라고.” “그 기분은 내가 잘 알지.” 우영 본인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클랜을 백배 이해했다. 사실 암울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보자면 자신은 원래 아주 감성적이고 문학적이어야 하는데, 어떤 경험도 없는 재능을 살려주지는 않는다는 걸, 우영은 자신을 통해 처 참하리만치 깨우쳤다. 교수님들조차 너는 글을 쓰기보다 평론이나 편집으로 나가는 쪽이 백배는 나을 거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글쓰기 재능은 제로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보다 더 재능이 없는 게 클랜이었다. 사실 대넌은 꽤 문학에 소양이 있는 남자였다. 문학가들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해주던 대넌은 자식이 넷인데다 다들 제 몫을 확실히 하다 보니 가문에 한 명쯤 작가가 있어도 괜찮을 거라고 하며 클랜을 지지해줬다. 하지만 그런 대넌조차 클랜의 무재능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6년 전엔가, 클랜이 쓴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은 대넌은 당장에 때려치우라고 그 소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만약 클랜이 허르베지쿨 이름을 걸고 소설을 낸다면 그건 가문의 수치이니, 전량 회수에 불태워버린다고 할 정도로, 클랜은 진짜 재능이 없었다. 그대신 클랜은 돈을 버는 데에 비상했다. 허르베지쿨가 남매들 모두가 예술이나 교양 쪽으로는 젬병이지만 사업쪽으로의 감은 타고났다. 진짜 환경은 되는데 꿈과 재능이 완벽하게 불일치한다는 건 다행 중의 불행이었다. “그런데, 우영이 좀 도와줘야 돼.” “왜?” “우영이 닉쿤 옆을 꿰차야 아버지가 날 안 죽이실 것 같아서.” “뭐가 문제야? 다른 상대도 아니고 재클린인데.” 거기다 마음잡고 일까지 한다니 대넌으로서는 가문의 수치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아도 되니 당장에 대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거였다. “그게, 재키가 임신을 했거든.” “……응?” “생일 지났다고 프랑스에 와서 정식으로 교제하자고 하길래 그냥 질러버렸지. 임신 3개월이야.” 그 말에 우영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클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확인했다. “저기, 레너드 독실한 청교도 집안아냐?” “맞아.” “그리고 재키는 열여섯 생일날에 혼전 순결선언을 했었지, 아마?” “응. 그래서 재키랑 나랑 둘이 꼭 끌어안고 벌벌 떨다가 내가 먼저 총대 메고 나선 거야.” 처음 본 순간 불독을 닮아 브루스인가, 하던 브루스 레너드의 얼굴을 떠올린 우영은 진심으로 클랜에게 조의를 표했다. “……브루스가 너 죽일지도 모르겠다.” 레너드 가는 크리스찬도 아닌 아주 독실한 청교도 집안이었다. 심지어는 자식 이름도 첫째 딸이 마리아, 둘째 아들은 요셉, 셋째 아들은 요한이었다. 재클린이 재클린이 된 건, 단순히 재클린의 임신 중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외할머니의 이름을 따 재클린이 된 것뿐이다. 그 정도로 레너드 가는 독실한 청교도 집안이었다. 그 집 자식 들은 딸들뿐 아니라 아들들까지 열여섯이 되면 무조건 혼전순결 선언을 해야 하고, 특히나 딸들은 혼전까 지는 절 대 아버지가 허락한 남자가 아니면 교제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브루스 자체도 워낙에 고지식하고 깐깐한 사 람이라 파티에서조차 딸들이 등과 허벅지를 드러내는 옷도 못 입게 할 정도였다. 닉쿤이 한 번은 사석에서 시대 착오적인 가풍이라고 브루스를 비난하자 그대로 테이블을 뒤엎을 정도로 성격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혼인에는 닉쿤도 하나의 암초였다. 브루스는 닉쿤을 죽도록 싫어했다. 게이설까지 난 상태니 지금은 더 싫어할 거다. 그런데 클랜이 그의 어린 딸을 임신까지 시킨 걸 안다면 진짜 킬러를 고용할지 도 모른다. “우영, 그렇게 아픈 데를 찌르지 마. 그래서 지금 협조를 구하는 거잖아. 그쪽은 지금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 상황인데 재키가 임신까지 했으니 진짜 날 죽일지도 몰라.” 확실히 그럴 거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의, 그것도 허르베지쿨 가의 아들이라지만 무재능의 백수 작가 지망생에게 딸을 내주고 싶을 리가 없다. 에이먼이나 닉쿤라면 몰라도 클랜은 진짜 결혼상대로는 빵점이다. 거기다 임신까지 시켰다면, 클랜도 클랜이지만 재키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몇 번인가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브루스 는 여 기가 중동이라고 생각하는지 부인과 자식들에게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딸들을 막 대 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재키가 아버지에게 혼나고 허르베지쿨 저택으로 도망 왔을 때 얼굴에 멍 이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가정 폭력이 절대 없을 것 같은 미국이지만 실상은 아주 심하다. 특히나 남자가 돈이 많을 경우엔 누구도 손댈 수 없다. 어쩌면 이 일은 재키에게는 잘 된 건지도 모른다. 허르베지쿨가 남자들은 여자들에게는 아주 상냥하다. “내가 아니라 사라나 클레어한테 협조를 구하는 게 좋지 않아? 에이먼이랑 닉쿤이야 네 인생 네가 살라고 하겠지만, 두 사람은 도와주지 않을까?” “두 사람이 나 대신 죽어주진 않을 거잖아. 그러니까 당분간 아버지 혼을 좀 빼달라고. 형이 친 사고에 비하면 난 양반이지. 형이 우영하고 진짜 같이 살겠다고 하면 날 끌어안아주실 거야.” “너, 그래서 돌아온 거야? 이 김에 치려고? 너 살고 우리 죽으라고?” “응.” 쉽게 말해 클랜의 계획은 대넌이 닉쿤 때문에 정신없는 사이, 치고 빠지겠다는 의미였다. 순간 우영은 그냥 자기가 먼저 이 자식을 한 대 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은근히 얄미운 녀석이었다. “그래, 좋다. 나랑 닉쿤이 대넌의 혼을 빼놓는다 치자. 그런데 그쪽에서는 널 반기겠냐? 닉쿤이 게이인데, 그 청교도 집안에서 이 집이랑 사돈을 맺으려고 하겠냐고. 그렇지 않아도 닉쿤한테 쌓인 게 많을 걸? 저번에 이동 통신사업에 뛰어들겠다고 자금 모으는데, 닉쿤이 F진단 내려서 무산됐잖아.” “형이 문제긴 하지. 하지만 재키가 임신했잖아. 그쪽은 빼도 박도 못해. 유산시키려고 하면 내가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낼 거야.” “닉쿤이 대넌 무덤 파놓으니 넌 묻어주려고 왔구나. 조만간에 대넌, 병원에 실려 갈지도 모르겠다.” “하하. 고생도 한번에 하는 게 좋잖아. 아버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소식 듣는 순간 이때다 싶더라고. 그래서 서로 서로 좋자고 형 지원사격 해주러 온 거지. 형도 살고, 나도 살고, 재키도 살고. 재키도 기사 보더니 눈이 확 떠지던데? 일단 우리 아버지 설득은 쉽겠다고.” 순간 우영은 저런 걸 자식이라고 둔 대넌이 진심으로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저런 자식들 때문에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럼 그쪽은?” “내가 맞으러 가야지. 양쪽에서 맞는 것보다는 한쪽에서 맞는 게 좋잖아.” 누구 부럽지 않게 성공한 사업과 외모와 지성 교양에 성격까지 좋은 자식들, 그리고 아름답고 헌신적인 부인까지. 대넌 허르베지쿨의 인생은 완벽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모두가 찬양하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아무래도 앞 으로는 그다지 평탄치 않을 것 같다. 알콜 중독자나 마약중독자 하나 없이 청소년기를 무난하게 보내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그의 장성한 아들들이 이제 와 돌아가면서 속을 썩이고, 어쩌면 평생을 사귀어온 친구에게 절연 당할 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대넌에 대한 연민이 들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웬수다.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내가 뭐라고 하겠냐.” “그러니까 아버지 좀 당분간 정신없게 만들어줘. 그리고 형한테 너무 그러지 마. 우리 형도 고생했어. 정 못믿겠거든, 은행 금고에 숨겨둔 각서 보여 달라고 해봐. 아버지가 그거 찾으려고 한바탕 난리치신 것 같으니까.” “각서? 무슨 각서?” “형한테 물어봐. 난 노코멘트.”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아?” “지원사격만 한다니까, 나는. 본 사격은 형이 해야지. 아버지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이 김에 같이 사고 쳐서 허락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우영도 어지간하면 우리 형 그만 봐줘.” “봐주고 말고 할 게 없다니까. 네 형한테 화난 거 아냐. 그냥, 내가 복잡한 거야. 정신도 없고.” 이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야 하든가 말든가 하지, 라고 중얼거리던 우영은 갑자기 울린 핸드폰 벨소리에 폴더를 열고 재빨리 답을 했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하지만 상대는 답이 없다. 혹시나 해 번호를 확인하니, 엘레나였다. 하루 종일 문자를 보냈더니 번호도 외워버렸 다. “엘리, 왜?” 「……왜 답 문자 없어요?」 “아, 지금 누구랑 얘기 좀 하느라. 왜?” 「내가 귀찮게 해서 화났어요?」 나 열 받으라고 문자 보낸 거 아니었냐? 라고 하려다 우영은 무난하게 말을 돌렸다. “좀 귀찮긴 했지만 화날 정도는 아니었어. 지금 허르베지쿨 저택에 와있거든. 클랜이 돌아와서 얘기 좀 하던 중 이야.” 「그래요? 그럼 문자 더 보내도 돼요?」 듣던 중 무서운 말이었다. 백 통을 보내고 또 보내겠다니……. 물론 핸드폰 요금 값 걱정할 아가씨는 아니지만, 자신은 걱정된다. 그리고 솔직히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다. “엘리, 너 지금 나랑 문자 친구 하자는 거냐?” 「누가 늙은 아저씨랑 문자 친구 한대요? 그냥…… 그냥…….」 “그래. 너 내 나이 반토막이지. 그런데 지금은 서로 문자 보내고 통화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잘 시간 아냐?” 벌써 11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엘레나는 잘 시간이다. 「잘 거예요, 이제.」 “그래. 그럼 자. 나도 좀 쉬어야겠다. 오늘 많이 지쳤어.” 「……알았어요. 저…… 나한테 화난 거 아니죠?」 슬슬 눈치를 살피는 듯한 음성에 우영은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화 안 났어.” 「……다행이다. 답 문자 없어서 화내는 줄 알았는데.」 순간, 우영은 이 아가씨가 자신을 열 받게 해 죽일 정도로 고난이도의 작전을 쓸 만한 뇌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 나쁜 아이는 아니다. 그냥 모자란 것뿐이다. “그럼 자. 끊는다.” 「네.」 엘레나가 웬일로 얌전히 답을 하며 전화를 끊어주었다. 뭐랄까, 하루 사이에 진짜 더럽게 말 안 듣고 머리 나쁜 여동생이 하나 생긴 것 같은 기분이라 묘했다. “누구야? 엘리라니?” “아, 있어. 타조 양. 나 가서 잘게. 오늘 너무 피곤하다. 아침부터 놀라서 기운이 하나도 없어.” “그래. 아, 나 도와줘야 돼? 그럼 나도 도울 테니.” “난 솔직히 지금 네가 누굴 돕는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우영이랑 형 둘 다.” 자리에서 일어나 막 방문을 열려던 우영은 그 말에 클랜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클랜을 보며 싱긋 웃으며 답해주 었다. “너나 잘하세요. 장담하건대, 브루스가 너 골프채로 팰 거야. 재키는 임산부니 저택에 숨겨두고 가. 그리고 한 가지 더하자면 당장 사교계에 소문 퍼트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 아저씨가 재키 얼굴 보면 당장에 두드려 팰 것 같아서 파리에 두고 왔어. 내가 먼저 허락받고 돌아오는 대로 빨리 결혼해서 우리 집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 그 집하고는 완전 다르잖아, 우리 집은.” “그래, 행운을 빈다.” “아, 성감별 했더니 아들이래. 닉쿤 짐 좀 덜어줬으니 도와줘.” 시답잖은 그 말에 우영은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가 2층 복도 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절대 현실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던 클랜이 결혼을 하고, 결혼하기 위해 죽어도 입지 않겠다 선언한 양복을 입고, 게다가 그 결혼 상대가 그 어리던 재키라니. 역시 인생은 의외성의 총집합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대넌도 이 사실을 안다고 같은 기분일 것이다. 얼마 전 잡지 인터뷰에 ‘아이들이 나의 가장 큰 재산’이라며 아이들이 곧 국력이니 여성들에게 출산을 권장하는 말을 했지만 아마 다음 인터뷰에는 ‘자식 들 은 평생 원수니, 절대 애 낳지 마시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상사태에도, 클랜은 아주 행복해보였다. 맞아 죽어도 좋다는 듯 행복한 그 얼굴을 보니, 조금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지금 상태를 즐기면 행복해질까. 그냥 가는 대로 흘러가면 마음이 편해질까.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느니 그냥 내키는 대로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평생을 다른 사람들 눈치만 보며,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으니 한 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용기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의 소심함을 한탄하며 막 자신의 방으로 가 문을 열려는데 다시 핸드폰이 울려댄다. 엘레나인가 해 번호를 보니 이번엔 노먼이었다. “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던 우영이 퉁명스레 전화를 받자 노먼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뭐 또 그렇게 화가 났어?」 “화가 난 게 아니라, 피곤해서 그래. 만사가 귀찮다.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 줄래? 아니, 날 잊어라.” 「지금 어디야?」 “방.” 「그럼 창문 내다 봐.」 “왜?” 「하여간 봐.」 스크림 가면이라도 쓰고 무단침입을 했나 해 우영은 부루퉁한 얼굴로 창가로 다가섰다. “보고 있어. 왜?” 「우리 저택 보이지?」 “응.” 맥캐인 저택은 허르베지쿨 저택의 바로 맞은편이었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자 노먼이 “그럼 기다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뭔가 치적거리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야, 너 뭐야? 너희 집에 불내려는 거야?” 기숙사도 태워먹는 녀석이 집은 못 태워먹을 게 뭐냐 싶어 걱정스레 묻는 순간 갑자기 밤하늘 위로 색색의 불꽃이 터져나간다. 엄청난 소음과 함께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불꽃에 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이거?” 「마음에 들어?」 드디어 노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쉴 사이 없이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고요한 밤하늘을 수 놓는 화려한 빛의 향연에 우영은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노먼…….” 「왜? 감격했어?」 “……너, 이거 허가 받았어?” 「분위기 없는 놈. 그게 지금 할 소리냐?」 할 소리다. 노먼은 몰라도 우영은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너희 저택이긴 해도 밤중에 불꽃 막 쏴도 되냐고? 허가 받아야 하잖아.” 당장 경찰이 달려올걸, 이라는 우영의 말에 노먼이 웃고 만다. 「너무 너다워서 화도 안 난다. 까짓 거 유치장 신세 좀 지지, 뭐.」 “진짜 더럽게 할 일 없구나? 웬 불꽃이야?” 「말하는 거 하고는. 넌 진짜 감성 제로야. 그러니 글이 그 모양이지. 소설을 쓰라는데 기사를 쓰면 어떻게 해? 」 “너를 대할 때는 감성보다는 법이 필요해. 갑자기 뭐야?” 「감동적인 이벤트 좀 해본 거야. 어때? 내가 좀 달라 보여?」 “아니. 너무 너다운데? 경찰에 신고해야겠다.” 우영의 딱 잘라지는 말에 전화기 저편의 노먼이 긴 한숨을 내쉰다. 「너 진짜…….」 “농담이야, 농담. 왜? 무슨 용건이야?” 「용건이 있어야만 전화를 해?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한 거야.」 “난 네 목소리 들으니 피로가 몰려온다. 나 좀 쉬자. 오늘 좀 많이 피곤하다.” 「왜? 닉쿤이 드디어 고백했냐?」 그 말에 우영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굳어졌다. 노먼은 마치 눈앞에서 우영의 얼굴을 본 듯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것 같더라고.」 “무슨 소리야? 너, 뭐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너 같은 바보인 줄 알아? 그 자식 기숙사 시절부터 너만 보면 어떻게 잡아먹을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어. 그래서 그 놈 성질 긁으려고 나도 일부러 짓궂게 굴긴 했지만.」 상상도 못한 그 말에 우영은 놀란 얼굴로 창밖을 노려봤다. 클랜이 자꾸 10년 어쩌고 하던 것도 이상한데 노먼까지 이렇게 나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0년이라고 한다. 진짜 닉쿤이 10년이나 자신을 좋아했던 게 사실이라면…… 한 대 패줘야 한다. 아니, 열 대는 패줘야 한다. 솔직히 그게 사실이라면 기쁘다기보다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그 무수한 고뇌의 날들은 뭐란 말인가. 그리고 그 동안 아무 말 안 한 닉쿤은 또 뭐란 말인가. “진짜, 걔가 날 대학 때부터 좋아했다고? 넌 알고 있었고?” 「모르면 바보지.」 “야! 그럼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지!” 「말했으면 뭐? 너처럼 겁 많은 녀석이 너도 나도 서로 좋아하니 그냥 한 번 연애하자, 이러고 달려들었을까 봐? 아서라. 우영 케이먼은 그렇게 못해. 닉쿤이 먼저 행동하기 전엔 넌 절대 어떤 리액션도 안 보였을 거야. 말해봐야 소용없는 걸 내가 뭐 하러 말을 해? 알았어도 넌 그냥 넘어갔을 거야. 포기하기만 더 힘들어졌겠지.」 분명 노먼의 말대로였다. 그 상황에서는 닉쿤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노먼의 말대로 포기하기만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남을 통해 들으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대체 뭐야? 그럼 닉쿤은 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야? 나는 그렇다 쳐도 닉쿤이 그런 걸 속일 성격은 아니잖아. ” 「너랑 비슷한 거지, 뭐. 괜히 시작했다 어설프게 피만 볼까 하는 거. 진심이 담긴 사랑은 너만 두려운 게 아냐. 평생을 걸 사랑에는 누구나 신중해질 수밖에.」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지금까지 입 꽉 닫고 닉쿤 따라다니면서 사진이나 찍어댄 거야?” 「사실은 좀 괘씸해서 그랬지. 마음은 너한테 있으면서 이 여자 저 여자 하도 만나고 다니길래 엿 먹어봐라, 이 기분?」 “네가 왜 괘씸해?” 「그냥 같잖은 질투 같은 거지. 그리고 닉쿤보다는 내가 훨씬 괜찮은 남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좀 이상한 말이었다. 아니, 많이 이상한 말이었다. 노먼이야 워낙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폭탄 같은 녀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왜 그렇게까지 닉쿤을 괴롭혔던걸까. “노먼…… 너 진짜 나 좋아해?”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렇게 묻자 노먼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가짠 줄 알았냐?」 “응.” 「거참……. 내 나름대로는 필사적인 고백이었는데 넌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거지?」 “밥 먹듯이 무성의하게 사랑한다고 하는 놈을 어떻게 믿어?” 「하긴. 그래서 진심인 내 고백에 대한 답은?」 “난 너랑 연애할 생각 없어.” 「너 너무 답이 빠른 거 아니냐?」 “그게 진심인 걸. 너랑은 지금 이 상태가 좋아. 미안한 말이지만 진짜 너한테는 조금도 연애감정이 생기지 않는 다.” 「조금도?」 “응, 미안.” 「미안할 일은 아니지.」 “아니, 거절이 미안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몰라서 미안해. 진작 알았으면 확실히 거절하는 건데. 미안하다. ” 혹시나 하면서도 사실은 노먼이 절대 진심일 리 없다고 단정 짓고 그를 이용할 생각까지 했던 터라,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 노먼의 고백을 믿는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닉쿤만은 못하지만 노먼도 만만치 않은 바람둥이였다. 신문에만 안 났을 뿐 노먼의 화려한 여성편력은 동창생을 통해 자주 들어 알고 있었다. 닉쿤이 가볍게 자주 여자를 바꾸는 편이라면, 노먼은 아주 가끔이지만 진짜 진지하게 오랫동안 여자들을 사귀었다. 노먼이 누군가를 사귈 때마다 이번에야 말로 결혼까지 갈 것 같다는 소문이 퍼졌었으니 그 만큼 감정이 깊었던 거다. 그런 놈이 가끔 나타나 사람 열 받게 하고 사라지니,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보면 닉쿤보다 더 질이 나쁘다. 그러니까 자신이 노먼의 고백을 믿지 못했던 건 절대 노먼의 잘못이었다. 「……재미없는 놈.」 “하여간 미안.” 「됐어. 그런 일로 사과 받는 거 기분 더러워. 아닌 건 아닌 거지. 그래도 난 너 포기 안 해.」 “……그냥 포기해주면 안 될까?” 「미안하다면서?」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나 좀 포기 해줘라, 제발……. 지금 닉쿤만으로도 너무 벅차다.” 「싫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끈덕지게 붙어 다닐래. 데이트나 하자. 언제 만날래?」 “내가 이 상황에서 너랑 어떻게 데이트를 해? 몰랐으면 몰라도.” 「그럼 그냥 영화 보자. 아니면, 식사를 하든가. 친구끼리 하는 식사라면 괜찮지? 너한테 상담할 것도 있고. 어 때?」 참 껄끄럽고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로서의 부탁도 거절하긴 애매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친구라고 할 만한 인간은 닉쿤을 제외하곤 노먼뿐이었다. “그래. 주중에 보자.” 「그래. 잘 자.」 “응, 너도. 그리고 진짜 미안.” 「싱거운 놈.」 마지막으로 인사를 마친 노먼은 깔끔하게 먼저 통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본 우영은 멍하니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였다. 그리고 마음도 요란한 하루 였 다. “10년…….”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우영은 새벽 4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한 채 침대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닉쿤이 자신을 10년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아주 복잡하다. 어쩌면 닉쿤와 자신의 시작은 같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그렇다. 닉쿤이 10년 어쩌고 할 때는 자신과 함께 보낸 기억들을 통틀어 우정까지 사랑으로 치환하려 드는 태도에 열받아 그럼 그때 말하지 그랬냐고 다그쳤는데, 클랜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탓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클랜의 말이 사실이라면…… 닉쿤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 아니, 말 안 한 건 서로 마찬가지니 닉쿤만 탓할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어떻게 단념했는데, 자기가 어떤 마음으로 그 녀석을 포기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우영은 그대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궁금해서 못 참겠어…….” 닉쿤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다 진짜 아침까지 꼴딱 샐 것 같다는 생각에 우영은 망설임 없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불도 켜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긴 복도를 지나 빠 른 걸음으로 반대쪽 끝에 있는 닉쿤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막 방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이었다. “너, 이 자식 거기 안 서!” 비명 같은 대넌의 고함 소리에 우영은 화들짝 놀라 서둘러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그 소리에 쾅하고 문이 열리며 닉쿤 역시 서둘러 얇은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이야?” 닉쿤의 등장과 동시에 3층 난간에서 에이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간에 기대 선 우영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자 인형을 안고 나온 에이먼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무슨 일이야, 대넌 목소리 맞지?” 어지간해서는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는 대넌의 고함에 3층에 있던 클레어 역시 가운을 걸치며 서둘러 계단을 뛰어내려온다. “우영, 무슨 일이야?” 뛰어나온 건 거의 비슷한데 막간의 차이로 자신이 먼저 나왔다고 다들 자신에게 이유를 묻자 우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모른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2층을 돌아보자 클랜이 안 보였다. 1층은 전부 홀과 응접실, 그리고 의료실과 트레이닝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서재와 대넌과 사라의 방, 그리고 반대쪽에는 닉쿤의 방과 미궁이라 불리는 클랜의 방이 있다. 그리고 3층에는 클레어와 에이먼의 방이 있다. 열여섯 살이 되자마자 각자의 방을 워하는 위치로 옮겨 마음대로 꾸몄는데, 에이먼은 성격 그대로 고지식한 앤틱풍으로-성인이 된 후로는 아끼는 인형 몇 개가 추가되었지만 - 닉쿤의 방은 아주 심플하고 현대적인 느낌으로 꾸며놓았다. 클레어는 여자라 방에 들어가 본 적은 몇 번 없지만 깔끔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방이었다. 그리고 클랜의 방은 말 그대로 미궁이었다. 닉쿤이 몇 번이나 “저 쓰레기장을 빨리 파내야 하는데. 내 방까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아.”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로 클랜의 방은 고서적과 이상한 폐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영이 농담으로 저기를 발굴하면 황금광이 나올 것 같아, 라고 할 정도였다. 아마 황금은 안 나와도 경매가가 몇 만 달라에 달하는 고서적들은 나올 것이다. 하여간 이 시끄러운 소리에도 클랜이 2층 복도로 안 나온 걸로 봐서 저 정체불명의 ‘이 녀석’은 아무래도 클랜인 듯했다. “아…….” 우영이 뭔가 감이 잡힌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자 옆에 있던 닉쿤이 우영을 흘깃 본다. “뭐야? 너, 뭐 알아?” “……불독이 온 모양인데…….” “불독? 브루스?” 이 집안에서 브루스의 코드명은 불독이었다. 우영이 지어놓은 그 별명을 모든 형제들-특히 브루스를 싫어하는 닉쿤이-이 애용했다. “브루스가 왜?” “……클랜이 재키를 임신시켰거든.” 아무래도 허르베지쿨 저택이 새벽에 이렇게 떠들썩한 일로는 그 일밖에 없을 것 같아, 작게 중얼거리자 3층에서 내려온 클레어와 에이먼이 동시에 소리친다. “뭐야?” 귀가 찢어질 듯 울리는 그 합주 옆에서 닉쿤이 랩을 피처링한다. “그 봐. 뭘 몰라? 알고 있었으면서.” “……그 일일 줄 몰랐지.” 우영이 괜히 민망해져 작게 중얼거리자 옆으로 다가선 에이먼이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브루스가 온 거면 저 정도로 끝날 리가 없어. 벌써 총성이 울렸을걸.” 그도 그렇다. 아마 그가 사슴 사냥에 애용하는 장총을 들고 와 정원에서부터 활극을 펼쳤을 것이다. 그 사이 어디선가 뛰어나온 클랜과 대넌이 홀 한 가운데에 서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다행히 브루스는 보이지 않았다. 우영이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하는 사이 옆에 선 닉쿤이 냉정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브루스는 안 온 모양이네. 왔으면 한바탕 해주려고 했더니.” “……뭐라고?” “그렇게 자식 교육 자랑하더니 딸 교육 그 모양으로 시켰다고.” 브루스에게 쌓인 게 많은 닉쿤은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 비상사태에도 닉쿤은 불독을 열 받게 할 고민만 하고 있었다. 클랜 같은 자식도 질색이지만 이런 자식도 별로 달갑지는 않다. “활화산에 핵폭탄을 던져라.” 우영이 어이없다는 듯 닉쿤을 보며 답해주자 옆에 있던 에이먼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선다. “그래. 그러니까 다들 들어가서 자자.” “에이먼, 안 말려도 돼?”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나의 집 귀한 딸을 임신시켰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쩐지 웬일로 조용히 귀향했다 했더니.” 에이먼이 아주 냉정한 평을 내리며 혀를 차더니 그대로 다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디딘다. 그와 함께 아래층 홀을 빙빙 돌던 대넌이 위를 쳐다보곤 고함을 내지른다. “너희들, 다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대넌의 노성에 난간에 선 세 사람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넌에게 묻는다. “저흰 왜요?” “너희들도 다 똑같아! 우영, 너도 그대로 있어!” 갑자기 불똥이 자신한테 튀자 우영은 화들짝 놀라 옆에 있던 닉쿤의 팔을 잡았다. “전 왜요?” “너도 똑같아! 이 놈의 자식들! 너희 넷, 당장 이리 내려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대넌은 버럭버럭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우영은 나름 지은 죄가 있는지라 어깨를 늘어 뜨리며 닉쿤의 팔을 더 세게 잡았지만 닉쿤과 에이먼, 그리고 클레어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린 채 그들의 형제와 아버지를 내려다봤다. “우리를 클랜과 비교하다니……. 상당히 불쾌합니다.” 에이먼이 진짜 자존심 상한다는 듯 낮은 음성으로 내뱉자 대넌이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지른다. “당장 안 내려와!?” “네, 갑니다. 가요. 내려가자. 하여간, 클랜 저 녀석 한 번도 조용하게 넘어가질 않는다니까. 우리까지 이게 뭐야?” 에이먼이 큰형답게 앞장 서 걷자 그 뒤로 클레어와 닉쿤이 따른다. 우영도 얼결에 닉쿤의 팔을 잡은 채 계단을 내려가며 에이먼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내가 보기엔, 대넌도 참고 참다 터진 것 같은데…….” 우영의 중얼거림에 클레어가 기가 차다는 듯 돌아서 말한다. “뭘 참아? 우리 집 같은 자식들이 어디 있다고? 클랜 빼고.” “그건 아니지. 에이먼은 쪽팔리게 인형 수집에, 넌 결혼도 안 하고 버티고, 닉쿤은 게이라고 설치고. 대넌이 열 받을 만하지. 지금까지 참을 것도 대단해.” 우영의 말에 허르베지쿨 가 삼남매가 동시에 너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우영을 돌아본다. 그리고는 동시에 외친다. “그건 우리 프라이버시야.” 그래, 잊고 있었다. 이 집 남매들이 사이가 좋았던 이유를. 다들 빼어나게 잘나고 개성도 강하고 특이하지만 한 가지만은 네쌍둥이처럼 꼭 닮은 남매들이었다. 프라이버시 존중, 이라는 테마에서만 말이다. 그래, 그래서 사이가 좋을 수 있었던 거다. 가끔 이 남매들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매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절대로 터치하지 않았다. “……그래, 너희 남매 맞다.” “애초에, 이렇게 완벽한 아이들의 사소한 취향 정도는 참아줄 줄도 알아야지. 아버지는 너무 많은 걸 바란다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마약을 해, 알콜중독자이길해? 아니면 사고를 쳐서 신문지상을 시끄럽게 만들기를 해? 재산을 말아먹기를 해? 우리 같은 자식들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아주 당당하게 우린 잘났어, 라고 외치는 클레어를 보자 우영은 힘이 쭈욱 빠져버렸다. “그래……. 누가 뭐라겠냐.” 잘난 사람들은 한 가지 단점쯤 가져도 된다는, 진짜 잘난 사람들의 철학을 고수하는 클레어의 태도에 우영이 더는 할 말이 없어 옆에 있던 닉쿤에게 바싹 붙자 닉쿤이 이마를 툭 치며 우영을 밀어낸다. “붙지 마. 나, 화났어.” “어? 왜?” “……왜? 그걸 말이라고 해? 나 진짜 화났어.” 그 말에 우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닉쿤의 팔을 세게 잡아끌었다. “내가 화를 내야지, 네가 왜 내?”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생각에 우영이 닉쿤에게 항의하자, 닉쿤이 우영을 휙 돌아보더니 인상을 팍 찌푸린다. “너……. 좀 이따 얘기하자.” “나도 화났거든?” “나도 화났어!” 계단을 내려가던 두 사람이 서로 화났다며 목대에 피를 세우자 앞서 가던 에이먼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보며 소리친다. “시끄러워. 사랑싸움은 나중에 해.” 갑자기 튀어나온 ‘사랑싸움’이라는 말에 우영이 방금 전보다 더 핏대를 세웠다. “사랑싸움이라니? 그런 거 아냐!” “아니면 말고. 새벽에 이게 뭐야?” 신새벽에 깬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듯 부스스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선 에이먼이 먼저 홀을 돌아 응접실로 들어가자 대넌의 고함소리에 깬 메이드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이쪽을 구경한다. 그들의 눈빛에 닉쿤이 손을 들더니 이 저택에서 30년 가까이 일한 에나에게 말을 건다. “에나, 나 커피 좀. 약하게.” 닉쿤의 청에 앞서 가든 클레어도 한 마디 한다. “어, 나도 따뜻한 우유 한 잔 부탁해.” “나도, 우유.” 복도로 들어서던 에이먼 역시 한 마디 거들자 우영도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이며 에나에게 말을 건넸다. “저도 커피 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닉쿤의 손이 탁하며 우영의 뒤통수를 때렸다. “넌, 안돼. 잠도 못 잔 얼굴이잖아. 에나, 따뜻한 우유 네 잔하고, 커피 세 잔. 그리고 시럽도 부탁해.” “왜 우유야?” “눈 팅팅 부어서 다니려고? 우유나 마셔.” 진짜 화가 나긴 한 건지 무뚝뚝한 투로 그렇게 말한 닉쿤이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서자, 우영 역시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닉쿤을 따라 응접실 내부로 발을 디뎠다. 바로크 시대의 가구들을 경매에서 사들여 꾸며놓은 응접실은 진짜 베르사이유 궁전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고풍스럽고 호화로웠다. 들어올 때마다 “역시 돈이 좋아.”라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만큼 호화스러운 응접실에는 먼저 들어온 대넌이 이마를 짚은 채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사라가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그리고 사라의 옆으로 클레어가 앉아 있었고, 사라의 맞은편 자리에는 에이먼이, 그리고 그 옆에는 닉쿤이 있었다. 그리고 클랜은 대넌에게서 가장 멀찌감치 떨어진 반대편 자리에 가 앉아 있다. 우영은 잠시 어디에 앉아야 하나 망설이다 결국 닉쿤의 옆자리로 가 털썩 내려앉았다. 우영까지 자리를 잡고 앉자 비로소 대넌이 고개를 들고는 앞에 앉은 사람들을 주욱 돌아본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다 빼고 딱 본론만 말을 한 다. “클랜이, 재키를 임신시켰다.” 하지만 이미 우영을 통해 사정을 들은 에이먼, 닉쿤, 클레어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채 대넌을 바라보며 단순한 답을 내려주었다. “결혼해야겠네요.” “그게 문제가 아냐! 지금 파리에서 킴이 당장에 전화를 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던 말이다!” 다행히 아직 브루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파리에 여행을 간 딸이 돌아오지 않자, 궁금해 하던 킴이 직접 찾아갔다 소식을 듣고는 먼저 대넌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이번엔 재키와 킴이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임신은 한 거고, 했으면 결혼해야죠. 딱히 문제 될 거 없잖아요? 재키도 성인이고 클랜도 성인이니까요 .” 닉쿤이 별것도 아닌 일로 시끄럽게 군다는 듯 말을 하자, 대넌의 눈이 순간 번쩍한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냐! 남의 집 귀한 아가씨를 임신시켰다고! 그것도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아이다! 그리고 재키는 나한테도 딸 같은 애야!” “하여간, 근친상간은 아니잖아요.” 막 잔이 가득 찬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에나에게서 커피 잔을 받아든 닉쿤이 태연하게 중얼거리자 닉쿤보다 먼저 잔을 받아든 대넌이 그 잔을 닉쿤에게 집어던지려 잔을 치켜들었다. 화를 참지 못한 그 행동에 머리를 다 묶은 사라가 대넌을 만류한다. “여보, 손 내려요.” 대넌도 사라의 말에는 어쩔 수 없었던 듯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잔을 내려놓자 닉쿤이 아주 얄밉게 피식 웃는다. 옆에서 보던 우영도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얼굴이었다. “우영, 우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에나가 우영에게 따뜻한 우유 잔을 건네자 닉쿤이 먼저 받아 우영의 앞에 두곤 에나에게 시럽을 달라고 한다. 향이 강한 모카 시럽을 손에 든 닉쿤은 우영의 잔에 시럽을 듬뿍 넣어주었다. 단 거라면 질색을 하는 우영이 닉쿤을 보며 입을 부루퉁 내밀었다. “나 단 거 싫어.” “마셔. 좀 자야지.” “……너무 많이 넣었는데.” “그래도 마셔. 다크서클 생길라.”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손을 뻗어 우영의 앞 머리카락을 넘겨주자 겨우 겨우 화를 식히고 있던 대넌이 주먹을 꽉 쥐며 그의 둘째 아들을 향해 조용한 분노를 퍼부었다. “닉쿤…….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냐?” “설마요.” “에나, 그만 나가봐. 그리고 오늘 일은…….” 대넌이 뭐라고 말을 하려하자 에나가 부드러운 투로 그에게 말을 건다. “입단속 철저히 하겠습니다. 그럼, 필요한게 있으면 부르세요.” 인사를 마친 에나가 다시 트레이를 끌고 사라지자, 응접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대 넌은 몇 번인가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클랜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래서, 어쩔 셈이냐?” “결혼한다니까요. 일도 시작할 거고요. 그러니까, 에반 저 주세요.” “에반이 문제가 아니잖아! 브루스가 이 일을 알면 당장에 전투기를 몰고 우리 저택을 폭격할 거야! 아니 이미 오고 있을지도 몰라!” 대넌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에 닉쿤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간단히 그 고민을 정리해준다. “여기가 중동인 줄 아세요? 무슨 명예 살인도 아니고. 적당히 하세요, 아버지. 정 마음에 걸리시면 러시아에 연락해 스페츠나츠(Spetsnaz) 베타 부대를 부르시던가요. 정원에 텐트 치고 주둔시키면 되겠네요." 구 소련 KGB와의 합동작전으로 유명한 현 알파 부대의 전신인 스페츠나츠를 부르자는 닉쿤의 말에 우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그들에게 할 청구 금액을 계산해봤다. 스페츠나츠는 현재 알파 부대로 불리지만 알파 부대는 대외 적 인 활동을 하는 곳이고 그 뒤에 숨어 활동하는 베타 부대가 존재한다. 그 베타 부대의 잔악함은 감히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현재 가장 강력하다 칭할만한 이집트의 777부대가 단순히 인해전술로 죽고 터트리고 하는 막가파식 군대라면 스페츠나츠는 개인 한 명 한 명이 초일류급의 실력을 자랑하는, 인간 살상무기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존재에 대해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들의 활동 내역은 분명 존재한다. 구 소련 시절, 이란의 테러리스트들이 인질극을 벌이자, 스페츠나츠가 출동해 KGB의 정보력을 동원해 테러리스트들의 가족을 찾아 가족들의 사지를 잘라 인질범들에게 배달 보낸 뒤 인질을 풀어줄 때까지 하나씩 자르겠다 협박한 건 지금도 유명한 일화였다. 그러고 보면 그 인질범들 더럽게 재수도 없다. 역사상 테러범들이 전 세계인의 동정을 받은건 딱 그 사건뿐일 것이다. 그런 스페츠나츠가 저택 정원에 주둔한다면 아무리 불독이라도 어쩔 수 없을 거다. “한 달에 천만 달라 정도면 가능할 것 같은데?” 계산을 마친 우영이 슬쩍 닉쿤을 찌르며 그들의 용역비용을 알려주자 대넌이 다시 주먹을 꽉 쥔다. “지금 그거 계산할 때야?” 대넌이 다시 흥분할 기세가 보이자 우유 잔을 든 에이먼이 느긋한 투로 말한다. “이미 임신한 거 낙태를 할 수도 없고, 결국 결혼밖에 수가 없잖아요. 시키실 거면 여러 말 말고 그냥 시키세요 .” “시키는 건 시키는 거고, 브루스는 어쩔 거냔 말이냐?” 브루스 레너드라면 아마 길길이 날뛰며 불을 내뿜을 게 뻔한지라 그의 오랜 친구인 대넌도 미치겠는 모양이었다. 우영은 그런 대넌을 진심으로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친자식들은 냉정했다. 특히 닉쿤이 가장 냉정했다. “어쩌긴요. 날뛰다 말겠죠. 여차하면 집 앞에 「미친 불독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시든가.” “뭐라고?” “……브루스 출입 금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희들, 다 필요 없어! 다들 나가! 당장 나가! 사라, 당장 잭에게 연락해서 유언장 다시 쓴다고 해! 너희들 전부 내 유언장에 이름도 못 올릴 줄 알아!” 대넌은 진짜 화가 났는지 최후의 수단을 썼다. 그가 ‘유언장’을 갖고 난리를 치는 건 이게 처음인지라 우영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옆에 있던 닉쿤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그러시든가.” “뭐라고!” “아버지 재산이니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에이먼 역시 초연했다. 하긴 이미 신탁으로 받은 재산도 꽤 되고, 물려받을 건 대부분 물려받았다. 그래봐야 실제 대넌의 재산의 20% 가량만 증여받은 채였지만, 다들 능력이 있다보니 아버지의 재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클레어만 빼고 말이다. “전 왜요? 말도 안 돼요, 아버지! 허르베지쿨사는 제 거잖아요!” “누가 네 거래? 내가 그렇게 애원하는데도 결혼도 안 하는 자식들 따위 필요 없어!” “그건 말이 안 되죠! 결혼은 우리 프라이버시에요! 제가 왜 벌써 결혼을 해야 하냐고요? 위로 똥차가 세 대나 있는데!” 순식간에 ‘똥차’가 된 에이먼과 닉쿤이 순간 잡아 죽일 듯한 얼굴로 클레어를 노려보자 클레어 역시 화가 난 듯 금발을 뒤로 넘기며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말썽인 건 오빠들이지, 전 아니잖아요. 까놓고 말해서, 제가 아버지 속 썩여 드린 적 있어요? 왜 저만 먼저 결혼해야 하냐고요!” “내가 무슨 말썽을 부려?” 에이먼이 클레어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대꾸하자 클레어가 그의 약점을 사정없이 쥐어뜯기 시작했다. “막말로 오빠가 결혼 못하는 건 그 취미 탓이잖아! 난 그딴 수치스러운 취미 없다고!” “너, 남의 취향을 수치스럽다고? 너, 지금 내 자존심을 건드는 거냐?” “남한테 떳떳한 취향은 아니잖아? 그렇게 떳떳하면 저택으로 컬렉션 옮겨가고 결혼도 해! 왜 못해?” “그래. 내가 못할 것 같아? 좋아, 한다! 너 후회하지 마!” “해봐! 누가 눈 하나 깜짝 할 줄 알아? 하여간, 아버지 전 아니에요. 전 말썽부린 적 없어요. 전 진짜 억울하다고요! 에이먼은 변태취향이고 닉쿤은 게이지만 전 떳떳하다고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아요! 허르베지쿨 부동산은 제 거예요!” 강한 어조로 후계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는 클레어의 말에 지금까지 죄 짓고도 당당하게 앉아있던 클랜이 딱 잘라 말한다. “아냐, 내 거야.” “뭐?” “아버지, 허르베지쿨 제게 주세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뭐야?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거야? 닉쿤 오빠 떨쳐냈다고 좋아했더니, 클랜 오빠는 왜 굴러들어와? 지금까지 나 몰라라 놀다 이제 와서 허르베지쿨사를 달라고? 뭐 이런 파렴치한이 다 있어?”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클레어도 슬슬 자기 성질 기어 나오는 걸 제어 못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난장이 된 응 접실에서 우영은 느긋하게 달디 단 우유를 한 모금 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아예 닉쿤은 허르베지쿨가의 상속자 명단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우영이 남은 우유를 한 번에 마시려 쏟아 부으려는데 자식들의 상속 다툼에 보다 못한 대넌이 소리를 내지른다. “다들 그만두지 못해? 누가 너희들한테 물려준대?” “그럼 누굴 물려주시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디 아버지가 멀쩡히 눈 뜨고 살아있는데 재산 싸움을 해?” 날더러 죽으라고 관 짜놓고 비는 거냐고 대넌이 고함을 내지르자 닉쿤이 이 모든 상황의 출발점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유언장 얘기 먼저 꺼내신 건 아버지세요.” 진짜 나라도 한 대 패주고 싶다는 생각에 우영은 닉쿤의 옆구리를 쿡 찌르곤 작게 속삭였다. “너, 그러다 진짜 맞는다?” “괜찮아. 아버지는 자식들한테는 손 안대. 유언장에서 제외는 하시겠지만.” 태연자약한 그 답은 당연히 대넌의 귀에도 들어갔다. 막 잔을 들려던 대넌은 결국 들고 있던 잔을 차받침 위로 내동댕이쳤다. “닉쿤, 당장 나가! 네 놈이 제일 나빠!” “제가 왜요?” “너 때문이야, 이게 모두! 네 놈은 T&G사의 놀이공원 부지까지 빼앗아가고 나한테 사기를 치고! 네가 문제야, 항상!” 꽤 오래된 그 사건이 아주 한이 된 듯 대넌은 울화가 치민다는 듯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니까, 6년 전 쯤 T&G사가 거대한 강 근처에 대규모 놀이공원을 짓겠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물론, 주식시장에도 빠지지 않은 따끈 따끈한 소식을 먼저 접한 대넌은 그들이 확보하려는 부지를 대량 매입했고, 막 그쪽에서 부동산을 팔아 달라 요청하자 가격을 올리려 은근히 한 발 빼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때쯤 그 하류지역에 땅을 사둔 닉쿤은 마침 대넌이 산 땅 근처가 야생동물 보호구역과 인접하다는 점을 이용해 클랜과 짜고 환경운동가들과 야성동물 보호협회들을 우르르 불러들여 농성을 시작했고, T&G사는 마침 환경 운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터라 재빨리 대넌에게 한 제의를 취소하고 그대로 그보다 하류에 있는 닉쿤의 땅을 매입하겠다 연락을 해왔다. 딱히 손해를 본 건 없지만, 당신 투자금의 100배가량의 돈을 회수할 수 있었던 대넌은 그 사건으로 한 동안 닉쿤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리고 닉쿤과 손잡고 희희낙락하며 인터뷰를 나온 기자에게 “아버지는 경제적 이익보다 환경을 우선시하시는 분입니다. 야생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매입한 이 땅을 절대 T&G사에 팔지 않으실 겁 니다.”라는 말을 지껄인 클랜은 그대로 집에서 쫓겨났다. 진짜 무자식이 상팔자다. “아버지 말은 바로 하셔야죠. 제가 빼앗은 건 아니죠. 그들이 제 땅을 선택한 겁니다.” “네 녀석이 클랜과 짜고 사기를 친 거잖아!” “클랜은 자기의 신념을 그대로 실천한 것뿐입니다. 아버지도 늘 그러셨잖아요. 사업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건 이익에 눈이 멀지 않도록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의지라고요. 지금도 이렇게 부자인데 거기서 더 욕심내는 건 안 되죠.” “그러는 넌?” “유언장에 제 이름을 안 올리실 것 같으니 전 좀 벌어야죠.”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저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닉쿤의 친절한 답에 겨우 진정된 대넌이 다시 고함을 내쳤다. “당장 나가! 다들 나가! 내 저택에서 싸그리 사라져!” 저러다 대넌이 뇌졸중이라고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넌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연민도 열 받은 대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다들 귀가 막혔어? 다들 나가라니까!” 그답지 않은 화에 허르베지쿨 사 남매를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계속해서 침묵하던 사라가 입을 열었다. “아니, 앉아. 다들 모였으니 지금 말하죠. 저도 할 말이 있어요, 대넌.” 차분하고 조용한 그녀의 음성에 자리에서 일어섰던 이들이 다시 조용히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대넌이 골치 아프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사라에게 애원한다. “사라, 당신은 좀 나중에 해주면 안 될까?” “아뇨.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에 정리하죠.” ‘정리’라는 말에 다들 방금 전과는 달리 긴장하는 얼굴로 사라를 바라봤다. 사라는 늘 말이 없고 조용한 편이었다. 순종적이라기보다는 애초에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 탓에 그녀가 한 번 내뱉는 말은 대넌이 백 번 하는 잔소리보다 영향력이 컸다. 그래서 다들 바싹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자 대넌이 심호흡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며 묻는다. “도대체 뭔데?” “우리, 이혼해요.” 짤막한 그 말에 응접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 모두가 미동도 없이 움직임을 멈춘 채 몇 초, 드디어 닉쿤이 그 침묵을 깼다. “우영, 브렛 불러.” *** 새벽 5시에 허르베지쿨 저택으로 달려온 브렛은 고혈압으로 쓰러진 대넌을 1층 가장 안쪽에 있는 의료실로 옮겨 이것저것 상태를 확인한 뒤 방을 나와 잠옷 차림 채로 대기 중인 허르베지쿨 사람들을 돌아봤다. “너무 놀라 잠시 혼절한 거야. 혈압도 이젠 정상이고, 몸 상태도 괜찮아. 일주일 전에 정기검진을 받았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브렛의 진단에 전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걱정하던 일이 괜찮다 확인되자 첫째인 에이먼이 먼저 나서 브렛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 이른 시간에 왕진을 부탁드려서.” “하하, 대넌하고 나야 오래된 친구 아니냐.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야? 대넌이 기절을 다 하고.” 브렛의 순수한 질문에 에이먼이 이 자리에 없는 사라를 대신해 태연하게 답해준다. “사라가 이혼 선언을 했거든요.” “뭐?” “갑자기 그랬어요. 저희도 놀랐어요.” “……별일이네.” “그러니까요.” 남의 결혼이 파탄 지경이 이르렀는데도 느긋한 사람들을 돌아보며 우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집 가족들뿐 아니라 친구들도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우영, 아는 거 있지?” 대넌의 혈압을 단숨에 상승시킨 문제의 클랜이 슬쩍 우영에게 이유를 묻는다. 이 집 인간들은 진짜 비밀을 좋아하고, 그 비밀을 자신에게 터놓는 것도 무지 좋아하고, 또 남의 비밀을 묻는 것도 너무 좋아한다. “나도 몰라. 진짜 놀랐어.” “진짜 몰라?” 이번엔 클레어가 묻는다. “진짜 모른다니까. 나라고 이 집일이라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건 아냐.” “다 알고 있잖아.”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는 듯한 허르베지쿨가의 원수 같은 사 남매의 얼굴에 우영은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물어볼게. 물어볼 테니까, 대넌 옆에 있어줘.” 또 다시 총대를 짊어지고 돌아선 우영이 사라가 있는 응접실을 향해 걸어가자, 클랜이 말을 보탠다. “빨리 물어봐줘. 아버지가 혹시 바람이라도 피운 거면 우리가 가만 안 둘 테니 사실대로 전부 말해도 된다고 해.” “알았어.” “아, 사라가 바람 피운 거라도 우린 절대 이해한다고 해! 괜찮으니까, 그냥 왜인지만 말해달라고 해.” 꼭 자기 같은 말만 골라하는 클랜을 돌아본 우영은 인상을 확 쓰며 그에게 받아쳤다. “뒷말은 빼지 그랬냐.” “가능성의 여지를 두는 거지.” 더 말할 기운도 없어 우영은 터벅터벅 걸어 응접실로 가 노크를 했다. 두 번 정도 토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사라가 답한다. “들어와, 우영.” 자신의 이름까지 정확히 부른 사라의 음성에 우영은 사라가 이제 투시도 하나 하며 문을 밀어 열고 다시 조용해진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 위에 있던 잔들은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진 채였다. 그리고 사라는 우유가 가득 잠긴 잔을 들고 있었다. “네가 올 줄 알았어.” “그렇지? 앉아도 돼?” “응.” 사라의 부드러운 태도에 우영은 사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조심스레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화장을 하지 않아서인지 사라는 유독 창백해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식사를 거의 못하는 것 같았다. “사라, 왜 이혼하려는 거야?” “……글쎄.” “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도 되잖아.” 우영이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걸자, 사라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 그래도 되겠지. 나한테는 네가 아들이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나한테도 엄마는 사라뿐이야.” “……우영, 항상 난 진짜 네가 내 아들 같았어. 진심이야, 이건.” “알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 뒤를 봐줬지.” 그 말에 사라가 슬픈 얼굴로 미소 짓는다. 사라가 자신을 허르베지쿨 가로 데려와 몇 번이나 정식 입양을 하기 위해 애썼다는 건 우영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대넌이 반대해 결국 자신은 허르베지쿨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라가 늘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대넌은 우영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우영의 능력과 쾌활한 성품을 아주 좋아했고, 우영을 위해 무던히 애써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영에게 허르베지쿨이라는 성을 주는 건 꺼려했다. 다름 아닌, 우영이 동양인인 탓이었다. 대넌은 딱히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허르베지쿨 가문에 동양인의 피가 섞이는 것을 환영할 정도의 박애주의자도 아니었다. 우영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대넌의 결정에 화를 내거나 섭섭해 하지 않았다. “사라,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지?” “하하, 아냐. 설마.” “나랑 닉쿤 문제로 대넌하고 싸운 거 아냐?” “아냐, 그런 거. 그 문제는 깨끗해. 닉쿤이 해결해둔 모양이니까.” “닉쿤이?” “나는 잘 모르겠지만, 닉쿤이랑 약속한 게 있으니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네 탓이 아냐.” “하지만…….” “우영,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 이혼을 원하는 건 내가 원하기 때문이지, 너 때문이 아냐. 절대 너 때문에 생긴 일이 아냐.” 사라가 애달픈 얼굴로 웃으며 우영을 바라본다.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자신의 탓을 하는 우영이 그녀는 안쓰러웠다. 꼭 품에 끼고 보살펴주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우영을 안타까워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기에 우영도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자기 비하와 혐오는 어느 정도 벗어난 채였다. 물론, 가끔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튀어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 할 정도로, 비굴하지는 않다. “그럼 왜 갑자기 그러는데?” 우영의 진지한 질문에 사라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작게 답한다. “나, 임신했어.” 짤막한 그 답에 우영은 그제야 “아…….”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의 나이가 있어 걱정은 되지만 임신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우영이 차마 축하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사라와 대넌의 혼전 계약서에 대해 알고 있는 탓이었다. 사라와 재혼 전에 이미 네 명의 아이를 둔 대넌은 사라에게 아이는 낳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당신은 사랑하지만 허르베지쿨 가에 핏줄에 동양인 피가 섞이는 건 싫다고도 말했다. 사라는 진심으로 대넌을 사랑했기에 그 조건을 수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그녀를 닮은, 그녀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혼하자고 한 거야? 대넌은 알아?” “몰라. 구질구질하게 말할 필요 없으니까. 이혼하고 아이는 내가 낳아 키울 거야. 위자료는 혼전 계약서대로 오천만 달라에서 정리할 거고.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 중이야.” “사라……. 그냥 그 전에 대넌한테 말하지 그래?” “싫어.” “그건 벌써 17년 전 일이잖아. 대넌도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을 거야.” “얼마 전에도 지금이라도 널 양자로 들이면 어떨까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 그 사람은 여전해. 쓸데없는 데에 희망은 걸고 싶지 않아. 그리고, 만약 유산하라는 말을 들으면 진짜 비참해질 것 같아.” 그 말에 우영은 더 이상 그녀에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라의 기분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의 말을 듣는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자신이 차마 닉쿤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던 것처럼, 그러다 포기한 것처럼, 사라도 그냥 조용히 침묵한 채 포기하려 하는 거다. 상대방의 입에서 나올 한 마디가 무서워서, 그리고 거절당한 순간이 너무 비참하고 아플 것 같아서, 무조건 도망치려는 거다. 말 한 마디 꺼낼 용기도 낼 수 없는 그 기분을 잘 알기에 우영은 손을 뻗어 사라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속삭인다. “방에서 쉬어. 좀 자야지. 임산부잖아.” “그래. 그래야겠다.” “애 꼭 낳아야 돼, 사라. 꼭 낳아. 아주 예쁘고 착한 아이가 태어날 거야.” “그래.”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진짜 형 노릇해줄게. 이젠 내가 당신과 아이를 보호해줄게.” 우영의 진심어린 말에 사라가 겨우 해맑게 웃는다. “고마워. 너라도 있어줘서. 네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하고 기쁜지 몰라.” “나도 늘 그랬어.” 그렇게 말하며 우영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라가 그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이제는 자신보다도 훌쩍 커버린 우영을 바라보며 사라는 우영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부축하며 우영은 천천히 응접 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대넌 자서전에 오늘이 인생 최악의 날로 기록될 듯싶다. *** “무슨 일이야?” “사라가 뭐래?” 사라를 방에 데려다주고 나오자마자 벌 떼처럼 달려드는 허르베지쿨 형제를 본 우영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입술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다들 입을 꾹 다문다. “3층으로 가자.” 대넌의 옆에 클레어를 남겨두고 우르르 몰려든 형제들을 이끈 우영은 먼저 계단으로 올라서며 그들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일단 사정을 아는 건 우영뿐인 터라 다들 조용히 우영의 뒤를 졸졸졸 따라 3층에 있는 에이먼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해안 쪽으로 난 테라스로 나간 세 사람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사이 에이먼은 방안에 있는 바에서 생수병을 꺼내들고 다가왔다. “그래서 뭐야? 누가 바람 피운 거야?” 이미 이혼의 이유를 바람이라고 결정내린 클랜이 조급한 듯 묻자 에이먼이 클랜을 한번 노려본다. 저걸 어디다 써먹냐, 하는 감정이 그대로 담긴 에이먼의 시선에도 클랜은 꿈쩍하지 않았다. “뭐야, 우영? 빨리 말해.” “……임신했대.” “응?” “사라가 임신했대. 3개월 정도 됐나 봐.” 우영의 딸 잘라지는 설명에 클랜이 심각한 얼굴로 되묻는다. “누구 애야?” “……너 그냥 여기서 떨어질래? 내가 밀어줄까? 불독에게 물려 죽느니 내가 깨끗하게 죽여주마.” 원한다면 기꺼이 집어던져줄 수도 있다는 우영의 호의에 클랜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버지 아이면 왜 이혼을 해? 축하할 일이지.” “그게,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그러니까…….” 그렇게 우영은 대넌과 사라 사이에 오간 혼전 계약서부터 자신의 입양거부 사건까지, 천천히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건 아니라고 봐.” 우영의 설명이 끝난 뒤, 닉쿤이 딱 잘라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에이먼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아니라고 봐.” “그건 내가 봐도 아냐.” 에이먼의 뒤를 이은 클랜까지, 세 형제의 부정에 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버지는 사라의 아이라면 좋아하실거야. 특히나, 지금 같은 때라면 유언장에서 우리 이름 싹 지우고 그 애 이름 하나 적어 넣으실걸.” 가장 현실적이고 가능성 있는 닉쿤의 말에 우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먼저 증여한 재산 뺏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닉쿤도 그 말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그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대넌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안 돼.” “왜? 낳지 말라고 할까 봐?” “아니, 지금 아버지 상태라면 열이라도 낳아달라고 할걸.” “그럼 왜?” “이렇게 큰 건을 그냥 놓칠 수는 없지.” “응?” “아버지의 약점을 잡았는데 그냥 놓칠 수는 없잖아. 사라가 좀 더 버텨주면 좋겠는데…….” “어이, 너 뭐야? 이걸 이용하겠다는 거야?” 우영이 경악한 얼굴로 닉쿤에게 묻자 옆에 있던 클랜 역시 닉쿤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중얼거린다. “닉쿤 말이 맞아. 아버지한테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어.”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나 싶어, 우영이 그나마 상식적인 에이먼을 바라보며 구원요청을 하자 에이먼은 고개를 내젓는다. “……그건 부모님 일이야. 아무리 자식들이라고 해도 그런 프라이버시에 간섭하는 건 안 되지.” “옆집 아저씨랑 아줌마가 아니라, 너희 부모님이 이혼하신다는 거야! 그런데 남의 프라이버시라고?” 너무나 태연한 세 형제의 반응에 우영이 열변을 토하자 닉쿤이 별걸 다 갖고 시끄럽게 군다는 듯 말을 돌린다. “어차피 이혼 안 하실걸, 뭐. 아버지가 그렇게 쉽사리 이혼에 합의해줄 사람도 아니고. 아마, 뉴욕에 있는 로펌 전체를 사서라도 이혼 못하게 할걸.” “그래도 미리 막아야지. 쉽게 갈 수 있는데 왜 그걸 꽈?” “우영,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너 진짜…….” “사라한테는 걱정 푹 놓고 있으라고 해. 내가 장담하건대 아버지는 사라가 임신했다면 당장에 성이라고 하나 지어주실 분이야. 성이 뭐야? 나라도 하나 사주실 걸.” “하지만…….” “아냐, 그 영감도 늙었어.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야. 걱정할 것 없어. 허르베지쿨의 실세는 이제 우리야.” 자신의 아버지를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칭하는 닉쿤의 지독함에 우영은 넌덜머리가 나는 기분이었다. 닉쿤이 간혹 대넌에게 이제 늙었으니 은퇴하라고 할 때마다 나름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닉쿤은 진짜 대넌의 정년이 다 했다고 결정내린 채였다. “진짜 너희 같은 자식 낳을까 봐 결혼하기 싫어진다.” “어차피 넌 못해.” “내가 왜 못해?” “휴전. 너랑 내 일은 조금 뒤에 얘기하자. 사라랑 아버지 일 정리될 때까지만 휴전.” “우리가 언제 전쟁했어?” “사랑은 원래 전쟁이야.” “뭐……?” 우영이 헛소리 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닉쿤이 강제로 우영의 입을 틀어막고는 이 모든 비극의 원점이었던 클랜의 결혼 문제를 재확인한다. “그나저나 넌 어쩔 셈이야? 슬슬 브루스도 알게 될 것 같은데.” “몇 대 맞아야지, 뭐.” 클랜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미 각오했다는 듯 말하자 옆에 있던 에이먼이 고개를 내젓는다. “몇 대 맞는 걸로 끝날까? 내가 보기엔 당장 탱크 몰고 널 깔아뭉갤 것 같은데. 알잖아? 돈 많고 권력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속이 더러운지. 재키 임신 사실을 알면 마피아에 몰래 의뢰해 네 목을 따버리라고 할 수도 있어. ”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급한 대로 네비이씰이라고 부를까?” 점점 허황된 얘기로 빠지는 대화에 우영은 그냥 차라리 SAS를 불러라, 라고 하며 이마를 짚고 돌아서 앉았다. 하지만 이 형제들은 진지했다. “네이비씰은 안 돼. 돈으로 미국 군대를 불렀다간 우리가 언론으로부터 공격받아.” “그럼?” “차라리 777 부대를 불러. 접근 즉시 다 부숴버리게. 프랑스 외인부대도 있고. 앞 정원과 뒤의 해안가 양쪽으로 주둔시키면 될 것 같은데?” 놔두니 진짜 안드로메다로 가는 세 형제의 대화에 우영이 참지 못하고 다시 끼어들고 말았다. “야, 제발 현실 가능성 있는 말을 해라.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오늘 당장 달려와 주겠냐? 자기들 얼굴에 먹칠하는 건데?” “돈이면 다 할 걸?” “진짜 부르려고?” “못 부를 것도 없지. 연예인들도 하는 짓을 우리가 왜 못해?” 얼마 전 출산 후 아이가 유괴당할까 저택 정원에 군대를 주둔시킨 연예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 드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기가 차다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게 부러웠냐?” “못할 건 없다는 거지.” 어깨를 으쓱하는 닉쿤의 반응에 우영이 시선을 돌리자 의자에 기대앉은 에이먼이 클랜에게 아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그보다, 여차하면 닉쿤이랑 같이 만나. 닉쿤이 네 장인어른 뇌혈관 터트려서 병원으로 실려 보내줄 테니.” “……형, 내 결혼을 아예 말아먹고 싶은 거야?” “그게 네가 제일 덜 맞는 일이야.” 에이먼의 차가운 답에 클랜이 한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쳐다본다. 하지만 닉쿤은 클랜의 고뇌 따윈 상관없다는 듯 어느새 의자에 기대 잠든 우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눈길로 우영을 바라보며 에이 먼 에게 묻는다. “형, 잠 다 잤지?” “응? 아, 뭐. 잠은 다 깼어.” “그럼, 방 좀 비워줄래? 우영이 좀 자야겠는데?” 그 말에 잠든 우영을 돌아본 에이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의 동생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바를 물었다. “그나저나, 너도 문제는 문제다. 진짜야, 그 기사?” “아마.” “이건 또 무슨 수작인데?” “수작 아냐.” “그럼?” “나도 종착역에 닿았거든.” “……뭐,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그렇게 말하며 에이먼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나이트가운의 허리띠를 풀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 그를 따라 클랜 역시 “새벽부터 뭔 일이래, 이게.”라고 중얼거리며 테라스를 나섰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의자에 기대 세상모르고 자는 우영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닉쿤은 고개를 내려 우영의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이번에는 이마에 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를 드러내 살짝 살결을 물어뜯으며 세게 빨아들인다. 낯선 감촉에 우영이 귀찮다는 듯 밀어내자 입술을 뗀 닉쿤은 우영의 목덜미에 남은 흔적에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마킹은 시간이 날 때마다, 라는 게 닉쿤의 모토였다. *** “이게 뭐야?” 에이먼의 방에서 한참을 자다 겨우 눈을 뜬 우영은 샤워 중 목덜미에 남은 키스마크에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어제는 그래도 몸 안쪽에 남겨 괜찮았지만, 오늘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목덜미였다. 셔츠로도 가리기 힘든 그 위치에 우영은 “죽여버리겠어!”라고 소리치며 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샤워룸을 나와 일단 대강 옷을 갖춰 입은 뒤 당장에 닉쿤의 방으로 뛰어간 우영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 2층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우영이 달려들자 드레스룸과 이어진 거울 앞에 선 채 은색의 정장을 다 갖춰 입고 커프스를 하던 닉쿤이 싱긋 웃으며 우영을 반긴다. “너무 애절하게 부르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웃기네! 너, 이거 뭐야? 네가 이랬지?” 우영이 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가리키며 묻자 닉쿤이 아주 태연하게 답한다. “응.” “죽고 싶냐? 이 여름에 나더러 어쩌라고 이런 걸 남겨?” “마킹.” 그렇게 말하며 닉쿤은 거울 옆에 놓인 콘솔에서 향수병을 들어 우영에게 뿌린다. 치익- 하며 익숙한 Bliss Bless Kiss의 진한 향이 확 돌자 우영은 진저리를 쳤다. “이건 또 뭐야?” “마킹이라니까.” “네 향수를 왜 나한테 뿌려?” 오로지 닉쿤을 위해 만든, 닉쿤만이 쓸 수 있는 시원하면서도 향기로운 이 지상 위에 단 하나뿐인 향수 냄새에 우영이 손을 휙휙 내젓자 닉쿤이 눈꼬리를 휘며 눈웃음을 친다. “내 냄새니까 너한테 배야지. Bliss Bless Kiss.” 우영도 이미 잘 알고 있는 향수 이름을 번복한 닉쿤은 한 걸음 내딛어 우영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그 행동에 우영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치며 방어 자세를 취한다. “나, 너한테 화났어!” “나도 화났어. 하지만 지금은 정신없으니 일단 휴전. 마침 잘 일어났어. 그렇지 않아도 깨우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어서 준비해.” “왜?” “나랑 갈 데가 있어.” “어딜 가는데?” “불독 병원에 실려 보내러.” “너, 클랜 혼사에 아주 제대로 깽판을 치려고 그러냐?” “아니, 도와주려는 거야. 형으로서 먼저 나서서 브루스를 병원에 보내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어줘야지.” “넌, 이게 재미있냐?” “뭐, 재미없을 것도 없지.” 그 답에 우영은 확신했다. 닉쿤은 단지, 이 김에 브루스를 아주 제대로 보내고 싶어 하는 것뿐이다, 라고. 사실 브루스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아니 사실은 아주 싫어하지만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클랜은 동의했어?” “응.” “너희 형제는 진짜 이상해…….” “뭘 새삼.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어서 준비해.” “나도 꼭 가야 돼?” “응.”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닉쿤이 진짜 사고치기 전에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우영은 돌아서 다시 닉쿤의 방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우영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껌뻑거렸다.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던 건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중에 생각나겠지, 뭐.”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생겨 기억이 아슬아슬한 채였다. 일단 외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우영은 바지 주머니에서 울려대는 메시지 음에 흠칫 놀라 멈춰 섰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 보자, 역시나 엘레나였다. 순간 우영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너, 적당히 해. 대넌에 이어서 브루스까지 기절하게 하지 말고.” 허르베지쿨 저택이 있는 뉴햄튼을 벗어나는 차 안에서 우영이 미리 닉쿤에게 주의를 주자 운전대를 잡은 닉쿤이 뭘 그따위 일을 걱정하냐는 듯 받아친다. “걱정 마. 클랜과 재키 결혼문제만 깔끔하게 매듭지을 테니까.” “어떻게?” “어떻게는? 그냥 밀어붙이는 거지.” 닉쿤과 브루스라……. 사실 아주 걱정된다. 따라가면서도 사실 그냥 중간에 새버릴까 할 정도로 아주 걱정된다. “닉쿤, 레스토랑 어디로 예약했어?” “왜?” “인도 음식점으로 예약하지. 브루스가 스테이크 썰다가 칼 집어던질라.” “그러고 보니 그렇군. 인도음식점이면 기껏해야 그릇이나 내던질 텐데.”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장소 옮기면 안 될까?” “안 돼. 시간이 빡빡해.” “……분위기 이상해지면 나 먼저 뜬다?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걱정 마. 혈압 오르게 해서 정신없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사교계에서 ‘브루스 잡는 닉쿤’라는 말이 돌 정도로 브루스 약 올리는 데에는 통달한 닉쿤이 직접 하는 말이니 우영은 어쩔 수 없다는 팔짱을 끼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소리친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걱정 마. 만나서 간단히 식사하면서 얘기 끝낼 거니까. 그리고 나서 데이트 하자.” “휴전이라며?” “브루스 만나고 정리되면 전쟁 재개해야지.” “사라는?” “그쪽은 좀 시간을 두고 볼 거야. 사라한테 안심하라고 해. 아버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대체 뭘 할 건데?” “두고 보면 알아.” “그래, 너희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은 없기에 맥없이 대답한 우영은 삐빅거리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엘레나 덕에 이젠 핸드폰 소리만 들어도 기가 질린다. “타조야?” 닉쿤이 슬쩍 눈으로 돌아보며 묻자 우영은 진짜 무서운 듯 부들거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배심원들 앞에서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이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의 액정을 본 우영은 액정 위에 뜬 이름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 공포영화 one missed call을 봤을 때보다 더 핸드폰이 무서운 요즘이었다. “에반. 왜?” 「어디야?」 “허르베지쿨 저택에서 맨하탄으로 빠지는 중인데, 왜?” 「닉쿤은?」 “같이 있어.” 「좀 바꿔줘.」 그 말에 흘깃 닉쿤을 돌아본 우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운전 중이라 그런데, 왜?” 「그럼 이따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무슨 일 있어? 나한테 말해. 전해줄게.” 「그래, 그게 낫겠다. J&K 사에서 갑자기 GATH사 인수를 철회하겠다고 나섰어. 아직 발표는 안했는데 무슨 일인가 모르겠다.」 그 말에 우영이 눈을 껌뻑거리며 닉쿤 대신 답해주었다. “그래도 우리한테는 별 타격 없잖아. 어차피 M&A가능성만 타진하는 게 일인데.” 「우리가 GATH사 주식을 상당수 사 모았거든. 이 인수 문제가 백지화되면 이쪽 손해가 커.」 “그럼 큰일이네. 알았어. 내가 전해줄게.” 「그리고 닉쿤에게 이것도 전해. 난 어제부터 오늘까지 두 시간 잤다고. 돌아오면 당분간 휴일도 없을 줄 알라고해. 아무리 그 녀석이 오너라고 해도 너무 심하잖아?」 피로와 원한이 덕지덕지 묻은 에반의 음성에 우영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널리스트들의 하루는 빡빡하고 고단하다. 닉쿤만 해도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20시간을 일했다. 올해 들어서야 간신히 16-18시간 사이로 근무시간을 줄일 정도로 시간이 금인 직업이었다. 그 와중에도 할 짓은 다한 닉쿤의 체력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알았어. 내가 잡아서 끌고 갈게. 수고해.” 「응.」 짤막한 통화를 끝낸 우영은 에반에게 들은 바를 닉쿤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J&K사에서 갑자기 GATH사 합병을 백지화하겠다고 했다는데? 아직 정식으로 발표한 건 아닌데, 그럴 기미가 보이나 봐.” “……뭐?” “에반이 그렇게 전해달래.” “갑자기 왜?” “난 모르지. 그리고 너 이틀 뺀 덕에 당분간 휴일 없을 거라고도 전해달래. 에반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두 시간 잤대. 너 만나면 잡아먹을 기세다.” 그 말에 닉쿤이 “깐깐하긴.”이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찬다. “어제 저녁에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빨리 준비해달라고 하던데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된 거지?” “글쎄. 하여간 잘 됐다. 넌 좀 바빠야 돼. 바빠야 다른데 신경 안 쓰지.” 슬쩍 이 김에 나 좀 포기해라라고 말하는 우영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닉쿤은 그대로 우영에게 반박했다. “그래도 연애할 시간은 있어.” “그래, 있겠지. 너야 괴물이니.” 그 사이 다시 우영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짧은 메시지음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어깨를 굳히고 다시 핸드폰을 확인한 우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닉쿤, 내 일생일대의 소원인데…… 그냥 얘 만나라. 만나서 4년 동안 기다린다고 해. 얘가 아무래도 내 피를 말려 죽일 모양이다.” “네가 감당해. 나 같이 근사한 남자를 얻는데 그 정도야 별것도 아니지.” “누가 너 갖고 싶대?” “사실은 열렬히 날 원하잖아?” “누가 그래?” “내가. 넌 날 사랑해.” “꿈보다 해몽이 좋다.” 혀를 차며 폴더를 연 우영은 순간 화면에 뜨는 정체불명의 문자에 헉- 하는 신음을 토해냈다. 「Were art you?」 “닉쿤. 이건 대체 무슨 소리냐? 아트가 너였니?”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의 조합에 우영이 닉쿤에게 문자를 보여주자 닉쿤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타조 대단한데?” “웃을 일이 아냐.” “나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단하네, 그 아가씨.” “돌겠다, 진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우영이 답 문자를 보내자 한참 뒤에 엘레나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의미 불명이었다. 「I`m going dare.」 “제발……. 나 좀 살려라.” 이번 말은 그래도 어떻게 해석이 될 것 같아 ‘절대 오지 마.’라고 문자를 보내자 곧 다시 답 문자가 온다. 「you wona peace of me?」 무슨 말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우영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사전 옆에 두고 쓰라고 했더니 화가 나서 ‘ 나한테 시비 거는 거예요?’라고 하는 말 같은데…… wona도 문제지만 peace는 대체……. “그래, 나한테는 지금 평화가 필요해……. 나 휴가 좀 줘, 닉쿤. 너희 가족이랑 타조 때문에 말라죽겠다.” 우영이 고개를 뒤러 젖히고 눈을 가리며 진심으로 애원하자 닉쿤이 웃으며 되묻는다. “또 뭐라고 보냈는데?” “네 눈으로 봐.”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썩어 들어갈 것 같아, 닉쿤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자 그걸 받아 액정을 본 닉쿤이 죽을 듯 숨을 헉헉거린다. “우영, 나한테 얘 문자 보여주지 마. 이러다 사고 내겠다.” “진짜 나 좀 휴가 보내줘! 아무도 없는데 가서 나 혼자 쉬고 싶다. 노먼도 타조도 너도 없는 데로!” “두바이 섬 살까? 가서 혼자 지낼래?” “너나 가. 아니, 너랑 노먼이랑 타조랑 거기 가서 나오지 마!” “내가 미쳤어? 그것들이랑 같이 섬에 들어가게?” “그럼 나는 미쳤냐? 이것들이랑 같이 뉴욕에서 살게?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이야…….” “참아. 이게 다 나를 얻기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해.” “너 필요 없으니 그냥 시련도 같이 가져가. 나 이러다 진짜 내 명에 못 죽는다.” “참아.” “못 참아!” “스트레스 받지 마. 그냥 너도 엘레나처럼 머리를 비워.” “그게 쉬운 줄 아냐?” 그것도 타고나는 거다. 아무나 엘레나처럼 깨끗한 뇌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무 피곤해.” “좀 쉬어. 도착하면 깨워줄게.” “너무 피곤하니 잠도 안 온다.” 어느새 닉쿤과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진 후였다. 하도 여기저기서 죽자고 달려드니 닉쿤의 10년이고 나발이고 이젠 다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냥 아무도 없는 곳에서, 딱 일주일만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다. 그동안 너무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자신에게는 절대 휴식이 필요하다. “진짜 나한테는 평화가 필요해.” 며칠 새 눈에 띄게 야윈 우영의 옆얼굴을 흘깃 본 닉쿤은 우영에게 지금 필요한 건 휴가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이러다 연애 시작도 전에 우영이 쓰러져버릴까 걱정이 될 정도로 우영은 지친 상태였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였다. 사무실에 나가는 대로 우영에게 일주일 정도 휴가를 줘야겠다 생각하며 닉쿤은 액셀을 세게 밟았다. 물론, 그 휴가는 자신의 집에서 보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 브루스와 약속한 레스토랑 앞에 도착한 닉쿤은 차키를 맡긴 뒤 안으로 들어서다 갑자기 온 전화를 받고는 우영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먼저 들어가라는 듯한 그 동작이 아무래도 일 관계인 듯해 우영은 “휴게실에서 기다 릴게.”라고 하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브루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불독과 잠시라도 단 둘이 마주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동양인들을 아주 좋아했지만-그와 함께 일했던 한국인들이 대부분이 빠릿하고 영리하고 성실한 덕에.- 닉쿤 때문인지 그는 자신만은 싫어했다. 닉쿤의 이름을 대고는 우선 휴게실로 안내해 달라고 요청한 우영은 레스토랑 한쪽에 외부로 난 작은 수목원 같은 휴게실로 들어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길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뒤 비장한 얼굴로 폴더를 열었다. 순간 우영은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아직 엘레나의 문자는 없었다. 그래, 걔도 밥은 먹겠지. 뻣뻣한 목을 한 손으로 주무르며 핸드폰을 진동 모드로 전환하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 사이를 스쳐 불어온 바람이 목을 스치자 순간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익숙한 닉쿤의 향이었다. 닉쿤이 왔나 고개를 돌리던 우영은 그 향이 자신에게서 난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오싹한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자신의 몸에서 타인의 향이 난다는 건 진짜 묘한 기분이었다. 보통 향수라면 흔한 냄새니 상관없지만, 닉쿤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된 Bliss Bless Kiss의 향이 자신의 피부에서 퍼진다는 사실에 우영은 문득 손을 뻗어 닉쿤이 흔적을 남긴 목을 손으로 가렸다. “아…… 맞다……. 내가 이거 따지려고…….” 그제야 닉쿤에게 쳐들어갔던 이유가 떠올라 주먹을 꽉 쥐는데 바로 뒤에서 나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영 케이먼?” 낯설지만 낮고 허스키한, 섹시한 그 음성에 본능적으로 우영은 뒤를 돌아봤다. “네, 우영 케이먼…….” 입니다, 라고 말하려던 우영은 순간 눈앞에 선 장신의 남자를 보곤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햇살이 남자의 은발 위에서 찬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은발에 얼어붙은 듯 차가운 파란 눈동자. 진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그 눈빛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엄청난 포스를 발하는 남자였다. 미파아다, 진짜 마피아였다. 러시아의 대제라 불리는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지금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냄새군. 우영 케이먼 맞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안녕하십니까!” “엘리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어. 생각보다 어린 것 같은데…….” 남자의 말투는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러시아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 실력에 유난히 발음이 부드러워 듣는 순간 녹아들어갈 것 같은 어조였다. 하지만 우영은 녹아들기보다 부서져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무서운 남자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고 투명해 보이는 남자였다.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서른……입니다.” 석상처럼 하얗게 굳은 채 우영이 겨우 그렇게 답을 하자, 앞에 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확실히 동양인이라 그런지 동안이군. 그렇지 않아도 인사를 한번 할 생각이었는데 잘 됐어. 엘리가 어제부터 폭식을 시작했어.” “……네?” “마치 음식이랑 원수진 것처럼 먹어대더군. 돼지처럼 꾸역꾸역. 스테이크 삼인분이랑 아이스크림 2겔론을 먹어 치웠어. 자네가 잘 먹으라고 했다지?” 순간 세르게이의 눈이 번뜩였다. 당장에 레이저 빔을 쏠 것 같은 그 눈빛에 우영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뭐 사과할 것까진 없어. 거기다 답지 않게 밤새 사전까지 들춰보고 말야. 러시아 수도가 어디냐고 묻더군. 자네가 비웃었다지?” 사람이 말 한 마디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우영은 처절하게 깨닫고 말았다. 과연 러시아의 대제라 불리는 남자는 그 포스부터가 달랐다. 대제다. 황제도 아니라, 대제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힌 듯 얼어붙은 채 세르게이의 눈을 바라보던 우영은 뻣뻣하게 굳어 선 채 천천히 그에게 진심어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진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세요…….” 이렇게 죽기엔 너무 불쌍한 인생입니다, 라고 말하려던 순간, 세르게이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친구군. 내 명함이…… 아, 지금은 없네. 핸드폰 주겠어?” 부드러운 동작으로 손을 뻗는 세르게이의 움직임에 우영은 재빨리 두 손으로, 아주 공손하게, 핸드폰을 세르게이에게 넙죽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우영의 핸드폰을 받아든 세르게이는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버튼을 누른 뒤 다시 폴더를 덮어 우영에게 건네주었다. “내 개인 직통 번호야. 시간나면 연락하도록.” 우영은 꿈을 꿀꺽 삼켰다. 연락 안 하면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진짜 기관총 들고 와, 아니 그냥 갑자기 나타나 눈으로 광선을 쏴 죽일 것 같은 남자였다. “……시간 없어도 연락하겠습니다.” 하얗게 질린 채 답하는 우영을 바라본 세르게이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유쾌한 미소였지만 우영은 세르게이가 자신을 노려본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보며 웃는 세르게이의 얼굴 위로 꼭 사자가 먹잇감을 앞에 두고 포식할 꿈을 꾸며 웃는 표정이 겹치는 듯해 오한이 끼쳐왔다. 허르베지쿨 가 사람들의 포스도 대단하지만, 이 사람은 다른 느낌의 포스가 있었다.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꿈에도 다시 만나기 싫은 남자였다. “그럼, 연락 기다리지.” 그렇게 말하며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돌아서는 순간 휴게실 문 쪽으로 닉쿤이 들어섰다. “우영……? 아, 세르게이?” 자연스럽게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이름을 부르는 닉쿤을 보면 우영은 순간 닉쿤의 옆으로 다다다 뛰어가 그 뒤에 숨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닉쿤이 놀란 얼굴로 우영을 쳐다본다. 왜 그러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우영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앞에 선 세르게이가 닉쿤에게 악수를 권한다. “닉쿤. 오랜만이군.” 눈에서 광선이 나올 듯한 무시무시한 마수의 손을 닉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마주잡았다. “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당신이 여기는 무슨 일이죠?”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뵈었으면 했는데…… 여기서는 좀 그렇고. 나중에 연락드리죠.” 아주 자연스럽게, 평소 그의 고객들을 대하듯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태도로 세르게이를 대하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닉쿤을 만난 뒤 처음으로 “너, 진짜 멋지다!”라고 속으로 외쳤다. 태어나 처음으로 닉쿤이 근사해보였다. 아니, 근사하긴 늘 근사했지만, 평소보다 대단히 근사해 보였다. 저 무서운 남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다니……. 진짜 닉쿤은 대단했다. “그래, 조만간 얼굴 봐야겠지. 이왕이면 네 비서에게 연락하라고 해. 네 냄새가 흠뻑 뱄는걸. 아주 마음에 들어 .” 노골적인 그 말에 우영은 닉쿤의 뒤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도 닉쿤 냄새 어쩌라고 중얼거렸었다. 닉쿤의 향수 냄새가 더 묻을까 우영은 한 걸음 더 닉쿤에게서 떨어졌다. 그런 우영을 슬쩍 못마땅한 듯 돌아보던 닉쿤이 앞에 선 세르게이에게 웃으며 받아친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마킹해둔 겁니다. 넘보지 마세요.” 그 말에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였다. 뭔지는 몰라도 저 무서운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싫었다. 노먼에 닉쿤에 타조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더 이상의 관심은 필요없다. 사실 지금도 다 집어던지고 혼자 한국으로 떠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저 남자까지 문자 보내면 돌아버릴거다. “글쎄…….” 의미심장한 세르게이의 답에 닉쿤이 표정을 굳힌다. “세르게이, 뉴욕에서 저와 적이 되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물론, 그건 나도 사양이야. 하지만 재미있다면 또 모르지. 우영이라고 했지?” 닉쿤과 대화를 하던 세르게이가 다시 자신을 돌아보자 우영은 순간 어깨를 잔뜩 굳히고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예!” “그렇게 긴장할 건 없어. 연락 기다리지.” “예, 꼭 연락하겠습니다. 휴가 내서라도 연락하겠습니다.” 그 말에 세르게이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 웃음소리가 하도 묘해 우영이 다시 닉쿤의 옆에 붙어 팔을 잡아끌자 닉쿤이 쓰게 웃는다. “그만 놀리세요. 우영은 소심해서 겁이 많습니다.” “그래?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 “겉보기엔 안 그래도 아주 겁이 많아요.” “잘 보호해줘야겠군. 그럼, 이만.” “다음에 뵙죠.” 닉쿤의 가벼운 인사에 우영 역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마치자 그가 먼저 휴게실을 빠져나간다. 세르게이가 나가고도 한참을 그대로 선 채 닉쿤의 팔을 잡고 있던 우영은 그의 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숨을 내쉬며 닉쿤의 팔을 잡은 손을 놨다. 손바닥 안에는 땀이 고여 있었다. 닉쿤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데, 자신은 그가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특유의 분위기나 사나운 눈빛도 그렇지만, 불길한 뭔가가 있는 남자였다. 그게 아직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불길하다. 우영이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는 사이 닉쿤이 우영의 이마를 툭 친다. “저 사람한테 연락하지 마.” “어?” “연락하지 말라고.” “하지만, 안 하면 나 죽일지도 몰라. 내 아파트에 폭탄을 터트리면 어떻게 해? 아니면 회사에 기관총 들고 나타나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대부 찍을 일 있냐? 지금이 몇 년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 “그래도…….” “걱정 마. 그런 짓 안 해. 그나저나,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무슨 일로 움직이는 거지?” “왜?” “……그런 게 있어. 그보다…….” 그렇게 말하며 슬쩍 문을 돌아본 닉쿤이 무방비한 우영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우영은 이번엔 놀라지도 않고 그냥 미간만 찌푸렸다. “뭐야?” “도장 찍기. 들어가자. 불독 배고파서 화내겠다. 먹이 주러 가야지.” “너, 그러다 불독이 진짜 사돈 되면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 불독한테야 영광이지. 이 지구상 어디에도 허르베지쿨을 거부할 사람은 없어.” 닉쿤이 워낙에 털털하고 재미있는 성격이라 돈 쓸 때 외엔 그다지 느끼지 못했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 이럴 때엔 닉쿤이 진짜 오만한 귀족계층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허르베지쿨을 거부할 사람이 없다니, 이건 무슨 중세 시대 왕의 발언도 아니고, 아주 가끔씩 이럴 때마다 비위가 틀린다. “누가 없대? 있어.” “누구?” “나.” 한 마디로 난 너 싫어, 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자 닉쿤이 입술 끝을 올려 유쾌하게 웃는다. “귀엽긴.” “……지금 휴전 상태지만 나 진짜 많이 화났어. 휴전 끝나는 대로 너랑 담판을 지을 거거든?” “어차피 쉽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네가 받아들일 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어 줄 테니까.” “진짜 그러면 스토커로 고소할 수도 있어.” “걱정 마. 잭이 알아서 잘 변호해줄 테니.” “너, 진짜 끝까지 가볼 생각이야?” “그런 각오도 없이 시작했을까 봐?”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무 생각 없어. 널 갖고 싶다는 것 외엔.” 부드럽고 나긋한, 하지만 어떤 의지가 느껴지는 닉쿤의 선언에 우영은 우두두 돋는 닭살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 “사랑하면 그렇게 돼.” 이번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어 우영은 자기가 먼저 휴게실을 나서 웨이터를 찾았다. 웨이터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상냥한 태도로 두 사람을 닉쿤의 지정석에 앉아 기다리는 남자에게로 안내했다. “적당히 해.” “걱정 마.” 우영은 진심으로 닉쿤이 걱정되었다. 그러니까 브루스가 닉쿤에게 해를 끼칠까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닉쿤이 브루스를 열 받아 죽게 하지나 않을까가 걱정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자신의 지정석에 미리 와 앉아있던 브루스를 본 닉쿤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말에 브루스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닉쿤을 쳐다본다. “약속 시간을 칼이라고 자랑하더니, 3분이나 늦었군.”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전화가 걸려와서요.” 그렇게 말하며 닉쿤은 우영의 앞에 있던 의자를 빼 우영에게 권했다. 닉쿤의 그런 태도에 일일이 놀라워하는 것도 피곤해 우영이 조용히 의자에 앉자 닉쿤 역시 웨이터가 빼주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브루스에게 묻는다. “주문부터 하시죠.” “주문은 조금 나중에 하지.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지?” 닉쿤과는 앉아 식사도 하기 싫다는 듯한 그 태도에 닉쿤이 웨이터에게 조금 뒤에 주문하겠다는 말을 하곤 브루스를 바라보며 말을 써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언제는 안 그랬던가?” “재키가 임신했습니다.” 짤막한 그 말에 우영은 턱을 빼고 닉쿤을 쳐다봤다. 그래도 좀 부드럽게 이야기를 돌릴 줄 알았더니, 아주 대놓고 시작한다. 그것도 가장 충격적인 일부터 말이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우영이 앞을 돌아보자 브루스가 넋이 나간 얼굴로 닉쿤을 바라본다. “……뭐라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재키가 임신을 했고, 애 아버지는 클랜입니다. 이주일 뒤 결혼시킬 예정입니다. 임산부가 있으니 우선 저택에서 지내게 할 거고요.” “잠깐…… 지금 나랑 장난을 하자는 거냐? 무슨 말이 그 따위야? 누가 임신을 해?” “재클린 레너드요. 당신의 딸 말입니다.” 분명히 브루스가 잘못 들은 건 아니다. 정확히 알아들었다. 그의 질문은 감탄사였을 뿐, 진짜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닉쿤은 얄밉게도 그 말에 정확히 답해주었다. 그 덕에 불독이 화났다. “뭐라고!” 식당 안이 떠나가라 고함을 내지른 브루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닉쿤이 살짝 인상을 쓰며 그에게 다시 앉기를 권한다. “앉으세요. 여긴 제 지정석입니다. 이 레스토랑 고객 명단에서 삭제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잖아?” 이미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절대 앉지 않을 것 같은 브루스의 태도에 닉쿤은 “이 레스토랑 다시는 못 오겠군.” 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침착하게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재키가 임신을 했고 클랜과 2주 후에 결혼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장소와 시간은 정해지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결혼식 준비 일체를 이쪽에서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재키는 10일 후쯤 돌아와 저희 저택에서 지내게 할 예정이고요.” “누구 마음대로! 지금 네가 어른을 놀리는 거냐?” “이미 저희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결혼식은 2주 후입니다.” 우영도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2주 후에 결혼식이라니, 너무한다. 결혼식도 보통 화려하게 하는 게 아닐텐데 어떻게 준비를 하란 말인가. 그리고 그 결혼식에 초대되는 이들의 스캐줄은 어쩌라고……. “너랑은 말이 안 돼. 대넌, 대넌은 어디 있어?” “아버지는 지금 기절하셨습니다.” “웃기지 마! 내가 대넌을 만나 직접 얘기하지! 아니, 그 전에 클랜, 내 이 자식을 그냥!” 당장에 탱크를 몰고 갈 듯한 그의 기세에 닉쿤 역시 가드를 올린다. “아버지도 클랜도 저택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택에는 안 가시는 쪽이 좋으십니다. 당신이 집안으로 들어서면 그대로 경찰들이 출동할 테니까요.” “뭐라고?” “내일 신문 지상에 ‘상처 입은 레너드, 셀레브리티들의 가정은 법의 사각지대?’ 이런 타이틀의 기사를 읽고 싶지 않으시면 저희 쪽에서 제시하는 대로 따라오시는 쪽이 좋을 겁니다. 허르베지쿨 가와의 혼인은 레너드에겐 절대 손해 볼 일이 아니니까요.” 아니, 방어가 아니다. 닉쿤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듯 브루스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의 자존심을 슬슬 건 드려가면서 말이다. “사실, 전 레너드 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규모는 크지만 당신이 꽤 말아먹었죠? 클랜의 상대로는 작지만 내실 있는 가문의 딸을 원했는데, 두 녀석이 벌써 눈이 맞았는데 어쩌겠습니까? 덕분에 레너드도 기사회생하겠죠. 제가 관리할 급은 아니지만, 원하신다면 특별히 고객 명단에 넣어드리겠습니다.” 순간 우영은 닉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손 안 대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닉쿤은 아주 훌륭하게 터득한 후였다. “네가 감히……. 너 같은 애송이가 감히!”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당신들의 시대는 같습니다. 이제 고물차는 폐차되어야 하는 때죠. 아무리 애정이 있어도 망가진 차는 운전자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습니다. 레너드의 재정 상태가 엉망이라는 건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주가를 조금이라도 올리고 싶으시다면 조용히 이 결혼을 받아들이십시오. ”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말에 닉쿤을 쳐다본 우영은 차갑게 얼어붙은 닉쿤의 푸른 눈동자에 불편한 듯 고개를 돌 려버렸다. 자신과 있을 때엔 늘 편하고 유쾌하지만 일을 할 때의 모습은 자신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닉쿤이 낯선 얼굴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자신이 아는 그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소외감도 느껴지고 쓸쓸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 제일 두려웠던 건 그거다. “너, 감히……. 이 결혼은 안 돼! 절대로 안 돼!” “재키가 열다섯 살 때 당신에게 맞고 우리 집으로 왔을 때 찍어둔 사진이 있습니다. 의사들의 소견서도 있고요. 그 후로도 종종 있었죠. 재키의 멍든 얼굴을 타블로이드 일면에서 보고 싶지 않으시면 제 제의를 받아들이는게 좋으실 겁니다. 이거야 말로 윈윈 전략이죠. 전 제 동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에이먼형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클레어도, 클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제 동생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든다면, 그 순간 당신의 인생도 끝장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재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 가족이니, 재키에게도 손끝 하나 대지 마십시오. 우리 가족을 건든다면 우리뿐 아니라 아버지도 가만 계시진 않을 테니까요.” 계속해서 닉쿤의 차가운 음성이 계속 됐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정도로 냉랭한 그 음성에 우영은 침착한 자세로 앉은 채 일부러 테이블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협박하는 게냐?” “협박이라뇨?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새로 시작하시는 유전 사업에 F등급을 받고 싶지 않으시다면 잘 알아서 해 주실 걸로 압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한 뒤 닉쿤은 우아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서 우영의 의자를 빼주었다. 때마침 더는 그 자리에 있고 싶 지도 않았던 우영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굳어버린 브루스에게 인사를 하곤 닉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레스토랑을 나오며 매니저에게 사과를 한 닉쿤은 나서자마자 이미 앞에 도착해 있는 차의 조수석으로 가 문을 열어 주었다. “타.” 짤막한 그 말에 우영은 먼저 조수석에 올라타 닉쿤을 기다렸다. 본네트를 돌아 다시 운전석에 탄 닉쿤은 재빨리 안전벨트를 메고 시동을 걸며 우영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미안. 좀 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얘기를 끝내야 했어. 아파트 앞에 내려줄게, 들어가 있어.” “그래도 너무했어, 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뻔히 아는 사람들이 가득 찬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망신을 주다니.” 빠른 속도로 도로로 진입하는 차 안에서 우영이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을 걸자 닉쿤이 웃으며 사과를 한다. “미안해. 아파트에서 먼저 식사하고 있어. 메이드에게 식사 준비 해놓으라고 했으니까.” “집으로 갈래. 내일 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집에서 기다려. 최대한 빨리 얘기 끝나고 돌아올 테니까. 응?” 다시 상냥해진 닉쿤의 태도에 우영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네가…….” “응?” “……아냐. 집에, 아니. 아무데서나 내려줘. 바쁜 것 같은데 일 봐야지. 나도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그리고, 로이랑 일 다시 바꿀게. 아무래도 너랑 나랑 같이 다니면 일이 제대로 안 될 것 같아. 앞으로 사라도 신경써 줘야 하고, 클랜 일도 있고.” 겨우 이틀간이었지만 완전히 스케줄이 틀어진 채였다. 운전하는 시간도 아까워하는 닉쿤이 계속 운전을 하고,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GATH사의 인수 문제가 틀어진 것 같은데 이렇게 놀 시간은 없다. 닉쿤도 그건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 그럼 당분간 그렇게 하자. 나도 얼마간은 꽤 바쁠 것 같아. 대신, 클랜 결혼식 준비 부탁할게.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사라가 하기엔 좀 벅찰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 왜 안 나오나 했다. 2주 후면 당장 내일 식장부터 잡아야겠다. 여차하면 저택 정원에서 올리는 것도 괜찮을 거고. 웨딩웨어나 일정들은 내가 잡을 테니, 대넌한테는 네가 얘기해. 그리고 재키는 내일쯤이라도 돌아오라고 해. 웨딩드레스 준비해야 하니까. 최고로 준비해줄게.” 허르베지쿨의 이름의 걸맞게, 단 2주 만에라도 최고의 결혼식을 준비할 셈이었다. 화려하고 고상하고 품위 있게, 누구라도 혀를 내두르며 최고라고 칭할만한 결혼식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게 자신의 일이었다. “고마워. 귀찮은 일만 떠맡겨서 미안하다.” “괜찮아. 내가 할 일인데, 뭐.” 섭섭해 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다. 지난 며칠간이 비정상적이었던 거다. 닉쿤은 늘 바빴다. 항상 그랬다. 대넌 의 말대로 이 미국에서 한가한 자들은 실패한 자들뿐이다. 얼마나 바쁜가가 그의 성공을 의미한다. 어쩐지 기운이 빠진 우영이 멍하니 앉아 있자 닉쿤이 불안한 듯 말을 건다. “그렇게 축 쳐져있지 마. 날 무서워하는 것 같잖아.” 무서워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사실 우영은 닉쿤이 무서웠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랬던 것 같다. “무서워, 사실은.” “하하, 네가 날 왜 무서워해?” “그런 게 있어. 넌 죽어도 모를 거야, 아마.” “왜?” “……그런 게 있어.” 우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짧은 브루스와의 만남으로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아버렸다. 닉쿤은 이런 말을 하면 웃겠지만, 낯선 닉쿤을 보고 있으면 그가 너무나 멀고 무섭게 느껴진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닉쿤은 함께 있을 때엔 더없이 재미있고 유쾌한 친구이지만, 어느 순간 돌아서 자신에게 저런 얼굴을 보일까 두려웠었다. 닉쿤이 낯선 얼굴, 낯선 음성으로 고압적인 투로 말을 내뱉고, 자신을 지겨워할까 봐 무서웠던 것 같다. 친구의 자리마저 잃은 채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닉쿤의 등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건 너무 싫다. 돌아보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다리가 부르트도록, 그 자리에서 서 있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아파트 앞에 도착해 안전벨트를 풀던 우영은 버튼을 눌러 차문을 열려했다. 조용히 운전석에 앉아 우영을 바라보던 닉쿤은 그런 우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분간, 좀 바쁠 것 같아.” “알아.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당분간은 미뤄야겠다.” 하고 싶은 말보다는 서로 해야 할 말이 많았다. 갑자기 벌어진 일들 때문에 잠시 휴전이라 했지만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난 며칠간이 이상했던 거다. “우리 사이에 뭘. 어서 가봐.” “전화할게.” “괜찮아. 난 걱정하지 마.” 서둘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우영은 문을 닫으려 돌아섰다. 그 순간 닉쿤이 우영을 부른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그 음성에 우영은 차문을 연 채 서 닉쿤을 바라봤다. “왜?” “……사랑해.” 너무나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면 어쩌면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아련한 감각만 남아있다. 안타깝고 쓸쓸한 마음뿐이었다. “가.” “전화할게.” “그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차문을 닫은 우영은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닉쿤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본 기분이 들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덕분에 지 금까지 불확실하던 사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단지 친구로서의 감정인지, 아니면 미련인지 헷갈렸는데…… 지금 확실히 알아채고 말았다. 자신이 아직도 그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 버렸다. 그가 멀어질까 두려웠던 건,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 슬퍼했던 건, 아직도 그에게 미련이 남은 탓이었다. 지금도 자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한없이 우정에 가깝지만, 조금은 다른 형태로, 그 감정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일단 자각하고 나니 머리가 또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우영은 돌아서 아파트 건물을 향해 걸었다. 닉쿤도 닉쿤이지만 자신 역시 바빠질 것이다. 당분간 정신없이 일을 해야 한다. 겨우 2주 만에 결혼식 준비도 해야 하고, 다음 달에 있을 사라의 생일 준비도 해야 하고, 매일 하는 고객들의 기념일 체크와 선물 보내기, 카드 쓰기, 그리고 임신 중인 사라도 잘 보살펴야 한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말 그대로 휴전이다. 그냥 가끔 사무실에서 닉쿤의 얼굴을 보고,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그날 아무리 기다려도 닉쿤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서도 닉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Chapter 6 “정확히 언제까지 되는데요? 진짜 급해서 그래요.”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차를 세워둔 채 커피를 사들고 막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우영은 클랜의 결혼식 전부를 위해 통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주 만에 결혼식 준비를 다 하라니,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다. 대체 무슨 깡으로 자신이 다 하겠다고 장담한 건지, 자신의 입술을 쥐어뜯고 싶어질 정도였다. 아무리 허르베지쿨이라도 당 장 존롭(Jhon Lobb)에서 기성제품도 아닌 수제 웨딩슈즈를 만들어내라고 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해주기는 했지만 신부까지 지각을 하는 바람에 괜히 준비를 맡은 우영만 죽어나고 있었다. “진짜 미안해요. 다음 주까지는 되는 거죠?” 「우영, 정말……. 당신 부탁이니 들어주는 거예요. 아무리 허르베지쿨이라도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하면 안 되죠.」 “미안해요. 부탁할게요.” 「제발 신부나 좀 데리고 나와 봐요. 맞춘다고 하고 가서는 통 무소식이니. 웨딩드레스는 가봉된 거예요?」 “네, 다행이도요.” 「신부 빨리 보내주세요. 그리고 신랑도요.」 웨딩슈즈를 부탁한 존롭의 매니저와 통화를 마친 우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이번엔 주세페 파피니의 담당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우영, 자꾸 재촉하지 말아요.」 “죄송해요. 그런데 가봉은 어떻게 된 거예요?” 「일단 거의 되어가긴 하는데……. 진짜 괜찮겠어요, 이걸로? 한 달만 여유가 있어도 맞춰서 입을 수 있는데.」 “사정이 그렇게 돼서요.” 「이탈리아에서 오늘쯤 다시 연락을 준다고 했어요. 그쪽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가봉을 마치려고 노력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정말 미안해요.” 「닉쿤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거예요.」 “고마워요.” 지금 통화하는 주세페 파피니의 담당자는 닉쿤과 약 2주간 데이트를 했던 여자였다. 덕분에 살았다. 닉쿤의 전화 한 통에 최고급 웨딩 드레스를 간신히 건졌다. 원래는 겨우 2주 만에 끝날 일이 아닌데, 그쪽도 신경을 써서 이탈리아 본사로 가봉을 맡겨줄 정도였다. 막 전화를 끊은 우영이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하려 하는데 사무실에 있던 에반이 문을 열고 나서다 우영을 보곤 손짓한다. “잘됐다. 들어와. 할 얘기가 있어.” 갑작스러운 에반의 등장에 시간을 확인한 우영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에반에게 물었다. “에반, 대체 언제 퇴근하고 언제 출근하는 거야? 설마 사무실에서 사는 건 아니겠지?” 이른 시간이었다. 오전 중에 할 일이 많아 일부러 다른 때보다도 한 시간이나 빨리 출근을 한 우영은 자신보다도 일찍 출근한 에반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에반은 단 한 번도 진보다 일찍 퇴근하거나, 늦게 출근하는 일 이 없었다. 과연 집에 들어가기나 하나 싶을 정도였다. “집에는 잘 들어가고 있으니 걱정 마. 들어오기나 해.” “무슨 일 있어?” 핸드폰을 일단 주머니에 넣고 커피를 든 채 에반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에반이 사무실 안쪽의 소파를 권한다. “아, 에반, 다음 주 일요일 시간 괜찮지? 클랜 결혼식.” “진짜 하는 거냐? 브루스 병원에 입원 중인데?” 그 날 브루스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현기증을 일으켜 진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리고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겠다 선언한 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닉쿤이 심했다. “배불러오기 전에 해야 하니까. 참, 아주머니한테 한국인 요리사 한 명 부탁했는데. 전문 요리사보다 가정식 잘 하시는 분으로.” 우영이 소파에 앉으며 그렇게 말하자 에반이 우영에게 메모지를 한 장 건넨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처 주셨어. 사라 때문이지?” 메모지를 받아 그 안에 적힌 이름과 나이, 그리고 연락처를 확인한 우영은 곧장 그 번호를 휴대폰에 등록했다. “임신하니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은가 봐. 매일 주문할 수는 없으니 아예 요리사를 상주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네가 애쓴다. 대넌은 아직도 몰라?” “몰라. 지금 열심히 보석만 사다 바치고 있나 봐. 사라는 그것 때문에 더 열받아가는 중이고. 오늘 맨하탄에 있는 빌라로 나온대. 브렛한테 갈 수는 없으니 친구가 하는 병원 근처에 빌라를 하나 렌탈했나 봐. 대넌 또 기절하게 생겼어.” “진짜 어지간들 하다. 이제 슬슬 말하지?” “내 말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진짜 나중에 그런 자식들 낳을까 봐 겁난다니까.” 번호 입력을 끝낸 우영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에반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인터뷰 보고 곧장 일할 수 있는 거야, 이 사람은?” “응. 곧장 가능하대. 미국에 온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이민 온 뒤 남편하고 이혼을 한 모양이야. 다행히 아이들은 없고, 한식 자격증을 가지고 있대. 중식도 좀 하고. 어머니 말로는 조용하대. 사람은 괜찮다고 하더라.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소문 새나갈 염려도 없고.” “다행이네. 더 할 말은?” 우영이 할 말 없으면 나가보겠다는 투로 묻자 에반이 빈 소파에 있던 신문을 찾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걸 본 우영은 작게 “아…….”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봤어. 오는 길에. 이게 왜?” “여기 나도 같이 있었어. 오해하지 말라고.” “무슨 오해?” “그런 오해.” 그 말에 우영은 간지러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커피를 사러 가던 중 가판대에 진열된 이 신문을 보곤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신문 1면에는 진한 갈색 머리의 미녀와 닉쿤이 난간에 서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타이틀은 역시나 「돌아온 닉쿤」였다. “신경 쓰지 마.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뭘 그래? 새삼.” “새삼은 아니지. 아침에 신문 보고 닉쿤이 길길이 날뛰면서 전화를 했더라고. 요즘 바빠서 짜증나 죽겠는데 신문사까지 이런다고. 당장 신문사 상대로 고소하라던대.” “1면인데 왜 고소를 해?” 비웃음이 가득한 우영의 말에 에반이 조금 놀란 얼굴로 우영을 바라보자 우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어간다. “그냥 둬. 별것도 아닌 일로 뭘 그래?” “……네 그 말,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냐?”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그럼? 닉쿤이 타블로이드 1면에 스캔들 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까지 아무 말 안했었잖아? 새삼 뭘 그래? 이 김에 게이설 싹 들어갈테니 다행이지. 대신 타조는 좀 설치겠지만.” 그렇게 말한 우영은 그제야 근본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문제는 타조였다. 당장에 자기 속였다고 총 들고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엘레나가 문제가 아니야. 닉쿤 진짜 화났어. GATH사 인수 문제로 존을 만나기로 했는데 존이 딸까지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저렇게 된 거야. 알잖아? 일하다보면 고객 딸에게도 기어야 하는 거.” 에반의 장황한 설명에 우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 나도 이젠 여기 돌아가는 구조 파악했어.” “나랑 케인도 함께였어. 존도 있었고.” “왜 나한테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 “나도 알아.” “뭘?” “닉쿤이 너한테 정착하고 싶어 한다는 거.” 그새 닉쿤이 에반에게 불었나 보다. 어쩐지 잔소리장이 에반이 요 며칠 조용하다 싶었다. “바람이 정착을 할 수 있나? 여기저기 맴돌아야 바람이지.” “우영.” “됐어. 나도 지금 너무 바쁘다. 정신없어. 닉쿤한테 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해. 2주 만에 결혼 준비를 하라니, 진짜 미친 거지.” 피곤한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우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컵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순간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사흘 째 이어진 모닝콜이었다. 정확히 사흘 째 이 시간만 되면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에반, 나 일어설게.” “그래.” 에반에게 인사를 고한 뒤 신문을 옆구리에 낀 우영은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예요.」 “그래, 알아.” 생각 같아서는 ‘나 죽도록 바쁘거든?’ 하고 끊어버리고 싶지만 엘레나의 오빠를 만난 뒤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화를 내고 전화를 끊으면 울면서 오빠한테 ‘오빠, 우영 좀 죽여줘!’라고 말할 것 같아 아무리 바빠 죽을 것 같아도 이 전화만은 받고 있었다. 「신문 봤어요.」 그래, 봤겠지. 읽은 게 아니라, 봤겠지. “그럼 본 김에 읽어 봐. 사전 펴놓고.” 사진만 보지 말고 기사를 좀 읽어라, 라는 투로 우영이 말하자 엘레나가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 여자 뭐예요?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그 말에 우영은 휴대폰을 어깨와 턱 사이에 끼곤 신문을 펼쳐 봤다. 사진 속의 여자는 미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미인이다. “왜? 미인인데.” 「웃기지 말아요. 코 세우고, 눈 찢고, 보톡스도 맞았어요. 웃는 거 보세요. 표정이 부자연스럽잖아요. 저번에 태닝할 때 한 번 봤는데 등에 살 장난 아니에요. 거기다 어찌나 까다롭게 굴던지. 제가 점원이었으면 기계 잠가 버렸을 거예요.」 어쩐지 엘레나라면 점원이 아니라도 잠갔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우영은 억지로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러냐?” 「그렇다니까요. 거기다 옷은 뭐 이래? 저거 3년 전 드레스라고요. 촌스럽게 3년 전 드레스를 입고 디너에 가다니 완전 미친 여자에요. 거기다 저 백은 뭐래요? 아무리 리미티드라도 4년 전 거라고요. 검은 칵테일 드레스에 저 번쩍거리는 주얼리에 검은 가방이라니. 미친 거 아니에요, 이 여자? 천박하고 촌스러워요. 지루하다고요. 분명히 자기가 골라 입은 거예요. 내가 스타일리스트라면 저 여자 그냥 죽여 버렸을 거예요.」 사진 속 여자의 패션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엘레나의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사무실로 들어선 우영은 곧장 책상으로 가 가방과 신문, 그리고 컵을 내려둔 채 양복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엘레나, 옷 못 입는다고 죽이면 안 되지. 그럼 큰일 나.” 「아씨! 당신은 패션을 너무 몰라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요! 다 뜯어 고치고 화장을 덕지덕지 했는데도 못 생겼잖아요! 거기다 패션도 문제에요! 진짜 무슨 옷을 저 따위로 입어요? 거기다 머리도 촌스럽긴. 구두도 분 명 히 5-6년 된 디자인 신었을 거예요. 닉쿤 원래 저렇게 눈이 낮아요?」 “그런가 보지.” 아무리 봐도 흠잡을 데 없는 미녀인지라 우영은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입이 딱 벌어지는 미녀는 아니라도 나름 개성 있는 미녀였다. 그리고 옷이나 장신구도 딱히 거슬리진 않는다. 하지만 전문가인 엘레나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전문가의 시선에서인지 아니면 그냥 비틀린 시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닉쿤을 죽이겠다 설치지 않는 게 다행이다. 「우영, 저 여자 그냥 둬도 괜찮은 거예요?」 “그냥 안 두면?” 벗은 재킷을 옷걸이에 건 뒤 책상으로 가 앉은 우영은 끈끈한 공기에 에어컨을 틀고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옆에 있던 스케줄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순간, 엘레나가 진짜 큰일 날 소리를 내뱉었다. 「저 여자, 내가 죽여줄까요?」 “……저기, 너 말이다…… 죽인다는 소리를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돼.” 진 본인도 그런 말을 자주 하는 편-특히 노먼에게-이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농담으로 들리는 말이, 엘레나가 하면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아가씨는 죽인다면 진짜 죽일 것 같다. 「우영은 남자니까 그렇다 쳐도 저런 못생긴 여자가 닉쿤 옆에 있는 거, 난 못 참아요!」 “참아.” 「아씨, 그럼 어쩌라고요?」 “어쩌긴 뭘 어째? 자기가 좋아서 만나는 건데.” 「바람피운 남자를 그냥 두겠다는 거예요?」 막말로 네 애인도 아니잖아, 라고 말하려다 우영은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지난 며칠간 쉴 새 없이 문자가 오간 덕에 이젠 남 같지가 않다. 한 10년은 알고 지낸 친구 같았다. “원래 바람같은 녀석인데 뭘 어떻게 해?” 「내가 닉쿤 만날까요? 아니, 오빠한테 얘기해서 닉쿤 혼 좀 내주라고 할까요?」 진짜 이 아가씨를 어째야 하나 하는 생각에 우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엘리, 그보다 너 학교 갈 준비해야 하지 않아?” 「지금 제가 학교 가게 생겼어요? 오크한테 닉쿤을 뺏기게 생겼는데?」 “일단 학교 가. 학교 가서 수업 다 받고 나중에 전화해서 얘기하자. 알았지?” 「……당신은 괜찮아요? 이런 거?」 “하루 이틀 일인가?” 「전 닉쿤이 이런 남자일 줄 몰랐어요.」 “원래 그런 놈이야. 그러니까 너도 어서 좋은 남자 찾아라. 네 또래에 맞는 착한 남자 친구 만나.” 「……몰라요. 끊을게요. 이따 학교 끝나고 사무실 가면 안 돼요? 아니면 따로 만나거나.」 “너랑 따로 만났다간 네 오빠가 내 머리통에 대포를 쏠 거야.” 「아니에요. 세르게이가 우영 마음에 든대요.」 “응?” 「가정교사 부탁하고 싶다고 하던데요?」 “……응?” 「오빠가 어지간하면 그런 말 안 하는데, 당신은 진짜 마음에 들었나봐요. 귀엽대요.」 “뭐!?” 귀엽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대체 그 남자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귀엽다고 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끼친다. 「뭘 그렇게 놀라요? 저 아침 먹고 학교 갈 준비할게요. 나중에 전화해요.」 “……그래라, 일단.” 에어컨을 틀어놔서인지 세르게이가 자신을 귀엽다고 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갑자기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등골이 오싹한게 오한이 끼쳐 온다. “진짜 미치겠네…….” 일은 바빠 죽겠지, 닉쿤은 전화도 없지, 마음이 어지러워서 잠은 제대로 못자지, 툭하면 대넌이 전화해서 사라 좀 말리라고 난리를 치지, 클랜은 전화해서 얼빠진 소리나 하고 앉아있지, 엘레나는 30분 단위로 메시지를 보내지. 진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난 진짜 휴가가 필요해.” 스케줄첩을 보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우영은 곧 죽을 것 같은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신적으로도 그렇지만 육체적으로도 한계다. 닉쿤이랑 에반만 힘든 게 아니다. 이것도 진짜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영문과를 나와 영어 교사나 될 걸, 하는 생각이 절실히 드는 요즘이었다. 사람이 말라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대로 엎어져 한참을 그렇게 있는데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앉아 침착한 음성을 내뱉었다. “네, 들어오세요.” 그 말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엄청난 꽃다발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진짜 꽃다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 키만 한 꽃다발이었다. “우영 케이먼 씨 맞으시죠?” 꽃이 말을 한다. “……네. 맞는데요…….” 우영이 얼어붙은 채 그렇게 답하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꽃다발이 떠억 하니 책상 앞에 멈춰 선다. “꽃 배달입니다. 사인해주세요.” 우영이 질린 얼굴로 꽃을 바라보는 사이 꽃의 뒤에서 하얀 손이 불쑥 나와 영수증을 내민다. “아……. 저 이게 뭐죠?” “안에 카드가 있습니다. 저흰 배달만 부탁 받아서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우영은 재빨리 영수증을 받아 사인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장미 더미 앞으로 다가갔다. 프린세스 드 모나코와 에스메랄다, 그리고 오델로가 색색별로 섞인 장미 더미였다. “으아…… 이천 송이는 되겠다.” 이걸 대체 어떻게 옮겨온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오로지 장미로만 장식된 꽃다발을 보던 우영은 위쪽에 꽂힌 연한 분홍색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드를 열어 보았다. 혹시나 닉쿤이 보낸 게 아닐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닉쿤의 취향치고는 좀 무식하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자신에게 이런 꽃을 보낼 사람은 솔직히 닉쿤밖에 없다. 심장이 두근두근 기분 좋게 울렁거렸다. 방금 전까지 죽을 듯 지쳐 있던 게 거짓말인 듯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생기가 돌던 우영의 얼굴은 카드를 여는 순간 다시 이상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이게…… 어느 나라 말이지?” 카드를 아무리 뜯어 봐도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악필이 문제가 아니라, 우영이 아는 나라의 문자가 아니었다. 꼭 상형문자 같은 것이……. “뭐지? 러시아언가? 아닌데……. 맞나?” 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우영은 도저히 그 문자를 읽을 수가 없어 책상으로 가 잘 쓰지 않는 안경까지 꺼내 쓰곤 다시 카드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 불명이다. “……이집트 문잔가?” 내가 이집트 사람을 알던가, 하며 우영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에서 고객명단을 열었다.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혹 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고객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하나씩 명단을 살피던 우영은 울리는 벨소리에 기계적으로 휴대폰의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시선을 노트북 화면에서 떼지 않은 채 말하자, 안에서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영?」 “네. 누구시죠?” 「저번에 인사했었지? 세르게이라고 하는데…….」 바이올린 소리처럼 청아하고 섹시한 그 음성에 우영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안녕하십니까?” 「꽃은 잘 받았나?」 “아…… 당신이 보내신 건가요?” 「응.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순간 우영은 자신의 키만 한 꽃다발을 바라봤다. 생긴 거답지 않게 사람이 좀 무식하다. “……네.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꽃은 왜…….” 「감사의 뜻이야. 엘레나의 몸무게가 3파운드나 늘었어.」 “……예?” 「그리고 학교도 열심히 나가더군.」 “아, 그건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하필 꽃을…….” 「아, 보석이 좋은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우영은 몸서리를 쳤다. 어디선가 장물을 들고 와 건넬 것 같아 무서웠다. 철창 행은 싫다. 사실 저 꽃도 어디 장례식에서 갖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뇨. 전 꽃이 좋습니다.” 「다행이군. 그보다 시간을 좀 내줬으면 하는데?」 “……저 제가 요즘 좀…….” 어지간하면 그가 만나자는데 무조건 나가겠지만, 지금은 죽을 시간도 없었다. 농담 아니라, 진짜 목 매달 시간도 없다. 「내가 내일 저녁에 시간이 나는데…… 저녁 식사나 함께 했으면 하는데?」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에 우영은 뭐라 할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그러시죠. 그럼 어디서?” 「내일 저녁 때 사무실 앞으로 리무진을 보내지. 7시쯤 괜찮나?」 사실 전혀 안 괜찮다. 리무우영도 싫지만 내일 7시에 퇴근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청이다. 어쩌면 지금 저 장미더미 안에 폭탄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거절하면 저기서 폭탄이 터질 거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지.」 “예……. 그럼.” 다소곳하게 인사를 한 우영은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책상 위에 놓인 카드를 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러시아어는 아닌데…….” 그렇다고 분명히 영어도 아니다. 아니, 영어 비슷하긴 한데, 이렇게 생긴 게 영어일 리가 없다. 아무리 봐도 이집트나 중동 쪽의 상형 문자 같은데……. 언어학자라도 찾아가 물어볼까 하는 사이 다시 전화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순간 우영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날 잡아 죽여라.” *** “허르베지쿨 가 사남매는 전생에 내 원수였을 거야.” 오늘 오후 겨우 겨우 웨딩웨어 세트를 확보했다는 전화를 받고 안심하던 중, 아주 경사스럽게도 클랜이 재키와 웨딩웨어를 고르러 나가 200세트를 전부 각각 다른 걸로 골랐다는 전화를 받은 우영은 혈압이 오를 대로 올라 매장으로 달려 나온 채였다. 다된 밥에 재 뿌린 두 녀석을 잡으러 간 우영은 모든 건 예정대로 한다며 직원들을 안심시킨 뒤 말썽쟁이 두 사람을 이끌고 나오며 피곤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테이블웨어를 꼭 통일할 이유 있어? 너무 촌스럽잖아.” “그래서, 제조사도 다 다른 백 달라부터 십만 달라 사이를 오가는 식기들을 골고루 고른 거냐, 이 얼간이들아! ” 옆에서 따라오며 투덜거리는 재키와 클랜을 보며 우영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클랜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시선을 돌리고 재키는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영을 바라본다. “우영, 꼭 그렇게 비싼 걸로 통일을 할 필요는 없잖아. 색색별로 가격별로 얼마나 좋아?” “클랜이 그러면 재키, 너라도 말려야지. 너까지 같이 이러면 어떻게 해? 백 달라 짜리 세트가 놓인 테이블에 앉는 손님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러니까 아무 거나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게 하라고.” “……너희 결혼식에 오는 손님이 몇 명인지 알아?” “천 명 정도?” “그 사람들을 우르르 몰려오게 한 뒤 아무데나 앉으라고 한다고? 재키, 너 파티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야?” “가본 적도 없고, 내가 해본 적도 없는걸.” 확실히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레너드 가는 셀레브리티들 중에서 가장 검소하고 소박한 가정이었다. 그 점만은 브루스를 존경한다. 어릴 때엔 유모군단과 보디가드들에게 둘러싸여 자라고 다섯 살부터 주식과 투자, 그리고 프랑스어와 일어, 독일어 등의 고급 과외교육을 받고 전용기를 타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한도 무한대의 신용카드를 들고 다니는 일반 셀레브리티들의 자녀들과 달리, 재키는 아주 검소하고 차분한 아가씨였다. 스타일리스트나 디 자이너와도 연이 없고, 파티에 참석하거나 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패션센스나 파티에 대한 감 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사실, 우영은 그런 재키를 무척 좋아했지만 막상 셀레브리티들의 사회에서 이 아가씨를 공주님으로 만들어야 할 걸 생각하니 눈앞이 막막하다. 파티장에 화장도 거의 안한 채 목부터 무릎까지 가리는 검은 드레스에 흰 단화를 신고 나타난 아가씨에게 뭐라고 할까. 물론, 그 집 여자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재키의 어머니인 킴은 센스가 있는 편이었는데, 재키는 그쪽으로는 꽝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예의 바르고 똑 부러지는 재원이지만, 기본적으로 재키도 클랜 과였다. 보석이나 구두보다 책을 좋아하고 명품 브랜드의 신상가방보다 커다란 백팩을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하나도 힘든데 둘이나 생겨버렸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미치겠네……. 대체 브루스는 그것도 안 가르치고 뭘 한 거야? 너, 어쩔래? 이제 허르베지쿨가에서 하는 작은 파티는 네가 주최해야 하는데?” 사라가 고령 임신 중이라 결혼 직후부터 사소한 티파티는 이제부터 재키가 관리해야 한다. 그걸 생각하다 눈앞이 막막하다.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부인과 아가씨들을 불러놓고 프렌치 프라이와 토스트에 머그잔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를 내줄까 걱정돼 죽겠다. “너, 차 종류는 아는 거야? 홍차 종류 아는 대로 대 봐.” “……립톤?” 순간 우영은 이 아가씨보다는 타조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타조는 명품에 대해서는 빠삭하다. 물론, 차 종류를 알지는 의문이지만……. “미치겠다. 너, 내일부터 집안에 앉아서 과외 받아. 내가 전문가를 붙여줄 테니까, 과외 받아. 그리고 스타일리스트랑 헤어 디자이너 붙여줄게. 손톱 관리는 받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주차장으로 가던 우영은 재빨리 팜을 꺼내 그 안에 있는 명단을 확인했다. 과외교사부터 시작해 붙여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영, 꼭 그런 것까지 해야 돼? 나더러 머리 빈 애들처럼 멍청하게 앉아서 머리에 바가지 뒤집어쓰고 손톱에 색칠하라고?” “해야 돼. 안 그러면 내가 명목이 안 서. 결혼식까지만이라도 해. 그 뒤는 무조건 파티 강의야.” “파티 준비야 우영이 해주면 되지. 내가 어떻게 그런 걸 해?” 허르베지쿨 사람들-재키 포함-은 뭔가를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다. 원래 이 일은 사라의 영역이었다. 사라가 임신 중인데다 지금 대넌과 전쟁을 치르느라 자신이 대신해주는 것뿐이지, 엄밀히 말해 이건 자신의 일 이 아니다. 사라가 못한다면 원래 대넌의 비서들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자신은 닉쿤사의 닉쿤의 사교담 당 비 서이지, 허르베지쿨 부동산 홍보과에서 일하는 직원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닉쿤 사는 허르베지쿨 사의 지점이 아 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건 절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다. “이 참에 내가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난 닉쿤 사교 비서야. 사실은 이것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이 바보들아. 제발 내가 해둔대로만 놔다오, 응?” 그 말에 옆에서 걷던 클랜이 재빨리 받아친다. “그럼, 청첩장은 우리가 만들게 해줘.” “안 돼.” “왜?” “미안하지만 이미 준비 들어갔어. 청첩장이 아니라 플래티넘 카드야. 일일이 수공예로 손님들 이름과 초대 번호를 새겨서 보내는 거라고.” 대넌으로부터 무조건 화려하게, 남들이 그 호사스러움에 질려 뒷말 못하도록 최고로 준비하라는 명을 받은 뒤라 우영은 말 그대로 최고로 모든 걸 준비하고 있었다. 청첩장은 종이가 아니라 손님들 이름이 새겨진 플래티넘으로 만든 카드였고,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이탈리아의 명품 가구 브랜드인 플루에서 공수하기로 했다. 야외식장에 꾸미는 꽃값 예산만 벌써 10만 달라가 넘어간 상태다. 테이블 웨어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웨딩웨어로 써 유 명해진 엘리자베스 웨어를 200세트 주문했고, 경호요원만 500명에,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의 옷까지 디자 이너에게 부탁해 격에 맞는 디자인으로 단체 주문해둔 채였다. 신부의 들러리를 설 어린 친구들을 위해서는 스 타일리스 트 5명이 붙어 그녀들의 드레스와 구두뿐 아니라 주얼리와 헤어까지 모두 준비하고 있었다. 브루스가 병원에서 골골대는 상태인데다 킴 역시 남편이 무서워 현재 허르베지쿨 저택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신부 쪽의 부담까지 허 르베지쿨이 떠맡은 덕에 우영은 죽어날 판이었다. 총 경비만 대략 삼천만 달라를 예상 중인 초호화 판 결혼식이었다. 그 금액을 전부 계산하고 정리하고 지불하는 것도 우영이 할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는데 너희는 무슨 개소리냐고 소리 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인데, 막상 결혼을 하는 당사자인 클랜은 이게 상당히 못마땅한 듯했다. “돈이 썩었어? 무슨 청첩장을 플래티넘으로 만들어? 거기다 수공예로 이름을 새겨? 안 돼, 취소해. 우리가 디자인 도안 세워서 만들게.” 순간 우영은 진심으로 클랜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무 사치스러운 것도 안 좋지만 클랜이나 재키처럼 지나치게 소박한 것도 죄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죄다. “안 돼. 대넌과 브루스 얼굴도 있으니 무조건 나한테 맡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야. 너무 심하잖아.” “찰스 황태자와 다이아나 비 결혼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치러주고 싶으시다지만, 시간이 빡빡해서 이 정도인 줄 알아.” “이건 진짜 낭비다. 차라리 돈을 뿌리는 게 낫지.” “대넌 입장도 생각해줘. 하여간 내가 준비한 대로 둬. 안 그러면 내가 대넌한테 혼나.” “아버지는 진짜 못 말린다니까. 이게 바로 낭비라고.” “너희도 진짜 못 말리겠다. 정상적으로 하는 결혼도 아닌데, 결혼 준비는 부모님들이 원하시는 대로 둬. 허락하신 것만도 다행이니까.” 생각 같아서는 허르베지쿨 사람들-사라만 빼고- 전부 저택 해안가에 파묻어버리고 싶었지만 화를 꾹꾹 참으며 우영은 자신의 차 앞에 도착해 경보를 껐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차 문을 연 우영은 앞에 멈춰선 원 플러스 원 초특가 할인 세트를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나 죽을 시간도 없거든? 제발 일 좀 치지 마. 이러다 나 진짜 말라 죽는다.” “알았다니까, 미안해.” “알았으면 재빨리 돌아가. 난 더 들를 데가 있으니까.” “또 어딜 가는데?” “내가 어딜 가겠냐? 너희 결혼식 때 쓸 샴페인하고 포도주 고르러 가지.” “그건 우리가 할게.” “됐어. 그랬다가 또 30달라짜리 골라 올라.” “우영, 싼 것도 맛있는 거 많아. 꼭 비싸야 맛있는 건 아냐.” “클랜, 너도 일을 시작할 거면 그건 알아둬. 셀레브리티들은 포도주의 맛을 음미하려고 마시는 게 아냐, 그 상표와 희소성을 마시는 거라고. 옷도, 구두도, 가방도 마찬가지야. 질 좋고 근사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만 입을 수 있고 들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을 원하는 거야. 그걸 알아야 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지.” “……그 말 들으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네.” “하여간 들어가 봐. 늦겠다.” “알았어. 오늘 미안해. 그런데 우영 너무 피곤해 보여. 그래서 우리가 좀 도우려고 한 거지.” 그 말에 순간 불타오르던 전의가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클랜과 재키 나름은 자신을 도와주려고 한 거였나 보다. 물론, 전혀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쓸데없는 일까지 늘려줬지만 그래도 자신을 도우려 한 그 마음만은 가상해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미안한 줄 알면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둬. 너희 둘 결혼식에 가족도 아닌 내가 이렇게 나서는 거 나도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하는 대로 뒀다간 허르베지쿨이고 레너드고 망신만 당할 거야. 부모님 체면도 좀 생각해줘. 너희 착하고 검소한 커플인 건 아는데, 부모님들 생각해서 그냥 눈 딱 감고 하루만 참으라고.” “진짜 미안해. 그런데 그 말은 좀 그렇다. 우영이 왜 가족이 아냐? 우리 형들보다 훨씬 형 같은데. 아니, 누난가?” 클랜다운 재치에 우영은 결국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저런 것들이 진짜 가족이라면 다들 골방에 처넣고 정신교육을 시켜야겠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은 말이었다. 물론, 뒤에 누나라는 말은 좀 그렇지만, 지금은 더 화낼 기운이 없다. “나 먼저 간다. 너희도 어서 들어가. 그리고 맞아 죽더라도 브루스한테 들러서 제대로 인사해. 너희 형이 심했어.”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자존심을 박박 긁어 앓아눕게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당했으니 브루스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재키를 없는 딸 셈 치겠다 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런 게 사돈이 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브루스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닉쿤도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다. “찾아뵐게. 아, 그리고 오늘…….” 막 클랜이 뭔가 얘기를 꺼낼 것 같은 분위기에 우영은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닉쿤 1면에 얼굴 난 거면 말하지 마라. 이미 알고 있으니.” “괜찮아?” “괜찮아. 너희도 빨리 돌아가. 그리고, 재키 너는 내일부터 내가 붙인 사람들한테 열심히 배워. 머리 좋으니까 넌 빨리 배울 거야.” 만약 상대가 타조라면 그냥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로 가 투신했겠지만 그나마 재키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우영이 마지막으로 재키에게 당부를 하자 재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알았어. 오늘 미안해, 우영. 그리고 수고했어.” “아니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안전벨트를 한 뒤 곧장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상하게 심난하고 시끄럽고 피곤한 하루였다. 초특가 세트 둘을 떨쳐낸 뒤 포도주와 샴페인을 골라둔 우영은 마지막으로 사라의 집에서 상주할 한국 여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뒤 곧장 사라고 이사 나온 빌라로 데리고 가 인사를 시켰다. 당장 내일 오전 중에 입주하겠다는 그 말에 우영은 웃으며 그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대넌까지 전화해서 제발 사라 좀 설득해달라고 매달리는 통에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사라가 편안해 보여서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파김치가 된 채 집으로 돌아오자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은 결혼식 업체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과 함께 자세한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내일도 한 시간 빨리 출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터벅터벅 아파트 복도를 걷던 우영은 문득 생각난 듯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재 중 전화는 없었다. “이번엔 진짜 손가락을 다쳤나…….” 에반과는 전화도 잘하고 자주 얼굴도 보는 것 같은데 자신은 벌써 사흘이 넘도록 닉쿤을 보지 못했다. 출장이라도 간 건가 했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점점 더 기운이 빠지는 느낌에 자신의 집을 향해 걷는데 집 앞에 동그랗게 앉아있는 물체가 보였다. “닉…….” 닉쿤인가 해 우영이 서둘러 이름을 부르려는데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진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우영을 반긴다. “어이.” 닉쿤이 아니라 노먼이었다. 순간 반가웠던 마음이 가셨다. “아……. 노먼. 웬일이야, 이 시간에?” “식사하자더니 통 소식이 없어서. 이 시간에 퇴근하는 거야?” “클랜 결혼 문제 때문에.” “그걸 왜 네가 준비해?” “그럴 사정이 있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집 앞에 선 우영은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어서 침대에 가서 눕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먼이 자리에서 일어서 우영을 따라 들어선다. “노먼, 나 좀 피곤한데…….” 너랑 말싸움 할 기운 없다는 말을 돌려 말하자 노먼이 우영의 어깨를 밀며 안으로 들어선다. “그래 보인다. 전해줄 게 있어서 온 거야.” “뭔데?” “일단 가방 내리고 재킷 벗고 앉아 봐.” 그 말에 우영은 소파에 가방을 내려두고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건 채 노먼의 말대로 얌전히 소파에 가 앉았다. 그러자 바로 옆으로 다가와 앉은 노먼이 그가 읽고 있던 책을 건넨다. “선물.” “응?” “생일 선물이라고.” “웬 생일? 내 생일 지난지가 언젠데?” “원래 그 생일 음력이라며? 확인해보니 한국 음력 날짜로 오늘이 네 생일이더라고.” “아…….” 순간 우영은 멍하니 노먼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래 전에 한 번, 그것도 스쳐가듯 한 말이었는데……. 생일을 챙 겨주겠다던 노먼의 말에 질려 내 생일은 원래 음력이라고 거절하려고 했던 그 말을 노먼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너무 놀랍고, 또 그 생일을 챙기러 늦은 밤까지 기다려준 그에게 감동해 눈물이 시큰해졌다. 힘든 상황이라서인지 더욱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노먼, 너 되게 매력 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응. 너 진짜 매력 있다. 내가 여자였다면 진짜 감동해서 당장에 결혼하자고 했을 것 같아.” “으하하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네가 진짜 힘들긴 한가 보다. 마음이 약해진 걸 보니.” “응, 힘들어. 허르베지쿨 사남매들 쓸어서 다들 어디 갖다 버리고 싶어.” 우영의 그 말에 노먼이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책을 손으로 가리킨다. “책이나 봐.” “무슨 책이야?” “봐.” 책의 표지에는 「In the Mirror」라고 써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노먼 맥캐인? 네가 쓴 거야?” “응. 6개월 전에 출판 결정 나고 사흘 뒤에 전국에 뿌릴 거야. 마침 네 생일 생각도 나고 해서 막 인쇄 마치고 나온 따끈따끈한 책 들고 온 거야. 네가 첫 독자야. 신랄한 평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노먼은 우영의 이마를 툭 쳤다. 그 손길에도 우영은 어색한 듯 웃으며 책의 표지를 빤히 내려다봤다. 너무나 기다려오던 책이었다. 노먼이 언제 정신을 차릴까 걱정하며, 그가 그의 이름으로 그가 만들어낸 세 계 를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길 기다렸다. “나, 지금 진짜 감동했어. 고마워. 사인도 좀 해주지?” “……안에 봐.” “벌써 해놓은 거냐?”라고 웃으며 받아친 우영은 천천히 책의 표지를 넘겼다. 그리고 맨 앞장에 써진 문구를 보곤 눈시울을 붉혔다. 어떤 선물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노먼이 그의 이름으로 낸 첫 번째 책의 첫 장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주었다. 영원히 남을 그의 세계 안에 자신을 새겨주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날 기다려준 한 사람, 언제나 나를 믿고 기다려준 사랑하는 친구, 우영 케이먼을 위해. 하하, 이거 되게 기분 좋다. 나 지금 진짜 감동 받은 것 같아.” 우영이 진심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노먼이 우영의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준다. “그렇지? 기분 좀 좋아졌어?” “응. 최고로 좋아졌어.” “다행이다. 오늘은 그만 쉬어라.” “네 책 볼래.” “그러지 말고 자. 너 지금 죽을 것 같아. 너무 피곤한 상태야.” 딱 보기에도 우영은 지쳐 보였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 말에 우영은 어깨에 힘을 빼고 솔직하게 대답 했다. “……맞아. 나 진짜 피곤해.” “옆에 있어줄까?” “……그럴래?” “그래. 너 외로움 많이 타는 녀석이니까 특별히 옆에 있어주마. 대신, 오늘 밤에 무슨 일 일어나도 난 모른다? ” “하하.” 우영은 맥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노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와 함께 다정한 손길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슬슬 잠이 쏟아진다.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지치고 슬픈 기분이었다. *** 탕탕탕- 이른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에 소파에 누워 잠을 자던 노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내다봤다. 시계를 보니 아직 6시 30분이었다. 이 이른 시간에 뭐야, 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노먼은 옆에서 기절하듯 잠든 우영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곤 천천히 문을 향해 나갔다. 그리고 삼중으로 잠긴 열쇠를 열고 문을 여는 순간 앞에 선 금발의 미인을 보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엘레나 네브즐린?” 얼마 전 사고를 치고 1년간 모델 활동 정지를 먹었지만 그 포스만은 대단해 뉴욕 디자이너들의 몸을 달게 만든 슈퍼모델 엘레나 네브즐린을 정면에서 본 노먼은 다시 한 번 눈을 비비며 그녀를 바라봤다. 런웨이나 파티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긴 금발을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은 채였다. 구두도 단화였지만 노먼과 비슷할 정도로 큰 키였다. 헐리웃에는 린제이 로한, 셀레브리티에는 패리스 힐든 있다면 슈퍼모델계에는 엘레나 네브즐린이 있다고 할 정도로 지독한 파티걸에 온갖 말썽을 다 피우고 다니는 러시아 마피마의 막내딸이 여긴 웬일인가 싶어 노먼이 인상을 쓰자 엘레나가 커다란 봉투를 든 채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기 우영 케이먼씨 댁 아닌가요?” “맞는데?” “누구시죠?” “나 우영 애인인데?” 순간 엘레나의 손에 있던 봉투가 툭하니 떨어지는 걸 노먼이 재빨리 잡아들었다. 봉투가 따뜻한 게 맛있는 냄새 가 나는 걸로 봐서 음식이었다. 마치 배가 고파오려던 차라 노먼이 봉투를 열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자 엘레나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다. “우영 애인이요?” “응. 왜?”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난 10년 사귄 애인인데?” “뭐라고요?” 엘레나가 당장에 한 대라도 칠 기세로 달려들자 그녀의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노먼은 재빨리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순간 잠에서 깬 우영이 노먼의 뒤로 다가와 머리통을 툭 친다. “무슨 개소리야? 엘리,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우영, 양다리 걸친 거예요?” 퉁퉁 부운 두 눈으로 나온 우영을 보자마자 엘레나는 온 아파트가 떠나가라 그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우영은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누르며 작게 답해주었다. “속지 마. 내 친구야. 대학 동기, 노먼 맥캐인.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제야 엘레나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기, 아침 사왔는데요.” “왜?” “일찍 나와서 아침 사왔어요. 같이 먹어도 돼요?” 일찍이라도 너무 심하다. 이제 겨우 6시 30분이었다. 이 아가씨가 원래 이렇게 부지런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우영은 복도를 돌아봤다. “이 시간에 너 혼자 온 거야?” “당연히 보디가드들도 있죠. 밖에서 차 기다려요. 오빠한테 허락받고 왔어요.” 세르게이가 허락했다면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우영은 쉽사리 길을 터주었다. 어차피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먼도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새벽같이 아침까지 사들고 온 엘레나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들어와.” 우영이 돌아서 안으로 들어서며 말하자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선 엘레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우영 목소리 이상해요. 왜 그래요?” “진짜 너 목소리 너무 심하게 갈라졌다. 누가 들으면 너랑 나랑 뜨거운 밤을 보낸 줄 알겠다.” “노먼, 헛소리 그만해. 그냥 목이 좀 부은 거야.” 안쪽의 주방으로 들어선 우영이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내리려하자 엘레나가 재빨리 따라 들어와 우영의 옆에 선다. “아픈 거 아니에요?” “괜찮아. 목소리만 좀 이상한 거야. 요즘 좀 무리를 해서 그래. 앉아라. 커피는 그렇고 주스 마실래?” “네.” 커피 메이커에 물을 붓고 냉장고로 간 우영이 주수병을 찾아들자 먹음직한 베이글과 샐러드를 식탁에 늘어놓은 노먼이 우영의 옆으로 다가와 우영의 이마를 손으로 짚는다. “너 열 있어.” “그런 것 같아. 몸이 무겁고 나른하더라고.” “오늘은 쉬어. 목도 부었어.” “일단 출근해 보고.” “안 돼. 쉬어. 큰일 나. 너 어제도 밤새 끙끙거렸어. 내가 있길래 망정이지.” 우영에게서 주스병을 빼앗아든 노먼이 컵을 꺼내 주스를 따라 우영에게 먼저 주자 우영이 잔을 받아들고 식탁 의자에 앉는다. 그런 우영의 뒤를 따라온 노먼은 엘레나의 앞에는 컵만 달랑 내려두곤 주스병을 옆에 내려둔 채 우영의 목을 만졌다. “목 많이 뜨겁다.” “그래?” “응. 몸살인가 본데, 내가 회사에 연락해둘 테니 좀 쉬어. 병원 갈래?” “나가는 길에 들르지, 뭐. 오늘도 할 일이 많아. 하루 쉬면 내일 감당 안 돼.” “그 회사에 일하는 사람 너뿐이라냐? 쉬어.” 그렇게 말하며 노먼은 부드럽게 우영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그 손길에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주스를 따르던 엘레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잠깐만요. 그대로 있어요.” 하며 재빨리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은 엘레나가 빠르게 버튼을 눌러댄다. “너, 뭐하는 거야?” “닉쿤에게 전송하는 중이에요.” “왜?” “아, 닉쿤 사진은 대문짝만하게 실려서 우영이 보는데 우영 사진은 닉쿤이 못 보잖아요! 이건 불공평해요! 두 사람 다 봐야죠.” “뭘?” “바람피우는 거요.” “누가 바람을 피웠…….”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우영은 콜록거렸다. 목이 뜨거웠다. 거기다 잔뜩 말라 말도 한 마디 하기가 힘들 정도 엿다. “그 봐라. 너 하루 종일 통화하느라 그런 거야. 오늘은 쉬어.” “사교 담당은 나 하나라서 안 돼. 그리고 에반하고 닉쿤은 집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뭘.” “그 사람들은 연봉이라도 수백만 달라지. 넌 뭐야?” “내 능력이 모자란 탓이지. 나 준비해야겠다. 늦겠다.” “아냐, 우영, 너 오늘은 집에서 쉬어. 그대로 나가면 큰일 나.” “괜찮다니까.” “뭐가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갑자기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노먼 덕에 우영은 움찔해버렸다. 순간 우영이 다른 사람이 소리 지르는 걸 무서워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노먼은 화를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큰소리 내서 미안. 하여간 너 오늘 쉬어야 돼. 집에 해열제 없어?” “있어. 저기 거실 상자에.” “내가 찾아올게. 입맛 없어도 뭐 좀 먹어둬. 그리고 약 먹고 쉬어.” “우리집 치의사 불러올까요?” 엘레나도 걱정이 된 듯 그렇게 말했지만 우영은 순간 한숨을 내뱉었다. “주치의면 주치의고 의사면 의사지, 치의사는 뭐야?” “하여간요! 제가 전화하면 당장 들려와요.” “그렇겠지.” 안 그러면 총 맞을 테니까. “역시 난 좀 쉬어야겠다. 에반한테 전화해두고 좀 자야겠어.” “그래. 나도 아침 일찍 출판사에 나가야 하니까, 나갔다 들어올게. 11시쯤 끝날 테니 오는 대로 병원 가자. 아니면 브렛 불러줄까?” 노먼은 우영의 옆자리에 앉아 우영에게 포크를 챙겨주며 음식들을 모조리 우영의 앞으로 몰아주었다. 우영의 앞으로 모든 음식이 나열되자 엘레나가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음식들을 바라본다. 먹는 데에 한이 맺혔다는 세르게이의 말이 떠올라 우영은 베이글을 엘레나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순간 엘레나의 얼굴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이상하게 귀여운 애라고 생각하며 우영이 샐러드를 쑤시며 그쪽 사정을 전한다. “브렛 요즘 바빠. 대넌도 혈압 간당간당하고 브루스는 쓰러지고.” “그쪽은 또 왜 그래?” “클랜하고 재키 결혼 문제 때문에.” “아, 대강 얘기는 들었다. 브렛하고 우리아버지랑 대넌, 브루스 모두 유펜 알파베타감마 클럽 출신이지?” 순간 우영은 먹으려던 샐러드를 떨어트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알파베타감마 클럽은 아이비리그 내에 모든 대학 안에 있는 클럽이었는데, 대넌을 비롯한 그들 모두 같은 클럽 출신으로 스스로를 ‘형제’라 부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부……. “그 놈의 알파베타감마. 내가 언젠가 그 기숙사에 불 싸질러 버릴 거야.” 모든 악의 근원인 클럽을 아예 파멸시켜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우영이 전투적으로 샐러드를 먹기 시작하자 옆에 앉은 노먼이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물며 궁금한 듯 묻는다. “그런데 누구 결혼해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거 모르냐? 닉쿤 동생 클랜하고 레너드 가의 재클린이 결혼한다고.” “……신문은 봤는데…….” “보지 말고 읽으라니까.” 아마 사진만 보고 그냥 스캐들이라고 여겼을 게 분명해 우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엘레나가 입을 삐죽 내민다. “하여간, 결혼한다 이거죠? 언제예요?” “다음 주 일요일.” 그 말에 엘레나가 놀라 소리친다. “그렇게 빨리요?” “응. 왜?” “구두랑 드레스 사야 하잖아요!” “응?” “아, 파티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칵테일 드레스면 되죠? 구두는 뭘 신지?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썸씽 블루 새틴 구두 예쁜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는 좀 노티 나죠? 바바라 부이(Barbara Bui)도 예쁘긴한 데, 그보다는 크리스찬 르부탱(Christian Louboutin) 핍토 펌프스가 낫겠죠? 로에베(Loewe) 금색 스트랩도 예 쁜 데! 뭘 신죠? 살베토르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새틴 스트랩도 진짜 예쁜데. 드레스는 어디 걸로 할까 요? ” 결혼식이라니 신이 나 떠드는 엘레나를 보며 우영은 엘레나에게 압도당해 얼결에 눈을 껌뻑거렸다. “어, 아무 거나…….” “어디 디자인 좋아해요? 입생로랑이 좋아요? 아니면 샤넬? 아니면 프라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도 예쁘죠? 아니에요. 그런 결혼식에 그런 기성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어요. 오트구튀르를 입어야겠어요. 파리에 당장 오더 넣어야 겠어요.” 환상에 젖어 꿈을 꾸는 엘레나를 보며 우영은 “네가 결혼하는 거 아니거든?”이라고 현실을 일깨워주려다 말았다. “그래, 너야 뭘 입어도 예쁘니까…….” 물론 엘레나를 뭘 입어도 예쁜 거다. 슈퍼모델이니 모델 핏 사이즈를 어떻게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입으면 그만이다. 아마 제대로 꾸미도 나오면 신부를 압도할 정도로 예쁜 거다. 문제는 불행히도 엘레나 네브즐린은 결혼식 초대객 명단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클러치랑 목걸이랑 다 새로 사야겠다. 세르게이한테 카드 돌려달라고 해야지∼.” 혼자 신이 나 떠드는 엘레나를 보며 우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 타조가 브랜드명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제대로 말하고 있었다. 진짜 명품에 대해서만은 천재였다. “색은 결혼식이니 베이비 핑크가 좋겠죠?” “어, 응……. 네 마음대로…….” “아 신나. 오늘부터 쇼핑해야겠다. 우영은 무슨 옷 입을 거예요? 내가 한 벌 선물해도 돼요? 피부도 하얗고 체형도 가느니까 저랑 같이 베이비핑크로 입으면 잘 어울릴 거예요.” 순간 우영은 머리가 아찔해옴을 느꼈다. 클랜과 재키의 결혼식에 엘레나 네브즐린과 옷을 세트로 맞춰 입고 등장 한다니……. 말도 안 된다. 거기다 베이비 핑크 양복이라니, 입느니 죽겠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라는 게 있다. “엘리, 너 학교 안 가니?” “학교 따위가 뭐가 중요해요? 우영 나랑 옷 고르러 가요.” “……저기 난 말이지…….” 죽어도 그 옷만은 못 입어, 라고 하려는데 순간 의식이 아득해졌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그대로 암전 상태였다. **20편 완결 예정이었던 글이 이상하게 늘어나 중간 과정을 잘라먹으려다.... 결국 포기했습니다. ㅠㅠ ** 언젠가..... 끝나겠죠..... 어두운 밤이었다. 찬바람이 몰아치던 겨울의 어느 날, 새해가 막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대넌과 사라는 클럽 회원들과의 모임을 위해 전용기를 타고 지중해로 날아갔고, 에이먼은 친구들과 함께 왜인지 모를 아프리카 여 행을 간 상태였다. 그리고 클랜과 클레어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외가인 영국을 방문하러 간 덕에 저택 안에는 고용인들과 닉쿤, 그리고 우영뿐이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거대한 저택은 이상하게도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낮부터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나른다가 느끼던 우영은 우울한 기분에 옷장정리를 시작했다. 기분이 안 좋을 때엔 늘 옷 정리를 하는 게 버릇이라 옷을 전부 꺼내놓은 우영은 커다란 트렁크를 꺼내둔 채 그 안에 차곡차곡 옷가지들을 정리해 넣고 있었다. 한국에서 자신이 입고 왔던 옷가지들과 당장 필요한 옷가지와 속옷들을 챙겨 넣던 우영은 문득 가방 안쪽의 작은 주머니에 있던 사진을 꺼내 멍하니 그 안을 바라보았다. 낡은 사진 안에는 어린 자신과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나란히 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뒤로 펼쳐진 새하얀 자갈밭과 파란 강물.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그 광경에 우영은 그리운 듯 사진 속의 어린 소녀의 뺨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영은이었다. 자신의 이름은 희미하지만 여동생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서영은. 작고 예쁜 아이. 늘 자 신의 뒤를 따라와 작고 앙증맞은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마주 잡고 자갈길을 걷던 작은 아이. 아버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도 느낌도 목소리도, 심지어는 이 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다시 만난다 해도 못 알아볼 것이다. 기억나는 건 어린 여동생뿐이다.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네 사람들 말로는 엄마가 여동생을 데리고 떠났다고 했으니 어딘가에서 엄마와 함께 잘 살고 있을 거라 기대할 뿐이다. 이 아이는 행복하길 바란다. 자신이 불행했던 만큼 이 아이는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우영, 뭐해?」 두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안으로 닉쿤이 들어섰다. 그 소리에 놀라 서둘러 사진을 이불 속에 감추자, 컵 두 개를 들고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오던 닉쿤의 표정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려간다. 「그거 뭐야?」 「어? 어…… 그게…….」 어쩐지 그 사진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우영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을 돌리려는데 닉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 쪽으로 다가와 컵을 내려두곤 침대 위에 있던 가방 안을 쳐다보며 우영에게 묻는다. 「왜 짐을 싸? 입양 결정된 거야?」 그 말에 우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닉쿤이 갑자기 화를 내 뭔가 실수를 했나 싶었는데 트렁크의 짐 때문이었나 보다. 「아, 이거. 원래 여기에 정리를 하는 게 버릇이라서.」 「왜?」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짐을 다 풀면 다시 쌀 때 힘들잖아.」 아직까지 재입양 이야기는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우영은 생각했다. 입양을 하기엔 자신의 나이가 지나치게 많다. 게다가 한 번의 파양은 부모와 상성이 안 맞았다 할 수 하지만 두 번의 파양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다. 두 번이나 파양당한 동양인 아이를, 그것도 이제 열여섯이나 되는 아이를 입양할 가정은 없다.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복지사들 역시 재입양은 거의 불가능하다 얘기했다. 하지만 허르베지쿨 가에서 너의 후원을 맡았으니 넌 진짜 운이 좋은 아이라고 반복해 말했었다. 자신 역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렇다고 이 집이 자신의 집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습관처럼 옷을 늘 이 집에 갖고 들어온 커다란 트렁크에 하게 되었다. 언제 이 집을 떠나게 될지 모르니까 늘 짐을 싸두었다. 이 천국을 떠나게 되는 날이 다가왔을 때 다시 짐 을 싸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짐을 싸는 내내 울어 눈이 부은 채로 떠나야 할 것 같아서, 이 집 에 들어온 지 6개월이 되는 오늘까지도 몰래 옷들을 트렁크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하고 다정한 닉쿤과 헤어지는 건 진짜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우영의 설명을 들은 닉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뭐야? 난 또. 그럼 여기다 싸지 마.」 「왜?」 「앞으로 우리 집에서 살 거잖아. 이제 짐 풀어. 가방도 버리고.」 닉쿤은 확신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우영은 그렇다 말할 수 없었다. 「글쎄. 그건 어떻게 될지 모르지.」 「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저번 집에서도 다시는 파양은 없을 테니 짐을 풀라고 했는데, 짐을 풀자마자 양부모님들이 이혼하셨거든.」 씁쓸한 우영의 말에 닉쿤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멋대로 가방을 뒤져 안에 있던 옷들을 꺼내 침대 위에 집어던졌다. 거친 그 손길에 우영이 그를 만류하려 하자 닉쿤이 그 손을 뿌리치고 안에 있던 짐들을 모조리 꺼낸 뒤 트렁크를 끌고 나간다. 「닉쿤, 왜 그래?」 「이거 버릴 거야. 그리고 앞으로 너한테 트렁크는 안 줘. 네 집은 여기야. 앞으로 영원히 여기야.」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야.」 「내가 장담해.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다시는 짐 싸지 마! 보기 싫어!」 그렇게 말하며 닉쿤은 가방을 끌고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진짜 그 가방을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우영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서 닉쿤의 뒤를 따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닉쿤! 그거 줘!」 「안 돼. 넌 이제 우리 집 가족이야. 이런 거 필요 없어.」 「알았어. 이제 안 쌀 테니까 줘.」 「안 돼.」 「야!」 「안 되는 건 안 돼.」 매섭게 우영의 팔을 뿌리친 닉쿤은 평소답지 않은 냉랭한 얼굴로 돌아서 그대로 우영의 방을 빠져나갔다. 닉쿤의 차가운 태도에 차마 방을 나서는 그를 더 이상은 잡지 못한 채 우영은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닉쿤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조용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우영은 새벽녘에 조용히 열리는 방문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누구냐고 물을 기운도 없었다. 낮부터 계속해서 몸이 좋지 않았는데, 닉쿤이 화를 내고 방을 나간 뒤 더욱 안 좋아졌다. 온몸이 떨리고 피부가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 너무 아파서 계속해서 눈물만 나오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말 한 마디 내뱉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우영, 자?」 침대 바로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닉쿤이였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도 아프고 온 몸이 무겁고 나른해 꿈쩍할 기운이 없다. 입을 꾹 다문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자 닉쿤이 천천히 침대 맡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까는 미안.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음성이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몸이 떨려올 뿐이다. 「화났어?」 닉쿤이 조심스러운 투로 그렇게 물어왔다.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놀랐을 뿐이라고 말을 해주려는데 입술을 뗄 수가 없다. 「우영? 울어?」 이번엔 조금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리는 자신의 몸에 닉쿤이 놀란 듯했다. 「우영?」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이불이 끌어내려졌다. 아프다는 말도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자신을 바라본 닉쿤은 놀라 그대로 손을 뻗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너, 왜 이래? 열이 나잖아? 언제부터 그랬어?」 「…….」 「우영!」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그 이름에 겨우 겨우 입을 열었다. 「……아파. 너무 아파…….」 입을 열자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열이 심해서인지 눈물이 조절이 되질 않았다. 「의사 불러올게. 기다려.」 불덩어리 같은 몸을 만진 닉쿤이 방안을 뛰어나가려는 순간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닉쿤의 옷소매를 잡고 말았다. 「가지 마…….」 「의사 불러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려.」 「가지 마. 혼자 두지 마…….」 두려움에 찬, 끊어질 듯 이어지는 우영의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태세였던 닉쿤이 움직임을 멈추고 우영을 바라보며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끌어내린 이불을 잡고 우영을 꽁꽁 싸맨 뒤 우영을 뒤에서 꼭 끌 어안아주었다. 「이렇게 아프도록 왜 말을 안 했어? 바보야.」 이불 너머에서 울 듯한 닉쿤의 목소리가 들려와 우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아플 줄 몰랐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었다. 눈물을 쏟아내며 우영이 계속해서 몸을 떨자 닉쿤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우영에게 속삭인다. 「자. 우영. 어서. 쉿.」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고 다정한 그 음성에 겨우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져 흐르자, 닉쿤이 더 세게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걸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조용한 노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Don’t cry, baby don’t cry. There’s a sun behind the clouds you know Don’t cry baby, don’t cry `cause I hate to hear you cry It hurts me deep inside You know the way I feel, you know I love you so. 낮고 조용한, 부드러운 노랫소리. 닉쿤이 가끔 돌아가신 어머니가 불러주셨다며 흥얼거리던 그 노래였다. 울지 마, 아가. 울지 마. 구름 너머로 곧 해가 뜬다는 걸 알잖니. 울지 마, 아라. 울지 마. 네가 우는 건 싫어. 네가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걸 알잖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알잖아. 사랑하는 걸 알잖아……. “……모르겠어…….” 펄펄 끓는 물속에서 산 채로 끓여지는 느낌에 부들부들 몸을 떨던 우영은 이마에 올라오는 차가운 느낌에 겨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열이 높아서인지 눈앞이 흐리고 의식이 몽롱한 채였다. 아직도 귓가에 닉쿤이 부르던 『Don`t cry, baby.』가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낮고 조용한 그의 음성과 자신의 뜨거운 몸을 감싸 안았던 팔의 감촉, 나른하게 울리는 그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자신의 주변을 감싼듯 포근하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 우영은 앞에 선 남자를 보곤 살짝 표정을 굳혔다. “정신 들어?”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의 얼굴은 낯이 익은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그를 바라본 뒤 그의 이름을 기억해낸 우영은 순식간에 꿈에서 현실로 내팽개쳐진 듯 멍한 눈으로 노먼을 바라봤다. “네가…… 왜…….” “너 쓰러졌어. 에반한테는 내가 전화해놨으니 쉬고 있어. 출판사에 들렀다 다시 올 테니까 병원 가자.” 그제야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몸이 아픈 건 그때와 똑같다. 그 날 이후로 3-4년에 한 번 꼴로 이렇게 된통 몸살을 앓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열다섯 소년이 아니었다. 참 많은 시간이 흘러, 자신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옆에는 자신이 아플 때면 귀신처럼 알아채고 언제든 달려와 주는 닉쿤이 없다. 긴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복잡하게 바뀌어 있었다. “노먼, 그냥 가봐. 나 좀 쉴래. 그런데…… 엘리는?”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학교에 보냈어. 눈을 부릅뜨고 러시아어로 뭐라고 하는데 살 떨리더라.” 진력이 났다는 듯한 노먼의 말을 우영이 힘겹게 웃으며 재빨리 부정한다. “걔 러시아어 못해. 아마 급해서 이상한 말이 나갔을 거야.” “……그러냐?” “응.” “이상한 애네. 하여간 쉬어라. 핸드폰 꺼놨으니까 푹 자. 11시 쯤 들를게.” “됐어. 볼일 봐. 책 발간하는데 기념 사인회나 뭐 그런 것도 안 해?” “그런 거 할 처지냐? 하여간 다녀올게. 쉬고 있어.” “응.”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진다. 노먼의 친절에 감동한 우영이 순순히 답하자 노먼이 우영의 이마를 쓸어 넘겨주곤 방에서 나간다. 노먼의 등을 보면서도 우영은 편안함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의 앞에서 돌아서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노먼은 괜찮다. 아마 이골이 난 탓일 것이다.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 스트레스 주고 다시 사라지지만 결국 또 다시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나줄 테니까. 노먼에겐 그런 믿음이 있었다. 이 녀석은 어디 갖다놔도 절대 죽지도 않고, 전쟁 한복판에서 혼자 유유히 살아 오토바이 타고 돌아와 전리품이라며 해골을 선물해줄 것 같은 끈질 긴 생명력을 가진 녀석이었다. 그래서 편했던 것 같다. 언제, 어디선가 꼭 다시 만날 것 같은 친구, 그리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도 얼굴 본 순간 간지러운 인사말보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싸우고 화를 내도 좋을 것 같은 편안한 친구다. 그래서 노먼이 돌아서는 건 무섭지 않다. 하지만 닉쿤이 저렇게 돌아서면 자신은 상처 받을 것이다. 긴 시간을 함께 했던 만큼, 늘 자신에게 친절한 모습만 보여줬던 그인 만큼, 그가 냉랭하게 등을 돌리고 돌아서면 자신은 크게 상처 받을 것이다. 너무 아파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노먼과 닉쿤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게 우정과 사랑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리고 그게 닉쿤의 진심에 마냥 기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은 아직도 그 트렁크를 완전히 풀지 않았다. 마음속 한 켠에는 늘 커다란 트렁크에 짐을 싸두고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언제 떠나지 아프지 않게, 미련스레 뒤를 돌아보지 않게, 아파하지 않도록 마음을 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닉쿤을 떠난다면, 그리고 닉쿤이 떠난다면 많이 슬플 것 같았다. 사랑보다도 그 긴 시간의 정이 남아서,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준 깊은 애정과 상냥함에 목이 말라, 가슴이 아파 많이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짐을 완전히 풀어둘 수는 없었다. 우영에게 있어 만남이란 곧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 이불을 덮고 모처럼 숙면을 취하던 중 우영은 쿵쿵거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누군가 못을 박고 있는지 벽이 울려댈 정도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뭐야…….” 어지간하면 그냥 자고 싶은데, 소리가 너무 커서 겨우 몸을 일으킨 우영은 몽롱한 눈동자로 방 안을 돌아봤다. 순간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소음이 울려왔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어…….” 강도라도 들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우영은 현기증을 느끼곤 잠시 비틀거렸다.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몸이 뜨끈뜨끈하고 눈앞이 핑핑 도는 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하도 시끄러워 무시할 수가 없었다. 우영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겨우 방을 나와 소음의 근원지인 현관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막 다가가 문을 여는 순간 쾅 하고 문을 밀고 들어오는 남자에게 밀려 우영은 뒤로 두 걸음 정도 밀려나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 “노먼 어디 있어?” 이 김에 이 아파트를 부술 생각인지 사자후 같은 고함을 내지르는 닉쿤을 보며 우영이 머리를 부여잡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소리 지르지 마. 멀리 울려.” 다크서클이 볼까지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우영의 얼굴과 잔뜩 갈라져 팍팍해진 음성을 듣고 있던 닉쿤은 순식간에 험악하던 표정을 지우고 걱정스레 우영의 앞으로 다가섰다. “너, 왜 그래?” “왜 그러는지 몰라서 그래? 시끄러워. 꺼져. 잘 거야.” “왜 그래?” “왜 그러긴? 온 몸이 다 아파 죽겠어. 팔도 아프고 다리고 아프고 머리고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다 아파!” 그답지 않게 고함을 내지르는 우영을 바라본 닉쿤은 우영의 팔을 잡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흠칫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이렇게 열이 나?” “너 때문에 그러잖아! 너랑 클랜이랑 다 갖다 쓸어버릴 거야! 아파 죽겠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내지르던 우영은 다음 순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열이 나니 자꾸 눈물이 나고 몸이 아프니 마음이 약해져 제어가 되질 않았다. “왜? 아픈 거야? 병원부터 가야지, 그럼.” “나가. 잘 거야.” “병원부터 가야지.” 팔을 강하게 잡아끄는 닉쿤의 팔에 우영은 결국 참고 있던 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사흘 동안 연락도 안 하고! 얼굴도 안 보이고! 이상한 여자랑 사진이나 찍히고! 내가 얼마나 아픈 줄 알아? 진짜 아파 죽겠어! 아파서 죽겠단 말야.” 거기까지 말한 우영은 기어이 엉엉거리며 목을 놓아 울고 말았다. 머리는 흔들리고 앞도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열이 오른 채였다. 거기다 온몸이 다 아파 꼼짝도 하기 싫은데 갑자기 나타나 문까지 열게 만든 닉쿤이 원망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손가락 끝까지 저릴 정도로 아픈데, 진짜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치더니 아픈 사람한테 소리까지 내지른 닉쿤에게 살심이 들 정도였다. 엉엉거리고 우는 우영을 내려다본 닉쿤은 불덩이 같은 우영의 몸을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말로만 미안하다면 다야? 사흘이야! 사흘 동안 연락도 안 했어! 손가락이 부러졌어? 아니면 이빨이라도 몽창 빠졌어? 타조도 보내는 메시지를 넌 왜 못 보내? 세르게이도 꽃을 보냈는데 왜 넌 꽃도 없어? 노먼은 책까지 내줬는데 왜 넌 아무것도 없어? 메모 한 장, 메시지 하나 보낼 시간도 없어? 난 바빠 죽겠는데……. 아파 죽겠는데도 일하는데……. 넌 전화도 없고 여자랑 놀러 다니다 사진이나 찍히고! 클랜은 사람 속 박박 긁고 사고나 치고! 대넌은 시간마다 전화해서 괴롭히고! 이 주일 안에 결혼 준비를 하라는 게 말이나 돼? 내가 터미네이터냐? 내가 개조인간이야? 수퍼맨이야? 배트맨도 그건 못해! 그냥 타조랑 동물원이나 갈래! 빌어먹을 알파베타감마 클럽 다 불 싸질러 버릴 거야! 허르베지쿨 저택에도 내가 폭탄 터트릴거야!” 두서가 없는 말을 내뱉으며 엉엉거리며 우는 우영을 끌어안은 닉쿤은 안타까운 듯 우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네 목소리 들으면 당장에 달려오고 싶을 것 같아서 그랬어. 너무 너무 보고 싶은데, 시간은 없고, 미친 듯이 바쁘고……. 네 이름이라도 들으면 달려오고 싶어질 것 같아서 참았어. 전화도 못 했어. 미안해.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 “그러니까 네가 나쁜 놈이야. 사람을 그렇게 부려먹으면서 전화 한 통 못해? 어젯밤에 와인을 서른 잔이나 마셨단 말야. 이제 샴페인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다고! 또 그 놈의 구두는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거기다 왜 플루에서는 연락이 없냐고! 재키는 왜 살이 쪄서 드레스 가봉도 오래 걸리게 하는 건데!” 진짜 쌓인 게 많았는지 엉엉거리고 울면서도 줄줄이 원망의 말을 내뱉는 우영을 꼭 끌어안은 닉쿤은 그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미안해.”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제일 나빠. 왜 전화 안 했어? 전화만 해줬어도 힘내서 일했을 텐데. 네가 전화도 안 하니까 힘이 빠져서 못 하겠잖아! 너 때문에 일하는 건데……. 네가 부탁한 거 아니면 절대로 안 하는데…….” “그래,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 우영. 쉿, 이제 좀 쉬어. 휴가 줄게. 한 달, 아니, 일 년이라도 휴가 줄게. 쉬어.” 닉쿤이 조용히 달래며 우영을 꼭 끌어안고 상냥하게 속삭이자 조금씩 울음소리가 그쳐든 우영이 닉쿤의 목을 꽉 끌어안고 중얼거린다. “휴가 필요 없어. 네 재규어랑 람보르기니 줘.” “……그래, 줄게. 다 가져.” “영화관도 만들어줘.” “그래, 57층 샀어. 곧 공사 들어갈 거야.” “그리고 나 사라랑 한국에 갈 거야. 전용기로 보내줘. 한국 가서 내 동생 찾을래. 엘리 때문에 동생 보고 싶어 죽겠어. 살아있는지 보고 싶단 말야.” “그래, 알았어. 다 해줄게. 전부 다 해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네가 우니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두바이에도 갈 거야! 나도 두바이 7성급 호텔에서 쉬면서 놀고 싶어.” “그래, 가자. 내가 회사 때려치우고라도 데려가줄게.” “클랜 만나면 한 대 때려줘. 내가 겨우 겨우 다 해놨는데 다 망치려고 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던 우영이 클랜의 괘씸한 행동을 고해 받치자 닉쿤이 이를 으드득 간다. “알았어. 죽도록 패줄게.” “나, 아파. 너무 아파.” “그래. 쉬어. 내가 옆에 있어줄게.” “그러다 바쁘면 갈 거잖아.” “안 가. 까짓 거 몇 천만 달라 손해 본다고 안 죽어.” 까짓 몇 천만 달라라니 진짜 돈에 대해서만은 스케일이 큰 닉쿤이였다. 다른 때라면 놀라며 어서 가라고 했겠지만 지금만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너무 아파서, 닉쿤이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네가 박아. 너 돈 많잖아. 나 잘래. 어디 가지 마. 옆에 있어줘.” 가끔, 아주 가끔씩 열이 나 아프거나 할 때 늘 옆에 있어주었던 사람은 닉쿤이였다. 내색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약을 챙겨주고 병원에 데려가주고, 열이 내릴 때까지 손을 잡아주고.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고. 항상 그랬었기에, 몸이 아프니 닉쿤이 더욱 보고 싶었다.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어주었던 건 닉쿤뿐이었다. 그래서 더 서러웠던 것 같다. 이렇게 아픈데 닉쿤이 나타나지 않아서 화가 났던 것 같다. 스르르 우영의 몸에서 힘이 빠지자 닉쿤은 축 처진 우영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눈물로 얼룩진 눈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쉬어.” 마치 조건 반사처럼 닉쿤의 그 말에 우영은 의식이 멀어짐을 느꼈다. *** “……제발, 사라.” “병실이에요. 조용히 하세요.” “대체 뭐가 문제인데? 뭐가 불만이야? 내가 어떻게 해야 돌아와 줄 테요?” 한참을 달게 자다 정신을 차린 우영은 간절한 대넌의 목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봤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눈이 완전히 떠지지를 않는다. 뭔가가 눈꺼풀을 세게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이미 끝난 얘기예요. 아픈 애 앞에서 그만하세요.” “우영을 입양하지 않아서 그래? 하지만 그건 나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고.” 눈을 반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사라와 대넌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봤지만 두 사람은 우영이 눈을 뜬 걸 전혀 모른 채 대화를 이어갔다. “사정은 무슨 사정? 망할 놈의 백인 우월주의.” 빈정거리는 것도 아닌, 비난의 색이 역력한 사라의 말에 대넌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하도 조용한 성격이라 잊고 있었는데, 사라도 한 성격 한다. 사라는 백 마디 잔소리가 아니라 조용하게 내뱉는 한 마디가 독한 타입이었다.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 당신도 그건 알잖아.” “그럼 뭐가 문제였는데요? 우영이 당신 아이들보다 뭐가 부족해서요? 성적도 좋았고, 능력도 더 뛰어난 애였어요. 그런 애를 겨우 비서로 부려먹으면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요? 아니면, 우영 이름을 당신 유언장에 올리는 게 싫었어요? 우영이 그런 걸 바랄 애예요?” “아니라니까! 그렇지 않아도 우영에게도 재산은 충분히 물려줄 생각이었어. 솔직히 말해서 내 아들들만큼은 아니라도, 내 조카들만큼은 우영을 아낀다고. 아니, 당신하고 내 애들 다음으로 소중한 아이야.” 내 아들들하고 똑같아, 라고 말하지 않고 그 다음으로 소중하다는 솔직하기 짝이 없는 대넌의 말에 우영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너무나 그다운 말이었다. 그가 닉쿤나 다른 아이들만큼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면 웃겼을 텐데, 솔직하게 그에게 자신이 여섯 번째로 소중하다고 말하니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그게 얼마냐 싶다. “그럼 왜 죽어도 우영을 입양할 수 없다고 한 건데요?” “그게…… 당신은 모르겠지만, 내가 닉쿤이랑 약속한 게 있어. 10년 전에 닉쿤이 누굴 데려오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계약을 했다고. 그런데 그게 아무래도 우영인 것 같은데, 내가 우영을 양자로 들일 수는 없잖아? 우디알랜 사건도 아직도 그렇게 비난을 받는데 닉쿤과 진까지 그 꼴 나면 곤란하잖아.”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라며 두 사람은 여전히 우영이 눈을 뜬 걸 모른 채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진짜요?” 대넌의 대략적인 상황 설명이 끝나자 사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우영 역시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불행히도 눈이 너무 심하게 부어서 여전히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채였다. 닉쿤을 끌어안고 울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아무래도 너무 운 모양이다. “그래. 내가 그래서 얼마 전에 그 각서를 찾아 불태우려고 방을 다 뒤졌는데도 안 나오더라고. 아무래도 은행 금고에 넣어둔 것 같아.” 순간 사라의 얼굴이 더 엄하게 굳어졌다. 대넌은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더니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솔직하게 내뱉어버렸다. “한 번 약속을 했으면 끝이지, 그걸 왜 태워요?” “아니……. 난 그냥…….” “진짜 상종 못할 사람이군요. 자식과 한 약속도 지키지 않으려 하다니, 진짜 실망했어요, 대넌. 이혼을 더 확실하게 생각해봐야겠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라의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사정을 알고 나니 조금 화가 식는 듯 했다. “사라, 그러지 말고 제발 좀…….” “됐어요.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사라, 제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변덕인가 보죠.” “사라!” “시끄러워요. 애 깨요. 저 눈 부은 것 좀 보세요. 애를 얼마나 부려먹었으면 애가 얼굴이 저 모양이 돼요? 얼굴은 살이 쪽 빠지고 다크서클은 턱에 걸리고, 눈은 붕어처럼 팅팅 붓고. 그 예쁘던 애가 순식간에 개구리상이 됐잖아요.” 라며 사라가 항의하듯 우영을 손으로 가리키자 우영은 그냥 자는 척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어차피 눈을 뜨나 감으나 비슷한 상태라 입만 다물고 있으면 다들 잔다고 여길 듯했다. “내가 닉쿤 불러서 야단칠게. 그보다 사라, 대체 무슨 일인데? 응? 이유를 알아야 고칠 것 아니야?” 대넌 허르베지쿨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저 대넌 허르베지쿨이 ‘제발’이라고 애원하며 저렇게 설설 기다니, 진짜 사랑의 힘은 놀랍다. 하지만 사라가 그런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다. 사라의 고집도 남부럽지 않다. “병실에서 할 얘기는 아니네요. 그만 나가주세요. 전 우영이 깨어나는 거 보고 돌아갈 테니, 가서 일보시죠. 불쌍한 우영. 얼굴이 저 꼴이 되다니.” 눈 멀쩡하게 뜬 자신의 앞에서 개구리라고 소리치며 불쌍하다니……. 뭔가 묘한 기분에 우영은 그냥 멍하니 그들 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넌의 어택은 끊이지 않았다. “사라, 잠시 한국에 다녀올까? 가서 좀 쉬고 올래? 나랑 같이 한국 들러서 친구랑 가족들도 만나고, 일본하고 홍콩으로 돌아오는 건 어때?” “당신하곤 여행 안 가요.” “사라, 왜 이러는데 진짜?” “시끄럽다니까요.” 사라가 조용하고 명확한 어조로 대넌에게 닥치라는 말을 하는 사이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리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이게 뭐야? 이게 누구야? 우영, 세상에…….” 엘레나였다. 넌 또 왜 왔냐, 라는 생각에 우영은 치를 떨었다. “세상에, 이 팅팅 부운 눈. 이 까무잡잡한 피부! 피부만은 좋다고 인정했는데 꼬라지가 이게 뭐예요? 안 되겠어! 당장 마사지 담당자 불러야겠어요! 세상에, 이런 처참한 꼴이라니! 이건 119보다 더한 비극이야! 어떻게 얼굴 꼴이 이렇게 되냐고요?” 엘레나의 비통한 외침에 우영은 그냥 자는 척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근질거려 결국 말을 내뱉고 말았다. “……911이야.” 우영이 본능을 참지 못하고 엘레나의 말을 정정해주자 사라와 대넌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온다. “우영, 일어난 거니?” 사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뒤로 엘레나가 바로 이어서 중얼거린다. “아, 911……. 911, 맞다. 911. 하여간 일어났어요? 눈 떠 봐요! 왜 눈을 못 떠요? 눈알 빠진 거 아니에요?” 엘레나와 사라, 그리고 대넌이 동시에 내려다보는 게 선명히 보이는데 그들은 누구도 우영이 눈 멀쩡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영은 번거롭게도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눈 뜬 거야.” “네?” “눈 뜨고 있다고.” 그 말에 갑자기 엘레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려 한다. “어떻게 해! 불쌍한 우영! 눈알이 빠졌나 봐!” 분명히 눈은 멀쩡히 제 자리에 있다. 엘레나는 자신의 눈알이 빠졌으면 하고 바랐던 모양이다. “엘리, 그냥 눈이 부은 거야.” 침착한 우영의 말에 엘레나는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며 우영의 눈가를 살짝 찌른다. “어떻게 눈이 이렇게까지 부어요? 눈에 보톡스 맞았어요?” “……내가 너니?” “아, 여기 주름살 있다. 요기도 있고. 좀 맞아야겠는데요? 제가 잘 아는 데 있는데 소개해줄까요? 필러도 잘해 요. 저 입술에 필러 넣으려고요. 아, 우영도 아래쪽만 조금 넣으면 섹시할 것 같은데요? 퇴원하면 나랑 병원 갈래요? 아, 진짜 섹시하겠다.” 눈가와 입가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성형수술을 권하는 엘레나에게 우영이 퉁명스레 내뱉는다. “시끄러워. 넌 왜 온 거야?” “왜는요? 문병 왔죠.” “문병은 보통 조용히 오는 거 아니냐?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닉쿤 위치 조작했어요.” “……추적.” “아, 추적.” “그런데 닉쿤이 여기 있어?” 방 안에서 보이는 건 대넌과 사라, 그리고 엘레나뿐이었다. 아무리 돌아봐도 닉쿤이 보이지 않아 우영이 그렇게 묻자 엘레나가 옆에 앉으며 답해준다. “밖에서 비슷한 남자랑 싸우고 있던데요?” 비슷한 남자 누구? 라고 물으려는데 다행히도 뇌 상태 좋은 사라가 엘레나의 말에 추가설명을 해주었다. “닉쿤이 클랜하고 한바탕 하러 나갔어. 우영, 정신이 드니?” “괜찮아요, 이제. 푹 잤어요.” “세상에……. 가엾어라. 눈이 안 보이다니…….” 이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사라, 눈은 잘 보여요. 그냥 부은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부은 적은 없었는데.” “아파서 울었나 봐요. 울다 자서 많이 부은 것 같아요.” 열이 나면 우영은 우는 체질이었다. 그것도 아주 목 놓아 통곡을 한다. 보통 화는 잘 내지만 감정의 기복이 없는 편인데-노먼이 ‘네가 그 환경에서도 삐뚤어지지 않은 건 네 감수성이 바닥이라서야.’라고 할 정도로- 3, 4년 에 한 번 오는 몸살에 걸려 열이 오르면 미친 듯이 울고 만다. 그리고 한 번 그러고 나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 려서 인지 또 다시 담담해진다. 그러니까, 이 몸살은 일종의 스트레스 풀이 겸 감정을 폭발시키는 기회였다. 몇 년 간 고이고이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하면 열이 나며 끙끙 앓고 실컷 울고 만다. 아프지 않는 이상, 자신은 절 대 감정 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쌓이고 쌓인 게 한 번에 터지는 거다. 가만히 이번 몸살의 원인을 캐던 우영은 이게 다 닉쿤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부 닉쿤이 쓸데없는 고민을 늘려줘 자신을 현실 위에 묵직하게 내리누른 탓이다. 역시 람보르기니랑 재규어 정도로 끝내면 안 되겠다고 다짐 하던 사이 사라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정한 투로 말을 한다. “과로래. 일주일 휴가 내놨으니 푹 쉬어.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사라, 하지만…….” “아냐. 내가 해야지. 난 당연히 웨딩 전문 업체에 부탁했을 줄 알고 그냥 놔뒀는데, 널 이렇게 부려먹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말하며 사라가 찌릿하니 대넌을 노려보자 대넌이 어깨를 움츠리고 우영의 눈치를 슬슬 살핀다. “그래, 우영.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결혼 준비가 그렇게 복잡할 줄 몰랐지. 나머지는 킴하고 사라가 의논해서 해결할 테니, 넌 당분간 푹 쉬어라. 클랜하고 재키는 내가 한 번 혼내마. 그렇지 않아도 말썽을 부렸더라고.” ‘말썽’이라는 대넌의 말에 우영은 ‘대체 또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대넌에게 침착 한 투로 물었다. “무슨 말썽이요?” “별거 아니다. 이쪽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 넌 걱정 말고 그냥 쉬어.” 대넌이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우영도 그냥 귀찮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푹 자고 열도 내리긴 했지만 다른 생각 을 할 겨를이 없었다. 여전히 몸이 나른하고 무겁다. 잠도 쏟아진다. 닉쿤도 닉쿤이지만 과로도 이 몸살에 한 몫 한 건 분명하다. 너무 피곤하다. 진짜 죽을 만큼 피곤하다. 다시 스르르 감기는 눈에 졸음이 쏟아져 의식을 놓으려는데 청천벽력 같은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우영. 퇴원하면 우리 집으로 가요. 세르게이가 우영 데리고 와도 된대요.” “……응?” “간병인이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 집 사람들이 잘 간호해줄 거예요.” 순간 잠이 확 깬 우영은 검은 양복을 쭈욱 빼입고 기관총을 든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자신을 간호해주는 장면을 상상하곤 몸서리를 쳤다. 아니, 간병이고 양복이고 기관총이고 다 좋은데, 지금 자신더러 마피아가 되란 소리인가? “고맙지만, 사양할게. 세르게이한테도 아주 미치도록 고맙지만 정중하게 사양하겠다고 전해줘.” “왜요?” 너흰 마피아니까, 라고 하려다 우영은 대강 말을 돌렸다. “……두바이로 갈 거야.” “두바이! 좋죠! 나도 같이 가요.” 이 타조가 아무래도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아 우영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엘레나는 귀엽고 마음에 들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건 곤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박복한 생을 마피아와 한 패로 몰려 총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 “엘리, 말은 고맙지만…… 난 좀 쉬고 싶거든?” “그럼 우리 집으로 와요. 오빠가 이 김에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앉힌대요. 지금 받는 연봉 3배로 준다는데요? ” 그 말에 우영은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세 배?” “네. 우영이 적임자라고요.” “어…… 보험은?” “원한다면 들어줄게요. 생명보험하고 사고 보험. 유괴보험도 들어줄걸요.” 마피아가 되는 건 싫지만, 진짜 절대로 싫지만 슬슬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연봉 세 배에 보험까지. 격하게 끌린다. “……위험수당은?” “위험수당은 그만큼 쳐주죠. 저번에 우리집 폭발할 뻔했었거든요. 뒤에 보트장에서 폭탄이 터져서 그 뒤로 위험수당 많이 줘요! 진짜 보트가 하늘로 떠올랐다니까요! 푸하하하.”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아주 화통하게 웃는 엘레나를 우영뿐 아니라 대넌과 사라도 기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타조가 될 수밖에 없긴 하겠다, 라고 우영은 순간 엘레나를 이해하고 말았다. “그게 웃을 일이냐?” “그래도 저택은 안 터졌는데요, 뭐. 정원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진 적도 있어요. 아, 저 런던 쇼에 나가는데 비행기에 폭탄 설치된 적도 있었고요.” 너무나 해맑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공중에서 사지가 분해될 뻔한 이야기를 하는 엘레나를 보며 우영은 전직에 대한 미련을 접기로 했다. “……아무래도 난 비서가 천직인 것 같다.”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요. 오빠도 당신 이상 가는 적임자가 없다고 침 흘리고 있어요.” “내가 왜 적임잔데?” “비서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그게…….” 엘레나가 막 뭐라고 설명을 하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닉쿤이 엘레나를 보곤 인상을 확 찡그린다. 그리고는 느긋한 투로 내뱉는다. “어이, 새대가리! 병원은 조류 출입 금지야!” 그 말에 엘레나가 병실을 휙휙 돌아본다. “여기 새 있어요?” 전혀 못 알아듣는 엘레나를 바라보며 닉쿤은 아주 친절하게도 그가 말하는 조류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너 말야, 타조. 나가.” “……타조라고요? 내가 타조요? 우영, 내가 타조 같아요?”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는 닉쿤의 손가락에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우영에게 되묻자 우영은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엘레나를 타조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자신이었다. 게다가, 엘레나는 진짜 타조를 닮았다. “……솔직히 아니라곤 말 못하겠는데…….” “내가 어디가요?” “키 크고 팔 다리 길고 마르고 얼굴 작은 게…….” 괜히 미안해져 우영이 말을 흐리자 침대 옆으로 다가선 닉쿤이 엘레나를 밀어내며 우영이 차마 다 못한 말을 대신 한다. “어딜 봐도 타조지. 특히 뇌가.” 닉쿤은 그 말을 끝낸 뒤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 양복 재킷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셔츠에 넥타이도 반쯤 풀어 내린 채 소매 역시 걷어 올린 채라 우영이 “재킷은?” 라고 묻자 닉쿤이 “세탁.”이라고 말하며 우영의 퉁퉁 부운 눈가에 입을 맞춘다. 그 사이 머리 정리를 끝낸 엘레나는 다시 우영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타조가 그렇게 생겼어요?” 순간 우영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설마, 아무리 엘레나라도 타조를 모를까. 직접 본 적은 없어도 텔레비전으로 사진으로 수없이 봤을 그 타조를, 설마 본 적이 없을까, 라고 자신에게 묻다, 문득 다른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엘레나라면 타조를 봤어도 기억 못할 수도 있다. 애초에 타조-Ostrich-라는 단어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을 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Austria)는 알아도 오스트리치는 모를 애다. 아니, 어쩌면 오스트리아도 모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스트렐리아(Australia)도 모를지도 모른다. 대체 아는 게 뭘까. “타조 본 적 없어? 오스트리아 말고, 오스트리치.” “……다 아는 거예요?” 아마 엘레나 빼고 전 세계인이 다 알 것이다. “대부분이 알걸?” “유명한 거예요?” 순간 우영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유명하다면 유명하지만, 타조를 유명하냐고 묻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던 터라 뭐라 답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졌다. “……유명하긴 하지.” “그래요? 난 또. 뭐, 그럼 괜찮아요.” 금세 새대가리의 충격을 떨쳐낸 엘레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새대가리에 조류, 타조라는 폭언을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엘레나의 대범함에 대넌과 사라가 입을 쩌억 벌린다. 하지만 그들의 경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병실에 있던 이들에게 연타로 그녀의 순결한 뇌를 자랑했다. “그런데 조로가 뭐예요?” 비꼬는 것도 상대가 어지간해야 먹히는 거다. 그런 면에서 엘레나는 진짜 최강이었다. 자신은 박복해 박명하겠지만 엘레나는 진짜 복이 터져 아주 오래 살 애다. “……엘레나 늦겠다. 집에 가봐라.” “에? 방금 왔는데요? 아, 나 구두 샀어요. 루부탱 매장 통째로 털었거든요. 자랑하고 싶어서 왔는데.” 그 말에 우영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어쩐지 엘레나가 털었다니 진짜 오빠랑 기관총 들고 매장에 들어가서 돈이 아니라 구두를 모조리 쓸어 담아 왔을 것 같다. 진열대를 통째로 옮겨놓고 자랑할 것 같은 엘레나의 기세에 닉쿤이 재빨리 말을 자른다. “그만 가. 아픈 사람 앞에서 무슨 자랑을 해?” 야박할 정도로 냉랭한 닉쿤의 말투에 결국 엘레나도 버티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어요. 갈게요. 우영, 빨리 나아요. 나랑 같이 양복 맞추러 가요. 제가 아주 예쁜 베이비 핑크 드레스를 봤거든요? 우영이 같은 색 양복 입으면 진짜 예쁠 거예요.” 절대 입고 싶지 않았던 옷인지라 우영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쓰게 웃으며 답하지 않고 버티자,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던 엘레나가 한 번 더 돌아보곤 결정차를 날린다. “아, 그리고 퇴원하면 나랑 필러 맞으러 가요.” “……어서 가라.” “거기 필러 잘해요. 브리트니가 맞은 필러랑은 수준이 달라요. 진짜 안젤리나 졸리 입술처럼 해줄 거예요.” 우영은 순간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뭔가 자신의 얼굴에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이 오버랩되자 괴물이 연상된다. 절대 싫다. “어서 가.” “갈게요. 나중에 봐요~.” 정신없이 쳐들어와 발랄한 인사말을 남긴 엘레나는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병실을 나서 복도를 걸어간다. 엘 레나가 떠나자 비로소 우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싫은 건 아닌데, 이상하게 엘레나랑 있으면 정신이 없다. 아주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입을 다물고 있던 대넌이 겨우 그 침묵을 깬다. “엘레나 네브즐린 맞지?” “네.” “참…… 독특한 아이구나. 파티에서 봤을 때는 상당히 도도하던데…….” “매니저가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을걸요. 말하면 산통 다 깨지니.” “그럴 만하구나.” 그렇게 말하며 대넌은 작게 “나도 압도당했어.”라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그만 들어가 보세요. 사라도 쉬어야죠. 제가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가세요.” 닉쿤의 선언에 사라가 걱정스러운 듯 닉쿤을 돌아본다. “바쁘지 않아?” “일정 취소했어요. 우영하고 저랑 일주일 휴가 받았습니다.” 휴가를 그렇게 맘대로 내도 되냐고 우영이 물으려하자, 그 전에 대넌이 먼저 묻는다. “너, GATH사는 어쩌고?” “될 대로 되라고 하세요. 이제 와서 변덕 부리는 영감 비위 일일이 맞추기도 힘드니까요.” “……그 친구도 참……. 그쪽은 내가 손써 보마. 사라, 우린 이만 나가보지.” “그래, 갈게. 우영, 저녁 때 식사 준비해올게.” “그건 걱정 마시고 가세요. 클랜과 재키가 사고를 대량으로 쳐놔서 처리하기 좀 힘드실 겁니다.” “왜?” “……가보시면 알아요.” “어느 정도길래?” “파리지엔이니 뭐니 하며 거지처럼 떠돌며 살라고 맨몸으로 프랑스 상공에다 던져버리고 싶던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닉쿤은 진짜 화가 나 있었다. 그게 확연하게 느껴져 우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닉쿤을 바라봤다. 대체 클랜이 또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클랜이 친 사고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참으로 걱정되기 그지없었다. 클랜의 비서들이 누가 될지 진짜 불쌍하다 못해 염불을 외워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 일 더 커지기 전에 가봐야겠다. 우영, 나중에 보자.” 사라가 불안한 듯 서둘러 인사를 마친 뒤 병실을 빠져나가자 대넌 역시 손을 흔들며 사라를 따라 조르르 병실을 나선다. 여전히 눈이 반도 떠지지 않은 채 우영은 닉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대체, 클랜하고 재키가 무슨 짓을 해놓은 거야?” “넌 신경 쓰지 마.” “궁금하잖아. 대체 무슨 사고를 쳐놨는데?” 우영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옷을 잡아끌자 닉쿤이 우영의 붕어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녀석이 너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리에 초대장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카드를 받아다 봉투에 넣었나봐. ” “그런데?” “그런데, 이 머저리들이 초대장이 너무 많으니 아예 다 봉투에 넣어두고 순서대로 붙인다고 했는데 중간에 뭐가 하나 꼬여서 다들 엉뚱한 주소에 가 붙은 모양이야.” 차분한 닉쿤의 설명에 우영은 비명을 내질렀다. “뭐?” “그래서 지금 비상이야. 멍청한 것들이 또 손은 빨라서 천 장을 다 붙였대. 마지막 장은 확인하겠다며 카드와 주소를 확인하다 안 맞으니 부랴부랴 뜯어봤나 봐. 그래서 전부 도루아미타불. 그 중에 또 카드 몇 개를 잃어버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확인해야 되게 생겼어.” 우영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저도면 대형 사고다. 결혼식은 다음 주다. 최소한 모레까지는 초대장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러다 큰일 나게 생겼다. 왜 하필 눈을 떠도 이렇게 더러운 때 눈을 뜬 걸 까 싶어 우영은 자신의 박복함을 다시 한 번 저주했다. 그 일처리라도 누가 한 뒤에 일어날걸. 어쩌면 이렇게 지지리도 운이 없을까. “진짜 그 녀석들은 가만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건데…….” “내버려둬. 자기들이 친 사고니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클랜이 그런 능력 없는 녀석도 아니고. 친구들 모아서 알아서 하라고 했어.” “그런데 카드가 다 나왔을 정도면 나 얼마나 잔 거야?” “하루 꼬박. 이제 금요일이야.” 그 말에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뭐?” “내일까지는 입원해야 돼. 아무 생각 말고 쉬어. 네가 몸살이 낫다는 건 정신도 극한에 치달았다는 거야. 아무 생각 말고 쉬어.” 맞는 말이었다. 아니, 사실은 몸보다 정신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누구한테 터놓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대는 게, 자신의 가장 안 좋은 버릇이었다. “……그래. 알아서 하겠지. 나도 모르겠다. 너무 피곤해.” 우영도 이젠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한 채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어지간해야 걱정을 하지, 도무지 대책이 안 서 니 알아서 하라는 말밖에는 안 나온다. 어쨌든 사라와 킴, 그리고 전문가들이 대규모로 붙으면 잘 해결될 것이다. 일단 자신은 쉬어야 한다. 쉰 뒤에 뭔가를 생각하든 결정을 내리든 해야 한다. 이대로는 주변 사람들에 치어 쓰러져버릴 것이다. 우영이 피곤한 듯 숨을 내뱉으며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침대 옆에 기대앉은 닉쿤이 우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용히 속삭인다. “퇴원하면 우리 집으로 가 지내.” 갑작스러운 그 말에 우영은 눈을 뜨나 감으나 별 차이 없는 눈을 겨우 뜨곤 닉쿤을 바라보며 무뚝뚝한 투로 되물었다. “내가 왜?” “혼자 지낼 수는 없잖아. 이렇게 아픈데.” “됐어. 아픈데 넓고 어색한 남의 집은 불편하기만 해.” “우리 집으로 가. 잠깐 눈을 떼면 아프니 떼어둘 수가 없잖아.” 안타까운 듯 그럴 듯한 말을 내뱉는 닉쿤의 손을 피해 휙 돌아누운 우영은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슨 헛소리냐는 듯 퉁명하게 받아쳤다. “나 너 없는 3년 동안 잘 살았거든?” “많이 아팠잖아, 그때도.” 닉쿤이 워튼 스쿨에 다니던 3년 간 열다섯 살 때부터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한 달 이상을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그때 우영은 꽤 자주 시름시름 앓았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러다 병을 쌓아 한 번 죽도록 아팠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딱 지금처럼 아팠었다. 그때 닉쿤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던 때라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연락을 하면 당장에 달려올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닉쿤은 그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클랜이 말을 안 했을 리가 없다. “누가 그래?” “클랜한테 들었어.” “……그런 놈이 전화도 한 통 안 하냐?”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올라 우영이 울화통을 터트리자 닉쿤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왔었어.” “언제?” “새벽에 와서 너 자는 것만 보고 갔어. 너 눈 뜬 거 보면 가기 싫어질 것 같아서.” “거짓말.” 또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라고 중얼거리며 우영이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자 닉쿤이 침대 위로 누우며 이불 속의 우영을 그대로 폭삭 끌어안는다. 15년 전의 그 날처럼, 다정한 체온이 다가왔다. 그것만으로도 울컥해져 우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진짜야. 너무 아파하길래 옆에 있다 열 내리는 것만 보고 돌아갔어. 나도 참 무던히 노력했거든. 10년만 기다리자. 10년 동안 버텨보자. 10년 동안 안 되면 운명이다, 이러고. 독한 척 굴려고 해도 그게 안 되더라.” 진 역시 이미 대넌과 클랜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그 10년이 어떻게 된 10년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으로서는 그게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을까. 만약, 닉쿤이 흔들리던 그때 말을 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그때 말을 했다면, 그리고 기다려달라고 했다면, 그 정도의 각오였다면…… 기다려달라는 한 마디면 됐는데. 그럼 그렇게 마음고 생하며 포기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 놈의 10년…….” 억울함에 우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닉쿤은 우영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인정해. 널 떨쳐내려고 그랬어. 사실은 자신이 없었거든. 10년 뒤의 내가, 그때도 여전히 널 사랑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어. 스무 살의 애송이가 어떻게 서른 살을 기약할 수 있었겠어? 그 감정의 깊이도 알지 못한 채 어설픈 고백으로 널 상처 주는 건 싫었으니까. 장담할 수 없는 내 미래를 네게 약속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 넌 그런 놈이야.” 철저한 완벽주의자. 100%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일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는 안전제일 주의에, 조금의 틈도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녀석. 이가 갈리도록 지독하고 완벽한 녀석. 그래, 그게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웃고 떠들며 모든 사람들에게 유쾌하고 재미있는 친구로 인식된 닉쿤이 사실은 어떤 야망을 품고 있는지, 그 야망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 건지, 그리고 닉쿤 자신이 본 인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다. 가끔씩 비치는 그의 오만하기까지 한 자신감은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니까, 그는 모든 걸 다 갖고, 모든 이들의 우위에 서는 게 당연한 인간이었다. 그런 거리감이 싫었다. 그리고 닉쿤이 돌아서는 순간 자신을 타인 대하듯 할까, 너무 무섭다. 항상 가까운 곳에서, 너무 친밀하게 붙어 있던 탓에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와 자신의 격차는 너무 크다. 그 간극을 메울 수가 없다. “그래, 난 그런 놈이야. 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특히나 너에 대해서는 더욱 그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넌 몰라. 넌 날 포기했다고 했지? 하지만 난 포기하지 못했어. 10년 아니라 100년을 노력해도 안 될 거야. 너는 날 포기해도 난 널 포기할 수가 없어. 너는 날 잊어도, 난 널 못 잊어. 네가 날 떠나도, 난 기 다 릴 거야, 아마. 네가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고 말거야.” 작고 낮은 속삭임에 우영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실컷 떠들라는 듯 이불 속으로 파고들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닉쿤이 계속해서 부드럽게 말을 이어간다. “만약 네가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걸 보면서 기다렸을 거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만약에 10년 뒤에 네가 결혼했다면, 다른 연인이 있다면 다시 10년을 기다리자고 했어. 그리고 그 후에도 다른 사람이 있다면 또 다시 10년, 그리고 또 10년.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으니까……. 네가 행복하다면 기다릴 테니까……. 불행해지면 나한테 돌아오면 된다고. 그때는 내가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달콤한 그 속삭임에 우영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작은 진동에 닉쿤은 더 세게 우영을 품에 끌어안았다. “노트북의 라이언 고슬링처럼, 평생을 너와 함께 하고 싶었어. 네가 내 옆에 없더라도 네 모든 것을 기억하며, 네 침대 맡에 장미 한 송이를 놔주는 꿈을 꾸며 매일을 기다렸을 거야. 그리고 어느 날 함께 손을 잡고 최후를 맞이하는 거지. 매일 매일을 다시 기억하면서, 다시 사랑하면서, 네가 날 잊어도,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조용하고 상냥한 속삭임에 우영은 지끈거리는 심장의 고통을 참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었다. “……뻔뻔하긴. 라이언 고슬링을 어디다 갖다 대?” “끝난 게 아니었어. 지금도 끝난 게 아냐.” 라이언 고슬링의 대사를 그대로 읊조리는 닉쿤의 음성에 우영은 입술을 꾹 깨물며 일부러 퉁명스러운 투로 받아쳤다. “끝나는 사람도 있어.” “난 끝나지 않았어. 10년이 아니라 20년, 3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거야. 이제는 확신할 수 있어. 이 사랑이 절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나쁜 자식.” “미안.” 한동안 우영은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불 속에 틀어박힌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고요함에 닉쿤은 우영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안타까운 듯 속삭였다. “울지 마.” “안 울어.” “……그럼 뭐야?” 우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 고요함이 마음에 걸린 듯 닉쿤이 이불 위로 우영의 몸을 쓰다듬으며 머리에 입을 맞췄다. “울어?” “안 울어.” “그럼 얼굴 보여줘.” “귀찮아. 잘 거야.” “우는 거네.” 끈질긴 닉쿤의 눈물 타령에 결국 이불을 재치고 일어난 우영은 퉁퉁 부은 얼굴로 닉쿤에게 사납게 소리쳤다. “봐! 안 울지? 그러니까 좀 비켜. 자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더니 슬슬 잠이 오는 듯해 우영은 닉쿤을 침대 위에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닉쿤은 침대에서 내려갈 생각은 없는 듯 그 자리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큰일 났다.” “또 뭐가?” “눈이 아예 안보여. 어디 잘못 된 거 아냐? 이건 너무 심한데. 하치 이야기 봤을 때보다 더 심해.” 4년 전, 우영은 닉쿤의 집에 앉아 같이 본 일본 영화에서 하치라는 개의 주인이 죽은 뒤부터 시작해 거의 한 시간 동안을 엉엉거리며 울다, 하치가 주인을 기다리며 죽는 장면에서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울었었다. 보통 최루성 신파는 비웃는 우영이지만 유독 개 이야기나 버려진 아이 이야기에는 약해 그런 영화는 시작 전부터 티슈 두 박스를 놓고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나 그 영화는 심각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영은 결국 울다 잠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음 날 눈 상태는 대단했다. 거의 눈을 뜨지 못했던 그때보다 더 심하다, 라고 닉쿤이 말하자 우영이 놀라 되묻는다. “……그 정도야?” “응.” “거울 좀.” 우영이 손을 뻗자 침대 옆의 테이블 서랍에 있던 서랍을 꺼낸 닉쿤은 그 거울을 들어 우영의 얼굴을 비쳐주었다. 작은 거울 위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우영은 히익- 하며 조금 뒤로 물러나 앉았다. “으아……. 심하다……. 웬 외계인이…….” 이러니 사라와 대넌이 눈을 뜬 줄도 모르지.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하긴 해 우영이 뚫어져라 거울을 들여다보자, 닉쿤이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눈이 잘못된 거 아냐?” “아냐. 눈은 멀쩡해. 아프지도 않고 아주 잘 보여. 그래도 너무 심하긴 하다. 이게 개구리야, 사람이야?” 눈알 빠졌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어떻게 아면 눈이 이렇게 붓나 싶어 빤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가를 살피자 닉쿤이 침대에서 내려서 냉장고로 다가간다. “얼음 좀 올려놔 봐.” “아, 내버려둬. 그냥 잘래.” “안 돼. 그대로 자면 더 부어.” 여기서 더 부으면 진짜 붕어다. 큰일 난다. “……그건 안 되지.” “얼음 팩 올려놓고 좀 자. 볼 살이 다 눈에 가서 붙었냐? 그 꼴이 뭐야?” 조금 로맨틱한가 싶더니 평소의 닉쿤로 돌아왔다. 짓궂고 장난스러운 그 말에 우영은 거울을 내려놓으며 닉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너 진짜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거 알아?” “그래도 날 사랑하잖아.” 밉살맞은 그 답에 다시 거울을 들어 얼굴을 살피던 우영은 퉁퉁 부운 눈을 보다 슬쩍 시선을 내려 입술을 바라봤다. 핏기가 가셔 파리한 그 입술을 손끝으로 쓰다듬던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필러 맞아볼까…….” “뭐?” “……아냐.” 얼음 팩을 들고 우영의 옆으로 다가온 닉쿤은 우영이 침대에 눕자 눈가 위에 얼음 팩을 올려놨다. “좀 가라앉아야 사람 같은 텐데.” “……너 자꾸 시비 걸어라.” 이게 진짜 나 사랑한다는 놈 맞나 싶어 우영이 이를 갈며 응수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옆에 놓인 긴 의자에 앉은 닉쿤이 “네.”라고 답하자 우영도 눈가에서 얼음 팩을 치우고 문 쪽을 돌아봤다. 그 사이 문이 열 리며 이번엔 거대한 나무 한 그루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진짜 나무였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화분에 있는 아주 커다란 나무였다. 순간 우영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어디선가 본 광경이었다.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았다. “우영 케이먼 씨 병실 맞나요?” “네, 맞는데…… 그게 뭐죠?” “편백나무입니다. 세르게이 네브즐린씨가 배달시키신 겁니다.” 그렇데 말하면서도 화분을 옮기는 남자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대체 이건 뭐야, 라는 얼굴이었다. 우영이 보 기에도 이게 뭔가 싶었다. 2미터가 조금 넘을 것 같은 나무를 낑낑대며 병실 안에 옮기는 남자들을 보며 우영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브나 난 같은 작은 화분은 병실에 자주 보내지만, 저렇게 큰 나무를 병실에 보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게다가 저건 아무리 봐도 정원이나 공원에 심어야 할 나무였다. “저기, 그런데…… 네브즐린 씨가 저 나무를 왜…….” 처음 세르게이 네브즐린을 만났을 때 느꼈었던 그 기묘한 오싹함을 다시 느끼며 우영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남자가 진까지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한다. “저희도 모릅니다. 그냥 이 나무를 보시더니 통째로 뽑아서 이 병실로 배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뽑아서’라는 건 분명히 저게 화분에 심는 나무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죄송한데 그게 어디 있던 나문데요?” “센트럴 파크에요.” 순간 우영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이유로 멀쩡한 센트럴파크에 멀쩡하게 심어졌던 나무를 뽑아 자신에게 보낸 걸까.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말 안 들으면 너도 이 나무처럼 뿌리 채 뽑힌다는 뜻일까? 아니면 러시아식 협박의 한 방법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권리로 공원에 있는 나무를 뽑는단 말인가? “그거 위법 아닌가요?” “돈은 지불하셨습니다. 하여간 사인 부탁드립니다.” 뭐 씹은 얼굴로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본다는 듯한 남자가 내민 영수증에 우영이 사인을 하자 남자가 다른 일꾼과 함께 병실에서 나간다. 그들을 바라보다 다시 나무를 돌아보고, 그리고 이번엔 닉쿤을 바라본 우영은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닉쿤을 바라봤다. 하지만 닉쿤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인상을 쓰며 그 나무를 바라볼 뿐 우영을 돌아보지 않았다. “세르게이……. 결국 이렇게 나오는군.” 닉쿤의 중얼거림에 우영은 서둘러 닉쿤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저 사람이 왜 저러는데?” “……그런 게 있어.” “뭐가 그런데? 나 무서워!” “……널 스카웃하고 싶어 했어. 예전부터.” “날 왜?” “가정교사로 쓰고 싶다고.” “타조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죽을란다.”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좀 가르쳐도 괜찮을지도, 라고 생각했지만 방금 전 병실에 나타나 “조로가 뭐예요?”라 고 묻는 순간, 포기해버렸다. 아무리 자신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엘레나를 가르칠 수는 없다.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아마 엘레나를 가르치다가는 수명이 반으로 줄어들 게 뻔하다. 불안함이 가득한 우영의 얼굴에 닉쿤이 뭐라고 중얼거리다 말을 끊는다. “……타조가 아니라…….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쉬어. 세르게이랑은 내가 얘기할 테니.” “어떻게?” “내가 말할게. 넌 걱정 말고 쉬어. 그리고 눈 좀 어떻게 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제발 빨리 전화해서 저 나무 좀 다시 뽑아가라고 해. 무서워 죽겠어. 저 나무에서 밤중에 귀신 나타날 것 같아. 예전에 그 영화 있었잖아, 가디언(The Guardian). 나무껍질 뒤집어쓴 여자가 사람 죽이는 거. 나무 자르니까 막 피가 터지고, 아이들의 시체가 나무 아래 묻혀있고. 저 나무 아래에도 아기들 시체가 묻혀 있는 거 아냐?” 순간 닉쿤은 진심으로 우영의 집에 있는 텔레비전을 부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애써 웃으며 우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게. 그러니까 걱정 말고 좀 쉬어.” “나 진짜 그 사람 무서워.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든단 말야.” 우영의 그 말에 닉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묘한 얼굴로 우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영의 예감은 아주 정확했다. “……어쩌면 너한테는 진짜 무서울 수도 있겠다.” “너, 뭐 알지? 아는 거지? 뭐야?”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러니 제발 눈부터 어떻게 해. 웃겨 죽겠어.” 그렇게 말한 뒤 닉쿤은 진짜 피식 피식 웃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우영은 그 웃음에 약이 바싹 올랐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사흘 못 봤다고 그렇게 엉엉거리며 울다니. 진짜 큰일이다.” “너 보고 싶어서 운 거 아니거든? 나 열나면 우는 거 알잖아?” “거짓말 안 해도 돼. 이제 하루도 안 떨어져 있을게. 매일 꼭 붙어 있을 테니 울지 마, 아가.” 닉쿤이 그렇게 말하며 우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야!” “What can I do to make you happy?” 가볍게 시작한 멜로디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닉쿤의 낮고 상냥한 음성에 맞춰 부드럽게, 꿈처럼 이어진다. What kind of clown thing can I do? Wiggle my ears, and make them flappy? My humor is sappy, won’t you sit on my lappy. and don’t cry baby, boo hoo. “치사한 자식…….” 계속해서 이어지는 노랫소리에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15살의 그 날 이후 저 노래를 들으면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약해지고 말았다. 특히나 닉쿤이 저 노래를 부르면 뭐든 다 용서해버리고 만다. 닉쿤은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울화가 치민다. “내가 애냐? 이제 그런 노래 안 통해.” “좋아하잖아, 이 노래? 내가 노래 부르는 건 더더욱 좋아하고.” 모두 사실인지라 우영은 더는 말하지 않고 다시 침대에 누워 얼음 팩을 눈가에 댔다. 우영을 바라보고 앉은 닉쿤 은 우영의 손을 꼭 쥔 채 남은 곡을 마저 불러주었다. 감미롭고 부드럽게, 상냥하게 다정하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영은 슬슬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어이, 괜찮…….” 우영이 입원한 지 사흘 째, 우영이 퇴원하기 전에 겨우 시간을 내 병실을 찾은 에반은 방을 한 가득 채운 꽃과 선물, 그리고 병실 안에 우뚝 선 정체불명의 나무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이건 뭐야?” 멍한 얼굴로 묻는 에반을 돌아본 우영 역시 창가에 서서 한숨을 푸욱 내뱉는다. “위문품들. 좀 이따 퇴원해야 하는데 이걸 어쩌라고.” “와우……. 대단한데. 존 에스터에, 매니 플락, 조지 메이든. 루크 스틸러. 너 인맥 끝내준다.” 꽃을 시작으로 고급 크리스털로 만든 조각품과 만년필, 그리고 쾌유를 비는 의미에서 보낸 메시지들이 가득 찬 방을 돌아본 에반은 카드에 쓰인 거물들의 이름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닉쿤이 입원해도 이보다는 못할 걸. 대단한데?” “나도 놀랐어. 이제 다들 내가 보내는 선물들인 줄 알았나 봐.” 어차피 자신이 닉쿤을 대신해 모든 선물과 카드, 메시지 등을 감당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 듯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자신의 입원 소식에 이렇게 줄줄이 선물과 꽃을 보낼 줄은 몰랐던 터라, 우영은 솔직히 당황하고 있었다. 기분은 좋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건 사실이다. 차근차근 선물과 꽃 위에 걸린 카드를 돌아보던 에반은 병실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서다 문득 생뚱맞게 놓인 거대한 나무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이 나무는 뭐야?” 그렇게 말하며 혹시나 모형인가 해 나무를 두드린 에반은 맑고 묵직한 소리에 “진짜네.”라고 중얼거렸다. 지금 우영이 가장 걱정하던 것 역시 그 애물단지인지라 우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답해주었다. “몰라. 나도 지금 저게 제일 문제야. 대체 저걸 어쩌라고…….” “누군지 몰라도 무식하네. 나무를 통째로 보내다니. 그것도 이런 나무를. 이거 가로수로 쓰는 거 아냐? 누군지 대단하네.” “……세르게이 네브즐린이야.” “……뭐?”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보낸 거라고.” “아…….” 순간 납득한 듯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우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에반을 노려본다. “말해봐, 그 사람 대체 뭐야? 날 스카웃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스카웃 얘기는 모르겠고, 이 나무는 세르게이다워. 이거 어디서 온 거야?” “센트럴 파크.” “아하~.” 순식간에 혼자 납득한 듯한 에반의 태도에 우영이 얼굴을 굳히고 에반을 닦달한다. “뭐야? 대체 뭔데? 그 사람 무슨 생각인 거야?” “대강 알 것 같아서. 센트럴 파크 지나가다 차 안에서 너 입원했다는 소리 듣고는 그냥 보이는 나무 뽑아다 보낸 모양이네.” “뭐?” “원래 그래. 자기 비서들도 명단 뽑아두고 펜 굴리기 해서 뽑는 사람이야. 엘레나 모델 데뷔시킨 것도 지젤 번천, 브리트니 스피어스, 안젤리나 졸리 사진 찢어서 종이비행기 날려서 지젤 번천이 제일 멀리 날아가니 시켰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아끼던 부하 생일 선물로 데저트 이글(Desert Eagle)을 선물한 모양이야. 얘기 듣기로는 무기를 고르러 갔을 때 그 부하의 생일이라는 얘기를 듣고 앞에 있던 권총을 아무거나 선물을 한 것 같은데, 그때 막 그 부하가 횡령 사건에 휘말렸을 때거든. 세르게이는 별 생각 없이 한 선물이지만 그 부하는 그게 자결하라는 뜻인지 알고 자기 생일 날 그 총으로 자기 머리통을 쐈다고 하더라고.” 에반의 길고 자세한 설명을 듣던 우영은 순간 자기가 뭔가를 잘못 들었나 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응?” “그냥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 무관심이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극단적인 예지.” 그렇게 말하며 선물 지뢰를 헤집고 들어선 에반은 테이블 위에 신문을 하나 집어던지곤 의자에 앉았다. 우영 역시 선물과 꽃을 피해 테이블에 가 자리 잡고 앉았다. “그게 진짜야? 그 사람 아무 생각 없는 거야?” “진짜야. 자기 살 집도 다트 판에 지도 걸어두고 찾는다는 말도 있어.” 타조의 오빠니 평범한 인류는 아닐 거라 여기긴 했지만, 지나치게 평범의 범주를 초월한 그의 기행이 우영은 인상을 썼다. 일단 밀어붙이기의 대가 닉쿤에, 능글뻔뻔 천상천하 유아독존 노먼에, 포스작렬 새대가리 엘레나에, 돌아온 탕아 클랜에, 무심함으로 사람까지 죽이는 세르게이를 자신의 인맥에 포함시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세르게이 네브즐린 입장에서는 호의라 여길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우영의 입장에서는 호의보다는 악의에 가까운 행위였다. 무엇보다 저 커다란 나무를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경찰을 비롯한 FBI나 다른 세력들이 자신이 네브즐린가의 사람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라 여긴다면 자신의 인생을 끝장이다. 우영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하는 사이, 에반이 팔짱을 끼며 무심한 투로 내뱉는다. “그나저나 너희 둘이 잘 논다? 난 바빠 죽겠는데, 죽도록 부려먹으면서 두 놈이 손잡고 이런 때에 휴가나 내고. ” “왜? 휴가 내면 안 돼?” “바빠. 미치도록 바빠. 거기다 손실도 커. 뭐, 오너가 포기하겠다니 할 말은 없지만. 지금 닉쿤의 행동은 아주 곤란하다고.” “왜?” “J&K사가 갑자기 GATH합병을 없던 일로 돌리자고 나오더라고. 닉쿤이 사흘 동안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어제 오전에 오찬하면서 잘 마무리되나 싶더니, 갑자기 뛰쳐나가는 바람에 백지화.” 한숨을 푸욱 내쉬는 에반의 설명에 우영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거 나 때문이야?” “그럴걸.” “내가 잘못한 거야?” “응. 하필 그 타이밍에 메시지가 왔으니까.” “……미안해해야 돼?” “아니. 애초에 문제는 그 영감이야. 닉쿤을 자기 딸이랑 짝지어 주려고 수 쓴 거야. 뻔히 알면서도 닉쿤이 나름 대로 비위 맞춰줬는데 산통 깨진 거지, 뭐. 차라리 잘 됐어. 그런 사람하고 일하면 이쪽만 피곤해. 닉쿤에게는 오점이 남는 거지만, 뭐…… 그 놈이야 그런 걸로 별로 타격 입을 놈도 아니고.” “……큰일 난 거야?” “큰일이긴 한데, 어차피 한두 번 정도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엎어지는 거 순식간이니까.” 분명히 큰일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에반의 표정이나 말투는 너무 태연했다. “그 사람은 딸을 왜 닉쿤이랑 결혼시키려는데?” “딸을 허르베지쿨 부동산의 사모님으로 만들고 싶었겠지. 지금은 저러고 있지만 결국 허르베지쿨 부동산을 맡을 건 닉쿤니까. 그쪽도 괜히 머리 쓰다 된통 당한 거야. 닉쿤이 열 받아서 그 회사랑 일 안 한다고 했으니까.” “그것도 큰일 난 거야?”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에반을 우영은 참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지금만은 싫었다. 도대체 큰일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뭐, 큰일은 큰일이지만……. 네가 걱정해봐야 소용없으니 신경쓰지 마. 엎어진 건 엎어진 거야. 공 들인게 아깝긴해도 GATH사도 눈독 들이는 회사가 제법 있으니 다른 데로 팔아넘길 거야. 당장은 항의 전화를 좀 받긴 하겠지만.” “항의 전화는 왜?” “닉쿤 믿고 그쪽에 투자한 사람들이 있거든. 한 동안은 좀 그렇겠지만, 알아서 마무리 잘 할 거야.” “…….” “네가 걱정해봐야 소용없으니 넌 그냥 쉬어. 늙으면 적당히 물러날 줄도 알아야지, 늙어 아집만 생겨서 자기 딸 결혼을 그런 데에 이용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말로는 걱정 말라면서 대체 그 얘기를 하는 저의가 뭐냐는 눈으로 우영이 에반을 바라보자 에반이 “그냥 알고 있으라고.”라며 말을 돌린다. 그걸 알면서 걱정을 안 할 수 있냐고 반박하려하자, 에반이 결국 먼저 입을 연다. “월요일부터는 정상출근 해줘.” “……그게 목적이었어?” “그래. 닉쿤도 닉쿤이지만 네 손이 더 급해. 로이에게 맡겨두다간 일주일 안에 고객들 항의전화가 빗발칠 분위기야. 주말까지 쉬고, 복귀해주길 간절히 요청한다.” “그것 때문에 온 거구나?” “응.”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나도 뒤처리도 안 하고 쉬는 거 달갑지 않으니까.”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테이블을 내려다본 우영은 신문 위에 대문짝만하게 난 사진을 보곤 재빨리 그 신문을 들어올렸다. 1면은 아니지만 연예면에 꽤 크게 실렸다. “……왜 엘레나랑 노만하고 엮인 거지?” 사진은 별거 아니었다. 이틀 전 오전 엘레나가 자신의 아파트를 나서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타이틀이 너무 거 창 하다. “「런웨이의 무법자 엘레나를 변화시킨 건 전직 파파라치 노먼 맥캐인. 스타와 파파라치의 사랑?」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사진을 잘 봐.” 에반의 말에 자세히 자신을 들여다본 우영은 엘레나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보곤 눈을 껌뻑였다. 신문은 아주 친절하게도 그 부분을 확대해 설명까지 붙여놓았다. 아직 발간도 되지 않은 노먼 맥캐인의 첫 신간이라고. 그리고 어떻게 엘레나 네브즐린이 그 책을 손에 넣었나 하는 의문문이 꼬리에 달려 있었다. 혹시나 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출판사 측에서는 저자인 노먼 맥캐인이 그저께 오후 특별히 선물할 사람이 있다고 하면 한 권을 받아갔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아침 일찍 나온 아파트가 노먼 맥캐인의 집으로 추 정된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거 노먼이 나한테 준 거라고!”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책 홍보는 확실히 됐다. 책 풀리자마자 저 책 사서 안고 다니겠다는 애들이 수두룩해. 뉴욕 내의 전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화장 하나도 안 하고 머리 하나로 묶고 마크 제이콥스 티셔츠에 수비 우영 입고 저 책 들고 도시를 배회하는 진풍경을 보게 될 거야. 벌써 저 청바지 모델 뭐냐고 난린가 봐. 저 티 셔츠는 매장에서 이미 동났어.” 뜻밖의 말에 열심히 사진을 들여다보던 우영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얘, 그렇게 대단한 애야?” “10대 패션 아이콘이잖아. 성질도 대단한데다 명품만 걸치지, 거기다 수퍼모델이지. 그런데 파티걸 명성에 비해 술도 안 마시고 마약도 안 하고 성인 남자들이랑 스캔들도 없고. 총 들고 설치는 것만 아니면 나름 바람직한 애거든. 그리고 되게 도도해 보이잖아.” 에반의 설명에 다시 한 번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본 우영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엘레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미인에 스타일 좋고, 센스도 좋은 데다 나이까지 어리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도도한 고양이 같은 스타일에 포스만은 누구 못지않다. 거기다 러시아 마피아 딸이니 함부로 건들 사람도 없어 주변도 깨끗한 편이다. 물론, 7개월 전 총을 쏘게 한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비슷한 또래의 같은 모델이라 문란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남자 친구와 1년 넘게 교제를 했었으니 바람둥이 느낌은 아니다. 이렇게 완벽한 애가 ‘there’ 철자도 제대로 모른다면 누가 믿을까. “그나저나 얘가 이 책은 왜 들고 간 거야? 이거 노먼이 나한테 선물해준 건데!” 순간 그 책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 기억난 우영은 재빨리 핸드폰을 찾아들고 엘레나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재빨리 통화가 이어졌다. 「웬일이에요? 먼저 전화를 다 해주고?」 꺄악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온 엘레나의 말에 순간 우영은 뜨끔했다. 엘레나가 한 전화를 받은 적은 많지만 자신이 직접 전화를 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웬일은? 너, 그제 내 아파트에서 노먼 책 들고 갔어?” 「아, 이거요? 인 더 미로?」 이제는 말로 오타를 내는 엘레나의 음성에 우영은 아예 다 포기한 심정으로 차분하게 답해주었다. “미로가 아니라, 미러야. 그거 노먼이 내 생일 선물로 준 거야. 그걸 마음대로 가져가면 어떻게 해?” 「어, 쪽지 적어놨는데 못 봤어요?」 “내가 봤겠냐? 그대로 기절해서 병원으로 왔는데?” 우영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엘레나의 메모를 봤다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데 이틀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가 그제 코디가 완벽했는데 뭐가 하나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잘 생각해보니 책이 좋겠다 싶어서 하나 들고 갔어요.」 “……너한테는 책이 코디용이냐?” 「그럼요. 스타벅스 컵하고 생수 병, 책이나 잡지도 코디용이에요.」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데 네 책은? 너 그날 학교 가는 길이었잖아.” 「에이, 책을 왜 들고 다녀요, 무겁게. 그리고 학교에서 쓰는 책은 분위기 안 나요. 크고 무겁고 스타일 안 산다고요. 오늘 나 나온 파파라치 사진 봤어요? 되게 지적이죠? 교과서 들면 저 분위기가 안 난다니까요.」 분명 우아하고 지적이고 아름답긴 하다. 그래, 인정한다. 그 책 한 권이 순식간에 엘레나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켜놓았다. 문제는, 그 책 한권이 야기한 스캔들에 대해서, 엘레나가 전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 그런데 사진만 보고 기사는 안 읽었냐?” 「읽어야 돼요?」 “……읽어야지. 네 기사잖아.” 「사진 예쁘게 나왔으면 됐어요. 오빠가 가쉽 따위는 자세히 볼 필요 없다고 했어요.」 물론, 맞는 말이긴 했다. 줄리아 로버츠의 말대로 자신들의 기사가 어느 면에 났는지, 사진만 잘 나왔는지 확인하는 건 헐리웃 스타로서는 아주 현명한 태도이다. 하지만 적어도 타이틀은 읽으란 말이다! “너, 노먼이랑 스캔들 났어.” 「노먼이 누군데요?」 “……내 친구. 어제 봤잖아.” 「아, 그 잘 생긴 남자요? 그 사람하고 제가 왜요?」 “왜긴? 그 책 내일 풀릴 책이야. 노먼이 먼저 나한테 가져다준 거라고. 시중에 풀리지도 않은 신간을, 그것도 유명 작가도 아닌 신인 작가가 쓴 책을 네가 들고 다니니 다들 너랑 노먼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지. 게다가 내 아파트에서 나가는 사진이 찍혀서, 그 집이 노먼 아파트가 아니냐고 하잖아. 오빠가 아무 말 안 해?” 「별로요. 아, 어쩐지 아빠가 아침에 누구 뒷조사 한다고 하더라니, 그게 그 사람인 모양이네요.」 “엘리, 이거 비상사태야. 너 미성년자라고.” 「괜찮아요.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요?」 “……그래, 너야 괜찮겠지. 책이나 가져와. 아니다, 나 지금 퇴원해야 하니까 오후에 좀 보자.” 「아, 잘 됐다. 저 오늘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에 가서 새틴 슈즈 샀어요. 보여줄게요.」 또 구두로 튀었다. 이 아가씨와는 무슨 대화를 해도 명품으로 나아간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거기다 사방팔방으로 튀는 주제보다 더 문제인 건, 이 타조가 진짜 자신을 그녀의 조류 친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쯤해서 난 네 친구가 아냐, 라고 사실을 인지시켜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우영은 차마 이 순결한 아가씨에게 그런 말은 할 수 없어 참았다. 달갑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지만 나름 이것저것 신경써주는 애한테 할 말은 아니다. “……그래. 거기 구두 예쁘던데 잘됐네. 어울리겠다.” 「지금 건 초록색이고 결혼식에 신고 갈 건 핑크로 샀어요. 드레스도 베이비 핑크의 칵테일 드레스에요. 너무 너무 예쁜 거 있죠? 제가 그거 입고 가면 제가 신분 줄 알 거예요, 다들.」 엘레나는 이미 그 결혼식장에 들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휘어감은 채 파티를 즐기고 있는 상태였다. 초대 안 했다간 진짜 큰일 나겠다. “예쁘겠네…….” 「당연하죠. 그럼 어디서 볼까요?」 “이따 전화할게. 우선 퇴원하고 나서.” 「알았어요. 빨리 전화 줘요.」 “그래.” 아무래도 오늘 밤 플래티넘 판을 구해다 직접 엘레나의 이름을 파야할 것 같았다. 초대 안 했다간 미하엘 네브즐린이 결혼식장을 날려 보낼지도 모른다.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는 우영을 보며 에반이 궁금한 듯 묻는다. “뭐래?” “뭐라긴. 아무 생각 없어. 기사도 안 봤나 봐. 그 책 제목도 제대로 못 읽는 애한테 뭘 바라겠어?” “그 애도 진짜 물건은 물건이다. 에이먼이 걔 얘기 듣더니 걔를 메인으로 한 리얼리티 쇼를 하고 싶어 하던데? ” “리얼리티 쇼?” 우영이 그건 또 무슨 장난이냐는 듯 에반에게 묻는 순간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들어선 닉쿤이 대신 답해준다. “일명 타조 쇼라고 부르지.” 오늘은 정장이 아닌 진한 먹색의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흰색 재킷을 걸친 닉쿤이 열쇠를 한 번 집었다 던지며 이쪽으로 다가선다. “타조 쇼?” “아버지가 어제 엘레나를 보고 감동받으셨나 봐. 엘레나를 메인으로 해서 비슷한 급의 새 대가리들 세 마리 더 모아 쇼를 준비한대. 아직 구체적인 타이틀은 안 정해졌는데 가제로 타조 쇼라고 부르고 있지.” 어쩐지 어제 대넌이 뭔가 대단히 놀라는 듯하더니 기어이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었다. 타조 네 마리를 모아두고 쇼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우선 그 쇼 담당 프로듀서들은 무슨 죄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엘레나랑 비슷한 애들을 찾는 게 가능해? 아니, 그런 애들이 실제로 있어? 한 마리가 아니라 네 마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바닥을 가득 채운 선물과 꽃들을 피해 겨우 우영과 에반의 옆으로 온 닉쿤은 우영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빈 의 자에 앉아 다리를 꼬곤 느긋하게 답을 해주었다. “나도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아버지 말로는 충분히 가능하대.” “설마. 이 지구상에 그런 생물이 하나 더 있다곤 생각할 수 없는데?” “엘레나가 무식을 아무렇지 않게 티낼 수 있는 굉장히 독특한 대인배긴 하지만 그 비슷한 지적 수준의 애들은 의외로 많대. 걔처럼 대놓고 티를 안 내는 것뿐이지.” “그거, 잘됐다고 해야 하냐, 불행이라고 해야 하냐?” “아버지에겐 잘된 일이고, 이 세계를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지.” “그래서 진짜 기획하는 거야? 엘레나가 한대?” 대넌의 기획력과 추진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당장에 다음 시즌 프라임 타임을 잡아 방영할 수도 있다. 어쩐지 걱정이 돼 우영이 그렇게 묻자 닉쿤이 어깨를 으쓱한다. “아직 컨택은 시작하지 않았어. 지금 형이 준비 중인데. 아주 신났어. 그런 애들 넷을 붙여놓고 걔들을 여기저 기 데리고 다니면서 음악, 역사, 문학에 대해 가르치는 방식으로 나갈 건가 봐. 그때 그 애들의 반응은 어진간한 코미디 저리 가라할 정도일 테니, 시청률은 장담할 수 있잖아. 내가 봐도 그건 절대 성공할 거야.” 닉쿤뿐 아니라 우영도, 에반도 그 쇼의 성공을 장담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그 쇼는 성공한다. 엘레나 같은 수 퍼모델이 브라운관에 나와 그 천사 같은 얼굴로 텅텅 빈 뇌를 자랑한다면 누구든 좋아할 거다. 원래 예쁜 여자들 중에서도 클레어처럼 똑똑하고 야심 강한 귀족 스타일은 시기와 질투를 받아도 엘레나처럼 아예 뇌가 표백된 애 들은 귀여움을 받는다. 거기다 엘레나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기까지 하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래, 다 좋다. 좋아. 그건 방송국 일이니까. 그런데 그 애들 가르치는 사람들은 무슨 죄야?” “돈 벌잖아. 혈압계를 보너스로 지급하지, 뭐. 그리고 상시 의사도 대기시키고.” 그거야 말로 코미디다. 외형상 학습 형 쇼에 의사와 혈압계라……. 나중에 그게 기사에 실려도 센세이셔널할 거 다. 엘레나가 끼면 뭐든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네브즐린 가에서 그걸 시킬까? 걔 일단 미성년자인데.” 우영이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자 신문을 들어 그 안의 사진과 기사를 본 닉쿤이 어깨를 으쓱한다. “할걸. 세르게이 네브즐린도 성공만 할 수 있다면 뭐든 다 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자기 동생 백치인 건 자기도 알 테니 그걸 팔아먹는 것도 좋다고 여기겠지.” 닉쿤은 말미에 “노먼과 엘레나라,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 묘하게 어울리는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우영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두 사람은 정반대이면서, 상당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예일대 영문과 출신의 재원이자 재능 있 는 신진 작가인 노먼과 수퍼모델 엘레나는 정반대의 느낌이지만 아버지가 글 쓰는 걸 반대한다고 학교 내의 최 고 또 라이 짓을 하고 졸업 후에는 집을 뛰쳐나가 파파라치 노릇을 하며 아버지의 피를 말리던 노먼은 남자 친구 의 변 심에 대낮의 백화점에서 총 들고 설친 엘레나와 비슷하다. 차이라면 노먼은 철저히 계산한 채 반항적으로 행동하 는 거고, 엘레나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그건 좀 그런데? 애를 팔아먹는 거잖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걔가 바보라는 걸 알 텐데, 너무한 거 아 냐? 얘도 체면이 있지. 보그지 표지를 장식하는 수퍼모델인데.” “그 타조가 그런 거 신경 쓸 것 같아?” 닉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엘레나 이콜 무뇌아로 인식이 된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엘레나도 일단 사람이다. 거 기다 액면가는 20대 중반이라도 일단 예민한 청소년이다. “걔도 사람인데, 자존심도 없을까 봐.” “걔는 자기 정도로 예쁘면 무식해도 된다고 할 걸. 물론, 그 쇼에 나오면 모델 생명은 끝장이겠지. 걔가 런웨이 에 서면 다들 웃겨서 쇼에 집중을 못할 테니까.” 분명 그럴 수도 있지만, 하여간 그 백치미와는 달리 엘레나의 포스는 진짜 위대할 정도였다. 파파라치 사진만 봐 도 자신의 앞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표정을 굳히고 걸어가면 감히 말을 붙이기도 힘든 여왕 같은 이미지 다 . 물론, 입을 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이지만. “굳이 걔 모델 생명을 끝내야겠냐?” “카리스마 있는 수퍼모델인 척하면서 입 다물고 먹지도 못하고 사느니 먹고 싶은 거 먹고 마음대로 떠들고 사랑 받는 백치가 되는 게 좋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그렇긴 하다. 하루에 물과 샐러드 200그람으로 연명하는 삶이라는 건, 솔직히 좀 끔찍하다. 게다가 세르게이가 종이비행기 날려서 선택된 직업이니 어쩌면 엘레나도 별 미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좀 아깝긴 하다. “……어떻게 보면 그런데, 너무 아깝잖아. 사진으로 보니 대단한 모델인 것 같던데. 모델들 많이 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존재감 있는 모델은 드물잖아.”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아깝다고 해도 자기가 행복한 게 먼저잖아.” “뭐, 그게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새대가리 문제는 그만 고민하고, 옷 갈아입어. 퇴원 준비해야지. 사라 빌라로 들어오신 한국인 아주머니가 아 파트로 오셔서 식사 준비 다 해주셨어.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사라가 뭘 잔뜩 준비해서 보냈던데?” “누가 너희 집에 간대?” “그럼?” “우리 집에 가서 좀 쉴래. 휴가 내내 잠이나 자야겠다.” “음식들은? 난 한국 음식 안 맞아.” “우리 집으로 보내. 진짜 좀 쉬고 싶어.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잠이나 잘 테니 전화도 하지 마.” 우영은 말 그대로 진짜 잠만 잘 생각이었다. 책과 비디오를 잔뜩 쌓아두고 보다 질리면 자고, 자다가 깨면 다시 보고, 그리고 또 자고. 핸드폰도 꺼둔 채 진짜 잠만 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휴가를 내지 못했다. 막 고객이 늘고 전체적인 규모가 확장되기 시작한 때라 우영뿐 아니라 에반과 닉쿤도 휴가를 쓰지 못했다. 에 반 에 겐 좀 미안하지만 아픈 김에 푹 쉴 생각이었다. 그 뒤의 문제는 나중에 생각할 생각이었다. 닉쿤이 보기에도 여전히 우영은 지친 상태라 결국 닉쿤 역시 우영의 말에 동의하기로 결정내렸다. “그럼, 이거.”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주머니에 넣었던 열쇠를 던져주었다. 그걸 두 손을 받은 우영은 디지털 키 위에 새겨진 람 보르기니의 문양을 보곤 떨떠름한 얼굴을 해보였다.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로드스터야. 오늘은 이걸로 타.” 자신이 가장 탐내던 차 명에 우영은 순간 눈을 반짝거리며 닉쿤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거 진짜 나 주는 거야?”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곧 죽을 것 같이 창백한 안색에 눈만 팅팅 부어 진짜 개구리 같던 우영이 갑자기 활짝 갠 얼굴로 방긋 방긋 웃자 닉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저렇게 갖고 싶었을까. “그럼 가짜로 주겠냐? 저택 차고에 있는 차들까지 키 박스 통째로 줄 테니, 네가 다 가져. 차야 별로 필요도 없 고, 난 리무진 취향이니까.” “진짜? 진짜? 진짜로?” “나 차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네가 하도 눈 반짝거리면서 갖고 싶다고 해서 사놓은 거야. 가끔 와서 타라고 해도 네가 안 탔잖아.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고. 저번에 본 재규어 XJ super V8 모델도 이번 달 내로 출고될 거 야.” “그것도 나 주는 거야?” “그래. 그렇게 갖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 동안 어떻게 참았냐?” 굳이 닉쿤이 아니라도 허르베지쿨 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우영이 원하는 차 한두 대 정도는 당연한 듯 선물해줬 을 것이다. 하지만 우영 본인이 고사하는 통에 생일 선물로도 줄 수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에이먼이나 닉 쿤이 물려주겠다고 한 차도 거절하곤 자신이 직접 중고로 차를 구입했다. 닉쿤은 사실 차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이 여자는 가방, 남자는 자동차가 최 고의 사치품이라며 피를 토하며 성토하는 친구들이 있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닉쿤은 진짜 차 자체에 별로 흥 미가 없었다. 운전하는 것 역시 닉쿤에겐 귀찮고 번거로운 시간 낭비였다. 차는 안 좋아하면서 차를 모으는 게 신기했는지, 몇몇 친구들은 돈이 넘치니 모형 자동차 모으듯 운전하지도 않는 차를 모으는 거냐고 비아냥거리기 도 했지만, 지금까지 닉쿤이 사 모은 차들은 대부분 우영이 갖고 싶다고 한 차들이었다. 우영이 타라고 사둔 거 지, 그 차들 자체에는 별 애착이 없었다. 그래서 컬렉션도 28대에서 멈춘 거다. 우영이 타고 싶다는 모델만 골 라 놓다 보니 그렇게 됐다. 어차피 람보르기니고 재규어고 페라리고, 차는 차다. 사실, 닉쿤이 유일하게 좋아하 는 차는 리무진이었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고 자신의 개인공간이 분리되고 그 안에서 뭐든 할 수 있으니 이상적 인 차였다. 클레어도 닉쿤과 비슷한 타입이었다. 사실 클레어도 가방과 구두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남매 중 에 이먼과 클랜이 닮고, 닉쿤과 클레어가 가장 닮았는데, 귀찮고 번거로운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건 닉쿤과 클레어 둘이 똑같았다. 클레어의 가방과 구두 수집 역시 그냥 보여주기 위한 수집이었다. 일종의 과시다. 어차피 돈은 썩을 정도로 남아돌고,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보니 내가 이 정도의 컬렉션을 유지할 정도의 재력이 된다고 과 시하기 위한, 우영이 가끔 하는 말처럼 그냥 돈지랄이었다. 클랜 역시 그나마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보관 방 법이 엉망이다. 클랜은 다만 활자 중독일 뿐 책 자체는 그다지 아끼는 편은 아니었다. 사 남매 중 유일하게 자 신의 컬 렉션에 애착을 갖고 있는 게 에이먼인데,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취미라 에이먼은 취미도 없이 그냥 일 벌 레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참 아이러니하다. “키 박스는 필요 없고 이건 받아둘게. 보너스라고 생각하지, 뭐.” 닉쿤이 잠시 이 웃긴 상황을 개탄하는 사이 우영은 이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나치게 거절 하는 것도 좋지 않다. 닉쿤에게는 자동차 모형에 불과한 람보르기니 한 대 정도는 지난 생일 선물로 받아도 괜찮 다. 무엇보다 자신이 입에서 내뱉어놓고 모르는 척하는 것도 우습다. 사실은 전부 잊고 싶지만, 진짜 싸그리 기 억에서 지우고 싶은 수치스러운 기억이지만 닉쿤에게 매달려 했던 말들이 너무 생생히 기억난다. 특히 재키가 살쪘다고 타박하던 것이 가장 선명했다. 죽고 싶다. “퇴원 전에 이 방을 먼저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저 나무는 진짜 처치곤란이군.” 닉쿤이 세르게이가 보낸 나무를 보고 그렇게 중얼거리자 우영 역시 난감한 듯 그 나무를 멍하니 바라봤다. “저걸 진짜 어쩌냐?” “일단 들고 나가서 아무 데나 심어놔야겠지. 무식한 건 알아줘야 돼. 뭐든 큰 거면 좋은 건 줄 아는 사람이라. ” 닉쿤의 중얼거림에 우영이 슬쩍 닉쿤을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대체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러시아 마피아 대부의 아들. 러시아 쇼비지니스 계의 대제. 그리고…… 공작새.” “공작새?” “……나중에 보면 알 거야.” “공작새라니? 뭐야? 타조 오빠라 공작새야?” “그렇다고 해두지.” “뭔데? 나 그 사람 무섭다니까!” “알려주면 뭐해줄 건데?” “뭐?” “세르게이가 왜 공작새인지 알려주면 뭐해줄 거냐고? 진한 한 방이 있어야 나도 뭘 말해주지. 그거 러시아 국방 기밀 수준인데.” 살짝 입술 끝을 올려 웃으며 은밀한 뭔가를 요구하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그냥 닉쿤에게서 알아내길 포기하고 말았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게 닉쿤의 신념이듯 우영은 공짜가 아니면 자신이 알아서 하자라는 게 신념이었다. “됐다. 내가 알아보고 만다.” 우영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존재 자체가 잊혀졌던 에반 역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도 사무실 나가봐야겠다.” “어? 그런데 에반 아무 것도 없어? 위문품은?” 우영의 말에 에반이 방 안을 쭈욱 돌아보더니 시니컬하게 중얼거린다. “이렇게 받고 더 바라냐? 너 이거 열어보는 데에만 하루 종일 걸릴 거다.” “그래도.” 람보르기니 키를 든 채 얌전히 두 손을 내밀며 뭐라도 달라고 요청하는 우영의 얼굴에 에반은 결국 웃으며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한국에서 홍삼 공수해 와서 아파트에 보내놨어. 어머니가 어렵게 구해오신 거니 꼬박꼬박 잘 먹어야 돼. 하루에 두 개씩, 아침저녁으로.” “어? 아, 고마워라.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주셔도 되는데.” “어머니가 너 걱정하더라. 몸 좀 좋아지면 한 번 인사드려.” “전화할게.” “그래. 난 또 몸이 부서져라 일하러 간다. 닉쿤, 휴가라도 휴대폰 켜 놔. 갑자기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까.” 선물 더미를 해치고 가던 에반이 휴가 중이라도 필요하면 호출하겠다는 그 말에 닉쿤이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쓴다 . “어지간한 건 당신이 알아서 해. 그리고 휴가 끝나고 곧장 인사 정리 있을 거야. 파트너가 된 걸 축하해.” “어? 드디어? 에반 승진 축하해!” 우영은 마치 자기 일인 냥 기뻐하며 축하의 말을 남겼지만 드디어 지뢰밭을 헤쳐나간 에반은 별로 신통치 않은 표정으로 닉쿤을 돌아봤다. “뭐야? 이제 대놓고 부려먹겠다는 거야?” “기뻐해. 파트너라고. 연봉도 나랑 같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거야.” “하나도 안 고맙고 하나도 안 기뻐. 나도 결혼은 해야 할 거 아냐? 너희 뒤치다꺼리 하다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으라는 소리냐?” 그 동안 쌓인 한이 많은 듯 에반이 절대 파트너 따윈 하지 않겠다고 소리치자 닉쿤이 기분 좋은 듯 웃는다. 하지 만 그 표정에 우영은 불안해졌다. 닉쿤이 저렇게 웃을 때엔 뭔가 꿍꿍이가 있을 때다. 그것도 아주 짓궂은 장난을 치기 직전의 얼굴인지라 또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우영이 닉쿤과 에반을 돌아보는 사이 닉쿤이 에반에게 그린마일을 펼쳐주었다. “지금 이 기쁨을 누리는 게 좋을 거야. 잘하면 내가 허르베지쿨 부동산으로 들어가고 내 자리에 클랜이 올 수도 있으니까.” “뭐?” “일단 그런 얘기 중이야. 당장 허르베지쿨사로 들어오기엔 너무 모르는 게 많으니 당신한테 교육 좀 받아야지. ” “미쳤어? 차라리 날더러 죽으라고 해!” “클랜도 똑똑해.” “똑똑한 게 문제가 아니잖아.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폭탄을 끼고 살란 소리냐? 차라리 우영을 붙여줘!” 에반이 우영을 가리키며 그렇게 소리치자 우영이 질색을 한다. “클랜이 쳐놓은 사고 처리하느니 차라리 타조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클랜은 분명히 능력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거물이 될 자질도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투자에 있어서는 과감하며, 일을 기획하고 처리하는 데에 있어 재치 있고 기발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와 함께 일하는 것만은 절대 싫다. 다른 건 몰라도 클랜은, 그의 과감하고 대범한 성미로 아주 획기적인 대형 사고를 수시로 쳐주며 뒤처리는 하지 않는 최악의 생물체다. 클랜을 따라다니며 일처리를 하다가는 딱 한 달 만에 뇌졸중을 일으켜 이 박복한 인생을 끝내게 될 것이다. “닉쿤, 나 클랜한테 보내면 진짜 너랑 끝장이야. 내가 에이먼이나 클레어랑은 일해도 걔랑은 일 안 해. 못 해. ” “걱정 마. 넌 안 보낼 테니까. 하여간 그건 나중 일이니, 나중에 말하자고. 나도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에반, 가서 일봐. 그리고 우영 너는 빨리 옷 갈아입어.”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며 닉쿤이 다시 자리에 앉자 에반이 이를 으드득 간다. “닉쿤, 너 두고 봐. 휴가 끝나고 돌아와 보라고.” “기대하지.” “실컷 기대해 봐. 이렇게 된 거 아예 내가 닉쿤 사를 장악해 버리겠어.” “그것도 좋지. 해봐.” 신문을 들고 연예 면을 휙휙 넘기며 뒤에 나온 사회면을 읽기 시작한 닉쿤을 보며 에반은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 병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 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얄미운 자식.” 에반이 떠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던 우영은 다시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서둘러 핸드폰을 들었다. “내, 우영 케이먼입니다.” 밝은 음성으로 대꾸하자 안에서 맥없는 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영, 난데…….」 사라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거기다 머뭇거리는 기색도 완연하다.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해 우영은 서둘러 답했다. “아, 사라? 왜?” 「저기, 진짜 미안한데…….」 “왜? 무슨 일인데?” 「나 좀 살려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클랜 하나가 아니라 재키까지 합세했다면 버거운 게 당연하다. “알았어. 내가 갈게. 어디야?” 「허르베지쿨 사 회의실. 나, 진짜 이런 말 하기 싫었는데……. 계모라서 그런다고 할까 봐,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안 해도 돼.” 「아니, 하고 싶어. 나 지금 클랜을 로켓에 달아서 우주로 보내버리고 싶어.」 순간 우영은 안도했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말이 아닌 게 얼마냐. “충분히 이해해. 곧장 나갈게.” 「미안.」 “아냐.”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은 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닉쿤을 바라봤다. 닉쿤은 통화 내용은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휴가잖아. 그냥 무시해.” “……어떻게 무시하냐?” “그냥 두라니까? 지금 붙은 인력이 몇인데 그거 하나 처리를 못해?” “초대장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사라가 클랜을 우주로 날려버리고 싶다는 걸 보니 다른 사고를 친 거야. 옷 갈아입을게. 나가있어. 나 지금 너랑 말싸움할 시간 없다.” 우영이 지친 듯 손을 휘휘 내저어 내쫓자 닉쿤도 더는 어쩔 수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신문을 손에 든 채 병실을 빠져나간다. 어제 오후에 사라가 챙겨 보내준 옷을 찾아들던 우영은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작게 신세타령을 했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Chapter 7 고요한 회의실 안으로는 째각거리는 시계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허르베지쿨 사의 회의실을 차지하고 앉은 우영은 바로 맞은편에 죽을상을 하고 앉은 사라와 킴, 대넌의 비서 세 명, 그리고 한쪽에 처박혀 뻔뻔스러운 얼굴을하고 있는 클랜과 이 상황에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재키를 돌아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였다. 역시나 사고를 쳐도 대형으로 쳐놨다. 우영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자 사라와 킴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저 두 녀석을 잡아먹든 볶아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 우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다. 다 좋아.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모르지. 우영이 알아서 해야지.” 여전히 죄책감은 전혀 없는 듯한 클랜의 반응에 우영은 차분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이야기의 전개는 다음과 같았다. 플래티넘판에 일일이 이름과 고객 넘버를 적어 만든 초대장을 엉뚱한 이름이 적힌 사람들의 초대장에 넣은 클랜과 재키는 다시 그 초대장들을 모조리 뜯어야 했고, 그 과정에 7장 가량의 초대장을 분실했다. 거기까 지는 좋다. 다시 명단과 일일이 대조해 잃어버린 초대장을 다시 제작해 제대로 일을 시작하면 된다. 문제는 이 둘이 초대장을 도저히 못 찾겠다고 널브러진 건데, 나중에 3장의 초대장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초대장들을 파기해야 하는데 친절하게도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고, 쓰레기통을 통해 나간 그 초대장 3장이 불행히도 파파라치의 손에 들어갔다는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 이미 세기의 결혼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화스러움의 극치가 될 두 사람의 결혼식은 비공개로 치러지며 에이먼이 갖고 있는 채널의 웨딩쇼 「We`re married.」를 통해서만 독점 공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초저가 세트 두 놈이 파파라치에게 초대장을 내준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은 만큼, 파파라치의 수 익도 대단할 것이고, 그 초호화판 결혼식 장면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일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거의 실신 직전 상태에서, 대넌과 브루스가 힘을 합쳐 클랜에게 킬러를 보내지 않을까 걱정 중이었다. 하지만 우영은 클랜보다는 자신의 혈압이 더 걱정되었다. 클랜에 대한 살의가 바닥난 체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파파라치들한테 초대장을 내주고도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너, 지금 그게 할 말이냐?” “이미 잃어버린 거잖아.” “잃어버린 거라고? 그냥 준 거겠지! 너, 오늘 나랑 끝장을 보자! 아무래도 너랑 나랑 같이 죽는 게 낫겠다!” 우영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험악한 기세로 소리치자 클랜이 어깨를 으쓱한다. “우영, 진정해. 아직 몸도 다 안 나았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 “네가 지금 그런 말할 처지냐? 날더러 어쩌라고! 너, 지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비공개 결혼식을 위해서 보디가드만 500명을 불렀다고! 내가 그 사람들 공수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뉴욕에 있는 모든 사설 경호업체의 사람들을 총동원해 교육까지 시키고 있다고! 그런데 뭐? 이제 와 어쩌냐고? “미안해.” “너 사람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고만 하면 끝이야?”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채라 고함을 내지르던 우영은 현기증을 느끼곤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재빨리 의자를 끌어다준 닉쿤이 우영의 어깨를 잡고는 천천히 진정을 시킨다. “진정해, 우영. 우선, 카드부터 다시 제작하고 초대장부터 처리해. 그리고 에이먼한테 연락해.” 지금까지 침묵하며 듣기만 하던 닉쿤의 말에 우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겨우 겨우 목소리를 내 묻는다. “에이먼은 왜?” “생방으로 날리게.” “뭐?” “아예 결혼식을 생방으로 중계하겠다고. 그게 낫지.” 그 말에 우영이 천천히 얼굴에서 손을 떼고 닉쿤을 돌아봤다. “……날 죽여라. 그 준비는 또 어떻게 하라고? 생방으로 날릴 거면 좌석 배치부터 전부 새로 해야 한단 말야. 결혼식이 무슨 프렌치 프라이냐? 햄버거야? 그냥 달라면 나오는 줄 알아?” “내가 도와줄게.” “돕긴 뭘 도와? 넌 회사에 가서 일이나 해. 에반이 과로사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어이, 우리 휴가야. 오너가 휴가를 줬는데 무슨 일이야?” “에반이 과로사하면 귀신이 돼서 날 괴롭힐 거야. 휴가고 뭐고 취소하고 나중에 얘기하자. 우선 초대장부터 어떻게 해야지. 사라, 킴. 이제 들어가 봐요. 그리고 뒤에 비서 분들 제 지시대로 움직여주세요. 그리고, 클랜하고 재키는 내 일생일대의 소원이니 제발 돌아가라. 클랜은 사라 집까지 데려다주고, 재키는 제발! 내 소원이니 가서 네일 케어랑 스킨케어 받고, 그 머리카락부터 정리해.”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돌아보며 지시를 내린 우영은 재빨리 전화기를 들고 에이먼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일생에 단 한번뿐인 클랜의 결혼식을 날림공사로 치를 가능성이 점점 농후해지는 상황이었지만 닉쿤의 말이 맞다. 어설프게 파파라치들에게 사진을 내주느니 채널을 통해 아예 생중계를 하는 게 낫다. 어차피 초호화판이다. 보고 즐기는 결혼식이라도 돼야 한다. 그래, 확실히 즐길 수는 있을 거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으로 봐선 결혼식 날 폭우가 내린다거나, 폭죽을 쏘는데 신부 드레스에 불이 붙는다거나 하는 사고가 벌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진짜 웃겨질 거다. 문제는 진짜 그런 일 이 벌어질 것 같다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에이먼에게 전화를 건 뒤 통화음을 듣고 있던 우영은 멀뚱하게 앉은 재키와 클랜을 보곤 재빨리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 행동에 닉쿤이 턱을 들어 문을 가리키자 클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와 킴에게 다가섰다. “사라, 집으로 가서 쉬어. 아이한테 안 좋으니까. 뒷일은 우영이 알아서 할 거야.”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그 말에 우영이 클랜을 노려보자 클랜이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라를 에스코트하며 우영에게 인사를 남긴다. “수고해. 그리고 미안.” “미안한 건 아냐?” “우영은 능력 있으니까. 아픈데 미안하긴 하지만, 우영이 최고야. 알지? 우영만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 일 할 때 제일 쌩쌩하잖아.” 눈을 찡긋하며 사라와 킴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서는 클랜의 뒷모습을 보던 우영은 그제야 이 사건 사고의 모든 원인을 헤아릴 수 있었다. 클랜은 문장 실력은 엉망이지만 눈치만은 기가 막히게 빠른 녀석이었다. 그래, 인정한 다. 사실 그렇게 길길이 날뛰면서도 자신이 클랜의 결혼식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상처 받 았 었다. 확실히 자신은 워커홀릭이다. 일을 하고 그 일을 완벽하게 성공하고, 그 성공에 대한 찬사를 받을 때 야 겨 우 안심을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감은 가질 수 있게 된다. 클랜이 기차게 눈치가 빠르고 자신의 심리를 잘 눈치 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서 일을 벌인 건 알 것 같지만 -아니, 사실은 그건 미안함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을 가능성이 99%지만- 그렇다고 클랜이 용서가 되는 건 아니다 . 왜 하필 이때냐……. “클랜.” “응?” “결혼식 끝나고 나 좀 보자.” 우영이 살짝 이를 갈 듯 말하자 클랜이 눈웃음을 치며 응수한다. “기운 내. 우영의 몸살은 육체적인 문제보다는 정신적인 문제니까.” “……꺼져.” 「꺼지라고?」 우영이 웃으며 핸드폰을 들고 클랜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던 순간 전화를 받은 에이먼이 묵직한 음성으로 그렇게 답해왔다. “어, 아니. 클랜한테 한 말이야. 사고 얘기는 들었지?” 「응. 그렇지 않아도 편성 짜는 중이야. ‘We`re married.’를 앞으로 당겨서 생중계를 하는 것도 방법이지.」 역시나 형제였다. 닉쿤이 생각한 방법을 에이먼도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우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 난리에 파파라치를 일일이 골라낼 수도 없고, 우영이 직접 식장 밖에 나와 손님 리스트와 이름을 일일이 대조하는 실례를 범할 수도 없다. 「편성하고 카메라 설치는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넌 나중에 나온 카메라 위치 확인하고 배치도만 다시 짜면 돼. 방송국 일은 이쪽에 맡겨.」 확실히 빠르다. 빠르고 추진력 있고 기획력도 뛰어나다. 에이먼은 그 취미만 빼면 완벽한 남자였다. “응, 고마워. 그럼 그쪽 디렉터한테 자리 잡은 뒤에 조감도를 나한테 팩스로 보내달라고 해. 여기도 준비해야 하니까.” 「어디로?」 “……아, 내 사무실로 부탁할게. 다시 내 사무실로 가야 하니까.” 「그래. 아 참,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너한테 접근한다고?」 “뭐, 접근이라기보다…… 꽃하고 나무를 보냈어.” 우영이 에이먼과 통화 중인 사이 닉쿤 역시 휴대폰을 들고는 회의실을 나갔다. 누구한테 전화가 온 건가 해 목을 빼고 닉쿤이 나가는 방향을 바라보는데 에이먼이 심각한 목소리로 묻는다. 「혹시 파리지옥을 보낸 건 아니겠지?」 “웬 파리지옥? 장미 이천 송이랑 그냥 나무였는데? 왜? 그 사람 파리지옥을 선물이라고 보내는 사람이야?” 「……나한테 보냈었거든.」 “왜?” 「초기에 일 시작할 때 선물이라고 보냈더군.」 “……같이 일하기 싫다는 뜻 같은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소문은 전해 들었었거든. 워낙에 특이한 선물을 많이 하던 사람이더군. 당뇨병 어린이 모임에 케익과 과자를 선물하고, 소아암 환자들에게 머리핀과 끈을 선물하는 남자야. 그것도 전혀 악의 없이 말야. 그거면 할 말 다 한 거지.」 뭔가 아련하게, 아주 아련하고 희미하게 세르게이 네브즐린이라는 남자의 이미지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꽃을 보냈을 때에도 느꼈지만 생긴 것과는 다르게 확실히 무식하다. 그러니까 엘레나처럼 상식이 없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은근히 무식하다. 그 사람 감성에는 좀 문제가 있다. 에이먼의 상세한 설명에 우영은 드디어 그 선물들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냥 그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는 거다. 어떤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이제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제 그 꽃과 나무의 의미를 알겠어. 하여간 고마워, 에이먼. 방송국 일은 그쪽에 맡길게.” 우영이 마지막으로 인사의 말을 건네자 에이먼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한다. 「넌 일할 때가 제일 활기차서 좋아.」 “……그런가?” 「그래. 수고해.」 “응.” 재빨리 전화를 끊은 우영은 앞에 대기 중인 대넌의 비서들을 돌아보곤 그들에게 차례차례 확인할 것들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샴페인과 와인, 그리고 당일 부를 웨이터와 보디가드들의 인원수와 교육 상황 파악 및, 부족한 인원을 메우기 위한 면접 과정을 정리해 알려주고, 재클린의 드레스와 웨딩슈즈가 입고됐나를 파악하라고 지시를 내리던 중 회의실을 나갔던 닉쿤이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우영, 나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 우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비서가 내민 손님 리스트를 확인했다. “가봐.” “7시에 데리러 올 테니까 기다려. 저녁 같이 하자.” “안 와도 돼.” 급한 일이면 아마 7시까지도 시간을 질질 끌게 될 거다. 닉쿤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우영이 일부러 딱 잘 라 거절하듯 말을 하자 닉쿤이 옆으로 다가와 앉아있던 우영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다. “정확히 7시야. 다른 남자가 유혹해도 가면 안 돼.” “누가 날 유혹해? 빨리 가. 나도 일 처리해야 돼. 아니, 대체! 왜 내가 쓰러지기 전하고 똑같은 거야? 뭔가 발전이 있어야지. 그 수많은 인원들이 사흘이 넘도록 뭘 한 거냐고!” 분명히 수요일 저녁 자신이 퇴근 전에 확인한 그대로였다. 오늘이 벌써 토요일인 걸 감안하면 지금쯤 대부분의 준비는 진행이 됐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상태냐고 우영이 울분을 터트리자 문을 향해 걷던 닉쿤이 걸음 을 멈추며 우영을 부른다. “흥분하지 마, 우영. 너 흥분하면 섹시하거든? 누가 납치해 갈라.” 장난기 가득한 그 말에 우영은 그대로 시선을 돌려 닉쿤을 바라보며 싸늘한 투로 중얼거렸다. “너, 아직도 안 갔냐?” “발걸음이 안 떨어져서 말야. 7시야. 기다려.” 우영은 결혼식 하객 리스트를 쭈욱 돌아보며 표시된 7명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한 뒤 닉쿤에게 어서 가라는 듯 손 을 휘휘 내저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도 내내 축 쳐져 죽을 것 같더니 일을 손에 쥐자마자 기운이 팔팔한 우 영의 모습에 닉쿤은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에서 빠져나갔다. 섭섭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클랜의 말대로 우영은 늘어져 있는 것보다는 바쁘게 일하는 쪽이 정신 건 강에 좋다. 혼자 있으면 잡념이 많아지거나 우울해지는 성격이라 늘 텔레비전을 끼고 사는데, 사실 그 텔레비전 이 우영에게 긍정적인 효과만 부여하는 건 아니라, 차라리 바쁜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낮에는 바쁘게 일을 하고 밤에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지고, 지금의 우영에게는 그런 패턴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혼 식 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면 우영도 그 스스로를 보는 눈이 바뀌어갈 것이다.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자신 없어하며 위축되는 우영에게 이 결혼식은 어쩌면 꼭 필요한 과정 이었다. 모든 이들이 찬사를 보내며 잘했다고 칭찬한다면 우영도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체력이 심하게 떨어진 게 문제이긴 하지만 자신이 주의 깊게 살피며 조절하는 수밖에는 없다. 클랜의 결혼식까지 남은 일주일이 우영과 자신에게는 인생 최대의 반환점이 될 것이다. *** 진척이 없는 결혼 준비를 모두 재확인한 뒤 몰래 하객 리스트에 엘레나의 이름을 넣은 우영은 새로운 카드 발급 요청한 뒤 대넌의 개인 비서들과 사라와 킴의 비서들까지 총동원해 초대장을 새로 작성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다행히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총동원된 상태에서 지휘를 하자, 준비는 순조로웠다. 자신이 직접 나 가 고 확인할 필요 없이 지시만 내리면 되는 상황이라 그다지 힘든 것도 느끼지 못했다. 클랜이 쳐놓은 사고를 대강 마무리하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던 순간 우영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시 간을 확인했다. 6시 30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슬쩍 핸드폰을 확인해 봐도 닉쿤에게서의 전화는 없다. 대체 어딜 간 걸까. 닉쿤 성격에 아무 말 없이 바람맞힐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30분 단위로 시계를 보고 있었 다. “우영, 3번 전화 받아보세요.” 회의실에 아예 전화기와 노트북까지 가져다주고 살림을 차려둔 우영은 다른 비서의 말에 재빨리 전화기를 들고 3 번 내선을 눌렀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아, 저……. 여기 정세희 씨 여동생인데요…….」 더듬더듬 이어지는 한국어에 우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한국어로 답해주었다. “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을 드렸는데 외출 중이라고 하셔서요. 저 기억하시죠? 장우영이라고, 사라, 아니 정세희 씨가 후원하는 한국인이요.” 또박또박 사라의 한국명을 대며 말하자 상대가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네, 기억해요. 세희 언니가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한국어를 굉장히 잘 하시네요.」 “네. 일주일에 한 번은 공부하는 중이라서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언니랑은 어제 통화를 했는데요.」 “네, 저 혹시 사라, 아니 정세희 씨가 임신하신 거 아시나요?” 임신이 정확한 표현인지 생각하면 우영이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당장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그 나이에 임신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그 큰 목소리에 우영은 슬쩍 다른 비서들을 돌아봤다. 하지만 다들 자기 업무를 하느라 바쁘고, 한국어라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듯했다. “네. 3개월째에요. 그래서 조금 힘든가 봐요. 어머님이나 동생 분께서 잠시 와서 돌봐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괜 찮으시다면 허르베지쿨 가에서 전용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자기 멋대로 그런 말을 하면서도 우영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건 대넌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 대넌은 전용기가 아니라 저택이라도 내놔야 할 판이다. 「아, 아뇨. 저희가 티켓을 준비해 갈게요. 어머니가 들으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언제 괜찮으시겠어요? 편하신 시간을 알려주시면 김포? 아니, 인천 공항으로 허르베지 쿨 가의 전용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원래 티켓을 준비해드려야 하는 건 이쪽인 걸요. 걱정 마시고 준비 되시는 대로 알려주시면 곧장 전용기를 시 간에 맞춰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제가 시간이 잡히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아, 그리고…… 사라한테는 말하지 먼저 이야기하지 말아주시겠어요?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려고 하는데 요.” 「네, 그럴게요. 이번에 가면 우영씨도 뵈었으면 좋겠네요.」 “네,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인사를 마친 뒤 전화를 끊은 우영은 두근두근하며 수화기를 바라봤다. 사라와 둘이 있을 때엔 일부러 한국어를 쓰고 주말에는 최소 3시간은 잡고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빌려와 틈틈이 한국어를 익혔지만 자신이 제대로 말을 한 건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쪽에서는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우영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한국어를 계속해서 공부한 건 언젠가 여동생을 만날 날을 위해 서였다. 사라가 후원하는 여러 단체 중 한국인 입양아들의 가족 모임이 있었다. 사라는 꾸준히 그 모임에 참석 하 고 그을 후원하며 한국 아이들이 이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한국에 대해 잊지 않도록 문화원을 만들어 한국의 문화 를 가르치는 데에 주력을 했다. 그리고 에이먼이 운영하는 채널 중 하나와 한국 채널을 연계해 친부모를 만난 아 이들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우영은 어린 시절부터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가슴에 맺힌 그 수많은 말들을 통역사를 통해 듣고 말하는 이들이 너무나 가엽다고, 자신은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그런 거였다. 말이나 글도 자신이 아는 언어로, 반드시 상호간의 완벽한 이해가 가능한 말로 해야만 정 확 한 소통이 가능하다. 아니, 그래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같은 말을 해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 가 부지기순데 통역이나 번역을 통한 말이나 글로는 서로를 알 수 없다. 서로가 품은 상처와 슬픔을 제대 로 표현 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꾸준히 공부해왔다. 물론, 한국어를 이해하기 위한 한문 공부도 꾸준히 해왔다. 언젠가는 여동생을 만날 거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를 만나 안아주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며, 그녀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알려줄 것이다. 다시 떠오른 감상에 우영이 잠시 위자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자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안으로 대넌이 들어섰다 . “우영. 고생 많다.” 갑작스러운 대넌의 등장에 우영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대넌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렇지 않아도 뵈려고 했었어요.” “왜? 뭐 문제 있어?” “여기서 더 문제가 생기면 큰일 나죠. 잠깐 얘기 좀 해요.” 우영이 그에게 잠시 회의실을 나가자고 말하자, 대넌이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하나 내민다. “이거.” “이게 뭔데요?” “너, 잘 먹던 거. 사라도 좋아하는 가룬데……. 이름은 까먹었다. 아픈 후라 속도 안 좋을 텐데 커피나 주스는 안 좋으니 이걸 먹으라고. 기사를 검색해보니 위가 안 좋을 때 마셔도 좋다고 해서.” “아, 미숫가루요?” “그래, 그런 이름이었군.” 대넌이 내민 상자를 받아든 우영은 놀란 얼굴로 대넌을 바라봤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허르베지쿨 가에서 못 구하는 건 없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대넌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사라가 가끔 질색을 할 정도로 섬세와는 담을 쌓은 남자가 자신을 위해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미숫가루를 수배해 직접 들고 왔다는 사실에 우영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그의 자식들의 생일 선물도 필요한 게 있으면 비서나 사라에게 말하라고 하며 대강 처리하는 그가 이렇게 신경을 썼다는 사실에 감격해 우영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 할 얘기란 게 뭔데?” “네. 사라의 어머님과 동생 분을 잠시 모셔오려고요. 연락은 해뒀고 괜찮은 시간을 알려달라고 했거든요. 전용기 좀 보내주셨으면 해서요.” 그 말에 대넌의 눈이 번쩍 뜨인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인들은 이혼에 부정적이라지? 어머니와 동생이 와서 말리면 되겠구나.” 순식간에 환해진 안색으로 우영의 어깨를 두드리는 그를 보며 우영은 그의 무심함에 쓰게 웃고 말았다. 대넌은 참 좋은 사람이지만 늘 저런 식으로 말을 해 될 일도 안 되게 만든다. “대넌, 사라 앞에서 절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러다 진짜 이혼 당해요.” “주의하지.” “제가 대넌의 지시를 받아서 연락했다고 할 테니 시간 정해지면 전용기만 보내주세요. 그리고 사라에게는 말하지 말고, 도착 시간에 맞춰서 사라와 함께 리무진으로 직접 공항으로 모시러 가보세요. 사라가 기뻐할 거예요.” “그래. 바로 그거야! 여자들은 그런 이벤트에 약하지! 거기다 사라는 감성적이라 그럼 당장에 기뻐서 다시 집에 들어올 거야!”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당장에 하늘로 날아갈 듯한 대넌을 보며 우영은 작게 혀를 찼다. 남자란 동물은 진짜 나이가 들어도 평생 아이인 것 같다. 대넌도 철들려면 멀었다. “대넌, 제발 부탁인데 그 말도 절대 하지 마세요. 다 된 일에 코 빠트리지 마시라고요.” 우영은 대넌을 위해 진심으로 그렇게 충고했다. 클랜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대넌을 꼭 닮았다. “명심하마.” “네, 꼭 그래주세요. 사라를 위해서도요.” “그래. 아, 그럼 이만 가보마. 저녁 만찬 약속이 있어서. 참, 오랜만에 알파베타감마 형제들이 모이는데 시간 나면 함께 가겠니? 다들 널 한 번 봤으면 하던데.” 그 빌어먹을 클럽 모임에 날더러 같이 가자는 소리십니까, 라고 생각하며 우영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젠 진짜 알파베타감마라면 신물이 난다. 1년에 한 번은 아이비리그 전체의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선상 파티가 있고 분기 마 다 세계를 돌며 예일대 클럽에서의 모임이 있지만, 초대장이 올 때마다 그 초대장을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렸 다. 물론, 그 클럽 출신의 선후배와 동기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일 관계일 뿐이다. “전 예일 출신이잖아요. 유펜 모임이니 혼자 다녀오세요.” “아니. 클럽 회원들이 널 보자는 거다.” “절 왜요?” “내가 소개해주고 싶어서.” “감사하지만 일이 많아서요. 파트너가 없으신 거라면 클레어를 데려 가시죠?” “클레어는 다들 봐서. 에이먼이랑 클랜이야 동문 클럽 직속 후배라 자주 봤고 닉쿤도 다들 알지만 널 보여준 적은 없어서.” “절 왜 보여주시려고 하시는데요?” “재키는 브루스의 딸이라 다들 아니 상관없지만 넌 얼굴 보여야지.” 재키야 그의 첫 번째 며느리가 되니 얼굴을 파는 게 당연하지만 나는 왜, 라고 생각하던 우영은 뭔가 묘한 느낌에 떨떠름한 얼굴로 대넌을 바라봤다. “저, 혹시…… 아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죠. 다녀오세요. 전 나머지 일 처리할게요. 잘 마실게요, 이거.” “그래. 그럼 수고해라. 내가 클랜 결혼식 끝나면 근사한 저택 하나 사주마.” “아니, 뭐 그러실 것까지야…….” “아냐. 내가 해주고 싶어. 이 김에 차도 바꾸고, 너 경비행기 자격증 있지? 경비행기도 한 대 사주마.” 아주 한 재산 챙겨주려는 그의 말에 우영은 계속해서 뭔가가 따끔따끔하고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신경 안 써주셔도 괜찮아요. 일 보세요.” “그래. 나중에 보자.” 어깨를 툭 치곤 다시 회의실을 나서는 대넌을 보며 우영은 대넌이 가져온 상자를 안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묘했다. 대넌이야 워낙에 통이 큰 사람이고 돈이 쓸 데가 없어 고민인 사람이니 저택에 경비행기 정도는 별거 아니다. 그의 마음에 든다면 요트나 전용기도 사줄 남자였다. 문제는 자신이 그걸 받을 이 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큰 공을 세워 그의 사업에 엄청난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 죽을 위기에 처한 그에게 간이 나 신장을 떼어준 것도 아니다. 사업가 체질이라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인지라 자신이 그만큼 하지 않는 이상 절대 그만큼 준다 말할 리가 없다. 그런데 대체 이건 무슨 조화인가. 자신에게 사라를 잡아달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사라가 기분이 좋아질 팀을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머릿속을 휙하니 스쳐가는 망상에 우영은 살짝 몸서리를 쳤다. 차마 구체적인 상상을 하는 것도 두려워 하얗게 굳은 얼굴로 상자를 빤히 바라본 우영은 어색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설마다. 대넌이 아무리 닉쿤과 그런 계약서를 썼다고 해도 쉽사리 그 각서 조건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이상한데…….” 의심스러운 듯 계속해서 상자를 노려보던 우영은 갑자기 울린 휴대폰의 벨소리에 놀라 재빨리 휴대폰을 받았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지금 시간 괜찮나?」 수화부에서 들려오는 나른하고 허스키한 음성에 우영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네, 지금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군기가 잔뜩 들어간 우영의 인사에 같이 일하던 대넌의 비서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우영을 바라봤다. 우영은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며 재빨리 회의실을 빠져나가 복도에 섰다. 「저번에 미룬 식사나 함께 했으면 하는데.」 부드럽고 고요하면서도 어쩐지 거역할 수 없는 느낌의 음성. 세르게이 네브즐린이라는 남자가 진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라는 건 이제 대강 눈치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다. 목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린다. 러시 아 마피아의 포스는 전화기를 통해서도 느껴지는 법인가 보다. “아, 저…….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리고 제가 지금 클랜의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 「아, 그런가? 그럼 잠깐 얘기를 하고 싶은데.」 세르게이의 느긋한 말투에 우영은 고개를 들어 복도 끝에 있는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6시 40분이었다. 좀 있으면 닉쿤이 올 시간이다. “제가 조금 있다 약속이라…….” 「그럼 잠깐 내려오지.」 “네?” 「지금 허르베지쿨사의 정문 앞이거든. 계속 세워둘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엘레나가 알려주더군.」 엘리, 너 진짜 나 위치 추적하고 있는 거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나 보다. 아니 하려면 닉쿤을 해야지, 왜 자신을 추적하는 거냐! “예, 잠시라면…….” 「그래. 그럼 기다리지.」 전화를 끊은 우영은 다시 회의실의 문을 열고 잠시 내려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서둘러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들어서며 우영은 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에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직접 스카웃 제의를 하러 온 거라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만약 차 안에서 총구를 들이댄다면 차 밖으로 뛰어내려야 하나, 아니면 그를 진정시켜야 하나. 아니, 어쩌면 납치를 할지도 모른다. “미리 911에 연락을 해야 하나…….” 진심으로 911을 누르고 대기하게 할까를 고민하던 우영은 어느새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냈다. 거대한 건물을 걸어 나와 막 입구에 서자 새하얀 리무우영이 보였다. 차를 찾을 필요도 없이 차 밖에서 대기 중이던 운전수가 보였다. 순간 우영은 어깨를 바싹 긴장시켰다. 어째서 운전수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근육을 갖고 있는 거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우영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그가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어준다.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우영이 차 안을 바라보자 안쪽 자리에 편안히 기대앉은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살 떨리도록 차갑고, 또 그만큼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오늘은 그의 근사한 은발과 잘 어울리는 진한 은색의 양복을 걸치고 보랏빛이 도는 드레스 셔츠에 연한 분홍빛의 윈저노트로 넥타이를 맨 채 였다. 안쪽으로 비치는 양복보다 조금 밝은 감의 조끼가 은은한 빛을 발해 더욱 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분 위기 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부하를 생일 날 죽게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앉지.” 남자의 그윽한 목소리에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순종적인 태도로 재빨리 리무진 안에 올라탔다. “와인 한 잔 할 텐가?” “아뇨. 일하는 중이라서요.” “그래? 이 시간까지 일이라니, 힘들겠군.” 이라고 말하며 세르게이는 앞의 테이블에 놓인 베뜨뤼스(Chateau Petrus)의 병을 들어 와인글라스에 따랐다. 순간 우영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와인을 마시는 건 좋은데 대체 왜 레드 와인을 화이트 와인잔에 따르는 걸까. “저, 보내주신 꽃과 나무는 잘 받았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받았다니 다행이군. 다들 내 선물이라면 질색을 해서 말야.,” 질색 팔색할 만하다. 누가 총이나 파리지옥 같은 선물을 받고 좋아할까. “마음의 선물인 걸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군.” “그런데 무슨 일로…….” “엘리가 이야기를 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이야기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무슨” “우리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올 생각 없나?” “없습니다.” 우영은 방금 전까지 세르게이를 대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정색을 하며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세르게이가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피아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죽어도 곱게 죽어야지, 공중분해 되는 것 만 은 사양하고 싶다. 자신의 내장기관이 하늘에 흩날린다는 건 참 불쾌한 일이다. 그리고 그걸 볼 사람들에게도 못 할 짓이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그야, 당신은 마피아니까, 라고 하려다 우영은 가장 그럴싸한 답을 내주었다. “지금 일이 마음에 듭니다. 적성에도 맞고요. 비서는 제 천직이거든요.” 순간 세르게이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묻는다. “그럼, 내 비서로는 어때?” 그건 더더욱 싫다.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말하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세르게이는 잔을 내려두고 담배를 찾아 들었다. 그 모습에 우영은 재빨리 테이블 위에 있던 라이터를 들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한 걸요.” “엘리가 자네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던데 거절한 걸 알면 실망하겠군.” 우영은 별로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세르게이의 기분에 맞춰주기로 했다. 세르게이가 자신을 정중히 대해주는 건 아무래도 엘레나 덕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아, 엘리가 전해달라던 게 있더군. 여기.” 그렇게 말하며 세르게이는 그의 옆에 있던 책을 주워 우영에게 건네주었다. 노먼의 책이었다. 엘레나가 이걸 자신에게 전해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이걸 전해주시러 여기까지 오시다니…….” “그건 옵션이지. 내 선물은 따로 있어.” 그렇게 말하며 세르게이는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있던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를 우영에게 밀었다. 커다란 전공 서적 사이즈의 상자를 본 우영은 이걸 받아도 뇌다 잠시 망설였다. 이 남자의 선물 센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라서인지 차마 그 상자를 냉큼 받아 챙길 수가 없었다. “……감사하지만 제가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생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는 모양이니 받아도 돼. 엘레나가 자넬 꽤 좋아해. 나도 자네가 마음에 들고. ” 싫다는 말보다는 좋다는 말이 좋기는 하지만, 어쩐지 네브즐린 남매의 호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피아를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그들과 얽히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마피아는 괜히 마피아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선물을 안 받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레나가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엘레나는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참 재미있는 아이였다. “그럼…… 받겠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이만 올라가 봐도 될까요?” “그래. 다음에 보지.” “네.” 마지막 인사를 마친 우영은 차문을 열고 재빨리 리무진 안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막 문을 닫으려는데 다시 한 번 우아한 세르게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우영.” “네?” 그의 부름에 재빨리 돌아서 그를 보자 안쪽에 앉은 그가 담배를 손에 든 채 우아한 어조로 묻는다. “동물 좋아하나?” “네? 네. 좋아합니다.” “다행이군. 그럼.” “예……. 그럼 이만.”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도 모른 채 차문을 닫은 우영은 운전수가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가 리무진을 멀리 끌고 갈 때까지 멍하니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무우영의 긴 차체가 완전히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우영은 그제 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나온 상자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잠시 이걸 볼까 망설이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 하고 상자를 열기로 결정 내렸다. 진한 갈색 빛의 무거운 상자를 오른팔로 안고 왼손으로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연 우영은 안에 든 물건을 보고는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이걸 어쩌라는 거야?” 상자 안에 있던 건 다이아몬드였다. 그것도 일반 다이아몬드가 아닌 1캐럿에 100만 달라를 호가하는 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게다가 이건 가공도 되지 않은 원석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던 큰 문제는 그 레드 다이아몬드의 원석이 주먹만한 크기라는 사실이었다. 전체 국민의 0.001%에 달하는 최상류 층 손님들을 위한 선물을 담당하기에 우영은 이게 진품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가끔 아주 까다로운 셀리브리티들에게는 직접 남아공에서 사온 원석을 선물했었기에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정도 크기의 원석을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더더구나 레드 다이아몬드라니 말도 안 된다. 이 한 덩어리의 가격은 어마어마하다. 물론 세팅을 끝내고 나면 몇 캐럿 남지 않겠지만 세팅을 한 뒤엔 더욱 엄청 난 가격이 될 것이다. 순간 어떤 한 마디가 우영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장물이다…….” “우영, 거기서 뭐해?” 한참을 못 박힌 듯 멍청하니 서 있던 우영은 자신을 부르는 그 음성에 재빨리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건물 안에서 검은색의 턱시도에 연한 은색의 보우타이를 맨 닉쿤이 빈틈없이 꾸민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영? 무슨 일이야?”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린 우영의 얼굴에 닉쿤은 다시 몸이 안 좋아진 건가 해 걱정스러운 듯 다가와 우영의 이마를 만졌다. “열은 없는데? 어디 안 좋아?” 우영의 양 볼을 감싸 쥔 채 열을 재던 닉쿤은 진짜 넋이 나간 듯한 우영의 얼굴에 가까이 얼굴을 대고 우영의 눈을 들여다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우영?” 계속되는 닉쿤의 부름에 우영은 멍한 눈으로 작게 웅얼거렸다. “……나 어떻게 해?” “왜?” “나 끌려가는 거야?” “응?” “장물소지죄로 나 경찰한테 끌려가는 거야? 아니지! 마피아면 FBI지? 나 변호사 어떻게 해? 내 고문변호사 완전 바보거든? 돈 주는 게 아까울 정도로 바본데 어떻게 해?” 정신을 잃은 듯 엉뚱한 소리를 하는 우영을 바라보며 닉쿤이 전의 머리카락을 차분히 넘겨주며 침착하게 달래기 시작했다. “잠깐, 우영. 천천히 설명을 해봐. 장물은 뭐고 마피아는 또 뭐야?” “그게, 세르게이가 와서 다이아몬드를 줬는데 장물인가 봐.” “……세르게이가?” “응. 이거 진짜 원석이거든? 확실해. 그것도 아주 순도 높은 거야.” 이제 보석과 명품에 대해서는 거의 전문가가 된 우영이 그렇게 말하며 안고 있던 상자를 열어보이자, 닉쿤이 안에 든 물건을 보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진짜 통도 크군.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이런 게 나왔다는 말은 없었는데? 세팅만 잘하면 레드 크로스 다이아몬드(Red Cross Diamond - 카나리 옐로우(Canary Yellow) 색상의 현존하는 레드 다이아몬드 중 가장 크고, 다이아몬드 중 다섯 번째로 큰 205.07캐럿 다이아몬드. 밝은 빛을 받으면 붉은 태양처럼 반짝이고 내포물의 배 열 이 십자가 형태인 스퀘어형의 다이아몬드. 현재 소유주를 알 수 없음.)를 능가하겠는데.” 냉정한 눈으로 세르게이가 남긴 원석을 살피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바싹 긴장한 채 닉쿤의 팔을 잡고 끌었다. “어떻게 해? 그 사람 진짜 이상해! 이걸 왜 나한테 줘? 어디에서도 이런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단 말야.” 닉쿤이 워튼 스쿨에 다니는 동안 우영은 아예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칼스배드에 위치한 GIA(Gemological Institution of America) 스쿨에서 6개월 간 GG과정을 수료하고 마스터 자격증을 취득했다. 보석 감정을 전문적 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감정은 할 수 있다. 이건 눈으로 딱 보기에도 최상품(最上品)이었다. 문 제는 이런 상품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 거였다. 우영은 대넌과 닉쿤, 그리고 에이먼이 쓰는 선물용 겸, 그리고 사라를 위해 우영은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회사와 연계해 희귀한 팬시 컬러 다이아몬드(유색 다이아몬드)가 나오는 대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특히나 블랙과 블루, 레드는 희귀한 색상이라 나오는 즉시 원석을 구입할 수 있도록 조취를 취해놨는데 지금까지 이런 크기의 레 드 다 이아몬드의 원석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광산에서 채굴 후 빼돌렸다 는 것이고, 그 말인 즉 장물이라는 의미다. 특히나 희귀한 붉은 색의, 그것도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붉은 빛의 다이아몬드다. 내포물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원석 상태임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투명해 휘광성이 뛰어나다. 모조라면 절대 이런 빛을 띨 수가 없다. “닉쿤, 이거 진짜야. 절대로 진짜라고. 남아공산이 확실해.” 우영의 보석감정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닉쿤은 우영이 당황한 이유를 대강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돌려줄게. 원래 크면 무조건 좋은 줄 아는 사람이야. 여차하면 내가 사면 되고.” “이거 장물이란 말야!” “……장물이래?”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장물이니까 나한테 준 거겠지! 그리고 이 정도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단 말야. 이 정도 순도에 이 크기의 원석이라면 벌써 내 귀에 들어왔지! 대넌이 당장에 사라에게 선물한다고 사라고 했을 거란 말야! 하지만 남아공 광산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 어떤 경매에도 이런 물건이 나 왔다 는 보고는 없었어! 그러니까 당연히 장물이지!” 다른 건 몰라도 보석, 명품, 그리고 꽃에 대한 우영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영이 들어본 적이 없다 면 없는 거다. “우영, 일단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이 무게감이면 400캐럿 정도야. 원석 모양도 거의 타원형이라 세공만 잘하면 300캐럿은 너끈히 나온다고. 센터너리를 능가할 거야. 게다가 레드 다이아몬드면 가격이…….” 현존하는 다이아몬드 중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고 알려진 센터너리 다이아몬드(Centenary Diamond-273.85캐럿)를 네 번째로 밀어낼 수도 있다. 거기다 레드 다이아몬드니 그 가격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다. 부르는 게 값이 아니다. 경매에 걸면 얼마까지 올라갈지 모르니 가격을 부를 수도 없다. “이것 때문에 난 살해당할지도 몰라.” 만약 이 사실이 소문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뒤쫓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FBI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르게이가 어떤 황실에서 몰랜 숨겨둔 물건을 강제로 빼앗았을 수도 있으니 그 나라의 비밀요원들이 파 견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이 정도 가치의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강도를 시작으로 자신에게 이 물건을 팔라고 협박하는 자들까지 줄줄이 나타날 것이다. 점점 창백해지는 우영의 표정에 닉쿤은 우영의 머릿속을 생생히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우영의 집에 유선채널을 모조리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우영의 이마를 툭툭 쳤다. “우영, 상상의 나래는 그만 펴. 가짜일 수도 있어.” “아냐. 이건 진품 느낌이야. 내가 진품하고 모조를 구분 못할 것 같아? 품질에 대해서는 육안으로 확신할 수 없지만 절대로 모조는 아냐.” “우영,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네게 그런 물건을 줄 리가 없잖아.” 딱 잘라지는 닉쿤의 말에 우영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그도 그렇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이런 물건을 이렇게 쉽게 던져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상한게 아니라 미친 거다. “……그렇……지?” “그래. 그 사람이 아무리 얼이 빠졌어도 그런 짓은 안 해. 요즘 모조 제조 능력이 뛰어나니 한 번 만들어서 너한테 시험해본 걸 수도 있어.” “……그런가?” “그래. 나라도 그런 장난은 안 쳐. 그 정도 보석은 최고로 번성한 왕실에서 여왕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하는 선물이거나, 우리 아버지 정도 되는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영원을 맹세하며 바치는 경우뿐이야.” “……혹시 나한테 마피아로 들어오라는 의미 아닐까? 이게 장물인데 내 손에 있으면 나도 한 패가 되는 거잖아? ” “널 마피아로 끌어들여서 뭐하게? 네가 총을 쏠 줄 알아? 마약을 제조할 줄 알아?” “나 스카웃하고 싶다고 했단 말야.” “가정교사로겠지.” “……그렇지…….” “그러니까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도 무섭단 말야. 이게 진짜면 어떻게 해?” “걱정 마. 절대 그럴 일은 없어. 그리고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진짜라면 돌려줘야지.” “돌려주는 건 돌려주는 건데, 너도 알잖아. 리전트(The Regent)랑 블루 호프(The Blue Hope)의 전설. 블루 호프 는 아직도 그 미스테리가 파헤쳐지지 않았다고. 태양왕을 천연두로 죽게 만들고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사형 당 했잖아! 게다가 헨리 필립 호프는 낙마해서 죽고.” 엘레나처럼 너무 몰라도 문제지만 우영처럼 너무 많이 알아도 문제라고, 닉쿤은 처음으로 통감했다. 우영은 지나치 게 많은 것들-보통 사람은 몰라도 되는 것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상상력이 이상한 데로 뻗어나가는 거다. 그 러 고 보니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녀석이 왜 소설에는 그렇게나 재능이 없었는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우영, 그거 거짓말인 거 알잖아?” “응?” “그 전설 모두 거짓말이야. 보석상이 보석을 팔려고 저주를 만들어낸 거야.” “하지만…….” “얼반 레전드(Urban Legend)랑 비슷한 거야. 사람들이 흥미로우니 그냥 소문 퍼트린 거지. 절대 진실은 아냐.” 블루 호프의 전설은 대부분이 거짓이었다. 그 소문들은 모두 보석상이 블루 호프를 비싸게 팔기 위해 지어낸 것 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을 믿고 자신만은 절대 저주에 걸리지 않는다 장담하며 블루 호프를 산 에블린은 진짜 저 주를 받은 듯 불행하게 죽었다. 하지만 닉쿤은 그 얘기는 우영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아니겠지?” “그래. 세르게이나 엘레나에게 돌려줘. 별거 아닐 거야. 요즘 모조품 수준이 GIA전문가들도 헷갈릴 정도라고.” 그 말에 우영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애초에 이런 게 존재할 리가 없어. 존재했으면 벌써 전 세계가 시끌시끌했을 거야, 그렇지?” “그래. 맞아. 그럴 리가 없지. 아무렴.” 그제야 납득한 듯 우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마음의 평화를 찾은 얼굴이었다. “우영, 그보다 식사하러 가야지.” “어? 응.” “다들 퇴근하라고 하고 준비하고 내려와. 난 통화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닉쿤이 한 걸음 물러선 채 우영에게 다정하게 속삭이자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우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건 물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돌아서 닉쿤을 쳐다봤다. “그런데 너 옷은 왜 그래? 어디 파티에 가?” “파티는 무슨. 그냥 식사하러 가는 거지.” “그런데 웬 보우타이야?” “그냥. 근사해 보이려고.” “나도 옷 갈아입어야 하잖아.” “정장 안 입어도 돼. 편한 데니까 신경 쓰지 마.” 자신은 저렇게 빼입고 자신에게는 편한 복장으로 가도 상관없다는 닉쿤의 말에 우영은 재빨리 어떤 건지 감을 잡 았다. “……또 어딜 빌린 거야?” “응. 통째로 빌렸으니까 사람들 눈 신경 쓰지 마.” “참, 재주도 좋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가게들을 통째로 잘 빌리냐? 웬만하면 대여도 안 해주는 데를?” “그게 내 능력이지.” “그래, 너 잘났다.” “왜? 새삼 반했어?” “그래. 네 재력에 반했어.” 농담 투로 툭툭 내뱉던 우영은 커다란 상자와 책을 챙겨든 채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우영의 등을 바 라보던 닉쿤은 핸드폰을 들고 어딘 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어눌한 음성의 여자가 전화를 받 는다. 「누구야?」 거친 그 목소리에 닉쿤은 순간 여전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니카 메를랜드. 예일대학 시절 알파베타감마 클 럽과 가장 가까웠던 여자 기숙사에 기거하던 여자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세계 최대의 보석을 생산하고 있는 그리핀 사의 둘째 딸이자 닉쿤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로 일명 Crow Danika라고 불리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석에 둘러싸여 자란 탓인지 반짝거리는 거라면 환장을 하고, 그 보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옷은 무조건 검은색만 입 는, 보석에 의한, 보석을 위한, 보석의 삶을 사는 여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남자들로 부터 진한 우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 졸업 후 얌전히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 보석 감정과 매매를 담당하나 했지만 역시나 그 습성을 못 버리고 보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는,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보석의 데이터를 다 갖고 있는 살아있는 보석의 메 카 였다. 고객을 상대할 때는 검은 정장에 보석을 휘감고 다니지만 영업이 끝나는 즉시 슬리브리스 셔츠 한 장 에 카 고 팬츠를 걸치고 장비가 든 배낭 하나를 들고 전 세계를 헤매며 보석 찾아 삼만 리인 까마귀가 마침 뉴 욕에 돌 아와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니카, 나야.” 「아, 닉쿤? 웬일이야?」 귀찮다는 듯 내뱉던 그녀가 금세 밝은 음성으로 답하자 닉쿤은 재빨리 용건을 뱉어냈다. “다이아몬드 원석 좀 찾아줘. 뭐든지 커야 돼. 블랙마켓을 뒤져서 원석이 아니라도 무조건 큰 걸로 찾아. 블랙 이나 레드, 블루, 그린 다이아몬드로 무조건 가공 상태는 300캐럿 이상. 원석은 500캐럿 이상.” 쉴 틈도 없이 줄줄이 무조건 찾아내라고 닦달하는 그 말에 상대 여자가 조금 신경질적인 투로 받아친다. 「닉쿤, 아무리 네 부탁이라도 그건 불가능해. 그런 건 찾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고.」 “그럼 일반 다이아몬드 3000캐럿 이상을 찾아내.” 「어이, 너 다이아몬드가 무슨 공산품인 줄 알아? 돈 줄 테니 만들어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냐, 그건. 요즘 8캐 럿짜리도 드문데 무슨 3000캐럿 소리를 해? 아프리카의 별(The star of Africa)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어.」 3106캐럿에 달하던 아프리카의 별은 이미 전설이 된 다이아몬드였다. 그 아프리카의 별을 잘라 만든 다이아몬드 가 컬리넌(The Cullinan Diamonds)인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조각이자 현존하는 다이아몬드 중 가장 큰 컬리넌 1세 (530.20캐럿)는 영국 왕실의 지팡이에 장식되어 있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컬리넌 2세는(317.40캐럿)는 영국 황실 왕관을 장식되어 있다. 왕실의 지팡이와 왕관에 장식된 두 개는 영국의 국보라 어떻게 해도 살 수 없다. 그 래서 닉쿤이 센터너리를 구입하려 무던히 애쓰던 중이었는데 세르게이에게 당했다. 우영에게는 절대 진품이 아닐 거라 말했지만 닉쿤이 보기에도 이건 진품이다. 확실하다. “너 세계 최고의 보석 상인이잖아. 경매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져서 찾아내. 아니면 암시장 거래를 통해도 좋아 . 나 진짜 급해. 무조건 구해. 큰 게 안 된다면 블랙 다이아몬드나 알렉산드라이트 캐츠 아이, 그것도 안 되면 퍼플리쉬라도 찾아내. 그리고 혹시 블랙마켓에 레드 다이아몬드 원석 400캐럿짜리가 나왔는지 알아봐. 그리고 누 구한테 팔렸는지도.” 닉쿤의 빠른 전언에 다니카가 담배를 빼물며 비웃는 투로 말한다. 「닉쿤, 너 꿈꾸냐?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잖아?」 “있어. 있으니까 찾아내. 무조건 찾아내. 그리고 그보다 한 급 위의 물건 무조건 찾아.” 「있다고?」 닉쿤에게 한심하다는 듯 타박을 주던 다니카의 목소리가 금세 환해졌다. 경악과 감동에 찬 그 음성에 닉쿤이 차 분히 답해준다. “그래. 내가 봤어.” 「레드 다이아몬드 400캐럿짜리가 진짜 있다고? 야,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GG마스터 자격 있는 사람의 평이야. 원석이야. 400캐럿이고, 남아공 산이래. 그 녀석이 그렇다면 확실해.” 「세상에. 나도 못 들은 얘긴데. 알았어. 찾아낼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낼게. 그런데 네가 그걸 어 디서 본 거야? 내가 볼 수 있어? 정확히 감정해봤으면 좋겠는데.」 “안 돼. 너도 오프 더 레코드야. 무조건 찾아내. 컬리넌보다 더 대단한 걸 찾아내보라고. 레드 크로스를 찾아냈 으니 그것도 찾아낼 수 있겠지. 이번에도 찾아낸다면 네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게.” 닉쿤의 그 말에 다니카가 잠시 후 기분이 상한 듯 투덜거린다. 「너 진짜 짜증나는 거 알아?」 “뭐가?” 「나한테는 힘든 일만 골라서 맡기잖아? 10년 전에도 갑자기 레드 크로스를 찾아내라고 해서 5년이 걸려서 겨우 찾아줬더니 이번엔 컬리넌보다 큰 걸 찾으라고? 너 진짜 양심 없어.」 “너도 찾는 거 좋아하잖아. 나 아니면 누가 너한테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맡기겠어?” 보석을 미친 듯 좋아하는 까마귀지만 다니카가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게 그 보석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힘든 미션 을 맡길수록 좋아하는 그녀였다. 투덜거려도 지금쯤 내심 두근두근 하며 벌써 장비를 챙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지만 하여간 너 짜증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 못 찾으면 네가 가서 캐와.” 없으면 만들어내라는 그 말에 다니카가 빽하니 비명을 내지른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 너 여자들한테 신사라더니 나한테는 왜 그래?」 “네가 여자였냐?” 「뭐라고?」 “넌 내가 남자로 보여?” 「미쳤냐?」 대학시절 다니카가 미친 듯 허르베지쿨을 드나들던 때가 있었다. 그때 묘하게 클레어와 짝이 맞아 클레어가 닉쿤 와 결혼할 것을 적극추천하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니카와 닉쿤 두 사람이 동시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바닥에 패대기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까마귀 다니카는 그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남성체’로 인 식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니카가 연애도 안 했다는 건 아니다. 사실 다니카가 허르베지쿨 저택을 드나든 건 심 심해서가 아니었다. 다니카는 그때 우영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다니카의 연심도 우영의 한 마디에 박살 나 버렸다. 은근히 대쉬를 하던 다니카를 보며 우영은 다른 친구들처럼 “넌 진짜 근사한 녀석이야.”라고 무신 경하게 내뱉어버린 것이다. 그 뒤로 다니카는 두 번 다시 허르베지쿨 저택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에 이먼과 데이트를 시작했다. 다니카는 수많은 여인들 중 에이먼의 취미를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허르베지 쿨 가 사람들 모두 다니카를 좋아했기에 에이먼과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에이먼도 결국은 네 번 정도 데이 트를 하고는 이별을 고했다. 이유는 다니카에게서 너무나 진한 동지애와 함께 격렬한 우정을 느껴 애인으로 만나 기엔 아깝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다니카를 만나며 에이먼이 내뱉은 이별의 말 역시 우영과 같았다. 『넌 진짜 근사한 녀석이야.』 그 후로 다니카는 더욱 더 보석에만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래. 하여간 네 덕에 졸리다 정신 확 들었어. 알았어. 까짓 거 찾아내지, 뭐. 좋아. 1년만 기다려줘.」 “일주일.” 「응?」 “일주일이야. 그 안에 찾아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야! 그게 말이 돼? 아프리카를 통째로 파 올려도 일주일 안에는 못 찾아!」 “찾을 수 있어. 넌 유능하니까.” 「……나쁜 자식. 알았어. 해볼게. 어디에 쓸 건데 그래? 선물용이면 네가 이렇게 애를 태울 리가 없고.」 “청혼할 거야.” 「레드 크로스로 한다며?」 “안 돼. 나 솔직히 지금 자존심 굉장히 상하거든? 생각 같아서는 컬리넌 1세를 훔치러 영국에 밀입국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야? 너 보석 같은 데에는 연연하지 않잖아?」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설명해줄게.” 「잠깐…… 혹시, 그 보석 감정했다는 게 우영이야? 우영이 400캐럿짜리 레드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은 거야?」 역시나 감이 좋은 다니카의 질문에 닉쿤은 침묵했다. 다음 순간 안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니카에게 까마귀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가 세 개가 있는데 첫 번째가 반짝거리는 것만 보면 환장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검은 옷만 입고 다닌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이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이러고도 네가 여자냐?” 문득 떠오른 듯 닉쿤이 공격하자 뚝하니 다니카의 웃음소리가 그친다. 「……죽고 싶냐?」 “하여간 찾아내.” 「찾아내긴 내는 건데, 그걸 찾아서 뭘 하려고? 우영 성격에 그걸 받고 기뻐하겠냐? 무서운거 줬다고 벌벌 떨지 ?」 다니카도 우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우영의 그 이상한 방향으로 발달된 상상력은 대학시절부터 유명했었다. 대체 왜 저런 애가 소설을 못 쓰는 거냐고 묻던 걸 닉쿤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100캐럿 이상 가는 다이아몬드는 그냥 장식용이야. 아니지, 솔직히 말해 장식용도 안된다. 박물관에나 진열해놔야지 그걸 어떻게 집에 둬? 하물며 펜던트나 왕관으로 쓸 것도 아닌데 무슨 가치가 있겠냐고?」 다니카의 말대로 확실히 100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는 주얼리용이라기보다는 그냥 관상용이다. 명화나 조각상과 같이 걸어놓고 세워놓고 멀리서 보는 거지 현실상에서 걸고 달고 사용할 수는 없다. 닉쿤 역시 그걸 잘 알고 있 었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걸 구해주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라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니카 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뻔하기에 닉쿤은 냉정하게 그녀의 말에 받아쳤다. “까마귀, 너 은근히 말 돌리지 마. 어차피 우영에게는 필요 없으니 레드 다이아몬드 내놓으라는 소리 아냐?” 「맞아.」 “내가 벨트로 만들어서라도 우영 허리에 채워놓을 테니 넌 찾아오기만 해.” 「거참, 노먼 떼어놨다 싶었더니 이번엔 너냐? 우영도 참 팔자 사나워.」 “그래, 너 같은 거한테도 사랑 받았으니 아주 팔자 사납지.” 「닉쿤, 너 자꾸 이 따위로 굴면 안 구해주는 수가 있어?」 “네 성격에 잘도 그러겠다. 빨리 찾아내. 클랜 결혼식까지 찾아내는 거야. 널 믿어.” 싱긋 웃으며 도저히 거절 못할 말로 마무리하는 닉쿤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다니카가 한탄한다. 「내가 대체 왜 너랑 친해진 거지?」 “우영하고 어떻게 해보려고.” 사실 닉쿤은 처음부터 다니카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니카와 친해진 것은 다니카에게는 전혀 경계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남자인 노만은 꽤 위험하다 감지했지만 여자인 다니카에게 연적의 느낌을 받지 못했던 건, 우영이 다니카를 진심으로 ‘좋은 녀석’이라고 느끼고 있던 탓이었다. 그러니까 다니카는 우영에게는 이성은커녕 동성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는 그냥 ‘녀석’이었다. 아니, 어쩌면 ‘ 형님’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기숙사 시절 알파베타감마 클럽 멤버들이 다니카를 클럽의 명예 회원으로 받아들여 ‘형제’라 부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래, 그랬지. 그랬었다. 알았어. 끊어. 암시장부터 뒤져보게.」 “일주일이야.” 「끊어.」 그 말에 막 전화를 끊으려던 닉쿤은 은근한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니카.” 「응?」 “넌 진짜 근사한 녀석이야.” 다니카 메를랜드, 30년 인생 최초의 실연이자 최고의 고통과 아픔을 선사한 그 대사를 그대로 내뱉어주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워낙에 재미있는 친구라 가벼운 기분으로 통화를 끝낸 닉쿤은 고개를 들어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던 회의실의 불빛이 사라진 걸 보곤 안쪽에서 기다리던 누군가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 이는 확인한 뒤 느긋하게 건물 앞에 선 닉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우영을 보며 저 멀리서 나타난 리무진에 손짓을 해보였다. 검고 긴 차체가 다가오는 것과 같이 상자를 잔뜩 든 우영이 복도를 가로지른다. 토요일 오후라 텅 빈 건물의 복도를 나온 우영이 문을 나서며 닉쿤에게 말을 건다. “기다렸지? 가자.” “뭐가 그렇게 많아?” “이건 대넌이 갖다 준 거야. 그런데 차는?” 가장 큰 상자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던 우영의 말과 거의 동시에 그들의 앞으로 검은 리무진이 멈춰 섰다. 손을 뻗어 우영이 들고 있던 짐을 받아든 닉쿤은 차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 “……이건 또 뭐야? 너 또 이상한 시 읊으면 나 그냥 자리 박차고 나가버릴 거야.” 예이츠의 시를 이상한 시라고 폄하하는 예일대 영문과 졸업생을 웃는 표정으로 바라본 닉쿤은 안심하라는 듯 천 천히 말해주었다. “설마. 한 번 한 거 두 번 써먹지는 않아. 그것도 너한테는 먹히지도 않는 걸.” “다행이네.” 그 말에 안심을 한 우영은 조용히 리무진 안에 올라타 닉쿤에게 손을 뻗어 상자를 받아 안쪽의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곤 자신이 안쪽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뒤 닉쿤에게 손짓을 했다. 그 손에 이끌리듯 바로 옆에 올라탄 닉쿤은 차문을 닫았다. “오늘은 리무진 타는 날인가 봐.” 자리를 잡고 앉은 우영이 그렇게 말하자 닉쿤이 우영을 돌아보며 묻는다. “왜?” “세르게이가 흰색 리무진을 타고 나타났었거든. 그 사람 진짜 이상해.” “……리무진을?” “응. 저녁 먹자는 거 겨우 거절했어. 원래 아무 생각 없다지만 그래도 하도 하는 행동이 이상해서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순간 닉쿤은 자기도 모르게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말하려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세르게이에게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건 세르게이의 그 독특하고 무심한 성격 탓도 있지만 그가 하는 행동이 평소와 다 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전혀 모르는 남자가 우영에게 꽃이나 나무를 보냈다면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세르게이라면 원래 그러려니 하게 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이상한 선물을 잘 보내는 걸로도 유명한 남자니까. 하지만 세르게이가 저녁 초대를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리무진을 타고 누군가를 픽업하는 경우도 드물다. 아니,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레드 다이아몬드가 마음에 걸린다. 우영의 말대로 장물일 가능성이 99%이긴 하지만 그 존재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다. 사실 돈보다는 유일무이하다는 사실에 가치가 있는 거다. 아무리 세르게이가 성격이 독특하다 해도 그런 걸 쉽사리 건네줄 리가 없다. 세르게이 네브즐린 역시 돈에 연연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엄청난 물건을 아무나에게 내줄 정도로 뇌가 없는 건 아니다. 자신이 농담으로 공작새라 부르긴 하지만 엘레나처럼 머리가 딸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감각의 핀트가 어긋난 것일 뿐 머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비상하게 좋아, 텔레비전 안에 계시는 신께서 케이블 보급을 위해 만들어낸 인간이라 불리는 천재적인 기획자 에이먼조차 같이 일하기 무서울 정도로 기획력이 좋다고 칭찬할 정도의 남자였다. 이게 겨우 우영이 경계를 하지 않는 건 좋은데 슬슬 닉쿤이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게다가 그의 남색 취미는 유명하다. 물론 금발벽안의 까칠한 미소년들이 취향이긴 하지만, 그 남자라고 취향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에반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우영은 진짜 이상한 인간들에게 인기가 있는 타입이었다. “좀 경계해야겠군.” “응?” “아냐. 오늘은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와 줘. 죽을 때까지 못 잊을 밤을 만들어줄 테니.” “죽고 싶은 밤이나 만들지 마라.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멀쩡한 차 놔두고 리무진 끌고.” “힌트 하나 줄까?” “무슨 힌트?” “네가 나랑 처음 본 영화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해?”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 “땡.” “아…… 시스터 액트 2였나?” “아니.” “쥬라기 공원?” “영화관에서 본 거 말고.”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기억해봐.” 아리송한 힌트에 눈살을 찌푸린 우영은 심각한 얼굴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에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허르베지쿨 가는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이었지만 딱 세 가지만은 아이들에게 절대 해선 안 된다고 제어하고 있었 다. 하나가 설탕과 색소, 그리고 트랜스지방이 함유된 음료와 패스트푸드 종류였고, 둘째가 마약, 그리고 셋째가 텔레비전이었다. 현재는 에이먼이 운영하고 있지만 당시 케이블과 지방 방송을 통틀어 20여개의 채널을 소유하 고 있던 방송계의 거물인 대넌이 막상 그의 자식들에게는 절대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건 진짜 아이러 니한 일이었다. 우영도 정확히 기억을 하는데, 미국에 처음 와 영어를 배울 때 텔레비전을 통해 배웠는데 당시 대넌이 운영하던 ‘kids kids'라는 채널의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그 광고인 즉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다 못해 그 채널을 달아주자, 아이들과 소 통을 하기 시작해 마침내 학교 최고의 인기 학생이 된다는 거였다. 쉽게 말해 아이가 따돌림을 당한 이유가 그 채널에서 하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해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탓이라는 내용의 광고였다. 그런 남자가 막 상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못하게 했다는 건 참 웃기는 얘기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간 다. 우영이 허르베지쿨 저택에서 가장 놀랐던 게 그 집에는 텔레비전이 딱 한 대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사라의 방에만 있는 거였다. 그 외엔 1층에 영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영사실은 영화관처럼 꾸며져 납치 위험 때문에 영화관도 제대로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직접 필름을 구해다 틀거나 사회와 문학, 역사, 언론에 대한 다큐 멘 터리를 보는 용도로만 쓰였다. 지금도 실제 셀리브리티들 중에 가정교육을 엄하게 시키는 집안은 아예 못 보 게 하는 건 아니라도 하루에 30에서 1시간 사이로만 텔레비전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집안이 대부분이었다. 텔레 비전뿐 아니라 오락기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생일에 유명한 오락기를 선물하는 사람은 무식하고 예의 없 는 사 람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셀리브리티의 아이들은 어드벤처 게임 대신 보디가드와 전문가 들을 데리고 직접 이집트로 날아가고, 레이싱 게임 대신 정원에 소형 레이싱 장을 만들어두고 페라리에 서 나오는 아동용 스포츠카를 타고 달린다. 여자 아이들은 인형 놀이를 하는 대신 개인 스타일리스트들을 데리 고 다니며 명 품 브랜드에서 나오는 키즈 브랜드의 드레스를 원하는 대로 사다 입을 수 있다. 삶 자체가 가상적 이라 가상공 간 에서의 게임을 할 필요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허르베지쿨 저택에 게임기나 텔레비전이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집에 들어간 뒤 사라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방에만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가끔 한국의 드라마나 만화들을 녹화한 비디오를 갖다 틀어주었다. 한국어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녀의 배려였다. 문제는 그걸 눈 치 챈 허르베지쿨 사 남매가 종종 자신의 방으로 몰래 렌탈한 비디오를 들고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 다. 물론, 비디오만 들고 온 건 아니었다. 집에서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코카콜라나 프랜치 포테이토, 그리고 과자나 카라멜 등을 학교에서 입수해 가방에 싸 짊어지고 들어와 몰래 갖고 나타나곤 했다. “아…….” 순간 뭔가가 스치는 듯해 우영은 닉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닉쿤이 싱긋 웃어 보인다. “이제 기억났어?” “응. 그런데 그건 왜?” “가 보면 알아.” “설마 이 바쁜 때에 진짜 거기로 가려는 건 아니지?” “그러고 싶지만 오가는 시간이 낭비라 패스. 가보면 알아.” 닉쿤은 기억해낸 우영이 대견하다는 듯 우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영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닉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보면 알아.” 리무진까지 끌고 온 것에 비해 닉쿤이 우영을 데리고 온 곳은 레스토랑이나 바가 아닌 그의 아파트였다. 차에서 내려 짐을 대신 든 닉쿤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우영은 이건 또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닉쿤을 바라봤 다. 그 표정을 정확히 읽어낸 닉쿤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가보면 알아.” 오늘은 카드 대신 지문인식기를 쓰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57층과 58층의 불이 동시에 들어왔다. “뭐야? 이거 고장 난 거 아냐?” “아냐.” “57층도 불이 들어오는데?” “내가 샀다니까.” “……진짜 샀어?” “응. 원래는 터서 2층으로 사용할까 했는데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계단 하나만 이어놨지.” “돈이 썩었다.” “너, 내 재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내 재력에 반했다면서?” “재력은 재력이고 쓰는 건 쓰는 거지. 너희 집 사람들은 진짜 금전 감각이 없어.” 그 말에 닉쿤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영이 허르베지쿨 저택에 온 뒤 어느 정도 속을 터놓게 된 뒤 학교에서 돌아오다 중간에 차가 고장 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닉쿤도 막 정식 면허를 받은 뒤라 직접 차를 몰고 다녔는데 누가 차에 장난을 쳐놨는지 엔진 과열로 차가 멈추자 그대로 견인차를 불러 차를 보내고는 자신은 택시를 타고 페라리 매장으로 가 전시된 차를 사서 끌고나온 일이 있었다. 집에도 차가 많은데 왜 사냐, 그럼 차라리 택시를 타고 집에 가지, 라고 하자 “그냥.”이라고 답을 해 우영을 기함시켰다. 닉쿤뿐 아니라 허르베지쿨가 사 람들- 사라를 뺀- 모두 마찬가지였다. 클레어도 외출 중에 구두나 옷에 문제가 생기면 그대로 차를 타고 돌아오는게 아니라 매장에 전화를 해 점원에게 옷과 구두를 들고 그녀가 있는 곳까지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아주 작은 흠이 난 옷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우영이 몇 번인가 그 이야기를 하며 “좀 아껴라.”라고 말하 자 돌아온 답은 허망했다. 『그거 아껴서 뭐하게?』 진짜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왜 아껴야 하냐고 묻는데 더는 답할 말이 없어 우영은 그냥 되는 대로 살라고 해버렸다.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는 힘든 숙제처럼 아무리 쓰고 써도 돈이 쌓이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아낀다는 건 진짜 쓸데없는 짓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57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닉쿤이 정장을 입은 채 우영에게 길을 내준다. 닉쿤의 아파트와 비슷한 구도로 내리자마자 현관문이 보이는 구조였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복도를 바라보던 우영이 다시 닉 쿤을 돌아보자 닉쿤이 복도에 놓인 콘솔 위에 우영의 짐을 내려두곤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를 한다. 오늘따라 유독 친절하고 부드러운 닉쿤의 태도에 슬쩍 그를 바라본 우영은 얌전히 그를 따라 그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내부를 본 순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건 뭐야?” “영화관.” “그건 나도 알아.” 전체적으로 어두운 내실의 내부에는 정면에 거대한 스크린이 걸려 있고, 바닥에는 커다란 고급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이음새 하나 없이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양탄자였다. 대체 저걸 어떻게 57층까지 올려온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바닥에서부터 내부를 다시 돌아보자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단 두 개의 나무 의자가 있었다. 벽에는 여기저기 오래된 명화의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거기까지는 VIP를 위한 식 당 용 극장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 스크린의 반대쪽에 있는 낡은 바가 보였다. 그 바 위에는 「Rick`s Cafe Americain」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그 팻말이었다. 순간 우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거 어떻게 만든 거야?” “똑같이 제작한 거야.” 그러고 보니 바의 모양도 비슷하다. 슬쩍 바를 돌아보던 우영은 그 옆에 놓인 오래된 피아노를 보곤 진짜 놀란 얼굴로 닉쿤을 돌아봤다. “저거 소리 나?” 처음에는 모형인가 했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우영이 그렇게 묻자 닉쿤이 웃으며 우영을 바라본다. “응. 구하느라 애먹었어. 같은 년도 모델들은 거의 사라져서 말야.”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우영을 테이블 앞으로 데리고 간 닉쿤이 의자를 빼며 자리를 잡아주자 우영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의자도 똑같네. 대단하다. 역시 돈이면 다 되는구나.” “무슨 소리야? 정성이야, 정성.” “아무리 정성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못 사지. 이 의자는 새로 만든 것 같은데, 저 피아노는 너무 보존 상태가 좋은데?” 피아노가 탐난다는 듯 쳐다보는 그 얼굴에 닉쿤이 테이블 옆에 놓인 트레이에서 접시와 잔을 세팅하며 걱정되는 바를 경고했다. “너 여기까지 와서 물건 감정하지 마. 저거 어디 선물로 보낼 생각은 꿈에도 말라고.” “그래도 아깝잖아. 저거 경매에도 잘 나오기 힘든 물건인데. 릭 브레이먼 씨가 카사블랑카 팬이잖아.” 그 와중에도 저 피아노를 진짜 보낼 생각인 듯 눈을 반짝거리는 우영을 웃으며 내려다본 닉쿤은 와인 병을 들고는 마개를 따며 부드러운 투로 타박을 줬다. “누가 우영 케이먼 아니랄까 봐 그래? 일은 좀 잊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클링 와인(샴페인)의 뚜껑을 연 닉쿤은 우아한 움직임으로 우영의 잔에 뵈브 클라코 (Veuve Clicquot)를 따랐다. 테이블 위에 있는 캐비어와 스파클링 와인의 이름을 본 우영은 웃음을 터트렸 다. “너, 여기서 ‘그대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s.)’이런 대사 하면 상 엎어버릴 거야.” 웃음을 밝고 목소리도 유쾌한 듯 들리지만 우영의 눈가에는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와인 세례를 한 번 받 아본 경험이 있던 터라 닉쿤은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알아. 나도 그런 쪽 팔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해.” “네가 무슨 험프리 보가트냐? 뵈브 클리코를 땄으니 그 말도 해보지? ‘자, 독일 군이 닥치기 전에 이 샴페인들 을 다 마셔버리자고. 아직도 세 병이나 남았어.’ 너, 설마 진짜 세 병을 준비한 건 아니지?” 그 말에 닉쿤이 웃는다. “아직도 그 대사들을 외우고 있어?” “대학 때 카사블랑카의 대사들을 텍스트로 바꿔 논문을 썼거든. 그런데 뵈브 클리코라면 너무 싸게 먹히는 거 아냐?” 닉쿤라면 절대 마시지 않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의 와인을 돌아보며 우영이 타박을 하자 닉쿤이 자신의 잔을 채 우며 반박한다. “어이, 이건 분위기야, 분위기. 난 무드를 중시한다고.” 유난히도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병을 감싼 채 우아한 동작으로 와인을 따르는 닉쿤을 우영은 멍하니 바라봤다. 닉쿤이 차나 술을 따르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근사하다. 노란 빛이 도는 투명한 스파클링 와인마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우아하게 찰랑거리며 흘러내리는 듯했다. 우영이 잠시 동안 넋이 나간 듯 닉쿤을 바라보고 있자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르던 닉쿤이 싱긋 웃는다. “내가 그렇게 근사해?” “술 따르는 건 멋있어. 인정.” “분위기 없기는.” 그 말에 우영은 샴페인 잔을 들며 닉쿤에게 이 상황에서 가장 궁금한 바를 물었다. “그래, 좋다. 그래서 이 다음은?” “그대 눈동자에 건배?” 닉쿤이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한 대사를 읊으며 잔을 들자 우영 역시 웃으며 잔을 마주쳤다. “앉아.” 우영이 아직도 서 있는 닉쿤에게 의자를 권하자 닉쿤이 우영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바 쪽으로 다가섰다. 뭘 틀려는가 싶어 턱을 괴고 있자, 희미하던 불빛이 사라지고 대형 스크린 위로 카운트가 시 작 된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는 카사블랑카였다. 닉쿤은 비록 마지막 장면을 남겨둔 채 잠들어버렸지만, 그 게 두 사람이 함께 처음으로 본 영화였다. 방 안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 새벽에 몰래 불을 끄고 소리를 죽인 채 봤던 거지만, 지금까지도 우영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영화는 그 영화뿐이었다. 물론, 처음의 감동은 어디에 갖다 팔아먹었는지 대학 시절 논문을 쓸 때에는 ‘바람난 여편네가 사람 여럿 잡는 구나.’라는 감상뿐이었지만 여전히 카사블랑카 영화 속의 함축적인 대사들은 인상 깊게 남았다. 특히 다시 만난 릭과 일자가 일자의 남편을 앞에 두고 그저 아는 사람인 듯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던 그 대 사 들은 잊을 수가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별을 한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때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 과 미안함. 그리고 어떤 깨달음.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파 리에서의 추억뿐이었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접어야 하고, 후회 없이 사랑했기에 서로의 자리로 돌아가 살 힘을 얻었다. 그 영화를 곱씹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랑을 잊고, 아니 포기한 뒤 다시 닉쿤을 만났을 때 자신은 어떤 감정 이 들까. 어떤 얼굴로 그를 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랑은 상처로 남아있을까, 추억으로 남아있을까. 사랑 했 던 추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도 그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없다. 그 사랑이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임을 알게 된 이상,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닉쿤의 말대로 닉쿤도 자신도 여전히 끝을 내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도 그게 어떤 건지, 미련인지, 진짜 사랑인 지 알 수 없어 그 자리에 선 채 헤매고 있는 거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는 사이 드디어 ‘0’이 나타난 화면 위로 새하얀 바닷가의 풍경이 펼쳐졌다. 순간 그 위로 드러난 소년의 모습에 우영은 멍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인사해 봐, 우영.」 화면에 잡히는 건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음성은 닉쿤이였다. 처음 허르베지쿨 저택으로 간 뒤 얼마 후 허르베지쿨 소유의 해변으로 나갔던 날, 찍은 비디오였다. 그리고 비디오를 찍은 건 닉쿤이였다. 「어서. 우리 집은 대대로 매해 같은 날 비디오를 찍는 게 전통이라고. 너도 익숙해져야 돼.」 그 말에 우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건 거짓말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사라는 그런 전통 따위 없다고 말했다. 「이건 성장기록이야. 나무에 키를 새기는 거랑 똑같아.」 닉쿤은 저때도 뻔뻔스럽게 사기를 잘 쳤었다.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며 계속해서 주변을 빙빙 도는 닉쿤의 카메라 에 어색하게 웃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비친다. 분명 그게 자신인 줄은 알지만 동시에 아주 낯설어 보였다. 저게 언제던가, 자신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먼 과거의 일로만 느껴진다. 저 케케묵은 비디 오를 찾아낸 닉쿤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테이블에 기대앉는데 바로 뒤에서 맑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닉쿤, 이건 또 무슨 수작…….” ‘무슨 수작이야?’ 라고 물으려는 순간 부드럽게 이어지던 피아노 소리 위로 닉쿤의 노랫소리가 겹쳐진다. You must remember this A kiss is still a kiss A sigh is just a sigh The fundamental things apply As time goes by “뭐야?” 턱을 괸 채 뒤를 돌아본 우영은 기가 차다는 듯 그렇게 웃었다. 우영의 반응에 이쪽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치는 닉쿤에게 우영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새하얗던 화면이 바뀌며 어두운 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닉쿤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닉쿤과 찍었던 사진들이 하나씩 스쳐가기 시작했다. And when two lovers woo They still say “L love you” On that you can rely No matter what the future brings As time goes by 카사블랑카에 나온 곡보다 훨씬 더 느리고 감미로운 피아노 반주 위로 닉쿤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흐르며 화 면 위로 즐거웠던 추억들이 스친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닉쿤이 뭘 목적으로 했든, 이 계획은 확실히 성공했다. 잊고 있던 추억을 되살린다는 건 닉쿤에게 아주 유리한 고지를 마련해주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저때 자신을 살린 게 닉쿤이였다. 수십 번 포기하고 싶었던 때에도 자신을 버 티 게 해준 게 닉쿤이였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추억이 스친다. 그리고 그때 얼마나 닉쿤에게 위로받았던가, 또 얼마나 사랑받았던가 하는 기억이 스치자 닉쿤에 대한 원망도 함께 고개를 쳐든다.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영리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 바 람기는 타고난 거다. 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친구, 동생, 형……. 그리고 연인. 미련이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사람. 어떤 미래가 다가온다 해도, 긴 세월 속에 흔적으로 남는 사람. Moonlight and love songs Never out of date Hearts full of passion Jealousy and hate man needs man And man must have his mate That no one can deny woman이 man으로 바뀐 부분을 부르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닉쿤의 얼굴에 작게 웃음을 토해낸 우영은 화면에 스치 는 두 사람의 대학 입학 축하 파티의 한 장면을 보곤 슬픈 얼굴을 해보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들이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애틋하고 아름다운, 어떤 순간도 버릴 수 없는, 추억들이다. 저 추억들만은 앞으로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죽는 순간에도 기억할 것이다. It’s still the same old story A fight for love and glory A case of do or die The world will always welcome lovers As time goes by 마지막 소절이 끝난 뒤 반주마저 끝나자 그와 함께 영상이 멈춘다. 마법 같은 시간이 멈추고 다시 현실이 돌아온 다. “감동 받았어?” 멍하니 멈춰진 화면을 바라보던 우영은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놀라 고개를 들려다 목가에 닿은 차가운 느낌에 다 시 고개를 숙였다. “뭐야?” “청혼.” “……미쳤냐?” 짤막하고 담백한 그 말에 닉쿤이 작게 웃는다. “그럼, 고백타임이라고 생각해둬.” 그 말과 함께 목에 닿은 차가운 줄이 가라앉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을 들어 체인을 들어보자 눈이 부실 정도 로 반짝이는 플래티넘 반지가 걸려 있었다. “이건 뭐야?” “네 마음이 정해지면 그 반지를 끼면 돼. 그때까지 기다릴게. 평생이 걸려도.” 다정한 음성과 함께 정수리 위로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이 정도면 선수 급이다, 라고 생각하며 우영은 한숨을 내뱉었다. 심플한 플래티넘으로 된 평범하고 깔끔한 링이지만 세공이 몹시 섬세하고 화려하다. 본 적 없 는 작품이었다. “누구한테 맡긴 거야?” “닐 레인(Neil Lane).” 과연, 깔끔한 디자인을 보며 감탄하는 사이 옆면에 0.2캐럿 정도의 다이아몬드가 정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 있는 게 보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 부리는 사치였다. “……마음이 정해지면 말해줘. 넌 몰아치면 쓰러지는 타입이니까. 천천히 기다릴게.” 허르베지쿨 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을 친구의 체온을 느끼며 우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주일…….” “응?” “일주일 줄게.” “……응?” “일주일 뒤, 클랜의 결혼식 때 내가 이 반지를 끼고 나타난다면 네 마음을 받아들인 거지만, 아니라면 아냐. 일 주일 동안 다시 내 심장을 뛰게 해봐. 능력껏.” 해보지도 않고 무서워 포기하느니 한 번쯤은 도전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한 번이다. 딱 한 번만 마음이 가는 대로 한 번 해보고 싶다. 눌려있던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추억을 남기고, 후회하지 않도록 도전해볼 생 각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해도 한 번쯤은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도박이었다. 그리고 실패한다면, 아니 어차피 실패하 겠지만, 그럼 깔끔하게 포기하고 도망치면 된다. 도전하지도 않고 물러서는 건 싫다. 더 이상 남의 눈치나 보면서 모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살고 싶지는 않다. 한 번은, 일생에 한 번쯤은 이런 휴가를 받아도 된다. 자신에겐 그럴 권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그 정도 상은 받아도 된다. 그럴 자격이 있다.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게, 죽는 그 순간 후회하지 않도록 꿈같은 일주일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깨끗하게 잊고, 모든 미련을 버릴 것이다. 미련이 남은 건 서서히 타오른 불꽃이 제대로 타오르지도 못한 채 식어버린 탓이다. 아직도 다 타지 못한 사랑이 남아 있었다. 그 남은 사랑을 모두 태우고 이번에야 말로 재로 만들어 저 멀리로 날 려 보낼 것이다. 깊고 강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 기억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면 된다. 후회하지 않게 사랑했노라고 말하며,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 닉쿤은 닉쿤의 자리에서, 자신은 자신의 자리에서. “고마워.” 바로 귓가에서 닉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사이 닉쿤의 팔이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아오 는 느낌에 우영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닉쿤의 팔이, 그리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완벽한 함정을 파 준비한 주제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포기했듯, 닉쿤도 포기하 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닉쿤은 포기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닉쿤의 사랑이 자신의 것보다 더 독하 고 질겼던 걸 수도 있다. 그러니 불안한 게 당연하다. 자신이 불안하듯 닉쿤도 불안해했을 것이다. 어떤 인간 도 완 벽하게 타인의 감정을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 불안이 더욱 더 서로를 사랑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욱 더 안타깝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 다. 마음껏 사랑하고 상대의 애정을 확인하면 곧 마음도 편안해질 것이다. 포기도 쉬워질 것이다. 자신에게서 있어 시작은 곧 끝을 의미했다. 만남은 이별을, 사랑은 실연을. 늘 그랬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다 싸놓은 가방을 보며 언제 이곳을 떠나야 하나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방을 풀고 짐을 늘어놓고, 그 시간을 즐긴 뒤 그 휴가가 끝나면 깔끔하게 가방을 싸들고 떠날 것이다. 준비 가 필요한 건 마음이었다.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이별을 두려워하기보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깔끔하게 포기하 는 쪽 이 현명하다 “……기회를 줘서 고마워.” 자신의 목을 꽉 안을 닉쿤의 팔을 잡으며 우영은 고개를 숙였다. “사랑해.” 닉쿤이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다. 그 말에 우영은 닉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해봐, 샘.(Play it, Sam.)” 카사블랑카의 대사를 반복하자 닉쿤이 작게 웃는다. 그리고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은 듯 한 번 더 다정하게 속 삭인다. "사랑해.”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일주일이었다. ----------------------------------------------------------------- Ameriain 은 불어로 미국인 남성이라는 뜻입니다. ^^;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릭의 카페 이름이 'Rick`s Cafe Americain'이라 그대로 적었습니다. 이 부분을 쓰느라 카사블랑카를 영자막으로 전부 다시 봤습니다. 대사가 빠른 부분은 놓칠 걸 각오하고 봤는데, 카사블랑카는 영자막 버전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한국어 자막에서는 "뵈보 클리코"(그 유명한 그대 눈동자게 건배를, 할 때 마시는 샴페인 이름입니다. 그래도 영 자막으로는 비교적 안 웃깁니다.;) 영화 중에는 릭의 카페의 지배인이 독일 장교들에게 권하는 장면에 이름이 나 오는데 한국 자막에서는 "버트리코"라고 표기해놓은 걸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일설에 나오는 일자의 대사 "뵈브 클리코라면 남겠어요.(If it`s Veuve Clicquot I`ll say")라는 대사는 영화 중에 안 나옵니다.;; (아마 뵈브 클리코 마케팅이었던 듯.) 세 번이나 돌려본 결과 안 나옵니다. 저 대사가 나온다는 얘기에 "재규어라면 남겠어."라는 우영의 대사를 쓰려고 희희낙락한 결과 참패당했습니다.; 마지막 나오는 대사 "Play it, Sam"은 우디 알랜이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유명한 잉그리트 버그만의 대 사입니다. 릭이 데리고 다니는 샘이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다시 한 번 "As time goes by."를 연주해달라는 요청이 었죠. 하여간, 그렇습니다. ㅠㅠ 눈이 많이 아프네요.....; P.S : 닉쿤이 부른 As Time goes by 는 Jason Donovan의 버전입니다. ^^; 줄리 런던의 버전을 제일 좋아하지만, 닉쿤에게는 현대적인 제이슨 도노반입니다. *-_-* Chapter 8 몸이 나른하면서도 가볍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잠에 분명히 평소 기상 시간을 훨씬 넘겼다는 걸 알면서도 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밍기적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벌써 환한 햇살이 발치에 닿고 있었다. 평일이라면 사무실에 도착해 막 블라인드를 올릴 때 느껴질 법한 정도의 햇살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니 마음껏 자도 된다. 무의식중에서도 요일을 계산한 우영은 그 러 다 문득 자신의 침실에는 늘 블라인드가 쳐져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늦은 시간에 들어와 늦게 잠들어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침실 안은 1년 365일, 청소를 할 때 외엔 늘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비가 올 때도 블라인드를 살짝 밀고 밖을 확인할 뿐 블라인드를 걷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햇살이 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기가 어디지, 라는 생각에 눈을 번쩍 뜨자 새하얀 베갯잇 위에 놓인 장미 한 송이가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 파트와는 달리 주변의 다른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 풍경. 환하게 트인 창밖으로 파란 구름이 보였다. 하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마치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이제 좀 일어나지? 아무리 휴가라도 너무 자는 것 같은데?”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자 흰색 셔츠에 검은 면바지를 입은 닉쿤이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우영의 뺨에 키스를 한다.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를 들려하자 부드러운 실크 셔츠 자락이 뺨을 간질인다. “어…… 일어나야지. 그런데 아침부터 뭘 그렇게 차려 입고 있어? 어디 나가?” “너야말로 어제 고백 받고 너무한 거 아냐? 나랑 한 침대에서 자면서 잠 못 이루며 들척거리지는 못할망정 시 체처럼 자더라? 거기다 눈도 팅팅 부어서.” 괘씸하다는 듯 퉁명스러운 닉쿤의 말투에 우영은 기지개를 키며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받아친다. “너랑 나랑 하루 이틀 알아? 이제 와 새삼 못 잘 건 또 뭐야? 기숙사도 한 방을 썼는데.” 우영은 태연하게 기숙사 이야기를 꺼냈지만 닉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그래, 그때는 죽는 줄 알았지…….” “왜?” “너랑 한 방 쓰느라 죽을 뻔했다고. 몸은 뜨겁지, 넌 자각도 없지. 노먼은 자꾸 찝쩍거리지.” “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경계령 1호 발령.” “응? 그게 나 때문이었어?” “몰랐냐?” “알 리가 없지.” “그래도 눈치 좀 채주지. 하여간 네 덕에 별 짓을 다 했어. 내 노고를 알아줘. 덕분에 학내의 동성애 단체로부터 협박 편지도 받았었다고.” 분명히 닉쿤의 그 특이한 경고성 발언으로 인해 학내뿐 아니라 실제 사회 내에서도, 허르베지쿨 사에 대한 반발도 거셌었다. 하지만 닉쿤도 대넌도 그 정도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너희 취향이면 내 취향도 있다며 셀리브리티들도 사생활과 취향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그때 우영은 진심으로 저 집안 사람들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뻔뻔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닉쿤의 주변에는 수많은 호모와 바이 가 있었기에 그 이상의 반발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대단하긴 했었다. 일단 사회 유명 인사의 아들이 그런 말 을 내뱉었다는 것 자체가 센세이셔널했다. 그런 의미에서 허르베지쿨 가 사람들은 참 남의 눈치는 보지 않는다. 뻔 뻔스럽다고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잠깐…… 너, 그거 진짜 나 때문이었어? 겨우 그런 이유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었다고?” “말도 안 되다니. 피 끓는 20대에게 그게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이었는지 알아? 덕분에 1학년 때는 미친 듯이 공부만 했지. 그건 감사해. 그렇게 질색을 하던 accounting(회계학)을 A+ 로 패스했으니까. 모르는 걸 배운다는 거, 참 신기한 일이더군. 색다른 기분이었어.” “……다른 건 다 알았다는 거냐?” “응용 법을 몰랐을 뿐이지, 어지간한 이론은 열 살 전에 패스했었어. 원래 열두 살 때 대학 입학을 하려다, 그 건 좀 재미없을 것 같아서 그냥 다닌 거지. 클레어도 차라리 대학에 입학할까 하더니, 대학 졸업하면 자기 인생 은 서류더미에 묻혀 먼 훗날에 유적으로 남을 거라면서 쉬엄쉬엄한다고 일반 과정을 택했던 거니까.” 다들 뛰어나긴 하지만 특히나 클레어는 사 남매 중 가장 욕심도 많고 야망도 있던 아이였다. 막내라 치이긴 했지 만 사회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것도 그녀였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만 존경스러운 아이다. “클레어는 진짜 서른 되면 자서전 쓸 것 같아.” “쓸 거 많을걸.” “너희 가족 얘기만 써도 시리즈물로 나올 수 있을 거다.” “좋네, 그거. 자서전 시리즈.” 그렇게 말하며 우영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닉쿤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인다. “일어나. 식사해야지.” “응……. 그런데 그거 진짜야?” “뭐가?” “나 때문에 1미터 경계령 내렸다는 거.”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서던 우영이 진짜 궁금하다는 듯 묻자 닉쿤이 침대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며 뭘 그렇게 당연 한 걸 묻냐는 투로 말한다. “그럼 내가 미쳤다고 욕먹을 짓을 사서 하냐?” “넌 하잖아.” 물론, 일반적으로는,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남에게 욕 먹을 짓은 하지 않는다. 특히나 사회 지도층이 라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이목과 평에 예민하다.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런 탓이다. 한 사람의 명 예 가 그 사람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가문의 이름과 그의 사업과 온 가족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닉쿤 이 그러냐고 묻는다면 “글쎄.”라는 답이 나간다. 대넌은 물론 남의 이목에 예민한 사람이지만 우영이 알기로 허르 베지쿨 사 남매는 남의 이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원래 그들의 모친인 퍼기 허르베지쿨은 70년대를 주름잡 던 수퍼모델이었다. 깡마른 몸매에 시스루룩을 유행시켰던 그녀는 백만장자인 대넌과 결혼하면서 온갖 가쉽에 시 달려야 했고, 몇몇 타블로이드에서는 대놓고 그들이 일 년 안에 이혼할 거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었 다.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에이먼이 태어났고,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은 닉쿤과 클랜, 클레어까지 네 남 매를 낳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이 언제 이혼할까 하는 관심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클랜이 대넌의 아이가 아니라는 날조 기사까지 퍼졌었다. 다들 어렸을 때지만 사교계와 언론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고 자라 서인지 사람들의 관 심에 적당히 반응하면서도 때때로 그들을 엿 먹이는 걸 아주 좋아했다. 물론, 그 중에 최고 는 클랜이었고 그 다 음에 닉쿤이였다. 클레어는 그나마 얌전한 편이지만 에이먼은 아예 케이블 공화국의 황제 가 되어 그들을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 우영은 나중에야 에반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확실히 그럴 만도 하다 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닉쿤라면 욕먹을 짓을 사서 할 수도 있다. 나중에 언론사를 상대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뜯어내기 위 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우영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닉쿤이 잠시 머뭇하더니 시선을 돌리며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안 해. 내가 클랜이냐?” “클랜은 우주 생물까지도 위아 더 유니버스야. 그런 놈이 남 엿 먹이려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아.” “아니라니까.” “그럼 기사대로 넌 호모 퍼그가 맞다는 거야?” 우영이 예리하게 논점을 꼬집자 닉쿤이 우영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기사 꽤 예리하긴 했어.” 닉쿤의 말에 우영 역시 동의했다. “그렇지? 확실히 예리하지. 아마 그 기사도 노먼이 쓴 것…….” 거기까지 말하던 우영은 순간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닉쿤의 눈이 번뜩인다. “뭐?”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실언이었어.” 우영이 재빨리 말을 바꾸려하자 닉쿤이 우영의 옆으로 척척 걸어오며 말을 건다. “너 사실대로 말해. 노먼이라고?” “아니, 분명히 사진은 노먼이 찍었는데…….” 그 말에 닉쿤이 불같이 화를 낸다. “역시 그 자식이었어!” 클리샤 사건 이후로 닉쿤이 열 받으면 어떻게 하는지 익히 봐왔기에 우영은 서둘러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들어 닉쿤을 진정시키려 했다. 닉쿤은 대부분의 일에 뒤끝이 없는 편이지만, 한 번 원한을 가지면 진짜 쫌팽이처럼 죽 는 날까지 갖고 가는 타입이었다. 그러니까 보통은 가쉽이고 뭐고 아주 관대한 편이라 대부분은 웃으며 넘기지만, 그 허용선을 넘길 경우는 가차 없다. 그리고 우영이 알기로 그 허용선을 넘긴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인간이 노먼 맥캐인이었다. “닉쿤 진정해. 나한테 화낼 건 없잖아.” “뭐하자는 거야? 클리샤부터 시작해서! 너, 그 자식하고 어디까지 갔어?” “가긴 어딜 가?” “내가 치사하게 굴기 싫어서 엘레나가 보낸 사진은 그냥 넘어갔는데, 그 자식이 왜 그 시간에 너희 집에 있었냐고?” “어…… 선물 주러 왔다 자고 갔지.” “너희 집에서 잤다고!” “응.” “나도 잔 적 없잖아!” “오늘 가서 자면 되지.” “그런 문제가 아냐!” 원한이 드글드글한 얼굴로 화를 내던 닉쿤은 문득 우영의 앞으로 다가오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좋아. 내가 노먼과 결판을 내지. 노먼과는 한 번 담판을 지어야 하긴 했으니까.” 닉쿤이 그렇게 말한 뒤 휙 돌아서자 우영은 순간 눈앞이 까매졌다. 닉쿤은 이대로 달려가 노먼을 죽일 기세였다.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한바탕 난리를 칠 것이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내일 아침 타블로이드 1면에 사진과 타이틀이 스쳐갔다. <허르베지쿨 가의 몰락. 닉쿤 벅 허르베지쿨, 치정살인. 상대는 신진작가 노먼 맥캐인>이라며 두 손에 수갑을 찬 닉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장면이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참고인으로 따라 나오는 자신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문제의 비서>라는 타이틀이 자신의 이름 뒤에 따를 걸 생각하니 더욱 머리가 아득해졌다. 거기다 점점 상상이 확장되더니 법원에 선 채 검사 측 증인으로 출두되어 닉쿤과 자신의 과거를 줄줄이 내뱉으면서 증언을 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으로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그건 안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따위로 살다 그런 개망신까지 당할 수는 없다. 게다가 조국의 이름에 먹칠까지 할 수는 없다. “닉쿤!” “왜?” “클리샤 사건…… 에 대해 말할 게 있어.” “설마 그 사진 찍은 게 노먼이 아니라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아냐. 그건 걔가 찍은 거 맞아.” “그럼?” 싸늘한 닉쿤의 시선에 움찔한 우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히고 사실대로 모든 진실을 고백했다. “그 호텔하고 약속 시간, 내가 노먼한테 알려줬어.” “뭐?” “내가, 알려줬다고.” “……너!” 갑자기 빽하니 내질러진 그 음성에 우영은 서둘러 침실 한구석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따라 달리며 닉쿤이 소리친다. “너 거기 안 서?” 진짜 안 서면 죽일 것 같은 그 기세에 우영은 침실 안에 놓인 조각상 뒤로 가 숨으며 소리쳤다. “아씨! 너, 나 사랑한다며?”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고 그건 다른 문제지!”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그 사건 때문에 얼마나 곤경에 처했는 줄 알아?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 일어나서도 이를 갈 정도야!”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도 이를 으드득 간다. 자신에 대해서만은 한없이 관대하고 어지간해서는 절대 화내지 않는 닉쿤이 저 정도로 화를 낼 정도라니 그 분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고백한 뒤가 아니면 진짜 자신을 갈아마셨을 기세다. “그래도 클리샤 나이 20살이라고 밝혀줬잖아!” “그래서 감사하라는 거냐? 애초에 그런 사진을 찍지 말았어야지!” “하여간 경찰 조사는 안 받았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야! 클리샤는 존 에스터의 사생아라고!” 갑자기 나온 그 이야기에 조각상 뒤에 숨어 빼꼼히 눈만 내밀고 있던 우영이 슬쩍 목을 빼고 닉쿤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존한테 정보 좀 빼내려고 겨우 겨우 클리샤 잡아서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사진 찍혀서 도는 바람에 혹시나 하고 의심하던 에스터 부인이 존을 잡았어! 그리고 클리샤도 모델 인생 파토 났고. 존이 그 뒤로 나한테 원한 품은 거 알아?” 존 에스터는 거물 사업가 중에 유일하게 닉쿤을 못마땅해 하던 남자였다. 얼마 전 쓰러진 그에게 자신이 보낸 카드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닉쿤에게 자신을 데리고 오라며 그의 별장에 초대를 했다는 말에 드디어 두 사람의 관계가 나아지나 했는데, 설마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었다. “진짜야?” “그래.” “……그럼 왜 말 안 했어?” “남의 사생활을 어떻게 말해?” “그래도 나한테는 말을 했어야지!” “다른 거면 말하지! 그래도 그런 사생활을 어떻게 까? 아무리 너라도 그건 안 돼!” “난 너한테 다 말하는데 넌 나한테 속였어!” “속인 게 아니라 물은 적이 없잖아! 그리고 너야 말로 지금까지 노먼한테 네가 말했다는 거 속였잖아!” 닉쿤이 그 스케줄 알린 게 누구냐며 길길이 날뛸 우영은 슬쩍 뒤로 빠져 모른 척했다. 그 스케줄은 사실 극비였던지라 비서들도 알지 못한 것이었기에 다행히 누명을 쓴 사람은 없었지만, 우영도 그 당시엔 간이 콩알만해졌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그때 걸렸으면 제대로 한바탕 퍼부었을 것이다. “미안해, 그건. 진짜 사고였어. 술 마시다 훽 가서 걸려든 거야. 이제와 노먼에게 따져봐야 소용없어. 노먼이 날 끌고 들어갈 테니까.” 오래된 일이기도 했지만 일의 인과관계를 밝히자면 술 마시다 홧김에 닉쿤의 일정을 다 불어버린 우영의 잘못이었다. 사실 노먼도 그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었을 거다. 그냥 우영이 얘기하는 걸 듣고 흥미가 생겨 찍으러 갔을 것이다. 노먼의 말로는 닉쿤을 엿 먹이려고 한 거라지만 반은 닉쿤에게 하는 복수였고, 절반은 잭 맥캐인의 혈압을 올리려 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잭은 한동안 대넌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를 못했었다. 워낙에 친한 친구였기에 더 했을 것이다. 닉쿤이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서 있자 우영이 슬쩍 조각상 뒤에서 나오며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나도 할 말은 있어.” “무슨 할 말?” “너, 그 여자랑 호텔 간 건 사실이잖아. 아무리 과거 일이라 해도 그 일을 당당하게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 “난 존을 만나러 간 거라니까.” “대넌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존 에스터는 오메가 클럽 출신이야! 아버지랑은 상극이라고.” 순간 우영은 복잡하게 꼬인 사교계의 관계를 풀어내곤 “아.”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가 클럽은 알파베타감마와는 이미 100년 가까이 원수를 우영 라이벌 클럽이었다. 알파베타감마의 회원들이 정재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것과는 달리 오메가 회원들은 문화와 예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알파베타감마가 상류층 자제들을 주로 받아들이며 그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서로의 힘을 합치는 것과는 달리 오메가 클럽은 각자 자신의 분야 에 서 뛰어난 천재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존 에스터는 재계의 명사지만 스스로 알파베타감마가 아닌 오메가클럽에 지원해 알파베타감마 회원들로부터 엄청난 원성을 산 채였다. 성향도 성향이지만 지지하는 정당과 정책도 늘 반대다 보니 알파베타감마와 오메가는 말 그대로 물과 불, 즉 상극이었다. 그러니 대넌이 존을 소개해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존 에스터가 워낙에 별종이긴 하지만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회원들 자체가 좀 문제가 있긴 하다. 뭐랄까, 모두들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남자들이지만 좀 애 같은 경향이 있었다. 풀어 말하자면 편 갈라 싸 우는 걸 무지 좋아하고, 상대방은 무조건 배척한다.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배척 하고 싫어한다. 그러고 보니 클랜이 유펜에 입학할 때 오메가 클럽에 들겠다고 했다가 대넌이 화를 내 영국으로 쫓겨 간 적이 있었다. 우리 집안에 오메가 클럽의 회원이 생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미친 듯 날뛰던 대넌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클랜조차도 결국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오메가를 포기했을 정도니 오메가클럽에 대한 적대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그건 그렇지만, 하여간 네가 그 여자 꼬신 건 사실이잖아. 난 과거는 묻지 않는다는 주의지만 그래도 내 앞에서 자랑할 일은 아니지.” “……그건 맞아. 하여간, 그건 그거고…… 너 이리 와. 한 대만 맞아라.” 그렇게 말하며 다시 슬금슬금 움직이는 닉쿤을 보며 우영이 타임신호를 걸었다. “잠깐! 잠깐만!” “잠깐이 어디 있어?” “그래도 이제 존하고 풀렸잖아! 별장에 초대했다며?” “그건 나한테 풀린 게 아니라, 너한테 풀린 거지!” “하여간 내 덕에 풀렸으면 된 거잖아.” 그러니 적당히 넘어가자는 우영의 말에 닉쿤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건 맞는 말이야. 인정해. 하지만 노먼한테 내 일정 알린 건 그냥 못 넘어가.” “미안하다니까.” “미안하다면 다야?” “술에 취해서 그랬다니까! 그건 그냥 사고야, 사고. 너, 나 사랑한다며?” 우영이 최후의 무기를 꺼내들었지만 닉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순간 우영은 괜히 말했다는 후회를 하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닉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재빨리 돌아서 도망치려던 우영의 팔이 닉쿤의 손에 먼저 잡혔다. 닉쿤에게 잡혀 강제로 되돌려진 우영은 이번엔 진짜 한 대 맞는다는 생각에 어깨를 움찔했다. 닉쿤과는 그 긴 시간을 알아오면서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투닥거림은 있었지만 진짜 몸싸움을 벌인다거나 소리를 내지른다거나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두 번 닉 쿤에게 맞은 적이 있지만, 그건 태권도 대련 중에서였다. 한국인이면 태권도를 당연히 해야 한다는 사라의 독특한 사고방식- 사라는 미국 생활이 길어서인지 사고방식 자체가 미국인이었다. 미국인들은 징병제인 한국 의 군 법 때문인지 한국인이면 무조건 태권도를 잘한다고 알고 있다.- 덕에 한국인 태권도 강사를 초빙해 1년 간 배웠었는데 그때 닉쿤도 자기도 배우겠다고 우겨 함께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딱 두 번 정도 대련을 했 는데 한 번은 이단옆차기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앞돌려차기로 얻어맞고 KO패 당했었다. 그때는 자신이 더 많 이 공격했으니 할 말은 없다. 사실 주먹으로 친 건 자신이 더 많이 쳤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멍만 들지 말아라, 하고 기다리는데 얼굴에 닿은 건 주먹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한 번이니까 넘어가주는 거야.” 라며 뺨에 입을 맞춘 닉쿤이 곧 다시 우영의 입술에 깊이 키스를 해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에 우영은 살며시 눈을 감고 닉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잠깐 동안의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운 키스가 끝나자 닉쿤이 우영의 콧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물러선다. “다시는 노먼 만나지 마.” “그건 안 되지. 내 친군데.” “그런 놈이 친구라고? 만나면 당장 나한테 끌고 오겠다며?” 분명 일주일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그건 일주일 전 얘기다. “내가 노먼한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알아?” “책 받은 건 알아.” “그거 말고.” “그럼?” “기다려봐.” 다시 슬며시 닉쿤의 목을 놓은 우영은 침대 옆으로 달려가 노먼의 책을 들고 와 닉쿤의 눈앞에 첫 장을 펼쳐보였다. “봐봐. 근사하지?” 책이 나왔다는 소식만 들었지,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은 닉쿤은 우영이 펼쳐 보여준 첫 장에 남은 글귀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상당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이게 뭐야? 겨우 이런 걸 갖고 그래?” “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라? 미국 전 서점에 깔린 이 책 안에 내 이름이 있는 거라고. 그리고 이 소설, 어제 자기 전에 잠깐 봤는데 재미있어. 베스트셀러가 될 거야. 노먼이 그러는데 다른 나라에 판권이 팔려도 내 이름이 들어가는 거야. 이 원고는 영원히 남는 거라고.” 눈을 반짝거리며 신이 나 떠드는 우영의 얼굴에 닉쿤은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게 며칠 전인데 겨우 이 정도에 넘어간 우영에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나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너희 집 사람들은 진짜 예술하고는 담 쌓았잖아.” 닉쿤의 약점을 콕 찌르는 그 말에 닉쿤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심술이 서렸다. 우영은 조금 불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전국에 깔리는 타블로이드 지에 네 이름 실어줄까? 그것도 대문짝만하게? 원한다면 주간 잡지의 모든 표지에도 네 얼굴하고 이름 실어줄 수 있어. 전 세계로 퍼져나갈 거야, 그거야말로. 유명인이 되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 어 . ” 닉쿤의 말인 즉 신문과 잡지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만한 스캔들을 터트려주겠다는 의미였다. 잡지와 타블로이드지에 얼굴 나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기에 우영은 뚱해진 얼굴로 책을 옆구리에 끼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것만은 절대 사양하마.” “왜?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동성연인, 드디어 베일을 벗다’ 내지 ‘그들은 신혼 중 ’ ‘닉쿤 벅 허르베지쿨, 동성혼 허가를 위해 로비 중?’이런 타이틀은 어때?” 상당히 구체적인 닉쿤의 말에 우영은 작게 혀를 찼다. 매도 맞아본 놈이 잘 팬다고 하도 가쉽란에 들락거리더니 기자들의 머릿속까지 훤히 들여다보며 타이틀까지 정하고 있다. 얼마 후에는 자기가 기사를 만들어 투고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했다만 봐. 확 한국으로 도망쳐버릴 테니까. 망신당할 거면 혼자 당해.” “그럼 노먼 만나지 마.” “그건 안 돼.” “왜?” “나 지금 얘한테 매력 느끼는 중이거든. 상당히 매력 있어.” “뭐?” “전 세계에서 책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것도 이렇게 책 첫 장에.” “그럼 네가 써.” “내가 쓴 소설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뭐 어때? 출판해서 월드와이드로 배포해줄 테니 쓰기만 해.” “책이 영화냐? 월드와이드는 뭐야?” “하여간, 출판해줄 테니 무조건 써. 전 지역 서점하고 도서관에 쫙 풀고, 교양도서로 이름 올려줄게. 지역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 때리면 그만이야. 케이블 채널에서도 한 시간 단위로 광고 올려줄게.” “장난하냐?” “그럼 회사 이름 바꿔줄까? Bliss&Jin 사 어때? 이 김에 파트너로 승우영도 시켜 줘?”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에 우영은 불쾌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그랬다간 에반이 죽을 때까지 날 저주할 거다.” “그럼 JIN이라는 메이커 하나 만들어줘? 회사 이름이 싫으면 브랜드는 어때? JIN이라는 이름으로 이동 통신 단말기 브랜드 만들어줄까? 아니면 백화점 지어줘? 아니지, 월드와이드로 배포할 거면 잡지는 어때? 패션잡지 JIN. 아니면 케이블 채널 하나 만들어줄게. JIN채널이라고 공포영화 전문 채널. 뭣하면 전 세계를 도는 전용기랑 요 트 에 네 이름 새겨줄게. 원한다면 네 이름 붙인 차를 생산해줄 수도 있어.”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진짜 딱 자기 같은 말만 골라하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팔짱을 끼었다. “너는 무슨 상상력이 그 모양이냐?” “그럼 넌 뭘 원하는데? 이제 와서 내가 소설을 쓸 수도 없고.”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클랜도 참 재능이 없다 했지만, 문학 쪽에 재능 없는 건 허르베지쿨 가 전체의 특징이었 다. 심지어 사라조차도 글 쓰는 재능은 없었다. 그나마 자신이 가장 믿을만하다 할 정도니 할 말 다 한 거다. 잠시 썩어 들어가는 얼굴로 닉쿤을 바라보던 우영은 순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씨익 웃었다. “좋아. 그럼, 네 이마에 우영이라고 쓰고 다녀봐.” 우영은 어차피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순간 닉쿤 역시 씨익 웃는다. 감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못할 것도 없지. 매직 어디 있어?” “야! 진짜 하려고?” “못할 거 뭐야? 이마네 네 이름 적고 브로드웨이를 누비고 다니지, 뭐. 파파라치들 다 달려들게. 그럼 다음주 신문 잡지에 네 이름이 진짜 대문짝만하게 실릴 거야. 소원 성취하겠네.” “야!” “매직 찾자.” “닉쿤!” “난 한다면 해! 네가 원한다는 게 그 정도도 못할까 봐?” “안 돼! 하지 마! 내 조국과 내 명예와 있는지도 모를 내 가족을 쪽팔리게 만들지 마!” “알 게 뭐야?” “야!” 닉쿤라면 한다. 그냥 말만이 아니라 진짜 하고도 남는다. 그가 대넌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분명히 한다. 순간 내일 아침 타블로이드를 장식할 닉쿤의 사진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이마에 우영 케이먼이라고 쓴 닉쿤의 얼굴은 엽기다. 닉쿤도 자신이 그럴 만한 배짱이 없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거다. 하여간 시간이 원수다. 너 무 오래 알아 온 게 죄다. “야, 타임! 노먼 안 만난다고는 못 하겠지만, 하여간 미안해. 그만!” 닉쿤은 분명 우영이 이렇게 나올 건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노먼을 만나겠다고 우길 줄은 몰랐던 터라 버럭 화를 냈다. “너, 그렇게까지 해서 그 녀석을 꼭 만나야겠어?” “어떻게 해? 하나밖에 없는 친군데!” “네가 왜 친구가 걔 하나야? 대니, 맷, 로니, 제니스, 그리고 에이먼하고 클랜, 클레어는 또 뭐야? 우리 형제들도 전부 네 친구 아냐?” “그건 그렇지만…… 걔는 좀 특별한 친구란 말야.” 슬슬 기어들어가는 우영의 음성에 닉쿤이 우영을 내려다보며 살짝 이를 드러내며 살기를 발한다. “특별히 죽여 버리고 싶은 친구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전부 네가 소개해준 친구지만 노먼은 처음으로 내가 직접 사귄 친구란 말야.” 그건 분명히 맞다. 우영이 하도 이상한 인간들을 끌어들이는 체질이라 학창 시절부터 우영의 사교 관계는 닉쿤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단지 외관뿐이 아니라 성격과 인품까지 모두 본 후 진짜 괜찮은 인간들만 우영에게 소 개 를 해주었고, 조금이라도 불순한 의도로 접근을 하거나 사생활이 문란하거나 우영에게 상처 줄만 발언을 할 법한 인종 차별주의자 내지 계급차별주의자는 닉쿤도 전부 친구 목록에서 쳐냈다. 우영이 유일하게 닉쿤이 같 이 다니 지 말라는 데도 같이 다녔던 건 노먼뿐이었다. 사실 노먼 자체는 나쁘지 않다. 성품도 좋고 집안도 좋 고, 사상이 나 종교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발상들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건 클 랜도 마찬가 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쿤이 노먼에게 적대감을 보인 건, 노먼이 진심으로 우영에게 애정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영 역시 노먼의 재능을 높이 사며 존경하고 있었기에 위험해서, 떼어놓으려던 거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들 네 친구야. 노먼만 네 친구라는 게 말이 돼? 그리고 나는? 나는 뭔데?” “너야 지금은 친구가 아니지.” “그럼?” “애인?” 그 말에 순간 닉쿤의 살벌하게 굳었던 얼굴이 화사하게 풀려간다. ‘애인’이라는 한 마디가 이렇게나 기분이 좋을지 몰랐었다.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가겠다, 이거지?” “사실이니까. 하여간 일주일 간은 애인이잖아.” “거기 일주일이 왜 붙어?” “일주일 뒤에 생각해본다니까. 너,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일주일 뒤에 생각해본다고 했다?” 아직 확실히 답을 내린 건 아니라는 우영의 말에 닉쿤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얄미운 자식.” “누가 할 소리를.” 일단 휴전 상태로 들어서자 우영은 책을 들고 다시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로 가 책을 내려뒀다. 그러다 그 옆에 놓인 커다란 갈색 상자를 보곤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슬쩍 상자의 뚜껑을 열어봤다. “아무리 봐도 진품 같은데…….” 라며 우영이 상자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닉쿤이 재빨리 달려와 손을 뻗어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모조야. 절대 모조야. 신경 쓰지 마.” 닉쿤의 강한 부정에 우영이 눈을 들어 닉쿤을 바라보며 묻는다. “……대니, 뉴욕 왔어?” 갑자기 나온 다니카의 애칭에 닉쿤은 상자 뚜껑을 세게 내리누르며 재빨리 답해주었다. “아니, 아직 폴란드에 있어. 왜?” “감정 좀 부탁하게. 걔라면 뭔가 알 거 아냐. 폴란드 숙소 전화번호 알아?” 닉쿤도 우영이 다니카를 찾을 줄 알았다. 우영이 거래하는 보석상은 꽤 많지만, 그렇다고 저 소심한 우영이 저걸 들고 보석상에 차 감정을 의뢰할 리 없으니, 분명 까마귀를 찾을 거라 여겼었다. “내가 어제 통화했어. 그런데 오늘 다른 데로 옮긴대. 파볼 데가 의외로 많은가 봐.” “그래?” “응. 걔야 반짝이는 거 있는 데는 어디든 날아가는 까마귀잖아. 그냥 세르게이에게 돌려주고 말아. 아니면 내가 돌려줄까?” 은근슬쩍 그러기를 바라는 닉쿤의 청에 우영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지. 내가 받았는데 널 통해서 돌려주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럼 에이먼한테 부탁해.” “그것도 예의가 아니지. 나중에 엘리 만나면 주지, 뭐. 밥이나 먹자.” 우영이 세르게이를 만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엘레나를 만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래도 속을 알 수 없는 세르게이보다는 속이 훤히 보이는 엘레나가 낫다. “……그래.” 상자에서 관심을 옮긴 우영은 먼저 나서서 침실을 나서기 위해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닉쿤을 돌아봤다. “아, 그리고 너 하나 약속해.” “뭐?” “오늘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기.” “나야 늘 네가 시키는 대로 했지.” “언제?” “언제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싱긋 웃으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섹시한 미소를 짓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감동하기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타고난 바람둥이야.” “사랑이야, 사랑.” 더는 반박하기도 지겨워져 우영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유난히도 화창한 일요일 오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닉쿤의 집은 나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클랜의 결혼문제와 사라와 대넌의 이혼문제로 투닥거렸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우영은 닉쿤의 집에 있던 옷을 대강 걸친 채 였 고, 닉쿤은 우영의 청대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우영의 강력한 요청으로 우영이 운전을 해 차를 몰고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우영의 아파트에 도착한 두 사람 을 일단 차를 주차한 뒤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러다 문득 우영이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진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알았다니까.” “좋아. 그럼 지갑 줘.” “지갑?” “줘.”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순간 잠시 머뭇거리던 닉쿤은 결국 우영이 하라는 대로 얌전히 바지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내주었다. 그러자 지갑을 받아든 우영이 그대로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지갑은 왜?” “어차피 쓸모없어. 너 카드밖에 안 갖고 다니잖아.” “카드 못 쓰는 데로 가는 거야?” “응.” “어딘데?” “그냥 얌전히 따라 와.” 귀찮다는 듯 그렇게 내뱉은 우영은 그대로 복도를 걸어 자신의 아파트를 향해갔다. 열쇠를 찾아 들고 문을 연 우 영은 좁은 투 룸의 아파트로 들어와 닉쿤의 손에서 받아든 책과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방으로 들어섰다. 모처럼 느긋하게 우영의 방을 돌아보고 있던 닉쿤은 티셔츠 한 장과 모자 하나를 들고 방에서 나온 우영을 보 곤 주방에서 시선을 떼고 우영을 돌아봤다. “옷 갈아입으려고?” 이미 샤워를 하고 새 옷을 입고 나와서는 뭘 또 갈아 입냐는 듯 묻자 우영이 닉쿤의 앞으로 다가와 닉쿤에게 말 한다. “벗어.” “응?” “옷 벗으라고.” 딱 잘라지는 그 말에 닉쿤이 싱긋 웃는다. “뭐야? 대낮부터. 그렇게 급했어?” “무슨 개소리야?” “난 어디서라도 상관없어. 네가 적극적으로 나오니 기쁜데?”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안아오려는 닉쿤의 팔을 툭 치며 우영이 들고 온 셔츠를 내민다. “더위 먹었냐? 빨리 벗고 이거 입어.” 더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우영이 들고 있던 티셔츠를 건네자 닉쿤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 “하여간 갈아입어. 그리고 이거 써.” 그러면서 우영이 옆에 들고 온 모자를 닉쿤의 머리 위에 씌운다. “모자까지? 왜? 선글라스도 씌우고 마스크도 하게 하지. 이 여름에 이게 뭐야? 내가 범죄자야?” “네 얼굴 사람들이 알아보잖아. 그리고 시계도 풀어. 벨트도. 평범하게 하고 나가.” “평범하잖아.” “너무 비싸 보이잖아. 싸보이게 하고 다녀. 눈에 안 띄게 하라고.” 어쩐지 자신을 감추려고 하는 듯한 그 행동에 닉쿤은 장난처럼 우영에게 물었다. “뭐야? 너 내가 창피해?” “응.” “뭐야?” 너무 빠른 답에 닉쿤이 조금 기분이 상한 투로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쏘자 우영이 싱긋 웃는다. “농담이야, 농담. 아무도 못 알아보게 하고 공원에서 데이트하자. 프리즐도 사먹고 커피 사마시고 길거리에서 파는 햄버거도 사먹고. 사진도 찍고.” 그렇게 말하며 우영이 셔츠 아래에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흔든다. 살짝 눈웃음을 치며 웃는 그 모습에 닉쿤이 불안한 듯한 얼굴로 우영을 내려다본다. “뭐야? 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뭐가?” “나긋나긋하잖아. 너야말로 더위 먹었어?” 이번엔 닉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공격을 하자 우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간다. “너, 이러면서 나랑 연애를 하자는 거냐?” “넌 튕기는 게 특긴데, 그렇게 나오니 이상하잖아? 무슨 생각이야? 너, 무슨 꿍꿍이 있지?” “싫어? 싫으면 관둬.” “그건 아니지.” “그럼 닥치고 빨리 갈아입어.” 셔츠를 강제로 떠넘긴 우영은 주방으로 가 커피를 찾았다. 약속한 바가 있기에 먼저 시계와 벨트를 풀어둔 닉쿤 은 핸드폰만 청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은 채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우영이 건넨 티셔츠를 막 목에 끼워 넣 는데 벨소리가 울려왔다. 팔을 끼우며 닉쿤이 문을 돌아보자 우영이 커피 메이커에 물을 붓고는 재빨리 문으로 달려간다. “누구세요?” “배달 왔습니다.” 일요일 오전에 무슨 일인가 싶어 문 앞으로 달려간 우영은 밖을 한 번 내다보고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누구시죠?” “우영 케이먼 씨인가요?” 노록색의 옷을 입은 네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우영에게 그렇게 물었다. 남자들의 뒤에는 검은색의 천이 씌워진 커다란 상자가 하나 있었다. “네, 제가 우영 케이먼인데요.” “네, 여기 사인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슬쩍 집안을 들여다본다. 뭔가 관찰하는 듯한 그 시선에 우영은 불길한 예감이 인상을 찌 푸렸다. 병실에서 받은 선물들은 자신의 집에 옮겨두기는 너무 많아 우선 닉쿤의 아파트로 옮겨둔 채였다. 물론, 닉쿤의 일방적인 독단이었지만, 자신의 아파트로 옮겼다가 침대까지 점령당할 게 뻔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따로 온 배달이라면 아주 예감이 좋지 않다. 우선 수령확인서를 받아들긴 했지만 사인은 하지 않은 채 우영이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보내신 거죠?” “세르게이 네브즐린 씨입니다.” 역시나란 생각에 우영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어제 받은 레드 다이아몬드-모조지만-의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또 뭔가를 보낸 모양이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남자들의 뒤를 살피자 이상하게도 큰 상자가 보였다. 그 위 를 검은색의 천으로 덮어놓긴 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자가 너무 크다. “배달 온 게 뭔데요?” “……직접 보십시오.” “아뇨. 먼저 얘기해주세요. 이번엔 또 뭐요?” 세 번쯤 당하고 나니 우영도 이젠 여유가 생겼다. 사실 놀랄 건 어제 다 놀란 상태라 더는 놀랄 것도 없었다. 그 남자의 악의 없지만 악취미적인 선물에는 어느 정도 적응되어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우영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뱀입니다.” “……네?” “보아 뱀입니다. 2미터 정도의 길이인데, 파충류를 키워본 적이 있으신가요?” “네에?” 남자의 자세한 설명에 우영이 기겁을 하자 우영의 뒤에 서 있던 닉쿤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남자들을 지나쳐가 상자를 뒤집어 씌워둔 검은 천을 거둬 올렸다. 순간 상자가 아닌 정 사각형의 대형 철창 안에 있던 노란색의 거대한 뱀이 쉬익하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우영은 재빨리 닉쿤의 등에 달라붙었다. “……대단하군.” 닉쿤은 마치 남의 일인 듯 중얼거렸지만 우영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냥 왔구나, 너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뱀의 존재 자체는 공포였다. 보통 크기도 아니다. 어젯밤에 동물을 좋아하냐고 묻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뱀을 보내냐……. “아나콘다…….” 기가 질려 중얼거리는 그 말을 닉쿤이 수정해준다. “보아 뱀이라잖아.” “하여간! 저게 나중에 크면 어떻게 될지 알 게 뭐야? 나 잡아먹으면 어떻게 해? 커다란 소도 통째로 삼킨단 말야! 그리고 뱀 새끼 낳는 거 너 본 적 없지? 배에서 새끼 뱀이 비처럼 쏟아진다고! 막 우수수수 떨어져! 새끼를 치면 15마리는 낳을 거고 그럼 걔들이 철창 밖으로 우르르 나와서 식사 대신 날 잡아먹을지도 몰라!” “안 잡아먹어.” “어떻게 알아?” “보아뱀은 순한 편이야.” “순해봐야 뱀이지!”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이걸 아파트에서 키우라고? 굉장히 손이 많이 갈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또 다시 상상 모드로 돌아가 지금까지 본 모든 크리처물들을 끄집어내는 우영을 바라보며 닉쿤은 혀를 찼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지만 문제인 게 그 크리처물이나 괴수물들의 대부분이 얼번 레전드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었다. 집에서 키우던 악어나 뱀을 버렸더니 환경오염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생장을 해 인간들을 잡아먹는다는 류의 엘리 게이터 같은 영화의 저반은 얼반 레전드였다. 그 외에도 블러디 메리나 캔디 케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우영이 그런 영화를 아주 많이 보면서 또 그런 기담까지 미친 듯 듣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저, 죄송하지만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런 아파트에서 키울 수 있는 동물은 아니라서요.” 닉쿤이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남자들에게 부드럽게 거절의 말을 건네자 그들 역시 “네, 그렇긴 하네요. 주소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남자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크기의 보아 뱀을 택배기사들이 들고 왔을 리는 없으니, 남자도 아 마 뱀에 대해서라면 전문가일 것이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닉쿤은 다시 한 번 그에게 어서 그 흉물스러 운 걸 들고 꺼지라는 듯 말을 걸었다. “세르게이 씨께는 우영이 직접 말씀드릴 테니 가져가 주시겠어요? 동물보호 단체에서 감시 나오기 전에 같은 층 분들께 고소당할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남자들도 상황을 납득한 듯 다시 검은 천을 씌운 철창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우영이 미친 듯 그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거 혹시 나한테 쇼에 나오라는 거 아닐까?” “무슨 쇼?” “목에 뱀 감고, 피리 불면서…….” 하얗게 질린 우영을 돌아보며 닉쿤이 그 상상을 확 끌어내린다. “그건 코브라지.” “보아 뱀도 할지 알 게 뭐야?” “거기서 끝. 이제 뇌 좀 닫아. 나가자.” 더 두다간 안도로메다까지 갈 것 같아 닉쿤이 우영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서자 우영 이 뒤를 따르며 닉쿤의 팔을 잡아끈다. “내가 지금 뇌를 닫게 생겼어? 대체 뭐냐고? 저 사람, 왜 저래?” “내가 알겠냐?” “저런 걸 왜 나한테 보내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 “너 그 사람 잘 안다며? 난 그 사람 지금까지 딱 두 번 봤거든?” 우영의 정보력은 상당하지만 러시아 마피아란 존재가 하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터라 세르게이 네브즐린에 대해서 까지는 아직 자세히 캐내지 못한 채였다. 애초에 닉쿤의 고객이 아닌 사람이니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고 보 니 어쩌다 저 남자랑 엮였는지 모르겠다. 진짜 걸려도 더럽게 걸렸다. “……하여간 들어가자. 나중에 얘기 좀 해봐야지.” “제발 어떻게 좀 해! 너 지금 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뱀?” “아니! 저 뱀을 보고도 납득하는 내 자신이야! 진짜 아무렇지도 않았어. 뱀은 무섭지만 그걸 보낸 사람이 세르게이라는 말을 그냥 납득해버렸단 말야!” 우영은 진짜 아주 큰일이라도 생긴 듯한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 닉쿤 역시 납득했다. “……큰일이군.” “너 지금 남의 말하냐?” “……일단 내 일은 아니지.” “닉쿤,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아니.” “뭐야? 나 좋아한다며?” “사랑하지.” 능글맞게 웃으며 닉쿤이 말을 자르는 사이 우영의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우영이 어깨를 잔뜩 경직시킨다. “전화 받아.” 아무래도 세르게이일 것 같다는 예감에 닉쿤이 그렇게 말하자 우영이 천천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꺼내 든다. “세르게이야.” “받아. 그리고 정확히 얘기해. 다시는 선물 보내지 말라고. 그 사람 선물은 민폐야.” “그래도 성의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닉쿤을 타박하며 핸드폰을 꺼내든 우영은 길게 심호흡을 한 뒤 폴더를 열었다. “네.” 「선물은 마음에 드나?」 “……네, 저기 그런데요. 감사하긴 한데 제 아파트에서 키울 만한 동물이 아니라,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집에 있는 시간도 거의 없고, 이렇게 좁은 데서 키울 녀석이 아니라서요.” 우영이 애써 상냥한 어조로 고사를 하는데 세르게이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집이 문제인 건가?」 “집도 문제지만, 돌봐줄 사람도 문제죠. 그러니까…….” 「어느 정도 규모면 되지? 관리하는 사람은 따로 내가 보내주지. 아파트보다는 저택이 낫겠지만…… 그럼 출근이 힘들겠지? 아니지. 이 김에 그냥 우리 저택에 들어오는 건 어때?」 역시나 그의 결론은 하나였다. 이러려고 뱀을 보낸 거 아닌가 하는 의심에 우영은 재빨리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역시 전 하던 일이 좋습니다. 그리고 집을 옮길 생각도 없고요.” 「그래?」 “네.” 이미 스카웃 제의 거절했잖아, 이 이간아! 라고 소리치는 걸 겨우 참으며 우영이 부드럽게 답을 하자 잠시 후 세 르게이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네. 호의는 감사합니다.” 「그럼, 청혼을 하지.」 “네?” 「결혼은 안 될 테니, 일단 동거부터 시작하지.」 “네?” 「짐은 언제 옮길 텐가?」 “아니, 그게…… 제가 왜 당신하고 동거를 해요?” 「싫은가?」 “싫고 좋고를 떠나서 저 지금 당신 두 번 얼굴 봤거든요? 만난 게 아니라, 딱 두 번 얼굴 봤다고요!” 「그래? 그럼 데이트부터 하지. 어디가 좋은가? 시간이 날 때를 알려주면 스케줄을 맞춰보지.」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무서웠다. 이 남자가 무서워서 이상한 선물을 줘도 제대로 거절도 못하고 전부 받아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 남자가 전혀 무섭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미친 남자다. “저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요!” 용기를 얻은 우영이 있는 힘껏 소리치자 세르게이가 느긋하게 답한다. 「그래? 누구지?」 “그건 사생활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알아내지.」 “알아내서 뭐하게요?”라는 질문이 우영의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뭐라고 답할까 무서워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물어보면 “죽이려고.”라는 답이 나올 것 같았다.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어 잠시 기다리자 수화부 저편에서 여전히 말귀 못 알아들은 남자가 자기 멋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언제가 좋지? 데이트를 하려면 저녁때가 좋으니, 퇴근 후에 만날까?」 “저, 애인 있다니까요!” 「양다리쯤 걸쳐도 돼.」 “전 싫어요.” 「내 쪽이 훨씬 괜찮을 텐데?」 “전혀! 그런 생각 안 듭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한 뒤 세르게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순간 우영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이 몸을 떨었다. “뭐래?” 닉쿤이 옆에 서 있다 이젠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우영의 얼굴에 닉쿤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순간 우영이 닉쿤의 멱살을 쥐었다. “너, 말해봐!” 갑작스러운 우영의 공격에 닉쿤은 멀뚱히 우영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뭘?” “내가 그렇게 매력적이야? 나 그렇게 매력 있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는 우영을 보며 닉쿤은 손을 들어 우영의 이마를 짚었다. “또 열 나냐? 왜 그래?” “세르게이가 나한테 청혼을 했다고!” “응?” “결혼, 아니 동거하쟤! 저 사람 미친거 아냐?” “……글쎄…….” “너 지금 남의 얘기하는 거 아니라니까!” “……일단 진정해. 내가 잘 얘기해볼 테니.” “지금 문제가 뭔지 알아? 저 사람이 어떤 목적이든 날 마피아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거라고! 알겠어? 나 마피아가 될지도 몰라! 내가 마피아 되면 너라고 좋을 것 같아?” “걱정 마. 그럴 일 없으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그 사람, 진짜 이상해!” 히스테리 직전에 몰린 우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닉쿤은 그대로 우영을 끌어안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조 금 진정이 된 듯 눈빛이 누그러진다. “걱정 마. 걱정 말고 나가자. 데이트하자면서 이게 뭐야?” “하지만, 그 사람 진짜 이상해. 무슨 청혼을 그따위로 해? 청혼을 하려면 뭐든 있어야 할 거 아냐?” “원래 이상하다니까. 하여간 진정하고 나가자.” 닉쿤은 계속 우영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지만 우영은 이번만은 진짜 충격이 큰 듯 쉽사리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혹시, 저 원석 덩어리가 예물인 거 아냐?” “……모조라니까.” 닉쿤이 딱 잘라 말하며 슬쩍 테이블 위의 상자를 돌아보곤 그대로 우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가자. 너, 안 되겠다. 일단 나가서 머리 좀 식혀.”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어 닉쿤은 일단 우영의 팔을 잡아끌고 모자를 뒤집어쓴 채 집을 나섰다. 멍한 얼굴로 닉쿤의 팔에 끌려 따라 나오는 우영을 돌아보며 닉쿤은 작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지금은 노먼이 아니라 세르 게 이 네브즐린이 문제인 듯했다. “일반인이 된 것 같아.” 근처의 식당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대강 점심을 때우고 공원의 산책로를 걷던 중 닉쿤이 그렇게 말을 던져왔다. 아파트를 나선 후까지 한 동안 패닉 상태였던 우영은 닉쿤이 커피를 사서 안겨주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하 지 만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라 닉쿤은 열심히 그런 우영을 현실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냥 뒀다간 그 뱀의 32대손의 탄생 후에 아나콘다 버전까지 상상할 우영이었다. “일반인은 무슨? 네가 왕족이냐?” “왕족 비슷하지. 귀족은 되잖아?”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우영은 입술을 툭하니 내밀고 말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시대였다. 예전처럼 왕, 귀족, 평민, 노예라고 딱 잘라 나누는 건 아니지만 대신 재벌, 상류층, 중산층, 서민, 최하층민 이 라는 계급이 존재한다. 거기서 굳이 따지자면 닉쿤은 왕족에 가깝다. 엄청난 부와 명예뿐 아니라 많은 이들 의 관 심을 받으며 이 나라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왕족들은 원래 왕족들하고만 친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옛날 얘기고.”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은근히 손을 잡아왔다. 크고 따뜻한, 그 손의 감촉에 우영은 놀라 조금 붉어진 얼굴로 주 변을 돌아봤지만, 우영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닉쿤이 손을 세게 잡아 쥐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산책로를 걷는다. “그러고 보니, 에이먼이나 너나 클랜도 친구는 다양한데…… 클레어는 집에 친구 데려온 적이 거의 없다?” “뭐, 우리 친구들이 다 클레어 친구니까. 걔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아버지 사업 잇겠다고 여자애들하고는 안 놀 았어든. 여자들 정보통이 얼마나 빠른지를 몰라. 내가 퍼트린 소문이 내 귀에 들어오는 속도를 봤을 때, 여자들 은 하루 동안 거의 200명을 거쳐 오는데 남자들은 그래봐야 10명 정도거든.” “걔는 성격이 그러니까, 뭐.” 우영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닉쿤이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트린다. “우리 집처럼 남자들만 드나드는 집은 없을 걸?” “다니카 있잖아.” “걔는 남자고.” 딱 잘라지는 닉쿤의 말에 우영은 잠시 뭔가를 떠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하긴, 작년에 봤을 때 보니 더 멋있어졌더라. 팔 근육이 우람해졌어. 점점 남자다워져.” 대학 시절 친구들이 붙여준 ‘안기고 싶은 가슴’ ‘매달리고 싶은 어깨’ ‘기대고 싶은 팔’이라는 다니카의 별명을 떠올리며 우영은 진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아주 우락부락한 건 아니지만 여자치고는 팔과 다 리의 근육이 유별난 친구였다. 거의 마돈나 급의 근육을 자랑하니 할 말 다 한 거다. “걔는 남자라니까.” “응, 걔는 진짜 멋져. 에이먼하고 다시 만나면 좋을 텐데.” “그건 무리일 걸.” “왜? 에이먼, 대니 좋아했잖아.” 우영은 지금까지도 에이먼이 다시 대니를 만났으면 하고 있었다. 대니는 워낙에 와일드한 형님인지라 세심하고 신경질적인 에이먼을 잘 보살펴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니 정도의 대인배라면 에이먼의 사소한 취미 정 도는 아주 너그럽게 포용해줄 것이다. 대니 본인이 보석에 열을 올리는 취미가 있는 만큼, 에이먼의 인형에 대 한 열정을 받아들이고 장려해줄 것이다. 둘이 결혼을 하면 아마 인형들의 옷이나 악세사리에 진짜 보석들을 박 아 온 집안에 진열해두고 행복해할 것이다. 아마 잘 때에도 대니는 보석을 끌어안고, 에이먼은 인형을 끌어안 고 잘 지도 모른다. 그렇게 완벽하게 아귀가 들어맞는 커플도 또 보기 힘든지라 우영이 진심으로 다시 만났으면 하고 소원하자 닉쿤 이 씁쓸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그게…… 형이 맏아들이잖아.” “그렇지.” “안 그래보여도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 첫째라는 게 워낙에 그렇잖아. 나랑 클랜, 클레어는 한 살 차이 지만 에이먼은 나랑 세살 차이라, 나이 차도 좀 있었으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동생들은 자기가 다 돌봐줘야 한다고 여겼던 모양이야. 혹시라도 우리가 엇나갈까 봐 자기가 모범을 보여야하니 숨통이 막혔겠지.” “……에이먼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가끔 보면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성격이지만 에이먼은 기본적으로 그의 가족들에게만은 한 없이 관대한 사람이었다. 거기다 은근히 고지식하기까지 해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 다. 그러니, 어린 시절 그가 받았을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동생 은 닉 쿤와 클랜이었다. 노먼 정도만 돼도 그다지 동정이 가지 않았겠지만, 닉쿤과 클랜을 세트로 동생으로 뒀 으니 스 트레스 받을 만하다. 그가 이상한 데로 빠지지 않고 제대로 자라준 게 대견할 뿐이다. “아버지는 좋은 분이지만 워낙에 바쁘고, 어머니 돌아가신 뒤로 고만고만한 동생들 챙기느라 자기 생활은 거의 없었거든. 거기다 우린 말썽만 부리고 말은 더럽게 안 들고 하니, 다니카를 만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 같아 . ” “대니가 성격이 좋지.” 푸근하면서도 대범하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해주고 충고를 할 때에는 가차 없지만 위로를 할 때에 는 더없이 다정한 대니는 에이먼에게는 최상의 짝이었다. 에이먼처럼 완벽한 남자에겐 대니처럼 한없이 푸근히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에이먼의 동생인 닉쿤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그보다는…….” “그보다는?” “……대니를 친형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어. 원래 첫째들이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약하잖아.” 그 말에 우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니가 상대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길을 걷던 중 닉쿤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한참 좋은 분위기라 우영이 뭔가 해 고개를 들자 닉쿤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서둘러 시선을 돌린다. “우영, 저기 숲으로 들어가 보자.” “숲은 왜?” “좋은 공기를 맞아야지. 우리에겐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강제로 우영의 어깨를 안은 채 방향을 돌려 산책로가 아닌 산책로 한쪽의 나무가 그득한 곳으로 들어서려 하자 우영이 고개를 갸웃한다. “여기도 공기 좋은데?” “숲 안쪽이 더 좋을 거야.” 억지로 웃으며 우영을 끌고 그 안에 들어가려는 닉쿤의 행동에 우영은 걸음을 멈추곤 미심쩍은 듯 미간을 좁혔다 . “……너 거기서 무슨 짓을 하려고?” “무슨 짓이라니?” “SVU보면 항상 저런 으슥한 데서 사건이 나던데.” “……내가 범죄자냐?” “처음부터 범죄자인 사람이 어디 있어? 범죄를 저지르면 범죄자 되는 거지. 뭘 하려고?” “아무 것도 안 할 테니 가자. 빨리.” “갑자기 왜 그래?” 우영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려하자 닉쿤이 강제로 우영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고정시킨다. 그 행동이 더 이상해 우영이 닉쿤을 밀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어? 어어? 우영!” 저 멀리서 들려오는 찢어지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에 우영이 자신의 목을 고정시킨 닉쿤을 밀어내고 그쪽 방향을 돌아보자 닉쿤이 낭패라는 얼굴을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 엘리?” 우영이 놀란 듯 그쪽을 바라보자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솜사탕을 들고 있던 엘레나가 상 인에게서 핫도그를 받아들더니 핫도그를 입에 물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보고 달려오듯 긴 금발을 휘날리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를 하는 엘레나를 보고 우영은 기겁 을 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강아지는 강아진데 대형견이었다. 길이가 장난이 아니다. 180이 넘어가는 장신의 황 금분할의 몸매를 가진 수퍼모델이 달리는 모습은 근사하긴 하지만 어쩐지 무서웠다. 물론, 엘레나는 오늘도 근사했다. 오늘은 긴 금발을 풀어 내리고 앞머리를 뒤로 넘기려 삔 하나만 꽂고 분홍색의 티셔츠에 청치마를 입고 플랫슈즈를 신은 모습은 말 그대로 인생이 화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근사했지만, 볼 이 터져라 핫도그를 물고 한손에는 아이스크림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솜사탕을 들고 달려오는 모습은, 괴 기 스러웠다. “엘리, 먹는 거 물고 뛰지 마!” 엎어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우영이 만류했지만, 이쪽이 도망이라도 칠까 엘레나는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다리 가 기니 속도도 빠르다. 기가 질린 얼굴을 하고 우영이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자 후다닥 달려온 엘레나가 우영의 앞에 서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내민다. 받아달라는 뜻인 것 같아 우영이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받아들자 그제 야 입에 문 핫도그를 빼고 눈을 반짝거린다. “우와~ 오빠가 이 근처에 있을 거라더니 진짜 있었네요.” “응?” “오빠가 우영 위치 추적해준다고 했거든요.” “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음 이어진 엘레나의 말에 우영은 비명을 내질렀다. 대체 왜 자 신의 위치를 추적한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이 허락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옆에 남자 누구예요? 또 바람 피워요?”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며 엘레나가 또릿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닉쿤이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린다. “……타조, 나 못 알아보냐?” 한 달에 걸쳐 스토킹을 하며 쫓아다니던 상대를 보고 모자 하나 썼다고 “누구예요?”라니. 하도 어이가 없어 닉 쿤이 툭하니 묻자 핫도그를 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레나가 이내 닉쿤을 알아보곤 탄성을 내뱉는다. “아! 닉쿤?” “그래.” “와우, 잘 어울리네요.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있어.” 보는 눈이 있는 애가 그렇게 간절히 사랑하던 남자를 못 알아보냐, 라고 하려다 닉쿤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세르게이가 왜 우영의 위치를 추적해?” “왜긴요? 청혼할 거라던데요?” “응?” “스카웃 제의 거절했다면서요? 그래서 청혼한대요.” 진짜 당연하다는 듯 이어지는 엘레나의 말에 닉쿤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 “잠깐, 스카웃 제의를 거절했는데 왜 청혼을 하지?” “왜긴요. 어떻게든 우리 집에 데리고 오려고 하는 거죠. 나랑 같이 백화점 가요.” 그렇게 말하며 핫도그를 입에 물고 있던 엘레나를 바라본 우영은 서서히 흘러내리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쳐다봤 다. 더운 날이었다. 바람이 불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을 오래 들고 다닐 날씨는 아닌지라, 차라리 아이스 크 림을 먼저 먹지 라는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보자 엘레나가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곤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우 영과 아이스크림을 번갈아보더니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한다. “그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요.” 작게 웅얼거리는 듯한 그 말에 우영이 잘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그거, 먹어도 된다고요. 먹고 싶어 했잖아요. 대신, 나랑 백화점 가요. 그거 뇌물이에요.” 아주 큰 선심이라도 쓰듯 어깨를 쭈욱 펴는 엘레나를 보며 우영은 진심으로 엘레나의 어휘력에 감탄했다. 타조도 모르는 애가 어떻게 뇌물이라는 단어를 안 걸까? “너, 뇌물이 뭔지 알아?” “그럼요.” “……책 많이 읽었구나? 많이 늘었네.” “집에서 늘상 쓰는 단언데요? 아빠랑 오빠들이랑 자주 뇌물 얘기해요. 상원의원들에게 찔러줘야 한다고요.” 어깨를 으쓱하는 그 말에 우영은 역시 사람에게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건가를 통감했다. 대체 그 남자들, 이 어 린애 앞에서 무슨 말들을 하는 걸까. 이상한 신세계를 본 기분에 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나, 차가운 거 안 좋아해. 아이스크림 녹길래 이것부터 먹으라고 쳐다본 거야. 먹어.” 저렇게나 먹는 걸 좋아하는 애한테서 먹을 걸 빼앗을 수는 없기에 우영이 아이스크림을 내밀자 기뻐할 줄 알았던 엘레나가 순식간에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우영을 바라본다. “나랑 백화점 가기 싫어요?” 아무래도 엘레나는 먹는 것보다 쇼핑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엘레나와 백화점에 갈 이유도 없고, 아이스크림도 안 좋아하기에 우영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자 닉쿤이 우영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엘레나에게 건 넸다. “미안하지만, 우리 지금 데이트 중이야. 그러니까 백화점은 너 혼자 가.” “어! 그럼 저도 같이 데이트해요.”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손을 번쩍 든 엘레나의 말에 닉쿤이 어이없다는 듯 날카롭게 일침을 가한다. “데이트를 누가 셋이서 해?” “하면 안 돼요?” “그래.” “……전 했는데요?” “누구랑?” “체이스 사귈 때, 걔가 원래 데이트는 셋이 하는 거라고 매일 여자 데리고 나왔어요.” 순간 우영과 닉쿤은 동시에 경악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그 체이스란 인간이 아무래도 7개월 전 백화점 총기 미수 사건의 상대 남자인 모양인데, 애한테 그렇게 가르쳐줬나 보다. 기도 안 찬다. “너 그걸 그냥 뒀냐?” 우영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그렇게 묻자 엘레나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뭐예요? 원래 셋이 하는 게 아니었어요?” “너 텔레비전 안 봐? 데이트를 누가 셋이 해?” “그건 텔레비전이니까 그렇죠. 원래는 셋이 하는 거라고, 체이스가…….” 거기까지 말하던 엘레나는 앞에 서 있던 닉쿤과 우영의 경악한 얼굴을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콘을 우두둑 일그 러트렸다. “체이스…… 이 개새끼를 그냥…….” 순식간에 순해 보이던 엘레나의 새파란 눈동자 위로 번들거리는 빛이 스쳤다. 첫 만남 외엔 늘 순해 보이는 엘레 나만 봐왔기에 우영은 그 놀라운 변화에 탄성을 내뱉었다. 괜히 마피아 딸이 아니었다. 얘도 한다면 하는 애다. “참아. 이미 끝난 놈한테 뭘 미련을 가져? 그보다 백화점은 혼자 가. 데이트는 둘이 하는 거니까.” 우영이 잠시 얼어있는 사이 닉쿤이 엘레나를 내쫓으려 말을 자르자 엘레나가 재빨리 우영의 옆으로 붙는다. “나도 같이 가요.” 자신은 상대하기 힘드니 재빨리 우영에게 붙은 게 분명해, 닉쿤이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우리 데이트 중이라니까?” “같이 해요. 사람 많으면 재미있잖아요!” “우리가 피크닉 나왔는 줄 알아? 넌 네 친구들하고 쇼핑해.” 닉쿤이 다소 가혹한 투로 사납게 소리치자 우영의 옆에 붙은 엘레나가 순식간에 풀이 죽어 고개를 푹 떨군다. “애들이 같이 쇼핑하자고 해서 나왔는데…….” “그럼 걔들하고 가.” 닉쿤은 가차 없었다. 일주일 전에 엘레나 무섭다고 자기에게 개망신을 준 인간이 맞다 싶어 우영이 ‘너, 뭐야? ’라는 얼굴로 닉쿤을 바라보는 사이 우영의 옆에 있던 엘레나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애들이, 걔들이…… 우리 학교 치어리더팀 애들인데, 그저께부터 갑자기 말 걸고 같이 밥 먹자 하고 하더니, 오늘 쇼핑하자고 해서 나왔는데 이상한 거예요. 새벽같이 네일 케어하고 머리도 다 하고 파티 복장으로 나왔길래 뭔가 했더니 나와서는 계속 두리번두리번. 파파라치 왜 안 따라오냐고 하길래 왜 그러냐고 했더니, 저랑 다니면 파파라치에 찍힐 것 같아서 나왔대요. 그러면서 파파라치 없으면 가방 들라고…….” 훌쩍거리면서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중얼거리는 엘레나를 본 우영은 진심으로 한 가지 사실이 궁금해졌다. “……걔들한테 문자 보냈어?” “네.” 순간 우영은 상황을 전부 납득해버렸다. 문자 몇 번 오가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엘레나가 보기와는 달리 먹통에 착하고 순한, 정이 굶주린 애라는 사실을 파악한 치어리더들이 얘를 봉으로 알았나 보다. 데리고 다니면 예쁘고 근사하니 악세사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고, 거기다 의외로 순해 빠져서 자기한테 잘해주면 다해줄 것 같으니, 파파라치도 찍힐 겸 자랑도 할 겸 데리고 나온 거다. 요즘 아이들이 아이들 같지 않게 영악하고 계산속이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수퍼모델 엘레나 네브즐린에게 가방을 들게 하곤 얼마나 희희낙락했을까. 자기 일은 아니지만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오른다. “엘리, 그런 애들하고 친구 하지 마. 왜 그런 애들하고 만나? 지들이 킴 카다시안이야? 찍히려면 지가 연예인하지. 왜 너한테 들러붙어? 아니지, 킴은 양심이 있어서 떠보려고 패리스 하녀 노릇이라도 했지. 걔들은 뭐야?” 본 적은 없지만, 그 애들은 연예계 데뷔를 위해 패리스 힐튼의 가방을 들어주던 킴 카다시안보다도 더 악질적인 애들이었다. 킴은 차라리 원하는 바가 분명했고, 그래서 하녀 소리까지 들어가며 패리스 힐튼의 꽁무니를 따라 다 니다 카다시안 쇼까지 하면서 연예계에서 꽤 성공을 거뒀지만, 그 애들은 엘레나를 노골적으로 이용하며 무 시하 기까지 했다. 악질을 넘어서 저질인 애들이다. 우영이 훈계하듯 말하며 화를 내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엘레나가 방긋 웃으며 우영을 바라 본다. 그리고는 방긋 웃으며 경악할 만한 사실을 전해준다. “그래서 백화점에서 쇼핑하는데 다이아몬드 목걸이 훔쳐서 걔네 가방에 넣어두고 왔어요.” “……뭐?” “꽤 비싼 거니까 아마 지금쯤 경찰서로 넘겨졌을걸요. 거기 제가 단골이라서 해보는 척하다 애들 가방에 전부 넣어뒀어요. 잘했죠?”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범죄 사실을 고백하는 엘레나의 얼굴에 우영은 잠시 그럴 만했다고 말 해줘야 하나, 어른답게 그래선 안 된다고 따끔하게 충고를 해야 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잘했어. 그 정도는 해도 돼.” “그쵸? 오빠가 그런 애들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했어요. 나쁜 애들이라고.” 세르게이는 대체 여동생을 어떻게 가르친 걸까. 허르베지쿨 가의 가정교육도 특이하지만 네브즐린 가의 가정교육 은 그보다 더 특이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복수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함무라비법전을 숭상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나름 일리는 있다. “그러니까 같이 쇼핑해요. 우영, 나온 김에 양복도 사요. 결혼식 생방으로 방송한다면서요? 근사하게 하고 가야죠.”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엘레나가 콘까지 다 먹은 뒤 이번에는 솜사탕을 조금 떼어 우영의 입에 넣어줬다. 엘레나가 먹을 걸 주다니, 뭔가 참 신기한 기분에 빠진 우영은 하객 명단에 엘레나의 이름을 추가한 걸 백 번 잘 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천천히 답해주었다. “난 그날 행사 진행하느라 정신없을 거야.” “어? 그럼 안 되죠! 나랑 같이 들어가야죠! 사진 찍어야죠, 사진!” 같이 들어가자는 말도 좀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우영은 설마, 설마 하는 기분으로 옆에 바싹 붙은 엘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너 결혼식에 레드카펫을 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안 깔죠. 그래도 포토존은 있을 거 아니에요.” 역시나였다. 레드 카펫까지는 안 가서 다행이지만-사실 백색의 카펫을 깔기는 한다.- 그래도 역시 엘레나는 결혼식에 대해 제대로 잘못 알고 있었다. 어쩐지 너무 옷에 신경을 쓰더라니……. “엘리, 포토존 같은 건 없어.” “에에? 왜요? 왜 없어요?” “왜는 결혼식이니까 없지.” “뭐예요! 말도 안 돼! 포토존 만들어요! 만들어내요!” “……영화제가 아니라니까.” “그래도 원래 다 사진 찍혀 나오고 하잖아요!” “……그건 파파라치의 일종이지. 그리고, 클랜하고 재키는 연예인이 아냐.” “연예인들 많이 오잖아요.” “안 와.” 하객 명단을 만든 우영이 장담하건대 연예인은 엘레나 네브즐린 하나뿐이었다. 셀리브리티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연예인들은 대부분이 신랑신부와 친분이 있는-신랑신부가 엄청난 팬이거나, 함께 마약하던 사이라든가 하는- 연예인들인데, 재키와 클랜은 연예인들과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 그러니 하객은 자연히 정재계의 인사들과 클랜 과 재키의 대학 동기, 그리고 닉쿤과 에이먼, 클레어의 동료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대넌과 친한 감독 두세 명이 초대받긴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오천 명이 넘어가는 하객 명단을 우영이 줄이고 줄여 천 명으로 압축한 만 큼, 엑기스들만 모이는 자리다. 말 그대로 최상류층의 명사들만 오는 곳이니 연예인들이 낄 자리가 없다. 사 실 엘레나를 하객 명단에 추가한 것도 우영의 월권이었다. 그리고 우영은 자신이 그 정도 월권은 써도 된다고 생각 했다. 그 개고생을 시키면서 그것도 못하게 하면 양심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다행히 허르베지쿨 가의 사 람들은 양심은 있는 편이었다. “그래도 파파라치는 오는 거죠?”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엘레나의 무음에 우영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사진에 목숨 걸었냐?” “예쁘게 하고 갈 건데 썩히긴 아깝잖아요.” “그래.” 우영이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닉쿤이 우영을 바라보며 심각한 어조로 묻는다. “잠깐…… 엘레나가 왜 클랜 결혼식에 온다는 거지?” “아, 내가 초대했어.”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우영이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닉쿤을 바라보자 닉쿤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한숨을 내쉬고 만다. 닉쿤도 양심 은 있었다. “하여간, 타조, 넌 집에 가든지 너희 오빠들하고 쇼핑하든지 해. 우린 우리끼리 데이트할 거야.” “에에? 닉쿤, 너무하잖아요!” “너무한 건 네 머리가 더 너무해.” 닉쿤의 폭언에 우영이 놀라 말을 막으려는데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닉쿤을 쳐다본다. “제 머리 안 어울려요? 아빠가 본 중에 최고로 예쁘다고 했는데?” “그 머리 말고, 네 뇌.” “제 뇌가 왜요?” “데이트 중인 사람들한테 끼어드는 건 무슨 매너야?” “같이 하면 되잖아요? 나랑 우영이 하고, 닉쿤이랑 우영이 하고, 또 닉쿤이랑 나랑 하고. 세르게이가 그렇지 않 아도 우영이랑 데이트 해보라고 했어요.” 갑자기 나온 세르게이의 이름에 우영이 화들짝 놀라 엘레나에게 물었다. “나랑 왜?” “몰라요. 그냥 데이트해 보래요.” “그러니까, 왜?” “모르죠. 오빠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우리 아빠도 몰라요.” 확실히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들도 그 속을 모를 정도라니……. 우영은 진 심으로 네브즐린 남매와 연결된 자신의 박복함에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 그 집안하고 연결이 됐을까. “같이 쇼핑할 거죠?” 우영이 고뇌하는 사이에도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한 엘레나가 우영의 왼쪽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을 하자 우영의 오른쪽에 선 닉쿤이 엘레나의 머리통을 밀어낸다. 그 손길에 엘레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닉쿤을 올려다본다. 새 파란 눈동자가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걸 본 우영은 놀라 재빨리 닉쿤의 손을 잡으며 닉쿤을 달랬다. “한 시간만, 응?” “……너…….” “한 시간만 하자. 나도 뭐 살 거 있고. 응?” 안 하던 재롱까지 피우며 닉쿤을 달랜 우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넘어가는 닉쿤을 보며 웃어 보였다. 진짜 한 시간만 쇼핑할 셈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 후 우영은 자신이 얼마나 안이했나 하는 생각에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많이 사도 보통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 우영이었기에 여자들의 쇼핑 시간 이 기본 3시간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여자 중에서도 엘레나는 아주 특별한 인종이었다. 결국 화창한 일요일 오후에 우영과 닉쿤은 엘레나의 쇼핑백을 들고 5시간 동안 백화점을 배회해야 했다. “내가 뭐랬어?” “……미안.” 엘레나를 마중 나온 차를 보낸 뒤 닉쿤이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자 우영은 풀이 죽은 음성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원피스 하나 사는 데에 1시간, 티셔츠 두 장 사는 데에 1시간, 그리고 구두 두 켤레 사는 데 한 시간, 그 리고 가방과 기타 악세서리를 고르는데 두 시간이 추가로 걸릴 줄은 몰랐었다. 클레어나 사라의 경우는 대부분 집으로 사람들을 부르거나, 매장에 나와도 30분 안에 물건을 고르는 일이 대부분이었던지라 그렇게 오랫동안 옷 을 고를 줄은 몰랐었다. 워낙에 타고난 옷걸이가 있어 뭘 입어도 예쁘던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고르는 걸까. 이럴 때는 차라리 매장을 통째로 쓸고 다니는 쪽이 낫다. “모델이라 뭘 입어도 근사하던데 뭘 그렇게 고를까.” 안 어울리거나 몸의 약점이 여실히 드러나 고른다면 이해하지만 거의 완벽한 몸매에 얼굴을 가진 엘레나는 쓰레 기봉투를 씌워나도 폼이 나 놀라울 정도였다. 마네킹에 걸어둔 옷이나 매장 벽에 있는 모델들보다도 훨씬 더 어 울리고 근사함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옷감의 질과 색감, 길이, 자신의 피부색과의 조화뿐 아니라 실용성까지 따 지며 하나하나 까다롭게 옷을 골랐다. 본인의 수입도 수입이지만 마피아 집안이라 돈도 많을 텐데 왜 저러나 싶 을 정도였다. 전문가의 눈은 달라도 뭔가 다른 건가 싶어 우영이 멍한 얼굴로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닉쿤이 우영의 셔츠의 뒷덜 미를 잡아당기며 험악한 음성으로 말을 건다. “……어쩔 거야?” “뭘?” “오늘 데이트. 내가 왜 타조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을 돌아야 하냐고? 너, 내가 짐 안 드는 거 알아, 몰라? 난 태어나서 내 쇼핑백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야.” 분명 그렇긴 하다. 닉쿤이 남의 짐을 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이트 중인 여자에게 줄 꽃조차도 자기 손으로 들지 않던 녀석이었으니까. 요 며칠 자신의 짐을 들어주긴 하지만, 그건 예의적인 일이었다. “이미 한 걸 갖고 뭘 쪼잔하게 그래?” “쪼잔한 게 아니잖아? 짐도 짐이지만 이 하루가 어떤 하룬데? 내가 하루 시간 빼기가 쉬운 줄 알아?” “그냥 하루 쇼핑 잘 했다고 생각해.” “내가 쇼핑한게 아니잖아.” “그럼 어쩌라고?” “키스.” 주차장 내로 들어서던 닉쿤이 걸음을 멈추며 그렇게 말하자 우영 역시 걸음을 멈추며 닉쿤을 돌아봤다. “여기서?” “그래.” “야…….” “빨리.” “안 돼.” “안 되면 여기서 안 움직인다, 나?” “……집에 가서 해줄게.” “안 돼. 여기서.” “무슨 억지야? 사람들 많이 오는 주차장에서.” “모자 썼잖아. 이 더운 날 네가 쓰고 다니래서 하루 종일 모자도 쓰고 다녔고, 엘레나랑 어울려서 쇼핑도 하고, 짐도 들어줬어. 그러니까 너도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그 말에 우영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맞는 말이긴 하다. 어쨌든 닉쿤은 오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고, 그 귀찮은 쇼핑백까지 들어주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돌려줘야 한다. “좋아. 대신 그냥 가볍게 한다.” “상관없어.”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슬쩍 주변을 돌아본 우영은 폐장 시간이 지나 한산한 주차장을 돌아본 뒤 재빨리 닉쿤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됐지?” “좋아. 그리고 다음은 손 잡고.” “……차 바로 앞에 있거든?” 우영이 불과 열 걸음 앞에 있는 차를 가리키자 닉쿤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게 뭐?” “……알았다. 모르겠다, 나도 이젠.” 어차피 하기로 한 연애 알 게 뭐냐는 생각에 닉쿤의 손을 잡은 우영은 그대로 닉쿤과 함께 주차장을 가로질러 자신의 차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내일 상상도 못한 폭풍이 닥칠 걸 상상도 못한 채. Chapter 9 이상하게도 요란한 아침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우영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꽤 밖이 시끄럽다. 블라인드를 내려둔 창을 한 번 돌아본 우영은 확인하는 것 도 귀찮아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서려 했다. 순간 옆에서 오늘도 다 벗고 잠든 닉쿤이 팔을 뻗어 허 리를 잡아끈다. 본능적인 그 행동에 닉쿤을 돌아본 우영은 곤히 잠든 닉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 듬어주었다. 잘 때는 어릴 때 그대로였다. 처음 만났던 날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그 얼굴에 우영은 조심스레 손끝으로 닉쿤의 얼굴을 더듬어갔다. 두근거림은 없다. 그런데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그냥 편안했다. 손길이 닿으면 편하고 행복하다. 다 정하고 성의 넘치는 사랑스러운 친구, 그리고 형 같고 동시에 동생 같던 친구. 가장 힘들었던 시절 옆에 있어주 었던, 지금은 옆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해진 친구. 그 편안함이 사랑이 되었고, 옆에 있으면 심장이 떨려 죽을 것 같은 욕망이 아니라, 옆에 없으면 허전하고 슬픈, 공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마 닉쿤과 헤어져야 한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한 듯 그 자리에 있었던 그가 없다면, 아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친구이길 선택한 건 그런 이유였다. 연인으로서는 옆에 있을 수 없으니 친구로서, 그리 고 동료로서 영원히 함께 하길 선택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 순간 깨어져버렸다. 닉쿤이 진심으로 다가서는 순간, 그의 애정을 확인한 순간 기쁘기보 다는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모든 노력들이 헛수고가 되어서가 아니다. 그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 에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말하지 않은 것은 서로 마찬가지니까. 서로 포기하려 했던 건 똑같다. 함께 자라서 인지 그런 점에 있어서만은, 똑같다. 닉쿤은 거울 안의 자신 같았다. 생각하는 것도 행하는 것도 비슷하다. 하 지만 그 걸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정 반대였다. 자신의 외손이 그의 오른손이고, 그의 왼손이 자신의 왼손 이듯 살 아 가는 세계가 다르기에,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나아갈 뿐 닉쿤과 자신은 꼭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니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나 같은데, 그렇게나 긴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는데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정 반대이면서 하나와 같은 그와 자신이 서로를 원하게 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와 자신 사이에 있는 유리였다. 서로를 비쳐주는 것이지만, 서로의 세계를 가르고 있는 유리 한 장이 그와 자신을 가르고 있다. 그 경계를 깨트리는 게 너무 두려웠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그 유리막이 깨 진 순간 그와 자신의 정반대의 세계가 뒤섞이는 순간의 혼란을 겪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빠르고, 순식간에, 정신없이 환경이 바뀌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수없이 이름이 바뀌고, 환 경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었다. 만약, 자신의 세계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 너머의 세계 속에서도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그런 확신이 없다.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감정도, 환경도, 심지어는 자신이 살아있는가도 불확실할 때가 많았다. 자신은 수많은 존재가치를 담고 있는 것과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무가치한 인간이기도 했다. 동시에 살아있으 면 죽어있기도 했다. 대부분은 우영 케이먼지이지만 자신은 가끔은 장우영이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에는 우영 메 이어이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우영 에클린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이름이 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때 늘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게 닉쿤이였다. 그는 늘 확신을 갖고 자신을 ‘우영 케이먼’으로 대해주었다. 태 어나 9년을 장우영으로 다시 4년을 우영 메이어로, 그리고 또 다시 7년을 우영 에클린으로 살았다. 그리고 이제 우영 케이먼으로 산 지 10년이 되었다. 닉쿤처럼 자신에게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두 개의 세계가 뒤섞인다 해도 의연하게 버틸 수 있다. 확고한 신념 과 의지, 그리고 그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그렇게나 수 없이 가쉽란을 장식하면서도 닉쿤이 뻔뻔스러울 수 있었던 건, 닉쿤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탓이었다. 사 람들의 잔인한 호기심이나 시선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스스로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자신감은커녕,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조차도 없다. 스스로를 믿지 않는 사람이 스 스로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 수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그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늘 가방을 싸두는 습관은 주변의 사람들을 온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르니 까 애초에 마음을 닫고 형식적으로 대하는 것뿐이다. 그런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겁쟁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일주일의 연애는 그런 자신에 대한 시험이었다. 마음 놓고 사랑하고 응석부린 뒤,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은 거다.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을 얻고 싶은 거다. 만약 그 기간 동안 확신을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닉쿤과 이별을 하더라도, 그 추억으로 살아갈 자신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얻을 수 있다. 클랜의 결혼식을 근사하게 성공시키고, 닉쿤과의 남은 시간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만약 그 증명을 받는다면 그때는……. “뭘 그렇게 멍하니 쳐다 봐?” 어느새 눈을 뜬 닉쿤이 뚫어져라 그를 내려다보는 우영을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파란 눈동자가 블라인 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유리구슬처럼 빛난다. 상냥한 그 빛에 우영은 웃으며 닉쿤의 이마를 툭 쳤다. “일어나. 출근해야지.” “출근을 왜 해?” “왜 하긴? 놀면 공짜로 월급 주냐?” “휴가잖아.” 그제야 우영은 닉쿤에게 다시 복귀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난 출근이야. 이 상황에서 휴가 내봐야 솔직히 나만 손해지.” “뭐?” “너라면 클랜 결혼 일주일 앞두고 쉴 수 있겠냐? 괜히 휴가 때 불려나가서 휴가만 까먹느니 그냥 일할래. 넌 어 떻게 할래? 일할래, 말래? 에반이 네 일정 취소 안 했을 것 같은데.” 모르긴 해도 아마 에반은 자신이 출근하면 닉쿤도 출근할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뻔한 일이라 어쩔 거냐고 묻자 닉쿤이 방금 전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린다. “너, 에반하고 짰지?” “아냐. 어디 짤 시간이나 있었냐? 네가 내 입장 돼봐. 오늘부터 내 사무실에서 결혼준비 해야 돼. 초대장은 제 대로 들어갔으니 마무리해야지. 다른 일정들도 있고.” 하기 싫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어차피 휴가 중에도 해야 하는 일이라 우영이 휴가를 반납한 것도 이해하는 바라 닉쿤은 순순히 일어나 앉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럼, 휴가는 언제 낼 건데?” “클랜 결혼식 끝나고.” “……맞춰야겠군.” “아, 그리고 이 김에 말하자. 나한테 비서 두 명만 붙여줘.” 우영의 그 말에 닉쿤이 황당하다는 듯 웃는다. “비서 주제에 비서를 붙여달라고?” “누가 내 비서를 붙여 달래? 일 좀 가르치고, 휴가 좀 내려고 그러지. 그리고 클랜 결혼식 때문에 여기저기 심 부름 보낼 데가 많아. 내가 과로사하길 바라는 게 아니면 두 명만 붙여줘.” “당연히, 그런 건 안 바라지. 잘 생각했어.” 그렇게 말하며 닉쿤은 우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에 우영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침대 에서 내려섰다. “씻고 나올게. 너 집에 들렀다 가야지?” “됐어. 로이한테 아파트에서 옷 좀 챙겨다 달라면 돼.” 그게 낫겠다 싶어 우영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는데 닉쿤이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열더니 다시 덮는다. “우영, 핸드폰 좀. 배터리가 나갔나 봐.” 그 말에 막 방에서 나가려던 우영이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들다 꺼진 걸 보곤 머리카락을 긁적인다. “내 것도 나갔다. 배터리 찾아줄게. 잠깐만.” 다시 침대 옆으로 다가와 사이드 테이블 서랍 안에 있던 핸드폰의 스페어 배터리를 찾은 우영은 서둘러 배터리를 바꿔 끼고 전원을 눌렀다. 삐리리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켜지고 막 전원이 켜진 순간이었다. 전원이 켜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부재 중 메시지와 문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울 정도로 울려대는 그 소리에 우영은 기겁을 해 핸드폰 액정을 쳐다봤다. “뭐야? 누구 죽었어?”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알림음에 손도 대지 못한 채 핸드폰 액정 화면을 빤히 바라보던 우영은 한참을 계속되던 소리가 멈추자 그제야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첫 번째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 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에반이었다. “응. 나. 왜?” 「닉쿤 어디 있어?」 스페인 억양이 강해 원래도 딱딱하고 화가 난 듯한 에반의 음성이 이번에는 진짜 심하게 격앙돼 있었다. 진짜 누 가 죽기라도 했나 싶어 우영은 놀란 음성으로 답해주었다. “닉쿤? 우리 집에. 왜?” 「왜 전화를 안 받아?」 “어? 아, 배터리가 나갔었나 봐. 닉쿤도 나도. 왜? 누구 죽었어? 아니면 우리 회사 망했어?” 놀란 듯 물으며 우영이 닉쿤을 돌아보자 침대에서 내려선 닉쿤이 셔츠를 입으며 우영을 돌아본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우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도 모른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너희, 신문 안 봤어?」 “지금 막 일어났는데, 왜?” 시간을 확인하니 6시 30분경이었다. 늦은 시간은 아니다. 「가서 신문 가져다 본 뒤에 텔레비전 켜. 그리고 사태 확인해. 그 뒤에 나한테 전화해. 나말고도 지금 너희 찾 는 사람 넘쳐흐르니까. 오늘 하루 종일 전화 받을 각오해.」 어쩐지 협박 같은 그 말에 우영은 놀란 듯 눈을 껌뻑거리며 에반에게 되물었다. “뭐야? 닉쿤이 또 사고 쳤어?” 「사고도 대형 사고지.」 “별일 없었어. 이틀 내내 나랑 있었는데 왜?” 「너도 같이 쳤어.」 “내가? 난 사고 안 쳐!” 「……신문 보고 말해.」 “그러니까 무슨 신문이냐고? 내가 보는 건 두 개뿐이야. 회사에 나가야 나머지 오고.” 「아무거나 봐. 전부 다 났으니까. 닉쿤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줘. 전 세계에 얼굴하고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날 테 니까.」 그 말에 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다 나지 않았어? 뭘, 새삼.” 「보통 스캔들이 아니니까, 그렇지. 닉쿤은…… 아니다. 너희 일단 회사로 와. 다른 데 가지 말고 일어나서 정상 적으로 출근은 하되, 다른 데 들르지 말고 회사로 곧장 와. 와서 얘기하자.」 “대체 뭔데 그래?” 「직접 봐. 상황 파악하려면 말로 듣는 것보다 보는 편이 나으니까.」 에반의 말에 우영은 슬슬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 잔소리장이가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할 정도면 보통 일 이 아니라는 소리다. “혹시, 우리 회사 망했어?” 「……회사가 하루아침에 망하는 일은 없어.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전에 닉쿤이랑 내가 어떻게든 막지, 그 냥 두겠냐?」 “그럼 뭔데 그래? 에반이 그러니까 무섭잖아.” 「어떻게 보면 엄청난 일이고,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일도 있으니까, 지레 겁먹지 말라고 말 안 해주는 거야. 일단 보고 와. 와서 얘기하자. 닉쿤은 각오하고 오라고 해. 에이먼도 이쪽으로 먼저 온다고 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남의 일에는-심지어는 가족들의 일이라 해도- 절대 신경 쓰지 않는, 자칭 마이 페이스 타칭 냉온동 물 에이먼까지 직접 나설 정도면 진짜 뭔가 터져도 엄청나게 터진 거다. 불안한 마음에 우영은 서둘러 방을 나 서 현관 쪽으로 향해 갔다. “알았어. 일단 회사로 갈게.” 그 사이 다시 핸드폰 수화부에서 대기 중 전화 소리가 들려왔다. “끊을게. 전화 들어온다.” 「계속 올 거야. 다 받지 말고, 아는 번호, 아니 허르베지쿨 가 사람들 번호만 받아. 절대 모르는 번호 받지 마. 그리고 지하주차장으로 나와서 재빨리 회사로 와. 사람들 조심하고.」 마치 몰래 빠져나오라는 듯한 에반의 말에 우영은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뭐야? 사람들이 우리 찾아? 닉쿤이 뭐 사기라도 친 거야? 횡령을 할 리는 없으니…… 무슨 큰일 벌였어? 사이 비종교라도 만들어서 테러라도 했대?” 「차라리 사기가 낫다. 아니, 이게 나은가? 모르겠다. 하여간 빨리 와. 와서 얘기하자.」 “아, 진짜 뭔데? 뭔지 말을 해줘야지!” 「네 눈으로 직접 봐.」 그렇게 말한 뒤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에반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재빨리 현관문을 열 고 문 앞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주워든 우영은 서둘러 에반과의 전화를 끊고 대기 중이던 통화를 연결했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축하해, 우영.」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온 원인 모를 축하의 말에 우영은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도 상대가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넌 또 뭐야, 클랜?” 「뭐긴 뭐야? 축하한다는 거지. 형하고 같이 있지? 형한테도 축하한다고 전해줘. 아주 제대로 엎어놨던데? 역시, 형이 나보다는 한 수 위야.」 물론, 닉쿤은 늘 클랜보다 한 수 위였다. 허르베지쿨 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의 대부분은 클랜이 저지르는 일이지만, 그런 클랜을 뒤에서 사주하는 게 닉쿤이였다. 클랜이 대놓고 사고를 치고 반항하는 타입이라면, 닉쿤은 뒤에서 조용히 눈치 채이지 않게 교묘하게 사람 속을 뒤집어엎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저 말썽장이 닉쿤을 대놓 고 한 수 위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에 우영은 진심으로 불안을 느꼈다. 클랜이 ‘제대로’라고 할 정도면 대체 닉쿤이 무슨 사고를 친 걸까? 상상도 하기 싫다. “대체 뭐야? 에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제대로 설명을 해! 닉쿤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어라? 아직 신문 안 봤어?」 그 말에 우영은 클랜의 웃음소리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신문을 펼쳐 들었다. “아직 안 봤어. 방금 깼어. 그리고 보통 이 시간에는 말이…….” 이 시간에는 말이다, 보통 일어나서 신문을 보지는 않아, 라고 말하려던 우영은 주워온 두 개의 신문 상단에 커 다랗게 뜬 사진과 타이틀을 읽고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아직도 안 본 거야? 새벽부터 전화통 불났을 텐데?」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 수화부에서 클랜이 계속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우영은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 는 듯 멍한 얼굴로 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신문에 난 사진은 아주 멀리서, 그것도 준비 없이 찍은 듯 초점이 잘 맞지 않아 한눈에 알아보기는 힘들 었다. 게다가 한 명은 뒤통수만 보이고, 한 명은 모자를 쓴 채 그 뒤통수에 얼굴의 절반 이상이 가려진 채라 그 모자에 쓰인 로고를 보지 않았다면 우영도 그게 누구인지 몰라봤을 것이다. “……이게 뭐야?” 너무나 멀어서, 그리고 잘 나오질 않아 우영은 그게 처음엔 뭔가 했다. 그냥 어렴풋이 두 사람이 키스를 하는구 나라고 생각만 했지만 이내 그 모자가 자신이 어제 닉쿤에게 씌워놓은 모자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눈을 부릅뜨고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신문의 타이틀은 거창했다. 『Bliss Bless Kiss With Man』닉쿤이 평소에 쓰는 향수의 이름을 빗대어 비꼰 기사였다. 거기다 그 옆에는 자신의 뒤통수가 커다랗게 확대되어 나오면 친절하게도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비서이자 예일대 시절 같은 기숙사 방을 썼던 우영 케이먼.』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덤으로,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한국인 입양아라는 설명까지 더해 놨다. 나라 망신이다. 「우영, 뭐해? 충격 받아서 쓰러졌어?」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클랜의 목소리에도 우영은 다시 핸드폰을 들 생각을 못한 채 아래에 있는 다른 신문을 펼쳤 다. 이번에도 역시 1면에 대문짝만하게 자신의 뒤통수가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얼굴보다 뒤통수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 것 같다. 뒤통수가 잘생겨서 다행이다라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며 우영은 타이틀을 읽었다. 이번에는 좀 호의적이었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순애. 10년 된 연인을 보호하기 위한 스캔들. 그의 여성편력은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며 연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었다……. 육갑을 떨어라.” 꿈보다 해몽이 좋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신문사 사장이 게이 인권 단체 간부였다. 그래서 그 동안 닉쿤에 대해 일부러 안 좋은 소식만 내보내더니-닉쿤의 남성 1미터 접근 금지령을 가장 먼저 보도하며 분개 해 , 허르베지쿨 가의 공식 사과를 강력하게 요청하던 신문이었다.- 지금은 아주 신이 나 스캔들을 퍼트리고 있 다. 확실히 너무 답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닉쿤의 남성 1미터 접근 금지령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다양성을 훼손 하며 게이들의 욕망을 자가 억제시키도록 만든 이 사회의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하며 닉쿤에 대한 연민의 정을 풀어놓 았다. “이건 뭐…… 연인을 연인이라 부르지 못하고, 게이를 게이라 말하지 못하고…….” 아주 자기 좋을 대로 온갖 사실들을 날조해놓은 신문들을 돌아보며 우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에반이 화가 나 전화할 만하다. 그리고 클랜이 신이 나 깔깔거릴 만도 하다. 아니, 에반과 클랜이 문제가 아니다. 다들 얼마나 신났을까. 닉쿤 벅 허르베지쿨이 게이라는 의혹이 담긴, 아무 도 믿지 않을 기사가 나간 지 열흘이다. 워낙에 여성편력이 화려한 데다, 본인이 입을 열지 않으니 흐지부지되어 사라진 그 기사가 다시 이 사진 한 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해 온갖 라디오쇼와 방송에서 아주 골수를 뽑아낼 정 도 로 우려내고 우려내고 또 우려내며 씹어대겠지. 언론뿐 아니라 사람들도 만나기만 하면 닉쿤의 이름을 먼저 꺼낼 것이다. 기도 안 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가 인터뷰할걸. 천만 달라 준다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우영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았다. 지금 천만 달라고 인터뷰고가 문제가 아 니다. 아무리 열심히 현실 도피를 하려고 해도 안 된다. 저 사진은 분명히 백화점 주차장에서 찍힌 거다. 하도 멀리 있어 인기척도 못 느끼고 있었던 거다. 미쳤다. 아무리 될 대로 되라고 해도 어떻게 그런 공공장소에서 저런 대범한 짓을 했을까. 아니, 사실은 괜찮을 줄 알았다. 안이했다. 엘레나뿐 아니라 백화점 직원들까지도 자신과 닉쿤이 엘레나의 새로 온 보디가드 내지 에이전시 소속의 매니저들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 정도로, 어제 닉쿤의 분장은 완 벽했다. 염색을 한 것도 렌즈를 낀 것도 분장을 한 것도 아니지만 완벽하다 자신할 수 있었다. 닉쿤 벅 허르 베지 쿨이 10달라짜리 티셔츠를 입고 5달라짜리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분장이다. 아니, 그 정 도면 완벽한 변장이다. 절대 알아봤을 리가 없다. 시계로 벨트도 지갑도 없었다. 닉쿤이 든 거라곤 핸드폰 하 나뿐이었 고, 계산은 전부 자신이 했다. 게다가 어제 몰고나간 차도 자신의 오래된 캐딜락이었다. 절대 닉쿤라 는 걸 알아 볼 사람은 없었다. 사실 닉쿤이 가쉽란에 하고 얼굴이 올라 알려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연예인이 아닌 이상, 그 렇게 잘 알아볼 리가 없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걸까. 게다가 하필 왜 이 사진이 찍힌 걸까.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뒤통수만 보고 자 신이 닉쿤의 비서라는 사실까지 유추해낸 걸까? “무슨 일이야?” 우영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옷을 걸친 뒤 방에서 나온 닉쿤이 바닥에 떨어진 우영의 핸 드폰을 주워들고는 흘깃 우영을 바라본다. “왜 그래?” 끊어진 전화를 보곤 폴더를 덮은 닉쿤은 우영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너무 머리가 복잡해 우영은 말로 하기 보다 자신의 앞에 놓인 신문을 들어 닉쿤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뭐가 어쨌다고?” 닉쿤 역시 그 저질 사진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하다 타이틀을 읽고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이게 뭐야?” “내가 아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우영은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욕실로 향했다. “우선 사무실로 가자. 에반이 당장 나오래. 에이먼도 온다니 로이한테 전화해서 네 양복하고 구두 그쪽으로 가져오라고 해.” 일단 에반과 에이먼을 만나 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영은 욕실 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거실에 멈춰선 닉쿤은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신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닉쿤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닉쿤의 푸른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차갑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한 우영은 가방에 팜과 핸드폰, 그리고 서류들을 챙겨 넣고는 닉쿤과 함께 부지런히 집을 나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머리카락도 제대로 말리지 않은 채 나선 우영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자신의 캐딜락으로 갈까 하다, 닉쿤과 함께 썬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차를 타기가 꺼려져 주차장에 세워둔 닉쿤에게 받은 람보르기니 쪽으로 가 차 문을 열었다. 서둘러 나온 덕에 아직 7시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에 질려 아예 전원을 꺼둔 채 시동을 건 우영은 그대로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닉쿤은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리고 우영 역시 딱히 할 말이 없어 막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라디오를 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하얀 섬광이 스쳤다. 놀라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은 우영은 사방에서 터지는 후래쉬에 놀라 눈을 가렸다. 그리고 거의 그것과 동시에 온 상태가 된 라디오에서 경박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 작했다. 『……엄청난데요? 오너와 비서의 사랑이라? 거기다 이 비서가 허르베지쿨 가에서 후원하던 한국인 고아라던데. 닉쿤 10일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고 넘긴 가쉽이 기정사실이 되었네요. 허르베지쿨가로서는 상당히 곤 혹스럽겠는데요?』 『허르베지쿨 가보다 닉쿤의 옛 연인들이 더 곤혹스러울 겁니다. 저라면 당장 이름 숨기고 피검사부터 하겠어요. 』 낄낄거리는 남자의 음성에 우영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자 닉쿤이 재빨리 라디오를 끈다. 그리고는 사나워진 투로 차갑게 내뱉는다. “밟아.” “응?”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 그 말에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정면을 본 우영은 차를 가득 에워싼 취재 우영의 모습에 기가 질린 듯 경악한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와 마이크를 잡고 들이대는 기자들, 그리고 차 안을 찍으려 창가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카메라맨들까지. 아수라장이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기자와 파파라치에게 둘러싸인 우영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거 뭐야?” 진짜 이 상황이 뭐냐고 묻기보다는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그 질문에 닉쿤이 차가운 음성으로 답한다. “액셀 밟아.” “어떻게 밟아? 저 앞에 사람들이 저렇게 가득한데. 으아, 좀비떼들 같아.” 조지 로메오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차 밖의 광경에 우영은 진저리를 쳤다. 썬팅이 짙게 된 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회색빛으로 보인 탓에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그들의 얼굴은 죽은 채로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달려드는 좀비떼들 같았다. “너랑 나랑만 살아있는 거고, 저 사람들 죽은 거 아냐? 28일 후, 뭐 그런 거냐?” “그냥 치어서라도 밟고 가. 여긴 도로야. 도로 점거한 것들이 병신이지.” “어떻게 그래?” 허르베지쿨 가에서 15년을 자랐어도 몇 년 전만해도 파파라치가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고, 다름 허르베지쿨 가에서도 우영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하게 우영의 인적사항이나 얼굴은 숨기며 공식적인 자리에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 도록 배려해준 덕에 우영이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허르베지쿨 가의 사람들이야 그게 타 고난 숙명이고, 그들이 갖고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특혜에 대한 대가로 사생활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지만, 우영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우영은 순간, 이런 상황 속에서 사는 스타들이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그저 소일거리로 떠들어대며 웃고 마는 가쉽 한 자락에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몇 명은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다. 쉴 새 없이 터지 는 플래시에 우영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방에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두렵다는 생각을 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냥 밟아.” “말이 쉽지, 이걸 어떻게 해?” 우영이 곤란하다는 듯 말하며 옆을 돌아보는 순간 닉쿤의 잔뜩 굳은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닉쿤의 조각 같 은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건 공포나 놀라움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위로 늘 상냥 하고 다정하던 푸른 눈동자가 얼어붙은 듯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도저히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꾹꾹 내 리 누르는 얼굴이었다. 닉쿤과 15년을 알아왔지만, 닉쿤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억누르며 화를 참는 모습을 본 건 처 음이었다. “……너, 왜 그래?” 평소의 닉쿤답지 않은 얼굴에 우영이 살짝 기가 죽은 듯 작게 묻자 닉쿤이 여전히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답한다. “너한테 화난 거 아냐.” “그럼?” “나한테 화가 나서 그래. 그냥 밀고 가.” “……닉쿤, 너…….” 우영이 막 뭐라고 반박하려던 순간 뒤에서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울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막 뒤에서 빠져나온 차가 어서 비키라는 듯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건물의 주차장 출구에서 도로로 들 어가는 진입로를 가로막은 채 우영이 안절부절못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던 닉쿤이 안전벨트를 풀려 한다. “왜? 내리려고?” “…….” “뭘 그래? 오늘만 이러다 말걸. 차라리 경찰을 불러. 교통경관도 안 지나가나?” 혹시나하는 생각에 우영이 닉쿤의 팔을 잡아 말리며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파를 포위한 취재진들이 조금 웅성거 리며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사이로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교통경찰이라도 온 건가 해 우영이 목을 빼자 취 재진들을 밀쳐내는 네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보였다. “어, 로드 아저씨다!” 네 명의 남자 중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남자를 본 우영은 반가운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해병대 출신의 보디가 드로, 대통령 경호 및 국빈들을 경호하던 로드는 5년 전까지만 해도 클레어의 보디가드를 맡았던 남자였다. 지금 은 나이가 들어 은퇴를 했지만, 애틀랜드 가 전체와 친하게 지내며 대넌의 포커 게임 친구이기도 했다. 인상은 무섭고 덩치는 엄청나 우영도 처음에는 좀 무서워했지만 마음을 터놓으면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반갑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그가 데리고 온 검은 양복을 입은 무리들에 의해 길이 뚫리자 우영은 그에게 손 을 흔들며 재빨리 액셀을 밟았다. 에이먼인 보낸 듯했다. 자신이 그 집에 들어갔을 때엔 로드는 클레어의 보디 가 드를 맡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에이먼을 자식처럼 키워주던 보디가드였다고 들었다. 클레어가 여자고 또 위 험부 담이 커 에이먼이 특별히 부탁해 로드에게 클레어의 보디가드를 부탁했지만 사실은 거의 15년 동안을 에이 먼을 옆에서 지켜보며 키운 로드는 에이먼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껴주었다. 그 덕에 에이먼이 서른세 살이나 먹은 지 금도 아직도 에이먼을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며, 에이먼의 부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사 람이었다. “에이먼이 보냈나 봐. 다행이다.” 우영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그렇게 말하며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사실 기사를 보고 너무 당황스럽고 또 잠시 패 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사실 가쉽이라는 게 워낙에 급물살을 타고 사방으로 흐르는 거라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을 굳힌 채였다. 솔직히 지금도 상당히 껄끄럽고 이상한 기분이긴 하지만, 어차피 가쉽은 가쉽이다. 10일 전 의 그 사건처럼 아무도 그 스캔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연히 사라진다. 무엇보다 자신은 뒤통수밖에 나 오 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라 믿었다. “닉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스캔들이잖아.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좀 크긴 하지만 잘 마무리될거야.” “…….” “야, 말 좀 해라. 괜히 내가 미안해지잖아.”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정면을 노려보는 닉쿤의 표정이 하도 험악해 우영이 그를 달래주려 하자, 닉쿤이 여전히 이쪽을 보지 않은 채 작게 중얼거린다.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너랑 시작해보겠다고 했을 때 이런 각오도 안 했을 줄 알아? 지금까지 망설인 데에 이런 게 무서웠던 것도 포함은 되지만…… 그래도 내가 한 번 괜찮다 한 건 괜찮아. 각오했던 바니까 미안해하지 마. 내가 널 모르는 것도 아니고, 네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 내가 하겠다고 한 거니 미안해하지 마. 나 바보 아냐. 그렇게 둔하지도 않고, 순지하지도 안하. 네가 미안해하면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거야.” “……그래도 미안해.” “어차피 가쉽이야. 다들 신나게 떠들고 비웃다 다음 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전혀 모르는 얼굴들을 할거야. 내가 상처 안 받으면 돼. 나도 모르는 척 귀 닫고 버티면 돼. 별거 아냐.” 지은 부드러운 투로 그렇게 닉쿤을 달래주었다. 하지만 닉쿤은 입술을 꾹 다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려들지 않았다. 핸들을 잡은 채 옆을 돌아본 우영은 닉쿤의 옆얼굴에 불안을 느꼈다.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해 들어서자마자 곧장 에반의 호출이 이어졌다. 이른 시간이라 텅 빈 사무실 복도를 지나 회의실로 들어선 우영은 미리 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에이먼과 클랜을 보곤,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구나 싶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바쁘네, 에이먼.” 우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에이먼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얼굴로 우영을 바라보며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건넨다. “아침부터 바쁘게 해줘서 고맙다. 클랜, 우영하고 좀 나가있어. 아침 아직이지?” 분명히 앉혀두고 잔소리를 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에이먼은 달랐다. 에반도 에이먼이 그렇게 말을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난 나가 있어도 돼?” 이상한 분위기에 우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묻자 클랜이 닉쿤을 힐끗 보더니 탁자 위에 올려둔 커다란 종이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우영은 별 상관없는 일이야. 형이 벌인 일이니 형한테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린 아침 식사나 하자.” 다른 때와 달리 유독 싹싹하게 상냥한 클랜의 태도에 우영은 의심스러운 듯 클랜을 한 번 바라보곤 다시 시선을 돌려 닉쿤을 돌아봤다. 닉쿤은 오는 내내 침묵했고 와서도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아무래도 진짜 화가 많 이 난 모양이었다. “닉쿤, 나 나가 봐도 돼?” 가벼운 닉쿤의 성격 상 이렇게 화난 게 오래 가는 일이 드물기에 우영이 애써 웃으며 다시 묻자 닉쿤이 우영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클랜하고 아침식사부터 해.” 닉쿤은 억지로 웃어 보이고 있었다. 입가는 부드럽게 휘어지지만 눈빛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차게 빛나는 그 눈빛에 우영은 불안한 듯 닉쿤을 바라보다 다시 에이먼을 돌아봤다. 그러자 에이먼이 닉쿤을 한 번 보더니 다시 우영에게 말을 한다. “나가 봐. 걱정 말고. 클랜이 사라 집에서 차랑 음식이랑 좀 준비해왔어.” “그래, 가자.” 클랜이 그렇게 말하며 봉투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우영의 어깨를 뒤에서 밀며 회의실에서 빠져나간다. 얼결에 그에게 밀려 회의실을 나서며 우영은 계속해서 닉쿤을 돌아봤다. 하지만 닉쿤은 자리를 잡으며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 아팠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닉쿤을 바라보는 기분이 너무나 이상했다. 탁- 하며 회의실을 나온 클랜이 우영의 어깨를 밀던 손을 내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작게 중얼거린다. “우와.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왜?” “왜긴? 진짜 열 받았잖아. 아, 골치 아프네. 닉쿤이 화나면 피해가 막대한데.” “화야 많이 났지만, 뭐 피해가 막대할 것까지야 있겠어?”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던 우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쉬운 듯 다시 회의실을 돌아봤다. 어쩐지 닉쿤이 화난 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닉쿤과 빽빽거리고 투닥거리는 거야, 닉쿤이 진짜 화를 낼 리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저렇게 화를 내면 주눅이 들고 만다. 전부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 “하긴, 우영은 우리 형 화내는 거 본 적 없지? 진짜 다행인 줄 알아. 어쩐지 에이먼이 당장 식사거리 챙겨들고 오라더니.” “닉쿤 먹이려고 한거 아냐? 혈당치 낮아지면 짜증나잖아.”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가 문을 연 우영이 먼저 들어서자 클랜이 그 뒤를 따라 들어서 우영의 책상 위에 커다란 봉투를 하나 내려놓는다. “뭐, 그런 생각도 있었을걸. 닉쿤 화난거 보고 같이 회의실에서 먹을지, 우영만 따로 먹일지 결정한다고 했으니까.” 양복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가방을 들고 책상으로 온 우영은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닉쿤이 지랄이거든.” 어느새 끌고 온 의자를 책상 앞에 두고 앉은 클랜이 짤막한 답을 해주자 우영은 여전히 이해 못한다는 얼굴로 클 랜을 바라본다. “지랄이라고?” “열 받으면 지랄이라고. 형제고 아버지고 없어. 나도 20년 만에 보는 건데도 살 떨리네. 하여간, 일단 뭐라도 먹어.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파라치까지 찍히느라 고생했어.” 방금 전까지 하얗게 혀를 내두르던 클랜이 재빨리 웃으며 시비를 걸자 우영이 아무 말 없이 클랜을 바라본다. “……너, 이게 재미있냐? 웃을 일 아냐, 이거.”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형들이 알아서 할 거야. 아버지랑 클레어도 열 받아서 날뛰는 중이니까 그냥은 안 넘어갈걸. 그 파파라치 불쌍도 하지.” 막 봉투에서 꺼낸 과일 샐러드와 팬케익을 책상 위에 늘어두며 클랜이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으로 불행해질 파파라치를 동정한다. 팬캐익이 든 종이 팩을 열며 우영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클랜에게 되물 었다. “닉쿤도 그렇고 다들 왜 그래? 그냥 가쉽이잖아. 뭐 웃고 넘어갈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할 거 뭐 있어? 내일이면 사라질 텐데.” “가쉽은 가쉽이지만 그게 우리 집에서는 좀 난감한 문제거든. 우리 가족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우영이 가쉽에 얼굴 나온 건 다들 용서 못할걸.” “뒤통수만 나왔는데?” 시럽을 들고 막 팬케익 위에 뿌리려던 우영이 자신의 머리통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클랜이 신나게 웃음을 터트린다. “어쩐지 괜찮아 보이더라니. 그래서 그런 거였어?” “얼굴 나왔으면 당장에 고소했지.” “역시! 난 이래서 우영이 좋다니까.” “좋아하지 마. 네가 좋아하면 기분 나빠. 난 너랑 과가 다르거든? 어, 메이플 시럽이다.” 좋아하는 시럽을 확인하곤 환하게 웃는 우영을 보며 클랜 역시 그냥 웃고 말았다. 사실 오기 전까지 닉쿤보다 우영을 더 걱정했는데 우영은 괜찮아 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잘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뒤통수만 나왔으니 아직은 안도할 만하다. 오후쯤엔 기겁하겠지만, 미리 안 좋은 걸 알려줄 필요는 없 을 듯해 클랜도 조용히 사온 커피를 손에 들며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먹어. 뭘 먹어야 머리가 돌아가니까.” 그리고 화도 덜 낼 테니까. “그런데 20년 전에 닉쿤이 화를 냈다는 건 뭐야? 20년 전이면 열 살 때일 텐데 화를 내봤자지.” 뭘 그런 걸로 아직도 떠냐는 듯 우영이 말하자 클랜이 커피를 손에 들며 거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우영이 그때 형을 못 봐서 그래. 진짜 건드리면 나도 죽일 기세였어.” 막 팬케익을 잘라 먹던 우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뭘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해? 너라면 당연히 죽이고 싶었겠지.” “우영, 나라고 어릴 때부터 이랬던 건 아냐.” “그럼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데?” “20년 전부터.” 말도 안 되는 그 말에 우영이 시럽을 뿌리다 기가 차다는 듯 받아친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20년 전이라는 거냐? 그때 핵폭발이라도 일어났어? 아니면 외계인이 와서 너희 집 수영장에 약이라도 탔어?” “엄마가 죽었거든.” 담백한 그 말에 우영은 조금 놀란 듯 클랜을 바라봤다. “설마, 닉쿤이 무섭게 화를 낸 게 그것 때문인 건 아니겠지?” “맞아. 자세한 건 나중에 형한테 들어.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 거니까.” “……왜? 무슨 난리를 쳤길래 겨우 열 살짜리가?” “겨우 열 살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지. 난 그때 아버지랑은 원수를 져도 절대 닉쿤이랑은 원수지지 말자고 결심했었거든. 우리 형이지만, 뭐랄까…… 무서웠어. 그리고 진짜 비열하기도 했고.” 닉쿤이 비열하다라, 라고 중얼거리던 우영은 어쩐지 상상이 되질 않아 클랜에게 물었다. “어떻게 했길래?” “형한테 직접 들어. 그 이상은 나도 말 못하니까. 그때 형이 열 살이니까 그 정도로 넘어갔지……. 지금은 아마 절대 그렇게 안 넘어갈걸.” “궁금하게 왜 그래? 말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형한테 들으라니까.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건 절대 금기야. 죽는 순간까지 다신 입에 담지 않기로 한 거니까, 형한테 물어봐.” 자세한 사정이 알고 싶긴 했지만 클랜이 그렇게 말하며 샐러드 통을 여는 통에 우영은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팬 케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해봐.” 우영과 클랜이 나간 뒤 에이먼이 오늘 아침 발간된 신문과 타블로이드의 1면에 나온 닉쿤과 우영의 기사들을 스크랩한 북을 집어던지며 그렇게 말하자 그걸 받아든 닉쿤이 그 기사들을 읽어 내려가며 냉랭한 음성으로 내뱉는다. “형이 먼저 말해.” “상황을 알아야 우리도 대처를 하지.” “사진 찍은 거 누구야?” “……캐니 워커.” 악명 높은 파파리치들 중에서도 악질적이기로 유명한 남자의 이름에 닉쿤은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페이지를 넘겼다. “헐리웃 전문이 왜 뉴욕까지 온 거지?” “브리트니 스피어스랑 린제이 로한이 드디어 속옷을 입기 시작한 모양이지. 아니면 이제 바지를 입거나.” 캐니 워커는 헐리웃 여배우와 가수들의 속옷 찍기로 유명한 파파라치였다. 속옷이 안보이면 카메라를 치마 속으로 멀어서라도 찍고, 아무리 가리려 해도 목숨 걸고 보디가드를 밀치고 들어와 은밀한 부위를 찍는다. 게다가 크레인까지 동원해 여자연예인들의 저택이나 빌라 안을 들여다보며 샤워 후나 일광욕 중인 장면을 포착해낸다. 저택 안에서는 의외로 누드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걸 노린 술수였다. 지금까지 그가 찍은 여자 연예인들의 노팬티씬에 애초에 속옷을 안 입는 게 문제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드레시의 옷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속옷을 못 입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유난히도 속옷 라인이 드러나 보이는 옷감이 있는 탓이다. 그걸 선택한 게 죄라면 죄겠지만, 굳이 그걸 찍겠다고 치마 속으로 카메라를 넣는 인간은 관음증 변태다. 캐니 워커도 지금까지 교묘하게 공공장소에서만 찍었다며 우겨대며 소송을 피해갔지만 아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긴 힘들 것이다.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닉쿤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본 에이먼은 애써 닉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조크를 쳤지만 그의 말에 웃기엔 닉쿤이 너무 심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에이먼이 하는 조크는 웃기지도 않는다. 너무나 심각하고 정중한 투로 말해 오히려 사람들을 당황하게만 만든다. “에이먼, 같잖은 농담하지 마. 왜 이 인간이 이 사진을 찍은 거지? 기척을 전혀 못 느꼈는데.”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몰라. 알아낸 건 캐니 워커가 최근 엘레나 네브즐린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것뿐이야. 엘레나가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졌는지 한 건 올리려고 따라다니다 너희가 걸린 거겠지. 거리도 멀고, 캐니도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엘레나를 쫓다 너흴 잡은 게 맞는 것 같아.” 닉쿤은 대강의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연예인이 아닌 이상 24시간 파파라치들이 따라다니는 건 아니다. 파파라치가 붙는 건 대부분 연예인들과 있을 때거나 파티에 참석할 때였다. 혹은 어떤 소문이 퍼졌을 때 그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이지, 자신에게는 전문적으로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는 없었다. 노먼이 한동안 질기게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노먼은 지금 우영에게도 연락을 못할 정도로 출판 사인회로 바쁠 터였다. “……이렇게 멀리서 찍혔으니 몰랐겠지. 가까이 있었다면 알았을 거야.” 어린 시절부터 온갖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라다 스무 살 때부터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파파라치들에게 둘러싸여 다닌 닉쿤이 파파라치의 기척을 못 알아챘을 리가 없다. 보통은 파파라치를 이용하는 편이기에 얼마든지 따 라와 보라고 내버려두는 편이지만, 파파라치가 붙어서는 안 될 경우에는 철저하게 뒤처리를 해둔다. 그런 닉쿤이 인기척을 모를 정도였다면 꽤 먼 거리였다는 소리다. 그래서 사진도 그 모양으로 나온 거다. “캐니 워커 뒷조사는?” 당연한 듯 나온 닉쿤의 질문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에반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나라는 의미의 한숨이었다. “지금 진행 중이야.” 에반을 돌아본 닉쿤은 이번엔 에반을 향해 물었다. “이 사진에서 우영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어떻게 이 뒤통수를 보고 알아낸 거냐고?” “저번 주에 나간 신문 있잖아. 노먼이 찍은 사진. 거기서 보고 유추해냈겠지.” 그건 닉쿤도 알고 있다. 문제는 우영이 뒤통수에 자기가 한국인 고아에 입양아고 파양을 두 번이나 당한 예일대 졸업생이라고 쓰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나 금세 인적 사항이 퍼진 걸까 하는 것이다. “내 말은, 우영의 자세한 인적 사항이 어떻게 퍼졌냐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닉쿤은 그가 보고 있던 기사를 펼쳐 에이먼에게 던졌다. 거기에는 진에 대한 아주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두 번의 파양을 겪고 허르베지쿨 가의 후원을 받게 된 것부터 시작해, 예일대 영문과 출신으로 닉쿤와는 대학 때 같은 기숙사의 한 방을 쓴 친구이자 현재의 비서이고 그가 하는 일들, 그리고 노먼 맥캐인의 책 첫 장에 나온 헌사에 쓰인 것도 우영이라는 사실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우영이 공인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이 렇게까지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일부러 찔러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건 우리도 모르지. 그쪽 신문사 기자를 따로 불러 얘기해볼 생각이야. 너무 자세해서 우리도 놀랐어. 얘기가 어디로 퍼진 건지 알아봐야지.” 물론 이야기를 퍼트릴 사람은 넘치고 흐른다. 대학 시절 같은 기숙사나 같은 과 친구들은 닉쿤과 진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파베타감마 클럽이 한 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들 머저리들 같긴 하지만 절대 형 제들에 대해 함부로 퍼트리거나 위해를 가할 이들은 아니다. 애초에 닉쿤이 얌전히 알파베타감마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들과 인연을 쌓아두면 앞으로의 긴 인생에 있어서 그들의 덕을 볼 일이 많은 탓이었다. 그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클럽의 형제들이 실수를 한다면 목숨을 걸고 적을 쓰러트려 보호해줄망정 형제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노먼이 예외이긴 했지만, 노먼 역시 치명적인 스캔들을 노출시키진 않았다. 전부 수습이 가능한 선에서 일을 벌일 뿐,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가진 않는다. 클리샤 사건 역시 친절하게 클리샤가 성인임을 더해준게 가장 확실한 예였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찍힌 사진 역시 이틀을 가지 못하는 가쉽의 습성을 잘 알고 있기에 반 장난으로 친 사고일 뿐, 악의는 없었다. 악의가 있었다면 닉쿤 이 진즉에 그를 잡아 요트 모터에 매달아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같은 과의 동기들이라는 소리다. 노먼의 신간 이야기까지 나온 걸로 봐선 우영과 같은 영문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기자 쪽으로 빠진 이들도 상당수니 얼마든지 가능하다. “각 신문사들 대상으로 예일대 출신 사람들 알아봐. 노먼 이야기까지 나온 걸 보니 예일대 영문과 출신일 가능성이 커. 얘기가 어디서 퍼졌는지부터 시작해서 기자들부터 싸그리 불러 모으고 내일부터 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 나가게 단속시켜. 형이라면 할 수 있지?” 에이먼을 돌아보며 닉쿤이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자 에이먼이 조금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썼다. 감히 형한테 하라 마라 명령을 한다고 뭐라고 따지려다, 괜히 저 더러운 성질머리 건들까 에이먼은 참기로 했다. 닉쿤은 지금 최선을 다해 참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데엔 한계가 있어. 물론 아버지도 어떻게든 손쓰시겠지만, 타블로이드 중에 우리 손이 못 미치는 신문사도 있어.” “그래도 해.” “닉쿤, 아무리 나나 아버지라 해도 언론 제재를 하는 데엔 한계가 있어.” “한계까지 압력을 줘. 그리고 당분간 우영한테 로드 붙여줘. 보디가드도 둘 정도 더해서. 그리고 아파트를 옮겼으면 하는데.” 예상대로의 반응에 에이먼이 냉정한 투로 닉쿤에게 충고를 시작했다. “닉쿤, 네가 그럴까 봐 내가 온 거야. 그냥 둬. 이건 스캔들이야. 일주일 뒤면 잊혀질 거라고. 좀 크게 터지긴 했지만 오히려 예민하게 반응하면 그쪽에서 꼬리를 물고 늘어질 거야. 평소처럼 일하고, 평소처럼 생활해. 아버 지도 가만히 계시지 않으실 기세니까.” 에이먼은 언제나 하던 것처럼, 스캔들에 대처하는 현명한 방법을 알려줬지만 닉쿤은 에이먼의 말을 아예 무시했 다. “캐니 워커에 대해 전부 다 알아내. 그가 찍은 사진부터 시작해서 키우는 개 이름, 전적, 애인, 부모님이나 가족들 직업까지 전부. 그리고 보디가드 붙여.” “닉쿤, 너만 우영 걱정하는 거 아냐. 내가 왜 움직인다고 생각해? 네 문제면 나도 신경 안 써. 우영이 엮였으니까 내가 움직이는 거야. 내가 하는 대로 둬. 다행히 우영도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으니까.” 차분한 에이먼의 설명에 닉쿤이 팔짱을 끼며 앞에 앉은 에이먼을 바라본다. 무표정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그 얼굴에 에이먼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먼이 걱정하던 것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다. “괜찮겠지. 그 녀석도 가쉽에 대해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아니까. 그래, 오늘은 뒷모습만 나왔어. 그런데 내일은 사는 아파트 주소부터 회사 출퇴근 하는 사진에, 먹는 음식, 들고 다니는 가방 브랜드까지 다 나올 거야. 그런데 나더러 그냥 있으라고? 그 녀석 얼굴 찍는 거 일도 아냐. 보디가드 붙이고 보안 철저한 아파트 수배해. ”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 이쪽에서 괜히 예민하게 나가면 그쪽도 사실이구나 싶어 더 달려든단 말야. ” “하기 싫으면 관둬.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한 번은 당해줬어. 그래도 두 번은 안 당해.” 의미심장한 그 말에 에이먼이 정색을 하며 닉쿤을 바라봤다. “너 아직도 신경 쓰는 거야?” “…….” “적당히 잊어. 그리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 그런 일은…… 그래, 그런 비극은 한 번이야. 그냥 여러모로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에이먼은 그럴듯한 태도로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뻔히 알기에 닉쿤은 침착한 시선으로 그의 냉정하고 고지식한 형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내버려뒀어. 얼마든지 찍어대고 얼마든지 떠들어대라고. 쓰러진 여자의 손만 잡아 일으켜도 그 여자는 순식간에 내 연인이 되니까. 재미있어서 내버려뒀어. 그게 우리 숙명이니까.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닉쿤은 잠시 말을 끊은 뒤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영은 아냐.” 그 말에 에이먼은 자신을 많이 닮은 동생의 푸른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냉정하게 이 일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애초에 우영을 끌어들인 게 너야.” 순간 닉쿤은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에반 역시 수없이 경고했던 바였다. 그리고 닉쿤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10년을 끌었다. 내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상처주기 싫었으니까. “알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럴 거였다면 차라리 내가 포기했을 거야. 하지만 포기가 안 돼서, 지금까지 왔어. 지금은 어떻게든 막을 힘이 있으니까. 비열하게 사기를 칠 자신도 있으니까.” “네가 아무 준비도 없이 일을 터트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우영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을 다 만들어뒀을 거라는 건 믿어. 하지만 모든 일이 네가 예상하던 선 안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냐. 네가 손쓸 수 없는 선에서 일이 벌어질 경우에 대한 각오도 했어야지. 그런 각오도 없었다면, 네가 이 세상을 너무 우습게 본 거야. 그리고 이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라 생각해. 아무리 우리라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어. 20년 전에는 네가 어리니까 그냥 넘어갔어.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었던 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냐. 욱한다고 함부로 움직이지마. 냉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해. 단 한 번의 실수가 너뿐 아니라 우영의 인생까지 끝낼 수 있어.” “…….” 닉쿤의 침묵에 의자에 기대앉은 에이먼이 느긋한 투로 입을 열었다. “네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 알아?” 이번에도 닉쿤은 답하지 않았다. 고집 세고 제어가 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닉쿤로 돌아간 듯한 그 모습에 에이먼은 강한 어조로 닉쿤의 약점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넌 언제나 안 되는 걸 모른다는 게 문제야. 불가능이라는 전제를 둔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뭐든 네 마음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네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야. 그런 면에서 우영은 현실적이야. 그 애는 이 세상에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게 많다는 걸 아니까, 너보다는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대처할 줄 알아. 문제는 너야. 어머니 일은 아주 특이한 경우였어.” 에이먼이 다시 한 번 확고한 어조로 언행에 조심하라고 충고를 하자 닉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 번 생긴 일은 두 번도 생겨. 다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딱 한 번이라는 건 없어.” “너무 앞서가지 마. 아버지도 나도, 클랜도 클레어도 마찬가지야. 이대로 두진 않아. 그러니까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고. 넌 욱하면 뒷일 생각 안하고 덤비니까.” “형의 말대로 우리 일이라면 괜찮아. 하지만 이건 그냥 못 넘어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건들면, 나도 그만큼 갚아줄 거야.” “닉쿤.” 그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못 알아먹는 거냐고 에이먼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닉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향해 걸으며 빠르게 지시를 내린다. “형은 그만 돌아가. 로이가 옷 가져오면 갈아입고 일해야 하니까. 에반, 내 스케줄 다시 정리해서 알려줘. 그리고 두 명 정도 자리 교체해서 우영한테 보내. 당분간 밖에 나가는 일은 그 사람들한테 지시하라고 해. 아버지한테도 연락해서 아버지 개인비서 세 명 정도 파견해달라고 하고.” “닉쿤, 너 기어이 그렇게 일을 만들겠다는 거냐?” “그래. 뒤처리는 형이 해줘. 형이랑 아버지라면 어떻게든 하겠지.” 더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닉쿤의 태도에 에이먼은 그냥 포기해버렸다. 허르베지쿨 가의 네 남매 중 가장 뛰어나면서도 사교성 좋고 유연한 게 닉쿤이지만, 대신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나 돌아가신 어머니도 못 말린다. “……알았어. 단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해. 그리고 너 우영한테 평소처럼 대해줘. 네가 굳어 있으니까 우영이 네 눈치를 보잖아.” 그 말에 막 회의실 문을 열려던 닉쿤이 천천히 에이먼을 돌아본다. 그건 마치 에이먼을 비난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형이 나라면 지금 우영 얼굴 보고 웃을 수 있겠어? 우영이 제일 드러나기 싫어하는 부분들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게 만들고, 그 녀석 얼굴을 볼 수 있겠어?” “걱정 마. 우영은 괜찮을 거야. 너보다는 영리해. 그리고 그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에 이 정도 각오도 없이 너한테 키스한 건 아닐 거야. 기본적으로 소심하지만, 각오한 바에 대해서는 너보다 훨씬 대범해. 한다면 하는 성미인거 알잖아.” “…….” “네 태도나 조심해. 괜히 문제 크게 만들지 말고. 캐니 워커는 맡겨둬. 내 동생을 건든 녀석을 그냥 두진 않아. ” 동생들의 일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닉쿤은 그의 형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 하다 다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닉쿤이 나간 뒤 곧 문이 닫히자 에이먼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내젓는다. “일이 커지겠군.” 에이먼의 탄식 섞인 말에 에반이 그를 위로한다. “괜찮을 거야. 닉쿤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 “어린애가 아니니 문제지. 열 살 때도 악랄했던 놈이야. 서른 살에는 얼마나 악랄할지 솔직히 상상이 안 된다. ” 돌덩어리 같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일도 없는- 심지어 자기 이마에 총이 겨눠줘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에이먼의 말에 에반은 신기한 얼굴을 해보였다. “대체 닉쿤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사람들은 전부 닉쿤이 날개 꺾인 천사라고 알고 있는 사건이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모르는 게 좋아. 알면 같이 일하기 싫어질 테니까.” 그 말에 에반은 조금 질린 얼굴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알아온 닉쿤과 일하기 싫어질 정도라면 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 걸까. 그것도 겨우 열 살짜리가 말이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래?” “나중에 얘기하자. 나도 출근해야겠다. 오늘도 수고.” 에이먼도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섰다. 에반도 더는 묻지 않고 에이먼의 뒤를 따라 문으로 향했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에반의 기척을 느낀 에이먼은 에반을 돌아보며 “아, 우영 좀 잘 달래줘. 닉쿤 저런 거 보고 기죽었을 거야. 자기가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해 .” “알았어.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 간단한 잡담을 나눈 뒤 에이먼이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에이먼을 보며 에반도 천천히 회의실을 나서 자신의 사무실로 향해갔다. 새벽에 신문을 봤을 때만 해도 에반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닉쿤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을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사실 닉쿤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영이 많이 놀랐을 거라 여기고 걱정했는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놀랐을 거라 생각한 우영은 침착했고, 오히려 닉쿤이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을 해온다. 사실은 닉쿤이 오자마자 단단히 한소리를 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어떤 가쉽이 생겨도 1면에만 나면 상관없다는 태도였던 닉쿤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놀라운 한편, 우영이 거론되자 화를 내는 게 납득도 가고, 또 그 정도로 우영을 아끼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상당히 복잡해져버렸다. *** 오늘 도착했다는 예복을 입히기 위해 클랜을 돌려보낸 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거래처에 주문전화를 하던 우영은 계속되는 상대의 질문에 웃으며 친절하게,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해주었다. 사실, 우영은 자신이 진짜 거짓말 을 못 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코너에 몰리자 아주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거짓말을 해대는 자신에게 놀 라 워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하하, 저도 놀랐어요. 거기가 니먼 마커스(Neiman Marcus) 백화점 지하였는데 어떤 바보가 그런 짓을 해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뻔뻔한 짓을 하고 나니 얼굴에 철판을 뒤집어씌운 모양이다.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참 한심 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영은 책상 위의 펜 위로 계속해서 ‘바보(idiot)’라는 단어를 적고 있었다. 철부지 십대 들도 아니고 진짜 머저리 같은 짓을 했다. 「그래요. 그럼 구두는 가봉되는 대로 보내줄게요.」 “네, 수고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우영은 이번엔 병원에 입원했을 때 꽃과 선물을 보내준 사람들에게 보낼 카드를 적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전부 뽑아놓은 상태였으니 감사의 말과 함께 간단하게 꽃을 보낼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보 내 는 것보다는 고급 장미 한 송이가 나을 것 같아 꽃집에 배달 주문을 하고 다시 카드를 쓰려는데 노크소리가 들려 왔다. “네.” 짤막하게 답을 한 뒤 다시 카드를 적으려는데 문이 열리며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 살아있나?” 짓궂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우영은 상대가 누군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내 파파라치 찍으러 온 거면 돈 내고 찍어. 내 얼굴 값 비싸.”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들던 우영은 앞에 턱하니 내려오는 커다란 봉투에 눈을 껌뻑거렸다. “뭐야? 도시락 폭탄이야?” “폭탄은 무슨. 점심 먹어야지.” 의자를 끌어다 자연스럽게 책상 앞에 놓고 앉는 노먼의 얼굴에 우영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피곤한 듯 미간 을 눌렀다. “점심까지 사무실에서 먹으라고? 내 유일한 휴식 시간까지 사무실에서 보내야 하는 거냐?” “그럼, 나가서 먹으려고 했냐?” “응.” “너 간 커졌다.” “왜?” “이 근처에 파파라치들이 진치고 있는 거 몰라? 네 뒤통수만 나와서 앞통수 찍으려고 벼르는 중이야.” 이미 알고 있던 바라 우영은 이를 갈며 응수했다. “앞통수 찍기만 해봐. 다들 고소해버릴 테니까.” 그 말에 노먼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넌 진짜 의외성의 인간이야. 지금쯤 부들부들 떨며 신경증에 걸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네?” “아직은 뒷통수만 나왔거든.” “네 이름, 프로파일 전부 드러났는데도 괜찮아?” “내가 어디 가서 사기를 쳤냐, 강간을 했냐,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냐? 세금 체납 하나도 없이 지금까지 떳떳하 게 살았고, 누구한테 흠 잡힐 구석 없어. 내가 해외입양아라는 거 아는 사람 다 알고, 파양 당한 건 내 잘못 아 니니까.” 우영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노먼이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친다. “우영 케이먼, 드디어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거야? 축하해야겠는 걸?” 우영을 잘 아는 노먼의 축하 말에 우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것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그보다는 포기한 거지. 남의 얘기 떠들어봐야 사흘이고. 다음 주면 내 이름도 다 까먹을 테니까. 닉쿤이랑 어 느 정도 관계 진척이 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야.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니 포기할 수밖에.” “하긴, 넌 한 번 한다하는 일에 대해서는 과감하니까. 그 간극이 매력적인 거 알아?” 싱긋 웃으며 다시 작업을 걸어오는 노먼을 보며 우영은 봉투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너한테 매력 있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너 시간 괜찮아? 요즘 출판 기념 사인회로 바쁘지 않아? 엘리가 네 책 열심히 홍보해줬던데.” 우영이 앞에 놓인 봉투에 든 종이 팩을 꺼내며 그렇게 묻자 노먼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다. “그 얘기 하지 마.” “왜?” “덕분에 신나게 불려 다니는 중이야. 엘레나 네브즐린 만나면 내가 가만 안 둔다고 전해.”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말투와 눈빛이 상당히 살벌했다. 그렇게 열 받았나 하는 생각이 우영은 종이팩을 풀며 노먼 에게 되물었다. “왜? 수퍼모델과의 염문설인데. 걔 예쁘잖아.” “절대 사양한다. 엘레나 네브즐린 새대가리라는 거 은근히 소문 퍼지고 있어. 덕분에 파파라치들이 엘레나가 무 슨 짓을 하나 예의주시하는 중이야.” “하는 건 멀쩡해. 꼬리 잡힐 거 없어. 말하고 쓰는 게 문제지.” “하긴 입만 안 열면야.” 다른 종이팩을 꺼내 노먼에게 건넨 우영은 안에 든 일회용 포크를 꺼내 크림 스파게티를 둘둘 말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야?” “괜찮은가 해서.” “괜찮아.” “그래 보인다. 다행이네.” “네가 내 걱정하니까 이상하다?” “반은 네 걱정이고 반은 내 걱정이야.” “왜?” “네 기분 최악이면 너한테 죽을 것 같았거든.” 그 말에 막 스파게티를 입에 넣으려던 우영이 손을 멈칫한다. 이 또라이가 직접 사과까지 하러 왔다면 또 무슨 일인가 두렵기까지 하다. “또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사진 네가 찍은 거냐?” “그건 아닌데…… 네 정보 흘린 게 아무래도 나인 것 같아서.” 순간 우영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져 내렸다. “……뭐?” “게빈 기억하지?” 물론 기억한다. 같은 영문과 출신으로 수업을 몇 개 같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 놈하고 술 마시다 책에 네 이름 넣은 거 말했거든. 그리고 네가 파양 당한 것도. 그 녀석이 해외 입양아들의 실태라는 소재로 무분별한 입양과 안이한 입양관리국의 태도에 대한 칼럼을 쓴다기에 너 취재해보라고 했는데, 네 정보가 연예란으로 넘어간 것 같다. 미안.” “……너였냐, 결국?” “응.” 진심 어린 노먼의 사과에 우영은 떨어트린 포크를 줍고는 책상을 더럽힌 면을 휴지로 닦았다. 그리고는 스파게티를 포장한 종이팩을 조용히 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영의 움직임은 아주 조용하고 신속했다. 군더더기 하나없이 깔끔한 그 움직임을 보던 노먼은 불길한 예감에 슬슬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리고 바로 1초도 지나지 않아 노먼의 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노먼 맥캐인!” 책상을 넘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우영을 피해 일어난 노먼은 빠른 속도로 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돌려 열고는 복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너, 거기 안 서?” 벼락같은 우영의 고함 소리와 함께 앞서 달리는 노먼의 머리통으로 생수병이 날아왔다. 재빨리 허리를 숙여 물병을 피한 노먼은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로 달려 들어갔다. 닫히려던 문을 강제로 열고 엘리베이터에 선 노먼은 우영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진정되면 말하자.” 싱긋 웃으며 닫힘 버튼을 누르는 노먼을 보며 막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간 우영은 바로 눈앞에서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보곤 발로 그 옆의 벽을 걷어찼다. “너 잡히면 죽을 줄 알아!” 온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우영의 고함소리에 막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려 준비 중이던 사원들이 놀라 우영을 바라본다. 평소에는 더없이 조용하고 차분한 우영이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처음 보는 데다 ‘죽여 버 린다.’라는 말을 하는 걸 믿을 수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넌 내 일생의 원수야! 걸리기만 해봐!” 여전히 분이 안 풀린 듯 쾅- 하니 엘리베이터 문을 한 번 더 주먹으로 내리친 우영은 씩씩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책을 받고 헌사까지 써준 덕에 노먼 맥캐인이 조금이나마 근사해 보이려던 찰라 아주 제대로 깨줬다. 그럼 그렇지. 노먼 맥캐인이 그렇게 멀쩡한 짓들만 할 리가 없었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지만 하여간 실수한 건 실수한 거다. 어쩐지 너무 자세히 써 있더라니 노먼이 사단이었다. “저 새끼는 저 입하고 손이 문제야. 아주 다 잘라 버려야 돼.” 다음에 만나면 이번에야 말로 사단을 내겠다고 결심하며 돌아서던 우영은 앞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을 보곤 손을 들어 웃어 보였다. “닉쿤, 식사하러 가?” “……응.” 답이 지나치게 짧다. 거기다 닉쿤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반도 같이네. 손님 접대?” 우영이 애써 웃으며 뒤에 선 에반에게 묻자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답해준다. “뭐, 그런 거지. 너, 점심은?” “갈아먹을 자식이 일단 사왔어.” “노먼?” “응. 아, 그 기사 우리 동기가 쓴 거래. 악의는 없고, 그냥 내 정보 얘기하다 새나간 건가 봐. 대체 칼럼에 쓸 내 인적사항이 왜 그쪽으로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노먼이냐?” “일부러 그런 건 아냐. 다른 얘기하다 나간 건가 봐. 식사하고 와. 나도 점심 먹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다시 닉쿤을 바라봤지만 닉쿤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선 채 뚫어져라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금단지라도 숨겨놨나 싶을 정도로 지독하게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진력이 난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달라붙더니 오늘은 또 완전히 남인척 구는게 짜증나 우영이 닉쿤을 불만스러운 듯 노려보고 있자, 에반이 우영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친다. 그리고 아주 안쓰럽다 는 눈빛을 하곤 다정한 음성으로 걱정을 한다. “몸 상했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 아직 얼굴색도 안 좋다. 쉬엄쉬엄 해.” 에반답지 않은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에 우영은 우두두 돋는 소름에 경악한 듯한 눈으로 에반을 쳐다봤다. “……혹시 나 죽을병이래? 의사가 나한테만 말 안 한 거야?” “응?” “아니, 나 뭐 암이나 그런 거냐고? 에반이 갑자기 다정한 척 구니까 이상하잖아. 아니면, 에반이 죽을 병 걸렸어?” 그 말에 닉쿤의 옆에 서 있던 로이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특유의 고집 세고 퉁명스러운 듯한 억양도 억양이지만 에반 브루너는 기본적으로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걱정을 해도 상대가 잘못한 점을 따박따박 지적하며 그러니까 그 꼴이 되었다라고 하거나, 칭찬을 해도 실수한 점을 요목조목 짚어 이런 건 고쳐야 한 다 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동료 중 누가 과로로 쓰러져도 피곤하면 알아서 스케줄을 정리했어야 한다고 무리하게 일 하는 것 자체가 폐라고 따끔하게 충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너무나 다정한 투로 무리하지 말라니 우영 이 이상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호의를 무시당한 에반으로서는 상당히 화가 나는 듯했다. “너 말이다. 사람이 걱정을 하면 걱정으로 알아먹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평소처럼 시비를 거는 듯한 에반의 어투에 그제야 우영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래, 이거야! 이게 에반이야.” 나름 우영을 걱정해 상냥한 태도를 보였던 에반은 이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냥 하던 대로 하기로 했다. 에이 먼의 당부도 있었고 닉쿤이 하루 종일 우영을 피해 다니는 통에 걱정이 돼 좋게 대해주려고 했더니 우영은 아주 멀쩡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너, 다 나았구나? 진짜 완벽히 회복한 모양이니, 하는 김에 회계 시스템 분석이나 해봐. 저번에 올린 프로그램 연동 확인하라고. 오늘 내로 나한테 보고서 제출해.” 사감이 듬뿍 담긴 에반의 지시에 우영이 팔짱을 끼며 짜증을 낸다. “이런 보복성 지시는 삼가 해줄래? 자꾸 그러면 고소할 거야.” “고소해. 그럼 내가 널 짜를 테니까.” “내 고용주는 에반이 아니거든? 그리고 닉쿤도 그런 이유로 나 짜르면 고소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다시 닉쿤을 쳐다봤다. 제발 이렇게까지 이쪽을 한 번이라도 봐달라는 듯 애원하는 시선으 로 닉쿤을 쳐다봤지만 닉쿤은 이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닉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에 반 은 다시 한 번 우영의 어깨를 툭 치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힘내라는 그 무언의 지시에도 우영은 계속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닉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좀 돌아보라 고, 이쪽 좀 봐달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닉쿤을 돌아봤지만 닉쿤은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닉쿤이 무슨 생각인지는 안다. 아침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닉쿤은 그 때문에 자신의 인적사항이 드러났다는 사 실에 분노했고, 또 자신에게 미안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알고 있다. 너무나 오래 알아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닉쿤이 다른 건 몰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도, 또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하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닉쿤이 그러면 그럴수록 미안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항상 그랬었다. 어떤 이유로든 그가 먼저 돌아서 자 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두려워지는 건 자신뿐이다. 천천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 틈 사이로 아무리 바라봐도 닉쿤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윽고 은색의 문이 완전히 닫히자 우영은 손을 들어 셔츠 속의 쇄골 사이에 있는 반지를 손끝으로 덧그리며 작 게 중얼거렸다. “소심한 자식…….” 우영한테 전화라도 좀 해.” 오후의 일정까지 끝낸 뒤 주차장으로 향하던 에반이 그렇게 말을 걸자 닉쿤이 아무 말 없이 주차된 차를 향해 간 다. 결국 하루를 못 갈 게 뻔한데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 꼴이 웃기고 또 안쓰럽기도 해 에반은 포기하지 않고 계 속 말을 걸었다. “우영은 괜찮다는데 네가 왜 그래? 걔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그럼에도 여전히 닉쿤은 침묵했다. 고객들과의 상담과 이어진 식사까지 닉쿤은 깔끔하고 완벽하게 그들을 상대해 냈다.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즐겁게, 오늘 가쉽란을 장식한 일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조차 웃으며 그게 사실일 지 아닐지 내기를 하자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모두들 별일 아니라고, 그 가쉽은 역시나 가쉽이라고 웃으며 넘 어갔 다. 닉쿤의 태도가 하도 교묘해 에반조차도 사실은 그게 날조된 기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자 닉쿤은 입에 본드라도 바른 듯 다시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에반이 아무리 귀찮게 하며 말을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야, 말 좀 해라. 뭘 그렇게 소심하게 그래?” “먼저 들어갈게. 다음 스케줄 있지?” 그의 차에 도착한 닉쿤은 로이가 열어주는 차의 뒷좌석에 올라타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 은 그 말에 에반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들어가라.” 개인 고객과 저녁 약속이 있던 터라 에반은 그의 차에 올라타 손을 흔들었다. 뒷좌석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든 닉 쿤은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곤 로이에게 어디로 갈지 지시를 내린 뒤 차게 기대앉았다. 에이먼의 말대로 다른 날과 같이,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게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라는 건 알고 있다. 자신 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못할 것도 없다. 한두 번,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모르는 척 무시하는 건 일도 아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스캔들을 화제로 삼아 내기를 걸고, 오히려 그 스캔들에 스캔들을 더해주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오늘만은 아니다. 짓궂게 오늘 난 스캔들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그 게 사실인지 아닌지 요트를 걸고 내기를 하자는 말을 건네며 스스로에 대한 환멸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에 이먼의 말대로 자신은 단 한 번도 실패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게 이렇게나 쓰디쓴 결과를 안고 돌아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 멍하니 차 안에 앉아 한참을 달려가던 닉쿤은 메시지 음에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온 문자를 보곤 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왜 전화 안 받아?」 사실 회의 중이라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다. 우영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빤히 핸드폰 액정만 바라보고 있자 잠시 후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6일 남았어. 너 자꾸 이따위로 굴면 나가는 길에 하수구에 반지 집어던질 거야.」 너무나 진다운 말에 액정을 바라보며 웃고 있자 다시 한 번 메시지가 도착한다. 「3분 안에 답신 없으면 나 세르게이랑 데이트한다? 내가 얼마나 인기 많은지 모르지?」 그 말에 드디어 닉쿤은 웃음을 터트렸다. 눈을 보고 얼굴을 보고 말하는 건 어려운데 이렇게 보니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안하다. 그간 두 사람 사이에 문자를 보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항상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하거나, 통화를 하는 게 전부였다. 메모를 남기거나 문자를 보내는 건, 둘 사이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미안할 때는 이런 것도 괜찮다. 서서히 마음이 풀려가는 듯했다. 송신탑을 통해 전해지는 짤막한 몇 개의 문장이 이렇게나 큰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대화를 할 때와는 달리 어울리지 않게 아양까지 떠는 우영이 마음에 들었다. 우영이 이렇게까지 정성을 보이는데 더는 무시할 수 없어 닉쿤은 재빨리 답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도 열이 안 내렸냐?」 농담처럼 장난 같은 문자를 보내자 곧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너, 지금 나 질투하는 거지?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툭툭거리며 가벼운 장난을 치는 듯한 그 말에 닉쿤은 다시 답문을 보냈다. 「조류한테 인기 있어서 뭐하게?」 문자를 적고 막 send버튼을 누르는데 차가 멈췄다. 짙게 썬팅이 된 차창 너머를 바라보자 검은색의 팬츠 정장에 검은색의 번쩍거리는 스팽글이 달린 슬리브리스 티셔츠를 입은 다니카가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올리고는 커다란 백을 들고 차로 다가와 문을 열고 올라탄다. 역시나 오늘도 시커먼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 시커먼 차림 속에 서도 번쩍거리는 스팽글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잊지 않은 게 너무나 다니카다워 웃음이 삐져나올 정도였 다. 딱 그녀다운 그 모습에 닉쿤은 옆에 올라타는 다니카를 보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까마귀, 아직도 검은 옷만 입냐?” “너, 자꾸 까마귀라고 할래? 이게 도와주는 사람 생각은 안 하고.” 다니카가 그렇게 말하며 살벌하게 웃는다. 다니카가 검은색의 정장 재킷을 입은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우람한 근육을 숨기기엔 최적의 의상이었다. “드디어 마돈나를 밴치마킹하기로 한 모양이지?” “우리 언니가 어때서?” 톡 쏘는 그 말에 닉쿤은 웃으며 “누나겠지.”라고 정정해주다 다니카에게 한 대 맞았다. “못 본 사이 더 우람해졌는데? 좀 있으면 G.I 제인을 넘어서겠어. 어때? 세계 평화를 위해 입대를 고려해보는 건?” “난 반전주의자야. 회사로 갈 거지? 가서 우영 얼굴 좀 보자.” 그 말에 닉쿤은 로이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차도에 멈춰 섰던 차가 매끄럽게 빠져나가자 다니카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창밖을 돌아본다. “뭐 이렇게 더워? 올해는 유난하네.” “시커멓게 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물건은?”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손을 뻗자 다니카가 혀를 찬다. “무슨 암거래 하냐?” “비슷하잖아.” “누가 보면 마약이라도 거래하는 줄 알겠다.” “마약은 흥미 없고 총기가 있으면 연락해줘.” “총 사서 파파라치들 다 쏴버리려고? 우영은 괜찮아?” 다니카 역시 오전 신문을 본 모양이었다. 오늘 만나는 사람마다 하루 종일 그 이야기인지라 닉쿤은 태연하게 대 꾸했다. “괜찮아. 의외로 의연히 받아들이더군.” “그래? 하긴, 대범할 때는 또 대범하니까. 그거 게빈짓이야.” “게빈?” “게빈 랜더스라고 영문과 친구 하나 있어. 나한테 전화했더라고. 연예부 기자가 게빈이 우영의 동문이라는 말을 듣고 은근히 찔렀나 봐. 노먼이 달려와 죽일까봐 부들부들 떨고 있더라.” 아무래도 예일대 출신 학생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다니카에게 보고를 하고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참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진 말로는 노먼 짓이라던데?” “아냐. 게빈이야. 노먼은 나름대로 게빈 보호하려고 한 거고. 괜찮은 애거든. 쓰레기 같은 기자들하고는 틀려. 잠깐 말실수한 거야. 괜히 불똥 튀게 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거야. 걔는 그냥 넘어가. 우영도 괜찮다고 했다며? ” 하긴, 노먼 맥캐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진에 대해 그렇게 떠들고 다닐 리 없다고는 생각했다. 친한 친구가 얽혀 들었으니 아예 자기가 먼저 나서 총대를 멘 거다. 자신이 그 뒤를 캘 게 뻔하니 먼저 방어막을 친 거다. 노만이 한 짓이라면 우영도 결국 화를 내다 말 테니까. 그리고 우영이 그렇게 넘어간다면 자신도 넘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노먼도 너도 무슨 오지랖이 그렇게 넓어? 너희가 인류를 구할 셈이냐?” “쓰레기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진주 하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거지. 우영한테는 미안하다고 직접 전화한댔어. 그냥 해프닝으로 넘겨.” 다든 같은 말들이었다. 그냥 가벼운 접촉 사고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라, 과잉 반응하면 오히려 더 좋지않다. 심지어 진조차도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 넘겼지만 자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같은 사건에서 느끼는 체감도가 이렇게나 다를 줄 몰랐었다. 닉쿤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다니카가 닉쿤을 돌아보며 어깨를 툭 친다. “그래도 괜찮아 보여 다행이다.” “왜?” “아까 통화했을 때엔 기분 영 아닌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 우영이 괜찮다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내일 일면은 다른 사건으로 꽉 찰 테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이었던 기분이 우영의 메시지를 받고 조금 좋아진 채였다. 그렇다고 다니카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하긴 귀찮아 닉쿤은 손을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진이나 내놔.” “아, 사진. 이거, 실물 크기 사진이야. 이 정도면 돼?” 다니카가 건넨 서류봉투를 받아든 닉쿤은 그 안에 든 사진들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속에는 찬란하게 광채를 뿜어내는 블루 다이아몬드가 보였다. 상품 자체도 우수하지만 우아하면서도 섬세한 세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괜찮다. 눈에 차는 물건이었다. “400캐럿 정도 되는 거야?” “응. 중동 쪽을 파서 겨우 구해낸 거야. 하여간 넌 운도 지지리 좋아. 어떻게 딱 맞게 이런 상품이 나오지?” “승리의 닉쿤니까.” 닉쿤이 고등학교 시절 럭비 팀의 쿼터백으로 있을 때 붙여진 별명을 입에 담으며 싱긋 웃자 다니카가 씁쓸한 웃 고 만다. “잘났다. 중동 석유 갑부들이 이런 상품을 꽤 많이 갖고 있어. 암시장을 통해서 거래된 모양인데 어때?” “좋아. 이걸로 해.” “오케이. 그럼 내가 당장에 날아가서 받아오지.” “침 묻히지 마.” “침 안 묻혀!” “너 보석만 보면 침 질질 흘리잖아.” 반박할 수 없는 그 말에 다니카는 잠시 이걸 죽여, 살려 라는 얼굴로 닉쿤을 바라보자 닉쿤이 짓궂게 말을 돌린다. “그렇게 열렬하게 쳐다봐도 소용없어. 넌 내 취향 아냐. 이 세상에 너랑 단 둘이 남아도 너랑 난 아냐. 미안하지만 날 향한 연심은 적당히 버려.” 닉쿤의 그 말에 문득 전 세계 멸망 후 닉쿤과 둘만 살아남은 자신을 떠올린 다니카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너랑 둘이 사느니 그냥 널 죽이련다.” “외로울 텐데?” “상관없어. 너랑 같이 살아남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쪽을 택하는 게 정신 건강 상 좋아.” 딱히 안 맞는 건 아니지만, 아니 사실은 기가 차게 잘 맞는 쪽이지만 다니카와 닉쿤은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 았다. 아니, 좋아하기는 하지만 둘 다 기가 센 타입이라 만나기만 하면 싸우다 끝나니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었 다. 하지만 닉쿤은 나름 다니카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니카는 진짜 거물이 될 녀석이었다. “우영은 이제 퇴근할 시간이지?” “응.” “그럼 나랑 같이 회사에 올라가자. 우영하고 저녁 먹고 얘기 좀 하게.” “그래. 난 나머지 일 정리하고 나가야 하니까 네가 같이 있어줘. 잘 됐네. 네가 있으면 보디가드는 필요 없을 테니 우영하고 내 아파트로 가 있어.” 마치 고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듯한 닉쿤의 어투에 다니카가 팔짱을 끼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너 날 뭘로 생각하는 거냐?” “람보.” “어이.” “싫어? 그럼 터미네이터.” “너 이 보석 다른 데로 빼돌리는 수가 있어? 나오기만 하면 거둬들일 사람들 수두룩한 거 내가 널 위해서 빼낸 거 몰라?” “알아. 그래도 넌 람보야.” “이왕이면 사라 코너라고 해줘!” “사라 코너는 미인이야.” “야!” 별 의미 없는 잡담을 하며 두 사람은 천천히 다시 닉쿤 사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뭐야?” 모처럼 문자를 보냈나 했더니 다시 답이 없는 닉쿤이 야속한 듯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우영이 퉁명스레 말하자,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우영, 무슨 일 있어요?” 그제야 우영의 사무실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두고 회의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우영은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아뇨. 개인적인 일이에요. 그럼, 식장 조감도 확인해서 배치도 다시 짜주세요. 일단 이 정도면 끝난 것 같네요. 내일 나올 메이드복 확인해주시고요.” 우영이 체크된 목록들에 대한 지시를 내리자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방송국 쪽 일은 캐인에게 맡기면 되는 거죠?” “네. 부탁드릴게요. 그럼, 이만 퇴근하죠.” 우영이 앞에 놓인 스케줄 첩과 노트북을 정리하며 그렇게 말하자 상대 역시 들고 온 팜과 스크랩북들을 정리해 일어선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수고하셨어요.” 그녀가 사무실에서 빠져나가자 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과 스케줄 첩을 제자리에 두곤 당장 필요한 서류들 을 챙겨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을 찾으러 가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 다 . “네.” 짤막하게 답하며 막 재킷을 입으려는데 예상대로 커다란 덩치의 로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하얀 폴로 티셔츠에 검 은 면바지를 입은 로드는 희끗희끗 샌 머리 덕에 편안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였다. “어서 오세요. 아침에 감사했어요.” 우영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로드가 다가와 우영을 안아 어깨를 두드려준다. “뭘. 네가 고생이 많구나.” “뭘요. 아저씨가 더 고생이죠. 닉쿤이 때 쓴 거죠?” “아니, 에이먼 부탁이야. 나도 오랜만에 나오니 좋다.” “모처럼 쉬시는 분인데 죄송해요.” “아냐. 지금 퇴근하니?” “네. 시간 맞춰 오셨네요. 저랑 같이 저녁 식사해요.” 닉쿤은 어차피 일정이 빡빡하니 저녁 늦게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6일 남았는데 바빠서 얼굴 볼 새도 없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휴가를 반납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니, 어차피 자신의 성격에 반납을 안 했 더라도 일이 신경 쓰여서 안절부절못했겠지만 그래도 조금 아쉽다. 진지 재킷을 제대로 입고 가방을 들고 나서자 로드 역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우영의 옆에서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일은 할만 하고?” “그럼요. 저야, 딱 적성이죠.” “다행이구나.” “전원생활은 마음에 드세요? 손자들 보는 재미 좋죠?” “뭐, 그렇지.” 천천히 복도를 걸어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우영은 계속해서 로드와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 버튼을 눌렀다. 그때까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침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 일 에 대해서는 잊은 듯했다. 사무실 사람들도 오전에만 조금 술렁거렸을 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닉쿤과 우영을 보고는 이내 그 소문 자체가 헛소리라며 무시하고 넘어갔다. 이대로면 내일 정도면 쓸데 없는 소문들은 모두 사라질 듯했다. 항상 그랬듯이 하루, 아니 길면 사흘을 넘지 못 한다. 요 사흘만 조심하면 된다. 치잉-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엘리베이터의 도착과 함께 열리기 시작한 문에 우영은 멀리서 다 다다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무슨 사고라도 났나 해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 앞이 하얘졌다. “안녕하세요! 신나는 테러블 트라블(Terrific Terrible Trouble) 채널 가쉽의 맥 커먼입니다. 우영 케이먼 씨죠 ?” 순간 옆에 있던 로드가 재빨리 우영의 팔을 잡아끌고는 우영의 얼굴을 그의 손으로 가렸다. 과연 전직 보디가드다운 재빠른 행동이었다.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그 실력은 어디 안 갔다. 하지만 아무리 로드가 무서운 얼굴로 바라보며 우영을 감싸며 카메라를 가기려해도 상대 리포터는 막무가내였다. “아주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됩니다. 우영 케이먼 씨, 오늘 오전에 난 닉쿤 벅 허르베지쿨과의 열애설에 대해 좀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스스로를 리포터라 밝힌 남자는 아주 어려 보였다. 게다가 케이블 연예 채널의 리포터답게 말투가 지나치게 경박스러웠다. 귀에 거슬리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잘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 옷차림도 가벼운 티셔츠에 청바지인걸로 봐서는 유명 케이블 채널이 아닌 작은 지방 케이블 채널인 듯했다. 끈질기게 우영을 따르며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 행동에 로드가 계속해서 카메라를 손으로 가리자 카메라맨이 이리저리 피하며 우영을 찍는데 여념이 없다. “허르베지쿨 가에서 후원하던 고아라고 하셨는데, 닉쿤과는 언제부터 그런 관계가 된 거죠? 사실은 10년이 넘은 사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강요는 아니었나요? 아니면, 성상납?” 기가 막힌 말에 우영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 리포터를 바라보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자 신이 난 리포터와 카메 라맨이 정면에서 우영의 얼굴을 잡는 사이 저 멀리서 익숙한 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그 차체에 우영은 경악한 얼굴로 재빨리 리포터를 피해 자신의 차 쪽으로 다가갔다. 닉쿤과 이 사람을 마주치 게 하 면 진짜 오늘 큰일 치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앞에서 들이대는 카메라와 리포터,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온 조명 담당 외의 두 세 명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막 차 앞으로 가는데 리포터가 경악할 만한 발언을 이어간다. “이 차는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차로 등록돼 있는데 이것도 선물로 받은 건가요? 역시 통이 크네요. 람보르기니 라니. 여러분들, 모두 부러우시죠? 이래서 돈이 많은 게 좋은 모양이네요. 제게는 꿈의 차인데 말이죠? 그 외에 또 뭘 받으셨나요? 재벌 애인의 선물 자랑도 좀 해주시요?”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계속하는 리포터의 태도에 우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바로 옆에 로드가 있고, 또 카메라가 있고 저 멀리 닉쿤의 차도 있어서 우영은 참았다. 참자. 참은 인 자가 셋이면 생명을 구한다. 무조 건 참자. 생각 같아서는 저 리포터의 머리통을 돌려차기로 후려 차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아야 한다. 서둘러 이 주차장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인간이 아닌 것들은 상대하는 게 아니다. 닉쿤이 내리기 전에 떠나야 한다. 화를 참으며 간신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쥔 채 차를 향해 가는데 운 나쁘게도 닉쿤의 차가 바로 앞에서 멈 췄다. 그리고 차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은색의 양복을 입은 닉쿤이 내려선다. 순간 인기척을 알아챈 리포터가 닉쿤을 돌아보자 카메라 역시 빠르게 닉쿤의 쪽을 비춘다. “오우, 여기 오늘 오전 미국을 뒤흔들어놓은 두 분이 동시에 나타나셨네요. 이제 닉쿤 벅 허르베지쿨과도 인터 뷰를 해보겠습니다.” 지금 자기 목숨이 간당간당한 것도 모르고 신이 나 방방 뜨는 리포터를 보며 우영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 사 이 닉쿤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차에 서 내린 다니카가 닉쿤의 뒤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오! 과연 닉쿤 벅 허르베지쿨! 혼자는 안 오는군요. 오늘도 여인을 대동하고 오셨는데 오늘은 그다지 미인이 아닌 걸요? 여자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니시나 봅니다, 요즘은? 애인은 남자? 보디가드는 여자? 역시 탁월하군요. ” 저 놈의 주둥이는 왜 쉬지도 않냐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이 슬랭어를 섞어 저속한 말들을 내뱉는 리포터를 경악 한 눈으로 돌아본 우영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닉쿤의 무시무시한 기운에 질려 걸음을 멈췄다. 저 리포터는 입만 살았지 눈은 썩어버렸는지, 저렇게 너 죽었어라는 오라를 발산하는 사람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용 감하다고 보기엔 지나치다. 그냥 바보인 것 같다. 자신이라면 도망간다. 당장에 신발 벗어들고 도망친다. “오! 닉쿤! 아메리칸 스윗하트의 등장입니다. 자, 닉쿤. 한 마디만 해주세요. 어떻게 우영을 사로잡았죠? 역시 돈인가요? 아니면 정력? 혹시 성희롱이었나요? 아니면 후원하는 집안의 아들로서 강제는 아니었나요? 어떻게 꼬셨나요? 역시 돈?” 온갖 비어와 은어를 섞어 쨍알쨍알 아주 빠른 속도로 닉쿤을 향해 해선 안 될 말만 골라서 하는 리포터를 입을 쩌억 벌리고 바라보던 우영은 바로 그 너머로 닉쿤이 싱긋 웃는 걸 보고 말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로 앞에 선 리포터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짓는 모습은 마치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 근사했지만, 눈에서는 광선이 나올 것 같았다. 딱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그를 찍는 기자들을 갈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던 그 얼굴이었다. 순간 우영은 위험을 감지했다. 닉쿤의 분노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저 병신 리포터는 왜 하필 지금 나타났냐 하는 한탄을 하며 로드를 돌아본 우영이 어떻게 좀 하라는 듯 눈짓을 하자, 로드가 우영의 옆에서 벗어나 닉쿤에게 다가간다. “……하하,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요.” 리포터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어설픈 웃음과 함께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맥이 빠진 음성으로 작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닉쿤의 분노는 그 정도에 풀릴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닉쿤이 살짝 입술 끝을 올려 웃는 게 불길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매력적인 푸른 눈동자. 그리고 조각같 은 미모 위로 냉랭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 우영은 끝장났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저 리포터는 오늘 관 짜야 할 것 같다. 아니, 관도 아니다. 시체도 찾기 힘들 테니 그냥 화장하는 쪽이 낫다. “얘기를 듣고 싶나?” 우영이 걱정을 하든 말든 닉쿤이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을 걸자 움찔했던 리포터가 다시 기가 살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오! 물론이죠! 전 국민이 원하고 있습니다!” 저 리포터는 아무래도 일 해먹기는 글렀다. 저능아가 아닌 이상, 닉쿤이 한 ‘얘기가 듣고 싶은가?’라는 말이 친절하게 상황 설명을 해주겠다는 말이 아니라는 건 다 알아 들었을 거다. 닉쿤의 말은 말하기 전에 널 작살내겠다는 의미였다. “자, 다들 두근두근하시죠?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심경 고백! 허르베지쿨 가에서 후원하는 고아를 어떻게 침대로 끌어들이신 거죠?” 순간 닉쿤의 얼굴 위로 살기가 스쳤다. 끝장이다. 하지만 이어진 리포터의 말에 닉쿤의 신경이 먼저 끊어지기 전에 우영의 신경이 먼저 끊어져버렸다. “혹시 침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려보낸다고 협박한 건가요?” 참으려고 했다. 진짜 어떻게든 참으려고 침착하게 자신을 다스리며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또 눌렀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거다. 아무리 막되 먹은 인간이라도 해서는 될 말과 안 될 말은 구분해야 한다. 닉쿤과 자신이 눈물겹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 따위로 함부로 떠들어댈 정도로 가벼운 감정은 아니다. 더더군다나 다른 것도 아닌 닉쿤의 인격과 허르베지쿨 가 전체를 모독하는 그 말은 참아줄 수 없었다. 순간 우영은 저런 건 인간 대접해줄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야, 너 안 닥쳐?” 몸이 붕 뜬다는 감각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고함을 내질렀다는 감각도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없었다. 예전에도 딱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식당에서 노먼이 자신을 하니라고 불렀을 때, 딱 지금 같았다. 이성은 사라지고 몸만 움직이는 상황. 지금이 딱 그랬다. 온 방 안이 브라운관으로 가득 찬 사무실에 앉아 대형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에이먼은 커다란 브라운관 안으로 아주 근사하게 돌려차기를 한 방 날리는 우영을 보고는 커피를 마시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역 케이블에서 오전부터 요란하게 닉쿤의 연인을 찾아간다는 광고가 나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생방송이라며 신나게 닉쿤 사가 있는 건물 지하로 몰래 들어가, 바닥을 구르고 난장을 피우던 어린 리포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영을 향해 달려갈 때는 알아서 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단 3분도 지나지 않아 사단이 났다. “……근사하군.” 에이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세르게이가 우아한 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케이블 방송의 방송 사고를 보고도 세르게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에이먼도 눈은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할 뿐이다. “……감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이먼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어차피 사단이 날 줄은 알았다. 닉쿤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걸 본 순간 경박스러운 리포터가 살아서 저 건물을 벗어날 수 없을 걸 예감하긴 했다. 그래서 잭에게 변호 준비를 해달라고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던 터라 이 사건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놀라운 건 닉쿤이 아닌 우영이 그 리포터의 머리통을 날아 찼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마음에 들어. 어때, 에이먼? 저 녀석 나 주지 않겠어?” 계속해서 우영을 달라고 요구하는 세르게이에게 에이먼은 우영은 사람이니 스카웃하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고 거 절해왔지만 지금은 그 말조차 듣기 귀찮았다. “……좀 닥쳐주시죠, 세르게이 네브즐린 씨?” 침착한 태도로 찻잔을 내려둔 에이먼이 다시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한 방에 나가떨어진 리포터의 앞에 선 우영이 자세를 잡으며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를 내지른다. 『너 한 번만 더 내 앞에 나타나 봐! 당장에 고소할 거야! 테리픽 테리블인지 트래픽 테러인지, 거기 채널도 마찬가지야! 내 얼굴 찍고 싶으면 돈 내! 내 얼굴 비싸! 어딜 내 허락도 없이 얼굴을 찍어!』 미국 시민권자로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상식인 다운 우영의 발언에 세르게이가 우아하게 웃으며 박수를 친다. “성격 있군.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걸?” 어느 때고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세르게이의 속 모르는 발언에 에이먼은 이를 갈 듯 응수한다. “좀 닥치라니까…….” 『다음에는 이 정도로 안 끝날 줄 알아! 그리고 너 영어나 제대로 배우고 리포터 해! 웬 새대가리들이 이렇게 많아?』 쓰러진 리포터를 발로 툭 차며 말을 마친 우영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뒤 다시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한 태도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다시 휙 하니 카메라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어 보인다. 사람들이 모두 인상 좋다고 하는, 유난히 해맑고 밝아 보이는 미소를 지은 우영이 카메라맨을 향해 조용히 주먹 쥔 왼손을 들어 올리곤 중 지를 펼쳤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아주 또렷하고 선명해 우아하기까지 한 발음과 음성으로 마지막 인사말을 던진다. 『좆까!』 상쾌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 한 방을 날린 우영이 휙 돌아서 그의 차로 돌아가 차 문을 여는 모습이 여실히 브라운관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닉쿤의 뒤로 다가오던 다니카가 신이 나 그 까마귀 같은 웃음을 터 트렸다. 온갖 잡음을 멀어지게 하는 그 요란한 웃음소리에 닉쿤이 인상을 쓰는 장면이 그대로 화면에 잡힌 뒤 그 장면을 보던 세르게이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걸작이군! 시트콤도 이렇게는 못 나오겠어! 과연 신나게 끔찍한 사고 채널이야.” 세르게이는 이게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신이 나 떠들어댔지만 에이먼은 조금도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 도 아닌 우영이 저렇게 막 나간다는 건, 우영이 지금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 녀석…… 이게 생방인지 모르는 거야.” 알았다면, 저 소심한 성격에 저렇게까지는 못했을 거다. 아니, 어쩌면 했을 수도 있다. 우영도 한 번 성질 나오면 앞뒤 안 재는 타입이다. “이거, 케이블 역사상 길이길이 남겠는걸. 마음에 들어. 보면 볼수록 내 타입이란 말야.” “세르게이, 당신은 좀 닥쳐.” 어지간하면 흥분하지 않는 에이먼도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듯 머리를 싸맸다. 케이블 채널을 맡고 처음으로 했던 생방송 요리 쇼에서 폭탄 머리를 한 리포터의 머리에 불이 붙었을 때보다 더 난감한 상황이었다. 분명히 우영은 이게 생방인지 모른 거다. 그러니 적당히 편집할 줄 알고 한 짓이겠지만, 지금 우영의 ‘좆까’는 생방송으로 뉴욕 전역에 퍼져버렸다. 그냥 카메라를 향해 한 욕이 아니라, 비록 그 채널이 소규모의 인기 없는 케이블 채널이라 해도 일단 우영은 뉴욕 시민들 전체를 상대로 욕을 한 거다. “미치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이먼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삐- 소리도 없이 적나라하게 나간 욕과 우영의 단아하고 상쾌한 얼굴, 그리고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우아한 말투 와 음성이 기가 막히게 언발란스해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간다. 유순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동안에, 상냥하고 밝 은 어조. 마치 잘 교육 받고 자란 부유한 귀족가의 도련님 같은 얼굴을 하고 신나게 돌려차기를 하고는 웃으며 ‘ 좇 까’라니. 거기다 그 정신 사납고 막말을 하는 어린 리포터에게 영어나 제대로 배우라는 침착한 충고까지 곁들였다. 너무나 진다웠다. 너무나도 우영 케이먼다워 웃음만 나온다. 파파라치도 파파라치지만 저런 저질 케이블 방송의 리포터들도 문제인데 우영이 한 방을 제대로 날려줬다. “난 우영이 진짜 마음에 들어. 닉쿤과도 저렇게 됐으니 내가 데려가면 안 되나?” “세르게이, 당신, 헛소리 좀 그만해. 우영은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는 거지, 일단 가족은 아니잖아.” “곧 가족도 되겠지. 하여간, 변호사부터 찾아야겠군.” “그러는 게 좋겠어. 저 리포터가 고소하면 복잡해질 테니.” 그렇게 말하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리포터가 나오는브라운관을 세르게이가 턱으로 가리키자 겨우 웃음을 삼킨 에이먼이 자세를 바로 해 앉으며 정색을 한다. “그래도 우리가 이겨.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드물게도 고압적인 에이먼의 태도에 세르게이가 의자에 기대앉으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거린다. “흐음, 첫째의 책임감이라는 건가? 내 동생들에게 손을 댔으니 끝장이라는?” “그런 거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난 너처럼 과보호는 안해.” “그렇겠지. 동생을 이용한다면 모를까. 동생 준다고 파닉스 사서는 당신이 썼지?” 재빨리 돌려 공격을 하는 에이먼의 태도에 세르게이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다시 공적인 대화로 돌아갔다. “……그 얘기는 안 들은 걸로 하지. 캐니 워커는 그대로 처리하면 되는 건가?” “그대로만 해줘.” “이걸로 너도 나한테 약점 잡힌 거야. 괜찮겠어?” 남한테 지는 거 싫어하고, 기대는 것도 질색이고, 가끔은 인간 혐오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고지식한 에이먼의 성격을 잘 알기에, 세르게이는 이 거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에이먼의 태도는 확고했다. “상관없어. 당신이랑은 오래오래 같이 일할 테니까. 그리고, 당신은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거잖아?” 그 사이 노트북을 열고 인터넷으로 방금 나온 방송에 대한 반응을 찾는 에이먼이 세르게이를 바라보며 요염하게 웃는다. 평소에는 더없이 딱딱한 인간이 이럴 때에만 저렇게 교태를 부리는 꼴에 세르게이는 작게 혀를 찼다. 잘못 걸려도 제대로 잘못 걸렸다. 평소에는 여왕님처럼 오만하고 장군처럼 고집 세고 고지식한 녀석이 가끔은 창녀처럼 교태롭고 또 가끔은 정치가들처럼 교활하며 어떨 때엔 변호사들처럼 악독하기까지 하다. 아주 골치 아픈 상대를 만나버렸다. 그게 에이먼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지만, 솔직히 아주 상대하기 버겁다. 그 주제에 또 사람은 싫어한다. 저 지독한 개인주의와 인간혐오증의 저반을 파헤치고 싶어지는 건 아마, 세르게이 타고난 본능 탓이다 . “이럴 때는 진짜 네가 싫어, 에이먼 허르베지쿨.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이용만 하려드는 거, 최악이잖아.” “그 고약한 악필부터 고치고 와. 그럼 생각해볼 테니.” “악필을 고치려면 우영이 필요한데, 말야?” “당신 때문에 닉쿤과 원수질 수는 없어. 당신이랑은 원수 져도 그 놈하고는 원수 안져.” “귀엽던데?” “평소엔 귀엽지. 웃고 있으면 천사 같고. 그런데 열 받으면 인정사정 없거든. 우영도 알고 있어. 그래서 자기가 먼저 사고 친 거야. 우영이야 저런 사건 생기면 동정을 받으면 받았지, 비난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 “눈물겹군. 연인을 위해 법정까지 갈 각오를 하다니…….” 세르게이가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기사를 검색하던 에이먼이 다시 세르게이를 바라보며 말을 끊었다 잇는다 . “아마, 그건 아닐걸.” “그럼?” “아마 돌려 차는 순간에는 별 생각 없었을 거야. 그냥 열 받으니까 후려친 거지. 쟤도 가끔 나사 풀리면 무섭거든. 평소에 얌전한 만큼 열 받으면 폭발력이 엄청나. 거기다 깐깐하기까지 하지.” “진짜 매력 있다니까.” “매력 타령은 그만하고, 내일 나갈 신문 보도 내용이나 뿌려줘. 내가 뿌리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타블로이드에 압력을 줘.” “어떻게?” “타이틀은,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연인은 다니카, '형님'이라 부르는 그녀.』” “……형님?” “닉쿤 뒤에 있던 여자, 다니카 메를랜드. 예일대 시절의 동창이고 칼리스타 다이아몬드의 후계자야. 나랑도 데이트했었는데 동기들 사이에서는 ‘형님’이라고 불리지. 팔근육이 엄청나거든. 닉쿤과 함께 있는 다니카의 뒷 모 습만 본 누군가 실수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해. 그걸로 닉쿤 게이설은 마무리해. 그리고 그 뒤는 칼럼리스트 들 총 동원해서 케이블 방송 이대로 괜찮은가. 리포터의 기본 자질부터 따지고 들어가서 공인이 아닌 일반 시민의 권리까지 침해한 파파라치와 케이블 채널. 다이아나 비의 비극을 일반인들에게까지 전염시킬 셈인가, 라는 식으로 기사를 끌어내고. 전국적으로 사생활 침해의 위험도에 대해 성토하는 기사들을 뿌려. 그리고 뉴욕에서 만이라도 유명인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 관렵 법규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프레스를 넣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동시에 내일 나갈 기사들까지 전부 창작해낸 에이먼을 보며 세르게이는 혀를 내둘렀다. “……넌 그런 생각밖에 안 하고 사는 거냐?” “그렇게 자랐으니까. 캐니 워커는 깨끗하게 처리해. 내 동생들을 건든 녀석이 두 다리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하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폭군이다. 과연 허르베지쿨 핏줄은 어딜 가도 바뀌질 않는다. 방금 전 생방송 프로에서 리포터를 향해 걸어오던 닉쿤을 보곤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여기며 에이먼을 슬쩍 봤었는데 확실히 형제는 형제다. 외모뿐 아니라 그런 점까지 꼭 닮았다. 거기다 이 폭군과 저 성격 나쁜 동생 위에는 이 애송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넌 허르베지쿨까지 있다. 확실히 저 집 형제들을 건드리는 건 상당히 비생산적인 일이다. 확실히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느긋하게 앉아 다시 화면을 돌아보자 화면에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다니카의 웃음소리에 닉쿤이 짜증스러운 듯 말을 던지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시끄러워, 까마귀.』 『너, 자꾸 까마귀 까마귀 할래?』 『그럼, 람보라고 불러줘?』 『이게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화면에 잡힌 다니카가 들고 있던 커다란 백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입고 있던 재킷을 벗는다. 순간 드러난 우람한 근육에 세르게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여자의 근육이 아니었다. 막 수화기를 들던 에이먼 역시 그 장면을 보곤 혀를 찬다. “저 녀석들, 아직도 생방인 거 모르고 있어.” 진짜 그런 듯했다. 케이블 화면을 통해 그들의 대화가 낱낱이 보여 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 다니카와 닉쿤은 나름 다정하게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 좀 어떻게 해.』 『내 웃음소리가 어때서?』 다니카가 항의하듯 받아치자 닉쿤이 상쾌한 웃음을 날린다. 아메리칸 스윗하트라고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달콤한 미소였다. 『다니카.』 『뭐?』 『넌 진짜 근사한 녀석이야.』 그 말과 함께 다니카가 비명을 내질렀다.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한 기분에 세르게이는 의아한 눈으로 에이먼 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여자, 드랙퀸인가?” 너 남자랑 데이트했냐, 라는 듯한 그 질문에 에이먼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답한다. “……순종 여자야. 다니카…… 너까지 이러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내저은 에이먼은 내선번호를 누르고는 잠시 기다렸다. 변호인단을 부르는가 해 에이먼을 바라보던 세르게이는 에이먼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다시 한 번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Terrific Terrible Trouble 채널 인수 준비해.” Chapter 10 “……이건 또 뭐야?”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들고 또 다시 매스미디어의 세계로 탈출하려던 우영은 브라운관을 켜자마자 나오는 자신의 욕설 장면에 마시던 맥주를 뿜어 버렸다. 그 장면만으로도 충격적인데 화면 하단에 아주 친절하게도 ‘1 시간 전 방송된 TTT채널의 생방송 장면’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생방이었냐…….” 갑자기 눈앞에 아득해지고 머리가 텅 빈 그 느낌에 들고 있던 맥주를 놓친 것도 모른 채 우영은 입을 헤에 벌린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자신의 왼손 중지가 멀어지며 밝고 경쾌한 인상의 남자와 여자가 자신의 왼 손 중지 앞에 선 채 웃음을 터트린다. 「와우, 대단한데요? 우영 케이먼. 생방송 중에 저런 사고가 나다니. 욕설도 욕설이지만 무술 실력이 대단한 모 양이네요. 역시 태권도의 나라!」 그건 대체 무슨 개소리냐, 라고 할 정도로 정체불명의 멘트를 날리는 남자의 옆에 선 여자가 유쾌한 목소리로 내 뱉는다. 「진짜 엄청난 방송사곤데요? 생방으로 보신 분들 아주 즐거우셨겠네요. 와우 닉쿤은 오늘도 근사한데요? 저렇게 근사한 남자라면 여자에게 주기 아까우니 남자라도 좋아요.」 아리따운 여자의 뒤로도 자신의 중지가 계속 잡히고 있었다. 오늘 아침 자신의 뒤통수에 이어 오후에는 자신의 왼손 중지가 만방에 악명을 떨치고 있다. 얼굴이 아닌 게 얼마냐, 싶다가도 왜 하필 저거냐, 하는 생각에 맥주에 코 박고 죽고 싶어졌다. 내일부터는 자신의 왼손만 봐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 것 같다. 왼손을 아예 기브스 해 버릴까. 「제니, 안 됐지만 그 희망은 접으시는 게 좋겠어요. 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이 있습니다. 자료 보시죠.」 그 말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이 화면 전체를 덮었다. 닉쿤과 그 뒤에 선 다니카가 잡힌 프레임이었다. 다행히도 얼 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 고소해버리겠다는 자신의 외침이 통했는지 자신의 얼굴과 다니카의 얼굴은 잘 가려졌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사이 다시 남자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 월요일 아침을 화려하게 장식한 배드 가이의 진짜 연인은 누굴까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멈춰진 프레임이 확대되며 닉쿤의 뒤에 서 있는 다니카를 줌인한다. 그리고는 다니 카의 얼굴 위로 동그라미가 그려지며 남자가 설명을 계속한다. 「이 여성은 닉쿤의 대학 동기로 동기생들 사이에서는 ‘형님’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딱 보기에도 체격이 대 단하죠? 닉쿤은 그녀를 사랑스러운 듯 ‘까마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가끔은 ‘람보’라고도 부르고요.」 지금까지 닉쿤이 다니카를 까마귀라고 부른 적은 수없이 많지만 그 어투가 다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체 , 그 살벌한 목소리를 어떻게 들으면 다정한 거냐? 귓구멍이 썩었냐? 우영이 어이가 없어 턱을 빼고 바라보는 사이 다시 한 번 사진이 바뀌며 검은 재킷을 벗은 다니카의 근육질 몸매 사진이 나타난다. 저건 어떻게 찍은 거야, 라고 우영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이 다니카의 어깨 근육을 일부 러 울퉁불퉁하니 확대하며 남자가 짓궂은 투로 말을 잇는다. 「오우, 진짜 람보 같죠? 실버스타 스텔론이 울고 가겠는데요?」 얄밉기 짝이 없는 그 말투에 우영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대니한테 난 죽었다…….” 저 우람한 팔로 한 대만 맞아도 즉사다. 큰일이다. 「아무래도 이 여성 덕분에 게이라는 소문이 퍼진 게 아닐까 하네요? 아니, 단지 소문이 아닐지도 모르죠. 드랙 퀸일지도요.」 땡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자 우영은 하염없이 화면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어쩌면 이렇게 지지리도 운이 없냐?” 그래도 스르르 소파위로 기대던 우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손을 뻗어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오전부터 꺼둔 핸 드폰을 켜보니 역시나 화면이 켜지자마자 미친 듯 메시지 알림 음이 울려댄다. 아침에 온 것도 다 못 봤는데 지 금 또 난리가 났다. 차라리 메시지 함이 다 차서 아예 메시지를 안 받는 쪽이 좋겠다 하며 액정을 바라보고 있자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번호를 보니 클랜이었다. 진짜, 죽도록 받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단 한 명이라도 괜찮다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니, 이게 다 꿈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응.” 「근사했어! 역시 최고야!」 “……닥쳐.” 그럼 그렇지. 클랜이 자상하게 전화를 해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해줄 리가 없다. 「왜 그래? 진짜 멋졌어. 사라랑 킴이랑 다 같이 봤는데, 우영 진짜 근사하대. 다들 환호성을 외쳤다니까? 입원 중이던 브루스는 그거 보고 좋아서 날뛰다 또 쓰러졌나 봐.」 “……브루스도 당했냐?” 「응.」 “다 건들고 다니는 애구나.” 「그렇다니까. 역시 우영이 최고야.」 클랜의 신나는 웃음소리에 우영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죽고 싶어졌다. 완전 클랜과 같은 과로 찍힌다. 생방으 로 강렬하게 욕 한마디를 남긴 것보다 그게 더 절망적이었다. 클랜에게 근사하다는 말을 듣다니. 최악이다. 「우영, 너무 상심은 하지 마. 오늘 진짜 멋졌어.」 “제발 좀 닥쳐라.” 「뭐 어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야. 지역 케이블이었잖아.」 “진짜 이민 가고 싶다. 내일부터 어떻게 얼굴을 들고, 아니 어떻게 왼손을 보이고 다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브라운관을 보자 여전히 깔깔대는 사회자들 뒤로 자신의 왼손 중지가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 었다. 화면 좀 바꿔라. 「이민 가봐야 소용없어. 저거 이미 유튜브에 쫙 퍼졌어. 생방송 사고, 어이없는 리포터 태권청년에게 한 방 먹 다.」 “나 죽으라고 아예 고사를 지내라.” 「괜찮다니까. 뒤처리는 걱정 말고 쉬어. 아, 나도 처음부터 보고 있었는데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 저 프로가 원 래 막가는 프로로 유명하거든. 저 리포터 일부러 유명인들 찾아다니면서 저런 식으로 폭언을 퍼붓고 사람들이 화 내고 욕하는 모습 찍는 거 전문이야. 브루스도 생긴 게 불독 상이니 머니 하는 소리 듣고 들고 있던 서류 집 어던 졌거든. 당한 사람들 모두 속 시원하다고 좋아할걸.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저 리포터 머리통부터 총으로 갈기겠 다고 한 사람들이 여럿이야. 물론, 진처럼 생방송 중에 머리통을 걷어찬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클랜이 다시 화통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점점 우울해진다. “진짜 죽고 싶다.” 「괜찮다니까. 이제 유명인이잖아. 인생을 즐기라고. 내가 장담하는데 저 리포터한테 당한 스타들과 거물들이 우 영을 자기 저택에 초대하려고 줄을 설걸. 우영, 다시 봤어. 존경해.」 “……그 말 들으니 진심으로 목매달고 싶다.” 「즐겨, 그냥 즐겨. 에이먼이 저 채널 인수 준비 중이야. 닉쿤도 저 채널 주식 미친 듯이 사 모으고 있고. 오전 부터 예감이 안 좋길래 나도 있는 대로 그쪽 주식 다 사놨거든. 일단 채널 인수하면 끝이야. 아, 녹화한 거 빌려 줄까? 생방 DVD로 녹화해뒀는데?」 “……꺼져.” 그렇게 말한 뒤 우영은 재빨리 폴더를 접고는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어느새 사회자들은 새로 개봉하는 영화의 시사회 장면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왼손은 사라지질 않는 걸까. “손가락을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다시 핸드폰을 꺼두고 샤워를 하고 나온 우영은 바스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맥주를 꺼내들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손에 들려다 어차피 오늘은 하루 종일 자기 손가락만 볼 것 같아 포 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디오 세트로 가 라디오를 틀었다. 「……리스 허르베지쿨의 연인으로 알려진 우영 케이먼이 생방송…….」 순간 우영은 재빨리 주파수를 돌렸다. “그렇게 방송할 게 없냐?” 하루면 없어질 걸 자신이 한 한 달은 떠들게 만들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냥 두면 될 걸, 거기서 열 받아 리포 터 머리통을 까버린 게 문제다. “난 왜 이럴까…….” 대학 시절이야 노먼이니까 그냥 넘어갔지, 저 리포터는 자신을 진짜 고소할지도 모른다. 고소하면 끝장이다. 돈 만 받아먹는 멍청한 변호사가 자신을 구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역시 돈을 좀 더 주고라도 유능한 변호사를 고 문으로 고용했어야 한다. 한국에서 12년이나 살다 보니 한국에서는 나름 소수의 상류층으로 통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나름 존경하고 있었다. 거기다 허르베지쿨 가의 변호사들이 하나 같이 유능한 사람들이라 다 그런 줄 알 고 있다. 자신의 고문 변호사를 선정한 뒤로 이 나라의 변호사 자격증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물 론, 잭 맥캐인처럼 뛰어난 변호사도 있다. 하지만 대형 로우펌이 아닌 작은 개인 사무실을 가진 변호사들은 자신 보다도 법률지식이 전무한 경우가 많았다. 이 나라의 특성은 한국과는 달리 라이센스가 있어도 그 라이센스 값 을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는 것과-라이센스 취득도 한국보다는 상당히 쉽다.- 같은 라이센스를 가진 사람 들 중 에서도 경력과 능력에 따라 수임료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었다. 잭 맥캐인의 경우 시간당 상담료만 3000달 라가 넘어가는데, 자신의 변호사는 200달라 안팎이다. 그나마 싸서 고용했는데 이 인간하고 한 시간 상 담하고나 면 한 달을 열 받아 몸져눕는다. 그래도 사람이 좋아 지금까지 참고 있었는데, 그것도 한계다. “난 수갑 싫다고…….” 생방송에서 자신이 리포터를 팬 장면이 고스란히 나갔으니 고소를 당해도 싸다. 형사소송뿐 아니라 민사소송도 가능하다. “내가 먼저 쳐버려?” 초상권 침해와 사생활 침해, 그리고 미리 생방송이라는 점도 밝히지 않은 채였고, 명예 훼손도 충분히 가능하다. “노먼…….” 노먼한테 연락해서 잭의 로우펌 소속 중 이쪽 전문을 소개받을까 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기자인가 해 경계를 하며 문으로 다가선 우영은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세요?” “나.” 닉쿤이였다. 닉쿤이 왔다는 사실에 우영은 재빨리 문을 열고는 앞에 선 닉쿤을 보곤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 거 렸다. “나, 사고 쳤어.” 풀이 죽은 우영의 얼굴에 문 앞에 서 있던 닉쿤이 살짝 눈웃음을 친다. “알아.” “걔가 먼저 잘못한 거거든? 나 끌려가는 거야? 형사 소송하면 나 수갑 차는 거야?” 놀란 얼굴로 진짜 겁에 질린 우영을 보며 닉쿤은 사랑스럽다는 듯 우영의 머리통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 “걱정 마. 다 처리됐으니까.” “……진짜야?” “지금 에이먼하고 통화하고 왔어. 생방송이었다고?” “응.” “걱정 마. 얼마 안 봤을 거야. 소규모 지역 채널이었으니까. 물론, 정규방송에서 신이 나서 재방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우영의 왼손 중지만 집중적으로 말이다. “그게 문제라고…….” “걱정 말라니까. 에이먼이 정규채널에서 전부 빼라고 지시했으니까. 내일부터는 안 나올 거야.” 그렇게 말하며 우영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닉쿤이 우영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다 문득 울리는 음악 소리에 우영을 돌아본다. “텔레비전 대신에 라디오냐? 좀 꺼.” “싫어. 뭐라도 소리가 나야지. 너무 조용하면 이상해.” 그 시끌벅적한 허르베지쿨 가에서 나와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우영은 조용한 걸 못 참는 성향이 있었다. 충분히 이해하는 바라 닉쿤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소파를 향해갔다. “그런데 멀쩡하네. 다니카가 널 가만뒀어?” 만약 그 방송이 뉴욕 전역에 퍼진 걸 안다면 그 성질에 가만있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우영이 신기한 듯 물었다. 아마 다니카도 당시엔 생방인 걸 몰랐으니 넘어갔지만 지금쯤은 알았을 테니 가만 안 있을 거다. “내일쯤 죽이러 올지도 모르지. 로드한테 부탁해서 간신히 쫓아냈거든.” “……난 안 죽인대?” “일단 나부터 죽일걸. 내 애인이라고 소문났으니까.” 그 말에 우영은 소파로 다가가 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닉쿤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당분간 너랑 다니지 말아야겠다. 같이 있다가 나까지 죽는 거 아냐?” 다니카가 닉쿤라면 얼마나 질색을 하는지 우영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너무 똑같아서 상극이다. 너무 똑같아서 죽이 잘 맞을 때는 기가 찬 호흡을 자랑하지만 한 번 수틀리면 한쪽이 나가 떨어질 때까지 싸운다.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 보니 의견 일치를 볼 때는 빠르고, 서로의 능력과 열정을 존중하고 존경하기에 좋은 동료는 될 수 있어도 한 번 부딪치면 서로 끝장을 보기 때문에 한 번 대립할 시엔 무조건 떨어트려 놔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서로 서로 피해 가는데, 이렇게 딱 걸렸으니-거기다 대니는 얼결에 드랙퀸 누명까지 썼다.-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내일 쯤 애지중지하는 연장들을 들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내 잘못도 아니고, 거기에 나타나서 재킷 벗어젖힌 자기 잘못이지. 사실은 나도 상당히 불쾌해. 어딜 인간이 없어서 까마귀랑 스캔들이 나?” 닉쿤이 재킷을 벗어 소파 등에 걸며 진짜 기분 나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클레어가 둘이 사귀라고 말했을 때 닉쿤과 다니카 둘이 미친 듯 화를 내던 게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연애대상으로 본다는 것 자 체를 불쾌해했다. 닉쿤이 이 정도니 대니는 아마 더할 것이다. “대니, 진짜 열 받았겠네.” “내가 더 열 받았어.” “내가 보기엔 대니가 더 불쾌해할 것 같은데?” “까마귀 주제에 영광이지.” “……내가 보기엔 대니가 아까워. 너보다 훨씬 근사해.” 우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닉쿤이 휙하니 우영을 돌아본다. “나보다 대니가 근사하다고?” “응.” “어이, 네 애인은 나야.” “그렇지, 일단은. 그런데 대니가 더 멋지긴 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뭐야?” “당연하지.” “어이. 너 말이지, 이런 사고를 쳐놓고 나보다 까마귀가 더 멋있다고? 내가 그 사고 수습하느라 오후 스케줄 다 놓친 것도 모르고?” “에이먼이 다 처리했던데, 뭐. 네가 왜 공치사를 해?” “그 리포터 녀석 브렛의 병원으로 보냈다고.” “응?” “쪽팔린 건 아는지, 안 일어나고 끙끙대길래 브렛한테 전화해서 실어가라고 했지. 브렛 아래 다이안이라고 알지 ?” 물론, 알고 있다. 다이안은 브렛의 병원에서 가장 경력이 꽤 오래 된 간호사로 원하는 대로 고통을 조절하는 신 기한 능력이 있는 간호사였다. 주사뿐 아니라 혈압 체크와 링거 투여 과정까지 뭘 하든 마음에 드는 환자에게는 고통을 못 느끼게,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환자들에게는 백배의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능력이 있어, 처치곤란으 로 말 안 듣는 환자에게만 파견하는 베테랑이었다. 그녀에게 찍힌 환자는 그녀가 나타나면 바닥에 뱉어낸 물약 까 지 재빨리 핥아먹는다고 할 정도로, 악명과 명망이 높은 간호사이기도 했다. 우영도 그녀에게 예방접종을 맞는 데 우영은 마음에 들었는지 주사 바늘이 들어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주사를 잘 놔준다. 대신 클랜이 그녀 를 만나 면 비명 소리가 난무한다. “다이안 담당으로 넣은 거야?” “응. 간 김에 미안하니 아예 건강검우영을 다 하라고 했지. 검사 끝나고 나오면 아마 넝마가 돼있을걸.” “저런…….” 우영은 진심으로 그 리포터에게 애도를 표했다. 자신에게 맞은 건 맞을 만했으니 상관없지만 다이안에게 걸렸다 면, 그건 꽤 불쌍하다. 병 고치러 들어갔다 병은 더 들고 성질만 고쳐 나올 거다. 그러고 보니 그 리포터는 인간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긴 하다. 아무리 시청률 올리려고 별 망발을 다 한다지만 정도가 있는 거다. “리포터 일은 걱정하지 마. 다행히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대. 골절도 타박상도 없어. 쓰러져서 못 일어난 건 쇼 가 확실하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MRI랑 CT 촬영에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그리고 혈관조영까지 전부 해보라고 했 어. 하는 김에 심장의 상태와 긴장 상태 시의 심장 박동도 알아보라고 했지. 스트레스 지수를 늘려서 말야. 미친 듯이 런닝 머신 뛰고 있을걸.”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닉쿤을 보며 클랜이 닉쿤과는 원수 지고 싶지 않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대장 내시경은 상당히 괴롭다. 거기다 혈관조영술까지 한다면, 진짜 도망치고 싶을 거다. 갑자기 그 영어 못하는 리포터가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좀 덜 아프게 찰 걸 그랬다. “어쩔래?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싶으면 해도 돼. 에이먼이 잭의 로우펌에서 그쪽으로 가장 유능한 변호사들 셋 을 대기시켜놨어.” “그건 좀 지켜보고.” 사실은 당장에 고소하려고 했는데, 다이안에게 끌려갔다는 얘기를 들으니 고소까지 하는 건 좀 너무한다 싶었다. 게다가 몸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쪽도 이쪽을 고소할 빌미가 없으니 괜찮긴 할 거다. 그쪽에서 어떻게 나오나 본 뒤 방향을 정해도 늦지 않다. 물론, 그 검우영이 다 끝난 뒤에도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그나저나, 오늘 근사했어. 난 설마 네가 거기서 그럴 줄은 몰랐지.”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우영의 얼굴을 감싸 쥔다. 따뜻한 그 손의 감촉에 우영은 기분 좋은 듯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웃자 닉쿤이 우영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다. “나 때문에 그런 거지?” 닉쿤의 푸른 눈동자가 밝게 빛난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이었다. 상냥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우영이 너무나 좋아하는 그 눈빛이었다. 하루 종일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 그렇게나 안달 나게 하더니 드디어 자신을 바라봐줬다. 그 리포터는 진짜 죽이고 싶지만, 하여간 닉쿤이 다시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는 사실에 아주 조금이나마 리포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 리포터가 내뱉은 말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닉쿤이 자신을 다시 돌아봤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오랫동안 안 본다 해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그대로이고, 또 섭섭할 일 도 없지만, 그렇게 뒤돌아서면 불안해진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닉쿤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가슴이 떨리 고 안 절부절못한다. 두근거림보다는 편안하고 옆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사람이었다. 단지 익숙함이 아닌, 없으면 살 수 없는, 외면당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건 분명 사랑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닉쿤을 보는 게 이렇게 힘들면서, 그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 오래 그 자리에 있어 그 자리에 자리를 잡아버린 그 감정을 자신은 사라졌다 여기고 있었다. 그게 그 자리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워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을 뿐, 그 사랑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네가 그런 건 의외였지만, 기뻤어.” 다정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 말에 우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네가 안 왔으면 그냥 조용히 집에 돌아왔을 거야.” “알아.” “그래. 그래도 벌여놓고 나니, 한심하다. 나 같은 건 죽어야 돼. 난 왜 욱하는 걸 못 참냐…….” “벌써 죽으면 곤란하지. 이제 막 사랑이 타오르는데 죽으면 어쩌자고?” “글쎄…… 타다 다 꺼져가는 건지, 알 게 뭐야?” “아니,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슬슬 우영의 위로 덮쳐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우영이 닉쿤을 바라보고 있자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진짜 보석 같은 눈이었다. 닉쿤의 눈동자 속으로 수 만 개의 에메랄드가 들어찬 듯 찬란하게 빛난다. “왜 자꾸 가까이 와?” “너, 내가 올 줄 알았지?” “뭐.” “그래서 목욕 재개하고 기다린 거야?” “응?” “그렇게 급했어?” 라며 슬쩍 닉쿤이 우영의 허벅지 안으로 손을 넣자 우영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피한다. “뭐하는 짓이야?” “뭐긴? 스킨십이지.” “넌 스킨십이 허벅지로 시작하냐?” “당연한 거 아냐?” “웃기지 마.” “오, 노래도 딱 맞는 게 나오거든?” 그 말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우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저거 내 재규어 송인데?” 그 반응에 닉쿤이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게 무슨 노랜지 몰라?” 라디오에서는 비트가 강한 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노래는 우영이 잘 아는 노래였다. 그리고 아주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했다. “Shut up & Drive.” “빨리 올라타라고?” “응?” come on now what you waiting for, for, for. my engine's ready to explode, explode, explode. so start me up and watch me go, go, go. 마침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에 우영은 아연해졌다. 리한나(Rihanna)의 이 곡을 상당히 좋아하지만 가사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재규어 송이라고 불렀는데, 닉쿤의 어투에서 이 노래 가사의 이중적 의미를 알아채버렸다. 우영이 진지하게 그 가사들을 되씹는 사이 닉쿤은 어느새 우영을 소파 코너로까지 몰고는 우영의 다리 사이로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짜 올라탈 것 같은 기세에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순간 나온 노래 가사를 내뱉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난 페라리가 아냐.(Ain't no ferrari, boy I'm sorry.)” “하지만 리무진보다는 부드러울걸.” “캐딜락 57이라니까!” 점점 위에서 몸을 내리누르는 닉쿤을 보며 점점 뒤로 눕던 우영은 머리가 소파의 팔걸이에 닿자 아연해졌다. 닉쿤이 위에서 덮쳐오니 피하려 한 거였지만 완벽하게 역효과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영은 서서히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별 생각 없이 닉쿤을 집안으로 들였고 평소와 같은 대화 중이었는데, 상황이 갑자기 이상해져 버렸다. 게다가 절대 자신이 불리하다. 샤워를 한 뒤 귀찮아 속옷도 입지 않고 바스 가운만 걸친 채였다. 가운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오는 닉쿤의 손에 우영이 창백하게 질리자 닉쿤이 싱긋 웃으며 상냥하게 웃는다. “저 노래 제목이 뭐라고?” “닥치고 운전해?” “원한다면 얼마든지.”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우영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너 운전하는 거 싫어하잖아!” “다른 차라면 거절하지만 너라면 좋아. 커브도 돌 수 있어. 난 꽤 훌륭한 드라이버거든.” 왜 하필 이 상황에 저 노래가 나오는 건데, 라며 한탄을 해봐야 이미 늦었다. 닉쿤이 끄랄 때 그냥 끌 걸, 괜히 라디오를 틀어 놨다. “저기, 우리 이러는 건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전혀 안 빨라. 그 동안 그렇게 참았으면 되잖아? 그리고 몸의 상성이라는 건 연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거거든.” “그거야, 그렇지만…….” 순간, 시원스러운 리한나가 큰일 날 소리를 내뱉는다. So step inside and ride. 순간 우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 가사가 이렇게 야한 줄 몰랐었다. 그 얼굴에 닉쿤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서서히 몸을 내린다. 그리고 우영이 입고 있던 바스 가운의 허리띠를 풀려는 순간이었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 너 여기 있는 거 알아! 나와!” 문을 부룻 듯 쾅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다니카의 고함소리에 우영과 닉쿤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대니다.” 드디어 다니카가 그게 생방인 줄 안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와 닉쿤이 스캔들이 났다는 것도 안 모양이다. 문을 두드리는 게 보통 기세가 아니다. 발로 걷어차는 것도 같다. “……어쩌지?” “없는 척해.” “음악소리가 나는데?” “켜놓고 잤다고 해.” “불도 환한데?” “불도 켜놓고 잤다고 해.”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려던 우영은 절대 이 상태에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닉쿤의 팔 아래로 휙하니 빠져나와 문으로 달려갔다. 닉쿤은 딱 좋은 순간에 방해하러 온 다니카를 저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짜 도움이 안 된다. 다다다 거리며 재빨리 문으로 달려가 문을 연 우영은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다, 이내 귀신같은 다니카를 보곤 표정을 굳혔다. 아까와는 달리 검은색 슬리브리스 셔츠에 검은색 카고바지 차림인 걸로 봐선 집에 가서 옷을 갈아 입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다. 다행히 연장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산발한 걸로 봐선 큰일 난 것 같긴 하다. “닉쿤! 이 자식, 너 거기 안 서?” 뭔가 휙하니 지나간다 했더니 순식간에 집안으로 뛰어든 다니카가 당장에 닉쿤에게 달려들자 닉쿤이 재빨리 소파 뒤로 피한다. 그리고는 소파를 사이에 둔 채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한심하다는 듯 말한다.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야? 너랑 엮여서 불쾌한 건 나야.” “네가 뭐가 불쾌해! 영광이지! 내가 너랑 애인? 거기다 날 드랙퀸으로 만들어?” 그게 제일 화가 났는지 고함을 내지르는 다니카를 보며 일단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우영은 진심으로 다니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니카가 좀 심하게 근육질인 건 사실이지만, 사실 다니카는 개성적인 미녀 축에 끼는 얼굴이었다. 오목조목하니 고전적인 미인형은 아니지만 친근하고 건강한 미인형이다. 닉쿤이 아메리 칸 스윗하트라면 다니카는 전형적인 걸 넥스트 도어 타입이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퍼기(Stacy Ann Ferguson- Black eyed peas의 보컬) 스타일이다. 그러고 보니 퍼기도 지나치게 건강미가 넘쳐 드랙퀸이라 오해 하는 사람들 이 꽤 많았다. 미인은 미인인데, 가끔 찍히는 파파라치 사진에서 남성미가 물씬 풍길 때가 있다. “까마귀, 아무리 열 받아도 말은 바로 해야지.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지. 그건 전부 네 잘못이야.” “야!” “누가 뭐래도 그건 네 잘못이야. 근육을 그렇게 키우지 말았어야지.” 닉쿤은 전부 네 탓이라는 듯 잘라지는 투로 아주 얄밉게 답을 해주었다. 태연자약한 그 답에 우영은 다니카가 닉 쿤을 죽여도 절대로 다니카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닉쿤은 가끔 사람을 너무 약 올린다. “대체 왜 내가 너 같은 거랑 엮인 거야?” 보통은 대범하고 어른스러운 다니카도 닉쿤의 이죽거림에는 못 당하겠는지 비명을 내질렀다. 음악 소리에 쿵쾅거 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고함소리에 우영은 귀가 찢어질 것 같아 서둘러 오디오로 달려가 일단 라디오를 껐다. 그 사이 닉쿤이 팔짱을 끼며 다니카에게 충고하듯 말한다. “까마귀, 지금 네가 나한테 화를 내는 건 아주 불합리한 일이야. 먼저 친구하자고 한 건 너였어. 그리고 내가 장담하건대, 너랑 내 스캔들은 에이먼 짓이야. 열 받으면 에이먼한테 가서 따져. 시시비비는 확실히 가려야지.” “가리기 전에 너부터 죽일 거야!” “날 죽이기 전에 에이먼한테 가서 따져.” “허르베지쿨 세 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 한이 서린 다니카의 외침에 우영은 슬금슬금 닉쿤의 뒤에 숨으며 궁금한 바를 물었다. “대니, 거기에 나 포함된 거 아니지?” “넌 아냐!” 다행이다, 라고 작게 안도하는 사이 또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 소리가 옆집에 들린 건가 싶 어 우영은 재빨리 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잡고 돌리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조용히 시킬게……. 엘리?” 굽신거리며 사과를 하던 우영은 문 앞에 우뚝하니 선 엘레나를 보곤 환하게 웃었다. 옆집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 었다. 하도 뛰고 소리를 질러대서 따지러 온 줄 알았다. “웬일이야?” 긴 생머리를 풀고 베이비돌의 퍼프소매 원피스를 입은 엘레나가 웬일로 수줍게 미소를 짓는다. “오늘 생방송 봤어요.” “어? 아……. 그래?” “저기, 이거.”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가 들고 있던 검은색 주머니를 건넨다. “이게 뭔데?” “마음의 선물이에요.” 라며 발그레한 얼굴을 하는데 우영은 우두두 돋는 소름에 뒷걸음질쳤다. 쟤가 미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엘레 나 네브즐린이 수줍은 미소라니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열어봐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라며 두 손을 모아 들고 입가를 가리며 붉어진 얼굴로 속삭이는데 우영은 진심으로 강한 공포를 느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친해져 엘레나에 대한 공포감은 사라졌다 여겼는데, 그래도 여전히 우영의 머릿속에 있는 엘레나는 사 다코였다. 사다코가 두 손을 모으고 수줍게 웃는다니, 이건 뭔가 다른 쪽으로의 공포였다. “고, 고마워. 들어올래?” 그래도 예의 상 들어오라고 말을 걸자 엘레나가 얼굴을 감싸며 꺄악거린다. 진짜 얘가 미쳤나 보다. “남자 혼자 있는 집에 어떻게 들어가요.” “……전에 들어왔잖아.” “그래도요. 어서 열어보세요.” 그 말에 우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검은색의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무게감이 꽤 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머니 안을 들여다본 우영은 순간 그 안에서 나온 찬란한 300캐럿 가량의 다이아몬드를 보곤 그대로 굳어버렸다. 투명한,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는 다이아몬드였다. 엑셀런트 컷으로 커팅이 된 다이아몬드는 어둠 속에서도 자체 발광을 한다 싶을 정도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는 다이아몬드였다. 그것도 품질로는 세계 최고라 칭해지는 센터너리를 능가할 정도의 상품이다. 투 명도도 이쯤이면 FL급에 컷팅이며 다이아몬드 자체의 품질이며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거기다 크기도 떨어지지 않는다. 센터너리의 보험금만 일억 달라에 달하는데 이 물건은 그에 비해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다. “너희 집 광산 하니?” 큰오빠는 400캐럿짜리의 레드 다이아몬드의 원석에 막내딸은 300캐럿 가량의 최고품의 다이아몬드를 선물이라고 가져오다니. 광산을 하더라도 이런 짓은 못한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에 이런 거 많아요.” 라며 발그레한 얼굴로 엘레나가 웃는 걸 본 우영은 몸을 떨며 멍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머리끝부처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보는 것만오 한참이 걸릴 정도로 길고,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정도로 인상이 강한 미녀가, 거기다 액면가는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미녀가 소녀처럼 두 손을 모르고 부끄러워하는 건 뭔가 상당히 기분이 묘했다. 우영이 멍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자 얼굴이 빨개진 엘레나가 아주 수줍은 소녀처럼 작게 중얼거린다. “그 리포터랑 파파라치는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아빠한테 죽여 달라고 했어요. 아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한대요.” 그제야 우영은 다시 한 번 엘레나가 미하엘 네브즐린의 딸이라는 사실이 실감되기 시작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얘는 마피아 딸이다. 그리고 얘 오빠가 세르게이 네브즐린이다. 아주 잠깐 잊고 있었다. “엘리,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돼. 절대로 안 돼. 법의 힘을 빌려야지,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그냥 말로 죽여 버린다, 라는 게 아니라 폭탄을 터트리든 기관총을 쓰든 어떻게든 진짜 죽여 버릴 것 같아, 우영은 엘레나를 뜯어말렸다. 죽이는 건 미하엘 네브즐린의 부하들이 하겠지만 사주는 자신이 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진짜 죽이면 쇠고랑 차는 건 자신이다. 기겁을 한 우영의 상태를 전혀 눈치 못 챈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죽이지 말아요?” “그래.” “그럼, 팔 다리 하나 부러뜨리는 거는요? 아니 자르는 건요?” “……안 돼.” “그럼, 눈알 파내는 거 안 돼요?” “……그것도 안 돼.” “좋아요. 그럼 혀만 뽑을게요.”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딱 그 짝이다. 저 천진한 얼굴로 혀를 뽑고 눈알을 파내겠다는 말을 하다니. 진짜 저 집 남자들은 교육 좀 받아야겠다. 애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리들을 지껄이는 거냐. “엘리, 그 일은 대강 정리 됐어. 그러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 “왜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데.” “괜찮아. 이미 정리됐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럼, 보석은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는 드는데, 이건 그냥 가져가는 게 좋겠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우리 집에 그것보다 더 큰 것도 있어요! 샤넬 2.55만한 것도 있어요. 그거 갖다 줄까 요?” 단위조차가 센치, 인치가 아닌 샤넬이 기준인 아가씨를 바라보며 우영은 들고 있던 주머니를 엘레나에게 돌려주 었다. “작아서 못 받는 게 아니라, 너무 커서 그래. 나한테는 과해.” “왜요?” “쓸데도 없고, 또 너무 비싼 물건이야. 과분해. 이런 건 남에게 함부로 선물로 주는 게 아냐, 엘리.” “오빠는 우영한테 레드 다이아몬드 줬잖아요!” “아, 잘됐다. 그것도 가져가. 이건 내가 보관할 게 아냐.” “안 돼요. 제 것도 받아요.” “아니, 내가 이걸 어따 쓰라고?” “팔아서 점심 사먹어요. 하여간 받아요.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받아야 돼요!” “잠깐…… 이걸로 무슨 점심이야, 점심은? 너 이게 얼마짜리인지나 알고 있는 거야?” “100달라요.” 순간 우영은 다이아몬드가 모조인가 하는 착각을 했지만, 절대 아니다. 그리고 모조라 해도 저 정도 퀄리티의 물건이 100달라일 리가 없다. 모조라 해도 저 투명도와 무게감 커팅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다. 모조면 100만 달라이고, 진품이면 100억 달라다. “누가 그래?” “아니에요?” “100달라가 아니라 100억 달라일 걸.” 그 말에 엘레나는 잠시 갈등하는 듯했지만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우영의 손바닥 위에 주머니를 건네준다. “하여간 받아요. 내가 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그냥요.” “그냥 이런 걸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씨! 내가 반해서 준다고 꼭 말을 해야 돼요?” 버럭 내질러진 그 목소리에 우영은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뭐라고?” 경악한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자 엘레나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고는 돌아선다. “아, 난 몰라. 오늘 너무 멋있었어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는 엘레나를 보며 우영은 진심으로 대체 뭐가 멋있었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대체 뭐가 멋있었는데?” 전국 방방 곳곳에 방송된 왼손 중지가 멋졌다는 걸까 싶어 우영이 멍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보자 차마 자신과 눈도 마주칠 수 없다는 듯 옆으로 돌아선 엘레나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다. 얼굴이 하도 작아서 한 손으로도 충분히 가려질 것 같다. “아, 부끄러워. 나 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후다닥 복도를 달려간다. 자신의 손 안에 남은 보석을 본 우영은 이미 멀리로 사라진 엘레나를 불 렀다. “야! 보석 갖고 가.” 하지만 우영이 소리를 치는 순간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든 엘레나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뭐야?" 갑자기 사라진 엘레나 덕에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뒤에서 닉쿤이 다가선다. "엘레나야?" "응." "왜 왔대?" "……몰라. 이거 주고 갔어."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닉쿤의 앞에 내밀었다. 하도 충격이 커 머리가 텅 빈 채라 우영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거 진짜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우영이 그렇게 묻자 닉쿤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검은 주머니 에 넣고는 딱 잘라 말한다. "모조야." 세르게이가 준 원석과 같이 모조라는 답을 내린 닉쿤이 우영의 손에서 주머니를 빼앗으려 하자 닉쿤의 뒤에서 다 가온 다니카가 재빨리 닉쿤에게서 주머니를 빼앗는다. "모조는 개뿔. 진품이야.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엘레나가 가져왔는데……." 우영이 작게 중얼거리는 사이 닉쿤이 다니카에게서 주머니를 빼앗으려 했지만 다니카는 옆으로 휙 피해 주머니를 다시 열고 그 안의 보석을 꺼내 밝은 빛 아래 비춰 보았다. "이거 진품이야. 이 정교한 커팅, 에 불순물 하나 보이지 않아. 현미경으로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진짜 상품인데, 대체 이런 게 어디서 나온 거야?" "……몰라. 네브즐린 가가 요즘 땅도 파나 봐……." 쇼 비지니스로는 만족 못해 드디어 땅을 파기 시작했나 싶어 우영이 창백한 얼굴로 답하자 보석을 찬찬히 보던 다니카가 놀란 얼굴로 우영을 돌아본다. "네브즐린? 그 네브즐린?" "응." 짤막한 우영의 답네 다니카가 어이 없다는 투로 중얼거린다. "어쩌다 걔네랑 엮였냐?" "몰라." "하여간, 이건 진품 맞아. 끝내주는데? 최근에 본 물건 중에 최고야." 다니카가 슬슬 흘러나오는 침을 꼴딱 삼키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다니카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보통 물건이 아니다. 확실히 그 전율감은 딱 맞아 떨어졌다. "나 어떻게 해? 사람들이 막 나 노리고 잡아가려고 하는 거 아냐? 보석 사냥꾼들이 내 집 터는 거야?" "일단 이건 따로 보관하는 게 좋겠다. 대체 이런 물건이 어딜 굴러다니고 있는 거야?" "……걔네 집에 많대." "집에?" "응." "아, 역시 마피아." 마피아라고 해도 이런 걸 갖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긴하지만 상대가 네브즐린이다 보니 다니카는 그렇게 납득한 듯했다. 하지만 우영은 그렇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나로도 무서운 것이 집에 두 개나 생겨버렸다. "……대니, 나 어떻게 해?" "내가 아냐?" "대니! 뭐라고 조언을 해줘! 괜찮다고 말해줘! 네가 괜찮다고 하면 마음이 놓인단 말야!" 다니카가 형님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믿음직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한 다니카는 늘 사람들을 따뜻 하게 위로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면 괜찮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그래서 모두가 그녀 에게 조언을 구하는 거다. 물론, 다니카는 그걸 아주 싫어했다. "……하여간, 정 마음이 안 놓으면 이건 내가 들고 가서 감정해볼게.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이건 돌려주는 게 나을 것 같다." 다니카가 그렇게 말하며 보석을 손에 들고는 돌아서 우영의 어깨를 툭 두드린다. "걱정 마. 일단 감정해본 뒤에 연락해줄게. 하지만 진품인 건 확실해. 돌려줄 때 연락해. 내가 가져나갈게. 너한 테 맡겨두면 잠도 못 자겠다." 맞는 말이었다. 레드 다이아몬드 원석을 그렇다쳐도 저 보석은 다른 사람도 아닌 다니카가 진품이라고 확인을 해 준 물건이니 집에 둘 수 없다. 아마 저걸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다 잠도 못 잘 거다. "제발 가져가줘." "그래. 그럼 연락할게."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를 든 다니카가 신이 나 문을 열고 달려나간다. 방금 전 길길이 날뛰며 닉쿤을 죽인다 살린 다 난리를 치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보석을 보자마자 달려나가는 모습에 우영은 허망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 우영의 뒤로 다가선 닉쿤이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는다. "그런 걸 왜 받아?" "억지로 떠넘기고 간 거야. 진짜 뭐야, 저 집은? 진짜 광산업이라도 하나?" "모르지. 그나저나 하던 거나 마저 하자."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뒤에서 안아오는 닉쿤을 우영이 툭 하니 쳐 떨어트린다. "기운 다 빠졌어. 왜 쟤만 만나고 나면 이렇게 기운이 없냐?" 이상하게도 엘레나와 통화를 하거나, 만나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다. 별로 힘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 게 힘들다. 우영이 터벅터벅 소파로 가 앉자 닉쿤이 뒤를 따르며 퉁명스레 내뱉는다. "그럼, 내 아파트로 가자." "움직일 기운도 없어." "그럼 이사를 해. 왜 이렇게 수시로 찾아와?" "몰라." 소파에 아예 드러누우며 우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옆으로 다가온 닉쿤이 우영의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그 자리 에 앉아 그의 무릎 위에 우영의 머리를 내려놓는다. 그 자연스러운 동작에 우영이 환하게 웃는다. "오랜만이다, 이런 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정말 오랜만이었다. 기분 좋은 듯 우영이 웃으며 눈을 감자 닉쿤이 우영의 머리카락을 쓰 다듬어준다. "그래. 진짜 오랜만이다." "응. 편해."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하루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는 듯했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 점점 가라앉는 의식 너머로 닉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답할 새도 없이 우영은 서서히 꿈 속으로 빠져들 었다. 따뜻하게 몸을 감싼 기온에 우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의 신체라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눈을 뜨면 딱 그 시간이다. 언제나와 같은 시간, 언제나와 같은 장소에서 눈을 뜬 우영은, 평소와는 다르게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피부의 감촉에 눈을 뜨곤 슬쩍 미소 지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누군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게, 그리고 이렇게 체온을 전해준다는 게 낯설면서도 너무나 좋았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따뜻한 아침에 우영은 일어나기 싫어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람의 체온이라는 게 주는 감동을 알지 못했었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체온과 감정과 타인에게서 받는 에너지라는 게 어떤 건지 미처 몰랐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살아와서, 그런 걸 느꼈던 게 언제인지도 아득해서, 지금 이 감촉을 놓치기가 싫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우영은 모처럼 따뜻하던 기분을 깨는 닉쿤의 손길에 다시 번쩍 눈을 떴다. “닉쿤, 너 어딜 만지냐?” 바스 가운만 입은 채 잠들었던 우영은 가운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아랫배와 가슴을 만지는 닉쿤의 손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그 행동에 슬슬 아래쪽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아침이라 특히 더 그랬다. “닉쿤, 손 좀 치워. 아침부터 이러고 싶냐?” 가슴을 더듬다 이내 아래로 내려와 당당하게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그 손길에 우영이 진저리를 치자, 등 뒤에서 우영을 안고 있던 닉쿤이 우영의 목에 입을 맞추며 살벌한 기세로 답한다. “당연하지. 너 내가 어젯밤에 그렇게 깨우는데도 안 일어났지?” 한이 서리서리 쌓인 듯한 닉쿤의 말에도 우영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그랬냐?” “그래. 내가 아무리 흔들고 일어나라고 난리를 쳐도 안 일어났잖아.” 목소리가 살기등등한 게 진짜 열 받은 듯했다. 하지만 우영도 할 말은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뭐가 그럴 수도 있어?” “나 퇴원한 지 얼마 안 됐다.” “……그래도 멀쩡하잖아. 너, 깨있으면서 일부러 자는 척한 거지?” 슬금슬금 허벅지 안쪽을 훑던 손이 아침이라 반쯤 발기한 성기를 콱 쥐자 우영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야, 놔! 내가 너냐? 난 잤어. 기억 안 나.” “……거짓말.” “네가 사기 친다고 다른 사람도 사기 친다고 생각하지 마. 난 분명히 자고 있었어. 전혀 기억 안 나.” 어스레하게 닉쿤이 어깨를 흔들며 깨우던 기억이 살짝 나긴 하지만 분명히 선명한 건 아니다. 분명히 자신은 그 때 푹 자고 있었다. 완전 자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자신은 자고 있었던 거다. “진짜 아무 것도 모른다고? 너 눈 뜬 거 봤는데?” “……잘못 본 거겠지.” “웃기지 마.” “잘못 본 거야.” “너 눈 떴었어. 그러다 나 보고 다시 감았어.” “아냐. 난 잤어. 네가 잘못 본 거야.” 눈을 떴다니 뜬 것 같기도 하지만 하여간 기억 안 난다. 꿈결에 한 짓이니 기억이 나도 무효다. “손 놔. 일어나야 돼.” 자꾸만 예민한 부분을 자극하는 손길에 우영이 닉쿤의 손을 잡자 닉쿤이 손을 떼며 우영의 손목을 잡아 내리누르며, 우영의 위로 올라탄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속삭인다. “어제 하던거 마저 해야지.” “뭘 해?” “해야 할 거. 너 자는 중에도 계속 나한테 달라붙은 거 알아? 내가 좀만 엇나갔어도 그대로 해버렸을걸.”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너 저번에도 거짓말했잖아.” “내가 언제?” “하긴 뭘 해? 내가 애냐? 딱 보면 한 건지 안 한 건지 몰라?” “알았어?” “그래.” 우영은 부아가 치민 듯 그렇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닉쿤은 뻔뻔스러웠다. 이제 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위에서 내리누르는 닉쿤을 본 우영은 경악한 얼굴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위에선 내리누르는 사람을 밀쳐내기란 불가능 했다. “닉쿤, 비켜.” “비키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이건 확실히 해두자. 날 원하지 않아?”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가 아냐. 넌 나한테 더 이상 두근거림이 없다고 했지만 난 아냐. 난 이런 의미로도 널 원해. 넌 안 그래?” 방금 전의 장난스러운 기운을 걷고 닉쿤이 드물게도 진지한 어조로 그렇게 물어왔다. 자신을 대하는 평소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진중한 어조와 진지한 태도에 우영은 모처럼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사귀겠다고 한 뒤로도 늘 편 안한 친구 같기만 하던 닉쿤이 지금 굉장히 낯설고 섹시해 보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 감각에 우영은 순수하게 감탄사를 흘렸다. “야, 너 조금 섹시해 보이는 것 같아.” 침대 위에 누워 다 벌어진 바스 가운만 입은 채 신기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우영을 보며 닉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우영을 내려다봤다. “그럼 얼굴을 붉히거나 한숨을 쉬거나 하란 말이다. 넌 대체 왜 그렇게 긴장감이 없는 거야?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분위기가 살아?” “……사실대로 말했는데?” “사실대로 말하는 건 좋은데, 분위기 좀 보라고.” 타박하는 듯한 닉쿤의 말에 우영은 설핏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 타령하기엔 지나치게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한 집 안에서 5년을 살았고, 대학시절 4년이나 같은 방을 썼다. 9년이나 옆에 바싹 붙어 지내다보면 볼 꼴 못 볼 꼴 다 보게 된다. “분위기는 무슨. 하여간 너 섹시해보였어.” “그럼 섹시한 김에 끝까지 가볼까?” “지금?” “그래.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아침부터 이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출근해야 하는데.” 우영이 턱으로 시계를 가리키자 닉쿤이 시간을 보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다시 우영을 바라보며 웃는다. “괜찮아. 네 오너는 나야. 아침 스케줄 좀 미루지, 뭐.” 이럴 때는 참 직권남용을 잘한다 싶어 우영은 쓰게 웃으며 닉쿤에게 그 직권남용으로도 넘지 못할 현실을 알려주었다. “난 미뤄도 넌 못 미룰걸. 오늘 아침에 오찬 있잖아.” “과로사 했다고 해.” “복상사겠지.” “하여간.” “존 에스더의 초대잖아. 나가봐야지. 모처럼 좋은 관계가 된 건데.” 반박할 수 없는 우영의 설명에 닉쿤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원한이 그득한 얼굴로 우영을 바라본다. “그러게 왜 휴가를 취소해?” “이 상황에서 휴가가 되냐? 애초에 네 발상이 이상했던 거야.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눕기는커녕 종 일 서서 일해야 하는 자리를 내주곤 휴가를 받으라니, 그건 나한테 쉬지 말라는 소리 아냐? 애초에 클랜 결혼식을 서두른 것도 너야. 알아?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너라고.” 우영이 딱 잘라 원인을 따지고 들자 닉쿤이 순순히 인정한다. “그래, 그건 인정해. 미안해. 너한테 무리하게 일을 모는 게 아닌데, 네가 제일 믿을 만해서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게. 넌 진짜 유능해.” 그 말에 우영의 눈이 번쩍 뜨인다. “진짜?” “그래. 아주 유능해. 있는 대로 부려먹고 싶어질 정도로.” 끝말이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하여간 유능하다는 그 말에 우영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실하게 해주는 말에는 더없이 약한 우영이었다. “나 진짜 필요한 거야?” “말이라고 해? 사적인 감정 빼고도 어디 빼앗길까 무서운 직원이야. 넌 진짜 유능해.” “에반보다 더?” “에반이 유능하긴 하지만, 그 정도 되는 애널리스트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너처럼 글씨 잘 쓰는 비서는 구하기 힘들지. 거기다 섬세하고 영리하고, 착하고.” 찬사를 늘어놓으며 닉쿤은 우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곤 살짝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어간다. “거기다 돌려차기도 잘하고. 욕도 끝내주게 잘하고.” 이어지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우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 너 그거 칭찬 맞아?” 우영의 반발에 닉쿤이 싱긋 웃는다. “네 중지 진짜 끝내줬어. 이상한 인간들만 안 끌어들이면 딱 좋을 텐데 말야.” “내가 언제 이상한 인간들을 끌어들였다고 그래?” “노먼, 다니카, 엘레나, 세르게이. 또 말해?” “그건, 너 때문에 엮인 거지. 막말로 내가 너 아니었으면 엘레나랑 엮였겠냐? 그리고 세르게이는 엘레나 따라온 거고. 게다가 다니카는 네 친구야.” “하여간 전부 네가 끌어들인 거야. 그것들 어쩔래?” “어쩌긴 뭘 어째?” “떼어내. 이건 뭘 할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슬쩍 하체를 밀어붙이는데 허벅지 사이로 닿는 그 감촉에 우영은 슬슬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닉쿤이 옷을 다 벗고 자는 건 죽어도 못 고칠 습관이라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험악하게 세우는 건 좋지 않다. 불안한 마음에 슬쩍 눈을 내려 닉쿤의 성기를 눈으로 확인한 우영은 기겁을 하며 닉쿤을 밀어내려했다. “야, 비켜. 아침부터 그 짓 하다간 나 오늘 출근도 못 하겠다.” “부드럽게 해줄게. 난 유능한 드라이버니까.” 이건 운전자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다. 차 자체가 너무 무지막지하다. 이건 마치 불도저로 소형차를 일어붙이는 격이다. “유능하고 뭐고 그걸로 한다는 게 말이 되냐? 너, 너무 무자비한 거 아냐?” “이 튼실한 게 네 거라고. 감사히 여겨.” “하나도 안 감사해. 할 거면 내가 위로 갈 거야. 그게 일리에 맞아.” “뭐?” “사실 그렇잖아. 서로 즐기자고 하는 건데, 한 사람이 골병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작은 쪽이 넣는 게 합리적이야. 그게 맞아.” 진지한 우영의 설득에 닉쿤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대신 확실히 해야 돼.” “……응?” “좋다고. 하자고. 단 이번뿐이야. 이번에 제대로 못하면 다음에 뭐라고 하든 내가 할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지금 시간도 없는데.” “아직 6시 30분이야. 오찬은 8시니까 한 시간 여유 있어. 샤워하는 데에 20분 잡고, 정확히 40분. 해봐.” “야…….” “자, 해봐.”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우영의 손목을 놓고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우영의 허리를 잡아 끈다. “야, 잠깐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좀 준비를 하고 해야지.” “섹스는 본능이야. 준비 같은 게 뭐가 필요해?” “아, 그래도 남자끼리는 뭐가 다를 거 아냐? 난 공부도 제대로 안 했다고.” “상관없어. 그냥 하면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왜 말이 안 돼? 해봐.” 닉쿤이 아예 우영의 허리를 잡아 끌어다 자신의 위에 앉혀놓으며 재촉하자 우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마음을 다졌다. 못할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섹스는 본능이다. 교육 받아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사실 닉쿤에게 일방적으로 리드 당하는 것도 상당히 자존심 상한다. “좋았어. 내가 못할 것 같아? 그래, 한다. 해.” 닉쿤의 허리 위에 올라탄 우영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닉쿤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췄다. 가볍고 부드러운 그 키스에 닉쿤이 웃으며 우영의 목을 안고는 응해준다. 그리고 동시에 이미 발기한 채인 닉쿤의 성기가 더욱 딱딱하게 굳어지며 우영의 엉덩이 아래쪽에 닿고 있었다. 잔뜩 흥분한 채 뜨거워진 것이 엉덩이에 닿자 우영은 입술을 떼며 불만을 토해냈다. “야, 잠깐. 네 아들 진정 좀 시켜라.” “이미 다 선 놈을 어떻게 해?” “이건 뭐 키우는 맛이 있어야지. 벌써부터 그러면 나한테 어쩌라고?” 우영이 진짜 이건 불공평하다는 얼굴로 불만을 토로하자 닉쿤이 웃으며 바스 가운을 안쪽으로 손을 넣어 우영의 가슴을 쓰다듬는다. 손바닥 전체로 문지르듯 천천히 피부 위를 자극하는 그 손길에 우영은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위로 오긴 왔는데 하는 건 여전히 닉쿤이 리드하고 있다. “닉쿤, 가만 좀 있어 봐.” “그럼 네가 잘해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잘.” 싱긋 웃으며 얄밉게 구는 닉쿤을 내려다본 우영은 어떻게든 가슴을 훑는 닉쿤의 손길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곱게 자란 남자의 손이 피부 위를 스치자 점점 몸이 달아오른다. 심장이 거칠게 뛰어오르는게 아무래도 할 준비는 끝난 듯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우영이 이 다음 과정을 어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닉쿤이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숙여 봐.” “왜?” “핥아줄게.” 노골적인 그 말에 순식간에 우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넌 좀 고상한 언어를 쓸 수 없냐?” “더 고상하게 말해줘? 유두를 물고 빨아줄 테니 숙이라고.” “야!” “분위기 없긴.” “네가 더 없어. 사실 이런 것도 좀 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꽃이나 와인이나, 영화를 본다거나. 좀 더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지, 이게 뭐야?” “분위기 밝히는 녀석이 내가 그렇게 깨우는 데도 퍼자냐?” “피곤하니까 그렇지.” “하여간 숙여봐.” 그 말에 우영은 두근두근하며 상체를 숙였다. 푹신한 베개를 양 손으로 내리누르며 상체를 내리자 닉쿤이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슴의 돌기부분에 입을 맞춘다. 그 감촉에 찌릿하며 허리가 울려오는 기분이었다.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느낌에 우영이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닉쿤이 우영의 허리를 잡아 내린다. 그 손길에 이끌려 다시 닉쿤의 얼굴 위로 가슴을 내린 우영은 유두를 자극하는 닉쿤의 혀에 낮은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분명?돌려주는 김에 다시 는 이런 꽃도 보내지 말라고 얘기해놔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꽃을 치우려는데 그 맨 위에 꽂힌 카드가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카드를 꺼낸 우영은 그 안에 적힌 삐뚤삐뚤한 영어를 보곤 용의자를 세르게이에서 엘레나로 바꿨다 . 역시 남매다. 「I sink you.」 짤막한 문장이었지만, 보는 순간 우영은 힘이 쭈욱 빠지는 기분이었다. “날 물 속에 처박고 싶다는 거냐…….” 대체 왜 이 아이의 영어 실력은 이렇게나 좋아지지 않는 걸까. 분명히 가정교사를 백 명은 넘게 붙여줄 수 있는 집에서 왜 얘를 그냥 두는 걸까. 갑자기 두통이 스며드는 기분에 꽃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주차장 안을 돌아보자 저 멀리 주차장의 기둥 뒤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이쪽 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엘레나가 보였다. 저러고 있으면 자기가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갑자기 한숨이 터져 나와 우영은 핸드폰을 꺼내 엘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삐리리 하는 온 주차장을 울리는 시 끄러운 소리에 엘레나가 서둘러 핸드폰을 찾아들더니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답을 한다. 「꽃 마음에 들어요?」 “……응, 고맙다.” 「꺄악, 다행이다.」 기둥 뒤에서 폴짝 뛰며 비명을 지르는데, 어차피 자신이 그녀를 본 걸 뻔히 알면서 왜 안 나오는 걸까 싶었지만 우영은 굳이 그걸 따져 묻지는 않았다. 자꾸 까먹지만 하여간 아직 15살의 소녀였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커다 란 다이아몬드를 갖다 주고 무식한 꽃다발을 보내는 게 약간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하여간 열다섯 소녀의 순 정 이었다. 저렇게 숨어서 훔쳐보는 것도 나름 순정이니 굳이 정정하라 말해주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열다섯 소녀의 순정이 원래 이렇게 소름끼치는 거였던가…….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다시는 이렇게 보내지 마.” 「왜요? 마음에 든다면서요?」 “선물은 고맙지만 난 꽃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이렇게 큰 꽃다발은 어디 둘 데도 없어. 굳이 주고 싶으면 한 송이로 해. 한 송이라면 받아줄게.” 「한 송이를 어따 써요? 뽀대가 안 나잖아요.」 “엘리, 선물은 크기가 아니라 마음이야.” 「아뇨, 크기에요. 내 마음만큼 큰 걸 보내야죠!」 “엘리, 난 네게 꽃이나 보석은 바라지 않아.” 「그럼요? 집 사줘요?」 저 방향으로 튀는 건 저 집안 유전인가 보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딱 하나뿐이야.” 「뭔데요? 뭐든 할게요.」 “너한테 제대로 된 카드 한 장 받는 거. 철자 하나도 안 틀린 거.” 마지막 말에는 살짝 감정이 들어갔다. 그 동안 받은 문자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그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머리 를 쥐어짜냈던 고난의 시간들이 흘러간 탓이다. 게다가 오늘은 자신을 잠수시키겠다고까지 했다. 다른 사람이 그 러면 농담으로 넘어가겠지만 엘레나가 저러면 잘못 쓴 건 줄 알면서도 진짜 다리에 돌 달아 강 한 가운데 던져 버 릴 것 같아 무섭단 말이다. 「영어 공부하라고요?」 “그래. 말은, 아니 카드 한 장은 똑바로 써야지.” 「알았어요. 할게요.」 “그리고 너 왜 학교 안 가니? 이제 등교 시간이잖아.” 「갈 거예요.」 “갈 거면 그 수상쩍은 선글라스 빼고, 스카프도 풀어. 무섭다.” 「나의 넬이 어때서요! 나한테 안 어울려요?」 ‘나의 넬’이 순간 뭔가 고민하던 우영은 이내 엘레나가 그 작은 머리통에 휘감은 스카프의 하단에 커다랗게 적 힌 샤넬 로고를 보곤 납득했다. 쟤는 진짜 샤넬을 사랑한다. “너의 넬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네 코디 자체가 문제야. 너의 넬은 목에 두르고 선글라스는, 그래…… 넬만 풀 면 괜찮겠다.” 「학교 갈 때는 그러려고 했어요.」 “그래, 얼른 학교 가라.” 「네.」 부끄러운 듯 답을 한 엘레나는 전화를 끊고는 우영이 슬금슬금 뒷걸음을 쳐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눈이 마 주치고 우영이 그녀의 스카프와 선글라스에 대해서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영이 그녀를 봤을까 걱정하는 움 직임이었다. “애가 머리는 안 나쁜 것 같은데…….” 대체 왜 저러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던 우영은 진한 향을 풍기는 장미꽃다발을 돌아보곤 그냥 웃고 말았다. 외모 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하는 짓은 남매가 똑같다. 사람을 놀라게는 하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사람들 이었다. Chapter 11 세탁소에 들러 회사로 돌아온 우영은 오늘 목록에 있는 손님들에게 일제히 카드와 선물들을 발송한 뒤 클랜과 클 레어의 결혼식 뒤 피로연에서 쓰일 요리 목록과 샴페인 명단 등을 확인한 뒤 예복 가봉 날짜와 시간을 정리하곤 그에 따른 지시들을 내리느라 분주했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점심시간에는 에이먼이 애지중지하는 인형옷 의 신상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아 그쪽에도 들러야 한다. 결혼식에 쓰일 꽃들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근처의 플로 리 스트의 사무실을 들르는 김에 들러야겠다고 스케줄첩을 정리하던 우영은 전화벨 소리에 재빨리 환한 음 성으로 영 업용 미소를 지었다. “닉쿤 사입니다.” 「우영, 이거 네 짓이지?」 시간을 보니 슬슬 사라의 어머니와 언니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예상했던 바라 우영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사라, 뭐가? 문제 있어?” 「어머니랑 언니 부른 거 말야. 대넌이 갑자기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가보니 공항에 언니랑 엄마가 와 있잖아.」 “전화한 건 제가 맞지만, 지시한 건 대넌이야. 전용기까지 보내줬다니까. 내가 마음대로 대넌의 전용기를 쓸 수 있나?” 물론, 쓸 수 있다. 지금 허르베지쿨 가에서 전용기를 갖고 있는 건 대넌과 에이먼뿐이었는데, 우영은 그들의 전 용기를 마음껏 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스에 있는 그들의 고급 빌라도 마음껏 쓸 수 있다. 애초에 필요하면 쓰라고 내준 것도 그들이었다. 딱히 그런 걸 쓸 시간적 여유가 없어 고사하긴 했지만 쓸 수 있긴 하다. 「우영, 시치미 떼지 마. 저 둔하기 짝이 없는 대넌이 이렇게 쓸만한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아.」 “사라, 이제 그만 용서해줘. 대넌이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사라를 진짜 사랑하잖아.” 「눈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 용서를 하지.」 “임신한 거 얘기해. 대넌이 아주 좋아할 거야.” 「……그건 좀 더 두고 보고.」 “그러다 배부르면 어쩌려고?” 「배가 산처럼 불러도 모를 남자야. 비만이라고 다이어트 하라고 할걸.」 “설마…….” 「17년을 살았어. 그 남자는 그런 남자야.」 “그래도 사랑하잖아.” 「그 놈의 사랑. 막 입덧 시작하려고 해서 힘들었는데 엄마랑 언니가 와서 다행이야. 마음도 더 편해졌고 좋다. 고마워, 우영.」 “뭘, 당연한 걸. 몸조심하고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안정해야 돼. 고령 임신이라 무슨 일 생길지 모 르니까 간호원 하나 꼭 대동하고. 내가 브렛에게 얘기해서 한 명 보내줄까?” 「브렛은 안 돼. 그럼 대넌이 금방 알 거야.」 “하긴, 그럼 다니던 병원에서 한 명 보내달라고 해.” 「알았어. 그럼 끊을게. 아, 저녁에 시간 돼? 같이 저녁 했으면 좋겠는데.」 사라의 제안에 우영은 자신의 스케줄첩을 내려다봤다. 딱히 다른 스케줄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닉쿤의 저녁 스 케줄도 빈 채라 사라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좀 바쁠 것 같은데.” 「그럼 어쩔 수 없지. 아, 그리고 어제 멋졌어. 대넌도 아주 극찬을 하더라. 브루스가 오늘 퇴원하는데 결혼 전 에 시간 내서 가족들끼리 식사하자고 했대. 너한테 한 턱 내고 싶다더라. 킴이랑 재키한테도 이제 됐으니 집에 들어오라고 했대. 다 잘 됐어.」 전혀 기쁘지 않았다. 불독, 아니 브루스가 드디어 그 충격을 털고 일어난 건 아주 기쁜 일이고, 허르베지쿨 가 사람들과 식사를 하겠다 청한 건 결혼을 정식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니 클랜과 클레어뿐 아니라 대넌을 위해서도 아주 잘된 일이긴 하지만 그 이유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라, 그런 걸로 칭찬받아도 조금도 기쁘지 않아. 제발 어제 그 생방은 기억에서 지워줘.” 「왜? 얼마나 통쾌했는데. 잘했어, 우영. 할 때는 확실히 해주는 거야.」 “내 왼손 중지를 잘라내 버리고 싶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자고.” 「그래. 그럼, 시간 나는 대로 알려줘.」 “알았어.” 어머니와 언니가 와서인지 평소보다도 활력이 넘치는 사라의 목소리에 안도하며 막 전화를 끊으려던 우영은 수화 기를 내려놓자마자 울리는 벨소리에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네, 닉쿤 사입니다.” 「뭐가 필요하냐? 경비행기는 좀 그러니까 전용기를 사줄까?」 대뜸 나온 대넌의 말에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역시나 대넌답다. “제가 전용기 있어서 뭐하게요. 됐어요. 제발 이대로 사라 기분이나 잘 맞춰주세요.” 「하하하, 아주 신났어. 저 사람이 저렇게 애처럼 기뻐하는 건 처음 본다. 어머니랑 언니가 한국 음식을 잔뜩 싸 들고 와서는 지금 먹고 싶다고 난리야. 식탐은 없는 사람인데 어머니 음식이 그리웠다네. 자, 뭐든 말해라. 이 탈 리아에 있는 별장을 줄까? 아니지, 한국에 별장을 사줄까? 아니지, 뉴욕에 있는 빌딩 하나를 줄까?」 너무나 통이 큰 대넌의 선물에 우영은 갑자기 이게 무슨 복이냐 하는 생각에 벙찐 얼굴을 했다. 요 며칠 새 왜 이렇게 집 사주겠다는 사람이 많은가 모르겠다. 이 김에 부동산 투자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 사주 겠다는 사람이 넘쳐흐른다. 이게 복인지 화인지도 잘 모르겠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그보다 사라 기분이나 잘 맞춰주세요.” 「그건 걱정마라! 여기 빌라에서 잠시 지내게 하다 클랜 결혼식만 끝나면 어머니랑 언니랑 같이 요트여행을 하라 고 하려고. 좋아하겠지?」 그건 아마 절대 무리일 거다. 임신 중에 요트 여행이라니, 사라를 잡으려고 작정을 했나, 이 사람이. “대넌, 부탁인데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고요. 플로리다 주에 있는 별장에서 휴가나 즐기라고 하세요. 그게 좋 을 거예요.” 「그래? 사라가 그게 좋대?」 “네. 아마 요트 여행보다는 좋아할 거예요. 제가 시간이 나면 함께 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좀 그러니까 한국어 잘하는 한인 1.5세 중에 관광가이드 잘하는 사람 불러서 사라의 가족들 뉴욕 관광이나 제대로 시켜주세요. 리무 진 내주시고요. 그 분들 선물은 제가 따로 준비해서 보내드릴게요. 옷도 준비해오셨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사라 가 자주 다니는 매장에서 옷을 보낼게요. 거기서 골라 입으라고 하세요. 대넌이 준비한 것처럼 선물해주세요. ” 「오오, 그렇지 않아도 5번가에 비서를 보낼까 했는데 내가 고르는 것보다는 네가 낫지. 부탁하마.」 “네.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말하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하고 말하세요. 다된 밥에 재 뿌리지 말고요.” 「알았다. 너만 믿는다.」 저만 믿지 마시고 좀 알아서 해보세요, 라고 하려다 우영은 알겠다고 답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대넌과 사라는 대강 정리가 되는 듯했다. 진짜 둔해서 쓸모없는 남자가 대넌이지만 사라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이니 , 도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저 사악한 허르베지쿨 가 사남매가 무슨 계획을 짜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자신이 라 도 도울 수밖에. “일단 한 건 처리됐고. 결혼식 전에 클랜하고 클레어가 사고만 안 치면 원이 없겠다.” 일단 준비는 아주 순조로웠다. 능력 있는 사람들을 줄줄이 데리고 일을 하니 자신도 편하고, 일 진행도 아주 매 끄럽다. 사소한 일들은 전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고, 감당할 정도의 능력들이 되니 자신은 최종 관리감독만 하 면 되니 이 이상 좋을 수 없다. 문제는 그 결혼식 당사자들이었다. 이렇게나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 그 초저가 세트 둘 때문에 불안이 가시질 않 는다. 농담이 아니라, 결혼식 당일 뭔가 사고를 쳐도 칠 것 같은 녀석들이다. “내가 그 녀석들 때문에 제 명을 못 살아.” 그 녀석들과 계속 안면 트고 살다가는 총각 딱지도 못 떼고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을 일으켜 유명을 달리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을 역순으로 뽑자면 취하위가 세금 체납, 그 다음이 권총, 그 다음이 쇠 고 랑-장물보유 및 교통사고, 혹은 법규 위반으로 인한-이고, 가장 두려워하는 건 실직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 무래 도 실직 위에 하나가 더 추가될 듯했다. 클랜과 재키. 이 두 녀석이야 말로 진정으로 천하무적들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닉쿤의 말대로 둘을 하나로 묶어 프랑스 상공 에다 내던져버리는 쪽이 나을 것 같다. 둘뿐 아니라 둘 사이에서 곧 아이도 태어날 걸 상상하니 차라리 프레디 대 제이슨 영화 속으로 뛰어들고 싶을 정도다. 귀신들은 그것들 안 잡아가고 뭐하나 모르겠다. “Knock, Knock!” 우영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뇌하는 사이 문 쪽에서 닉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닉 쿤을 바라보자 환하게 웃으며 문 앞에 서 있던 닉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어떤 애절한 사랑도 식게 하는 표정이군. 얼굴 좀 풀어. 웬 삼백안이야?” “네 동생 때문에 그러잖아.” “클랜이 또 사고쳤어?” “지금은 아니지만 어째 이번 주 안에 거하게 칠 것 같다. 사고를 치려면 차라리 빨리 쳐줘. 조용하니 더 불안해 .” “그 놈도 뇌가 있을 텐데, 또 사고를 치겠어?”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선 닉쿤이 등 뒤로 문을 잠근다. “너, 문은 왜 잠가?” “왜 잠그긴. 존이 시간을 당긴 덕에 30분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잠그지.” “아, 만난 건 얘기 잘 됐어?” “물론, 승리의 닉쿤잖아.”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오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문득 아주 안 좋은 추억을 떠올리곤 눈썹을 휘 었다. “너 자꾸 그 말하는데 내 앞에서는 삼가 해라.” “왜?” “내가 그 ‘승리의 닉쿤’에 아주 안 좋은 추억이 있거든?” 무슨 소린가 하며 우영을 바라보던 닉쿤은 뭔가 떠오른 듯 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거.” “알면 말하지 마.” “그건 미안했어. 설마 네가 그걸 못 받을 줄 몰랐지.” “죽고 싶냐? 쿼터백이 온 힘을 다해서 던진 공을 받으면 내가 럭비부에 들어갔지.” “난 사랑을 담아서 던진 거야.” “그놈의 사랑 두 번만 받았다간 코뼈 부러지겠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 고등학교의 럭비부 쿼터백이던 닉쿤은 졸업 직전 투톱을 달리던 네바다 주의 고등학교와 맞서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 전해에 상대 학교에게 우승컵을 내줬던 닉쿤은 학창시절 마지막 시 합을 우승으로 이끌겠다 다짐했고 갈비뼈가 부러져가면서도 투혼을 발휘해 결국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문제는 우승 후 헹가래를 받던 닉쿤이 기쁨에 넘쳐 관중석에 있던 우영을 바라봤고 우영에게 엄지를 근사하게 들 어 보이며 럭비공을 있는 힘껏 던졌다는 사실이었다. 닉쿤의 갑작스러운 세레머니에 클랜과 클레어와 함께 응원을 가 두 손을 들고 “Go! Bliss!”를 외치던 우영은 정면에서 날아오는 럭비공을 자신의 얼굴로 받아버렸다. 때마침 닉쿤을 비추던 전광판은 닉쿤의 손과 공을 따라 우영을 화면에 비췄고, 우영은 그 거대한 럭비 경기장 전 광판 위로 쌍코피를 흘리는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여 버렸다. 그 뒤로 우영은 ‘승리의 닉쿤’라는 말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켰다. 한 동안 안 들어 잊고 있었는데 또 시작됐다 . “그건 미안했어. 그래도 코뼈는 안 부러졌잖아.” “차라리 부러졌으면 성형이라고 했지. 내가 그 사건 때문에 코가 가라앉은 거 알아?” 우영이 손끝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불만을 토로하자 닉쿤이 고개를 내젓는다. “설마. 원래 낮았어, 네 코는.” “네가 내 코 높이 재봤어?” “안 봐도 알지. 몇 년을 보고 살았는데.” 그 말에 우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다. 자신도 닉쿤의 엉덩이에 있는 점 갯수도 알고 있다. 왼쪽 엉덩 이에 앙증맞게 수놓아진 삼각형의 점을 보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너, 나가라. 나 바쁘다.” “어이, 하던 거 마저 해야지.” “그래, 나 하던 일 마저 해야 돼. 점심 시간에 밥이나 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나, 시간 외 근무 수당 줘야 돼.” “알아서 청구해. 그보다 하던 거 말야.” 닉쿤이 사무실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목소리를 낮게 깔자 우영이 인상을 쓰며 닉쿤을 올려다본다. “사무실에서?” “응.” “미쳤냐?” “못할 거 있어?” “있어. 어딜 사무실에서.” “왜? 난 하고 싶은데.” “……밤에 해, 밤에. 너도 저녁 스케줄 비었잖아.” “내 스케줄까지 확인했어?” “네 스케줄은 원래 꿰고 있어. 네 데이트 스케줄도 다 꿰고 있었어. 더 말해줘?” 네가 누구랑 어디서 데이트 했었는지 난 다 알고 있다, 라는 듯한 투의 우영의 말에 닉쿤이 웃으며 두 손을 들어 올린다. “아니, 거기까지. 그럼 키스만.” 그 말에 슬쩍 문을 바라본 우영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확인하곤 블라인드를 내렸다. 재빠르고 정확한 그 동작에 닉쿤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소심한 듯해도 하겠다 마음먹은 일에는 빠르고 대범하다. 블라인드를 내리자 다소 어두워진 사무실 안에서 우영은 닉쿤의 앞으로 다가와 결심을 굳힌 듯 비장한 얼굴로 닉 쿤의 어깨를 잡으며 말한다. “키스만이야.” 전쟁에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한 얼굴을 한 우영의 얼굴에 닉쿤이 먼저 가볍게 키스를 한 뒤 우영이 조금 긴장을 풀자 본격적인 키스에 들어갔다. 우영의 허리를 안고 입을 맞추며 살짝 벌어진 우영의 입술 사이로 혀를 넣은 닉 쿤은 천천히 혀를 빨아들이며 타액을 교환했다. “으응…….” 숨이 막힌 듯 우영이 비음이 섞인 신음을 흘리자 닉쿤은 살짝 방향을 바꿔 우영에게 숨을 쉬도록 해주었다. 살짝 떼었던 입술을 다시 겹치며 닉쿤이 다시 깊이 혀를 넣자 우영은 닉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농염한 키스에 우영은 멍한 눈을 한 채 닉쿤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 사이 닉쿤이 자신을 책상 위에 눕히고 있다 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키스에 열중하던 우영은 머리가 딱딱한 상판 위에 닿자 그제야 놀란 듯 닉쿤을 밀어 내려 했다. “쉿. 25분 남았어.” “25분 동안 뭘 하려고?” “역사는 2분 30초로도 충분해.” “너, 조루냐?” “분위기 깨는 말 하지 말라니까.” 우영의 조루 발언에 닉쿤은 불쾌한 듯 이맛살을 찌푸리곤 재빨리 우영의 넥타이를 풀고는 셔츠를 벌리려 했다. “야, 너 진짜 할 거야?” “못할 건 뭐야?” 닉쿤은 진짜 할 생각이었다. 서둘러 재킷을 벗어던지는 닉쿤을 보며 얼결에 허리를 꺾은 채 책상에 누운 우영은 경악한 듯 닉쿤을 올려다봤다. “25분 동안 뭘 하려고?” “하면 한다니까.” 드디어 넥타이까지 느슨하게 한 닉쿤이 자신의 벨트에 손을 대는 걸 본 우영은 잠시 어쩔까 망설이다 그냥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까짓 거 장소가 대수냐. 첫 경헌으로는 분위기고 뭐고 없지만, 클랜과 클레어 때문에 뇌 졸 중으로 사망하기 전에 할 건 하자는 심정으로 벨트를 푸는 닉쿤의 손을 돕기로 했다. 그 순간이었다. “우영, 닉쿤 여기 있지?” 에반의 목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이내 철컥거리며 문이 열리려 한다. 우영과 닉쿤이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자 계속 문을 열려던 에반이 고요한 노성을 내뱉는다. “너희, 문 잠그고 뭘 하는 거야?” 철부지 딸내미가 남자를 끌어들여 방문을 잠갔다는 사실을 알아챈 아버지의 음성처럼 조용하지만 분노로 떨리는 듯한 그 음성에 우영과 닉쿤은 동시에 이 안타까운 순간을 개탄하며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셋 셀 때까지 문 열어. 안 열면 열쇠 찾아온다.” 진짜 아버지다. 딱 아버지의 음성과 말투였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닉쿤은 넥타이를 다시 매며 우영이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하는 사이 문으로 다가가 잠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험악한 얼굴로 에반에게 되묻는다. “대체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은? 너희 뭐하던 중이야?” “뭐하던 중이든? 당신이 우리 보호자야? 아니 보호자라 해도 말이지, 우리 이미 서른이거든? 성년 지난 지 10년 지났거든? 키스를 하든 섹스를 하든 그룹섹스를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진짜 화가 났는지 닉쿤은 이를 갈며 쉴 새 없이 다다다 내뱉으며 에반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꿈쩍한 에 반이 아니었다. “서른이면 다야? 사무실에서 뭐하는 거야? 그것도 이런 아침에.” “하여간, 그래서 뭔데? 우리 회사 주식이 갑자기 바닥으로 내꽂혔어? 아니면 거래하던 회사 하나가 도난을 했어 ? 아니면 누가 죽었어? 죽었더라도 누가 죽었는데? 우리 가족 죽은 거 아니면 가만 안 둬.” 으르렁거리는 듯한 닉쿤의 태도에도 에반은 침착한 태도로 알리러온 사항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웃기고 있네. 빨리 나와. 회의실에 다 모여 있어.” “그러니까 왜 모여 있냐고?” “존하고 얘기하고 왔다며? 30분 앞당겼다길래 다들 간신히 30분 빠져서 미팅 대기 중이야. 시간 있을 때 해결하 자고 아침 스케줄 다 취소하고 기다리는 중인데 이게 무슨 짓이야? 우영, 너도 그래. 닉쿤이 그러면 말려야지. 좋다고 달려들어?” 상사인 동시에 절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안하무인 딸 남자친구 닉쿤에게서 시선을 뗀 에반은 그의 권역 하에 있 고 말 잘 듣고 소심한 딸 우영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역시나 착한 딸 우영은 재빨리 옷을 정리하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남자친구에게 돌렸다. “난 말렸어. 닉쿤이 막무가내로 밀어부친 거야. 난 아무 죄 없어.” 분명히 거부했었다. 막판에 벨트를 푸는 걸 도왔던 건 자신이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손이 한 거다. 그러니까 본능 이 한 짓이니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듯 우영이 모든 책임을 닉쿤에게 전가하자 닉쿤이 우영을 돌아보며 기가 차 다는 듯 소리친다. “우영, 너!” “미팅 가. 어서 가. 일해야지. 닉쿤, 성공한 남자가 근사한 거야. 남자의 섹시함은 자신의 일에서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패기와 열정, 그리고 자신감이라고. 고, 닉쿤! 고고!” 두 주먹을 꽉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는 우영을 보며 닉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쩌억 벌렸다. “너만 빠져나가겠다 이거냐?” 당연히 혼자만 빠져나가겠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에반은 닉쿤의 파트너지만 자신에게는 상사다. 입장이 다르다. 그리고 닉쿤이야 에반이 무슨 소리를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성격이지만, 자신은 아주 소심하니 어쩔 수 없 다. “아니지. 난 명백히 거절했어. 에반, 닉쿤 어서 데리고 나가. 나도 일해야 돼. 아, 바쁘다. 바빠.” 서둘러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 우영은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안경까지 꺼내 쓰곤 분주히 마우스를 움직였 다. 자신의 태도에 닉쿤이 열 받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원래 이런 거다. 시치미를 뚝 떼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우영의 모습에 에반이 닉쿤에게 턱짓으로 재킷을 가리킨다. “닉쿤, 어서 따라 나와. 재킷부터 입고.” “우영, 너 두고 봐.” 은근한 협박이 담긴 닉쿤의 말에 우영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얄밉게 대꾸했다. “상사가 개인적 감정을 품고 보복하려고 들면 직권 남용으로 고소할 거야.” “직권남용만 안 하면 된다 이거지? 그럼, 밤에 보자고.” 재킷을 걸쳐 입으며 마지막 인사를 남긴 닉쿤은 상쾌한 미소를 띤 채 에반과 함께 우영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닉쿤의 마지막 선언에 우영은 조금 등골이 오싹하긴 했지만, 이내 공포를 떨쳐냈다. 에반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 보다는 닉쿤을 상대하는 쪽이 낫다. 선물 목록과 고객 명단을 주루룩 훑어보던 우영은 뭔가 떠오른 듯 보고 있던 명단을 끄곤, 폴더를 뒤져 Bliss란 파일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그 파일을 드래그해 엑셀로 연 뒤 차례차례 그 명단을 확인해 보였다. “백스물다섯…….” 곰곰이 그 숫자를 되새기던 우영은 여자의 이름과 나이, 생년월일, 직업과 특이사항들을 훑어보곤 흐뭇한 듯 미 소 지었다. “백스물다섯보다 내가 낫단 말이지…….” 인종, 국적, 학벌, 나이(일단 성인이기만 하면), 직업, 집안 등의 외부 요소는 전혀 상관없이, 가히 우주적이라 할 정도의 포괄적인 여성 취향을 자랑하는 닉쿤이 그 십 년의 세월을 이 많은 여자들을 거쳐 자신에게 왔다는 사 실에 우영은 만족했다. 양다리나 바람 따위는 절대 허용하지 않는 닉쿤의 고지식한 성품에 이제 와 바람을 피울 리도 없으려니와, 좋은 집안 태생의 고학력 미녀들을 전부 걷어차고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건 꽤 자신감이 생길만한 일임은 분명했다. 이 여자들 모두 사교계에서 내로라라는 정보통이거나 각 분야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여걸들이었다. 배우나 모 델, 가수나 디자이너 같은 엔터테이너뿐 아니라 기자나 사업가, 의사, 그리고 검사보나 변호사들 같은 전문직종 의 여성들도 수두룩했다. 음악가들도 있었고 발레리나도 있었으며 화가나 조각가 등과 같은 예술가들이나 교수, 학자들 같은 지성인들도 수두룩하다. 모두 사회적 지위에 있어 닉쿤과 결혼을 한다 해도 조금도 밀리지 않을 조 건의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닉쿤과 결혼은커녕 이 삼 주간의 만남 후 헤어졌다. 물론, 그들 중 절반은 현 재 닉쿤의 고객들이고, 절반은 닉쿤과 친구로 남아 연락을 주고 받으며 고급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일례 로 클 랜과 클레어의 이 무식한 결혼식이 아무 문제없이 준비되고 있는 것도 닉쿤의 옛 연인 겸 현재 친구들인 그녀들 의 도움이 컸다. 기혼녀들도 있고, 약혼자가 있기도 하고, 아직 싱글인 여자들도 있었지만 그녀들 모두 닉쿤을 친구로서 인정하고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닉쿤 역시 그녀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돌려주 고 있었다 . 그렇게 따지면 결국 감정적이라기보다는 비즈니스적인 느낌이 더 강한 관계지만, 하여간 그런 여자들을 모두 자 신이 이겼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조금이나마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좋았다. 국제 미아에, 고아에, 두 번이나 파양을 당했지만 자신을 버리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아니, 적어도 닉쿤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건 믿고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빠져나가려 애를 쓰긴 했지만 닉쿤 벅 허르 베 지쿨이라는 인간을 잘 아는 만큼 믿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왔고 그 성장 배경까지 훤히 아는 만큼, 사소한 습관 차이로 다투거나, 서로의 말이 나 행동을 잘못 이해해 오해를 하거나, 혹은 서로에게 질려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의 장단점을 훤히 아는 만큼, 단점은 감싸며 장점으로 바꾸도록 개선해줄 것이고, 장점은 칭찬하며 인정해줄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투닥투닥거리며 싸워도 금세 잊고 다시 화해하고, 자신의 습관에 짜증내지 않고 따라 와주며, 자신 역 시 그의 취향을 인정하고 따라가 줄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새로운 커플들이 몇 년에 걸쳐 싸우고 화 해하 길 반복해 겨우 얻어낼 수 있는 배려와 이해를 이미 갖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닉쿤과 자신은 이상적인 관계였다. 같으면 같은 대로 문제이고 다르면 다른 대로 문제가 생기지만, 닉쿤과 자신은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짝이 맞는 거울 속의 자신과 같은 짝이었다.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던 우영은 시선을 돌려 책상 서류 위에 놓여 있는 노먼의 책을 바라봤다. 아직 끝까지 읽지 못한 소설은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성장소설이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던 부모는 소년을 방치했고, 마약 중독자인 아버지의 폭력과 창녀인 어머니 아래에서 학대받던 소년은 어느 날 다락방에 있는 오 래 된 거울을 발견한다. 마치 이끌리듯 거울을 바라본 소년은 거울 속의 자신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에 그에게 말 을 걸고, 그러다 어느 순간 거울 속의 소년은 또 다른 개체가 되어 살아 움직이며 소년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 리고 소년에게 거울 너머의 세계로 오라고 손짓한다. 하지만 소년은 현실 세계를 저버릴 수 없어 계속 망설인다 . 거울 속의 소년은 상냥하고 따뜻하지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소년은 그 소년의 호의와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하염없이 거울을 바라보며 그 소년을 바라볼 뿐이다. 우울한 소년의 성장기에 우영은 차마 불안해하는 소년의 심리에 동화되어 그 소설의 마지막 장은 읽지 못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사랑하는데, 그 소년과 함께 하고 싶은데, 사랑받을 줄을 몰라서, 그리고 거울 속의 소년에게 자신이 짐이 될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는 모습과 그 불안하고 어두운 심리가 너무 생생하 게 느껴져 차마 완결을 펴볼 수가 없었다. 엘레나 덕에 홍보가 되어 이미 각 매체에서 책에 대한 평이 쏟아지고 있는데 전부들 호평들이었다. 21세기를 대 표할 섬세한 감각의 신인작가가 혜성처럼 나타났다며 평론가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노먼의 대단한 점은 진짜 흔하고 흔한 소재를 그 특유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성에 결부시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완벽 하게 동조해 주인공의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묘사나 은유보다는 짤막하고 쉬운 문체로 사람들의 감성을 이끌어낸다. 처음에는 단지 노먼의 글 속에 자신이 빠져들었다고만 여겼다. 그만 만들어놓은 정교한 덫에 빠져 소년과 자신은 동일시한다 여겼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 속의 소년은 자신이었다. 노먼은 애 초 에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간 거다. 거울 속의 소년은 노먼일 수도 있고 닉쿤일 수도 있다. 그건 중 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망설임이었다. 보통은 누구든 남의 문제에는 냉정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문제가 되면 객관성을 잃고 구차한 감정적 변명을 둘러 대게 마련이다. 냉정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본 우영은 너무나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왜 그 끔찍한 현실을 버리지 못해 망설이냐고, 거울 속의 소년의 손을 잡으라고 외치고 싶었다. 완결이 어떻게 날지 몰라 아직 뒷부분을 보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본 소설만으로도 우영은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 에게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닉쿤의 손을 잡으라고. 더 이상 외로움에 허덕이며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지 말라고. 잠깐 잠깐 틈이 날 때마다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푹 빠져 있던 책을 돌아본 우영은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노먼이 이 소설로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이미 알고 있다. 망설이지 말고 원하는 것을 위해 뛰어들라 고, 다른 건 보지 말고 행복해지라고, 노먼은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더없이 가볍고 즉흥적이고 속도 없는 녀석 같지만 더없이 속이 깊고 예민한 친구였다. 우영은 피로한 듯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그 얇은 유리막 너머의 세계는 반짝거리면서도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구차하고 비굴하더라도 익숙해진 공허와 외로움을 버리고 저 거울 너머의 따스하지만 낯선 세계로 뛰어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닉쿤과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자신이 왜 지금까지 이렇게 달려왔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이 사는 세계가 옳은 것인지, 저 너머의 세계가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지금의 세계가 옳다면 어떤 고난이라 도 버텨 이겨내야 하지만 만약 지금의 세계 자체가 잘못된 거라면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는 저 너머의 세계로 가는 것이 옳다. 소설 속의 소년 역시 거울 속 소년의 애정과 믿음보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절실하다. 결국 거울에 비친 소년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뿐, 결국은 자기 자신일 뿐이니까. 믿을 수 있는 것도 믿어야 하는 것도 자신뿐이다. 필 요한 건 자신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도 무감각하다. 그리 고 그 애정을 믿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러니까, 결국 뛰어넘을 건 유리막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자신은 지금 이대로 사아갈 수도 있다. 편안한 고독과 적막 속에서 시끄러운 매스미디어를 벗 삼아 공허하지만 큰 변화 없는 삶을 이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손을 뻗어 저 유리막 너머로 건너간다면 험난하지만 고독하지 않은 , 홀로 앉아 멍하니 브라운관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 만 그 삶에 대한 대가가 무엇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괴로울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후회 할 수 도 있다. 많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 길을 택해야 할지, 아직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행복해지고 싶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행복해지고 싶다. *** 점심시간이 되자 재빨리 나서 플로리스트들을 만나 최후 도안과 3D로 만든 배열을 확인한 마지막으로 꽃의 양을 좀 더 늘려달라는 말을 하곤 사무실을 나와 곧장 에이먼이 거래하는 인형 가게로 향했다. 주문했던 옷과 소품들 을 확인한 우영은 명품 옷처럼 상자에 넣어 고이고이 포장을 하는 점원을 보며 쓰게 웃고 말았다. 오늘 도착한 옷을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드레스와 헤어밴드, 그리고 망사 스타킹이었다. 에이먼이 일본 옥션에 나 온 곳을 보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제작자에게 특별히 제작해 오늘 공수 받은 소품들이었다. 에이먼의 취미야 취미로 인정한다지만 이런 스타일이 취향인가 하면 고개가 절로 갸웃한다. 닉쿤의 취향이야 전 우주적이라지만 에이먼의 취향은 고정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데이트하던 여자들을 하나씩 되돌려 보자면 아 주 완벽하게 취향이 눈에 들어온다. 갈색 머리카락에 집안 좋고, 우아하고 지적인 여자. 외모보다는 일에 대 한 열정과 자신감, 그리고 전공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여자들이었다. 옷 스타일도 모두 전문직 여성 다운 검은색의 원피스나 투피스, 혹은 정장형의 쓰리피스 형에 레이스와 망사와는 거리가 먼 타입들이었다 . 자신 의 외모를 꾸미기보다는 강한 주관과 신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달려가는 여자가 에이먼의 스타일이었다 . 그리고 그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했던 게 대니였다. 문제는 대니는 너무 완벽해 에이먼을 압도했다는 것뿐이 다. 데이트 를 하거나 결혼을 해 그녀의 가능성을 막고 싶지 않다고 했다. 확실히 대니는 분명 거물이 될 타입 이었다. 결혼 을 하기보다는 원하는 일을 하며 그녀의 미래를 넓게 열어두는 쪽이 좋긴 하다. 물론, 그건 주변 인들의 바람으 로 그 녀 자체는 소박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원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UN군에 들어갔으면 딱인데.” 우영은 아쉬운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니가 UN군에 들어간다면 세계 평화가 지켜질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UN 친선대사로 활약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국회에 나가는 것도 좋다. 만약 그녀가 지금이라고 마음을 먹고 나 선다면 하원위원은 따놓은 당상이고 곧 상원으로 올라가 언젠가는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그 녀를 지지하는 기반은 아주 탄탄하다. 대학 동기들부터 시작해 선후배들, 그리고 그 집안 사람들과 그녀가 거 래 하고 있는 각분야의 인사들까지. 모두들 그녀를 신뢰하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녀는 거침이 없 고 강하며, 신념이 굳다. 닉쿤에게는 자주 흥분을 하긴 하지만 그건 닉쿤이 하도 성질을 긁어서 그런 것일 뿐 다 른 사람들에겐 상냥하다. 사실 닉쿤과 대니는 진짜 상극이다. 붙여놓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녀 본인이 그런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클랜의 꿈은 작가였지만 다른 쪽으로 재능이 넘치고 글에는 재주가 메주라 포기한 것처럼, 그녀 역시 그녀의 능력과 희망이 전혀 따로 논다. 보석에 대해서만은 재능과 흥미와 취미와 환경이 완벽하게 받쳐주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니의 꿈은 가정주부였 다. 물론, 그러다 보석 소식이 들리면 프라이팬 집어던지고 달려나갈 성격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이먼이라면 그도 용납해줬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에이먼과 결혼을 했다면 대니가 프라이팬을 손에 들 일이 없을 거라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여기, 다 됐습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조심조심, 마치 값비싼 보석을 다루듯하는 점원의 손길에 우영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 가게를 단골로 삼은 건 잘한 일이었다. 어떤 물건이든 고객을 상대로는 최선을 다 하는 게 예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상이 들어오시면 알려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새 제품이 들어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마친 우영은 곱게 포장된 상자를 조심스레 들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바로 가게 문 앞에 주차해놓은 자신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불법 주차 아닌데?” 아주 잠깐 들르는 거라 키도 차 안에 두고 비상등을 켜놓고 내렸었다. 주차는 아니라 정차였다. 끌려갈 이유가 없다. “뭐지?” 갑자기 주정차 단속반이라도 떴나 해 주변을 돌아보던 우영은 혹시 딱지라도 붙어 있나 싶어 가로등을 살펴봤다. 하지만 딱지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불이 들어왔다. “도난이다…….” 어떻게 가게 앞에 정차해놓은 차를 훔쳐 가냐 싶어 씩씩거리며 거리를 돌아보던 우영은 저쪽에서 서서히 다가오 는 검은색의 리무진을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리무진 뒤에 자신의 차가 따라오 는 게 더욱 불길하다. 빠른 속도로 블록을 한 번 돌아 자신의 앞으로 온 리무진에서 기사가 내리더니 재빨리 우영의 앞에서 고개를 꾸 벅 숙여 인사를 한다. “우영 케이먼 씨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저희 오너께서 잠시 보셨으면 합니다.” 기사치고는 유난히 좋은 덩치에 검은 정장과 검은 선글라스, 혹시나 해 흘깃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차를 몰고 온 남자 역시 이상하리만치 덩치가 좋다. 순간, 우영은 그들의 오너가 누구인지 알아채버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 에 다시 물었다. “누구신데요?” “세르게이 네브즐린 씨요.” 역시나였다. 어차피 오늘 그를 찾아가 무서운 빨간 덩어리를 돌려주려던 참이었던 터라 우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 덕였다. 그 빨간 덩어리를 어디 두기도 무서워 가방 안에 넣고 하루 종일 들고 다녔다. 마침 때가 좋다. 빨리 건 네주고 어깨가 좀 가벼워졌으면 하는 생각에 우영은 남자가 열어주는 리무우영의 뒷좌석에 올라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오늘이야 말로 그 이상한 남자와 확실히 결판을 지을 셈이었다. 약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어마어마한 저택 정원 안에서 우영은 조금 기가 질린 듯 주변을 돌아봤다. 허르베지쿨 가의 저택도 굉장하긴 하지만, 이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기다 이 집 상당히 수상하다. 왜 정원 곳곳에 이 상한 바위들이 놓여 있는 걸까? 게다가 나무들의 분재 상태도 좀 이상하다. 저 바위 안에는 폭탄이나 기관총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해 인상을 쓰던 우영은 차문이 열리자 곧장 가방과 상자를 챙겨들고 차에서 내렸다. “따라오십시오.”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이상한 분재들-그러니까 일반적인 형태의 분재가 아니라 나무들이 좀 묘한 형태를 하고 있 었다. 예를 들어 뱀이라든가, 사자의 머리라든가 하는 좀 이상한 형태들이었다.-을 주욱 돌아본 우영은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기사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은 일반 저택과 같이 들어서자마자 홀이 보이는 구조였다. 그러니까 보통 저택과 구조는 같았다. 다만, 인테 리어가 좀 이상하다. “……주인께서 독특한 취미를 갖고 계시는군요…….” 홀의 벽면을 따라 주르륵 나열된 유리진열장에는 각종 권총과 기관총, 그리고 긴 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 고 계단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벽면에는 이상한 팔괘 같은 게 붙어있다. 예전에 태국 공포 영화에서 보았던 중간 에 유리가 붙은 묘한 형태의 팔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일직선상으로 사슴의 박재된 머리통이 달려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사슴 아래에는 거대한 철망이 있었는데 작은 인공정원처럼 꾸며놓은 그 안에는 보아 뱀 두 마리가 스스스 거리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참 청명한 날씨임에도 이 집안은 묘하게 한기가 들 정 도 로 뭔가 차갑고 음습한 인테리어였다. 집안을 쭈욱 한 번 돌아본 우영은 그제야 세르게이의 그 기묘한 선물들이 이해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 이런 취향 이었던 거다. 박재와 뱀, 총, 그리고 팔괘까지. 다른 건 몰라도 적들을 새벽에 초대하면 딱 심장마비 일으키게 하기엔 취적의 인테리어였다. 거기다 더 엽기적인 것 하나를 더 하자면 뱀의 목에 샤넬 로고가 새겨진 개목걸이 가 걸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건 분명히 엘레나 짓이다. 미치겠다. “따라오십시오.” “……네.” 조용히 남자를 따라 홀 안쪽으로 들어선 우영은 긴 복도를 걸어 활짝 열린 방 앞에 선 채 안을 들여다봤다. 그 방은 응접실인 듯했다. 정원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이 활짝 열려 있고,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세르 게이가 있었다. 집안에서 입는 편안한 옷차림의 세르게이는 오늘도 여전히 근사했지만, 방 안은 그와는 전혀 어 울리지 않았다. 우영은 태어나 처음으로 저렇게 비싼 가구들도 잘못 배치하면 조잡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저 가구를 만든 디자이너라면 소송 건다. “도착했군. 어서 와. 앉지.” 우영을 알아챈 닉쿤이 그렇게 말하며 손끝을 까닥거리자 우영은 재빨리 그의 앞으로 가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러 자 우영은 안내해준 남자가 문을 닫고는 사라진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고 했었는데 차까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이건 납치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우영은 애써 예의 바르게 인사치레를 했다. 사실 이젠 이 남자가 별 로 무섭지 않아 미쳤냐고 다다다 따질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참았다. 일단, 마피아다. “그래? 다행이군. 서로 마음이 통한 모양이야. 날 만나려 했다는 건 내 청혼에 좋은 답을 주기 위해서겠지?” 내가 미쳤냐고 하려다 우영은 영업용 미소를 띤 채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돌려드릴 게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열어 세르게이가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왜? 너무 작은가?” 순간 우영은 이게 작다고 말하는 세르게이를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혹시나 했었다. 엘레나야 워낙에 세상 물 정 모르는 애니 그러려니 했지만 설마 이 남자까지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닙니다. 제겐 과분한 물건이라서요.” “부담 가질 것 없어. 우리 집에는 넘쳐나는 물건이니. 이게 마음에 안 들면 더 큰 것도 있는데?” “샤넬 클래식 2.55 사이즈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극구 사양하겠습니다.” “아, 엘리가 벌써 말했나 보군.” “네.” “그 녀석은 통이 큰 면은 날 닮았단 말야.” 그렇게 말하며 세르게이가 나른하게 웃는데 우영은 속으로 그 말을 정정해주었다. 통이 큰 게 닮은 게 아니라 두 남매의 개념이 동시에 안드로메다로 출장 간 게 똑같다, 고.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이야기하신 청혼은 정식으로 거절하겠습니다.” “왜? 내가 마음에 안 드나?” 직설적인 세르게이의 질문에 우영은 변화구를 구사하기보다 직구 승부로 나가기로 했다. “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던 짓과는 달리 의외로 순순히 물러서는 세르게이를 보며 우영이 안도하려는 찰라 세르게이가 망발을 내뱉었다 . “그럼, 엘레나는 어떤가?” 갑자기 나온 이름에 우영은 의자에서 튀어오를 정도로 놀라 세르게이를 바라봤다. “예?” “엘리가 자네에게 관심이 많던데? 반했다더군. 어때? 내 동생이지만 예쁘고 성격도 괜찮아. 머리가 좀 빈 게 흠 이지만, 그런 점이야 자네가 채워주면 되지 않나?” “엘리는 열다섯 살입니다만?” “4년만 기다려. 지금은 약혼부터 하고 성인이 되는 즉시 결혼식을 올리지. 아, 그래. 성인식과 함께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군.” “저랑 열다섯 살 차이에요!” “상관없지 않나? 남자들이란 원래 여자가 어리면 어릴수록 좋아하잖아. 게다가 내 동생이지만, 그 녀석 액면가 는 스물다섯이야. 부담 갖지 마.” 아주 부담 된다. 러시아 마피아의 막내딸에 세계적인 수퍼모델이다. 일단 언론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둘째 로 네브즐린 가의 적에게 자신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 이전에 자신은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양심도 없이 열다섯 살이나 어린, 사고만 빨리 쳤으면 자기 자식뻘인 미성년자와 결혼을 하려들 정도로 얼굴에 철판 깔고 사는 인간은 아니다. 자신을 순식간에 롤리타 콤플렉스에 빠진 파렴치범으로 모는 세르게이를 보며 우영은 턱을 빼고 그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떠도는 의문을 던지고 말았다. “지금, 당신 여동생 얘기입니다만?” “엘리가 내 여동생이라는 건 미국하고 러시아 사람들은 다 알아. 뭘 새삼.” “아니, 이제 겨우 열다섯 살 된 당신 여동생을 서른 살 먹은 아저씨에게 시집을 보내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무 슨 정략결혼도 아니고!” “정략결혼이라고 봐도 좋지. 하지만 엘리는 진짜 자네를 좋아해. 그 녀석이 위치 추적까지 해달라고 한 남자는 자네가 처음이니까.” 그딴 거 하지 마, 라고 하려다 우영은 갑자기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돌렸다. “뜻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엘리는 좋아하지만 결혼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게도 제 결혼상대를 결정할 자유 정도는 있습니다.” 이상하게 이 남매만 만나면 힘이 빠지는 듯해 우영이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세르게이가 의외라는 표정으 로 우영에게 되묻는다. “어린 여자 좋아하지 않나?” “싫습니다!” “그럼 남자를 좋아하나?” “왜 얘기가 거기로 튑니까?” 이 남자랑은 평생 가도 제대로 된 대화를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영이 서둘러 이 대화를 접고 일어서려하자 세르게이가 테이블 위에 있던 잡지를 하나 꺼내 우영의 앞에 던진다. “얘는 어떤가?” 잡지는 러시아 잡지였다. Vanity show라는 영문 아래에 러시아어로 뭔가 빼곡하게 적힌 잡지의 표지에는 근사한 은발의 남자가 하얀색 셔츠를 입은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진을 유심히 바라본 우영은 기겁했다. 세 르게이였다. 세르게이가 러시아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이렇게 생긴 남자가 또 하나 존재할 수는 없다. 저 험악한 눈빛까지 아주 똑같다. 이 잡지는 마피아 특집 잡지인가 해 우영은 넋 나간 얼굴로 세르게이를 바라보 며 물었다. “러시아에서는, 마피아 전문 잡지도 나오나요?” “설마. 그 녀석은 내 동생 알렉세이 네브즐린이야. 러시아에서 배우로 활약 중이지. 나이는 서른. 자네랑 동갑 이야.” 순간 우영은 안도했다. 아무리 막 나가도 아직 마피아 잡지까지 발행하는 나라는 없는 모양이다. 진짜 다행이었 다. “나랑 가장 많이 닮은 녀석이지. 어때? 마음에 안 드나?” “……저, 알렉세이라는 이 사람도 당신이 자길 팔아먹으려 한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 그래도 내 말이면 들을 거야.” 역시나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세르게이의 발언에 우영은 딱 잘라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럼, 얘는?” 이라며 이번엔 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의 사진을 내민다. 조금 더 어려보일 뿐 엘렉세이와도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이 집 남자들을 찍어내는 모양이다. 아니 찍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카피해서 낳는 모양이다. 붕어빵 틀 에 넣고 찍어내도 이렇게 닮을 수는 없다. 세쌍둥이다. “이반 네브즐린. 지금 러시아에서 복역 중이지만, 곧 나올 거야. 어떤가? 스물일곱이야.” “……무슨 죄로요?” “장기매매.”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배우에 이어 장기매매 알선자까지 나섰다. 돌아버리겠다, 진짜. “그냥, 얌전히 복역 마치신 뒤 갱생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럼 얘는 어때?” 라며 또 다른 사진을 내미는데 이번에도 역시 똑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세르게이의 성장과정을 보는 듯한 사진 들의 나열에 우영은 기겁했다. 어쩌면 이렇게 형제들의 얼굴이 똑같을까. 허르베지쿨 가의 남매들도 참 많이 닮 았다 생각했는데 그 집은 이 집에 댈 것도 아니다. 이 집은 독한 눈빛까지 꼭 닮았다. 가족들이 모이면 레이저 쇼를 해도 될 정도다. “이 사람은 또 누군데요?” “니콜라이. 우리 집 넷째지. 지금 갓 스무 살이 됐어. 파릇파릇하지. 어린 여자가 싫다면 어린 남자는 어때?” “이 사람은 또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아직 가업에는 뛰어들지 않았어. 방황하는 중이지만 곧 집으로 돌아올 거야.” 돌아오지 마, 절대로 돌아오지 마, 라고 사진 속의 남자를 응원하며 우영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마음에 안 드나? 그럼 얘는 어때?” 라며 마지막 사진을 내미는데 이번에야 말로 우영은 기절할 뻔했다. 엘레나보다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기였다 . 열일곱, 열여덟이 갓 됐을까 말까 한 애기였다. 물론 아주 작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서른 살이 된 우영의 눈 에 는 아주 애기 같아 보였다. 통통한 볼 살하며 인형 같은 외모가 아주 예쁘장하다. 세르게이가 어렸을 때엔 꼭 이랬을까 싶어 유심히 사진을 바라보는데 세르게이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 녀석은 알렉산드르야. 엘레나 바로 위의 오빠지. 아직 발육이 더뎌 어려 보이지만 우리 집 남자니 다 크면 봐줄만 할 거야. 게다가 성격도 아주 당차지. 성격이 날 꼭 닮았어.” 우영은 조금 귀엽다는 듯 사진을 보고 있었지만 그 말에 사진을 툭하니 테이블 위로 떨어트렸다. 외모도 카 피해 놓은 듯한데 성격까지 똑같다면 한 마디로 상종 못할 인간이라는 소리다. 생긴 건 귀여운데 길에서 만나면 피해 가야겠다. “아주 귀엽지? 크게 될 놈이야. 내가 장담하지. 나 다음으로 제일 성공할 거야.” 자신의 남동생 사진을 보고 귀엽다는 듯 싱긋 웃는 세르게이를 보며 우영은 진심으로 세르게이의 정신 감정을 의뢰하고 싶었다. 대체 지금 뭐하는 짓이냐. “죄송하지만, 지금 도저히 당신의 의도를 모르겠는데요? 형제 자랑하시는 게 아니라면, 왜 제게 이러시는 거죠? ” “우리 집 가족이 되었으면 하는 거지. 우리 집 남자들이 얼굴은 모두 괜찮은데?” “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닙니다.” “그래? 그럼 막내를 성형을 시킬까? 닉쿤 같은 타입이 좋다면 금발로 염색을 하면 괜찮겠나? 코도 조금 낮추고, 눈은 렌즈를 끼면 되고. 턱을 좀더 깎아야 하나?” “……알렉산드르는 당신이 자기 성형수술 시키려는 거 알고 있습니까?” “알 리가. 그래도 내가 시키면 할 거야.” “미쳤군요.”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간 진심에 세르게이의 눈이 순간 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영은 이제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멀리 있을 때는 무서웠지만 이 남자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읽고나자 전혀 두렵지 않다. 그 러니까 한 마디로 진짜 두려운 건 미지의 생물체란 소리다. 익숙해지면 전혀 무섭지 않다. “동생들 팔아먹을 생각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십시오. 외모들이 출중하니 다른 사람들이라면 좋다고 달 려들 겁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건 자넨데?” “조상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전부 러시아 황제들의 이름을 따서 지으신 것 같은데, 조상들 이름에 먹칠 하지는 마시죠?” “……황제? 누가?” “엘리랑 당신을 제외하면 전부 로마노프 황가의 황제들 이름이잖아요?” “……그런가?” 의외라는 듯한 세르게이의 얼굴에 우영은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모르셨습니까?” “그래. 왜 난 뺀 거지?” 순간 세르게이의 눈빛이 번쩍했다. 마피아 주제에 황제 이름이 아니라고 아버지 멱살이라도 쥘 기세다. “아버지께 여쭤보시죠.” “그래야겠군.”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잠깐.” 더 이상 피곤한 건 싫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우영은 세르게이의 음성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씀하시죠.” 우영이 진중한 태도로 세르게이를 바라보고 있자 세르게이 역시 아주 진지한 얼굴로 큰일 날 소리를 내뱉는다. “어린 남자가 싫다면 우리 아버지는 어떤가?” 동생들을 팔아먹다 못해 이젠 아버지까지 팔아먹으려는 세르게이를 보며 우영은 “너 미쳤냐?”라고 소리치고 싶 은 걸 꾹 참으며 겨우 겨우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물었다. “……대체 왜 절 그렇게 가족으로 들이려고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고학력의 우수한 인재를 원하거든. 알다시피, 내 선물을 받고는 아끼던 부하가 자살을 해서 말야.” 아무리 봐도 그건 학력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다. 아니, 그보다는 섬세함과 이 집안 전체의 이상한 감각이 문제다. 당신 집은 학력을 높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머리부터 어떻게 해야 된다고 소리치려다 우영은 다시 침 착 하게 대꾸했다. “그럼 비서를 고용하시죠.” “그래서 스카웃 제의를 했는데 거절했잖아?” 분명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죄송하지만, 전 직장을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죠.” 내가 미쳤다고 정원에 폭탄이 터지는 집안의 비서로 일을 하냐? “고용해봤지만 다들 한 달을 못 넘기고 도망쳐서 말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 필요해. 폭탄 하나 터졌다고 도망 나가니 감당이 돼야 말이지. 거기다 가끔 다치기도 하고, 납치가 돼 사라지기도 하니까.” 우영은 세르게이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폭탄이 터지는 집에서 일할 뿐만 아니라 다 치고 납치를 당하는 일을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그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 “전 소심합니다.” “어제 방송을 보니 전혀 안 그렇던데?” “그건 10년에 한번씩 있는 사고고요. 하여간 전 네브즐린 가와 어떤 인연을 맺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까놓 고 말해서 진짜 고학력의 남성이 필요하신 거라면 다른 사람을 구하십시오. 전 그냥 예일대 영문과 졸업생일 뿐 입니다. 수석은 노먼이었습니다.” “노먼?” “노먼 맥캐인이요. 엘리고 들고 나왔던 책을 쓴 친구요.” “그 친구가 수석이었다고?” “네.” 우영이 진지한 얼굴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사이 세르게이의 눈이 번뜩인다. “……그거 괜찮군.” “……예?” “괜찮겠어, 진짜. 파파라치 출신이니 배짱도 두둑하겠다, 그 집이 거대 로우펌을 운영하고 있지? 괜찮군. 진짜 괜찮아.” 라고 중얼거리는 세르게이를 본 순간 우영은 노먼이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우영은 애써 자신의 양심에 서 두 눈을 돌려버렸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시간내 좋은 정보를 줘서 고맙네.” “천만에요.” 노먼이 이 사실을 안다면 이번엔 자신을 죽이려 달려오겠지만, 어쩔 수 없다. 누누이 말하지만 인생이란 원래 이 런 거다. “그럼, 이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를 챙겨든 우영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세르게이는 배웅도 하 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은 채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 남자의 배웅 같은 건 받고 싶지도 않다. “내 팔자는 왜 이래, 대체…….” 닉쿤의 말대로 걸려드는 인간들이라고는 모조리 저런 것들뿐이다. 부모 복 없는 인간은 이렇게도 인간 복도 없는 걸까. 빠른 걸음으로 막 다시 홀로 나와 그 저택을 빠져나가려던 우영은 홀로 나오자마자 들린 “꺄악!”이라는 감탄사 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자 엘레나가 오늘 오전에 봤던 차림 그대로 뱀의 우리 앞에 서서 자신 을 보곤 놀라고 있었다. “우영, 나 만나러 왔어요?” “……아니. 너희 큰 오빠.” “세르게이가요? 아, 약혼 준비한다더니……. 어떻게 해!” 라며 얼굴을 가리며 웃는데, 대체 이 집안 인간들은 왜 당사자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약혼 준비를 한 다는 걸까. 오늘 안 왔으면 내일 신문 지상에서 엘레나와 자신이 약혼했다는 말도 안 되는 기사를 보고 주말에 클랜이 아니라 자신이 식장에 끌려들어갈 뻔했다. 그냥 두면 결혼에 애까지 줄줄이 만들어줄 사람들이다. 그것 도 세르게이랑 똑같이 생긴 아이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우영은 소름이 끼친 듯 몸을 떨었다. 세르게이랑 똑같이 생긴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아빠’라고 부른다면 자신은 그대로 기절해 유명을 달리할 것이다. 공포 목록 위로 클랜과 클레어 위로 세르게 이 주니어라 랭크되었다. “약혼은 깨졌어. 난 이만 간다.” 손을 들어 딱딱하게 인사를 한 우영이 뒤돌아서자 엘레나가 우영의 팔을 잡고 매달린다. “어어? 왜요?” “엘레나, 너 열다섯 살이야. 앞으로 만날 남자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왜 벌써 약혼을 하려고 해?” “약혼은 약혼이잖아요.” “……4년 뒤에 보자. 그때까지 근사한 남자가 안 나타나면 나도 생각해볼게.” “기다려줄 거예요?” “봐서.” “아, 하여간 가지 말아요. 제 방 보고 가요.” “……고마운데 지금 다음 스케줄이 있어. 벌써 1시간이 딜레이 됐어. 미안하지만 방 구경은 다음에 하자.” 다음에 또 이 집에 온다면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우영이 휙 돌아서려하자 엘레나가 우영의 팔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잡아끈다. “안 돼요. 온 김에 제 방 보고 가요.” “나 바쁘거든?” “잠깐요, 잠깐만요.”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가 우영을 질질질 잡아끌고 계단으로 올라선다. 상대는 열다섯 살 짜리 여자애였다. 뿌리치 려 한다면 뿌리칠 수 있다 여기고 우영은 팔을 흔들었지만 엘레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삐쩍 마른 애가 웬 힘 이 이렇게 세냐, 싶어 우영이 놀란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보는 사이 엘레나가 계단을 올라서며 계단 아래의 음침 한 곳에 있는 뱀들을 보며 인사를 한다. “안녕, 코코, 칼. 이따 보자.” 순간 우영은 진심으로 궁금한 게 하나가 생겼다. 그리고 우영은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코코는 알겠는데…… 칼은 설마, 그 칼이 아니겠지?” “무슨 칼요?” “……칼 라거펠드(Karl Lagerfeld -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맞아요. 칼 아저씨가 절 예뻐해 주시거든요.”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에게 아저씨라 부르는 이 맹랑한 아가씨를 올려다본 우영은 진심으로 그 아저씨가 불쌍하다 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칼 라거펠드는 모델을 꽤 총애하는 디자이너였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베이비 페이스 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데본 아오키를 보고는 그녀가 자신의 무대에 서지 않으면 시즌을 포기하겠다고 데본 아오키의 부모를 설득했을 정도로 모델 하나에 대한 애정이 지대한 남자였다. 요즘은 그가 엘레나를 총애 하고 있 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엘레나가 그의 이름을 뱀에게 붙여줬다고 해도 총애할 수 있을까…… 는 잘 모르겠 다. 대체 그 할아버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보아 뱀에게 자신의 이름을 내줘야 했던 걸까. “제 방 여기에요.” 우영을 질질 잡아끌고는 2층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쪽으로 데리고 간 엘레나는 문을 열고는 그 안으로 우영을 밀어 넣었다. 엄청난 힘에 등이 떠밀려 방 안으로 들어서 햇살이 가득 든 분홍빛의 방을 본 우영은 처음에는 자 신의 눈이 이상해졌나 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엘레나가 방을 잘못 찾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방 예쁘죠?”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선 엘레나가 슬금슬금 침대 옆으로 가더니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브래지어를 발로 툭툭 차 침대 속으로 넣는다. 그리고는 그 옆에 떨어져 있던 팬티를 구둣발로 즈려 밟아 감춘다. 방은 나름 괜찮았다. 그나마 이 집안에서 제일 센스가 있는 게 엘레나인 듯 핑크색과 화이트가 절묘하게 조화된 전형적인 여자 아이의 방이었다. 문제는 가구마다 뿌옇게 쌓인 먼지와 방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매니큐어와 화 장 품들, 그리고 속옷과 스타킹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문제인 건 새하얀 카펫 위에 남아 있는 음료수의 얼룩과 과자 부스러기였다. 처참하기까지 한 광경을 목도한 우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엘레나를 돌아봤다. 그 험악한 시선에 엘 레나가 천진한 얼굴로 웃어 보인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라는 얼굴이었다. 엘레나의 얼굴은 너무나 해맑아 그 녀의 뒤로 보이는 방의 비참한 몰골이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손님을 데리고 오려면 최소한 청소하는 척이라도 해야 정상이 아니냐, 여자애 방이 이게 뭐냐, 너희 집에 청소해 주는 사람이 네 방만 일부러 안 치우는 거냐, 속옷은 제 때 제 때 내놔라, 하는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지만 우영은 그 모든 걸 한 마디로 요약해 깔끔하게 내뱉었다. “청소해.” 오! 일어나, 센! 계속 그대로 있으면 안 돼!” “일어나, 일어나!” 엘레나의 침대에 나란히 앉은 우영과 엘레나는 앞에 놓인 커다란 PDP화면에서 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A spiriting away of Sen and Chihiro)’을 감상하던 중 먹던 팝콘까지 내뱉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엘레나의 방 청 소를 돕던 우영은 에반 저리 가라할 정도로 잔소리를 퍼부어댔고, 1시간여 만에 깨끗해진 방에서 엘레나가 미안 하다며 들고 온 DVD를 틀어놓고 팝콘과 나초를 먹으며 두 주먹 불끈 쥔 채 영화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이 전에도 두 번인가 봤었지만 다시 보니 새롭다. “휴, 겨우 도망쳤어.” “응. 다행이다.” 이마에 땀을 닦으며 진지하게 몰입하는 엘레나의 옆에서 우영 역시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꾸했다. 다행히 DVD에 영문 자막뿐 아니라 더빙판이 있어, 영문으로 녹음된 화면을 보느라 엘레나도 완전히 몰입한 모양이었다. 우영이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 신기했던 것 중 하나가 이 나라 사람들은 자막을 읽기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진 짜 지독하게도 자막을 싫어한다. 김윤우영이 LOST에 출연계약을 할 당시 한국인 대사조차 모두 영어로 처리되어 있어, 이건 말이 안 된다고 한국어로 대화할 테니 자막을 넣으라고 했을 때 관계자들이 그럼 사람들이 채널을 돌 릴 거라고 할 정도로, 미국인들은 자막을 싫어했다. 그렇게 문맹률이 높은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다. 사실 발리우드(Bollywood, 인도의 영화 산업의 중심지인 뭄바이 의 옛 엉어 지명인 봄베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의 경우 자국 영화의 어마어마한 점유율을 자랑하는 이유 중 하 나가 바로 부탄의 94% 문맹률에 이은 58%에 달하는 문맹률 때문이었다.(물론, 그들 특유의 뮤지컬적 요소를 가 미 한 영화에 대한 절대적인 호응과 비극은 절대 보지 않는다는 점도 상당 수 작용한다. 타이타닉의 경우 인도 에서 만은 주인공들이 가장 행복한 부분에서 영화를 끝내, 타이타닉이 해피앤딩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 일 정도 다.) 그 나라 사람들은 아예 자국어 자막도 못 읽는다. 미국 역시 문맹률이 21%에 달하긴 하지만 사실 영화까지 전부 자막을 깔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게 미국인들은 자막을 싫어한다. 문화 우월주위인지, 단순히 남의 나라 영 화를 자막까지 깔아서 볼 이유가 없다는 오만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더빙판이 판을 친다. 덕분에 엘레나 같은 경우는 아주 편한 것 같다. “우와, 아프겠다. 저 용, 죽을 것 같아요.” “그러게.” 신이 나 함께 영화를 보던 엘레나는 주인공 소녀가 새하얀 용을 타고 약재가 가득한 방에 있는 장면을 보며 조마 조마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영 역시 진지한 얼굴로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 용의 입에서 튀어나온 검은 것 을 주인공이 밟고는 손을 동그랗게 만드는 장면에서 엘레나가 휙하니 우영을 돌아본다. “저거 뭐예요?” “뭐가?” “저기 손 동그랗게 하는 거.” “내가 아냐?” “당신 일본인이잖아요.” 순간 우영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엘레나를 돌아봤다. 얘가 지금까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건가, 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누가 그래?” “그럼 중국인?” 얘, 진짜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몰랐나 하는 생각에 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돌렸다. “나 한국인이야.” “한국이 뭔데요?” “……중국하고 일본 사이에 있는 반도국가(Peninsula).” 우영의 설명에 엘레나가 기겁을 한다. “페니실린(Penicillin)이요?” 이젠 이런 엘레나의 반응이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일상용어가 아닌 단어를 알아들으면 놀라지, 못 알아듣는다고 놀라진 않는다. “……그건 약이고. 한반도야.”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국제 입양.” “예?” “입양됐어. 한국에서 미국인한테.” 우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말했지만 엘레나는 상당히 처연한 얼굴을 하며 우영이 들고 있던 나초 접시 위 로 자신의 나초를 하나 들어 건네주었다. 엘레나가 먹을 걸 주다니 자신이 어지간히도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고생 많았겠네요.” “별로.” “막 다락방에 가두고 밥도 안 주고 그랬죠? 불쌍해라.” “누가 그러디?”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세계 명작 특선. 인어공주(little mermaid).” 그 말에 우영은 조용히 눈만 돌려 엘레나를 돌아봤다. 인어공주(little mermaid)가 고아라는 얘기는 듣다 듣다 처음 듣는다. 그럼 그 언니들은 뭐냐? 계모의 딸들이냐? 왜 계모의 딸들이 인어공주를 위해 머리카락을 내주고 칼을 얻어왔겠냐? “인어공주(little mermaid)가 아니라 소공녀(little princess)겠지.” “하여간요.” “엘리,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도 텔레비전 좀 작작 봐라.” 닉쿤이 자신이 엉뚱한 말을 할 때마다 텔레비전을 당장 박살내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 다. “만화나 보자.” 그렇게 말하며 우영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막 주인공 소녀가 전차를 타는 장면이 나왔다. “오, 간다.” “어? 진짜.” 신이 나 눈을 반짝거리는 두 사람은 다시 영화에 몰입해 들어갔다. 전차를 탄 주인공과 쥐 한 마리, 그리고 파린 지 뭔지 모를 정체불명의 날개 달린 곤충과 얼굴 없는 귀신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두 번이나 본 터라 뒷 내 용을 알고 있지만 우영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막 일행이 전차에서 내리는 순간이 었다. 기다린 듯 핸드폰이 울려왔다. 옆에 둔 자신의 재킷을 찾아 핸드폰을 꺼낸 우영은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너, 어디야?」 별 생각 없이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며 답한 우영은 순간 수화부에서 터져 나온 고함소리에 핸드폰을 귀에서 떼 어냈다. “닉쿤? 어, 나…… 엘리랑 있는데 왜?” 「엘레나랑?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회의 소집해놓고 안 나타나고 뭐하는 거 야?」 버럭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닉쿤의 음성에 우영은 순간 방 안에 있는 시계를 보곤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으아…….” 3시 40분이었다. 점심시간에 잠깐 볼 일을 보고 돌아가 2시 30분에 미팅을 잡아두고는 3시 40분까지 미친 듯 청 소를 하다, 엘레나랑 시시덕거리면서 DVD까지 보고 말았다. 너무 청소에 열중해버렸다. “미안. 미안해! 지금 나갈게. 깜빡했어. 시말서 쓸게.” 「시말서가 문제가 아니잖아! 안 그러던 녀석이 연락 하나 없이 미팅에도 안 나타나니 사고라도 난 줄 알고 놀랐 잖아. 문자 하나 못 보내? 대체 뭘 한 거야?」 닉쿤은 진짜 화가 나 있었다. 어지간하면 큰소리도 안 내는 녀석이 버럭 소리를 내지른 것부터가 안 좋은 징조였 다. 어쨌든 자신이 잘못했기에 우영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 동안 한 일을 이실직고했다. “……청소.” 뒤에 와야 할 DVD감상은 뺐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엘레나랑 DVD감상하고 놀았다고 말하면 수화부에서 닉쿤의 손 이 나와 자신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뭐? 청소?」 “엘레나 방 청소하다 보니…….” 「너 그 집에 메이드로 취직했냐? 네가 왜 걔 방을 청소해?」 “너무 더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참을 수 없는 그 꼴에 결국 온 열정을 다해 방안을 깨끗하게 치워버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시간이 지 나 있었고 그러다 엘레나가 가져온 DVD에 푹 빠져 버렸다. 점점 자신이 엘레나와 같은 급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지금 갈게. 지금 들어가면 40분 정도 걸릴 거야. 미안해. 진짜, 미안!” 「멀쩡하면 됐어. 일단, 사람들 각자 자기 일 보라고 보내놨으니까 천천히 와.」 “빨리 갈게. 기다려.” 서둘러 재킷을 들고 일어선 우영은 엘레나에게 손을 흔들며 가방과 상자를 챙겨들고 재빨리 엘레나의 방에서 달 려 나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오늘 오후 일정을 자신이 모조리 꼬아버렸다. 하루, 한 시간도 모자랄 판에 오후 를 꼬박 버렸다. “미치겠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간 우영은 그대로 홀을 가로질러 나갔다. 때마침 정원에 서 있는 자신의 차를 본 우영은 재빨리 저택을 나서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다행히 키는 와이퍼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열쇠를 꺼내 락을 풀고 막 차문을 열려는데 저택 안으로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들어온다. 은색의 재규 어 XK컨버터블이었다. “와우.” 차 볼 줄 아네, 라고 중얼거리던 우영은 서둘러 차를 타 안전벨트를 했다. 그와 함께 저택 앞에 선 차에서 한 남 자가 내려선다. 은발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에 빛이 날 것 같은 새하얀 셔츠, 그리고 물이 빠 진 청바지, 그리고 보잉 선글라스. 막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 근사한 모습이었지만, 어디서 많이 본 체형이었다. 그리고 많이 본 이목구비였다. 그러니까 방금 보고 나온……. “……세르게이 주니어다.” 알렉세인지 이반인지 니콜라인지 모르겠지만-나름 귀여운 알렉산드르는 제외- 하여간 세르게이의 쌍둥이였다. 보자마자 기함을 한 우영은 재빨리 기어를 바꾸고 재빨리 악셀을 밟았다. 도망쳐야 한다. 어서 저 세르게이 소굴 에서 멀리로 도망쳐야 한다. “진짜 환장하겠네…….” *** 다소 위험한 속도로 차를 운전해 사무실로 돌아온 우영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닉쿤에게 달려가 두 손을 모으 고 싹싹 빌었다. 일정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문제지만 닉쿤이 자신이 걱정이 돼 고객과의 상담 약속까지 취소했 다는 말에 진심으로 백배 사죄하는 마음이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잊고 청소를 할 수 있었을까. “미안. 미안해! 진짜 미안.” 닉쿤의 사무실로 뛰어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자 닉쿤이 보던 서류를 내려두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소집된 사람한테 미안해야지.” “사과할게.” 우영이 진짜 축 쳐져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닉쿤이 우영에게 다가서며 차분히 상황을 설명 해준다. “내가 돌아온 게 세 시였으니까 다들 30분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어. 혹시나 해서 계속 전화를 해도 넌 전화도 안 받고 해서 아무래도 퇴원한 지 얼마 안 돼 쓰러진 것 같으니 다들 돌려보냈어. 사과 전화를 하되 청소하다 늦 었다는 말은 하지 마. 그거 진짜 사람 열 받거든? 현기증을 일으켜서 잠시 쉬었다고 해.”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지 않아?” “기다리던 사람들 놀려? 남의 집에 가서 청소하다 늦었다고 하게? 상대방 기분도 생각해. 다들 이해해주는 분위 기니까.” “알았어. 너한테도 미안. 넋이 나갔었나 봐.” 그건 진심이었다. 세르게이랑 똑같은 남자의 사진을 줄줄이 보고 나니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그들의 그 독한 눈빛은 사진으로도 영력을 발휘하는 건지도 모른다. 진짜 그 집하고 연결돼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괜스레 남을 원망하던 우영은 자신의 머리를 끌어안는 닉쿤의 손길에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껌뻑거렸다. “됐어. 무사했으면 됐어.”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어투에 우영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눈을 감았다. 닉쿤이 화가 났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는데 화가 풀린 걸 보자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 행이었다. 진짜, 다행이었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괜찮아.” 다정하게 속삭이는 닉쿤의 말에 우영은 손을 뻗어 닉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시 그 상태 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에반이 들어섰다. “진.” 차분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우영은 닉쿤에게서 살짝 떨어져 뒤를 돌아봤다. “에반, 걱정했지?” 괜스레 모두에게 미안해져 우영이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에반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당연히 걱정했지.” “다신 안 그럴게. 미안.” “미안한 줄 알면 됐어.” 터벅터벅 걸어 닉쿤의 책상 앞으로 다가선 에반은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철을 닉쿤의 책상 위에 올려두곤 우영을 돌아봤다. “그보다, 우영.” 어깨를 툭 치는 힘에 우영은 웬일로 에반이 조용히 넘어가나 해 눈을 반짝이며 닉쿤을 바라봤다. 그 순간 에반에 게서 여지없이 그다운 말이 터져 나왔다. “시말서 써.” *** “그래, 쓴다, 써! 내가 못 쓸 것 같아?” 밀려 있는 일들을 하는 와중에도 우영은 이를 갈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 상황에서 에반이 진짜 시말서를 쓰라고 할 줄은 몰랐다. 거기다 “시말서 세 번이면 감봉이야.”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말이다. “너무한 거 아냐, 진짜? 물론, 내가 잘못했으니 쓰긴 쓴다고. 나도 쓸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닉쿤도 닉쿤다. 그러면 자기 편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파트너의 말이니 시말서를 쓰라며 자기는 슬쩍 빠져나가 버렸다. 통화를 할 때엔 분명 시말서가 문제가 아니라느니, 걱정했다느니 라고 잘도 떠들어대더니 에반이 뭐라 고 하자 당장에 혼자만 내빼다니. “나 사랑하는 거 맞아?” 오른손으로 부지런히 마우스를 움직이며 회계 프로그램을 체크하던 우영은 마지막 파일을 정리하곤 프로그램을 닫은 뒤 에이먼이 보내준 조감도를 열어 좌석 배치를 확인했다.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와 신부와 신랑 대기실, 그 리고 손님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섬세하게 좌석을 배치해야 한다. 이미 다 해놓은 배치도와 조감 도 를 같은 배율로 맞춰 확인하던 우영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돌려 폭죽이 터지는 위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 “이 정도면 됐나?” 준비는 완벽했다. 진짜 너무나 순조로워 무서울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위치를 확인하던 우영은 마이크를 보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곧장 에이먼에게 전화를 걸어 예식장을 장식할 꽃들 사이에 마이크를 넣기로 결정을 내렸다. 당장 급한 일들을 끝내고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닉쿤이 같이 퇴근을 하자고 했는데 일단 급한 불들은 모두 껐으니 갑자기 무슨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정시 퇴근도 가능할 듯했다. 이게 다 오른손 엔 마우스, 왼손엔 전화기를 들고 3시간가량을 미친 듯 일한 결과였다. “역시 난 대단해.” 스스로의 업무 능력에 자화자찬을 하던 우영은 기다렸다는 듯 문 안으로 들어선 닉쿤을 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일정 다 처리.” “벌써? 10시에 퇴근할 각오 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뒤에 들고 온 봉투를 우영의 책상 위에 내려둔다. “뭐야?” “저녁. 중국 음식이야.” “와, 웬일이냐? 네가 이렇게 쓸만한 짓을 다하고?” “밤늦게나 끝날 줄 알고 그랬지.” “그럼 먹자. 먹고 나가자.” “그럴까?” “응. 나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거든. 배고팠는데 잘됐다.” 우영의 책상 앞에 앉은 닉쿤이 봉투에 있던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놨다. 잘 포장된 종이 팩들을 뜯어 늘어놓자 음색 냄새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운다. “맛있겠다.” 다른 데에 집중하고 있을 때엔 몰랐지만 막상 음식 냄새를 맡자 허기가 돌기 시작했다. 침을 꿀꺽 삼킨 듯 막 젓 가락을 집으려던 우영은 핸드폰 벨소리에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네, 우영 케이먼입니다.” 「우영, 여기 좀 와야겠다.」 사라의 목소리가 푹 가라앉아 있었다. 오전에 전화를 할 때는 날아갈 것 같더니, 지금은 다 죽어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닉쿤을 바라보자 닉쿤이 입 모양으로 “누구야?”라고 묻는다. “사라.”라고 역시 입 모양으 로만 답해준 우영은 앞에 놓인 음식들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사라에게 되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오후에 재키 웨딩드레스가 왔는데…….」 “오늘 나온다고 얘기 들었어. 드레스에 문제 있어?” 웨딩드레스정도라면 별일 아니다 싶어 우영은 젓가락으로 닉쿤이 펼쳐놓은 음식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니. 드레스는 완벽해. 너무 예뻐. 황홀할 지경이야.」 “그럼 왜? 웨딩슈즈 때문에? 그건 좀 걸려. 내일 오전 중에 나올 거야.” 「아냐, 구두는 괜찮아. 웨딩슈즈야 급한 대로 어떻게 처리하면 되니까.」 “그럼 뭐가 문젠데?” 우영이 의아한 듯 그렇게 묻자 사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재키 살이 문제야.」 사라가 따로 살림 차려나온 빌라의 응접실에 앉은 우영은 이 순간 진심으로 재키의 신경줄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란 모름지기 백이면 백이 결혼식 전에 살이 쪽쪽 빠진다 들었다. 그래서 웨딩드레스 역시 가봉을 할 때 피팅을 할 때보다 조금 더 작게 만든다고 들었다. 그래야 당일 신부의 몸에 탄력 있게 들어맞는다. 임신 중 인 여자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3개월이라면 배가 눈에 띄게 나올 때도 아니고, 이것저것 신경을 쓰는 데다 입덧까지 하게 되면 살이 쪽쪽 빠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재키는 저렇게나 살이 찐 걸까. 그것도 배가 아니라 옆구리와 허리에 말이다. 더 신기한 건 임신 중임 에도 재키의 가슴은 여전히 등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결혼식 5일 전에 살이 찔 수가 있지? 그것도 전체적으로 한 사이즈 정도가 늘다니. 진짜 경이롭다.” 여자란 원래 남자보다 섬세하고 예민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라는 생각을 하며 우영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어차피 저것들이 식전에 사고를 칠 건 예상했던 바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5일 전에나 쳐주니 감 사할 따름이다. 그것도 겨우 살찐 정도로 말이다. “저 드레스는 못 입겠네. 클레어나 입으라고 해야겠다.” 바티칸의 성직자들이 입는다는 천연 섬유로 만든 주세페 파피니의 완벽에 가까운 라인을 자랑하는 백색의 드레스 를 보며 우영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뱉었다. 일이 이쯤 되자 식의 완벽함이나 화려함은 포기한 지 오래다. 길이 길이 남을 세기의 결혼식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아무 사고나 없이 치렀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일 결혼식만 치를 수 있다면 좋겠다. “애초에 임신 중에 주세페 파피니의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긴 했어.” 사라가 애써 죽어가는 우영을 위로해준다. 그냥 웨어(Wear)라기보다는 예술 작품에 가까운 주세페 파피니의 드레 스는 소화하기도 힘들뿐더러 몸의 라인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디자인이기 때문에 살집이 있는 재키에겐 애초 에 무리였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다. 진짜 결혼식 전에 살이 찔 줄이야. “이제 와 드레스를 새로 주문 수도 없고…… 큰일이네. 가봉만 사흘은 걸리는데. 저 드레스 공수해준 담당자한 테 면목이 없네.” “살이 찐 걸 어쩌겠어.” “그렇지.” 매도 맞을수록 맷집이 는다더니 이젠 저 두 녀석이 무슨 짓을 해도 화가 안 난다, 진짜. 이제 적당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매카니즘은 어찌나 훌륭한지 처음에는 당황하고 놀라고 화를 내지만, 두 번째 엔 그보다는 조금 덜 화낸다. 그리고 세 번째 쯤 되면 무감각해진다. 베버의 법칙이란 물리에서뿐 아니라 정신 에 서도 작용한다. 한 번 반응한 자극에는 두 번째로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자극에만 반응하게 된 다. “우영, 별로 화 안 내네.” 아예 지퍼가 올라가지도 않는 웨딩드레스를 벗고 나온 재키가 조심스레 그렇게 묻는다. 그래도 일단 우영이 화를 낼만한 일이라는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찐 살을 어쩌겠어. 일부러 찌운 것도 아닐 테고, 일부러 찌운 거라 해도 임산부를 굶겨가며 다이어트 시 킬 수도 없고.” 우영은 어쩔 수 없는 일에는 포기가 빨랐다. 이제 와 고칠 수도 없는 일이 힘을 빼봐야 자신만 손해니, 서둘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하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주저앉아 울기보다 사막을 파 물을 찾아라, 라는 게 우영 의 신조였다. 우영이 진짜 괜찮아 보였는지 재키가 우영의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다. “그럼, 클랜 올라오라고 해도 돼?” “왜?” “우영이 화낼 거라고 도망갔어.” 어쩐지 클랜이 안 보인다 했다. 하나로는 도저히 인간 구실 못해 짝이 된 두 놈 중에 한 놈이 사라져 무슨 일인 가 했더니, 자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망친 모양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안 돼?” “올라오라고 해.” 지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한 우영은 속으로 ‘너, 잘 걸렸다.’라고 중얼거렸다. 임산부에게는 차마 짜증을 낼 수 없었으니, 클랜이 올라오는 대로 한바탕 퍼부어줄 셈이었다. 사실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아예 화가 안 난 거 아 니 다. 단지 허탈함과 경악이 너무 커, 분노가 저 멀리 숨어 있었을 뿐이다. 이제 슬슬 허탈함도 인정했고 경악 은 가셔가니, 분노가 기어 나올 차례였다. “그런데 웨딩드레스는 진짜 어쩌지? 어디서 대여라도 해야 하나?” 사라와 킴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을 걸자 우영이 고개를 내젓는다. “어설픈 드레스는 안 입느니만 못해. 몸에 안 맞는 드레스를 억지로 입히는 것도 안 되겠지만, 예산만 삼천만 달라에 달하는 결혼식에 기성복 드레스를 입힌다는 건 말도 안 돼. 그건 내가 용납을 못해.” 그랬다간 꼴이 말 그대로 우스워진다. 애초에 소박하게 하는 결혼도 아니고 그렇게 돈을 처바르고 드레스는 기성 제품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최고가 아니면 최선이어야 한다. 그럴 듯한 사연을 가진 드레스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사라,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 있어?” “있긴 한데, 난 제로 사이즌데.” “그럼, 킴은요? 재키의 외할머니 드레스라도 없나요? 클랜의 할머니라도.” 우영의 물음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킴이 눈을 반짝인다. “아, 내 드레스 있어. 조금 구식 디자인이긴 하지만 하이웨이스트의 심플한 디자인이라 괜찮을 거야.” 하이웨이스트면 더욱 좋다. 바로 명치 부분부터 퍼져나가니 허리나 옆구리 살을 감추기는 더없이 좋다. 그리고 수선을 하더라도 일단 바스트 부분만 손을 보면 된다. “가슴 사이즈는요?” “당연히 재키보다는 크지.” 재키의 가슴이 절벽인 게 오늘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없는 천을 늘이기는 힘들지만, 있는 천을 줄이는 건 간 단하다. “잘 됐네요. 그럼 그걸로 하죠. 어설픈 기성복 드레스를 입느니 어머니 드레스를 물려 입는 게 보기에 훨씬 나 아요. 가슴 사이즈 조절만 하면 되니, 티아라는 주문한 대로 가고, 디자인 보고 면사포를 바꾸죠.” “오, 그럼 되겠네. 전화해서 어서 가져오라고 해야겠다. 그래도 그 드레스 베르사체가 직접 제작해준 거야.” “그럼 상당히 화려하겠는데요?” “그렇지. 지르콘이 층층이 달려있긴 한데. 볼래?” “일단 가져오라고 하세요. 베르사체 드레스라면 30년 전 거라도 믿을 만하니까요.” “보관 상태는 좋을 거야. 언젠가 아이들이 결혼할 때 입고 싶어 하면 물려주려고 진공 팩에 보관해뒀거든. 매해 꺼내고 손질해놨으니 다른 문제는 없을 거야.” “진짜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게 좀 길이가 긴데.” “얼마나요?” “드레스 뒷자락이 5미터 정도인데…….” “앞은요?” “앞은 살짝 끌리는 정도인데 점점 퍼지는 형태야. 그리고 면사포도 3미터 정도 끌릴걸.” “뒤에 아무도 못 오게 해야겠네요.” 재키라면 반드시 엎어진다. 절대로 장담할 수 있는데 엎어진다. 3센치 이상 굽이라면 롤러블레이드밖에 신어보지 않은 재키다. 구두와는 거의 원수에 가까운 사이라, 매일 하이힐을 신겨 교육시키라고 해놨는데, 드레스 자락 까 지 길다면 절대 엎어진다. 진짜 생각 같아서는 하이힐로 위장한 새하얀 롤러블레이드를 태워 식장에 들여보 내고 싶을 정도였다. “구두를 어쩐다…….” 잔화를 신기엔 클랜과 키 차이가 심하고, 웨딩슈즈는 기본적으로 굽이 있어야 한다. 웨딩슈즈는 기본적으로 드레 스에 가려지는 게 원칙이지만 신부가 살짝 드레스 자락이 들렸을 때 그 아래로 플랫슈즈가 보인다면 완전 깬다. 간혹 신랑과 키가 비슷한 경우엔 플랫을 신기도 하지만, 클랜보다 무려 26센치나 작은 재키가 플랫을 신고 식 장 에 나타난다면 말 그대로 고목나무에 매미다. 거기다 재키가 워낙에 동안이라 기본적인 나이 차에 그 정도까 지 키 차이가 난다면 성인 남자가 열서너 살 소녀를 신부로 맞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클랜의 발목을 잘라낼 수도 없고, 재키의 다리를 잡아 뺄 수도 없고…….” 그래서 부득의하게 웨딩슈즈를 12센치의 플랫폼 슈즈로 주문을 했는데 그게 잘한 일인지 진짜 모르겠다. 혹시 모 르니 플랫도 따로 주문해놔야 할 것 같다. “일단 드레스 가져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수선은 사라가 맡겨주세요. 전, 이만 퇴근할게요.” 우영이 재킷을 들고 일어서며 그렇게 말하자 사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수고했어. 가서 쉬어.” “응. 사라도 쉬어. 킴도 오늘은 푹 쉬세요.” 내일부터 지옥도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라고 속으로만 말하며 우영은 웃으며 돌아섰다. “우영, 잘 가.” “그래. 그리고, 재키.” “응?” “결혼식 전 사고는 여기서 끝내. 오늘까지는 어떻게 감당이 되지만 내일부터 치는 사고는 수습 못해. 클랜한테 도 똑똑히 전해. 오늘 이후로 치는 사고는 나도 책임 못 져. 결혼은 너희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거든?” 우영이 모처럼 진지한 투로 설교하듯 말을 하자 재키는 알아들었는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명심할게.” “그래, 꼭 명심하길 바란다. 난 이만 간다.” “조심해서 가.” “너희가 사고만 안 치면 조심할 것도 없어.” 재킷과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사라의 빌라를 나선 우영은 그대로 1층으로 내려와 차를 몰고 자신의 집으로 향해 갔다. 원래는 닉쿤이 그의 아파트로 오라고 하며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먼저 갔지만 그 집까지 갈 기운이 없었다 . 일단, 집에 가서 좀 자야할 것 같았다. 닉쿤과의 약속이고 뭐고, 지금은 좀 쉬고 싶었다. 낮에 남의 집 청소까지 해주고 왔더니 삭신이 쑤신다. 그래도 일단 연락은 해둬야 할 것 같아 막 핸드폰을 꺼내들던 우영은 울리는 벨소리에 재빨리 send 버튼을 눌렀 다. “나, 지금 나왔어.” 당연히 닉쿤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지만 안에서 뜻밖의 한국어가 나왔다. 「저, 장우영 씨 맞으신가요?」 “아, 네. 누구시죠?” 「아, 저 기억하려나 모르겠네요. 그때 우리 고아원에 있었는데…….」 “예. 아, 제가 저번에 연락드렸었어요.” 「그 연락 받고 전화한 거예요. 통화가 돼서 다행이네요. 지금 통화 가능한가요?」 “네. 괜찮습니다.” 근처에 보이는 건물 쪽으로 차를 돌려 세운 우영은 정차 등을 켜곤 두근두근하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저번에 연락하신 일말인데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 차분히 가라앉아있던 심장이 갑자기 거세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게…….」 거기서 들려온 것은 전혀 예상도 못했던 뜻밖의 이야기였다. 치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영은 멍하니 자신의 아파트로 가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섰다. 그리고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에 가 앉아 스르르 소파에 기대 누웠다. 너무나 듣고 싶었던 소식이었다. 간절하게도, 그녀의 전화 한 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양기관인 홀트 아동복지 회를 통해 자신이 있던 고아원을 찾았지만, 그 고아원은 2년 전 한국 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으로 등록이 되지 않 았다는 이유로 사라져, 20년 전 그 고아원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찾느라 몇 달을 허비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당장에 자신이 뛰어다니면 찾았겠지만 고아원의 원장이 죽고 아들은 일본으로 이민은 간 후라 그 이상의 정보를 찾아내기 힘들었다.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사진 한 장과 그 뒤에 적힌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 딱히 이제와 가족들을 찾아 원망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어릴 때는 사실 원망도 했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냥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멍하니 부유하며 떠돌아다니는 자신을 지상에 내려줄 끈을 원했을 뿐이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켜지지 않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바라보던 우영은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갑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사진을 꺼내 그 안에 있는 작은 소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있었다. 그래서 꼭 만나고 싶었다. 하얀 자갈길을 걸어 자신을 따라오던 작은 소녀를 다 시 만나고 싶었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공허할 뿐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가끔 꿈을 꿀 때엔 그렇게나 슬 펐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이 들 뿐이다. 왜 그녀는, 어머니는 자신만 버린 걸까. 왜 자신만 살려둔 걸까. 왜 여동생을 데리고 간 걸까. 왜 그랬을까. 자신만 버린 걸 이젠 감사해야 하는 걸까. 가슴이, 심장이 삭막하게 메말라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위잉 하며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멍하니 소파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우영은 멍한 채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틀었다. 화면 위로 금발의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이상하게 귀가 멍멍하다. 조용한 게 싫어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여전히 귓가는 너무 고요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아무 소리도 안 들렸던 것 같다. 귀가 먹은 듯 멍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는 사이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주방을 돌아본 우영은 개수대 쪽을 바라 보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분명히 물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개수대는 고요하다. 물을 튼 흔적이 없다. 윗집 에서 물을 흘렸나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런 소리가 아니다.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다. 뜨거운 태양 아래 차갑고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다. 그리고 그보 다 가까운 곳에서 자박거리며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 멀리서 지나가는 차의 둔탁한 소음. 그리고 작은 여자아이의 노랫소리……. 그립고 그리운 소리. 그 날의 광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소리만은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소녀의 재잘거리는 목소리, 노랫소 리, 물이 흐르는 소리, 자갈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 그리고 손을 마주잡아 오던 작은 소녀의 체온. 『오빠』라고 불렀었다. 하나로 머리를 묶은 작은 아이가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잡고 그렇게 불렀었다. 그 작은 아이가 이제는 세상에 없다고 한다. 그 작고 작은 아이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어떻게 자랐는지 보고 싶었다. 아직도 그렇게나 손이 따뜻한지, 여전히 사랑스러운지, 지금도 자신을 보며 ‘오 빠’라고 불러줄지. 뭐가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어디가 잘못된 건지, 아무도 모른다. 그 이유를말해줄 사람이 사라진 이상, 누구 도 알 수 없다. 이젠 왜, 어째서, 라는 의문도 들지 않는다. 그냥 허망할 뿐이다. 그저 슬플 뿐이다. “불도 안 켜고 뭐하는 거야? 문도 안 잠그고.” 멍하니 앉아 눈을 감고 기억 속의 소리들을 듣고 있던 우영은 갑자기 환해진 집안과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뜨곤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바로 눈앞에 키가 큰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자신이 모르는 나라의 언어였다. “우영,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직도 안 좋은 거야?” “…….” “뭐야? 전화도 안 받고, 사라는 아까 나갔다고 하던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 혹시나 해서 온 거야. 왜 그 래? 또 청소했어?” “……누구…….” 남자의 말은 전혀 모르겠는데 자신의 입에서 자신이 모르는 언어가 흘러나갔다.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상한 말을 사용하고, 이상한 남자를 보고 있다. “누구? 어이, 너 지금 날 몰라본다는 건 아니겠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든 맑고 푸른 눈동자에 한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삐딱하고 얄미운 말투 와 표정도, 그리고 그 익숙한 얼굴과 너무나 좋아하는 푸른 눈동자까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주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닉쿤…….” 우영의 작은 중얼거림에 닉쿤이 우영의 옆에 앉으며 우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그래. 나야.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 “……동생이…….” “동생이?” “……그 애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리는 우영을 바라보던 닉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우영을 바라보며 그의 목 을 끌어안았다. “됐어. 말 안 해도 돼.” “…….” “몰랐으면 했는데, 알아버렸구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닉쿤의 목소리에 우영은 눈을 들어 닉쿤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10년 전쯤에 사라의 외가에 부탁해서 찾은 적이 있어. 사라의 아버님께서 고위직 공무원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네 이름과 생년월일로 찾아냈어. 지금까지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았어. 거기서도 넌 모 르 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안 알려준 건가 봐.” “……그랬구나. 어쩐지…… 입양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닌데……. 집도 찾았고, 학교도 찾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서 입양을 시켰을까. 지금까지 그런 건 생각도 못 했어. 엄마를 찾았는데, 분명히 살아 있는데…… 영영 못 찾은 것도 아니고 양육권 포기 각서를 쓴 것도 아닌데, 왜 날 그렇게 쉽게 입양을 시켰던 걸까, 하고 의심도 안 해봤어. 알고 있었나 봐. 무의식적으로,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건가 봐. 입양이, 그것도 국제 입양이 그 렇게 쉬운 문제가 아닌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모님이 살아 있는 이상은 입양이 쉬운 게 아니다. 집을 찾지 못했다면 몰라도 다니던 학교 와 집을 찾았다면 다른 가족이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입양을 보낸 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부모가 죽지 않은 이상은 확인이 된다면 부모의 양육포기각서가 있어야 한다. 왜 그걸 이제야 생각할 걸까. 한국이 미국보다는 덜 까다롭겠지만 적어도 부모님의 행방을 찾은 아이를 그렇게 빨리 입양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어렸으니까 몰랐던 게 당연한 거야.” “엄마도 고아였대. 그래서…… 여동생은 데리고 갔나 봐. 그런 것 같아. 선생님 말이 그러네.” 무표정한 얼굴로 우영은 오늘 들었던 내용들을 그대로 닉쿤에게 전해주었다. 담담하고 차분한 우영의 목소리에 닉쿤은 안타까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눈물은 안 나. 그냥, 그래. 아무 생각도 없어.” “진…….” “자꾸만 물소리가 들려. 개울가에서 울리는 물소리랑 동생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소리가, 계속 귀에서 울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다정한 손길에 우영은 멍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죽을 때까지 생각날 것 같아. 아니, 죽어서도 생각날 것 같아. 그 소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 “아냐. 괜찮아질 거야. 전부 괜찮아질 거야.” “그 애가 보고 싶어. 너무, 너무 보고 싶어.” “알아.” “그 아이가 자란 걸 보고 싶었는데……. 만나면 꼭 영은이라고 불러주려고 했는데.” “……울어도 돼. 우영, 울어도 되니까…… 울어.” 닉쿤의 입술과 따뜻한 호흡이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두피를 통해 전해지는 습하고 따뜻한 그 호흡에 우영은 왈 칵 눈물을 터트렸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속수무책이었다. 계속해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닉쿤이 손을 들어 우영의 뺨을 닦아주었다 . “괜찮아. 울어도 돼.” 다정한 닉쿤의 태도에 우영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닉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우 영을 안아주며 닉쿤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래, 울어. 마음껏 울어도 돼.” 닉쿤의 품에 안겨 통곡하며 우영은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진짜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자신이 냉혈한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 는데,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닉쿤의 품이 따뜻해서 그리고 그의 체온이 너무나 다정해서, 그의 품 안에 그 동안의 설움과 슬픔을 모두 쏟아내 버렸다. 밤이 흐르고 아침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울기만 했다. 서서히 해가 떠오고 있었다. 해가 잘 통하지 않는 거실 안으로도 빛이 들 정도로 해가 떠 있었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닉쿤은 가벼운 우영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내 우영이 자신이 누워 있는 소파의 테이 블 옆에 뭔가를 내려두는 소리를 들었지만 닉쿤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우영의 발걸음이 멀어진다. 그 소리를 듣던 닉쿤은 자꾸만 눈이 떠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우영이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다. 우영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하고 있었다. 절대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만은 하지 않던, 그 고지식하고 깐깐하던 녀석이 태어나 처음으로 그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 려하고 있었다. 이제 훨훨 날아갈 때였다.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 원하는 곳에 머물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잡고 싶었다. 간절하게 가지 말라고 잡고 싶었지만, 이번만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날개가 더 강하게 날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날개를 꺾어 내려앉힐 수는 없다. 타악- 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휴가다. 우영이 이제까지 받지 못했던 아주 짧은 휴가다. 그러니까, 기다리면 된다.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서서히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걸 듣던 닉쿤은 그제야 겨우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봤 다. 낯선 방의 천장을 돌아본 닉쿤은 다시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와 열쇠를 보았다. 열쇠는 이 아파 트의 현관 열쇠였다. 그리고 종이에는 아주 짤막한 말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 『Thank you.』 우영도 자신이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모를 리가 없다. 서로의 사소한 습관이나 숨소 리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이였으니까. 이제 우영의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닉쿤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 괜찮을 것이다. 모두 괜찮아질 것이다. 이건 터닝 포인트였다. 우영이 드디어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자신은 그냥 기다려주기만 하면 된다. 이 자리에서 그냥 기다리면 된다. Chapter12 「우영, 어디 있냐?」 화창한 금요일 오후,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나온 대넌의 고함소리에 닉쿤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수요일 아침부터 시작된 우영을 찾는 전화가 금요일이 되어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전화 바꾸지 말라고 비 서에게 얘기를 해뒀지만, 대넌이 상대다 보니 비서들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잠깐 여행 갔어요. 왜 그러시는데요?” 「우영이 없으니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잖아! 클랜 녀석이 사고를 쳐도 뭔가 칠 것 같단 말이다! 겨우 브 루스도 클랜을 사위로 인정했는데 아주 불안하다고!」 돼지 멱이라도 따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대넌의 목소리에 닉쿤은 아예 수화기를 멀리 떼고 느긋하게 답 했다. “그 녀석 인생이니 알아서 살라고 두세요.” 「그게 안 되니 문제지! 내가 설마 사돈에게 이렇게 벌벌 떨 줄은 몰랐다. 그래, 우영은 대체 어딜 간 거냐?」 “알면 사람 보내서 불러오시게요?” 「그게 아니라도 일단 확인은 해야지. 이런 일이 없던 애가 이러니까 불안하잖아.」 “클랜을 알몸으로 내쫓고 일 년 동안 연락이 없었어도 걱정 안 하셨잖아.” 「그 녀석은 원래 그런 놈이고.」 “하여간, 저도 모릅니다. 모처럼의 휴가니 그냥 두세요.” 「그러니까 왜 갑자기 휴가냐고? 너, 바람피웠냐?」 “……끊죠.” 「그럼 그 애가 왜 갑자기 휴가를 내고 사라져? 지금 사라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 우영이 없으니 뭐가 일이 안 되잖아.」 “결혼식 준비는 다 끝났고, 중요 사항은 메일로 지시를 전부 내려놨어요. 행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행사가 문제가 아니라, 걔가 없으면 불안하다고.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냐?」 “잠깐 쉬러 갔으니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인데 대체?」 “우영의 사생활이라 말 못합니다.” 「역시, 네가 바람피운 거냐?」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너로.」 “끊죠, 저 바쁩니다. 그리고 제발 이런 사적인 일로 전화하지 마세요. 우영은 잘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곧 돌아올 거예요.” 「네 놈 말을 어떻게 믿어?」 순간 닉쿤은 “그렇긴 하네요.”라고 작게 대꾸했다. 대넌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이해한다. 자신이라도 자기 같은 아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나 뒤통수를 맞고도 아들이라고 무조건 믿는다면 그건 대 넌이 진짜 은퇴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행이었다, 진짜. 대넌은 아직 멀쩡하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좀 멀쩡해줘야 한다. “저 지금 바쁩니다. 오늘 내로 일 다 처리해야 해요. 그럼 끊겠습니다.” 「닉쿤!」 닉쿤은 이번엔 답하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비서를 연결해,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출장 갔다고 하라고 하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우영이 사라진 지 사흘째였다. 우영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다. 확인할 것도 뭐도 없이 당연히 그곳에 갔을 것이다. 그래서 사라의 부친에게 연락을 해 필요한 정보를 모두 내주라고 말해뒀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모르길 바랐다. 우영이 아는 게 좋을지, 모르는 게 좋을지는 모르 지만, 적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희망이 필요한 법이니까. 멍하니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던 닉쿤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놀라 다시 시선을 들었다. 혹시 우영이 온 건가 해 문을 바라보고 있자 쾅 하며 문이 열리곤 산발을 한 엘레나가 사무실로 달려 들어온다. 지난 사흘 내내 가장 열정적으로 우영을 찾던 엘레나의 등장에 닉쿤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전화를 안 받았더니 이젠 직접 찾아왔다. 그렇다는 건 이제 곧 다른 사람들도 찾아올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골 고루 한다, 진짜. “넌, 또 뭐야?” “우영, 어디 갔어요?” “휴가.” “그러니까 어디로요?” “나도 몰라. 나가라, 난 바쁘다.” 닉쿤이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일부러 바쁜 듯 손을 움직이자 엘레나가 바로 닉쿤의 앞으로 다가와 책상 을 탕- 하니 내리친다. “당신이 납치한 거죠?” 책상의 상판이 가볍게 울려댈 정도로 내리친 엘레나의 힘에 닉쿤은 인상을 쓰며 엘레나를 돌아봤다. “그건 나름 창의적인 발상이군.” “나도 다 알아요! 우리 사이를 방해해서 갈라놓으려는 거죠? 오빠도 노먼하고 데이트하라고 하고, 당신은 우영 을 납치하고!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 말아요!” 갑자기 여기서 노먼이 왜 나오나 했지만 닉쿤은 재빨리 그 생가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저 쪽이야 뭘 하든 알 바 아니다. 엘레나나 세르게이가 노먼하고 데이트를 한다 해도 상관없다. 이쪽에만 피해 안 주면 그만이다. 아니 , 오히려 이 김에 그 민폐덩어리를 저 쪽에 넘기면 이쪽으로서는 브라보를 외칠 일이다. “방해한 적 없어. 그리고, 우영은 널 사랑하지 않아. 됐지? 이게 가.” 태연자약한 닉쿤의 태도에 엘레나는 조금 약이 오른 듯 불을 불렸다. “진짜 어디에 있어요? 걱정돼서 밥도 못 먹겠잖아요!” 그 말에 닉쿤이 진지한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본다.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애 치고는 혈색이 지나치게 좋다. 그러 고 보니 살도 좀 찐 것 같다. 아주 볼이 터지려고 한다. “그런 말은 네 입술에 붙은 솜사탕이나 떼어내고 해라. 모델이 웬 단 걸 그렇게 좋아해? 그리고 왜 이렇게 살이 쪘어? 너 허리 제로 사이즈 넘어갔지, 지금?” 닉쿤은 모델계의 잔혹한 생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늘까지는 최고의 모델이라 치켜세워줘도 내일 당장 허리 살이 살짝 보이면 살쪘다고 밀어내는 세계다. 디자이너가 총애하는 몇몇 모델 외엔 수퍼모델이라 해도 대부분 이 오디션을 통과해야 하는데, 제로 사이즈 모델을 추방하자느니 어쩌니 해도 살집이 잡히면 당장에 퇴출시킬 업계 다. 이 미국 안에 13-16세 사이의 제로 사이즈 모델들은 넘치고 흐른다. 전 세계에서 모델의 꿈을 품은 어 린 미 녀들이 미국을 향해 날아온다. 선택의 폭이 그렇게나 넓은데 굳이 한 사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지젤 번천이라 도 허리 살이 잡히면 퇴출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한 세계다. 어쩌면 몸이라는 것이 수단이 된다 는 점에서 가장 잔혹한 곳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엘레나가 톱이라 해도 1년이나 징계를 받은 상태에서 허리 살 까지 찐다면 당장에 퇴출이다. 에이전시에서도 손을 놔버릴 거다. 너 이제 어쩌려고 그러니, 라는 얼굴로 닉쿤이 엘레나를 바라보자 엘레나가 산발을 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당 당하게 답한다. “모델 관뒀어요. 살쪘다고 난리치길래 총 들이밀었더니 도망쳤어요. 한 번만 더 살쪘다고 먹을 거 빼앗아 가면 그 에이전시 다시는 일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했어요.” “너 포드(ford) 소속 아니야?” “맞아요.” “뉴욕 패션쇼는 그쪽이 주름 잡고 있을 텐데?” “건물에 폭탄 터트린다고 했어요.” 농담이겠지, 라고 하려던 닉쿤은 엘레나의 진지한 얼굴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얘는 진심이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하여간 나가. 나 일해야 돼.” “우영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가죠! 전화도 꺼져 있고, 집에도 없고, 위치 추적도 안 되잖아요!” 당당하게 불법적인 위치 추적을 하고 있다고 밝히는 엘레나를 보며 닉쿤은 의자에 기대앉으며 팔짱을 꼈다. “너, 지금 네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있는 불법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 거 알고 있는 거냐? 수정 헌법 100조가 발표된 지가 언젠데 그런 짓을 하고 있어?” 닉쿤의 말에 엘레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뭔가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순간 닉쿤은 얘가 ‘침해’ ‘불법’ ‘수정 헌법’등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쉽게 설명해주었다. “너 범죄자라고.” 가장 리스크가 큰 단어를 골라 그렇게 말하자 엘레나가 더 얼빠진 얼굴을 한다. “그게 왜요?” 아버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무기밀매를 하고 있는 마피아 보스에, 큰 오빠 역시 쇼비지니스계에서 일을 하지만 그 아래로 러시아 여자들을 밀반출(?)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세르게이에, 셋째 오빠는 장기 매매와 마약 밀매로 형을 받은 범죄자에, 본인도 대낮에 총 들고 설치다 사회봉사 명령까지 받았는데 그게 뭐가 대수겠냐 싶 어, 닉쿤은 역시나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래.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가. 집에 가서 책이라도 한 자 더 읽어.” “아씨! 우영 목소리만이라도 들어야죠. 불안해 죽겠단 말이에요. 우리 집에서 가정교사 하던 사람들도 막 납치 되고 그랬는데……. 저번에 우리 집 다녀간 뒤로 사라졌으니 내가 걱정 안 하게 생겼어요?” “걱정 마, 우영은 잘 있을 테니까.” “역시, 당신이 납치한 거죠? 이런 소아성애자 같으니!” “……너, 그게 무슨 말인지나 알고 쓰는 거냐?” “나쁜 사람들한테 하는 욕이잖아요!” 순간 닉쿤은 마피아들한테도 소아성애자는 나쁜 놈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기와 인신매매 및 마약 밀매와 장 기 매매, 거기다 대량 살상도 자행하는 러시아 마피아들이 나쁜 놈이라고 할 정도니 진짜 나쁜 놈들이긴 한가 보 다. “……하여간 나 바쁘다. 나가. 경비원 부르기 전에.”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그럼 내가 사람들 보내서 데려올 테니까.” “휴가 간 사람을 왜 불러와?” “그럼 그냥 알아둘 테니까 어디 있는지만 알려달라고요.” “그만 가.” “……사실은 당신도 모르는 거죠?” 의심스럽다는 듯한 엘레나의 질문에 닉쿤은 귀찮아 그냥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래, 몰라. 그러니까 네가 찾아 봐.” “닉쿤, 이런 남자인 줄 몰랐어요! 우영이 납치를 당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니! 역시 우영은 납치당한 거야. 어 떻게 해. 불쌍한 우영!” 우영과 엘레나가 왜 잘 맞나 했더니, 이런 점이 비슷하다. 둘 다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그래, 그러니까 나가라. 네 아버지나 오빠들한테 찾아달라고 해.”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한 닉쿤은 다시 바삐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 말을 쉽게 넘기지 않았다. “아버지나 오빠요?” “그래.” 그 사람들이라면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금세 찾아낼 것이다. 특히나 세르게이가 하 는 인력사업-사실은 인신매매에 가까운-의 네트워크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계속되는 전쟁 등으로 남자들이 절대 적으로 부족한 데다 러시아 특유의 기후 덕에 여자들이 워낙에 피부가 희고 팔 다리가 길고 늘씬늘씬해 전 세계 로 여자들을 팔아먹고 있으니, 그만큼 조직망도 튼튼할 것이다. 러시아 모델이나 다른 나라로 국제결혼을 알선 받아 가는 이들은 모두 세르게이를 통해야 한다. 닉쿤은 그런 의도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레치카 구로바.” 순간 엘레나가 무서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건 호시탐탐 네브즐린 가를 노리는 러시아 마피아의 보스 이름이었 다. 네브즐린 가가 기업형 마피아로 구 소련의 붕괴 이후 해산된 KGB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곳이라면 레 치카 구로바는 러시아의 경제 발전과 함께 떠오른 신예 마피아세력이었다. 레치카 구로바는 50대 가량의 나 이로 10년 전쯤 미하엘 네브즐린의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그 뒤로 절치부심의 노력으로 다시 네브즐린 가를 노 리다, 5 년 전엔가 네브즐린 가의 셋째인 이반 네브즐린을 장기매매 알선으로 실형을 받게 한 대가로 세르게이 네브즐린 에게 잡혀 죽을 뻔했다고 들었다. 그 뒤로는 한 동안 조용하다 들었는데, 왜 갑자기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오는 걸 까. “엘레나, 너 지금…….” “걱정 말아요. 제가 우영을 다시 찾아올게요. 레치카 구로바,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오빠가 그 사람도 없 으면 너무 심심하다고 밟아만 준 게 문제예요. 알렉산드르 말대로 온 몸에 구멍을 내 죽여 버렸어야 했어요.” 엘레나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나며 섬광을 발한다. 순간 닉쿤은 진짜 핏줄은 못 속인다는 생각을 했다. 저 집 남 매들 모두 보통은 넘는다. 한 명 예외가 있기 하지만 그 남자는 워낙에 자란 환경-그 사람만 유일하게 외가에서 자랐다고 들었다.-이 좋았으니 예외로 쳐야 한다. 핏줄과 환경은 속일 수 없다. 엘레나가 마피아가 되면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세르게이보다 더 거물이 될 수도 있다. 엘레나의 무식함과 무대뽀라면 가능하다. 새로운 여자 보스의 탄생인가 하며 닉쿤이 엘레나를 바라보는 사이, 엘레나가 결의에 찬 얼굴로 닉쿤을 바라본다 . “제가 반드시 우영을 구해올게요.” “응?” “그럼 전 가요.” 라며 엘레나가 순식간에 다시 문을 달려 나간다. 키가 커서 참 빠르기도 하다, 라고 생각을 하던 닉쿤은 잠시 후 상황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러시아 마피아들 사이에 전쟁의 불씨를 일으킨 듯했다. 미하엘 네브즐린과 레치카 구로바라……. “……알아서 하겠지.” 지금 남의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오늘 내로 이 모든 사항들을 처리해야 한다. 에반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빌고 또 빌어 받아낸 시간이었다. 물론, 다녀온 뒤에 복수는 두 배로 해주겠지만 말이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화면을 바라보는데 다시 한 번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인간이 있었다. “우영, 어디 갔냐?”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고함 소리에 닉쿤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까마귀, 조용히 좀 나타나.” 까마귀라 불리면 경기를 일으키는 다니카가 이번에는 그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절실했다. “우영, 어디 갔냐고? 노먼이 난리잖아. 에이먼도 나한테 전화를 해서 혹시 아냐고 묻고! 애를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내가 세르게이냐, 라고 말하려다 닉쿤은 인상을 쓰며 말을 돌렸다. “안 죽었어. 안 죽고 살아있으니 돌아가.” “그럼 어디 있는데?” “내가 밤에 데리러 갈 거야! 그러니까 제발 좀 나가라. 일 좀 하자. 일을 해야 끝내고 모시러 가지!” “어디 있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 “내가 가야 돼. 제발, 그러니까 일 좀 하자.” 일을 몰아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계속되는 사람들의 전화에 닉쿤도 짜증이 극에 달했다.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한 시간 단위로 전화를 해서 사람을 괴롭힌다. “까마귀, 그만 가라. 여기 놀이터 아니거든?” “대체 어딜 간 건데? 그건 알아야 가지.” “그런 게 있어.” “뭐가? 너 바람피웠냐?” “왜 다들 얘기가 거기로 가?” “안 그러면 우영이 갑자기 휴가를 내고 뜰 리가 없잖아. 네가 데리러 간다는 것도 수상하고. 아무리 봐도 이상 해. 그 꼼꼼한 녀석이 이런 거사를 앞두고 쉰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사실대로 말해. 너 바람피웠지?” 라며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드는데 바람피웠다간 그대로 링 위에 세워두고 샌드백처럼 두들길 기세다. “바람 안 피웠어. 그런 사정이 있어.”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뭐냐고?” “진 사생활이라니까! 왜들 그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아?” 닉쿤이 성질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다니카가 아닌 다니카의 뒤에서 문이 열리며 느긋한 남자의 목 소리가 들려온다. “남의 사생활이 아니니까 그렇지.” 문틈으로 진한 회색빛의 로로피아나 정장을 입은 에이먼이 들어선다. 그를 보는 순간, 닉쿤은 아까 엘레나가 달 려 들어오던 순간 예감한 것이 서서히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이를 갈았다. 엘레나 왔고 까마귀 왔다. 그리 고 에이먼도 왔으니 이제 클랜하고 재키, 그리고 클레어와 클레어의 약혼자인 맷, 그리고 사라가 남았다. 어쩌 면 노먼도 달려올지 모른다. 거기다 브루스와 세르게이까지 온다면 더는 참지 못하고 회사 문 닫아버릴 지도 모른 다 . 닉쿤은 기본적으로 돈도 안 되는 고객들이 사무실에 들락거리는 걸 상당히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형은 또 왜 왔어? 안 바빠?” “바쁘지. 겨우 시간 내서 온 거야. 대니, 앉자. 닉쿤, 너도 이리 와.” “나 바빠. 말했잖아. 미치게 바쁘다고.” “좀 바쁘다고 안 미쳐. 바쁘다고 미치면 허르베지쿨 저택은 정신병원이냐? 와서 앉아.” 사무실 안의 놓인 소파고 가 앉은 에이먼이 그렇게 말하자 에이먼의 말에 따라 얌전히 그 옆으로 다가가 앉은 다 니카가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 비슷하긴 하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는 다니카를 에이먼이 슬쩍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다들 개성도 강하고 한 성격씩 하는 통에 가족들이 모두 저택에 모여 있을 때는 늘 시끌벅적하긴 했었다. 클랜은 사고치고 닉쿤은 그 런 클랜을 더욱 부추겨 아버지를 열 받게 만들고, 클레어는 잔소리를 하면서도 은근히 동조하고, 에이먼은 혀를 차며 그들을 지켜보다 나중에 같이 걸려들면 머리에 핏대 세워가며 자긴 결백하다고 아버지와 싸우는 게 일상 이 었다. 그러고 보니 허르베지쿨 저택에 초대를 받은 이들의 대부분이 다시는 그 집을 찾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긴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두 허르베지쿨 사 남매를 부러워했다. 유산상속 문제로 사교계를 시끌시끌하게 만드는 일 도 없고, 네 남매 모두 외모며 능력-본인의 바람과는 무관하게-이며 성격이며, 어디 하나 빠질 데 없이 출중했 다. 재클린과 클랜의 결혼소식에 사교계 아가씨들이 모두 재키가 부러워 몸 져 누울 정도로 허르베지쿨 가는 사 돈 맺 고 싶은 가문 1위에 랭크된 집안이었다. 큰형의 명령인지라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와 앉은 닉쿤은 앞에 앉은 에이먼과 다니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뭔데?” “너, 바람피웠냐?” 대넌과 다니카와 약속이라도 했는지 에이먼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자 닉쿤은 입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다들 내가 바람피우길 바라는 모양이군.” 닉쿤이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하자 순식간에 다니카의 표정이 굳어진다. “피워봐. 남아공 우리 광산에 처박고 묻어버릴 테니까.” “그럼 왜 이렇게 난리들이야?” “그게 아니면 그 꼼꼼한 녀석이 증발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지!” “이유가 있어. 그러니까, 그냥 둬.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무슨 정리냐고?” 더는 못 참겠는지 다시 고함을 내지르는 다니카를 보며 닉쿤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까마귀, 귀 아프다. 네 목소리 진짜 너무 데시벨이 높아.” “그럼 말해!” 말 안했다간 멱살을 쥐고 그대로 이 사무실 창밖으로 내던질 다니카의 기세에 닉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실직 고 했다. “한국에 갔어.” 순간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에이먼은 조용히 닉쿤을 응시했고 다니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닉쿤과 에이먼 을 돌아보다 다시 닉쿤을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거긴 왜?” “……어머니랑 동생을 찾았어.” “잘됐네, 그거!” 다니카는 왜 그런 좋은 소식을 안 알려주려 했냐는 듯 의아한 듯 닉쿤을 바라봤지만 에이먼은 알겠다는 듯 고개 를 끄덕이며 닉쿤에게 물었다. “그 소식, 너도 알고 있었냐?” “응. 형도?” “혹시나 해서 5년 전쯤 조사해봤어. 클레어도 얼마 전에 알았다며 펑펑 울면서 전화했더라고. 아마, 클랜도 알 고 있을걸.” 다른 건 몰라도 생각하는 건 비슷한 남매들이었다. 언젠가 언젠가라고 막연히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생각나는 즉시 행동하는 추진력도 비슷하다. “내가 이겼네. 난 10년 전이니까.” “사라도 알아?” “응.” “아버지는?” “아버지만 모르실걸.” “저런. 아버지는 여러모로 외톨이로군.” 자신의 부친에 대한 연민을 늘어놓으면서도 에이먼의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저게 진짜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얼굴인지 고소해 하는 사람의 얼굴인지 잘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언제나 그런 에이먼의 단점을 지적하던 다니카는 이번에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에이먼을 바라봤지만, 이내 닉쿤을 바라보며 자기만 무슨 소리인 지 모르는 이 상황에 대해 물었다. “뭔데? 뭘 알았는데?” “우영이 돌아오면 직접 들어. 우리가 할 말이 아니니까.” “궁금하게 해놓고 우영에게 들으라니! 너희들 자꾸 이럴래?”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다니카의 성미를 잘 알기에 에이먼이 다니카를 돌아보며 달래듯 말한다. “대니,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가족의 아픈 구석을 함부로 말하는 게 아냐. 신나서 남의 불행을 떠들어대는 건 저열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리고 이건 특히나 우리가 함부로 말할 사항이 아냐. 우영이 돌아오면 직접 들 어.” “아픈 구석이라니? 혹시 어머니랑 동생이 죽기라도 한 거야?” “……직접 들어. 충격이 꽤 컸을 테니까, 돌아오면 너도 잘 달래주고.” “아, 대체 뭐냐고? 나 다음 주에 출장간단 말야.” “그럼 나중에 들어. 닉쿤, 넌 언제 데리러 가려고? 어디 있는지는 알아?” “대강.” “내 전용기 써. 그리고 잘 달래서 데려와라. 클랜이나 클레어한테는 말하지 마. 클레어 알면 또 종일 울겠다.” “알았어.” 닉쿤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에이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간다.” “가. 까마귀, 너도 좀 가.” 에이먼에게 답을 한 닉쿤이 다니카를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말하자 다니카 역시 신경질적으로 받아친다. “간다, 가! 나라고 네 얼굴 쳐다보고 있는 게 기분 좋은 줄 알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다니카가 에이먼의 뒤를 따라 움직이자 닉쿤은 그제야 드디어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드디어 일을 끝내고 공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문을 나서는 걸 확인한 닉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자신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다시 한 번 문이 열렸다. 예상했던 바라 닉쿤은 천천히 문을 돌아봤다. “올 거면 한꺼번에 와. 왜 차례대로 와?” 문을 돌아본 닉쿤은 예상 대로 문 앞에 선 문제의 두 명을 보곤 팔짱을 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내는 클랜을 보며 닉쿤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너라면 받고 싶겠냐?” “진 어디 갔는지 아직도 몰라?” “몰라.” 결혼식 이틀 전에도 여전히 우영을 찾아 삼만 리 헤매고 다니는 클랜에게 딱 잘라 닉쿤이 모른다고 말하자, 옆에 따라오 클랜의 반토막만한 재클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닉쿤에게 묻는다. “우리 때문에 화나서 집 나간 거야?” “알긴 아는구나.” 주원인은 그게 아니지만 클랜과 재키의 말썽도 한 몫한 게 분명해 닉쿤이 딱 잘라 말하자 재키가 시무룩해진다. “그보다 재키 너, 다이어트 좀 하는 게 어때? 웨딩드레스가 들어가긴 해? 며칠 전보다 더 찐 것 같은데?” 아주 살이 올라 토실토실한 재키를 보며 그렇게 말하자 재키가 더 시무룩해진다. “내가 살 쪄서 휴가 간 거야?” “응.” “나 살 빼면 온대?” “결혼식에는 참석할 거야. 그러니까 드레스는 들어가게 조절해. 당일 네 드레스의 옆구리가 터지면 우영이 너희 둘을 폭죽에 묶어서 쏘아올려버릴 테니까.” 우영이 안 하면 자신이 할 것 같아, 닉쿤이 진지한 투로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클랜이 재키를 돌아보더니 시 비를 거는 듯 내뱉는다. “무슨 소리야, 그게? 임산부한테.” “너희가 한 짓들을 생각해 봐. 생각이 없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어떻게 웨딩드레스가 안 들어갈 정도로 살을 찌워?” “임산부니까 잘 먹어야지! 우리 애 잘못되면 형이 책임질 거야?” “그런데 왜 배는 안 나오고 옆구리로 찌는데? 식장에서 드레스 입는데 헐크 나오게 하지 말고 체중 조절하고 준 비나 잘해. 우영은 곧 돌아올 거야. 오자마자 혼나지 말고.” “진짜 온대?” “올 거야. 그러니까, 그만 가. 나 바빠.”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으니! 우영이 사라졌는데 아무렇지 않다니!” 버럭 고함을 내치는 클랜의 재키가 잡아끈다. 그러더니 클랜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인다. 매미가 고목나무에 매달 려 소곤거리며 뭔가를 말하자 순간 클랜의 눈이 번쩍인다. “설마…… 형, 바람피운 거야?” 오늘 하루 종일 하도 들어 이제 닉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짜증이 날 뿐이다. “……꺼져.” “그럼 뭔데?” “그런 사정이 있어. 우영 돌아오면 직접 들어. 셋 셀 때까지 안 나가면 경비원 부른다. 하나, 둘.” “아, 알았어! 간다, 가! 하여간 멀쩡하다 이거지?” “그래. 그러니까, 좀 가!' “알았어. 재키, 가자. 몸조심해.” 겨우 임신 3개월에 나이도 어려 펄펄 나는 어린 신부가 엎어지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데리고 나가는 클랜의 꼴에 닉쿤은 혀를 찼다. “썩을 것들.”이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우영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려 했다. 순간, 저 멀리서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노크씩이나 하는 게 아무래도 노먼 같다. 사라와는 오전에 통화했으니 사라는 아니다. 노먼이 무례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깍듯이 지킨다. “네.” 짧게 답하며 다시 화면을 보는데 끼익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닉쿤은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험악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영, 안 죽었어. 그러니까 꺼져.” “……우영이 다쳤나?” 묵직하고 낮은 음성에 닉쿤은 화면에서 눈을 떼고 앞을 올려다봤다. “아, 존.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종일 불청객들이 많아서요.” “무슨 일이라고 있나?” “제 비서가 한국으로 휴가를 가는 바람에 다들 난리가 나서요. 워낙에 유능해야죠.” 닉쿤은 부드럽게 말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마주잡는 백발의 노신사에게 자리를 권했 다. 그리고는 애써 웃으며 오늘 내로 처리해야 할 일이 줄어들었음에 환호했다. 아무래도 일이 너무 잘 돌아가 는 듯했다. 우영이 빨리 자기 찾으러 오라고 기도라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시죠?” “이건 뭐야?” 콘크리트를 깔고 깔끔하게 개조한 개울을 바라보며 우영은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틀 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연락을 해온 고아원 선생님을 만나러 택시를 타고 안양으로 향했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은 그녀와 거기서 한참 이야기를 하고, 그녀가 건네준 집 주소 하나 달랑 들고 그 날로 강원도 로 내려오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결국 근처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짐을 챙 겨들고 호텔을 나와 안양역에서 기차를 차고 춘천으로 향했다. 표를 어떻게 사야 하는 건지 몰라 한참을 헤매다 결국 오후 기차를 타고 내려와 춘천역에서 또 한 바탕 헤맨 뒤에 바보 같이 지갑까지 잃어버릴 뻔하는 촌극을 연 출하며 겨우 겨우 택시를 타고 홍천으로 왔다. 하지만 역시나 시간이 늦은 데다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찾기도 힘 들어 호텔에 짐을 풀고 식사를 한 뒤 메일을 확인했다. 결혼식 준비는 순조롭다는 사람들의 메일을 하나 하 나 확 인하고 최종점검에 대한 세세한 부분을 설명해 메일을 보낸 뒤 아침 일찍 찾아온 곳에서 우영은 멍하니 강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다, 이번엔 뒤돌아 낮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동네를 바라봤다. 관공서에 들러 물어보니 그 집은 이미 재개발에 들어가 집이 모두 허물어졌다고 해 집은 포기하고 왔는데, 설마 그 개울까지 이렇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 하얀 자갈들도, 매미 소리가 없다. 저 멀리 보이던 산은 어디로 갔는데 그쪽에는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 다. “너무 변했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근 이틀간에 걸쳐 겨우 찾아온 곳에서 본 광경에 우영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온 것인데, 충동의 결과는 이런 거였다. 뭔가 충격적인 기분에 우영은 멍하니 고요히 흐르는 개울을 바라봤다. 여름의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던 그 자갈들도 시원하게 흐르던 개울물도 없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겠네.” 진짜 무작정 사고를 치고 나와 항국행 비행기에 올라타 여기까지 온 대가가 이거라니 허망하고 또 허무했다. 사 실 이번에는 진짜 내 마음 가는 대로 한 번 해보자, 하고 나왔지만 비행기를 타는 순간 솔직히 이대로 가도 되나 , 안 되나 내심 조마조마했었다. 클랜과 재키의 결혼식도 끝나지 않은 채 무작정 떠나와 마음이 무겁다기보다 두 근두근거렸다. 회사 역시 무단 결근이니 해고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순간 이제 뭐 먹고 사나 하는 생각에 우영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순간에조차 현실적인 자신이 싫기는 했 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이 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가볍게 며칠 오갈 생각으로 여 행 용 백에 간단한 옷과 현금, 그리고 여권만 챙겨 나온 채였다. 한국의 물가가 의외로 높아 돈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런 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어쩌면 노먼 의 말대로 자신은 진짜 심하게 감성이 떨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련한 향수나 슬픔을 느낄 줄 알았는데 그냥 황당하다. 공포영환지 알고 봤는데 멜로 영화더라, 할 때의 기분 같았다. 멍하니 강을 바라보던 우영은 다시 걸음을 돌려 길을 향해 나갔다. 보고 싶었던 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광경 이었다. 콘크리트로 가득 찬 개울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하얀 자갈밭도 매미 소리도, 여름의 녹음도 없는 그곳 은 더 이상 자신이 기억하는 그곳이 아니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것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길고 긴 시간이 흘러 남은 것은 추억뿐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사진 한 장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우영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에 오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모든 게 변화하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막이 터지며 세계가 바뀔 줄 알았다 . 하지만 아무 것도 변화하는 건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장우영이라는 이름보다 우영 케이먼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 하고, 지금 이 자리에 선 순간에도 실직을 걱정하고 있었다. 바뀌는 건 없었다. 장우영이든 우영 케이먼이든 자신은 자신이었다. 공포영화광에 소심하고 감수성 제로의 영문 학도. 재능이 열정을 따라가지 못해 결국 비서가 된 불운아 같지만, 지금의 일도 나름 사랑하고 있고 누구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어차피 누구나 가슴 속에 한 가지 한은 품고 살아간다. 자신은 그 부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클 뿐, 잘못 되지 않았다. 크냐 작냐의 차이일 뿐이다. 닉쿤은 열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닉쿤에게 물을 수는 없어 인터넷으로 이전 신문 기사들을 찾아 봤다. 아는 사 서에게 부탁해 시청에 있는 신문 란에서 닉쿤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전후로 신문을 무작위로 카피해 보내달라고 했었는데 우영이 처음에 본 것은 아주 특이한 타이틀이었다. 「죽음을 부른 사진. 기자들의 사생활 침해 이대로 괜찮은가?」 그리고 그 하단에는 둘째 아들 닉쿤 벅 허르베지쿨의 생일 파티 준비 중 크레인을 타고 담을 넘어온 사진 기자에 게서 아들을 감싸던 퍼기 허르베지쿨이 실수로 계단을 잘못 디뎌 목뼈 골절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당시 그녀의 옆에 있던 건 닉쿤뿐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닉쿤이 전화기를 찾으러 달려가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퍼기 허르베지쿨이 임신 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허르베지쿨 가의 대 변인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 기사를 본 우영은 어쩌면 진짜 닉쿤의 다른 동생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허르베지쿨 사람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죽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라를 배려해서라고 생 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너무 아팠던 기억이라 서로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빛을 보지도 못하고 죽은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차마 꺼낼 용기가 없었던 거다. 어쩌면 그래서 대넌이 사라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한 번 잃어본 사람은 그 아픔을 아니까 , 혹시라도 같은 사건이 되풀이된다면 견디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대넌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잃어봤으니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서 늘 두려웠으니까. 또 다시 버림받을까, 다시 혼자 남겨 질까, 남의 등을 보는 것도 무서워 참지 못했었으니까.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그것도 아주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었다. 뒤돌아서 힘없이 팔을 늘어트린 우영은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 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자박거리는 가벼운 소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무서워 차마 돌아보지도 못한 우영은 그대로 멈춰선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축 늘어진 왼손에 작은 소녀의 손이 닿았다. 그 생생한 손의 감촉에 그 손을 잡으려던 우영은 어느새 허전해진 손에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갈도 없었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도 사라졌다. 그저 방금 전 본 삭막한 광경만이 스 쳐갈 뿐이었다. 하지만 손의 온기는 남아 있었다. 마치 방금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은 듯, 손바닥 안이 따뜻했다. 아주 작고 작 은 소녀의 손이 스친 듯 그 손 안은 따뜻했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기억은 그곳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 소녀가 있었다. 영원히 늙지 않은 채, 추억 그대로 그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자신 역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가족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그들이 살아있는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멍하니 뒤를 돌아보던 우영은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안녕.” *** 에반의 도움으로 간신히 시간을 빼 나온 닉쿤은 서둘러 JFK공항으로 향했다. 플로리다나 다른 주에 있는 별장들 은 아예 활주로가 있어 오가기가 편한데, 뉴욕 근방의 저택에는 활주로가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땅도 땅이지 만 소음 때문에 활주로를 짓는 게 어려웠다. 아예 근방의 땅들을 모조리 사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닉쿤은 시 간을 확인했다. 에이먼이 전용기를 준비해놓은 상태라 출발 시간은 상관없지만, 한국과의 시차를 생각해야 한다. 오후 8시가 다 되어 가는데 지금 출발하면 한국 시간으로 자정에나 도착할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을 찾는 건 그거대로 문제였 다 . 일단 사라의 아버지와 지인들을 통해 사람을 파견해 우영의 위치를 파악하라고 해둔 상태지만 그 사람과 접선 해 움직이는 데에만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한국이 작아서 다행이군.” 중국 규모였다면 아마 며칠은 참으러 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한국은 차를 몰고 하루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간다니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도로망이 상당히 꼼꼼하게 잘 퍼져 있다니 진짜 다행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우영을 찾아 돌아오는 게 급선무다. 사실, 우영이 돌아올 거라는 건 믿고 있지만 그게 언제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우영이 예약한 돌아오는 비행기가 바로 한 달 뒤라는 게 문제였다. 다른 건 몰라도 클랜의 결혼식에만은 참석해줬으면 했다. 가족으로서 꼭 와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상은 자신이 못 견딘다. 겨우 사흘 못 봤다고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항상 옆에 있었기에, 우영이 없는 공간 이 너무 컸다. 그리고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불청객들의 반란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사흘 안에 빼빼 말라 죽을 것이다. 들고 있던 핸드폰의 옆에 걸린 작은 장식품을 본 닉쿤은 싱긋 웃었다. 아마 이걸 듣는다면 당장에 달려오고 싶어 질 것이다. *** 멍청했어, 라고 중얼거리며 우영은 멍하니 인천 공항의 로비에 서 있었다. 금요일 오후에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와 밤에 서울 관광을 잠깐 한 뒤 토요일 오전에 인천으로 와 한 달 뒤의 날짜로 예약한 항공권을 취소하고 오늘 내 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을 사려는데, 없단다. 마침 휴가 기간이라 비행기 편이 석 달 전부터 모조리 예약이 된 상태라고 한다. 어떻게 자리가 안 나겠냐 해도 하루에 운행되는 비행기 편은 한계가 있고 다들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사람들인데다, 결정적으로 우영 말고도 대 기자 명단에 서른 명 가까이가 올라가 있다고 한다. “돌아버리겠네.” 어쩌면 이리도 지지리 복이 없을까. 그래도 혹시나 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고 선불로 산 핸드폰을 든 채 공항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뉴욕과 한국의 시차는 14시간이었다. 뉴욕이 14시간 느리다. 뉴욕 직항의 경우 13 시 간 정도가 걸리니 여기서 일요일 오전 9시까지는 출발해야 한다. 가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예식장에 도착 해 야 하니 반드시 9시까지는 가야 한다. 애초에 클랜 결혼식까지는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더럽게 꼬였다. 일요일 오전까지 티켓이 없으면 어쩌나 해 샤워를 하고 나온 뒤에도 우영은 안절부절 못했다. 결혼식은 꼭 가야 한다. 클랜과 재키가 반드시 무슨 사고를 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 외에도 걱정되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자신이 지시해놓은 대로 정상적으로 업무가 돌아가고 있는지, 사라와 대넌은 진짜 화해를 했 는지, 그리고 세르게이가 노먼한테 또 이상한 걸 보내지 않았는지 걱정되는 것 투성이었다. 그 동안은 자신의 소심함이 하도 버림받아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젠 그 소심함이 천성이라는 걸 알겠다. 자신은 타 고나길 소인배로 타고난 인간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도 절대 대범해질 수는 없었을 거다. 어차피 회사는 관둘 생각이었지만 실직을 하면 당장에 뭐해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저축은 꽤 있지만 그 건 어지간하면 안 건드는 쪽이 좋다. 차라리 닉쿤의 아파트로 들어가 먹여 살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 문 득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닉쿤에게 받은 뒤 계속해서 목에 걸고 있던 거였다. 사실은 이걸 받으면서도 자신이 이걸 끼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 반지를 낄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지를 끼는 쪽으로 점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리 복잡하게 따질 거 있나 하 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제야 저 엷은 유리막을 깨트릴 용기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좀 더 넓은 눈 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어중간한 채 부유하는 게 아닌, 어차피 할 거라면 확실히 해버리자라는 생각에 침대 맡에 앉아 목걸이를 풀었다. 느린 동작으로 체인에 걸린 반지를 꺼내 왼손 약지에 끼던 우영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닉쿤……. 썩을 놈.” ***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역시나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전용기에서 내려 입국심사장에서 빠져나온 닉쿤은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채 선글라스 하나만 낀 채였다. 검은색의 커다란 배낭을 우영 닉쿤은 새벽 이 라서인지 한산한 공항을 돌아봤다. 저 멀리 보이는 시간을 확인하니 일요일 새벽 1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 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6시까지는 우영을 찾아야 한다. 아직 뉴욕시간에 맞춰놓은 시계를 보며 다시 확인을 한 닉쿤 은 안내원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약속장소를 찾았다. 위성 폰으로 전화를 해 정확히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한 상대들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시간을 확인하던 닉쿤은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세 명의 남자를 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닉쿤 벅 허르베지쿨?” 조금 어려 보이는 통역사인 듯한 남자가 그렇게 묻자 닉쿤은 웃으며 그에게 대꾸해주었다. “네.” “어서 오십시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폐를 끼치게 돼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 안에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우영 케이먼 씨를 찾으시죠?” “네.” “바로 근처에 계십니다. 혹시나 해서 알려주신 크레딧카드 번호로 추적을 하고 있었는데 몇 시간 전에 근처 공 항에서 체크인을 했습니다.” 그렇게나 서로 어긋나더니 이럴 때엔 기가 차가 잘 맞는다 싶어 닉쿤은 그냥 웃어 버렸다. 역시 운명의 여신이 서로를 이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내해주시겠어요?” “네.” 언제나처럼 승리는 닉쿤의 것이었다. *** “노먼, 이 망할 자식…….” 딱히 할 일도 없고 잠도 안 와 침대에 누워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한 노먼의 소설을 읽은 우영은 분노를 터트렸다. “주인공이 분열증 환자라고!” 역시 세르게이에게 팔아넘기길 잘했다고 소리치며 우영은 베개를 퍽퍽 내리쳤다. 사실 조금 감동했었다. 아니, 사실은 많이 감동했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해 완전 몰입해 울고 웃고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했는데, 알고 보니 소년이 분열증 환자였단다. 한 마디로 거울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던 정신병자였던 거다. 환상 동화인 것처럼 사람을 푹 빠지게 만들더니 막판에 사이코 호러물로 탈바꿈했다. 거기다 더 가관인 건, 소설 안의 세계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소년의 시각으로 서술해 깜빡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당 뇨 환자라 꼬박꼬박 시간에 맞춰 주사를 맞아야 하는 남자였고, 어머니는 창녀가 아니라 새벽조에 근무하는 간호 사였다. 그리고 소년은 학대 받지 않았다. 소년이 발작을 일으킬 때 아버지가 소년을 말리려 끌어안고, 진 정제를 투여하거나 발작을 막기 위해 손목을 묶어놓은 것뿐이었다. 소년이 너무나 그의 시선에서만 상황을 서술 해 깜빡 넘어가버렸다. 거울을 보고 분열증이 심해지는 걸 안 아버지가 그 거울을 깨버리자 소년은 깨진 거울 조각을 들어 아버지를 살 해한다. 그걸 본 어머니는 결국 소년을 정신병원에 보내고, 소년은 거울을 금지 당한다. 마지막은 유리창을 바라 보며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소년의 모습으로 끝난다. 소년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 었 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나르시즘에 빠진 사이코 소년 살인마가 나오는 호러소설이었다. “내가 정신병자냐!” 완전히 자신을 소년과 동일시했던 우영은 마치 자신이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분열증 환자가 된 듯 한 기분에 베개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럼 그렇지! 네가 쓸만한 짓을 할 리가 없지, 노먼 맥캐인! 세르게이한테 시집이나 가라!” 물론, 세르게이가 받아준다면 말이지만. “역시 대학 때 저 자식을 죽였어야 했어. 살려두는 게 아니었어.” 소년을 안타깝게 여겼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정신병자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듯해 아주 기분 이 안 좋았다. 어쩐지 서평 중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어쩌다 해서, 당연히 소년이 겨우 유리를 깨고 넘어갔는데 그 세계가 현실보다 더 비참하다거나 하는 게 아닐까 했는데, 충격적 반전이라는 게 소년이 정신병자라는 거라 니 . 거기다 표지는 또 뭐냐. 책의 표지는 마치 환상동화집처럼 발랄하다. 여기저기가 헤지고 더러워진 누더기를 입은 작은 소년이 거울 속으로 웃으며 달려드는 그림이었다. “이래놓고 내용은 사이코 스릴러냐? 편집자 나오라고 해! 표지 디자인 누구야?” 이걸 애들이 읽는다고 생각하니 좀 끔찍하다 생각하며 다시 표지를 보던 우영은 섬뜩함에 슬쩍 옆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표지 안에 웃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살벌하다.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 굴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맑아 보이던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에드 기인의 얼굴처럼 보였다. 게다가 소 년이 입고 있는 누더기 옷에 묻은 얼룩이 지금 보니 빨간색이다. 갈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피 색 같 다. “……표지 잘 그렸네…….” 이 일러스트 작가는 천재야, 라고 중얼거린 우영은 침대 한 가운데에 놓인 책을 보곤 슬쩍 옆을 보다, 손을 뻗으 려다 휙하니 돌아앉아 다리를 뻗어 책을 툭툭 쳐 침대에서 떨어트렸다. 지금까지 제일 무섭게 본 소설이 로빈 쿡 의 돌연변이(Mutation)이었는데 이번에 이 소설이 뒤집어버렸다. 오랜만에 돌연변이를 떠올린 우영은 순간 몸서리를 쳤다. 어쩌면 세르게이가 그 돌연변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똑같이 생긴 동생들이 줄줄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돌연변이랑 비슷하다고 해서 바들바들 떨며 본 존 카펜터의 ‘저주받은 도시(Village of the damned)’는 솔직히 어이가 없어 비웃긴 했지만-사실 존 카펜터는 절대 취향이 아니다. 존 카펜터와 다리오 아르젠토는 왜 존경받는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조지 로메오는 찬사 받아 마 땅 하고 토브 후퍼와 스튜어트 고든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할 크리에이터들이지만 존 카펜터는 아동용의 선명한 화 면이 점수를 반은 깎아 먹고 들어가고, 다리오 아르젠토는 항상 여자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주인공이지만, 결 국은 여자들이 비명 지르는 것만 보여주다 끝난다.- 그걸 본 후라서인지 은발에 새파란 눈을 가진 세르게이 주 니어들 이 진짜 돌연변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존 카펜터도 그 집 아이들을 보고 그 영화를 찍은 건지도 모른다. 영화와 소설 속의 주인공 아이들은 모두 쌍둥이 같은 외모를 하고 기이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었는데, 현실 세계에서의 세르게이 주니어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기이한 취향을 가진 마피아들일지도 모른다. 어 쩌면 미하엘 네브즐린은 전 세계 아이들의 얼굴을 자기 아들들 얼굴처럼 만들려고 그렇게 아들을 많이 낳은 건지 도 모른다. 그 아들들이 결혼해 또 다시 그 만큼 아이를 낳고, 그 아들들이 결혼해 또 그만큼 아이들을 낳으면 … …. “언젠가 뉴욕이 세르게이 주니어들로 꽉 찰지도 몰라.” 갑자기 뉴욕으로 돌아가기 싫어진 우영은 서둘러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틀었다. 진짜 방 안이 조용하니 자꾸 만 이상한 쪽으로만 상상을 하게 된다. 다행히 외국 방송들이 꽤 나와 아무 데나 틀어놓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룸서비스입니다.” 룸서비스를 시킨 기억이 없던 우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갔다. 그리고 잠겨 있는 문을 밀어 열었다. “룸서비스 안 시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던 우영은 앞에 선 금발의 익숙한 얼굴을 한 남자를 보곤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자 그 가 입술을 검지로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핸드폰을 들어 그가 늘 옆에 달고 다니는 녹음기의 버 튼을 눌렀다. 아주 작은 소형 녹음기 안에서 너무나 그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영, 무조건 건강히 돌아와야 된다. 마음 정리하고, 천천히 돌아와. 사랑한다.」 사라였다. 먼 거리에서 녹음을 했는지, 아니면 전화의 내용을 다시 녹음한 건지 통화감은 멀었지만 사흘 만에 듣 는 영어에, 그리고 다정한 사라의 목소리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우영, 무조건 돌아와! 닉쿤이 바람을 피운 거면 내가 죽여 놓을 테니 돌아와도 된다. 건물이 싫다면 섬을 사주 마!」 무조건 돈으로 해결하려는 눈치 없는 남자, 대년의 목소리가 울리자 우영은 웃고 말았다. 역시나 항상 일관성이 있는 남자다. 「음…… 그래. 일단 돌아와라. 마음 정리 잘하고, 웃으면서 보자. 세르게이한테는 이상한 선물 보내지 말라고 내가 말해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무뚝뚝하고 감정이 없어 보이는 그 어조는 분명 에이먼이었다. 「우영, 우리 때문에 화났지? 미안해. 그래도 빨리 돌아와 줘. 우영이 없으니 어쩐지 결혼식 때 비가 내릴 것 같 아. 아니면 재키의 드레스가 찢어지거나 테이블에 올라온 캐비어가 상했다거나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빨리 와. 나도 내가 불안해.」 이번엔, 이제야 내 노고를 알았냐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클랜의 음성이었다. 「어서 돌아와, 우영. 사랑해.」 짤막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목소리는 클레어의 것이었다. 「우영, 빨리 돌아와요. 나 영어 공부 열심히 할게요.」 라는 건 엘레나. 「어이, 형제. 내 소설 다 읽었지? 나 죽이고 싶으면 빨리 돌아와라. 단 거울을 뛰어넘을 각오는 다지고.」 라며 낄낄거리는 건 역시나 노먼이었다. 「다이아몬드 감정 끝냈어. 이거 끝내주는 상품이야. 어서 돌아와. 나도 들고 있기 무섭다. 보고 싶다.」 이번엔 다니카. 그리고 다음은……. 「우영, 지금 돌아오면 다 용서할 테니 이 음성 듣는 즉시 돌아와라. 이번 주 넘기면 넌 해고야.」 화난 듯 약간 높아진 음성에 억양 역시 억세지만, 걱정스러운 듯한 그 음성은 분명 에반이었다. 에반도 역시 일 관성이 있는 남자다. “그리고 마지막.” 이라며 녹음기를 끈 닉쿤이 싱긋 웃어 보인다. “나와 함께 있어줘(Here with me.).”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한 걸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를 보며 우영은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남기고 온 말은 Thank you 였다. 그리고 닉쿤의 인사말은 Here with me.다. 기가 막힐 정도로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늘 함께 있고 싶었던 건 나였어.” 노래의 가사처럼 떨어져선 잠들 수도 떠날 수도 숨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건, 우영 자신이었다. “그럼, 돌아와 줘. 기다리다 지쳤어.” 싱긋 웃는 그 얼굴에 우영은 팔을 뻗어 닉쿤을 끌어안았다. 그립고 그리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그리운 사 람이, 지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자신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먼저 와줬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 먼 땅까지 자신을 찾으러 와줬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슬퍼서가 아니라,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클랜의 결혼식 전에 미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전용기 타고 왔지?” “응.” “다행이다. 내일 아침까지 비행기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어이, 너 나보다 전용기가 반갑다는 거야? 저 먼 타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반갑고 전용기도 반갑고.” 우영이 싱긋 웃으며 밝은 음성으로 그렇게 답하자 닉쿤이 우영을 슬쩍 밀어내더니 이마를 툭 친다. “아주 건방져졌어, 못 본 사이에.” “결혼식엔 참석해야지.” “좀 마른 것 같다.” “응. 못 먹었어. 너무 더워서.” 우영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닉쿤은 우영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네가 결혼식 전에 못 오면 다 날 갈아 마실 기세야.” “널 왜?” “다들 내가 바람피워서 네가 집 나갔는 줄 알거든.” 상상도 못했던 발상에 우영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오, 그거 괜찮은데? 그렇다고 할까?” “그랬다간 다음 날 오전 신문에 내 사체가 발견됐다고 들 거야. 그건 참아.”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우영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닉쿤이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히며 삐 리리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 둘뿐인 방 안에 남자 우영은 슬쩍 닉쿤의 뒤를 돌아봤다. “……둘뿐이네.” “그래, 모처럼 둘뿐이다. 아무리 그것들이라도 한국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그 동안 방해를 받은 게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이를 가는 듯한 그 말에 우영은 웃으며 이번엔 그가 먼저 닉쿤에게 키스를 했다. 가볍게 닿는 그 입술에 닉쿤은 우영의 허리를 안으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가볍게, 장난을 치 듯 입을 맞추며 침대 쪽으로 간 닉쿤은 우영을 먼저 침대에 눕게 하고는 싱긋 웃었다. “한국까지 날아온 보람이 있는 걸?” “이게 보람이냐? 그래도, 영어 들으니 너무 좋다.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어.” “나보다 영어랑 전용기를 더 반가워하는구나.” “응. 사실은 그래.” 우영이 웃으며 사실대로 말하자 닉쿤 역시 웃으며 우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뺨과 입술, 그리고 귓가와 턱에 장 난치듯 키스를 남기 닉쿤은 우영이 입고 있던 편안한 티셔츠를 밀어 올려 벗겼다. 그리고는 수월하게 바지를 끌 어내렸다. “트레이닝복이 이럴 때 이렇게 편한 줄 몰랐어. 아주 좋은데?” “네 옷은 벗기기 힘들어.” 닉쿤의 셔츠 단추를 풀며 우영은 웃었다. 모처럼 방해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의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을 그냥 넘긴다면 바보다. “저번에 네가 못 했으니 이번엔 내가 하는 거야.” 닉쿤도 원한이 쌓인 듯 그렇게 말하며 서두른다. 사실 그건 우영도 마찬가지였다. “알아. 빨리 하기나 해. 이러고 있으면 갑자기 전화나 누가 올 것 같아.” 이젠 거의 트라우마 수준이 되어 우영이 불안한 듯 문과 전화기를 돌아보자 닉쿤이 전화기의 코드를 뽑아버린다. “네 핸드폰 번호는 모르지?” “응. 선불폰이라 급한 대로 쓰기만 하고, 사람들한테는 안 알려줬어.” “Jackpot!” 닉쿤의 외침에 우영은 간지러운 듯 닉쿤의 셔츠 단추를 다 벗겨내곤 환하게 웃었다. “우린 왜 한 번 하기도 이렇게 힘드냐?” “하늘이 질투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닉쿤이 위에 올라탔다. 첫 섹스의 두근거림이나 색기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몇 번인가 웃으며 키 스를 했고, 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섹스라기보다는 가벼운 스킨쉽 같은 관계였다. 웃고 떠들며 서로의 몸을 더듬고 입을 맞추고 호흡을 섞는다. 서로의 몸을 탐하기보다는 서로의 체온을 전하는 행위였다. 행복했다. 많이 기쁜 것 같았다. 달게 자던 중 삐빅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우영은 침대 옆의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Hello.” 「우영 케이먼씨 핸드폰인가요?」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오전 10시 30분 발 뉴욕 행 직행편의 자리가 나서요. 지금 부킹하시겠습니까?」 “아, 10시 반이요?” 그 말에 눈을 뜨고 테이블 옆에 놓인 시계를 보던 우영은 눈을 번쩍 떴다. 9시 30분이었다. “아, 저……죄송합니다. 취소해주세요. 다른 비행기 편을 구해서요.” 「네, 감사합니다.」 짤막한 답과 함께 전화를 끊은 우영은 재빨리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닉쿤의 어깨를 흔들었다. “닉쿤, 일어나! 야, 우리 큰일 났어!” 닉쿤의 맨살을 사정없이 후려치며 깨우자 닉쿤이 인상을 쓰며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왜? 더 자.” “뭘 더 자? 지금 9시 30분이야! 지금부터 씻고 나가면 10시에 축구 수속하고 뭐하면 11시라고 아무리 전용기라 도 뉴욕에 도착하면 거기 시간으로 오전 10시야!” 시계를 들어 보인 우영이 이대로 안 일어나면 닉쿤의 머리통을 후려친 기세로 소리치자 시간을 확인한 닉쿤이 느 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린다. “……큰일이군.” 전혀 큰일이라는 투가 아니었다. 다른 때는 빠릿빠릿한 녀석이 오늘만은 유독 흐리멍덩해 우영은 조바심을 냈다. “지금 느긋하게 그럴 때냐? 빨리 일어나. 미치겠네. 넌 나 결혼식에 맞게 데리러 와서 뭐하는 거야?” “그보다 중요한 걸 했잖아.” “너한테나 중요하지. 빨리 가자. 집에 들러서 옷도 갈아입고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 “대강 준비하고 나가. 전용기 안에 네 양복하고 다 준비해왔어.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식장으로 가면 돼.” “그래도 빨리 일어나야지. 결혼식이 12시니까, 보자……. 공항에서 그 시간까지 도착할 수 있나?” “걱정 마. 일요일이라 괜찮을 거야.”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 빨리 일어나.” “넌 그 소심증이 문제야. 시간 맞을 거라니까.” 그렇데 말하며 다시 드러눕는 닉쿤의 어깨를 세게 내리친 우영은 자신이 먼저 벌떡 일어나 침대를 빠져나갔다. “그래도 빨리 일어나. 약속시간 전에는 도착하는 게 예의잖아. 식 시작하면 가차 없이 식장 문 차단해버리라고 했단 말야. 빨리 일어나.” “알았다, 알았어.” “나 먼저 씻는데.” 알몸인 것도 잊은 채 후다닥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는 우영을 웃으며 바라보던 닉쿤은 전화기를 들어 이 호텔에서 쉬고 있을 전용기 파일럿을 찾았다. 11시까지 출발해야 하니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린 채 느긋하게 일어난 닉쿤 은 기지개를 키며 이미 해가 환하게 뜬 창밖을 바라봤다. 여행은 끝났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결혼식 날의 날씨는 너무나 화창했다. 햇살이 가득한 야외 정원으로 서늘한 미풍이 불어 결혼식 날로는 최적의 날씨였다. 식장을 에워싸듯 포진한 카메라들은 교묘하게 꽃 장식으로 가려진 채였고, 테이블과 결혼식 단장을 넝 쿨처럼 감싼 분홍색의 장미들은 막 피어난 듯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슬슬 입장을 시작한 손님들 을 500명에 달하는 메이드들이 자리로 안내하며 샴페인과 쿠키, 초콜릿들을 서빙하고 있었다. “우영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신부 대기실에서 막 빠져나온 에반이 정신없는 식장을 돌아보며 클레어에게 묻자 클레어 역시 계속해서 입구를 돌아보며 답한다. “어젯밤에 출발한다는 연락 받았는데, 이상하네. 위성전화로 11시까지는 올 거라고 했는데.” 이미 시간은 11시 30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객들도 거의 반쯤은 차 있었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고급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하객들이 번쩍거리는 시계와 클러치, 목걸이들을 자랑하며 하나하나 차 입장하는 광경을 보며 에 반은 한숨을 내뱉었다. 준비는 완벽하지만 우영이 없으니 어쩐지 불안하다. 우영의 꼼꼼한 일처리가 이렇게나 그리워질 줄 몰랐었다. 닉 쿤이 우영에게 할말을 녹음하라고 해서 하긴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해고라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동안 놀고 온다고 해도 해고는 못할 것 같다. “클레어, 재키한테 가봐.” “왜?” “불안해서 그래.” “난 클랜한테 가볼 테니, 넌 재키 확인해. 두 녀석이 무슨 사고를 쳐도 칠 것 같아.” “두 사람도 제정신이면 오늘 같은 날 사고를 치겠어? 이게 어떻게 하는 결혼인데.” “그래도 가봐. 에이먼은 어디에 있어?” “지금 오고 있대. 어, 왔다.” 그 말과 동시에 입구 쪽으로 오늘만은 화사한 은빛의 정장을 입은 에이먼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뒤 가 좀 묘하다. “웬 까마귀 떼가…….” 라며 에반이 그쪽을 가리키자 에이먼의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다섯 명의 남자들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까마귀 떼 뒤로 화사한 연분홍의 칵테일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보였다. 아니, 오늘은 미녀라기보다는 미소녀 같았다. 윤기 흐르는 긴 금발을 단정하게 풀고 화사한 베이비핑크의 드레스를 입은 엘레나는 오늘만은 아주 사 랑 스러워 보였다. 나이에 맞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얇게 바른 분홍색 립글로스, 요란한 장신구 하나 없이 드 레스 위에 작은 은색의 목걸이만을 하나 하고 역시나 진한 핑크색의 구두를 긴은 엘레나는 너무나 사랑스러 운 10 대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에 앞선 까마귀들이었다. “……네브즐린이네. 그런데…… 세르게이 네브즐린 쌍둥이였어?” 똑같은 체격에 얼굴까지 꼭 닮은 남자 넷과 조금 작지만 역시나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년 하나가, 똑같이 검은색 양복을 똑같이 맞춰 입은 모습에 클레어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에반이 진지한 투로 받아친다. “그런 것 치곤 나이 차가 좀 나 보이는데?” “……저 집 유전자가 강한가 보네.” “그런가 봐. 아, 클레어 어서 재키한테 가봐. 난 클랜한테 가볼게.” 다시 시간을 확인한 클랜은 서둘러 클레어를 떠밀고는 자신도 결혼식장의 반대쪽에 실크 천으로 겹겹이 베일을 싸 만들어 놓은 신랑 대기실을 향해 달려갔다. 어서 우영이 도착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우영이 없으니, 예정대로 일이 진행되어도 어쩐지 불안하다. 문득 걸음을 멈춘 에반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 다봤다. “해고는 취소할게. 돌아오기만 해줘, 우영.” 간절한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반은 한숨을 내뱉었다. 진마저 없으면 저 골칫덩어리 허르베지쿨 가를 책 임질 사람이 없다. 결혼식장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우영은 힐끔 지금 시간을 확인하곤 분통을 터트렸다. “어떻게 올버니 공항에서 내려줄 수가 있어? 응? 분명히 JFK공항이라고 말했어, 안 했어?” “깜빡했다잖아.” “그게 말이 돼?” JFK공항에서라면 한 시간이면 될 거리가 올버니 공항에서 내리는 바람에 두 시간 거리가 되어버렸다. 신나게 액 셀을 밟으며 우영은 분통을 터트렸다. “어떻게 JFK공항이 언제부터 올버니가 됐냐고!” “파일럿이 이혼 문제로 머리가 복잡했다잖아.” 애가 둘인데다 자기가 바람을 피운 거라 저택과 차 전부 내주고, 한 달에 양육비로 자기 월급의 반을 떼어줘야 한대, 라고 말하며 닉쿤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리 위자료가 무서워도 내 목숨을 담보 잡으면 안 되지! 그러게 바람을 왜 피워?” “내 말이. 바람에 이혼에 위자료에 실직까지 하게 됐으니, 용서해줘. 에이먼이 들으면 그대로 자를 거야. 사실 기름도 아슬아슬했거든.” 닉쿤은 그제야 왕복용으로 가득 채웠던 기름이 막판에 가 아슬아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비행기 안에서 그 말을 했으면 우영이 공황상태에 빠져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숨겨왔는데, 재수 없었으면 대서양 한복판에서 캐스트 어 웨 이를 찍을 뻔했다. 물론, 파일럿이 돌지 않은 이상 도중에 비행기가 떨어질 정도로 어설프게 기름 양을 계산 하진 않겠지만 하여간 아슬아슬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야, 라고 닉쿤은 중얼거렸지만 우영은 그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잠깐, 지금 뭐라고?” “사실은 올버니에 내린 게 그래서일 수도 있어.” 파일럿이 잘못 내린 게 아니라 기름이 모자라 급한 대로 올버니에 내린 걸지도 모른다는 닉쿤의 설명에 우영은 고함을 내질렀다. “야! 그걸 왜 지금 말해?” “내렸으니까.” “그대로 우리가 죽었으면!” “설마…… 위성폰이 있는데, 무슨.,” “너,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냐?” “아, 시간 빡빡하네. 앞에 봐, 우영. 이 속도로 달리다 충돌하면 끝장이야.” 닉쿤의 지적에 우영은 다시 시선을 돌리곤 정면을 바라봤다. 파일럿의 개인사 덕분에 무려 한 시간이나 늦어진 데다 로이는 차를 끌고 JFK공항으로 가 있었다. 로이가 올 시 간이 없어 어차피 가는 길이라 택시를 타고 JFK공항에 도착해 보니, 이번엔 로이가 문제였다. 장염이란다. 덕분 에 로이를 병원으로 실려 보낸 뒤 우영이 대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로이라면 절대 진처럼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밟아대진 못한다. “너, 지금 너무 밟는 거 아냐?” “상관없어. 벌금은 네가 내. 네 명의로 된 차니까.” “어이, 벌점 부과 심하면 라이센스 정지야.” “어차피 운전 잘 안 하잖아.” “벌금까진 괜찮아도 정지 먹는 건 질색이라고.” “벌점이나 정지나, 어차피 풀리는 건데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말하며 우영이 더욱 속도를 올리는 걸 본 닉쿤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뉴욕시내에서 살면서 출퇴근 을 하더니 애가 완전히 난폭해져버렸다. 저택에 있는 소형 레이싱장에서 운전을 할 때에도 조심조심 안전수칙 다 지켜가며 운전을 하던 녀석이,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급하다고 사정없이 밟아대는 걸 보니 확실히 뉴욕 사 람 다 됐다. 오래 전에 쥐들을 갖고 한 실험에서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쥐들이 난폭해진다는 보고를 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맞는 말이다. 뉴욕은 하도 수많은 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살다 보니 특히나 운전자들이 난폭해진다. 그 중에서도 맨하탄은 최고였다. 한적한 시골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며 다른 운전자들을 위협하는 이들을 보면 “맨하탄 사람일 거야.”라는 말이 자연히 터질 정도로 말이다. 저 소심한 우영을 이렇게 난폭하게 변화시키다니 역시나 뉴욕은 죄악의 도시다. 하긴, 원래도 우영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범해지는 녀석이었다. “진짜 뭐가 이렇게 꼬이냐? 이거 나한테 결혼식 오지 말라는 거 아냐?” “액땜이라고 쳐. 이러고 가면 결혼식은 잘 될지 알 게 뭐야?” “절대 잘 될 리가 없잖아!” 클랜과 재키의 결혼식이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두 사람은 사고를 안치더라도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의 친구들도 만만치 않다. 갑자기 떠오른 바지만 클랜의 친구들도 상당히 이상하다. 몇 명은 멀쩡하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지만 클랜과 가장 친했던 친구 하나는 인디언 문 화에 심취해 아예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들어가 이름까지 ‘춤추고 날뛰며.’로 개명하고 그 안에서 온갖 이 상한 약초와 버섯들을 찾아 클랜에게 보내주곤 했다. 어젯밤에 총각파티 한다며 클랜에게 이상한 음식-마약성 분이 있 는 버섯이나, 독이 든 약초 같은-이나 안 먹였을지 상당히 걱정된다. “너, 클랜 친구 중에 로스 기억나지?” “아, 알아. 인디언이 된 로스. 왜?” “걔도 결혼식에 오나?” “아마, 올걸. 걱정 마. 머리 자르고 정장 입고 오라고 했으니까. 맨발로 치마만 입고 오면 그 즉시 갖다 버린다 고 했어.” “그 말썽쟁이가 그 말을 들을까 모르겠다. 와서 이상한 향 피우거나 노래 부르면 어떻게 해?” “걱정 마. 약초와 향 절대 반입 금지야. 그 녀석은 특별히 한 번 더 수색하라고 했어.” “로스도 로스지만 사람만 보면 사탄에 들렸다고 하는 친구도 있지 않았나? 저번에 뭐라더라? 잭 보고 악마의 혀 와 상어의 혼을 타고 났다고 엑소시즘하자고 했었잖아.” “아, 매니. 클랜, 그 녀석하고는 끊었을걸.” “왜?” “에이먼한테 오멘에 나오는 데미안이 당신 아니냐고 십자가 들고 난리치는 걸 보고 클랜이 한 대 팼거든.” 역시나 허르베지쿨 가 사람답다. 진짜 보기보다는 우애가 좋은 형제들이었다. “그, 음모론에 심취한 친구는?” “실버맨은 내가 정치인들 붙잡고 한 마디 이상 하면 잡아 끌어내오라고 보디가드들한테 사진 돌렸어. 요주의 인 물로.” “다행이다.” 우영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재키의 친구들 걱정하느라 클랜의 그 말썽쟁이 친구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못 썼는데 닉쿤이 먼저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실버맨은 좀 위험하다. 미국에서 행사 하나만 있어도 이 모든 게 정치인들의 수작이라느니, 미국 시민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려는 정부의 정책이라느니 하며, 온갖 신문 과 저널들을 챙겨 보며 음모론을 펼치는 그 친구가 정치인들과 재벌들이 드글드글한 식장에 나타나 입을 여는 건 상 당히 위험하다. 사실 우영도 정치인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 친구는 좀 말을 심하게 하는 편이라 주먹다짐이 최악의 경우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그런 것들을 칼럼으로 써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탓에 정치인들 중 에 적이 많다. 그리고 그보다 무서운 건 그 음모론의 절반은 꽤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걸리면 진 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게 네가 자리를 비우니까 그렇지. 네가 있었으면 클랜하고 재키도 다른 짓 못 하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난 휴가도 못 내?” “못 낼 거야 없지. 하지만 다 때가 있는 거니까.” 제한속도를 훨씬 초과해 달려 두 시간 거리를 한 시간 만에 달려온 우영은 결혼식장이 보이자, 그제야 조금 속도 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제 주차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속도를 줄여 서서히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닉쿤이 옆 에 서 박수를 친다. “대단해.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200까지 밟다니. 너 레이서가 꿈이었냐?” “이런 상황에 안 달리고 배겨?” 이미 반 이상이 들어찬 주차장으로 가던 우영은 앞에 선 주차요원을 보고는 차를 멈추고는 차 키를 꽂아둔 채 먼 저 차에서 내렸다. “주차 부탁해요. 닉쿤, 나 재키랑 클랜 보고 올게.” 그렇게 말하며 후다닥 식장 입구로 달려가자 닉쿤이 느긋하게 차에서 내려 우영의 뒤를 따른다. 다다다 하는 걸 음으로 재빨리 식장으로 들어서는 우영을 바라보며 닉쿤은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괜찮은 것 같았다. 마음을 많이 다쳤을까 걱정했는데, 일단은 괜찮아 보였다. 아픈 건 말로 할 수 없겠지 만 곧 괜찮아질 것이다. 이곳이 이젠 우영의 집이고, 가족들이 있는 곳이니까. 에반을 만나 인사를 한 뒤 마이크와 통신기를 받아든 우영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재키의 대기실이었다. “재키, 준비는?” “우영!” 재클린의 대기실로 들어선 우영을 보자마자 안에 있던 여자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우영에게 달려들었다. 결혼 식을 위해 정장을 갖춰 입은 사라와 킴, 그리고 옆에 와있던 클레어와 재키의 언니인 마리아까지, 모두 울 것 같 은 얼굴로 우영에게 달려왔다. “어서 와! 널 기다렸어!” “우영, 사랑해! 어서 와! 너무 기뻐!” 사라와 클레어가 소리치며 목을 끌어안으며 인사를 하자 우영은 조금 멋쩍은 듯 웃고 말았다. “걱정시켜서 미안. 그런데 준비는 잘 된 거지?” 우영이 웃으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자 사라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답한다. “괜찮아. 웬일로 아무 문제없어. 드레스도 수선한 게 딱 맞고, 구두도 잘 맞아. 그래서 더 불안해.” 그 말에 우영은 미심쩍은 듯 재키를 돌아봤다. 그러자 드레스와 구두 때문에 조심조심 우영에게 다가서던 재키가 억울한 얼굴로 우영을 바라본다. “그 얼굴은 뭐야? 나 얌전히 있었어. 식단 조절해서 살도 좀 뺐고 네일 케어도 얌전히 받고 스킨케어도 받았다 고. 우영이 화낼까 봐 머리 빈 여자애들처럼 헬멧 쓰고 앉아서 손톱에 색칠도 했다니까!” 손톱 색칠한 게 진짜 억울했는지 두 손을 번쩍 들어 곱게 칠한 손톱을 보여준다. 큐티클까지 말끔하게 정리되어 연한 핑크색의 매니큐어 위로 보석을 붙여 손톱 끝이 반짝반짝거린다. “손톱은 합격. 화장도 잘했고, 돌아서 봐.” “응?” “헤어.” 우영이 손끝을 까딱하며 돌아서라고 하자 5미터에 달하는 긴 드레스 자락을 무거운 듯 질질 끌며 돌아선다. 가벼 운 면사포를 치운 우영은 빈틈없이 하나로 깔끔하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과 빈틈없이 꽂힌 핀들을 확인한 뒤 다 시 돌아서라고 한다. 그 말에 다시 재키가 돌아서자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 하나를 가리킨다. “올려.” “어, 응.” 우영의 지시에 뒤에서 대기 중이던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당당, 그리고 헤어 담당들이 달려와 재빨리 재키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해준다. 그녀를 다시 한 번 주욱 돌아본 우영은 처음에 준비했던 주얼리와는 다른 치 렁 거리는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를 보고는 그 부분을 지적했다. “귀걸이 바꿔라. 너무 커. 주렁주렁해 보여. 다이아몬드 피어스로 해. 그리고 목걸이도 너무 알이 커. 목걸이도 심플한 걸로 교체. 번쩍거리는 드레스에 커다란 진주 목걸이 달고 나타나면 졸부 같아 보여. 구두굽 조심하고 입 장 전에 불안하면 플랫으로 바꿔 신어. 무리하게 신고 들어왔다 엎어지지 말고.” 혹시나 해 예물로 준비한 레드, 블루, 블랙, 옐로우, 핑크 다이아몬드와 진주와 백금으로 만든 심플한 세트를 모 두 들고 나오라고 지시한 우영이 투명한 다이아몬드 세트로 바꾸라고 하자, 재키가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다 . “이게 예쁜데.” 허르베지쿨 가에서 준비한 예물 세트 중 진주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재키의 항변에 우영은 딱 잘라 말을 한다 . “너무 커. 바꿔.” 우영의 지적에 옆에서 계속해서 진주 세트를 말렸던 클레어가 한 마디 돕는다. “그래, 재키. 그게 훨씬 나아. 그건 사실 굉장히 촌스러워.” 가차 없는 클레어의 한 마디에 재키가 부루퉁한 얼굴로 답한다. “알았다, 뭐.” “클레어, 여기 처리 부탁해. 난 클랜 보고 올게.”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들고 온 마이크와 이어폰을 꽂고 통신기를 양복바지 뒤쪽에 꽂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카메 라 위치를 확인하곤 테스트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엄청나게 큰 공간을 가로질러 클랜의 대기실을 찾아가려던 우영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 한 음성에 걸음을 멈췄다. “우영! 살아있었군요!” 상쾌 발랄한 그 목소리는 역시나 엘레나였다. 화사한 베이비 핑크의 드레스를 입은 엘레나가 다다다 달려오는 걸 본 우영은 웬일로 천사 같은 그 모습에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엘레나가 말로 이미지를 말아먹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엘레나는 진짜 모델이었다. 그것도 유명 디자이너들의 러 브콜을 한 몸에 받는 초일류급 모델이었다. 이제야 그게 좀 실감되었다. “오랜만이다.” 우영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엘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우영을 끌어안는다.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이상하게 거창한 환대에 우영은 좀 당황했지만 일단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이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일이 좀 있어서. 걱정했다며? 고맙다.” 구두를 신자 자신보다도 큰 엘레나에게 끌어 안겨 있던 우영은 엘레나가 다시 멀어지자 멀뚱한 눈으로 그녀를 바 라봤다. 오늘은 화장도 하지 않아 유난히 하얀 피부가 반짝반짝거리는 듯했다. 날개만 달면 진짜 천사 같았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말이다. “너, 오늘 진짜 예쁘다.” “그렇죠? 제가 들어오니 다들 저만 쳐다보더라고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주 화사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우영은 진짜 감탄한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아주 예뻐.” 10대로 보이진 않지만 하여간 예쁘긴 무지 예쁘다, 하며 우영이 엘레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순식간에 엘레나 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우영의 손을 꼭 잡는다. “우영, 많이 말랐네요.” 사흘 동안 한국과 뉴욕을 오가느라 시차에 제대로 먹지도 못해 확실히 몸이 좀 야윈 느낌이긴 했다. 충격을 받은 후라서인지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뭐……. 이런 저런 일이 있어서.” 우영이 웃으며 걱정해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자 엘레나가 결의에 찬 얼굴로 우영의 손을 더욱 세게 쥔다. “걱정 말아요. 복수는 내가 해줄게요.” “……복수? 무슨 복수?” “다 알아요. 불쌍한 우영. 얼마나 고초가 심했을까. 이제부턴 내가 지켜줄게요. 걱정 말아요. 이반도 이번에 탈옥 했으니까, 우리 집안은 든든해요.” 엘레나의 비약적인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던 우영은 ‘탈옥’이라는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탈옥?”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우영은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곤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탈옥이라니? 이반 네브즐린이 탈옥을 했다고?” “네.” “탈옥을 막 해도 돼? 아니, 그럼 숨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숨긴요. 이번에야 말로 구로바를 땅에 묻어버릴 거예요. 세르게이는 온화한 편이지만 이반은 안 그렇거든요. 알렉산드르도 아예 미국으로 왔고 니콜라이도 돌아왔으니, 이젠 나만 믿어요. 알렉세이는 별로 믿음이 안 가긴 하지만, 하여간 다른 오빠들은 모두 대단하거든요. 그간의 고초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해줄 거예요.” 구로바는 또 뭔가 하던 우영은 엘레나의 말을 되새김질하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세르게이가 온화하다고 할 정도면 대체 그 이반이라는 남자는 어떤 인간인 걸까. 장기매매를 하다 복역 중이라는 건 들어 알고 있지만, 엘레나의 입에서 대단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니 어쩐지 두려워졌다. 그런 남자가 미국 으 로 왔단다. 대체 FBI는 뭘 하는 거냐? “그래, 하여간 축하한다. 나 지금 좀 바쁘거든. 좀 이따 보자.” 멍한 채 일단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진 우영이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려 하자 엘레나가 우영의 팔을 잡아끈다. “우리 오빠들 안 보고 가요?” “……오빠, 들?” “오늘 다 왔어요. 알렉세이가 이번에 헐리웃으로 진출하거든요. 그래서 다 왔어요. 인사하고 가요. 이반도 왔어 요.” 순간 우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절대 싫다. 세르게이의 쌍둥이들을 줄줄이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거기다 탈옥한 장기 매매범이랑 얼굴을 마주하고 싶진 않다. 얼굴 보자마자 신장 팔라고 할 것 같다. “엘리. 지금 내가 바빠. 곧 있으면 식 시작할 테니까 자리에 앉아 있어.” “우리 자리가 없어요.” “응?” “자리가 없대요. 그래서 지금 인사 중이에요.” 라며 엘레나가 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결혼식 참석을 위해 최대한 화사하게 입은 사람들 중 검은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보였다. 전부 이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은발에 덩치 가 비슷하다. 뒤만 봐도 쌍둥이다. 한 명이 좀 작긴 하지만 그 사람만 빼곤 진짜 쌍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로 덩 치며 뒤태가 똑같았다. 돌연변이다! “……자리는 내가 체크할게. 엘리, 우선 오빠들한테 가 있어.” “네. 아, 이따 나랑 춤춰요, 우영!” 난 춤 못 춰, 라고 말하려다 우영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재빨리 돌아서 클랜의 대기실로 가면서 서둘러 이 이 상 사태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 머리를 굴렸다. 분명 네브즐린 가에서 초대된 사람은 에이먼의 동업자인 세르게이뿐이었다. 엘레나는 자신이 월권으로 하객 명단 에 끼워놓은 케이스였다. 사실 우영은 세르게이에게 형제가 있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 알았었다. 아니 있다는 건 알았지만 원래가 러시아 마피아들은 워낙에 가족 사항을 극비에 붙이는 경향이 있어, 저렇게 줄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순간 말로 설명 못할 전율이 흘렀다. 서둘러 마이크를 눌러 켠 우영은 테이블 담당들을 불렀다. “오늘 하객이 총 몇 명이죠?” 「아, 네. 오늘 하객은 에이먼과 대넌이 추가하신 분들까지 다 해서 1032명인데요.」 태연한 담당의 말에 우영은 비명을 내질렀다. “……네?” 「예. 그래서 테이블이 250개……. 어!」 그제야 담당도 이 비상사태를 깨달은 듯 빼액하니 비명을 내질렀다. 하객들의 자리배치는 전부 우영이 했다. 그 리고 그 테이블 배치는 우영이 최초로 작성한 하객명단을 기본으로 한 배치도였다. 기본적으로 결혼식장의 테이 블에는 1000명을 기준으로 한 테이블 당 네 명이 앉도록 되어있었다. 예외적으로 허르베지쿨 가와 교류가 있는 집안의 경우만 가족들끼리 앉도록 의자 세 개, 다섯 개를 놓긴 했지만 이건 지정좌석제였다. 우영이 최종적으로 확인한 테이블은 정확히 1002명을 기준으로 한 250개였다. “테이블하고 의자, 여분 있어요?” 「네. 네. 혹시나 해서 테이블은 10개, 의자는 맞춰서 40개 더 추가해놨습니다.」 “빨리 옮겨요. 재빨리 옮겨서 배치하고 장식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브즐린 가 분들 그 테이블로 안내해드리세요.” 「네.」 이럴 줄 알았다. 자신이 잠시 없는 사이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다. 그러고 보니 사라의 어머니와 언니도 추가했어 야 하는데 자신이 깜빡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에이먼하고 대넌도 그렇지, 손님을 추가할 거면 테이블도 추가하 라고 지시를 했어야지, 무작정 초대장만 돌리면 어쩌란 거냐? 초대장 발송자와 배치도를 담당하는 사람이 다르 나 보니, 하객 명단을 확인하고 개인적인 손님들을 추가하는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했던 거다. 결 혼식 을 이주일 만에 준비를 하다보니 이런 사단이 나는 거다. 그래도 혹시나 해 여분을 준비해둔 게 다행이었 다. 뭐 든 급하게 준비하면 한 군데는 꼭 구멍이 난다. “어이, 형제! 돌아왔네?” 막 클랜의 대기실로 들어서려는데 자신을 부르는 끔찍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우영은,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선 노먼을 보곤 눈을 부릅떴다. “넌 여기 왜 왔냐?” “신랑 들러리.” “……네가 왜?” “클랜이 날 좋아하잖아. 돌아왔다니 축하한다.” 라며 옆으로 다가온 노먼이 고생했다는 듯 어깨를 툭 두드린다. 하지만 그 말에도 우영은 웃을 수가 없었다. 갑 자기 어젯밤 읽은 소설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친 탓이다. “너 그 책 뭐야?” “아, 다 봤어? 감동적이지?” 너무 감동적이라 저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말하려다 우영은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내저었다. “넌, 나중에 얘기하자. 식 끝나고 보자고.” “아, 그런데……요즘 이상한 카드가 자꾸 와. 너 혹시 아는 거 있어?” “카드?” “영어인 것 같기는 한데, 이상한 글씨가 써진 카드랑 꽃 더미랑 보석이 자꾸 와. 뭐지? 하도 악필이라 잘 읽지 는 못 하겠는데, 네 이름이 써진 것 같던데?” 세르게이다. 순간 우영은 그 정체불명의 카드와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지만 애써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노먼의 전적을 생각하면 노먼도 좀 당해봐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노먼이 세르게이에게 시집가는 게 인류를 위 해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세르게이가 받아준다면 말이다. “난 모르겠는데? 너랑 원수진 사람들 중 하나인가 보지.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그런가? 어쩐지 선물들에 조금 악의가 섞인 거 같기는 했어.” 라며 중얼거리는 노먼을 두고 우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돌아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안했는데, 솔직히 지금은 안 미안하다. 세르게이가 노먼을 납치한대도 두 손 들어 환영해줄 거다. 다 노먼의 악업이 만들어낸 결과야, 라고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우영은 겹겹이 천이 둘러진 신랑 대기실로 들어섰다. 그리곤 그 안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클랜을 보곤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클랜.” 원수 같은 녀석이지만 결혼 전에는 나름 우영과 가장 잘 맞았던 녀석이라 반가운 듯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클 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우영에게 다가온다. “우영, 돌아왔구나?” “그래, 왔다. 준비는 어때? 말썽 부릴 거면 지금 부려, 빨리. 대책 세울 수 있을 때 쳐.”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슬쩍 클랜의 뒤에 있는 그 친구들을 돌아봤다. 다행히 머리를 치렁치렁 풀어헤치고 치마를 입고 온 ‘춤추고 날뛰며’는 없었다. 일단 다들 겉은 멀쩡하다. 하긴, 노먼도 신랑 친구로 멀쩡하니 턱시도 입 고 등장했으니, 다른 친구들도 멀쩡해 보이는 건 당연하다. 다만 그 속이 노먼과 클랜 같은 것들일 뿐이다. “우영, 너무하는 거 아냐? 나도 내 결혼식 망치기는 싫다고.” 클랜은 우영을 안고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 있게 소리쳤지만 우영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망치기 싫은 녀석이 결혼식 10분 전에 타이 다 풀어헤치고 있냐? 재킷은 어디 있어?” “아, 저기.” “타이 똑바로 묶어. 그리고 재킷 입고, 머리카락 정돈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알았어. 에반도 지금 잔소리 한바탕 하고 갔다고.” “잔소리 듣기 싫으면 미리 미리 알아서 하라고. 응? 난 신자는 아니지만 오늘만은 하느님, 부처님, 알라, 총 동 원해서 제발 2시간만 조용하게 지나가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야.” “하하하, 걱정 말라니까. 우영이 왔으니 다 잘 될 거야.” “내가 너희 사고 뒤처리 하러 돌아온 줄 알아? 시간 다 됐다. 어서 준비해. 난 자리로 돌아간다.” “응. 우영, 잘 돌아왔어!” 다시 한 번 어깨를 툭 치는 클랜의 인사에 우영은 뭐 씹은 얼굴로 클랜을 바라봤다. “널 보니 잘 돌아온 건지 모르겠다. 이제 10분 남았어. 지금 모인 손님들 모두 중요한 사람들이야. 시간 지체하 는 건 안 돼. 저 사람들의 시간은 돈이라고. 그리고 시간을 맞추는 건 곧 신뢰의 문제야. 네 신뢰도를 높이라고 . ” “알아, 안다고. 딱 맞춰서 입장할게.” “그래, 스탠바이한다.” 정확히 10분이 남은 걸 확인한 우영은 영상 팀과 마이크 팀의 테스트 결과를 확인한 뒤 결혼식 하객 중 현재까지 들어온 이들의 숫자를 체크했다. 대넌과 에이먼이 불려놓은 40명을 포함해 970명가량이 입장했다. 나머지 70명 도 지금 빠른 속도로 입장 중이었다. 주차장 쪽을 확인하니 하객들 대부분이 도착한 듯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12시 정각되면 입구 봉쇄 시작합니다. 그 이후로 오시는 손님들은 저한테 알려주세요.” 「네.」 경비 팀을 호출해 지시를 마친 우영은 대기실에 있던 거울로 못 매무새를 다시 확인한 뒤 대기실을 빠져나가 자 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맨 앞 테이블에 놓인 가족들의 자리로 가니 먼저 돌아온 클레어와 사라가 웃으며 맞이한 다. “닉쿤은?” “에이먼하고 닉쿤이랑 아버지는 지금 손님 접대 중. 곧 올 거야.” “그래.” 이제야 한 시름 놓은 듯 우영은 양복을 바로 하고 앉았다. 그러자 곧 닉쿤과 에이먼이 함께 이쪽 테이블로 다가 온다. 찬란한 햇살 아래 금발을 나부끼며 다가서는 닉쿤을 본 우영은 환하게 웃었다. 그런 우영에게 역시 웃어 보인 닉쿤은 우아한 태도로 우영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우영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세기의 결혼식의 막이 열리고 있었다. 결혼식은 너무나 순조로웠다. 무서울 정도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클랜의 친구-정상적으 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가 사회를 맡아 시작된 결혼식은 곧 신랑과 신부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재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조금의 흔들림 없이 12센치 힐을 소화해냈다. 다른 것보다 재키가 힐 을 신고 5미터에 달하는 드레스를 끌고 무사히 주례대 앞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우영은 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 렸다 .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도 자신의 정성을 알아준 모양이었다. 곧 이어 재키의 대학 교수님의 주례가 이어졌고, 감동적인 주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쏟아질 때마다 저쪽 테이블 에 앉은 브루스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신부 측 어머니는 미소를 머금은 채 태연한데 아버지가 유 난 을 떠는 건 또 처음이라, 우영은 옆에 있던 닉쿤을 쿡 지르며 그쪽을 보지 않은 채 작게 말을 걸었다. “브루스, 왜 저래? 아직도 이 결혼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야?” “아니. 그냥 막내딸 보내려니 그런가 보지. 사실 딸한테 잘한 것도 없잖아.” 불독 같은 브루스지만 역시나 막내를 먼저 보내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저 어린 아이가 임신까 지 한 채 결혼을 하니 마음에 좋을 리가 없을 거다. 게다가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클랜이다. 하다못해 에이 먼 이라도 된다면 브루스도 처음부터 그 난리는 안 쳤을 텐데, 하필 고르고 골라 클랜이니 뒤로 넘어갈 만도 하 다. 자신이라도 자신의 딸이, 아니 하다못해 클레어나 엘레나가 클랜 같은 거랑 결혼하겠다고 나타난다면 클랜을 두 조각내서 던져버릴 거다. 능력도 있고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고 외모까지 좋은 녀석이긴 하지만 현재까지의 상 황 으로 보자면 그 미래가 그다지 밝지는 않다. 사랑하는 딸이 아무리 재벌가의 아들이라도 나이 차도 많이 나 는, 순 날건달 같은 백수와 결혼을 한다는데 누가 좋아할까. 브루스도 이젠 늙어 마음을 금세 접은 모양이지만 앞으 로 브루스의 태도는 클랜 하기 나름이다. 허르베지쿨 가의 아들이니 또 마음을 잡으면 잘하겠지만, 그걸 실천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다른 결혼식에 비해 그다지 길지 않은, 현실적이고도 간결한 주례사가 끝나고 반지 교환이 시작되자 우영의 왼손 을 꽉 잡고 있던 닉쿤이 우영의 손을 보더니 우영을 쿡 찌른다. “너, 반지 왜 안 꼈어?” 잠시 잊고 있던 반지 이야기에 우영은 ‘그래, 너 잘 걸렸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지만 결혼식 도중이라 겨우 겨우 화를 참으며, 닉쿤을 돌아보지 않은 채 답해주었다. “……아무래도 너랑 사귀는 거 생각해 봐야할 것 같아서.” “뭐야? 너, 내 몸만 강탈하고 끝이라는 거야? 할 거 다 했으니 이제 볼 일 없다고?” 이게 웬 헛소리인가 했지만 우영은 중요한 순간이라 닉쿤의 말을 대강 얼버무렸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왜?” “귀찮아. 조용히 해.” 먼저 클랜이 재키의 손에 반지를 껴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재키도 반지를 클랜의 손가락에 껴주었다. 반지 교환 이후 드디어 신랑에게 신부에게 키스하라는 말이 나오자 우영은 마이크를 눌러 뒤에 식장 멀리에 있는 폭죽을 쏘 아 올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두 사람이 키스를 시작하자 저 멀리서 노랗고 빨간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소음과 함께 새파란 하늘 에서 터지는 색색의 불꽃에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일본의 장인에게서 특별히 부탁해 만들어온 최고급의 불 꽃들이었다. 원형을 그리며 3중으로 터지는 불꽃과 하나의 불꽃에서 동시에 4개지 색이 터지며 연꽃 모양을 그리 는 것까지,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그 광경에 하객들 모두 신랑과 신부의 결혼을 축하하며 박수를 쳤다.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지금까지는 더없이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웬일로 잘 넘어가네.” 우영은 신이 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닉쿤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우영을 이 상하게 여긴 닉쿤은 우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 아까부터 왜 여길 안 봐?” “……사정이 있어.” “왜? 나만 보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져서?” “사정이 있다니까.” 네가 앉은 자리 너머로 네브즐린 가가 있어,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우영은 대강 말을 끊어냈다. 너무 무서 워서 그쪽으로는 고개를 돌리기도 싫었다. 은발의 돌연변이들을 보는 건 영화만으로도 충분하다. “우영, 이쪽 좀 봐.” “싫다니까.” “왜 그러는데?” “다 사정이 있어.” 우영의 마지막 말과 함께 결혼식 순서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재키와 클랜은 식장에서 직접 혼인 신고서에 사인을 했고, 두 사람의 사인이 끝나자 다시 한 번 하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은 두 사람은 오늘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커플이었다. “쟤네는 진짜 잘 살 거야.” 우영이 박수를 치며 그렇게 말하자 닉쿤도 박수를 치며 받아친다. “그렇겠지. 주변 사람들만 괴로울 뿐이지. 애는 대체 어떻게 키우려고.” 닉쿤은 이제야 겨우 저 애들이 애를 낳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떠올리며 한숨을 뱉어냈다. 클랜도 클 랜이지만 재키는 이제 겨우 대학 1년생이었다. 휴학을 하긴 했지만 아이를 낳은 뒤엔 공부 욕심이 많아 반드시 학업을 마치려 할 테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닉쿤 개인적으로 재키 같은 인재가 결혼 때문에 학업도 못 마치는 건 원치 않는다. 문제는 그럼 애는 누가 기르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클랜 같은 애가 하나 더 태어난다면 난 진짜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진 역시 클랜과 재키의 아이를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투에 원한이 가득해 닉쿤은 싱 긋 웃으며 우영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걱정 마. 애가 클랜을 빼닮았으면 세 녀석 다 브루스 네로 갖다버릴 테니까. 처가살이 좀 하라고 하지, 뭐.” “그거 괜찮네. 이 김에 클랜도 성격 좀 고치고.” “클랜 성격 고치기 전에 브루스가 먼저 세상 하직할걸.” 내가 생각해도 그쪽이 확률이 높아, 라고 말하던 우영은 사라의 옆모습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고령출산도 힘 든데, 잘하면 사라가 클랜과 재키의 아이까지 떠맡게 생겼다. 물론, 재키가 키우는 것보다야 사라가 키우는 쪽이 아이의 정서 발달에는 좋겠지만…… 심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보모를 잔뜩 구해야 한 듯했다. 어쩌 다 보니 삼촌과 조카가 비슷한 때에 태어나게 생겼다. 정상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라 팔짱을 낀 채 마지막으로 식장을 걷는 모습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가족들 역시 웃으며 두 사람의 미래를 축하해주었다. 두 사람의 행진 시작과 함께 다시 멀리서 불꽃이 터졌다. 온 세상을 화려하게 수놓는 그 불꽃을 올려다보며 우영 은 행복한 듯 웃었다. 두 사람의 새 삶의 시작과 함께, 자신에게도 새 삶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날이었다. 하늘도 두 사람과 함께 자신을 축복해주는 듯했다. 우영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우영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퍼엉- 하며 하늘로 날아오른 불꽃이 다른 불꽃들의 반도 올라가지 못해 피시식 터졌다. 불량인가 하며 우영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다 타 지 못한 불꽃이 떨어져 내렸다. “으악!” 다른 불꽃보다 낮다고는 하지만 꽤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 사방으로 튄 불꽃 덕에 결혼식장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 다. 우영 역시 놀라 몸을 숙이는데 닉쿤이 재빨리 우영을 옆에서 끌어안아주었다. 위에서 감싸듯 우영을 품에 끌 어안아 숙이게 한 닉쿤이 따가운 듯 인상을 쓰며 험악한 투로 중얼거린다. “뭐야? 왜 터지다 말아?” “그러게……. 어? 어어!” 몸을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우영은 순간 새하얀 신부의 드레스 자락의 끝이 타들어가는 걸 보고 말았다. “소화기!” 긴 웨딩드레스의 끝자락에 붙은 작은 불씨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우영의 외침에 신부의 드레스에 불이 붙었다 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모두 비명을 내지르며 소화기를 찾기 시작했다. 우영은 진짜 입이 문제라고 한탄하며 이 마를 짚었다. 농담으로 드레스 자락에 불이 붙을 것 같다고 했더니 진짜 불이 붙었다. 이제 비만 내리면 다 된 다 . 진짜 돌아버리겠다. 혹시나 해서 꽃으로 만든 기둥 아래쪽에 소화기를 모두 배치해둔 채라, 서둘러 소화기를 찾으려 우영이 고개를 돌리는데 저쪽 테이블에 있던 엘레나가 소화기를 찾아들고 달려왔다. “우영! 소화기요!” 아주 빠르게 재난에 대비하는 신속한 엘레나의 모습에 우영은 엘레나에게 재키를 가리켰다. “불 꺼!” 그러자 엘레나가 비장한 얼굴로 소화기를 들어올린다. 천만 다행이라 여기며 우영이 엘레나를 바라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엘레나는 왜 두 손으로 소화기를 번쩍 들어올리는 걸까. 당장에 재키에게 소화기를 집어던질 것 같은 그 모습에 우영은 서둘러 엘레나를 불렀다. “엘리, 너 뭐하는 거야?” “이거 던지면 터지는 거 아니에요?” “소화기가 수류탄이냐?” “그럼요?” “핀 뽑아서 호스를 저리 대고 누르라고.” “어? 핀?”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듯 엘레나가 소화기를 내려두고 핀을 찾는다. 사람 살리려다 사람 죽일 뻔했다. 더 소화기 를 재키가 맞았으면 그대로 즉사다. 어쩐지 결혼식이 너무 평화롭다 싶었다. 저 불만 끄면 끝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나치게 맑은 하늘에서 빗줄 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우비다.” 우영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우영의 말과 동시에 사회자가 테이블 아래에 우산이 있 다는 알림을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럴 것 같아 각 테이블 아래쪽에 우산을 준비해뒀었다. 하객들이 재빨리 우 산을 꺼내 쓰는 모습을 보며 우영은 이번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다. 자기가 말로 해놓고도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나 아무래도 자리 깔아야 할까 봐. 신이라도 내렸나. 어쩌면 이렇게 딱딱 맞추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이는 우영의 위로 투명한 비닐이 막을 치며 비를 가려준다. “그러게 말이다. 너한테 예언력이 생긴 거냐, 아니면 네 저주가 통한 거야?” “저주는 무슨. 이건 당연한 결과야. 저 두 녀석 결혼식이 무사히 지나간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갑자기 내린 비 덕에 신부의 드레스 자락에 붙은 불은 꺼진 후였다. 다들 조금은 당황했지만 재빨리 우산을 쓴 덕에 값비싼 드레스와 클러치들을 모두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테이블은 젖었고 샴페인 잔에는 빗물이 떨어졌지 만 모두들 이 기가 막힌 상황을 즐기며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특히나 가장 신이 난 건 신랑과 신부였다.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두 사람은 웃으며 빗속을 뛰어놀고 있었다. 값비싼 드레스가 젖고 빗물에 젖고 비단 천으로 만든 웨딩 슈즈에 빗물이 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신이 나 두 손을 펼치고 비를 맞는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전역에 보도되고 있었다. 물론, 신랑 신부의 친구 들 역시 신이 나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 중에 “내가 기우제 지냈다니까!”라고 떠들어대는 건 분명 춤추며 날 뛰고 였다.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 수염 밀고 머리 자르고 정장까지 입은 채라 못 알아봤다. 참 어떻게 보면 대책 없이 낙천적이고,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커플이었다. “기가 막혀서.” 우영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자 닉쿤이 우영의 어깨를 안으며 웃는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우산을 든 사람을 만났으니까. 원래도 겁이 없는 녀석들이니 이제 더 무서운 게 없겠지.” “……글쎄, 그 상대가 가진 우산이 찢어진 우산일지 알 게 뭐야?” “수선하면 되지. 잘못된 부분은 고쳐주고 찢어진 부분은 기워주는 게 평생을 같이 할 사람의 기본 요건이잖아. ” “넌 진짜 말은 잘해.” “닉쿤사의 캠페인을 그걸로 할까?” “마음대로 해라.” 잠시 수다를 떠는 사이 비가 그쳐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태양이 도 다시 대지를 비춘다. 하지만 좀 더 비가 내려도 좋지 않았나 싶어 우영은 아쉬운 듯 우산을 올려다봤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는 삶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자신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우산을 들고 역 앞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며 조용히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아마 이제 겨우 그 사람을 찾은 것 같았다. 한쪽 어깨가 젖어도 다른 쪽 어깨로 전해지는 온기에 기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그렇게 말하며 슬쩍 닉쿤을 돌아본 우영은 기분 좋은 얼굴로 닉쿤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하지만 역시 반지를 끼는 건 좀 보류해야겠다. 아니, 보류하는 게 아니라 낄 수가 없다. 이 입만 산 바람둥이가 반지를 여자 사이즈로 맞춰오는 바람에 새끼손가락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걸 지금까지 모른 자신도 대단하지만, 그런 반지를 당당하게 건넨 닉쿤도 닉쿤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반지가 안 맞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버틸 셈이었다. 닉쿤에겐 그 정도의 페널티가 필요하다 . 어쩐지 속이 시원해져 우영은 피식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우영이 화를 내며 날뛸 거라 생각하던 닉쿤은 우영이 신이 난 듯 웃자 얘가 너무 여 받아서 미쳤나 하는 얼굴로 우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닉쿤도 그냥 웃고 말 았 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었다. 뭐든 웃으며 넘어가도 된다. 비가 완전히 그친 하늘 위로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Epilogue 「화창한 월요일 오전입니다. 오늘의 타블로이드들은 모두 어제 있었던 재클린 레너드와 클랜 허르베지쿨의 결혼 식이 장식을 하고 있네요.」 「과연 세기의 결혼식다웠죠.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화려한 결혼식이었습니다. 거기에 하늘에서 내린 비까지. 아 주 대단했죠?」 「야외결혼식에 폭우라니 진짜 엄청난 해프닝이었죠. 그래도 신랑신부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너무 기뻐하더군요. 」 「NY Daily의 타이틀을 전하자면 ‘유쾌한 커플의 웨딩 해프닝’이라고 써져 있네요. 세기의 결혼식을 향한 미국 인들의 관심이 지대했던 모양입니다. 하하, 저도 그 장면만 돌려봤는데 진짜 유쾌하더군요. 호화찬란한 결혼식 이 라 빈축을 살 수도 있었지만, 신부가 어머니의 드레스를 물려받은 데다 그 우아하면서도 심플한 센스라니, 모두 가 이 낙천적인 커플들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습니다.」 「상류층들의 돈지랄 결혼식에 이 정도의 호의적인 반응이 올라온 적이 또 있던가요? 진짜 신기한 일이네요. 오 우, 여기 작게 엘레나 네브즐린의 사진도 올라와 있네요. 최고의 스타일, 사랑스러운 엘레나라니. 7개월 전 총 기를 들고 설치던 아가씨라곤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네요. 엘레나, 개과천선 축하드려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낄낄거리는 남자의 웃음소리를 듣던 우영은 언제나처럼 퉁명스레 내뱉었다. “닉쿤, 어쩌냐? 클랜한테 일면을 빼앗겼네?” 핸들을 쥔 채 우영이 그렇게 말하자 닉쿤이 웃고 만다. “좋은 소식이니까. 이걸로 허르베지쿨 사의 이미지도 아주 좋아졌다고.” 「그런데 이렇게 보니, 클랜 허르베지쿨 너무 아깝네요. 닉쿤 만큼이나 멋진 남자가 유부남이 되다니, 가슴이 찢 어지네요.」 여자의 장난스러운 말에 남자가 받아친다. 「이런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대환영입니다. 드디어 공공의 적이 하나가 줄었네요. 이제 닉쿤 벅 허르베지쿨과 에이먼 허르베지쿨, 그리고 조지 클루니만 결혼에 골인해주시면 바야흐로 우리들의 세상이 올 겁니다. 멋진 남 자 들은 전부 유부남이 되는 근사한 상황이 닥치는 거죠.」 「그건 안 되죠. 닉쿤, 에이먼, 그리고 조지, 당신들만은 영원히 독신으로 남아주세요. 이렇게 멋진 남자를 한 여자가 독차지한다는 건 인류의 비극이에요.」 「이런, 당신 일부다처제를 지지하는 건가요? 그래요?」 「브래드와 애쉬튼이 유부남이 되어버렸으니 남은 남자들이라도 지켜야죠.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유전자는 널리 널리 퍼져야 한다고요.」 「여성단체에서 우리 방송의 광고를 모두 끊어버리겠군요. 항의전화가 빗발치겠는데요?」 「그러니까 독신으로 남아달라고요. 대신, 정자 기증하세요. 당신들의 유전자를 널리널리 보급해달라고요. 닉쿤, 당신의 유전자라면 10만 달라라도 사겠어요.」 「하하, 당신 진짜 미쳤군요.」 자기들끼리 만담을 하는 사회자들의 말을 뒤로 하고 우영은 라디오를 꺼버렸다. “흐응, 정자로 장사를 해도 되겠는 걸? 정자 하나에 십만 달라라면,한 번에 얼마야?” “하기만 해봐. 너 닮은 애들이 줄줄이 나타나면 다 네 과거의 과오로 돌릴 테니까.” 닉쿤의 장난에 우영이 진지하게 받아치자 닉쿤이 큰소리로 웃고 만다. 그 웃음소리가 상당히 얄미웠지만, 우영은 참아주기로 했다. “클랜은 오늘부터 출근하는 거야?” 재키가 임신 중인데도 결혼식 준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라 허니문은 일단 미룬 채였다. 대신 재키와 사 라, 그리고 킴과 사라의 언니와 어머니는 하루 쉰 뒤 내일 오전에 플로리다에 있는 별장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클랜은 대넌의 명령대로 오늘 오전부터 허르베지쿨 본사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결혼하자마자 출근을 시키는 걸 보니 대넌도 클랜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클랜이 클레어 직속으로 들어갔어. 아마 클레어가 신나게 굴려줄걸.” “둘이 잘 맞으니 잘 됐네.” “그렇지. 클레어는 섬세하고 꼼꼼하지만 대범하지 못한 면이 조금 있거든. 대신 클랜은 끈기와 섬세함과는 담을 쌓았지만 아주 기발하고 대범하지. 둘이 잘 맞을 거야.” 그렇긴 하다. 서로의 장단점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데다 클랜과 클레어라는 이름처럼 마치 쌍둥이처럼 자 라나 죽이 맞을 때는 기가 막히게 또 잘 맞는다. 하지만 우영은 클랜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 클레어가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무슨 죄냐?” “걱정 마. 클랜의 천적은 클레어니까. 브루스 잡는 닉쿤, 클랜 잡는 클레어. 몰라?” “그래, 제발 클레어가 클랜에게 말려들지 않기만을 바란다.” 우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저 멀리로 보이는 호텔을 향해 깜빡이를 켜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닉쿤이 뭔가 생각 난 듯 우영에게 말을 건다. “참, 너 결혼식 준비 또 해야 돼.” 그 말에 순간 우영은 핸들을 반대로 꺾을 뻔했다. “뭐라고? 나한테 또 결혼 준비를 하라고?” “아, 릴렉스, 릴렉스. 이번엔 석 달 정도 시간이 있어.” “누구 결혼식인데?” “클레어.” 짤막한 그 답에 우영은 놀란 얼굴로 닉쿤을 슬쩍 돌아왔다. “어? 드디어 하는 거야? 그 욕심쟁이가 웬일로? 평생 약혼 상태로 갈 것 같더니?” “응. 클레어가 어릴 때부터 묘하게 클랜하고 경쟁의식이 있었잖아. 그 동안 말은 안 했는데 클랜이 먼저 결혼해 애까지 낳는다는 소리를 듣더니 부러웠던 모양이야. 나랑 에이먼은 차치하고, 두 녀석이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서로 경쟁을 했었거든. 키며, 성적이며, 친구 숫자며 하는 걸로 말야.” 분명히 그랬었다. 에이먼은 워낙에 따로 노는 타입이었고, 닉쿤은 애초에 비교 상대가 아니었던 탓에 한 살 터울 인 클랜과 클레어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비교대상이며, 동시에 라이벌이기도 했다. 유난히 발 육 이 좋았던 클레어와 남매 중 발육상태가 가장 더뎠던 클랜이기에 어릴 때부터 클레어가 누나가 아니냐는 소 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유독 서로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그래도 설마 이런 문제에까지 그런 걸 끌어들일 줄은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 클레어도 참 어지간하다. 에이먼과 닉쿤은 분야가 다르니 그렇다쳐도 클랜에게 지는 것만은 죽어도 싫은 모양이다. “뭐, 나름 축하할 일이네.” “축하해야지. 내년에 남동생 하나에 조카 둘이 생길 것 같으니까.” “응?” “클랜이 재키 임신 시켰다는 말을 듣자마자 클레어도 사고를 친 모양이야. 뭐, 자기 말로는 먼저 손자를 안겨드 리는 쪽이 후계자로 유력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클랜한테 지기 싫었던 것 같아.” “그렇겠지. 왜냐하면 대넌에겐 내년에 손자보다 아들이 먼저 생길 거거든.” “그렇지. 손자보다야 아들이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 유언장에는 그 애 이름 하나만 올라갈 가능성이 제일 커. 사라, 너, 그리고 그 애한테 전 재산을 다 물려주실걸.” “나는 왜?” “아버지가 어제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유언장에 이름 올린다고 하셨거든. 우리들 다 필요 없으니 꺼지라고 하 면서 너랑 사라만 있으면 된대.” 그럴 만도 하다. 자식들이 원수 짓을 하니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자신이 대넌의 입장이라도 저것들이 자식들이라 면 알몸으로 내쫓고 말 것이다. 자식들이라고 넷이나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말썽들이다, 이 집은. 그러니까 마 약 중독이나 알콜중독 같은 게 아닌, 사람 속을 박박 긁는 쪽으로 열 받게 한다. “그나저나 내년이면 갑자기 집안에 애가 셋이나 생기겠네.” “그렇지.” “환장하겠네. 그 애들은 누가 봐?” “사실 클레어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어제 와서 생리가 늦어지는 것 같다고 좋아하더라고. 좀 더 두고 봐야 알 겠지만…… 내가 보기엔 확실해. 클레어 성격에 실수를 할 리도 없으니, 아마 거의 임신이 확실하고. 아니라면 다음에라도 성공시킬걸.” “그러니까 내 말이…… 클레어 성격에 한다면 인공수정이라고 할 거 아냐? 그럼 고만고만한 그 세쌍둥이들은 누 가 보냐고?” “알아서들 하겠지. 아버지가 보디가드에 유모부대에 줄줄이 붙여줄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할 거 아냐? 사라는 무슨 죄야?” “걱정 마. 클레어는 자기 일은 확실히 알아서 하니 잘하는데다 맷이 아이들을 굉장히 좋아해, 나 만날 때마다 애는 자기가 키울 테니 제발 클레어한테 결혼해서 애만 낳게 해달라고 사정했어. 그 순댕이는 클레어가 애 키우 라면 직장 때려치우고 들어앉아서 애 키워줄 거야. 그리고 맷의 부모님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거고. 어머니가 이번에 정년퇴임하셨거든. 그리고 재키는 일단 좀 쉬다 온 뒤에 맨하탄 쪽에 아파트 알아본다고 했으니까 킴이 와서 잘 돌봐줄 거야. 사라는 자기 몸만 잘 돌보면 돼.” 확실히 맷이라면 그럴 만하다. 클레어의 약혼자인 맷은 닉쿤의 예일대 동창으로 같은 알파베타감마 클럽 출신인 데 대재벌은 아니라도 정치와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집안의 장남이었다. 상류층에 속하는 집안에 부모님과 형제 들 모두 사회적으로 훌륭히 제몫을 해내고 있고, 워낙에 인품이 좋다. 맷은 날개 없는 천사 수준이었다. 우영이 늘 알파베타감마를 갈아 마신다고 하지만 그 멤버 중에서 맷은 아주 좋아했다. 순박하고 착하고 성실하며, 완벽 한 남자였다. 슬슬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와 벌써 나오기 시작한 배가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그 성격 으로 전부 덮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저 휘황찬란한 오빠들을 보고 자란 깍쟁이 클레어가 데이트 두 번 만 에 침 발라놓는다고 약혼을 서둘렀을 정도로, 맷은 완벽한 남자였다. 클레어는 진짜 시집 잘 가는 거다. 약혼식 때 봤는데 그 집안 부모님이나 형제, 인척들 누구 하나 불쾌한 사람이 없었다. 다들 너무나 너그럽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타블로이드에서는 미합중국의 공주님이 마구간지기를 간 택 해 약혼하는 것 같다며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조던 브래트먼-사실 조던 브래트먼과 맷은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았 다. 외모부터 시작해 꽤 성공한 남자이고 아주 참한 성격이라는 점까지 말이다.-의 예를 들어가며 ‘금발 의 공주 님에게 필요한 건 왕자님이 아닌, 시종?’이라는 타이틀로 결혼에서조차도 주도권을 잡아 휘두르려는 공주님들의 행태라며 상대 남자가 기대 이하라는 사실을 비아냥거렸다.(그 보도 직후, 쓸모없는 파파라치 노먼 은 아주 애매 한 사진을 찍어 그 타블로이드지에 팔았고, 그 애매한 사진으로 인해 그 신문은 천문학적 액수의 소송에 휘말 렸 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 신문사는 결국 대넌의 손에 의해 도산했다. 알파베타감마 회원을 건드 린 자들의 최후 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클레어가 아니라 맷이 아깝다는 사실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날조된 소문들과 달 리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호사가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든 말든 두 사람만은 진실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클레어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르니까 맷에게 신데렐라 맨이니 뭐니 지껄이는 거다. 구 원 을 받은 건 맷이 아니라 클레어였다. “이거고 저거고 다 좋은데, 그 애들이 내 몫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너 하기 나름이지.” “내가 왜?” “네가 일일이 다 참견하고 다니잖아. 문제는 너야. 넌 너무 꼼꼼하고 완벽해서 남이 네 일 하는 꼴을 못 보니, 먼저 간섭하다 뒤집어쓰잖아. 그 애들은 쳐다도 보지 마. 구르든 엎어지든 그냥 둬.” 과연 자신이 그럴 수 있을까 했지만 우영은 일단 그 이야기는 뒤로 미뤘다. 그 이야기를 지금 했다간 닉쿤의 오 찬 약속에 늦을 것이다. 어제 오전에 병원에 실려 간 로이는 결국 장염 진단을 받고 일주일간 휴가를 받은 채였 다. 어젯밤 닉쿤의 아파트로 돌아가 둘 다 잠만 자다 일어나 부랴부랴 약속에 맞춰 나온 참이었다. “다 왔다. 난 회사로 간다. 래먼에게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가라고 할게.” 호텔 정문 앞에 도착한 우영이 앞으로의 스케줄을 알려주자 닉쿤이 뒷좌석에 있던 가방을 꺼내들곤 우영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래. 그럼, 이따 보자.” 옷을 정리하고 조수석에서 내려서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다시 한 번 닉쿤을 불렀다. “닉쿤.” “응?” “사인 꼭 받아내. 파이팅!” “물론이지. 승리의 닉쿤라니까.” 씨익 웃으며 돌아서는 닉쿤을 보며 우영은 진심으로 이 계약이 어서 성사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닉쿤이 앞 으로도 더욱 더 성공해나가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야, 실직 뒤에 비빌 언덕이 생길 테니까. 닉쿤을 내려준 뒤 여느 때와 같이 오전 8시 30분 기준으로 출근을 한 우영은 텅 빈 복도를 가로질러 들어와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에반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체 언제 집에 가는지도 모르게 사무실에서 사는 에반이라 오늘 도 당연히 먼저 와 있을 거라 생각한 우영은 에반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네.”라고 나온 답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우영은 에반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커피를 하나 내려놓 았다. “에반, 당신 집에 들어가기는 하는 거야? 저 캐비넷 안에 침낭하고 옷이랑 다 있는 거 아냐? 아니지? 사실은 이 안에 비밀 방 만들어뒀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간이 회사에 없을 때가 없냐 싶어 우영이 그렇게 묻자 에반이 살짝 이마를 찌푸린다. “무슨 헛소리야?” “그거 있잖아.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거기서 캐비넷 뒤에 비밀 문이 있잖아.” 물론, 그건 존 말코비치의 뇌로 들어가는 문이었지만, 이라고 덧붙인 우영을 보며 에반은 작게 혀를 찼다. “너, 영화 좀 그만 봐. 나도 방금 출근했어. 그런데 넌 왜 혼자야? 닉쿤은?” “아침 약속 있어서, 나 혼자 왔지. 마셔.” 그렇게 말하며 우영이 커피를 권하자 에반이 불안한 듯 우영을 바라본다. “커피까지 사들고 왜 온 건데? 할 말 있어?” “응.” “뭔데?” “나 회사 관두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하는 우영을 바라보며 컵을 들려던 에반은 그대로 멈춰 우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컵을 내려두곤 의자에 기대앉았다. 움직임은 태연했지만, 에반은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닉쿤이랑 잘 안 되냐?” “아니.” “그럼?” “그냥.” 어깨를 으쓱하는 우영의 태연한 얼굴에 에반은 다시 허리를 세우고 앉아 우영에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진……. 그래, 내가 실수했다. 해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 심했어. 미안하다.” 순간 우영은 닉쿤이 들려준 녹음 중에 에반이 해고 어쩌고 했다는 걸 기억해내곤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사실 그런 말을 했었나 하는 것도 방금 전까지 까먹고 있었다. “그럼 왜? 연봉이 적어? 하긴, 팔만 달라는 너무했지. 그렇게 혹사시키면서. 10만 달라로 올려줄게.” “그것도 아냐. 돈이야, 뭐……. 이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어이, 너 블링스랑 사귀더니 통이 커졌다?” 그 말에 우영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주먹만한 다이아몬드를 사정없이 던져주는 네브즐린 가 사람들에, 평생을 벌어도 한 대 사기 힘든 고급차 키를 박스 채로 준다는 닉쿤에, 전용기에 별장에 빌딩도 사주겠다는 대 넌 까지, 주변에서 하도 준다 준다 하니 대범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들은 말만 하면 진짜 섬 이라도 사줄 것 같았다. 그럴 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닉쿤이 아니라도 허르베지쿨 가 사람들 은 아 주 오래 전부터 그랬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걸 무시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섬이나 빌딩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보이는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는 쪽이 낫다. “뭐, 그런 것도 아주 없진 않겠지만 이젠 굳이 돈 벌려고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어졌거든.” “왜?” “내 기억에 우리 집이 가주 가난했었거든. 그래서 엄마랑 동생 만나면 돈을 많이 주고 싶었어. 돈 잔뜩 벌어서 여동생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하려고 했거든.” “하면 되잖아?” “이젠 못해. 죽었거든.” “응?” “엄마랑 동생 다 죽었대.” 우영은 조금 슬픈 눈으로 애써 웃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곧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그 눈에 비해 우 영의 표정은 해맑았다. 그제야 에반은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린다. “……너, 그래서…….” “응. 그래서 마음 정리하고 왔어. 심리학과 다니던 친구가 그러더라고. 상처는 자꾸 드러내는 게 좋다고. 싸고 싸고 돌면 자신의 안에서 그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 계속 곪아들어 가니까, 사람들에게 터놓고 위로 받을 건 받고, 동정 받을 건 받고, 치유해 가라고. 사람이 해주는 ‘괜찮아.’ ‘안됐다.’ ‘힘내.’ ‘곧 괜찮아질 거 야.’라는 한 마디들은 그 당시엔 별 효력이 없는 것 같아도 그게 차츰차츰 머릿속에 저장이 돼 나중엔 진짜 괜 찮아진대. 상처는 숨기기만 할 게 아니라 드러내고 아프다고 호소하고 소독하고 치료받아야 빨리 낫는 거니까. 바보처럼 지금까지 꽁꽁 싸매기만 했는데, 이젠 안 그러려고.” “……잘 생각했어. 다행이다. 그리고, 안 됐어. 동생 꼭 만났으면 했는데.” 에반은 진심으로 우영을 위로해주었다. 따뜻한 말이나 위로, 감동적인 말 한 마디 같은 건 서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한 한 마디로 마음을 전했다. 에반을 잘 알기에 우영은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고마워.” 진 역시 진심으로 에반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조금 목이 멘 듯 콜록거리고 기침을 하더니 조금 갈라 진 음성으로 말을 돌린다. “참, 나 퇴직은 다음 달에 할 테니 후임자는 내가 지명할게. 한 달 정도 인수인계하고 가야지.” “그런데 왜 관둔다는 거야? 설마 한국으로 가려고?” “설마. 그건 내 자리가 아냐.” “그럼?” “……문학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응?” “나 글재주는 없잖아. 진짜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쪽에는 영 재능이 없으니 문학 가르치고 싶어서. 프렙스쿨 (prep school-기숙사제를 적용하는 고급 사립학교)로 갈지, 차터스쿨(Charter school-주의 지원을 받는 사립학 교)로 갈지, 공립으로 갈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라이센스를 따보려고. 처음엔 수학과 선생들이 많이 부족 하니 수학과 교사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은데, 결국은 영문학을 가르치고 싶거든.” “갑자기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게. 당분간은 국제 입양아들이나 이민 온 애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 발 룬티어로 참여해서 영어를 가르치다 라이센스를 딴 뒤에 이력서 돌리려고. 한국인이라 수학교사로 들어가면 유 리 할 거야.” 뉴욕 자체가 다른 주에 비해 교사 자격이 까다롭긴 하지만 자격증이나 전공과목에 있어서는 한국에 비하면 상당 히 자유롭다. 영문학 전공자들이 수학과 미술을 가르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현재 교사 수는 넘쳐나지만 수 학 교사들이 심하게 모자라 다은 영미권 나라에서 교사 수입을 해올 정도이니, 우영은 일단 수학과로 시작해볼 셈이었다. 그러다 경력이 좀 쌓이면 영문학 쪽으로 바꾸면 된다. 굳이 라이센스를 딸 필요 없이 일단 임시 교사 로 들어가 정교사 시험을 준비해도 좋겠지만, 워낙에 꼼꼼한 성격이라 라이센스부터 따고 시작할 셈이었다. 최근 엘레나를 보며, 우영은 자신에게는 아무래도 교사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 고 보니 아이들한테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았다. 지금의 일이 불만인 건 아니지만 좀 더 여유를 갖고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잠깐, 진……. 진심이야?” “응.” 우영이 산뜻하게 의사를 전달하자 에반이 그다운 현실적인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 교사 초봉이 얼만지나 알아?” “알아. 지금 내 연봉 반도 안 되지. 반이 뭐야? 1/3이지.” “그런데 괜찮겠어? 네 한 달 집세가 얼만데?” 일반적으로 교사의 첫 연봉은 2만3천 달라 정도였다. 물론, 프렙스쿨로 들어간다면 조금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교사의 초봉을 생각했을 때 연봉 23000달라라면 한 달에 약 1800달라 정도를 받게 된다. 문제는 우영이 대여한 투 룸 아파트의 한 달 렌트료가 1500달라에 달한다는 점이었다. 우영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 었다. “아, 집 정리하고 허르베지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 “뭐?” “아무래도 집세나 생활비가 부담되니까. 그리고 사라도 걱정되고.” “출퇴근은 어쩌게?” “대넌 따라서 오가지, 뭐. 그리고 센터도 그 근처니까.” “그럼 닉쿤은?” “가끔 데이트 해야지.” 심플한 우영의 답에 에반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머리를 꾹꾹 누르며 우영에게 되물었다. “너희 사귀기로 한 거 맞아?” “사귄다고 24시간 붙어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당장 같이 사는 것도 좀 그렇고. 닉쿤 바쁠 텐데 나 혼자 그 집에서 뭐하라고? 백수 되면 당분간 심심할 텐데. 시간 나면 오가고 데이트 하는 쪽이 좋잖아. 내가 시간 여 유가 있으니 공원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도 데이트도 하고. 이제 시작인데 그런 두근거림 정도는 있어야지.”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지 않냐? 사랑 안 해?” “우린 그럴 때는 지났지. 그리고 난 성공한 남자가 좋아. 사랑 하나에 목매서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하고 집 안에 앉아 같이 텔레비전이나 들여다보는 남자는 재미없어서 싫어.”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이제 시작이니까 진짜 데이트부터 하나씩 해보게. 우리 너무 붙어 지냈잖아. 억지로 시간 내서 만나고, 막 보 고 싶어서 피곤해도 달려오고 하는 것도 해보게. 밤중에 전화해서 악몽 꿨다고 깨우기도 할 거야.” 지금까지 사양하며 못했던 일들을 이 김에 모조리 다 해버리겠다고 다짐하는 우영을 보며 에반은 한숨을 내뱉었 다. 자기가 한다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우영의 능력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의 일을 결정하는 건 그 본인이 할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나설 일이 아니다. 하물며 미성년자도 아닌 서른이나 먹은 성인이니 어쩔 수 없다. “모르겠다. 네가 그렇다는데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대신, 최종 결정은 닉쿤이 하는 거니까, 닉쿤한테는 네 가 말해.” “알았어. 그럼 수고.” 가뿐하게 의자에서 일어선 우영은 자신의 컵을 들고 그대로 에반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 걸음이 가벼 웠다. 사무실에 앉아 오늘 일정을 정리하던 우영은 문득 울려대는 벨소리에 본능적으로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닉쿤사입니다.” 「우영, 너 이거 뭐야?」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노먼의 음성에 우영은 서둘러 목소리를 좀 높고 상냥하게 바꿨다. “우영 케이먼 씨는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좀 이따 다시 걸어주세요.” 「야!」 “그럼, 이만.” 일방적으로 다시 전화를 끊은 우영은 다시 울리는 벨소리에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노먼도 이제 슬슬 그 를 팔아먹은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안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던 우영은 끈질기게 이어지는 벨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우영, 세르게이 네브즐린 뭐냐고?」 “지금 거신 전화는 착신이 금지된 번호입니다.” 일부러 기계적인 목소리를 내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은 우영은 또 다시 울려대는 전화벨을 무시하고 하던 일 을 계속했다. 하지만 사무실 전화를 받지 않자, 이번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카드를 쓰던 펜을 던지고 핸드폰을 든 우영은 위에 뜨는 사라의 번호에 서둘러 폴더를 열었다. “응, 나.” 「우영, 대넌이 기쁘대. 너무 너무 행복하대!」 어린 소녀처럼 활달한 사라의 목소리에 우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임신 사실을 밝힌 모양이었다. “잘됐네. 그 봐,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 「출근 전에 들렀길래 사실대로 말했더니 무릎 꿇고 울면서 너무 너무 행복하다고 했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을 줬대.」 “그럴 거라니까. 그러게 왜 지금까지 숨겼어? 빨리 말해주지.” 「말하기 곤란했잖아, 사실.」 대넌과 사라의 혼전 계약서 내용을 떠올린 우영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니라니까.” 「퍼기가 죽었을 때 아이를 잃어서 무서웠대. 하지만 진짜 기쁘다고 울면서, 아들이라니까 대넌 주니어라고 이름 을 붙이고 싶대. 나도 기뻐.」 대넌 주니어라면 대넌처럼 눈치 없는 아이가 또 태어나는 걸까 싶었지만 우영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잘됐어. 축하해.” 「오늘은 빌라에서 쉬고 내일 중에 플로리다로 떠나는데 대넌도 스캐줄 조정해서 같이 가기로 했어. 브루스도 당 분간 쉴 예정이라 같이 동행해.」 “잘됐네. 가서 즐겁게 보내고 와.” 「응, 그래. 고맙다. 여러모로 고마워.」 “뭘, 새삼.” 「너도 휴가 내고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하하, 사흘 무단휴가 써서 할 일이 태산이야. 몸조심하고, 꼭 예쁘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 사라. 나한테도 동 생 같은 아이니까.” 「그래. 그럼 떠나기 전에 보자. 엄마랑 언니도 너 꼭 보고 싶대.」 “응. 나도 뵙고 싶다고 전해줘.” 「그래. 아, 나 병원 갈 시간이다. 대넌이 같이 산부인과에 가기로 했거든.」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는 임산부들을 보며 부러워했을 사라의 외로운 모습이 떠올라 우영은 진심으로 잘되었 다고 안도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봐. 초음파 사진 찍으면 나 먼저 보여줘야 돼?” 「대넌보다 너한테 먼저 보여줄게.」 “그래. 그럼 끊을게.” 「그래.」 언제나 우아하고 침착한 사라가 오늘은 아주 발랄한 소녀 같았다. 이렇게 좋은 걸 왜 그 동안 고집을 부렸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우영은 다시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카드를 끝까지 적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리며 안으로 노먼이 뛰어 들어왔다. “우영 케이먼!”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소리에 우영은 인상을 썼다. 전화를 안 받으니 직접 올라온 모양이었다. 검은 라이더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검은 헬멧을 팔에 안은 걸로 봐선 진짜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나 보다. “노먼, 나 업무 중이야. 약속 잡으려면 미리 전화하고 와.” “웃기네! 세르게이 네브즐린, 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러시아 마피아 두목.” 우영은 정확하게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실체를 밝혀줬지만, 노먼은 그에 만족하지 못한 듯 우영의 책상 앞으로 다 가와 헬멧으로 거칠게 상판을 내리쳤다. “그 러시아 마피아가 왜 나한테 자꾸 이상한 걸 보내냐고!” 장가, 혹은 시집오라고. 라고 말하려다 우영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나야 모르지.” “네가 소개해줬다며?” “아니? 난 잘 모르겠는데? 전혀 모르는 사실이야.” 한 번 오리발을 내밀었으니 끝까지 내밀 셈이었다. 언젠가 노먼의 아버지인 잭과 이야기를 했었는데, 유능한 변 호사 잭 왈, 죄가 있을 때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시치미를 떼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거나 동요해 말실수를 하면 끝장이니, 피의자가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고 절대 무죄를 주장하는 게 모든 변론의 최초 과정이 라 고 했다. 아무리 증거물이 확실하고 증인이 있다 해도, 배심원들도 인간들인지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 는 태도로 당당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게 바로 잭이 수많은 범죄 자들을 무죄로 만들어준 비결이었다. “우영 케이먼, 시치미 떼지 마! 오늘 갑자기 집 앞까지 찾아와선 나더러 엘레나랑 약혼을 하라잖아!” 분통이 터지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노먼을 보며 우영은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세르게이는 사람 보는 눈은 있었 다. 그래, 세르게이랑 노먼은 안 어울린다. 그래서 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팔아먹으려고 한 모양이다. “엘레나 얘기만 해?” “그럼?” “배우 알렉세이, 탈옥범 이반, 집나간 니콜라이, 세르게이랑 붕어빵 알렉산드르 얘기는 안 했어?” “그것들은 또 뭐야?” “……아직까지는 엘레나까지만 간 모양이니, 기운 내라. 그 형제들 선 사진까지 보면 기절할 테니까.” 나름 일관성 있는 태도로 우영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충고를 하자 노먼이 그답지 않게 파랗게 질린다. 아 무리 노먼 맥캐인이라도 러시아 마피아 두목은 좀 무서운 모양이다. “야, 대체 뭐야? 탈옥범은 또 뭐냐고?” “그냥 담담히 받아들여. 네 팔자려니 해. 아니면 지금까지 네가 한 짓들의 업보거나.” “야!” “네브즐린 가 꽤 괜찮아. 미하엘 네브즐린은 전직 KGB 출신으로 세계 최대의 무기 밀매상으로 아랍 테러리스트 들한테도 미사일을 파는 사람이고, 세르게이 네브즐린은 인신매매, 아니 쇼비지니스계의 황제잖아. 그리고 그 동 생 알렉세이 끝내주게 잘 생겼어. 세르게이랑 똑같은 얼굴인데 헐리웃 진출도 한대. 그리고 이반은 장기매매범 이 래. 거기다 성질도 죽인대. 그리고 추가로 어제 탈옥도 했어. 니콜라이는 집 나가는 전적을 보니 너랑 잘 맞 을 것 같고, 알렉산드르는 아주 미소년이야.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뻐. 그리고 엘레나는…… 나름 매력 있어. 미성년자지만.” 우영이 하나 하나, 그 남매들에 대한 평을 하자, 노먼이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리친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더러 러시아 마피아 집안 데릴사위로 들어가라고?” “데릴사위로 들어오랄 때 들어가. 좀 있으면 시집오라고 할 거야.” “뭐?” “어쩔 수 없어. 너도 시집보다는 장가가는 게 낫잖아.” “대체 무슨 소리야?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대처를 하든가 말든가 하지? 오전에 집 앞에서 와서 강제 로 차에 태우더니 세르게이가 이번 주에 당장 약혼식을 하자고 하잖아!” 역시나 무서운 사람이었다. 엘레나와 노먼은 딱 한 번 얼굴을 봤는데 그새 약혼식 준비까지 하다니.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세르게이에게 자신 대신 노먼을 팔아먹은 건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들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노먼, 친구로서의 충고인데…… 하라면 그냥 해. 오래 살려면 해.” “우영 케이먼!” “진심으로 네 친구로서 충고하는 거야. 그냥 해. 그게 좋아. 엘레나 진짜 매력 있어.” “나더러 타조랑 결혼을 하라는 거냐?” “그렇게 머리가 나쁜 애는 아냐. 차분히 가르치면 될 거야.” “지금이 무슨 18세기야? 솜털도 안 난 여자애를 데려다 키워 결혼하게? 장난해? 조혼제도 폐지된 지가 언젠데? 여기가 이슬람이냐? 네팔이야?” 여성인권에도 꽤 관심이 많은 노먼의 외침에 우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하라는 거잖아. 엘레나 지금 열다섯이야. 성인되기 전에 파혼하면 되잖아.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넌 엘 레나 취향이 아냐.” 우영은 슬슬 노먼을 응원하기 위해 그의 자존심을 건들기 시작했다. 노먼이 잘 걸려드는 분야에 대해서는 우영도 박사급이었다. “엘레나는 얼굴 무지 밝혀. 넌 진짜 취향 아닐 거야.” “내 얼굴이 어때서?” “솔직히 닉쿤에 비하면 좀…….” 우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노먼의 자존심을 자극하자 노먼이 순식간에 살기 어린 얼굴로 우영을 내려다본다. 언제 나 노먼이 놀리고 도망치고 우영이 열 받아 뒤따라가는 게 순서였는데, 오늘만은 그 반대였다. “오냐, 너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좋아. 그럼 엘레나가 나한테 반하면 내가 닉쿤보다 잘 생겼다는 거지?” “그건 또 아니지.” “그럼 뭐야?” “걔는 발차기 잘하는 남자 좋아하는 것 같아.” “나도 잘해.” “글쎄…….” “뺀질거리긴. 하여간 그래서 뭐야, 세르게이의 목적은 날 엘레나랑 진짜 결혼시키는 거라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너, 뭐야? 사실대로 말해! 전부 말해! 그래야 나도 대처를 하지!” “그 사람의 의외성은 대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냐. 그냥 포기하는 게 속 편할걸.” “미쳤냐? 나도 한 성질 해.” 한 성질뿐 아니라 한 말썽도 부린다. 그러고 보니 세르게이랑 노먼이랑 붙으면 누가 이길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농담 아니라 진짜 에일리언 대 프리데터, 프래디 대 제이슨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지하다. 그러고 보니 사다코 대 가네코 영화는 안 만드나? “그럼, 한 번 해봐. 대신, 그쪽은 강적이다. 세르게이도 문제지만 엘레나도 만만치 않아.” “웃기지 마! 대체 뭐야? 나랑 얼굴을 언제 봤다고 지금 결혼 얘기를 꺼내냐고?” 나는 얼굴 두 번, 그것도 총 합해 2분도 제대로 못 보고 청혼 받았다, 라고 말하려다 그 말까지 꺼냈다간 진짜 자신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밝혀질 듯해 우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할 말 다 했으면 이만 나가주면 좋겠는데? 난 지금 좀 바쁘거든?” 우영이 카드를 들어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노먼도 더는 우영에게서 캐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헬멧을 들고 쿵쿵거리며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분을 삭이지 못한 그의 걸음을 뒤에서 지켜보던 우영은 이내 노먼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거짓말은 체질에 안 맞아…….” 그래도 하여간 넘어갔으니 된 거다. 적다만 카드를 마저 쓰려 펜을 들던 우영은 노먼의 등장으로 글씨가 조금 흔 들린 걸 보곤 카드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막 새 카드를 꺼내려다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들고 에 이먼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 정도 신호음이 간 뒤 이어진 통화에 우영은 재빨리 용건을 입에 담았다. “에이먼, 저번에 새로 도착한 인형 옷 말인데, 내가 어제 깜빡하고 안 갖다 줬거든. 어떻게 할까? 내가 오후에 들러서 줄까, 아니면 허르베지쿨 가로 갖다놓을까?” 쉴 새 없이 이어진 우영의 말에 상대가 침묵한다. 전화가 끊겼나 했지만 이제 보니 통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에이먼, 안 들려?” 감이 먼가 해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묻자 잠시 후 우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인형 옷이라니, 그건 또 뭐지?」 처음에는 누군가 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세련된 발음. 그리고 어투. 너무나 매력적인 그 목소리에 잠시 에이먼이 감기 걸렸나, 라는 생각을 하던 우영은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 다. “세르게이?” 「그래. 인형 옷은 뭐지? 에이먼이 인형을 좋아하나?」 “어, 저 왜…… 에이먼 전화를 당신이 받죠?” 에이먼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 그대로, 다른 이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건 무조건 질색을 하는 성미였다. 특히나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매체인 편지와 이메일, 그리고 핸드폰은 누가 손만 대도 경기를 일으켰 다. 그건 친구뿐 아니라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사생활 보호, 그게 에이먼의 수칙이었다. 그런 에이먼 의 개인 핸드폰을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하필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말이다. 「에이먼은 잠깐 샤워를 하러 갔는데…….」 “샤워요!?” 은밀하고 어딘지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세르게이의 어조에 우영은 빼액 비명을 내질렀다. 매일을 하루처럼 짜 맞 춘 일정 속에서 살아가는 에이먼이 왜 이 대낮에 샤워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한창 근무시간에 말이다. 거기다 왜 세르게이가 에이먼이 샤워를 하는데 핸드폰을 대신 받아주는 거냐? 대체 당신들, 방금 뭘 한 건데? 라고 묻고 싶은 걸 꾸욱 참으며 패닉 상태에 빠진 우영은 눈을 부릅뜬 채 머리를 굴렸다. 세르게이 에이먼의 동업자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이 같이 만든 쇼도 꽤 많고, 러시아로 수출되는 에이먼 의 프로들은 대부분 세르게이의 채널로 수출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한 지가 벌써 5년이 넘었다고 하니, 가까 운 관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왜 에이먼이 세르게이에게 핸드폰을 맡겨두고 샤워를 하는 걸까? 대낮이라지만 어쩐지 ‘샤워’라는 어감에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무엇보다 세르게이의 어투가 상당히 미심 쩍었다. 에이먼, 당신 인형으로는 모자라 살아있는 인형을 구한 거야? 그것도 하필 세르게이 네브즐린을? 「무슨 헛소리야, 당신? 왜 남의 핸드폰을 받아? 우영, 왜?」 다행히 우영이 더 깊은 상념으로 빠져들기 전에 에이먼이 나타났다.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우영은 천천히 에이먼 에게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했다.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왜 당신 핸드폰을 받아?” 「샤워하는 사이에 자기 마음대로 받은 거야. 왜?」 샤워했단다. 당당하게 샤워를 했단다! “……에이먼은 왜 샤워를 한 건데?” 어쩐지 돌아올 답이 무서워 우영은 부들부들 떨며 그렇게 물었다. 사실은 그 답을 듣기도 무섭지만, 호기심이 고 양이를 죽인다고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에이먼의 답을 기다리는데 에이먼이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생뚱맞은 목소리로 답한다. 「아, 잠깐 수영하러 왔어. 몸이 무거워서. 그게 왜…… 아, 또 세르게이가 헛소리한 거야?」 헛소리한 건 없다.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물론, 잔뜩 이상한 어조로 말이지만. “아, 아니. 이 시간에 샤워를 한다니 이상해서. 저번에 주문한 옷이 도착했거든. 언제 갖다 줄까 해서.” 우영의 그 말에 에이먼의 목소리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 그럼 오늘 갖다 줄 수 있어?」 “응. 차에 있어. 퇴근할 때 갖다 줄까? 오늘 스케줄 어떻게 돼?” 「계속 사무실에 있을 거야.」 “그럼 7시쯤 들를게.” 「그래. 고마워. 수고.」 “응.” 핸드폰을 끊으며 다시 의자에 앉은 우영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수영이야 같이 다닐 수 도 있다지만, 세르게이의 말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거기다 에이먼이 세르게이가 헛소리를 했냐고 물었다 . 그렇다는 건 그 헛소리가 아무래도 세르게이의 어조를 의미하는 말 같은데……. “대체 무슨 사이야?” 세르게이와 에이먼이라니 절대 안 어울린다. 뭔가 안 맞는다. 세르게이의 취향이 금발벽안에 깐깐한 타입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에이먼은 진짜 아니다. 둘 다 상당한 거구에 성격도 만만치 않다. “케이블 공화국의 황제와 인신매매 비즈니스계의 황제라…….” 혼자서 작게 중얼거리던 우영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세르게이야 워낙에 이상한 사람이니 그 사 람의 어조 같은 거에 일일이 신경을 쓸 수는 없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걱정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 다. 오히려 간섭하면 에이먼이 싫어할 거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제 자신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나날들이었 다. 안정되고 편안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에이먼에게 들르기 위해 막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쾅- 하며 문이 열렸다. 막 재킷을 입으려던 우영은 인상을 쓰며 문 쪽을 돌아봤다. “너, 노크도 할 줄 모르냐?” 갑작스러운 닉쿤의 난입이 불쾌한 듯 우영이 퉁명스레 내쏘자 닉쿤이 다시 쾅- 하고 문을 닫으며 우영에게 다가 선다. “너 무슨 소리야?” “노크 좀 하라고.” “회사 관둔다며?” “응. 아, 맞다. 너한테 미리 말해야 하는 걸 깜빡했다.” 그제야 그 일이 떠오른 듯 우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닉쿤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우영을 바라본다. “뭐하자는 거야? 연봉 올려줘?” 에반이 한 것과 똑같은 질문에 우영은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나 싶어 귀찮다는 듯 툭하니 내뱉었다. “에반한테 얘기 못 들었어?” “그냥 관둔다고 했다며?” “연봉이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 될 거라니까. 문학 선생님.” 재킷을 다 걸치고 셔츠 깃과 소매부리를 재킷 밖으로 꺼내 정돈을 하던 우영이 태연하게 답하자 닉쿤이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을 해 보인다. “갑자기 문학 선생님은 왜?” “그냥. 글에는 소질이 없지만 문학은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서.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선택하자는 거지.” “난 진짜 글에는 재능이 없거든.”이라고 우영은 작게 중얼거렸다. 클랜보다야 낫지만, 사실 자신이 글을 쓴다 고 덤비는 건 작가들에게 너무 모욕적인 일이기에 일찌감치 노선을 비서직으로 바꿨는데 지금은 애들에게라도 문 학을 가르치고 싶었다. 재능은 없지만 아는 건 많이 안다. “다 좋아. 다 좋은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그냥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나도 최근에 안 건데, 난 아무래도 교사의 피가 끓어 넘치는 것 같아. 막 가르 치고 싶어.” 엘레나와 클랜, 재키의 경우만 봐도 우영은 자신은 아무래도 말썽쟁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천성에 맞는 것 같 았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자신의 한 마디가 그들의 사소한 습관 하나, 의식 하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 고 나자 상당히 기뻤다. 그들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들 하나하나를 신경 쓰고 가르치 는 과정은 꽤 즐거웠다. 무엇보다 재키가 12센치 힐을 신고 안 엎어졌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채였다. 그리 고 엘 레나도 영어 공부에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나 안 보려고 퇴직하는 건 아니고?” “무슨 소리야? 너랑 나랑 어떻게 안 보고 살아? 줄줄이 아는 인간들이 몇인데. 이제라도 하고 싶었던 일 하려고 하는 거야.” 우영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항상 움츠리며 숨어들던 소극적인 우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주장하려는 그 작은 몸짓에 닉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뭐, 네 결정이라면 존중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나한테 먼저 말해줬어야지.” 에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게 영 섭섭하다는 듯한 닉쿤의 말에 우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갑자기 결정을 했거든. 이런 문제는 다른 사람하고 의논해봐야 머리만 복잡해지더라고. 어차피 한 달 정도 기 간을 두고 인수인계 다 하고 나갈 거야.” “……어쩔 수 없지. 그럼 아파트는?” “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나 지금 에이먼한테 가봐야 돼. 너 저녁에 약속 있잖아.” “어이, 지금도 이런데 너 퇴직하면 우린 언제 보자는 거야?” “이젠 내가 시간이 날 테니 널 기다리면 되지. 시간 정해서 데이트도 해보고. 너무 가까이 있으면 신비감이 없 잖아. 얼굴 보기 힘들어야 데이트할 때 헤어지기도 싫지.” 그렇게 말하며 닉쿤의 앞에 선 우영은 닉쿤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돈 벌어, 닉쿤.” “응?” “나 당분간 거지 될 거거든. 많이 벌어.” 이미 벌지 않아도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의 재산은 있지만 우영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의 노후를 생각해 서라도 닉쿤이 성공하는 쪽이 좋다. 자신은 어차피 평생 박봉 선생으로 살아갈 테니까. “나더러 널 벌어 먹이라는 소리냐?” “응.” “뭐, 그야 더없이 바라는 바지만……. 앞으로 너무 보기 힘들잖아.” “매일 데이트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닉쿤의 입술에 슬쩍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떤 것이든 자신에게 최선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로, 무조건 향해갈 거라고 다짐하 고 또 다짐했다. 후회 없이 살도록, 이 짧은 생을 행복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만은 위해 살기로 결 정을 내리자, 어깨가 가벼워졌다. 더없이 날아갈 듯 마음이 가벼웠다. 슬픔은 여전히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누구나 가슴 속에 그런 아픔 하나는 품고 살아간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기자는 생각뿐이었다. 새로운 가족이 된 이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닥칠 노먼의 납치 사건과 탈옥한 이반, 그리고 무서운 십대 알렉산드르와의 조우를 상상도 못한 채, 우영 은 행복하게 웃었다. 어차피 그건 한참 후의 이야기였다. a